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칠곡군 왜관읍
경상북도 칠곡군의 군청소재지. 어원은 아래 2번 항목에서 설명하는 왜관(倭館)으로 해안가뿐 아니라 내륙지역에도 설치된 왜관이 여럿 있으나 지명이 현재까지 남은 곳은 이 곳밖에 없다. 원래 왜관은 약목면 관호리에 있었으나 1905년 일본이 경부선 철도를 부설할 때 관호리보다는 낙동강변의 넓은 지대가 더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곳에 왜관역을 설치했고 현재까지도 칠곡의 중심지로 남아있다. 칠곡군의 어원이 되는 칠곡읍은 1981년 7월 대구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대구 사람들은 보통 구 칠곡읍 지역을 칠곡으로 부르고 칠곡군은 왜관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자세한 사항은 왜관읍 문서 참조.
2. 조선시대 일본인이 통상하던 곳
倭館. 조선시대에 일본인이 건너와서 통상하던 곳을 말하며, 그 곳에 설치된 행정 기관과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을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요새로 치면 상공회의소와 대사관을 합쳐 놓은 개념이다.[1] 여러 지역에 있었으나 폐지하고 옮기기를 반복하다 조선 후기에는 현재의 부산광역시에만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부산왜관이 가장 유명하다.고려 말기에 왜구가 날뛰자 정부는 유화책으로 내이포[2]와 염포[3], 부산포[4] 근처의 항구를 개항해 일본인들이 왕래하고 무역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또한 왜관을 두어 행정 사무 등을 처리하게 하였다. 삼포왜란 이후에는 내이포에만 왜관을 두었으나 1541년에 쓰시마인들이 분란을 일으키자 내이포의 일본인을 추방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단절되었다가 에도 막부와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왜관은 다시 나타난다. 1601년 절영도[5]에 임시로, 1607년 두모포[6]에 1만평 규모의 왜관을 만들었는데 술집과 일본식 주택이 지어졌다. 건설을 추진한 이들은 주로 쓰시마 번주였다. 그러나 당시에 이 부근이 교통이 불편하고, 1만평 규모였던 두모포왜관이 너무 좁다는 불만이 많아 1678년 초량에 10만평 규모로 왜관을 신설했다. 다만 이 지역은 현재의 일본국 영사관이 위치한 동구 초량동이 아니라, 중구 광복동에 위치하였다.[7] 그리고 본래 두모포왜관이 있던 자리는 고관(古館)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초량역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관입구라는 지명이 있다.
새로운 초량동 왜관은 고관(古館)에 대비해 신왜관(新倭館)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후 개화기까지 200년 가량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을 전담하는 국제 창구가 되었다. 왜관 주변엔 돌담을 쌓고 거류민들의 주택과 시장, 창고, 관청 등에 용두산에는 일본인의 종교시설인 신사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의학을 배우러 온 일본인, 한국어를 배우려 온 유학생도 있었다. 쓰시마 번에서 세운 '초량관어학소'에서는 조선인과 원활한 소통이 되도록 춘향전, 임진록 등 문학을 교재로 사상과 풍습까지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 서관을 나눴는데 동관에는 왜관에 상주하면서 외교와 무역을 담당하는 쓰시마 사람들이 지냈고 왜관의 우두머리인 관수가 사는 관수가, 무역을 하는 개시대청, 가옥과 각종 상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서관에는 일본 본토에서 온 사절들이 이용하는 시설이 있었다.
조선 초기(1494년) 왜관의 규모는 부산포 왜관에 일본인 450명, 내이포 왜관에 2,500명, 염포 왜관에 150명 가량 사는 수준이었다. 한양에도 조선을 방문한 다이묘나 상인이 머물 수 있는 시설이 있었는데 상설은 아니었고 동평관(東平館)이란 이름이었다. 현재의 충무로에 위치했는데 광해군 때 폐지되어 부산포 왜관이 일본 외교를 전담하게 된다.
왜관에는 허가를 받지 않은 조선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으며, 일본인과 교역을 할 때도 왜관을 감독하는 조선인 관료가 보는 앞에서 해야 했으며 그렇지 않고 몰래 하는 경우 밀무역으로 간주되어 엄단되었다. 일본인 역시 허가를 받지 않으면 왜관 바깥으로 나올 수 없었으나 필요한 것이 있거나 조선 측에 무언가를 강력히 요구할 때에는 집단으로 왜관을 뛰쳐나오기도 했는데, 이러한 행위를 난출(闌出)이라 했다. 이 밖에 밀무역이 금지되는 만큼 조선인 여성과 일본인 남성의 성관계나 매춘 등도 엄격히 금지되었다[8].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범죄가 저질러지거나 정해진 규정을 어긴 일이 벌어지거나 한 경우 조선인은 조선 조정에서 처벌했고 일본인은 즉시 대마도로 돌려보내 대마도주가 처단하도록 했으나, 도주가 실제로 죄인을 처벌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일본에서 조선 도자기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9] 왜관에는 일본 수출용 그릇 공장도 운영되었는데 훗날 부산요(釜山窯)라고 이름지었다. 일종의 OEM 방식. 조선 측이 재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조선 기술자를 차출해주면 왜관에서 기술자에게 연봉을 지급하고 일본에서 좋아할만한 디자인으로 그릇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부산박물관에 당시 대마도에서 부산요로 보냈던 주문서가 전시돼있는데 디자인, 치수, 문양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조선이 재료 무상 공급을 거부하고 일본 현지의 자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1717년에 폐쇄됐다.
1727년 쓰시마에 일본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 芳洲)가 한국어를 배우는 기관을 세웠는데, 우수한 학생은 왜관으로 보내 공부시켰다. 위는 아메노모리 호슈의 초상화인데 이 사람은 중화사상에 빠져서 툭하면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했다. 옷차림만 봐도 일본인의 복식이 아니다.[10]
조선 말기에 가면 교역량이 감소한다. 양국 모두 차츰 강한 쇄국정책을 펼치게 되기도 했고, 18세기에 들어서 중국 비단을 수입하던 일본이 자체적으로 비단을 만들 수 있게 되고, 인삼도 조선 인삼의 일부 종자를 반출해 일본에서 재배가 가능해지면서 주요 교역품의 수요가 줄어든 탓도 있다. 그 후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에게 수교를 하고 싶다는 서신을 조선에 여러번 보낸 적이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여러가지 문제를 대며 여러차례 거절하였고 이에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대두되자 일본 정부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초량왜관 지역은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과 함께 초량왜관이 포함된 지역을 근대법적인 일본전관거류지(concession)로 설정하고 그 안에 거류지역소, 영사관, 경찰서, 상업회의소, 금융기관, 병원 등을 설치했다. 개항 이후 일본만 들어온 것은 아니고 한때는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기도 했다.[11] 시대가 바뀌었지만 국제적 창구 역할은 계속됐던 셈이다.
[1] 일본에서 비슷한 기능을 가진 시설로 데지마가 있었다. 조선이 아닌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위한 곳으로 거주 외국인 역시 네덜란드인이었다.[2] 현 창원시 진해구. 제포라고 불리기도 한다.[3] 현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4] 현 부산광역시 동구. 당시에는 동래도호부 부산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지금은 동래가 부산의 하위 지명으로 전락했지만, 일제강점기 전까지는 동래가 부산의 상위 지명이었다.[5] 현 부산광역시 영도구[6] 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부근[7] 본래 초량이라는 지명은 중구, 서구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었는데 나중에 의미가 확장되어 현재의 초량동은 조선 후기에 신초량으로 불리며 의미가 확장되었다. 초량왜관이 있던 곳은 구초량에 속하는 중구 일대이다. 그러다 1867년 부임한 동래부사 정현덕이 같은 고을에 초량이 둘 있다고 구초량을 다른 지명으로 바꾸어 신초량이 그냥 초량이 되었다.[8] 그러나 왜관에는 일본인 여성의 거주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매춘이 벌어지지 않기는 어려웠다[9]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도공을 많이 납치해가기도 했다.[10] 단, 와카슈도에 있어선 일본인의 시각을 공유하였다. 자세한 건 이 항목 참조. 공은 그 지극한 즐거움을 모르시오?[11] 화교 밀집지역을 거쳐 지금의 부산역 앞 차이나타운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