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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막리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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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대막리지 | 연남생 | |||
막리지 | 연남건 | |||
태대막리지 | 연남산 | |||
* 삼국사기, 연남생 묘지명, 연헌성 묘지명, 연남산 묘지명 원문 기준 각각 가장 높은 관직명 기술. | ||||
연씨 집권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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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초대 대막리지 연개소문 | 淵蓋蘇文 연개금 | 淵蓋金 | |||
출생 (음력) | 590년~614년 사이 추정[1] | ||
사망 (음력) | 664년 10월 또는 665년 (향년 50~70대 사이)[2] | ||
재임기간 (음력) | 초대 대막리지 | ||
642년 10월 ~ 665년 이전 (2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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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개소문(蓋蘇文) / 개금(蓋金) / 가수미(柯須彌) | ||
부모 | 부친 연태조(淵太祚) 모친 미상 | ||
형제자매 | 연정토, 연수영?[4] | ||
자녀 |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 ||
관직 | 대대로(大對盧) 막리지(莫離支) 태대대로(太大對盧)[5] | ||
부족 | 동부(東部) | ||
주군 | 영류왕 ➝ 보장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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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은
(一) 고구려의 900년 이래의 전통이었던 호족공화제라는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二) 장수태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三) 그리하여 영류태왕 이하 대신과 호족 수백 명을 도살하여 자기 집안의 독무대를 만들고, 서국(西國)의 제왕인 당태종을 격파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시도하였으니,
그 선악(善惡)과 현우(賢愚)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
단재 신채호의 연개소문에 대한 대략적인 평가. #
(一) 고구려의 900년 이래의 전통이었던 호족공화제라는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二) 장수태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三) 그리하여 영류태왕 이하 대신과 호족 수백 명을 도살하여 자기 집안의 독무대를 만들고, 서국(西國)의 제왕인 당태종을 격파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시도하였으니,
그 선악(善惡)과 현우(賢愚)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
단재 신채호의 연개소문에 대한 대략적인 평가. #
연개소문의 정책은 대내적으로 국가적 결속력을 높이고 대외적으로 국제정세에 현명하게 대처하여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고구려를 지키는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하였다. 그런면에서 그는 부정적인 의미의 ‘실패한 정치가’였다고 할수있겠다.
노태돈(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6], 「연개소문(淵蓋蘇文): 무모한 대외강경론자, 포악한 권력자」, 2002
노태돈(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6], 「연개소문(淵蓋蘇文): 무모한 대외강경론자, 포악한 권력자」, 2002
1. 개요
삼국시대의 고구려 사람으로 고구려 말기를 대표하는 권신이다. 아버지는 동부대인 연태조이며 뒤를 이어 동부대인의 지위를 계승받았다.이후에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 귀족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했으며 대막리지라는 관직에 올라 집권했다.
이후 연개소문이 신라, 당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보임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 당나라 사이에는 수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연개소문 생전에는 계속해서 승전했지만 사후 권력을 물려준 세 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임금을 시해하고 전횡을 일삼은 면이 있다. 다만 혼란스럽던 고구려의 정계를 평정하고, 죽기 직전까지 강력하게 통치했을 정도의 정치적 능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또한 당대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와 전쟁하여 계속해서 승리했다. 천하의 당 태종 이세민과 으뜸 무장이었던 소정방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 줄 정도로 당대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쓰면서 유독 심혈을 기울여 복원하고 싶었던 인물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외모가 웅장하고 기품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2. 본명에 관한 추론
현재 사학계 및 대중에서 널리 쓰이는 이름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지만 한국사의 고대 인물들에서 종종 발견되는 본명에 대한 논란이 연개소문에게도 있다. 알아둬야 할 점은 당시 한반도는 '한문식 인명'과 '순우리말 인명'이 교차하는 과도기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인명이 둘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연개소문의 성이 연(淵)씨라고 직접 언급한 사료는 일절 남아있지 않다. 정사의 기록에는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고만 나오며 원래 이름이 '연개소문'이라는 것은 당나라의 피휘 문화에 근거한 후대의 추측이다. 당나라의 기록인 《구당서》와 《신당서》, 〈천남생묘지명〉에는 연씨 가문의 성씨가 '천'(泉)씨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도 이 내용이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천씨가 본래 연씨였다는 사실은 김부식이 살던 고려 중기에서 500년도 넘게 지난 조선 후기나 되어야 밝혀졌기 때문이다.
- 《삼국사기》의 〈천개소문 열전〉에서는 연개소문의 이름을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후술하겠지만 쇠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소문'을 '금(金)' 자의 뜻을 빌려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의하면 현대인의 인명에 가까우며 삼국시대에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한 한자식 이름으로는 연개금(淵蓋金)이 된다. 일본 기록인 《일본서기》와 《등씨가전》에도 연개소문이 '개금'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또한 일본으로 망명한 고구려 출신 승려인 도현(道顯)이 저술한 《일본세기》도 '개금'으로 적었다.[7] 삼국시대 후기로 갈수록 한문 지식이 완숙해짐에 따라 고대 한국인의 인명 또한 단순 음차표기를 사용하기보다는 뜻까지 고려한 표기법이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을 고려해볼 때, 우리말 인명으로 지었더라도 대외 표기 상으로는 '개금' 쪽이 공식 한자 표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연남생 묘지명〉에서도 '개금'으로 표기되어 있다.
-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사신에게서 연개소문의 정변에 대해 직접 들은 내용을 기록한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는 연개소문을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 이리카스미)라고 적어놓았다. 여기서 '이리(伊梨)'는 '연(淵)'에, '가수미(柯須彌)'는 '개소문(蓋蘇文)'에 해당한다.
연개소문의 성씨가 연씨라는 설은 18세기에 이르러 국학자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처음으로 주장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고구려의 대신인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통고(通攷)》와 《신당서》에 따르면 "정토는 개소문의 아우"였으므로, 사실 연개소문의 성은 연씨였으나 이름이 당고조 이연(李淵)의 휘와 겹쳐서 당나라에서 연개소문의 성을 피휘해 '천'으로 적게 됐다는 주장이었다.[8] 이 주장이 한국 사학계에서 거의 정설로 인정받으면서 오늘날에는 개소문의 성을 연씨로 표기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과 일본의 학계에서는 연개소문을 여전히 천개소문이라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이런 추세가 어느 정도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의 성씨인 '연(淵)' 또는 '천(泉)'은 한문식 성이라기보다는 고유어를 훈차한 것[9]일 가능성이 높다. 우선 '연못 연'과 '샘 천'은 각각 뜻이 통하므로 같은 단어를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서기》에서는 연개소문의 성을 '이리(伊梨)'라고 적어놓았는데, 이를 고구려 고유어로 연못 또는 샘을 뜻하는 단어로 간주한다면 '이리'는 음차, '연/천'은 훈차 표기로 가정할 수 있다.
실제로 삼국시대의 지명을 수록한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고구려 지명 중 천정군(泉井郡)이 어을매(於乙買), 천정구현(泉井口縣)이 어을매곶(於乙買串)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여기서 매(買)는 한국어 '물'의 고대 한국어를 음차한 것이므로[10] '어을(於乙)'이 샘[泉] 혹은 우물[井]을 뜻하는 단어였다고 추측된다. 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전하는 나정(蘿井)은 나을(奈乙)로도 표기됐는데 여기서도 '을(乙)'이 우물 정에 대응된다. 이리가수미의 '이리'도 이 '어을/을'과 동계어였을 것이다.
이름의 경우, 개소문(蓋蘇文)과 가수미(柯須彌)의 고대 음가가 일치하지 않아서 추정에 난점이 있다. 정확히는 첫 두 음절은 '가소'로 읽혔다는 게 거의 확실한데[11] 마지막 음절의 모음이 불확실하다. '개소문/가수미'와 '개금(蓋金)'의 대응 관계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소/수'가 한국어 '쇠'의 고어형을 축약 표기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며[12], '개금'은 가수미의 '수미(須彌)'가 황금의 산을 가리키는 범어 '수메루(Sumeru)'의 음차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한 불교식 언어 유희에서 비롯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13]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고려고기》라는 서적을 인용해 '소문'이 신라의 시중에 해당하는 벼슬 이름이고, 성이 '개', 이름은 '금'으로 본명은 '개금'이라고 쓰고 있다. 즉 '개소문'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유황숙이나 김과장 같이 성+지위라는 것. 다만 현전하는 《고려고기》의 기록은 수나라 장수 양명(羊皿)이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연개소문으로 환생했다는 등 설화적인 성격이 짙어 그 정확성에 대한 논란이 많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한편 신채호는 연태조가 '갓 쉰 살 때 얻은 아이'라고 해서 아이 이름을 '갓쉰'으로 지었고, 그것을 고구려 이두문으로 표기한 것이 개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갓쉰둥전》'의 갓쉰둥[14]이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주장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국어학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며 근거가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에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연개소문/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4.1. 과거의 평가
...기자가 남긴 풍속이 아직 남아서 600여 년을 편안히 지내다가, 그 쇠할 무렵에 연개소문이 흉악하게 굴어서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의 군사를 불러들였고..(중략)..연개소문 때부터 난리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다'...(중략).. 지방에 가면 반드시 임금의 덕과 위엄을 펴고, 교화를 밝혀서 이미 잘 된 것은 그대로 지키고 아직 미진한 것은 더 장려하여, 기자(箕子)의 유풍을 되찾는 데 힘쓰고 연개소문의 나쁜 습관을 깨끗이 없애서, 덕성을 훈도하여 기르자...
《동문선》, 제93권, 하륜, 서북면 도순문겸 병마도절제사 평양윤 조공을 전송한 시의 서문(<송서북면도순문겸병마도절제사평양윤조공시서>) 中.
《동문선》, 제93권, 하륜, 서북면 도순문겸 병마도절제사 평양윤 조공을 전송한 시의 서문(<송서북면도순문겸병마도절제사평양윤조공시서>) 中.
조선이 비록 그런 흠이 있지만, 천개소문(泉蓋蘇文)처럼 임금을 시해한 죄가 없고 천조(天朝)를 섬기어 신하의 예절이 어긋나지 않았으니...(조선을 합병하지 말아야 합니다.)
송일한, 사학천[15]
송일한, 사학천[15]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때를 타고 진출하여,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는 대신이 되었으니, 간사함으로 손바닥 위에 나라의 권력을 놓고 농단하고, 정사(政事)에 임해서는 편리에 따라 충신을 죽이고 말았도다. 중외(中外)에 권력을 천단하고 날로 포악해지니, 민(民)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의 기틀은 기울었네.
이승휴-《제왕운기》
이승휴-《제왕운기》
근대로 들어와 연개소문이 '민족적 영웅'으로 재평가되기까지 그에 관한 평가에는 대역죄라는 틀이 강하게 작용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연개소문은 임금을 자기 입맛대로 갈아치우고, 전횡을 일삼은 포악한 역적이라는 것이 당시 비판의 요지였다. 기본적으로 왕조 시대에 왕을 참살한 신하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능력 여부를 차치하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나 조선시대 문집이나 자료를 찾아보면 해동이 배출한 대역 죄인의 대명사 정도의 취급이었으며, 명나라에서도 조선을 깔 때 곧잘 소환당하곤 했다.
이런 평가는 조선 시대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고려 시대 때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연개소문을 신랄히 비판했다. '《고려고기》'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사서를 인용하여, 수양제의 신하가 고구려를 멸망시켜 양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환생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전설을 대놓고 언급해 놓았을 정도였다. 또한 연개소문이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도입함으로써 고구려를 쇠망하게 만들었다는 기록까지 적었다. 물론 이건 친불교적 관점에서 도교를 도입한 연개소문을 까는 내용의 설화이기는 하지만, 연개소문의 정책이 당시 불교계에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17]
전해지는 말에 대당에는 위징이 있고, 고려에는 개금(蓋金), 백제에는 선중(善仲), 신라에는 짐순(鴆淳)이 있다.[18]이들은 각자 일방을 맡아 이름을 10,000리에 떨쳤으니 이들은 모두 당세의 준걸로 지략이 사람들을 뛰어넘었다.
덴지 덴노[19]
덴지 덴노[19]
개소문(蓋蘇文)은 안시성(安市城) 하나로 천하의 대병을 당해 내었으니 이는 사람을 제대로 얻은 효과입니다."
홍식[24]
홍식[24]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소유하여 삼국 중에..(결락)... 수(隨)나라와 당(唐)나라가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 땅은 평원이 광활하여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지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씩씩하고 호방한 사람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고구려의 역사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라고 일컫는 자는 비록 찬역(簒逆)한 도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적의 효웅(梟雄無敵之人)입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군신(群臣)들과 당세의 웅걸(雄傑)을 논하였는데 연개소문이 7인 가운데에 끼었으니, 그 인물이 어떠한지 상상이 됩니다.”
홍서봉
홍서봉
당 태종은 온 국력을 기울였는데 용맹한 장수와 병사들이 견고한 성을 넘지 못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연개소문이 영웅이었는데도 이미 망해버린 나라인양 간주함이 지나쳤던 것이다. 당 고종 때는 개소문이 죽었으니 이적 한 사람만으로도 취하기에 충분했다. 이적의 재주가 어찌 태종을 능가했겠는가? 상대방의 때가 달랐던 것이다
장뢰[25]
장뢰[25]
하지만 그 능력이나 업적에 관한 평가만큼은 꽤 높은 편이다. 요약하자면 "역적인데 인물은 인물이다." 정도로 강조점이 다를 뿐 이것은 사실 당대부터 근대의 신채호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진 내용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당대부터 천하를 대표하는 영웅의 대명사로 언급되었고, 한국에서는 역적이라고 욕을 하다가도 막상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통쾌하게 질러버리는 연개소문을 은근히 그리워하고, 또한 안시성의 일도 그의 공으로 여기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현대에는 사료의 행간을 더듬어 짐작만 할 뿐이지만 1차 사료가 편찬될 시점의 중국에서는 연개소문의 영웅적인 능력이 당태종과 같은 거물들을 이길 정도였음이 익히 알려져 있었다.
김부식을 비롯하여 연개소문에 대한 대체적인 평은 '재주는 뛰어나지만, 나라를 올바르게 받들지 못했고 성질이 더러워서 끝내 대역죄까지 저지른 인물'이었고 일단 나라를 구한 공만큼은 높이 쳐주었지만, 함부로 임금을 죽이고 오만하고 잔인한 행동을 한 데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했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그나마 병들어 천수를 누리다 간 것도 반역자 치고는 운이 좋은 최후였다고 사론에 대놓고 실어놓기도 했다.
다만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평과 미묘하게 다른 듯하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등은 그냥 대놓고 나라 말아먹은 것들이라고 적어 놓았으니.
군사적으로는 명장이라는 평가가 많다. 마멸되고 은폐된 기록의 편린 속에서도 광역 전선, 공성전, 수성전, 시가전까지 산전수전을 겪은 전력을 행간에 남긴 수십 년 동안, 그는 영양왕 시절 시가전에서 불세출의 기량을 보여준 영류왕 고건무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버린 후 집권했으며, 총사령관으로서는 대륙의 제1인자인 당태종 이세민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주는가 하면 야전으로는 당나라 제1인자였던 소정방에게도 굴욕을 안겨주었으며, 사수 전투와 같이 최전선에서 굵직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각 분야마다 도장깨기를 하듯 천하의 1인자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중원 대륙에 천 년 넘게 명성이 울려퍼진 사례는 한국 역사를 통틀어 비견할 이를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집안 싸움에서만 칼 들고 무적으로 군림하다 정작 외세에는 무력하던 여타 무신 집권자들과 격이 다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영휘 연간에[27] 도성에서 연회가 열렸는데 사람들은 서로 말을 하다가 민간의 일을 거론하여 누군가가 말하였다.
"예천현은 도성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데 그곳에서는 고독(蠱毒)[28]이 성행합니다. 그런 고을 사람들은 당장 멀리 유배를 보내야지 어찌 도성 가까이 둘 수 있겠습니까?"
또 누군가가 말하기를 "멀리 유배를 보낸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인데 거기서 또 고독을 행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해치치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말하였다 "그럼 그들을 어디에 안치해야 합니까?"
그때 장손현동이 말하였다. "저 현동에게 안치하게 하신다면 필히 장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뻐하며 어디인지 물으니 현동이 답하였다.
"고독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 모아 막리지에게 보내 잡아먹히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웃었다.
《태평광기》
"예천현은 도성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데 그곳에서는 고독(蠱毒)[28]이 성행합니다. 그런 고을 사람들은 당장 멀리 유배를 보내야지 어찌 도성 가까이 둘 수 있겠습니까?"
또 누군가가 말하기를 "멀리 유배를 보낸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인데 거기서 또 고독을 행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해치치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말하였다 "그럼 그들을 어디에 안치해야 합니까?"
그때 장손현동이 말하였다. "저 현동에게 안치하게 하신다면 필히 장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뻐하며 어디인지 물으니 현동이 답하였다.
"고독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 모아 막리지에게 보내 잡아먹히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웃었다.
《태평광기》
중국에서도 당나라의 쟁쟁한 명장들을 압도한 연개소문의 존재감은 매우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당태종이 비참하게 패배한 직후인 650년대에 이미 연개소문은 사람들을 잡아먹는 마왕 같은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관련된 전승이나 소설로 가면 거의 최종 보스급의 위엄을 자랑할 정도다. 대표적인 것이 설인귀가 주인공인 《설인귀정사략》이 있으며, 산동성이나 강소성에도 그런 형태의 연개소문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요동에서 북경을 지나는 기행문을 보면 연개소문의 고장으로 아직까지도 연개소문의 강대함을 논하고 상을 세워 기리는 이야기까지 실려 있는 등, 고대 로마에서의 한니발 바르카에 준하는 위용을 보였다.
'연개소문이 스스로 병법을 아는 것을 믿고 토벌당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내게 30,000명의 군사를 주면 그를 사로잡겠다.'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29]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29]
일례로 당나라의 병법서 《이위공문대》의 한 대목에 따르면 전체적으로는 스스로와 이세민을 띄우면서 연개소문을 깎아내리는 발언이지만 역으로 병법가로서의 연개소문의 면모 내지는 이미지를 파편적으로나마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4.2. 현대의 평가
당의 고구려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찾아온 김춘추의 제안에 대한 연개소문의 거부는 고구려로 하여금 남북에서 적을 맞이하게 하는 운명적인 선택이었다. 이는 고구려의 안위에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유혈 정변을 거쳐 집권한 그로서는 대외강경책이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유효하다고 판단하였던 데서 비롯하였던 것 같다.
......남생은 667년 당에 입조하였다. 이후 남생은 고구려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당에 알렸고, 당군의 향도(嚮導)가 되어 적극 협력하였다. 이처럼 남생 형제들 간의 이전투구가 지속되자 남녘을 지키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가 이탈하였다. 그는 666년 12월 자신의 관할구역인 함경남도 남부 일대와 강원도 북부 지역 12성을 들어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런데 내분이 터진 뒤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어떤 적극적인 조처도 마련되지 못하였다. 이런 양상은 20여 년에 걸친 연개소문의 집권과 무관할 수 없다. 연개소문은 대규모 유혈 정변으로 집권한 후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려 하였고, 권력을 아들이 세습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억압적 권력행사는 불가피하였다. 자연히 여타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하였으며, 무엇보다 기존 권력 장치를 무력화하였다. 연개소문에게 집중된 권력은 그가 죽자 엄청난 권력 공백을 초래하였다. 그의 아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갈등을 조정한다든가 어느 한 편으로 힘을 몰아주든지 하여, 권력의 혼돈상태가 빨리 종결되게 하는 데에 왕이나 귀족회의 등 어떠한 권력 장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노태돈 집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구려 문서.
......남생은 667년 당에 입조하였다. 이후 남생은 고구려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당에 알렸고, 당군의 향도(嚮導)가 되어 적극 협력하였다. 이처럼 남생 형제들 간의 이전투구가 지속되자 남녘을 지키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가 이탈하였다. 그는 666년 12월 자신의 관할구역인 함경남도 남부 일대와 강원도 북부 지역 12성을 들어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런데 내분이 터진 뒤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어떤 적극적인 조처도 마련되지 못하였다. 이런 양상은 20여 년에 걸친 연개소문의 집권과 무관할 수 없다. 연개소문은 대규모 유혈 정변으로 집권한 후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려 하였고, 권력을 아들이 세습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억압적 권력행사는 불가피하였다. 자연히 여타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하였으며, 무엇보다 기존 권력 장치를 무력화하였다. 연개소문에게 집중된 권력은 그가 죽자 엄청난 권력 공백을 초래하였다. 그의 아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갈등을 조정한다든가 어느 한 편으로 힘을 몰아주든지 하여, 권력의 혼돈상태가 빨리 종결되게 하는 데에 왕이나 귀족회의 등 어떠한 권력 장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노태돈 집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구려 문서.
그 선악 현부(善惡賢否)는 별문제로 하고 아무튼 당시에 고구려뿐 아니라 동방아시아 전쟁사 중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다. (중략) 봉건세습(封建世襲)의 호족공치제(豪族共治制)의 정치를 타파하여 정권을 한곳에 집중시켰으니 이는 분립의 대국(大局)을 통일로 돌리는 동시에 그 반대자는 군주나 호족을 묻지 않고 한꺼번에 소탕하여 영류왕 이하 수백 명 대관을 죽이고, 침노해온 당태종을 격파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당을 진격하여 지나 전국을 놀라 떨게 하였으니 그는 다만 혁명가의 기백(氣魄)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혁명가의 재능과 지략을 갖추었다고 함이 옳겠다. 다만 그가 죽을 때에 따로 어진 이를 골라 자기의 뒤를 이어 조선인 만대의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불초한 자식 형제에게 대권(大權)을 맡겨 마침내 이룬 공업(功業)을 뒤엎어버렸으니 대개 야심이 많고 덕이 적은 인물이었던가 싶다. 그러나 그 역사가 아주 없어져서 오직 적국 사람들의 붓으로 전한 기록을 가지고 그를 논술하게 되어 사실의 전말을 환히 알아볼 수 없으니...
신채호
신채호
연개소문은 분명히 지략가이고 당당한 무인이었으며 결과로 볼 때도 대국인 고구려의 전권을 장악한 정략가였다. 그리고 외세인 당이 자신의 지위를 문제삼을 때 그를 거부하고 당의 침략을 일단 격퇴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도 있겠다. 당과 신라가 연결되어 국가의 운명이 내다보이는데도 그는 자신과 가족의 집권에 일단은 집착하였다. 그러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서 그 같은 자세를 보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의 국제감각은 국가경영자로서 너무나 미흡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장기간의 집권기간에 이렇다할 국정의 개선조치가 없었던 사실을 보면, 그는 체제 붕괴기에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방법을 통하여 정권의 재창출에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자주적인 영웅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던 한말 그리고 일제 침략기에는 연개소문이 거대한 당나라에 대항한 민족적 영웅으로서 주목을 받았지만, 이제는 보다 면밀한 재검토를 받아야 할 시점에 처한 듯하다. 이러한 재검토와 재평가는 그만큼 우리의 민족적 역량이 축적된 데서 가능해진 만큼 이를 피하거나 터부시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김기흥
김기흥
근대를 거치면서 연개소문의 평가는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다른 면으로 극단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외세에 유린당한 무력한 시대를 거치고 왕조시대의 군신 간의 충의라는 가치에서 한결 자유로워지면서 외세를 무찌른 영웅으로서의 용맹하고 자주적인 모습이 한층 더 부각되는가 하면 이전까지 단순히 당태종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개략적인 부분을 넘어 그 행적이 왜곡되고 은폐된 정황까지 찾아내어 그 업적을 복원하려는 시도도 이뤄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민족주의적인 욕구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오판이 고구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실패임에는 분명한 사실이기에 호국정신 고취 외에는 큰 영향을 줄 순 없는 상황이다.
그는 7세기 고구려의 한계 상황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다. 그는 명장, 혁명가, 정치가로 만족해야 했다. 연개소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권신의 입장에서 권력을 장악하며 국가를 통솔한 것은 이점보다는 폐해가 많았다. 그의 라이벌로 지칭되는 이세민과 김춘추는 모두 일국의 왕이었다. 따라서 정적 제거나 권력 강화에서 연개소문은 이들보다 명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권력 강화는 무리한 독재권력, 세습정권의 폐해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비정상적인 권력구조는 고구려 정치권의 비효율성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중략) 그가 죽은 후에 빚어진 카리스마의 공백은 곧 고구려의 내분과 더 나아가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가 권력을 다시 왕에게 돌려주었거나, 혹은 후계자 선정을 제대로 했더라면 고구려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었다. 후계자 선정에서의 잘못이란 문제 하나만으로도 연개소문은 고구려 멸망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연개소문은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략) 당나라의 경우에서 보듯 비록 후계자가 자신보다 부족한 면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를 보좌하는 정치 시스템이 부재했던 것이 고구려가 실패한 더 큰 원인이었다. 연개소문은 대단히 뛰어난 군사지휘자의 능력을 지녔지만, 국가의 총체적 국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활용해야 하는 국가 최고경영자의 능력 면에서는 여러 부족한 면모를 보였다. (중략) 연개소문은 고구려 국력의 한계를 파악하고, 중간에 전쟁을 중지시킬 만큼 유연하지 못했다. 더욱이 상대인 당나라는 수나라와 달리 돌궐을 복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당의 용병으로 활용했으며,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은 설연타마저 멸망시켰으며,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힘과 의지를 갖고 있었다. (중략) 무엇보다 연개소문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에는 주변 여건이 따라주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적인 당나라는 새롭게 성장하는 신흥 강대국이었다. 반면 고구려는 전성기를 지난 노쇠한 대국이었다. 성장 에너지란 측면에서 고구려는 당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중략) 전통 귀족들이 여전히 권력의 한 축을 장악하고 있었고, 제도는 낡았고, 혁신은 뒤늦었다. (중략) 연개소문은 1차 고-당 전쟁과 2차 고-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했지만, 전투에만 승리했을 뿐 전쟁의 성과물을 획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비록 위대한 전략가, 고구려의 위신을 드높인 영웅이라고 칭송될 수 있다 하더라도, 분명한 한계를 지닌 지도자였다. 결과적으로 연개소문은 불리한 시대적 여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해, 고구려의 시대를 새롭게 열지는 못했던 것이다. 다만 후대에 본인만한 지도자가 없는 게 연개소문의 책임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 김용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中
- 김용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中
연개소문은 그를 중심으로 고구려를 재편하여 당나라와 오랫동안 맞서 싸울 수 있게 했지만 불리한 시대적 여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비록 전쟁의 발발여부를 온전히 결정할 위치는 아니었지만 일단 고구려와 당나라는 기본적인 체급 차이가 현저했으며 돌궐은 망한 지 오래였고 토번은 아직 어그로 끌기 전이라 모든 국력이 고구려를 향했고 이는 고구려에 치명적이었다. 백제가 오래 버텨주지 못했기도 하고 신라까지 당나라를 도와주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후계자 선정 실책이 고구려 멸망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에 대한 책임은 이견이 거의 없다. 장남이었든 차남 이하였든, 누군가를 내정했다면 그에게 권력을 제대로 몰아주고 나머지는 공식 후계자에 개길 수 없도록 권력을 한정시켰어야 했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은 그러지 않았고 이는 연개소문 사후 3년도 되지 않아 고구려가 내전으로 인해 자멸에 가까운 파국을 맞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구려 멸망이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서로 싸웠던 점이 크다고 본다면 향후 분쟁의 씨앗을 낳음으로써 서로 싸울 판을 깔아놓았던 연개소문의 책임은 적지 않다.
연개소문의 후계자 선정에 대해서 최근엔 연남생을 후계자로 삼고, 가문 일원들이 그를 보좌하는 공조 체계를 만들려고 시도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생기고 있다. #
그러나 이러한 시도도 최후엔 삼형제 주위의 측근들의 이간질로 인해 바로 무너지는 취약한 패착에 불과했다. 더 나아가, 연씨 가문의 내분에 대해 고구려가 국가적으로 할 수 있는 그 어떤 적극적이고 제도적인 수습책도 없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권력구조 증발을 야기한 연개소문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연씨 가문에 내분이 발생한 건 삼형제들 개인의 인격 문제이지만, 연씨 가문의 내분이 고구려의 멸망으로 직결된 건 연개소문의 책임이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태돈 교수는, 연씨 가문 내분에서 야기된 고구려의 멸망을 '후세대의 인격 문제'를 넘어 '연개소문이 뿌린 씨앗'으로, 고구려의 국제정세적 위기(특히 대신라 관계)를 '연개소문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었던 불가항력'이 아닌 '연개소문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으킨 결과'로 본다.
정통성이 결여된 그의 정권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불가불 강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후계 구도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따라 자기 아들들과 형제를 요직에 앉혔다. 아무리 귀족제사회였다고 하여도 왕이 아닌 자가 귀족회의를 무력화시키고 권력을 장기간 독점하고 그 일족이 위세를 떨치니, 자연 여타 귀족들의 불만 또한 적을 수가 없는 바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그의 정권이 일정한 제도화된 권력체계를 확립치 못하였다는 데 있다. 이는 그의 사후 권력 승계의 측면에서 그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그의 아들들이 권력을 승계하였다지만, 일단 그의 아들들 사이에 갈등이 터지자 그것을 수습하는 다른 제도적인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못하였다. 장자인 남생은 당으로, 그의 동생인 연정토는.신라로.투항하여 결정적인 파국을 초래하였다. 왕이나 귀족회의는 권력의 혼돈 상황에 대해 어떤 수습책도 강구하지 못하였다. 권력을 연개소문 1인에게 집중시켰고, 이를 강압적으로 집행한 결과, 그가 죽자 내재되어온 모순이 폭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곧 고구려 멸망의 직접적인 동인이었던 그의 사후 벌어진 최고권력층 내부의 분열과 갈등은 연개소문 자신이 뿌려놓은 씨앗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역사의 중요 고비에서 등장한 정치가 연개소문의 치적은 결코 긍정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당과의 대결이 급박한 상황일수록 남쪽의 신라와의 사이에 평화가 절실한데, 그는 신라의 평화 제의를 거부하였다. 이는 결국 고구려에 치명타가 되었다. 한반도에서 나라가 나누어져 대치하고있는상황에서, 서로간의 항쟁이 외부의 세력에 대한 대응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삼국 말기에는 아직 삼국을 아우른 차원의 동족의식이 실제적인 의미가 없던 시기였지만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그런 면에서 그의 대외정책은 무모한 강경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내적으로 그는 대규모 유혈정변을 통해 집권한 후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려 하였고, 권력을 아들에게 세습하였다. 그에 따라 억압적 권력행사가 불가피하게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자연히 이는 여타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하였으며, 무엇보다 기존의 권력 장치들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게 집중된 인격화된 권력은 그가 죽자 엄청난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였다. 그의 아들들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왕이나 귀족회의 등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어떤 권력장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해 인격화된 권력은 제도화된 권력에 비해 자의성이 강하며 폭력에 일방적으로 의존할 수밖 에 없다. 그런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결속은 기대하기 어려운 바이며, 결국 비극적인 결과로 끝나게 된다. 이런 면을 연개소문 정권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은 웅장한 용모에 걸출한 담력과 위엄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와 김춘추의 담판을 통해.추론해 볼 때, 그는 5~6세기에 동북아의 패자로서 군림하던 고구려의 영광을 자기대에 재현하려는 야망을 지녔고, 이를 위협하는 당제국과 자웅을 결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의 호기로운 기개와 야망은 낭만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정책은 대내적으로 국가적 결속력을 높이고 대외적으로 국제정세에 현명하게 대처하여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고구려를 지키는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하였다. 그런면에서 그는 부정적인 의미의 ‘실패한 정치가’였다고 할수있겠다.
노태돈(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연개소문(淵蓋蘇文): 무모한 대외강경론자, 포악한 권력자」, 2002.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역사의 중요 고비에서 등장한 정치가 연개소문의 치적은 결코 긍정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당과의 대결이 급박한 상황일수록 남쪽의 신라와의 사이에 평화가 절실한데, 그는 신라의 평화 제의를 거부하였다. 이는 결국 고구려에 치명타가 되었다. 한반도에서 나라가 나누어져 대치하고있는상황에서, 서로간의 항쟁이 외부의 세력에 대한 대응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삼국 말기에는 아직 삼국을 아우른 차원의 동족의식이 실제적인 의미가 없던 시기였지만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그런 면에서 그의 대외정책은 무모한 강경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내적으로 그는 대규모 유혈정변을 통해 집권한 후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려 하였고, 권력을 아들에게 세습하였다. 그에 따라 억압적 권력행사가 불가피하게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자연히 이는 여타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하였으며, 무엇보다 기존의 권력 장치들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게 집중된 인격화된 권력은 그가 죽자 엄청난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였다. 그의 아들들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왕이나 귀족회의 등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어떤 권력장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해 인격화된 권력은 제도화된 권력에 비해 자의성이 강하며 폭력에 일방적으로 의존할 수밖 에 없다. 그런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결속은 기대하기 어려운 바이며, 결국 비극적인 결과로 끝나게 된다. 이런 면을 연개소문 정권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은 웅장한 용모에 걸출한 담력과 위엄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와 김춘추의 담판을 통해.추론해 볼 때, 그는 5~6세기에 동북아의 패자로서 군림하던 고구려의 영광을 자기대에 재현하려는 야망을 지녔고, 이를 위협하는 당제국과 자웅을 결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의 호기로운 기개와 야망은 낭만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정책은 대내적으로 국가적 결속력을 높이고 대외적으로 국제정세에 현명하게 대처하여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고구려를 지키는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하였다. 그런면에서 그는 부정적인 의미의 ‘실패한 정치가’였다고 할수있겠다.
노태돈(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연개소문(淵蓋蘇文): 무모한 대외강경론자, 포악한 권력자」, 2002.
5. 가족 관계
아버지로 연태조, 동생으로 연정토, 아들로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이 있다.연개소문의 부인에 대한 기록도 전하는데, 당나라에서 죽어서 중국에 지금도 남아있는 <연헌성 묘지명>에 '조모'(祖母)란 인물이 등장한다. 이 조모는 679년 아들 연남생이 병으로 먼저 죽었을 때 슬퍼하던 손자 연헌성에게 끼니 거르지 말라고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682년에 당나라에서 죽었다. 연헌성의 조모는 당연히 연남생의 어머니이자 연개소문의 아내를 의미한다. 이를 보아 연남생이 당나라로 도망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간 걸로 보인다. 아니면 668년 고구려 패망 후 따로 모시고 왔든지.
가족사에서 특이한 점 중 하나로 연남생 삼형제는 돌림자(男)를 쓰고 있으며, 연남생의 아들들인 연헌충과 연헌성 또한 돌림자(獻)를 쓰고 있다. 연남생의 손자대부터는 가문이 당나라에 정착하고 태어났으니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돌림자를 썼다고 볼 여지가 있긴 한데 연남생 삼형제와 연남생의 아들들은 명백히 고구려 출신인데도 이름에 돌림자를 쓰고 있는 걸로 보아 삼국시대 말기부터 한국사에서도 돌림자를 사용하는 문화가 시작했던 걸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도, 의자왕의 손자인 부여문선과 부여문사가 돌림자(文)를 쓰고 있었다.
한편 옛 고구려 지역에 전하는 전설 중에 연개소문의 여동생이라 하는 연수영이 있다. 수군을 양성하고 지휘하여 당 수군을 격파했다는 내용의 금석문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있으나 해당 금석문의 존재가 확인된 바가 없어 실존 여부는 희박하다. 사서에서도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연수영의 존재를 신뢰하지 않는다.
6. 기타
- 연개소문이 평소에 차고 다녔다는 5자루의 칼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중국 쪽의 기록에는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나 칼을 5자루씩 가지고 다닌다는 기록도 있는데 혹은 사냥용, 가죽 다듬기용 등의 크고 작은 칼을 차고 다닌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실제로 황남대총에서는 칠지도의 이전 단계로 추정되는 큰 칼 칼날에 작은 검집 6개가 달려 있고 거기에 작은 칼 6개가 꽂혀 있는 환두대도 유물도 있다.[30]
- 중국 경극(중국 전통무용)에서는 연개소문이 비도술(飛刀術)에 능통한 것으로 묘사된다. 중국의 민간 설화에서는 칼이 5자루가 아닌 7자루로 묘사되며 이것으로 당태종을 뒤쫓다 설인귀가 창으로 막아내어 연개소문의 추격을 막아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스펀지에서는 중국의 유명한 경극 중에서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내용이 있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다. 상당히 비중있는 역할로 꽤나 용맹스럽고 카리스마 있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경극 팬들은 대부분 그의 이름과 고구려 사람인 것까지 알고 있다고 할 정도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용의 힘을 가진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패퇴시키고 뒤쫓지만 최후에는 당태종을 구하러 온 설인귀와 싸우다 패배하는 내용으로 끝난다.
7.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연개소문/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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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14년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려고기(高麗古記)》의 기록이다. # 하지만 책에 나온 내용부터가 오류가 많으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조차 다른 기록과 비교해봤을 때 분명히 오류가 있을 것이라는 주석을 달았기에 신빙성은 낮은 편이다. 실제 출생 연도는 매우 다양하게 거론되지만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연개소문/생애 문서 참조.[2] 전자는 《일본서기》의 기록이며, 후자는 〈연남생 묘지명〉의 기록이다. 《삼국사기》, 《구당서》, 《자치통감》 등의 사서는 666년 기사에서 연개소문의 사망을 언급하고 있으나, 연남생이 당에 투항한 기록 앞부분에 그저 배경을 설명하듯 서술된 만큼 이것만으로 연개소문이 사망한 해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고대사 사료 특성상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는 기록은 다른 기록 사이에 대충 붙여넣은 경우가 흔했다.[3] 《구당서》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연개소문의 성씨다. 당 고조 이연의 이름이 연개소문의 성씨와 같은 자를 썼기 때문에 이를 피휘한 것이다.[4] 요녕 지방에 연개소문의 누이라는 전승이 있다.[5] 이상 《삼국사기》, 〈연남생 묘지명〉 참조.[6] 국내 고구려사 연구의 권위자이다.[7] 링크. 당시 승려 계층은 어느 나라에서든 지식인이었으니 한문은 물론 당대 고구려에서 통용되던 표기 방식에 능숙하였을 것이다.[8] 淵이 泉으로 바뀌는 현상은 757년 신라 경덕왕이 고구려의 옛 지명 주연현(酒淵縣)을 주천현(酒泉縣)으로 개칭했다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다만 연남생, 연남산 등 당나라에 들어가서 평생을 산 아들들은 당고조 이연의 이름을 피휘하여 천(泉)을 성씨로 삼았을 것이므로, 사실상 개명(개성)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연개소문 생전에 이러한 개성이 이루어졌는지가 불확실할 뿐이다.[9] 한자의 뜻을 빌려 고유어를 표기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한자의 소리를 빌려 표기하는 것은 음차라고 한다.[10] 買의 후기 상고한어 발음은 /*mˤrɛʔ/로 재구되므로, 이 한자를 통해 대략 *mer에 가까웠을 '물'의 당시 형태를 표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물을 뜻하는 한자와 매(買)자가 대응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 삼국시대 당대에도 남천현(南川縣) - 남매(南買), 술천군(述川郡) - 성지매(省知買), 수곡성현(水谷城縣) - 매단홀(買旦忽), 횡천현(橫川縣) - 어사매(於斯買), 심천현(深川縣) - 복사매(伏斯買), 성천군(狌川郡) - 야시매(也尸買), 수입현(水入縣) - 매진이현(買珍伊縣) 등의 이표기 관계가 성립했으며, 이후 경덕왕 대에 개칭된 지명과 비교하면 살매현(薩買縣) - 청천현(淸川縣), 매홀군(買忽郡) - 수성군(水城郡), 이진매현(伊珍買縣) - 이천현(伊川縣) 등의 사례가 추가된다.[11] '개(蓋)'는 후기 상고한어로 /*kˤajs/였을 것으로 재구되며 차자표기에서 대략 '갓(*kas)' 정도의 음가를 표기하는 데 쓰였다. 일례로 백제 개로왕의 이름이 가수리(加須利)로도 기록된 사례가 있다. 12세기 문헌인 《계림유사》에서 "고려 사람들은 갓[笠\]을 '개(蓋)'라 부른다"고 한 대목도 참고할 만하다.[12] '쇠'는 삼국시대에 쓰인 고대 한국어 당시까지만 해도 어중에 ㄹ이 있었으며 대략 /*sore/ 정도의 발음으로 재구되긴 하지만, 첫째 음절만 따와서 '소'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소나(素那) - 금천(金川), 소나라(素奈羅) - 금관국(金官國) 등이 있다. 참고로 소나의 나(那) 역시 현대어 '내'에 대응되는 고대 한국어 '나리(那利)'를 축약한 것이다.[13]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도 불교식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실제로 후백제 견훤의 아들 금강(金剛)과 수미강(須彌康)을 동일 인물로 보는 학설도 있는데 여기서도 금(金)과 수미(須彌)가 대응된다.[14] SBS 연개소문에서는 이 이름을 '개똥이'와 같은 어린 시절의 아명으로 설정했다.[15] 명나라 급사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틈에 조선을 병합하자는 의견에 반대하며 나온 이야기다.[16] 명나라 일부 대신들이 조선을 병합하고자 모함한 언사를 인용[17] 연개소문의 이러한 시도는 도교를 수용해서 기존의 불교를 견제하거나 억압하려 한 의도였다고 평가된다.[18] 이 중 '짐순'은 일반적으로 김유신을 뜻한다고 해석되는데, 발음 때문에 김유신이 아니라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자세한 것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문서 참고.[19] 《등씨(藤氏=후지와라씨, 藤原氏) 가전》, 후지와라씨의 내력을 서술한 서적으로 한국의 《행장》 비슷한 형식의 기록이다. 이 발언은 덴지 덴노가 후지와라씨의 시조가 되는 후지와라노 카마타리를 "우리 카마타리는 위징, 연개소문, 성충, 김유신(혹은 김흠순)과 견줄 만한 인재라고!"라는 의도로 칭찬한 말이었다.[20] 오랑캐 虜로 표기[21] 당나라의 시어사, 668년 2월, 고구려 전선에서 장안으로 귀환하여 보고하는 중에[22] 송신종이 당태종이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 이유를 묻자 왕안석의 대답[23] 《삼국사기》에서 위의 왕안석의 대화를 인용하면서[24] 조선 선조 때의 대사헌, 선조와의 강론에서[25] 소동파의 4학사 중 하나, 《조충국론》을 저술하여 국방을 논하면서 나온 발언이다.[26] 문맥상으로 소동파의 제자(위에 언급된 장뢰)를 소동파로 썼을 가능성도 보인다.[27] 650년대 초.[28] 독충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일.[29] 당나라의 명장 이정(李靖)이 당 태종과 했던 군사학 토론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 병법서이다.[30] 다만 이러한 형태의 유물은 대체로 신라에서나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