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1:38:21

행장

1. 품행 行狀2. 문학 장르 行狀3. 行狀4. 行狀5. 行裝6. 行長
6.1. 小西行長

1. 품행 行狀

몸가짐과 품행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2. 문학 장르 行狀

1의 행장에서 의미를 가져왔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기에 처음 언급이 나오지만 당시 글들은 현재는 전하지 않고, 언급도 없어졌다가 남북조시대에 다시 부활한 장르이다. 일본에서도 행장 비슷한 서적들은 많이 현존해있으며, 전국시대같은 혼란기를 연구할때 중요 연구사료로 쓰이고 있다. 물론 무용을 과장하거나, 허물을 감추는것은 별 다를바없어서 타 지방기록을 비교해가면서 교차검증을 한다.

한국에서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김유신의 현손김장청김유신행록(行錄) 10권을 써서 전한다[1]는 기록이 있으며 "만들어 넣은 말이 너무 많아서 잘랐다"라는 것도 포함해서 최치원의상본전을 썼고 그 외에 작자 미상의 자장전이나 양지전,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원효의 행장을 언급하고 있어 통일신라에서 행장을 써내는 것이 한동안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인용한 부분 외에 본문은 실전되었다. 그나마 많이 남은 게 10권을 3권으로 요약해 김유신열전으로 남은 김유신행록.

이후 한동안 행장이 편찬되지 않다가 조선시대 속동문선부터 시작해서 정식으로 행장과 관련된 언급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이 죽었다. 이지란은 동북면(東北面)의 청주부(靑州府) 사람이다. 옛 이름은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이다. 타고난 천성이 순후(純厚)한데다 무재(武才)가 있었다. 일찍부터 태상왕을 따라 정벌하는 싸움터에 나가 승첩(勝捷)하여 마침내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반열에 올랐다. 태상왕이 이를 대접함에 특별히 두터이 하고, 또 정사 좌명 공신(定社佐命功臣)을 주었다.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본토(本土)의 사람으로 타국(他國)에서 죽사온즉, 시체를 불태워 도로 본토에 장사지내어 전하께서 신으로 하여금 본토의 풍속을 따르게 하소서. 또 전하께서 조심조심 덕(德)을 닦아 영원히 조선을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시호(諡號)를 양렬(襄烈)이라 내렸으며, 장사지내기를 그의 청과 같이 하여 주었다. 세 아들이 있으니, 이화영(李和英)·이화미(李和美)·이화수(李和秀)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이지란의 졸기

죽은 사람의 행적과 성품에 대하여 기록하는 형태로, 대부분 죽은 사람의 친익척이나 제자 등의 지인이 기록하였다. 원래는 죽은 사람의 행적과 사상을 기록해서 후대의 사관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오지랖의도로 창작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사상에 대해서 짧게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형태로 쓰여진 대표적인 예를 보고 싶으면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끔 등장하는 졸기를 보면 된다. 이게 그나마 유사하다. [2]

문제는 이게 죽은 사람의 지인이 역사가들 보라고 쓰는 글이니, 과연 어떤 내용이 될 것인가라는 것. 남송시대 주자의 제자인 황간이 스승 주희의 행장을 40여장에 달하는 방대한 장문으로 쓰면서, "우리 스승님의 행적이나 사상은 앞으로 크게 본보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자세히 쓸 수밖에 없다능"이라는 드립을 친 게 시작이었다.

당연히 성리학자를 자처하던 조선시대 유생들은 자기 스승, 자기 조상에 대한 행장을 쓰면서 경쟁하듯이 양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김에 없는 내용도 슬쩍 슬쩍 추가하기 시작했다. 이 행장이라는 글 자체가 역사서를 쓸 때 참고할 사료라는 명목으로 시작된 글이기 때문에, 행장을 폼나게 창작해두면 역사서에도 창작된 내용이 들어갈 수 있다는 심보를 먹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숙종 때에 사육신을 복권하면서 소설인 육신전마저 참고했던 것을 고려하면, 마냥 꿈만도 아니었다. 이게 국가에서 인정받으면, 제자나 후손은 대박이 터지는 것이다.

이렇게 행장은 100장을 넘기는가 하면, 김유신의 행록처럼 권단위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버릇은 직계조상뿐 아니라 자기 조상이나 학맥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해서 온갖 행장들이 다 등장했다. 그래서 행장에 따르면, 우리나라 모든 과거 인물들은 문인들은 유교적 성인이자 예술적 문장가이고, 무인들은 여기에 신출귀몰한 전략가이고 전쟁에 참여한 사람은 모조리 군신이 되는 것이다. [3]

그래서 허목 같은 이는
“행장이란 그 행적을 쓰는 것이다. 나이란 주공(周公) · 공자(孔子)라 하여도 나는 주공 · 공자가 아니며, 나를 정자(程子) · 주자라 하여도 나는 정자 · 주자가 아니다. 살았을 때 주공 · 공자가 아니었는데 죽어 지하에서 주공 · 공자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소설을 써 버릇한 사람들은 꾸준히 소설을 썼고, 후대의 인물들이 가끔 여기에 낚여서 파닥거리고는 한다. 그리고 가끔 이 행장의 내용이 민담이나 야사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역사의 진실인 것처럼 언급되기도 하는데, 후손들이 은근히 들이미는 경우가 많다.

역사를 거스르는 행장의 예는 굉장히 많은데, 대표적인 예가 조선 태조태종 때의 인물 김덕생이다.

태조시기 정안군 이방원은 이화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표범을 만나게 된다. 이 때 낭장 송거신이 표범을 자기 쪽으로 유도하고, 김덕생은 그 표범을 쏘아죽인다.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이방원은 둘에게 을 선물했고, 태조도 말을 선물한다. 조선왕조 실록 태조4년기사 이후 김덕생은 빨리 죽었다. 하지만 송거신의 추천으로 좌명공신에도 오르고[4], 동지중추원사에 추대되고, 딸만 있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사위도 관직에 오르고세종 18년 기사, 그 조카의 아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노비와 땅을 하사한다.세종 24년 기사 이런 공훈 기사는 단종성종 대에도 나온다. 왕(이 될 사람)을 구해서 대박을 친 전형적 사례이다.

문제는 행장이다. 숙종 때 김덕생의 후손인 김중태가 전 호조참판 송징은을 찾아가서 받은 행장 내용은 전혀 다르다.
 어느 날 태종이 가마를 타고 후원으로 행차를 했다. 그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호랑이는 거침없이 태종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김덕생이 번개처럼 뛰어나와 활을 쏘았다. 호랑이는 즉사했다. 김덕생 덕분에 태종은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감히 임금님을 향해 화살을 날린 것이 가당하냐"는 비난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김덕생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김덕생은 변명보다 실력을 보여주었다. 호랑이 그림을 그려 놓고 활로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임금님이 위태롭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이런 노력도 헛되어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목이 잘린 시신이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대역죄인 김덕생은 정식으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임시로 한양 근처에 묻혔다.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갔다. 억울한 한을 품은 김덕생은 귀신이 되어 세종대왕 앞에 나타났다.
 "소신은 김덕생으로 황천에서 원한을 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부디 제 해골을 고향에 묻게 해주시고 자손에게 벼슬을 내려 이 원한을 풀게 해주십시오."
 세종대왕은 김덕생에게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종2품)라는 벼슬을 내려주고, 김덕생의 시신도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그 후에 김덕생의 귀신이 "내가 묻힌 곳에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어서 괴롭다"고 하소연해서, 근처에서 경작과 방목을 금하게 하고 대신 논밭 60결을 내려주었다.
매경 프리미엄 기사 중 발췌

그리고 이 행장을 근거로, 정조 때가 되면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김덕생이 억울하다"는 식의 이야기였고, 주요 내용은 행장이었다. 위 링크 기사에서는 이를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기 어려워서"라고 평가하고 있지만[5], 실질적으로는 행장을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했던 이들이 전 호조참판과 같이 정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인물과 손을 잡을 경우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이 행장의 내용은 19세기 이유원이 쓴 민담집 <임하필기>에도 거의 그대로 등장한다. 흔히 야사집이라고 전해지는 민담집의 내용이 알고보면 진짜로 민간에서 전해지는 민간의 여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그나마 간혹가다 보면 사소한 잘못 정도는 기록해두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의 행장에 어린시절의 악동스러운 면모[6]가 기록되어 있다.

3. 行狀

교도소에서 복역수를 평가할 때 매기는 성적이기도 하다.

4. 行狀

여행증명서로 조선 시대왜관 등을 거치는 일본인들이 보유했다.

5. 行裝

여행갈 때 싸는 짐을 말한다.

6. 行長

은행의 수장.[7] 일반 기업의 사장과 같다. 지점의 수장인 지점장부장 대우이다.

일본어로는 頭取(とうどり)라고 한다. 한자와 나오키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표현이다.

여담으로 일본어 독음은 유키나가인데,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라는 전국시대 다이묘의 이름과 같다.

6.1. 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를 당시 조선에서는 '행장'으로 불렀다. 조선왕조실록 및 당시 여러 사료에서는 小西行長이나 平行長, 아니면 그냥 行長이나 豊臣行長등으로 기록되어있다.


[1] 庾信玄孫新羅執事郞長淸 作行錄十卷 行於世[2] 그나마도 졸기도 당대 사상이나 붕당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가령 최명길의 졸기는 마지막은 그래도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 이라는 극찬으로 마무리 짓지만 그 앞에는 온갖 욕이 나오는데 이는 그가 대표적인 주화론자에 당대로는 좋은 의미로도 파격적이었지만 나쁜 의미로도 파격적인 시각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야 최명길이 견지했던 시각들이 호평을 받으니 오늘날과의 시각과 최명길의 졸기간에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3] 행장을 따르면 역사적으로 큰죄를 지은 원균과 김경징은 억울하게 죽은 명장들이 된다. 당장 원균옹호론도 엄연히 난중일기를 실록에도 기록된 원균을 악행을 정치적 모함으로 치부하며, 그 근거로 칠전량 패전 이후 원균 후손들이 기록한 행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원균의 친한 지인들조차 원균을 악행은 사실이라고 기록했다..[4] 좌명공신은 2차 왕자의 난을 정벌한 이들을 올린 공신작호이다. 송거신과 김덕생은 왕자의 난과는 전혀 상관없이, 표범 쏴 죽였던 일로 이 공신에 추가된다. 처음에는 송거신만 올랐는데, 뒤에 송거신이 "김덕생이 일찍 죽어서 못 올랐다"고 세종대왕에게 언급해서 김덕생도 같이 오른다. 이렇게 된 것은, 송거신의 사촌누이와 김덕생이 결혼한 인척관계이기 때문이다.[5] 글을 쓴 사람이 초록불로 더 유명한 이문영이다.[6] 참외밭 주인에게 참외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말을 몰아 참외밭을 죄다 짓밟어버리거나 앞 잘 안보이는 친구 꾀어 그 집 밭을 서리했다(...)[7]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한국은행 등 국제적 규모나 국가적 규모의 은행의 수장은 총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