백제 삼충신 | ||
성충 | 흥수 | 계백 |
<colbgcolor=#003764><colcolor=#fff> 흥수 興首 | |
성명 | 흥수(興首)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1. 개요
백제 말기의 충신.2. 생애
본래 관직은 좌평으로 최고위급 관료였으나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에는 죄를 짓고 백제 고마며지현(고마미지현, 현 전라남도 장흥군)에 유배되어 있었다.갑작스런 나당연합군의 맹공에 의자왕이 대신들과 방어 전략에 대해 논의하는데 의견이 갈려 어찌할바를 몰라 흥수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나당연합군을 막을 계책에 대해 묻자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싸우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고 수비하기 좋은 지형인 탄현과 백강(또는 기벌포)[1]이 요충지이니 병사들을 보내 막는 한편 수성전으로 버티면서 나당연합군이 군량이 고갈되고 지쳤을 때 공격한다면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러한 그의 의견은 내용상으로도, 또 이후 의자왕의 발언을 볼 때도 성충의 것과 틀을 같이 하는 방책으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비성의 대신들은 흥수가 귀양을 가서 왕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말을 물리쳐야 한다고 했고, 백강과 탄현으로 병력이 넘어오면서 병력이 늘어서는 것을 노려 공격하는 대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양방 포위 전략은 기본적으로 백제 측이 병력상 우위를 차지해야 의미가 있는 것으로, 전통적인 군사학 관념으로도 『손자병법』에서는 '적을 분리시킨 후 차례로 공격하는' 방식을 2배의 병력이 있을 때 써 볼 만한 전략이라고 하고 있다. 그나마 흥수가 말한 수성전의 경우 『손자병법』에서는 공격 측에서 최후의 방책으로 기피되는 것으로 기술하여 상황에는 가장 어울리는 것이었으나 이를 피한 결과, 백제군은 결국 양 방향에서의 참패를 면치 못하고 멸망에 접어들게 된다.
다만 이런 수성전은 예컨대 정묘호란-병자호란 때와 같이 방어선을 무시하고 수도를 직격하려는 기동전에 취약하며,[2] 백제의 주력군과 충돌하기 전부터 당군은 이미 수성전에 들어간 성들을 가뿐히 점령하고 기벌포 단일 전선으로만 나선 것이 아니라 당진의 석두성을 공격한 흔적이 보이는 등 성충·흥수의 전략적 예상 범위조차도 이미 뛰어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조정에 남아 있던 신료들의 군사학적 지식이 굉장히 일천했던 점은 비판을 피할 수 없으나,[3] 전쟁의 규모 자체가 예상 범위를 뛰어넘는 것으로서 중과부적이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흥수가 귀양을 가 정보망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백제를 전쟁에 접어들게 만든 외교 정책 자체를 반대하다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해 정계에서 입지가 사라진 성충의 의견을 인용한 것을 고려하면, 이런 외교 정책부터 흥수가 성충과 같은 기조로 반대했을 가능성이 크기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삼국사기』에서도 딱 이 기사 한 건에 이름이 보이는 인물로서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다만 좌평으로서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삼국사기』의 기초가 되었을 신라의 정보망에 유배지까지 파악되어 있었음을 고려하면, 전후 처리 과정에서 고위층의 일원으로 당에 끌려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3. 기타
-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삼충사에서 계백, 성충과 더불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성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백제 최고관직인 좌평을 지낸 점을 보면 백제의 고위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4. 대중매체에서
- 2006년 SBS 대하사극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양승걸이 연기했다.
[1] 각각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서천군 장항읍 일대로 비정된다.[2] 게다가 8세기 이전 한반도에서 주를 이루던 테뫼식 산성은 입지가 비교적 고립적일 뿐더러 수용 인원이 수백 명 정도로 극단적으로는 '보루' 수준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도 드물지 않아 중국의 성을 그대로 대입하기도 쉽지 않다.[3] 이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미 당군과 신라군이 진군하고 있음을 파악한 상태에서도 백제 중앙은 의견을 통일하지 못해 중앙과 소통하는 데 며칠씩 걸렸을 장흥에 사람을 보내 흥수에게 의견을 구해야 했고, 그나마 정작 그렇게 의견을 받아오고서는 의견을 구하기 전에도 진작에 나왔을 명분으로 흥수의 의견을 폐기시켜 버리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애초에 대당 전선 쪽에서는 시간을 끄는 방책으로 가자며 그나마 흥수와 비슷한 의견을 낸 상영은 반대편의 좌평 의직에 미치지 못하는 달솔이었다고 하며 결과적으로 당군에 상대할 병력이 빠진 병력만 파견된 황산벌 전투에서도 계백에 밀리는 지위였으므로 조정에서 의직의 의견을 지지하는 세력이 압도하는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그런 상황에서 차라리 의직의 의견으로 반대파를 누르고 빠르게 지휘 계통을 확립하지도 못한 것이다. 이 결과 탄현은 어떤 전략을 택하느냐의 문제 이전에 백제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신라군에 이미 뚫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