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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우익 내셔널리즘의 부흥 |
일본의 거대정당 자민당은 태생이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 형태인지라 파벌이 매우 다양해서, 과거에는 요시다 시게루,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미키 다케오, 스즈키 젠코, 오부치 게이조 같이 나름대로 온건한 인물도 총리로 재직했고, 심지어는 고노 담화의 그 고노 요헤이나 재일 한국-조선인의 인권을 신경 쓴 아베 신타로[3]와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1990년대 온건 성향의 보수본류 계열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당을 차리고[4] 2000년대 이후부터는 강경우익~극우 성향의 보수방류 계열이 자민당을 장악해 방류 출신 총리들이 쏟아지면서 우경화 기조가 고조되었다.[5]
특히 일본의 보수 성향 언론인 요미우리 신문은 2012년 8월에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 발언과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이 일본 내에 반한 감정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이때부터 이에 반발한 아베 신조 당시 자민당 총재, 민주당의 마쓰바라 진 등의 일본 정치인들은 2012년말 고노 담화 수정론 및 폐지론을 제기했으며# 또한 2013년 2월 일본은 시마네현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처음으로 중앙정부 인사를 파견했고, 이어 중·고교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기하기로 발표하고 2014년 교과서부터는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일단은 자민당의 당 강령에는 극우 성향의 내용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민당이 대놓고 극우 성향을 표방했으면 세계평화를 기치로 내건 공명당과의 연립정부 구성 자체가 불가능했다. 다만 아베 신조 총리 취임 이후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6]
민주주의는 공것이 없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이라는 사람이 미국 3대 대통령인데, 그 사람이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와 땀을 먹고 산다." 이런 말을 했어요. 땀도 내가 붙인 거 같네요. 피라고 했어요. 여러분들한테 질문 공세를 받고 나니까, 좀 머릿속에 흐릿해진 거 같아요. 아무튼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증명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광주에서, 전국 도처에서 그랬습니다. 나도 사형언도를 받아가지고 집행 직전에 살았습니다. 감옥살이도 한 6년 했습니다. 망명, 연금생활도 10년 이상 했습니다. 이건 자랑도 아닙니다. 얼마나 이 많은 분들이 이 광주에서 또 목숨을 바쳤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한국 민주주의는 뿌리가 튼튼한 겁니다. 이제는 어떤 군부의 사람도, 어떤 독재자도 한국서 민주주의를 안 하고는 못 배깁니다. 다시 군사 쿠데타 하는 것은 꿈도 못 꿉니다. 우리는 3번 독재자를 극복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우리는 결국 민주주의 반석에 올랐습니다. 최근에 일본을 보면 일본이 급격히 우경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민주주의를 안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전후에 군국주의를 하다가, 갑자기 항복을 하고 나서 맥아더가 들어와서 민주주의를 하라고 하니까 민주주의를 한 겁니다. 그래서 일본은 민주주의의 주체세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군국주의 시대의 세력이 다시 부활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보면 그런 군국주의 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고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군국주의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런 거는 말도 안 먹힙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범죄를 한 것을 국민한테 교육을 안 시켰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지금 5, 60대 이하의 사람들은 과거를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선반도를 점령해가지고 조선 사람들을 도와줬다. 중국에서 남경대학살을 했던 것은 다 거짓말이다. 우리는 대동아 전쟁을 해가지고 아시아 사람들을 서구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줬다." 지금만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가 더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하고도 중국하고도 동남아시아 나라들하고도 갈등을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민주주의가 공것이 없다" 는 것을 일본을 볼 때 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우즈베키스탄 학생이 그 질문하는 심정을 이해하고, 참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데 우즈베키스탄도 민주주의 하는 것은 결국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의 권위를 유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4.19혁명, 학생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국민이 전부 합세했습니다. 또 우리가 그 87년 민주항쟁 때도, 처음에는 학생, 정치인들이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국민 전체가 참여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국회가 보는 눈도 달라져서 독재자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이박사, 이승만 전 대통령 보고 하야해라. 전두환한테 계엄령 선포 못 한다." 이렇게 해서 압력이 가해진 것입니다. 결국 시작은 우리가 해야 하고 희생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국민이 전부 참여하고 세계가 우리를 도와주게 됩니다. 우즈베키스탄도 그럴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모든 나라가 그럴 것입니다. 또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고 봅니다.
경제가 발전되면 중산층이 생깁니다. 중산층이 생기면 중산층은 자유를 요구하고 참정을 요구합니다. 투표권을 요구하고 또 피선거권을 요구하게 됩니다. 안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하고 나서 중산층이 생겼습니다. 중산층들이 그런 요구를 하니까 영국 귀족들이 선선히 내줬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평화혁명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귀족들이 말을 안 듣다가 대혁명이 일어나서 전부 몰살당했습니다. 이거는 어디서든지 같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공것이 없다는 것.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국민이 동조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면 민주주의는 성공한다는 것. 그렇게 해서 이룩한 민주주의는 결코 흔들림 없이 뿌리를 박을 수 있다는 것. 그러지 않고 외세나 우연에 의해서 민주주의를 하면, 그런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별강연 中 (2006년)
그렇기 때문에 한국 민주주의는 뿌리가 튼튼한 겁니다. 이제는 어떤 군부의 사람도, 어떤 독재자도 한국서 민주주의를 안 하고는 못 배깁니다. 다시 군사 쿠데타 하는 것은 꿈도 못 꿉니다. 우리는 3번 독재자를 극복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우리는 결국 민주주의 반석에 올랐습니다. 최근에 일본을 보면 일본이 급격히 우경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민주주의를 안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전후에 군국주의를 하다가, 갑자기 항복을 하고 나서 맥아더가 들어와서 민주주의를 하라고 하니까 민주주의를 한 겁니다. 그래서 일본은 민주주의의 주체세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군국주의 시대의 세력이 다시 부활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보면 그런 군국주의 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고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군국주의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런 거는 말도 안 먹힙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범죄를 한 것을 국민한테 교육을 안 시켰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지금 5, 60대 이하의 사람들은 과거를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선반도를 점령해가지고 조선 사람들을 도와줬다. 중국에서 남경대학살을 했던 것은 다 거짓말이다. 우리는 대동아 전쟁을 해가지고 아시아 사람들을 서구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줬다." 지금만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가 더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하고도 중국하고도 동남아시아 나라들하고도 갈등을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민주주의가 공것이 없다" 는 것을 일본을 볼 때 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우즈베키스탄 학생이 그 질문하는 심정을 이해하고, 참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데 우즈베키스탄도 민주주의 하는 것은 결국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의 권위를 유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4.19혁명, 학생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국민이 전부 합세했습니다. 또 우리가 그 87년 민주항쟁 때도, 처음에는 학생, 정치인들이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국민 전체가 참여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국회가 보는 눈도 달라져서 독재자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이박사, 이승만 전 대통령 보고 하야해라. 전두환한테 계엄령 선포 못 한다." 이렇게 해서 압력이 가해진 것입니다. 결국 시작은 우리가 해야 하고 희생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국민이 전부 참여하고 세계가 우리를 도와주게 됩니다. 우즈베키스탄도 그럴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모든 나라가 그럴 것입니다. 또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고 봅니다.
경제가 발전되면 중산층이 생깁니다. 중산층이 생기면 중산층은 자유를 요구하고 참정을 요구합니다. 투표권을 요구하고 또 피선거권을 요구하게 됩니다. 안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하고 나서 중산층이 생겼습니다. 중산층들이 그런 요구를 하니까 영국 귀족들이 선선히 내줬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평화혁명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귀족들이 말을 안 듣다가 대혁명이 일어나서 전부 몰살당했습니다. 이거는 어디서든지 같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공것이 없다는 것.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국민이 동조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면 민주주의는 성공한다는 것. 그렇게 해서 이룩한 민주주의는 결코 흔들림 없이 뿌리를 박을 수 있다는 것. 그러지 않고 외세나 우연에 의해서 민주주의를 하면, 그런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별강연 中 (200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6년 10월 11일 전남대학교에서 ‘한반도의 현실과 4대국’이라는 강연회에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일군 한국과 달리 일본은 민주주의를 외세에 의해 받아들였고 이에 대한 주체세력이 없기 때문에 군국주의가 부활할 것이라며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예견한 적이 있다.[7]
2. 일본의 우익단체
자세한 내용은 우요쿠단타이 문서 참고하십시오.3. 일본의 재무장과 집단적 자위권
(14/08/21 뉴스데스크) 日 방위비, 50조 원 돌파 '사상 최대'…무력 증가 잰걸음 |
일본의 우익들은 집단적 자위권으로 대표되는 군사력 증강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고 특히 넷 우익들의 경우 20세기 중반 미국과 싸웠던 황군의 기치를 되찾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추축국의 재무장과 그로 인한 비극을 이미 인류는 한번 크게 겪었기 때문에 외국, 특히 일본에 당한 적이 있는 중국과 한국은 이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다만 인도, 호주, 동남아시아는 중국과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기에 과거 일본과의 역사적 마찰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크게 지지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상황이 난처한데 미국 오바마 정권이 제창한 '아시아 재균형 정책(Pivot to Asia)'의 일환으로 일본을 '미국의 아시아 대리인'으로 내세워 군사력 증강을 공공연히 지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간접적 고리가 엮여있는 한국은 상위 동맹인 미국의 뜻을 거스르며 일본의 재무장 및 군사력 증강에 대해 태클걸기 곤란한 상황이다. 또한 현재 정권을 잡은 우파 진영의 경우 과거 좌파 정부에 비해 대일 스탠스가 비교적 유연하며 대북, 대중 문제에 대해 일정 부분 대일 협력을 지향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중국과 같이 앞장서서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2015년 9월 19일, 일본은 타국에 자위대 파병이 가능하게 되었다.
4. 일본 극우사관, 우익 정치이론, 그리고 역사왜곡
2014년 8월 아사히 신문이 일본군 위안부 관련 과거 기사 가운데 16건을 오보로 인정하고 취소한 일은 일본 우익들이 전방위적으로 발호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파 성향의 언론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산케이 신문, 요미우리 신문 등은 잇따라 '아사히 신문=매국의 DNA'[8]와 같은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공격했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해 정치인들도 여기에 가세했다.아사히는 단지 요시다 세이지란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한 기사를 취소했을 뿐인데 이들은 내친김에 위안부 강제 동원 자체를 부정하고 나섰다. 주변국 반발과 여론 악화를 의식해 위안부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河野) 담화를 부정하지는 못하면서도 '고노 담화를 계승하되 검증한다'는 기괴한 논리로 흠집냈다. 위안부를 '군사적 성노예'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권고한 유엔 인권위원회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철회를 공식 촉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움직임에 미국 의회조사국(CRS)은 '아베 정권이 역사를 들쑤시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민간 차원의 우경화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2010년대부터(더 이르게 잡으면 만화 혐한류이래) 일본 출판가에 ‘혐한(嫌韓)’ 서적 바람이 분 것은 물론 온라인 중심으로 이뤄졌던 혐한 활동도 오프라인으로 확대됐다. 2009년 7,000명이었던 혐한단체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9]회원은 지난해 15,000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활동도 점점 과격해져 전직 아사히 신문 기자에 대한 테러 협박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잔학성을 담은 할리우드 영화 <언브로큰> 관계자(안젤리나 졸리를 비롯한)의 입국을 막기까지 했다. 이에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 대학교 석좌교수는 "요즘 일본은 1930년대 일본을 떠올리게 한다"고 꼬집었다.[10]
일본 우익들은 메이지 유신부터 일제 패망 직전의 역사를 황금기라고 부르며 그리워하지만, 정작 일본 경제, 정치, 국방, 외교가 안정되고 중산층이 가장 많이 늘어난 풍요로웠던 시기는 일본 제국 시대가 아닌 전후 고도 성장기였던 1960~1990년대이다. 이 시기는 일본이 식민지가 없고 영토도 축소되었으며 군대도 없음에도 한때나마 미국 경제까지 위협했으며, 오늘날의 일본을 만든 토대가 되었다.[11] 그리고 이 시기의 일본은 정치와 언론 모두 극우가 아니라 친미, 친한 성향의 중도우파가 주도하였다.[12] 당시 집권당이었던 일본 자유민주당도 지방자치 레벨에서는 사회당, 공산당과도 협력하면서 복지를 대폭 강화할 정도로 유연했으며 전반적으로 중도파들이 당을 이끌었다.[13]
4.1. 혐한
자세한 내용은 혐한/일본 문서 참고하십시오.4.1.1. 혐한 데모 주도
재특회는 동경 시내에서 우익 성향의 데모를 벌이고 있으나 조회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니코니코 동화에서 5만 명 정도의 조회수가 전부이다. 대부분 정치적 열정이 있고 시간이 남아도는 넷 우익들이 클릭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재특회의 일부 회원들이 신오쿠보에서 해프닝에 가까운 방식으로 반한 데모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것이 점점 규모가 불어난 것. 이때까지도 일본의 미디어들은 "관심을 주면 오히려 키워주는 격"이라며 보도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한국 언론들이 이를 기사화하고 연일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소식이 역수입되어 일본 언론의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이쯤 되자 일본의 우익 단체들이 이런 식의 증오 범죄에 가까운 데모를 어떻게 좀 해야겠다 싶었는지 우파에서 생각하는 탈원전 데모[14]를 주도하는 단체들과 몇몇 젊은 우익단체들을 중심으로 재특회에 대한 지속적인 비난을 하고 있다. 이윽고 신오쿠보에서 반혐오집회라는 맞불집회가 열리기 시작하고 시위 현장에서 극우 단체들과 반혐오시위자들이 충돌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시위에는 일본의 재무장과 반미자주 및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통일전선의용군 멤버들, 1970년대 일본 신우익 운동의 거두였고 신우익 전국조직 중 가장 막강한 조직력을 발휘한 일수회의 창립자이자 유명한 평화주의 우익 칼럼니스트 스즈키 쿠니오도 참가했다. 쉽게 말해 정통 우익들이 들고 일어난 것.
사실 한국에는 일본의 폭력적인 극우 단체만 집중적으로 조명된 탓에 일본의 우익들이 얼마나 방대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검은색 밴을 끌고 다니면서 방송을 하는 단체들은 사실 야쿠자와 연계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고 일수회를 비롯한 단체들은 일본의 민족주의와 자주국방 노선을 지지하는 평범한 열도의 우익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일본 우익도 인종차별이나 민족 차별은 자신들의 강령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들의 민족적, 문화적 순수성을 지키고자 할 뿐이다.
일본 우익들이 단순히 한국에 대해 호의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후지TV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그 이유도 가관인 게 그저 후지TV가 한국 드라마를 많이 방영한다거나 K-POP, 한류를 많이 띄워주는 방송사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자매회사인 산케이신문은 우익 신문이다.
최근에는 "양이(攘夷·오랑캐를 몰아내자)"라는 반서방주의까지도 시위를 벌였다.
4.1.2. 한국 진보 세력 및 정치사회에 대한 경계와 적대
일본 우익 대부분은 특히 '한국 내의 진보 세력 즉 민주화운동에 기여해왔던 운동권 인사들을 주로 경계와 적대 그리고 암적인 세력이자 일본과 일본인들을 언제든 해칠 수 있을지 모를 위협적이고 악랄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한국 내에서 반일(反日), 혐일(嫌日)을 조장하며 반일, 혐일감정을 증폭시키는데 기여함.
- 일본에 우호적인 한국의 보수세력 등 우호적인 인사들에게 적대관계와 척살 대상으로 여김.
- 한국 내 민주화운동, 촛불집회, 노동운동, 정치사회운동, 진보적 세력 증강 등을 통해서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상.
- 일제강점기 과거사 및 일본군 만행 문제를 들추며 반일감정 및 혐일정서를 퍼뜨리는데 기여함.
- 1965년 한일간 협상 내용을 부정하는데 기여.
- 일본을 적으로 여기는 것으로 보이고 친일 청산 등을 외침.
특히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일본 우익들 사이에서는 참여정부의 진보 성향에 발맞춰서[15] 이들이 그토록 경계하는 한국의 진보 세력이 증강을 하게되고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시마네 현이 독도의 날 제정을 계기로 대일 독트린 발표 등 대일 강경책을 펼치면서 일본 우익들 사이에서도 이 때를 계기로 한국의 진보 세력들을 반일 세력으로 여기며 경계하게 되었다.
2008년에 출범한 한국 보수 성향의 이명박 정부의 경우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직접 방문과 당시 아키히토 덴노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 발언을 계기로 한일관계가 크게 악화되어서 일본 우익들의 앙금과 분노도 높아졌으며 2013년에 출범한 박근혜 정부도 처음에는 일본과 거리두기를 하였다가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 등을 통해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지만 2016년 10월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한국 내에서 일어난 촛불집회로 2017년 3월에 탄핵되고 그 해 5월 진보 성향인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강제징용 판결로 일본 우익들의 경계와 분노, 그리고 한국에 대한 적대감은 커지게 되었다. 보수 성향인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도 이들은 예외없이 한국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었으며 그와는 반대인 진보 성향인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는 문재인 정부의 일본에 대한 강경책과 거리두기 그리고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관계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 등으로 더욱 한국에 대한 적대감이 상승하였다.[16]
4.2. 징병제 도입 주장
대표적으로 미우라 루리라는 국제정치학자가 징병제를 주장한다. 징병제를 해야 민족 의식과 연대 의식이 생겨난다고 주장하고 있다.일본의 징병제는 일본 헌법에 반하고, 일본 내에선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강해 징병제를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함부로 주장하지 못하였으나, 미우라 루리같은 사람이 꾸준히 매체에 나와 주장하면서 이제는 일본의 대표 오피니언들도 하나둘씩 징병제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치권에서 징병제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전쟁에 대한 반감과 징병제를 하게 되면 당장 젊은 세대들이 대거 군대에 가야 하기 때문에 표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만이 아무리 한국을 싫어해도 한국의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을 한국판 훙중추(韓版洪仲丘) 사건이라고 보도하고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도리어 공감대가 생긴 사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영 설득력 없는 시나리오는 아닌 셈. 카미카제 항목에도 알 수 있듯이 군대는 싸움을 위해 존재하지만 사람이 죽기 싫은 건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이 더 미쳐갈수록 우리 쪽으로 공감대를 통해 설득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이묘들과 화족들은 군대에 안 가기 때문. 실제로 전쟁 직후 세대들, 즉 천황 폐하를 외치던 세대들이 정치인으로 집권한 버블 경제 시기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이렇게까지 개차반이지는 않았다. 또 독일이 2번 전쟁을 일으키고 드디어 청산을 완벽히 했듯이 일본이 피를 덜 흘렸기도 하고 말이다. 언젠가는 한 판 붙을 가능성이 있으나 싸우면서 친해진다고, 싸우고 나서는 오히려 더 관계가 나아질 확률이 높다.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가 일본에도 징병제를 도입해서 국민들의 썩어빠진 정신상태를 뜯어고치자고 했다가 40살 이하의 일본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 탓에 이시하라 신타로의 지지율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17]
4.3. 반미 성향 및 일본정치인들의 미군철수 발언
자민당 내각이 미일공조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일본 극우 내에서도 소수 성향에 불과하나 일본이 우경화되고, 역사 미화가 진행될수록 점차 늘어나고 있다. 반미 성향의 일본 극우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대표적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도쿄 대공습에 대한 역사적 반감과 현재 미국이 일본의 정계를 주무르는 현실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연합군 최고사령부 점령기에 대한 역사적 반감과 왜 항상 국제사회가 일본을 비롯한 추축국에만 전쟁 책임을 묻고 자신들의 제국주의 행보에 대해서는 쉬쉬하느냐가 그들의 논리이다.일본 정치인들 중에선 마루야마 호다카#, 아오야마 시게하루, 쿠로카와 아츠히코[18]가 주장했다.
일본에서도 주일미군에 대한 철수 논의가 오가기도 했는데 주일미군이 일본경제에 부담을 주며 과거 소련의 위협 때문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필요가 없기에 떠냐야 된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이다.[19]
이들 중에서는 외교적으로는 나쁠지언정 사상적으로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국수주의나 전체주의에 대해 호감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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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1월 21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 : (오키나와의 주요 정당들과 시민 단체들이 미군 기지 반환이 신속히 이뤄지지 않는다며 반발, 거부함에 따라 6개월 늦게 기노완 시에서 7백명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된 오키나와 반환 25주년 기념식에서) :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집중을 완화하는 한편 오키나와를 자유 무역 지대로 전환시키겠다. 오키나와가 아태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막대한 기여를 했으므로 전국이 부담을 나누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21]
1998년 12월 22일 노나카 히로무 일본 관방 장관 : "미국은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 감축 협정에 따라 오키나와의 군사 훈련장 한 곳을 반환했다. 이날 반환된 나하 훈련장은 4백80㏊와 7천9백㏊의 수역으로 96년 체결된 양국간 협정에 따라 미군이 일본에 반환키로 한 11개 시설 중 첫번째 것이다. 미국은 이 협정에서 미군이 오키나와에서 사용하고 있는 부지의 20%를 돌려주기로 합의했다. 이번 반환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을 줄이려는 노력이 진전을 보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내 미군 시설의 재편과 감축을 게속 추진할 것이다." 2) 전에는 소련의 침략 위협을 막아 주는 기능을 했지만, 이제는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8년 6월 17일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 : (미국의 외교 정책 전문지 Foreign Affairs 7∼8월호에 실린 <일본에 미군 부대가 필요한 것인가>에서) : "2000년까지 3만7천명의 주일미군을 철수시키고 일본과 미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새로운 동맹 관계를 맺어야 한다. 냉전 종식 후 옛 소련의 위협이 사라지고 일본이 충분히 자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만큼 주일미군의 필요성은 사라졌다. 이제 미군이 일본을 떠날 때다. 1995년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미군 주둔에 대한 일본의 연간 부담이 50억 달러로 늘어나 최근 침체를 겪고 있는 일본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0년에 만료되는 이 합의를 경신하지 말고 미군을 떠나도록 해야 한다." 3) 적어도 미 해병대의 규모는 줄이고 싶어한다.
1997년 2월 24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회담을 갖고) : "중장기적인 국제 정세의 변화를 고려하면서 양국의 안보상의 요청을 충족할 수 있는 군사 체제와 방위 정책에 관해 긴밀히 협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차 한반도 등 주변 정세의 안정을 전제로 미 해병대의 규모 감축 문제를 협의하자.” 4) 주일미군이 떠날 때를 대비해 중국의 강대국화를 핑계로 핵 잠수함을 만들고 싶어한다.
1996년 말 일본 방위연구소(<안보 환경의 장기 예측과 일본 방위의 존재 양식>이라는 연구 보고서에서) : "한반도의 통일이 실현되면 미국이 기존의 동아시아 전략을 변경할 것인 만큼 주일미군의 주둔도 크게 변할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중국의 강대국화가 필연적이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이 유지되는 한 중국이 패권적인 행동을 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에 대한 일본의 억지력 확보를 위해서는 원자력 잠수함의 건조가 필요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5) 최대한 주인 노릇을 하며 자존심을 지키고자 한다. 일본은 주일미군에 대한 지원금을 "배려 예산"이라고 부른다. 주일미군의 편의 제공 차원에서 주인으로서 "배려"한다는 뜻이다. 또한 주일미군을 "집 지키는 개"로 비유하기도 한다.
1997년 10월 4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홋카이도 오타루시의 강연회에서) : "(일본은 주일 미군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파수견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돈을 내고 미군을 주둔시켜 파수견으로 쓰는 격이며 그것이 현명하다."
틈만 있으면 주일미군 지원 예산을 깎고자 한다. 1997년 8월 3일 일본 정부(<도쿄신문> 2일치 보도) : "주일미군 주둔 경비 가운데 일본 부담분을 내년 예산에서 삭감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미군쪽과 협의에 들어갔다. 재정 구조 집중 개혁 기간인 98년부터 3년 동안 전체 방위비를 마이너스 편성한다는 내각의 결정에 따라 주일미군 주둔 경비 세출도 삭감하기로 했으며, 삭감 폭과 대상 항목을 미군쪽과 협의 중이다. 일본 정부가 주일미군에 대한 편의 제공 차원에서 지난 78년부터 도입된 '배려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삭감 대상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주일미군의 숙사와 가족 주택, 복리·후생 시설 건설에 할당된 제공 시설 정비비를 억제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주일미군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려 예산은 1996년의 경우 2천7백 27억 엔이었으며 제공 시설 정비비는 9백53억 엔이었다." 7) 일반 국민은 물론 유명한 고위급 정치인들이 주일미군에 대해 공공연한 반대 운동을 벌인다.아시아 주둔 미군과 미군기지 되찾기 운동
5. 일본의 우익 정치가와 학자
- 고이즈미 준이치로[22]
- 고이소 구니아키
- 기시 노부스케
- 타카다 마코토
- 도조 히데키
- 무츠 무네미츠
- 시게미츠 마모루
- 사이고 다카모리
- 스기타 미오
- 이시하라 신타로
- 아베 신조[23]
- 아베 노부유키
- 이토 히로부미[24]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오카와 슈메이
- 요시다 쇼인
- 히라누마 기이치로
- 히로타 고키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우 오히려 당대 기준에선 좌파로 분류된 지식인이었으며 일본 자유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 엄밀한 의미의 우익은 아니다. 다만 19세기 당시 정치사회적으로 경직된 상태라 외국을 상대로 쇄국 정책을 펼친 한국(당시에는 조선)과 중국(당시에는 청나라)에 대한 멸시 및 우월의식이 담겨 있는 발언을 한 사례 때문에 (당시 기준이 아닌)현대 일본 우익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준 인물이다.
5.1. 사실관계 왜곡 및 과거사 비틀기
자세한 내용은 램지어 교수 위안부 망언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6. 극우 사상에 동조하는 기업들
이런 일본 우경화의 범위는 재계 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기업이라는 조직이 으레 그렇듯 최종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이익이지만 일본의 심각한 우경화가 계속될 경우 기업들도 그에 발맞춰 우경화 행보를 걸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도 몇몇 기업들이 이런 행보를 보이고 있다.여기서 더 나아가서는 아예 사장이나 기업 자체가 극우 성향을 띄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DHC이다.[25]
7. 일본의 넷 우익
8. 일본의 반우익(反右翼)
당연하게도 모든 일본인들이 이런 우익 사상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며 일본 내에서도 반우익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또한 넷 우익, 혐한초딩은 일본 내에서도 반우익들한테 비판받는다. 때문에 재일 혐오 시위 vs 혐오 반대 시위, 우익 시위 vs 반우익 시위, 혐한 시위 vs 인종차별반대 시위 등이 지속적인 충돌을 빚는다. #특히 2020년대에 들어 자민당 내 온건파(보수본류)인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집권한 이후로는 일본의 우경화가 이전에 비해 많이 옅여졌으며, 아베 신조 피살 사건 이후로는 자민당도 이전에 비해 제법 온건화되었다. 물론 아직도 일본의 우익 세력들이 구설수에 오를 만한 태도를 종종 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과거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행태는 일절 보이지 않고 있다.
안티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안티파 계열 단체가 처음 진출한 아시아 국가도 일본이다. 일본 내에서 우익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굉장히 크다.[26]
그러나 젊은 사람은 많지 않고[27] 상당수가 나이가 꽤 있는 사람들이다. 일본의 노년층들 중 80대 이상의 초고령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맞던 비참한 현실과 끔찍한 참상, 일본 정부의 비이성적인 만행과 패색이 짙음에도 끝까지 저항을 부르짖으며 강행된 옥쇄 명령, 그리고 핵 공격과 전후 철저한 몰락을 직접 경험하고 눈앞에서 목도한 사람들이라서, 70대 이하의 다소 어린 나이의 노인이나 중장년층들은 완전히 풍비박산난 일본 땅에서 태어나 부모 세대로부터 나라를 이렇게 만든 전쟁의 참상을 직접 들었고 전공투와 안보투쟁 등으로 대변되는, 자민당을 포함한 우익 인사들에 대한 반대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는 현실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그 아래 세대들보다도 훨씬 진보적인 성향이다. 반면 40 ~ 50대들은 자민당의 우세가 공고해지고 거품경제가 절정으로 치달은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고, 그 와중에서 일본의 우경화가 공고해지는 속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우익 성향에 종종 빠진다. 실제로 넷 우익 계열 사이트의 평균연령대를 조사해 보면 태반이 40 ~ 50대이다.
하지만 젊은 진보주의자들이 일본에서 씨가 마른 건 아니다.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으로 인해 아베 신조와 자민당에서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아베 수상에 대한 대대적인 퇴진 시위가 벌어졌다.[28]
젊은이들은 대한민국과의 문화 교류가 이전보다 증가한 관계로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반한, 혐한 성향이 그리 크지 않으며, 오히려 혐한은 장년층들 사이에서 더 심한 편이다. 당장 극우 성향의 네임드 혐한 인사인 스즈키 노부유키나 타카다 마코토도 젊은 사람이라고 보기엔 나이가 제법 있는 이들로, 7,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들이며, 정치권에서 극우 정당을 이끄는 이들도 대부분은 중장년층 이상인 경우가 대다수다.[29] 또한 과거 전공투 등을 지지하던 좌파 성향 인사들은 한국의 우파들이 자민당을 포함한 일본 내 우익 인사들과 교류나 친분이 깊은 것을 지적하는 경우도 많다.
8.1. 일본 내 우경화 반대 인사
- 일본 황실[30]
- 나루히토: 아키히토 상황과 미치코 상황후의 큰아들이자, 현재 일본의 천황.
- 미치코 황후
- 아키히토: 前 일본의 천황. 일평생 야스쿠니 신사에 발도 안 들인 것은 물론이고, 해외 순방 도중 (일본군에 의한)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추도비에 꼭 인사를 했으며[31] 이 사람은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은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얼마나 뻘짓을 했으며, 동시에 얼마나 미친 짓을 많이 했는지, 그리고 일본이 어떻게 연합군의 공격에 멸망했는지, 그리고 일본이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되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다. 1945년 당시 아키히토는 초등학생이었던 자신의 시야보다도 더 수준낮은 작전을 짜고서는 좋다고 박수치고 설명하는 수많은 똥별들에게 "그냥 병력을 소모하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니오? 카미카제 외에는 다른 수가 없는 것입니까?"라고 팩폭을 날린 적이 있었던 만큼 편협한 시야에 매몰되지 않았고, 전후부터 쭉 일본의 우경화에 단호히 반대한다. 또한 현 아베 신조의 '덴노 헤이카 반자이'가 허울일 뿐, 실제로는 천황을 앞세워 자기 정권의 장기화만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우경화에 반대하는 것도 있다.
후미히토: 극우를 반대하는지의 여부가 애매해서 취소선을 친 채로 기술한다. 일단 그가 극우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것과는 별개로 본인은 극우에 대해 지지하는 언행을 보인 적이 없으며, 되려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 또한 2013년에 도쿄에서 개최된 도쿄국제도서전에서 박경리 작가가 쓴 토지의 일본어 번역판을 집어서 읽거나, 조선통신사의 행렬도를 구경하는 모습이 포착되어서 그 동안의 극우적 행보가 연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친한, 친중 성향을 보이는 일본인 중 일부[32]
-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 중 대다수.[33]
-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미국으로 이주한 일본계 미국인들[34]
- 나가이 고: 이 사람은 우익 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성 자체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반인륜적, 반민주주의적 사상을 가진 자들을 서슴없이 비판한다. 그의 대표작인 데빌맨이나 인기작 중 하나인 파렴치 학원이 대표적이다.
- 나카타 죠지: 본인 트위터에서 자민당이 추구하려는 개헌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였다. 해당 트윗은 카도와키 마이가 리트윗 하였다.
- 노나카 히로무: 자민당 소속의 정치인으로, 당의 특성 상 보기 드문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이자, 좌파 성향 정치인이었다.[35] 대한민국을 포함한 여러 전범 피해국들에게 지속적인 사과와 화해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고, 그래서 2018년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극우에 대해 격하게 반대하였다. 이는 그 자신이 일본 사회의 전통적인 피차별계층인 부라쿠민 출신[36]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가뜩이나 극우들에게 차별받는 계층의 사람이 우익에게 동조해봤자 차별만 더 심하게 받을 뿐이라서 그렇다[37].
- 리테라(언론사): 다른 언론사들이 친 아베, 친 우익적 성향을 보일 때 이 언론사는 진짜 대범하게도 아베와 우익을 향해 촌철살인으로 날카롭게 비판을 하며, 한국을 옹호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같은 극좌 언론사인 일간 겐다이와는 계정을 팔로우 하고 있다.
- 마루야마 마사오: 정치학자이다. 어느 정도 동양에 대해 까는 경향이 있었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서, 군국주의가 일본을 망쳤다면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신랄하게 비판하고, 일본 내 극우들을 씹어댄 사람이다.
- 마치야마 토모히로 : 영화평론가이자, 아버지가 한국인인 하프 코리안이다. 위안부 망언을 한 사다모토 요시유키와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조롱하는 우익들, 재일한국인들에 대한 편견을 불러일으킬수 있는 헛소리를 내뱉은 미우라 류레이등에게 강도높은 비판을 하는걸로 유명하다. 애초에 이 인물은 일본 극우들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기 때문에[38], 넷 우익들에게 인신공격을 자주 당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다만 이 사람은 우경화에 반대하는 사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혐한은 아니지만 반한에 가까운 성향이라서,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사람이다.
-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사회당 소속의 전(前) 일본 총리. 자민당과의 연정을 통해서 집권한 1995년 8월 15일 일본의 전쟁범죄와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 무라야마 담화는 비단 무라야마 한명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내각회의의 의결을 거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로 그 이후 현재까지 취임한 모든 일본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는 공식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무라야마 도이치의 이 진솔한 사과로 한때 한일관계에 상당한 훈풍이 불었다. 무라야마는 총리 퇴임 이후에도 현재까지 일본 사회의 우경화 경향을 계속 비판하면서, 진솔한 사과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의 한 세대를 풍미한 작가로 대접받는 소설가. 이 사람은 비단 극우뿐만 아니라, 전체주의에 근거해서 악행을 벌이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쉽게 말하면, 떼로 몰려다니면서 나쁜 짓하는 걸 싫어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하루키가 싫어하는 '나쁜 짓'에 지금의 일본 정부의 행보도 포함되어 있다.[39] 한 가지 사례로, 일본의 극우 단체인 마르코폴로의 후원 하에 몽골 여행을 간 바 있었는데[40], 거기서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몽골 연합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을 기리는 승전비를 보고서 '일본 정부는 할힌골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거짓말하면서도 이걸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르면서 작은 사건인양 축소하고 있다'고 비웃는 발언을 해서 이 여행을 후원해준 마르코폴로 측과 극우들의 뒤통수를 쳐 대노하게 만든 바 있다. 또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자국의 전쟁범죄에 대해서 피해를 입은 나라들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는 발언을 해서 극우들의 암살 협박을 받기도 했었다.
- 미야자키 하야오: 한국에서 바람이분다 때문에 극우 논란이 일어난 것과는 정반대로 극우를 가열차게 깐다. 동시에 반전주의 성향도 있어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천공의 성 라퓨타 등에서 이러한 자신의 성향이 강렬하게 반영되어 있다.
- 미와 아키히로: 일본의 오카마 방송인. 어렸을 적에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해 집안이 파산한 전적이 있어서[41], 전쟁을 혐오했고 우익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때문에 대놓고 "아베 신조와 자민당을 지지하는 것들은 직접 전쟁터로 나가라."라고 비꼬는 발언까지 했다.
- 미즈시마 세이지: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좌파주의, 반전주의 성향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다. 밑의 리스트에 나와있는 작품들 중의 다수 (UN-GO, 콘크리트 레볼루티오 초인환상)을 제작하였으며, 강철의 연금술사 이나 건담 OO 등에서도 전쟁의 허무함과 평화에 대한 갈망, 다른 자들에 대한 이해에 대한 메시지가 다수 삽입되어 있다. 일본 넷우익 계열 오덕들이 대단히 싫어하는 인물이며, 특히 UN-GO를 제작할 당시에는 테러 협박까지 당할 정도였다.
- 미즈키 시게루: 게게게의 키타로의 원작자. 일본군에 징집되었을 당시의 경험들을 만화로 그렸으며, 그의 원작을 계승한 게게게의 키타로 6기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고발이 잘 드러난다.
- 사잔 올 스타즈: 일본의 국민 록 밴드.[42]
- 사카모토 류이치: 일본 뮤지션들 중에서도 특히나 좌파 성향이 두드러지는 사람이라서, 아베 신조가 2015년에 평화 헌법 개정을 시도하자, "일본의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자."[43]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다. 2017년 6월 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이 여권이 없이 왕래가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한다."고 피력했다. 사카모토 류이치 "한국과 일본, 작은 EU처럼 됐으면."
- 사토 켄지: '일본은 우경화로 인해 속국이 될 것이다.' 라는 책을 쓴 작가로서 우익 비판적 성향 및 아시아 유화주의로 유명한 성향의 인물이다.[44]
- 쓰루넨 마루테이: 핀란드 출신이지만, 귀화했으니 여기서 언급한다. 일본이 좋아서 일본으로 귀화까지 한 전형적인 일빠이지만, 일본의 우경화까지는 찬동하지 않아서 극우들을 대차게 씹은 바 있다.[45]
- 야마모토 타로: 2008년 일본의 한 방송에서 독도를 한국에게 돌려줘야 한다고까지 주장한 배우.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 반핵 운동가로 활동했으며 2013년 참의원에 당선되어 현재 일본 생활의 당 대표가 되었다. 정치에 입문한 뒤 줄기차게 전쟁 반대와 일본 안보법 반대를 외치고 있다.# 다만 강한 친중주의자로 분류하는 의견도 있어 만일 중국이 똑같은 행보를 보인다 해도 똑같이 쓴소리를 할 지는 미지수다. 그의 자국의 우경화 반대가 그의 친중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는 지적이 같은 자국 내 반(反)극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46] 하지만 현재 레이와 신센구미의 당수로 진보세력 내에서 진정성 있는 행보로 큰 신뢰도를 얻고 있고, 우경화 세력에 대항해 정치대형을 바꾸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야마모토 하지메: NHK 스페셜 다큐 태평양 전쟁의 총제작지휘를 맡은 진행자. 태평양 전쟁을 비롯해서 일본군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더 나아가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크게 경계했다. ##
- 야스히코 요시카즈: 무지개빛 트로츠키, 하늘의 혈맥, 왕도의 개 등의 역사 만화로 유명한 만화가이다. 범아시아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이 과거 한국, 중국 등에 저지른 잘못들을 적극 사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47] 그가 자국 내 극우들을 열렬히 반대하고 자국의 부끄러운 흑역사를 사정없이 까발리는 것은 이와도 관련이 깊다.
- 오시이 마모루: 견랑전설이나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2을 보면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공각기동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이 사람은 너무 반대로 가서 전공투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 오에 겐자부로: 극우를 가열차게 깔 뿐만 아니라, 일본 공화주의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여서 천황 제도 자체를 까기도 한다. 오죽하면 그가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때도 스웨덴 국왕이 시상식장에 나와서 상을 수여한다는 사실에 불쾌해 하면서, "나는 스웨덴 국민들이 주는 상을 받는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 와타나베 신이치로: 잔향의 테러의 감독
- 우에무라 타카시: 아사히 신문의 기자 출신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대적으로 알리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과 명예회복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이가와 요시키: 한국사 및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의 여러 밈이나 슬랭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유명한 인터넷 유명인이다. 비록 2023년에 탈당하긴 했으나 한때 일본공산당의 당원이기도 했던 만큼[48], 철저하게 친한 극좌 성향을 유지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아베 신조 피살 사건에 대해서도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기고 자국의 전쟁 범죄를 부인한 죄인으로서 단죄받아야할 아베 신조가 극우들의 순교자로서 죽었다며 분노한 바 있다.
- 이온그룹: 아시아 최대 유통 전문업체로, 일본의 편의점 브랜드인 미니스톱의 운영사 맞다. 전 오너 가문인 오카다 가문[49]이 친한 좌파 성향을 띄는 것의 영향으로 인해, 기업 전체가 자민당의 부패상과 자국의 우경화를 비판하는 활동에 적극적이다[50]. 아래의 주니치신문과 함께 일본 내 반우익 단체들 중에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곳이다[51].
- 이와이 슌지: 영화 러브레터의 감독으로 알려진 그 사람 맞다. 트위터를 통해 센가쿠 열도 문제에 대해서 일본의 우익과 일본 정부를 깐적이 있다.#
- 일간 겐다이: 상술한 극좌 친한파 언론사인 리테라와는 계정을 팔로우한 사이이며, 다른 언론사들이 친 우익 성향을 보일 때 이 언론사 또한 대범하게도 우익과 혐한을 팩트폭력으로 비판하고 있다.
- 주니치신문: 일본공산당 및 입헌민주당, 일본사회당 등의 진보정당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대표적인 좌파 언론사이며, 일본 황실을 제외하면 일본 내의 반우익 성향의 개인이나 단체 중에서는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52].
- 츠쿠다 타카야: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은 다시 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까지 한 인물.
- 카리야 테츠: 만화 맛의 달인의 스토리 작가[53]인 그 사람이다. 자신이 스토리를 담당한 만화 일본인과 천황에서 일본인 입장에서만 아니라 한국인 입장에서도 가히 충공깽스러울 수준으로 천황제와 일본 극우를 무자비하게 물어뜯는다.[54] 비록 카리야 테츠는 현재 호주에 살고 있지만, 아직 일본 국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설명한다.
- 카도와키 마이: 나카타 죠지가 올린 아베 내각이 주장하는 개헌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글을 리트윗 하였다.
- 코야마 리키야: 평화 헌법 옹호 세력인 9조 모임의 회원이다.
- 콘도 요시후미: 애니메이터로, 일본공산당의 당원이었다.
- 쿠로야나기 테츠코: 인기 방송인 겸 평화운동가다. 어린 시절에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느낀 고통스러운 기억때문에 지금도 자국의 우경화는 동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열렬히 반대한다. 그녀가 쓴 수필인 창가의 토토에 이런 평화주의적인 생각이 그대로 담겨있다.
- 타카하타 이사오: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 이쪽은 아예 일본공산당의 열성 지지자로[55], 위의 콘도 요시후미와 함께 난징 대학살의 참상을 폭로하는 작품을 기획했다가, 천안문 사태로 인해 그만둔 전적도 있었다.
-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민주당 소속의 전(前) 일본 총리. 우리나라의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여 유관순 열사가 복역하던 방에 헌화하고는 추모비에 참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국이 한국을 식민지배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도게자까지 했다.[56][57][58][59]
- 후지타 사유리[60]: 한국에 거주하는 방송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서, 일본인으로서 자국의 전쟁 범죄에 대해 사죄한다는 말을 하거나,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에 거액의 돈을 기부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이런 자신에 대해 재일이라며 디스하는 넷 우익들에게 "그게 뭐 어때서?"라는 뉘앙스로 역으로 일침을 날렸다[61].
- 히라마츠 타다시: 주술회전으로 유명한 애니메이터다. 특이하게도 본래는 혐한 극우 성향이었던 인물인데, 2019년에 자민당의 주도로 수도 민영화가 추진된 것과 더불어, 위에서 언급된 사토 겐지의 글을 감명깊게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좌파 성향으로 전향하고 혐한 성향도 버렸다. 같은 해에 있었던 한일 무역 분쟁 당시에는 아베 신조를 위시한 일본 정부가 먼저 원인 제공을 했다고 비판하기도 하고, 심지어 해당 분쟁과 관련하여 한국에서 일어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옹호하거나, '다케시마를 무력을 써서라도 한국으로부터 되찾아오자'는 망언을 한 마루야마 호다카 의원을 비난하는 등, 명백한 반우익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 히로이 오지: 레드 엔터테인먼트 회장이자 게임 디렉터. 그의 대표작인 사쿠라 대전 시리즈부터가 반군국주의 성향이 강하며, "일본은 과거사를 반성하고 우경화를 경계해야 한다. 사쿠라 대전은 철저한 반전(反戦)게임이다." 라고 인터뷰하여 철저한 반군국주의 노선임을 밝혔다. 아쉬운 점은 사쿠라 대전의 배경이 한국에겐 민감한 1920년대인 데다가 반군국주의 메시지가 가장 강력한 사쿠라 대전 2가 한국에 정발되지 않아서 어필되기 어려웠다.[62]
8.2. 우익 비판적 메세지를 담은 작품
- 도라에몽: 일단 작가인 후지코 F. 후지오부터가 반전성향을 강력하게 띠는 인물이며, 작중 일본제국주의나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극장판 양철의 미궁 편에서는 대놓고 욱일기를 풍자하는 연출이 나왔고, '코끼리와 아저씨' 편에서는 주인공인 도라에몽과 노진구가 전쟁에서 어차피 일본 제국이 패배할 거라며 일본군 장교한테 팩트폭력을 날리다가 죽을 뻔한 장면도 있다.[63]
- 공각기동대 STAND ALONE COMPLEX: 작품 내의 일본 정부가 헌법 9조를 무력화하려 시도하고 국외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작품 자체는 이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참고로 1기는 정치적 요소보다는 철학적, 사회적 요소에 더 집중한 반면 위에서도 언급된 오시이 마모루가 각본에 참가한 2기는 대놓고 일본의 재무장과 우경화, 군국주의화를 다루는 등 정치적 발언의 수위가 훨씬 높다.
- 동쪽의 에덴: 내용도 내용이지만, 바로 위 작품의 20년 전이 배경이다.
- 린의 날개 애니판
- 맛의 달인
- 맨발의 겐: 군국주의를 비판한 만화이다.
- 메탈슬러그 시리즈: 모덴군부터가 독일 국방군을 본떠 만든 존재이고, 특히 메탈슬러그 3에서는 일본군 패잔병 잔당을 적으로 등장시키기도 하였다. 추축국 세력을 동시에 희화화시키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여 비판하는 작품.[64]
- 무지갯빛 트로츠키
-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1부 최종보스 시시오 마코토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도 자신들이 옳기 때문에 이긴 게 아니다, 무엇이 옳은 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신중한 입장을 취하던 켄신이었지만 시시오의 전체주의적인 약육강식 사상에 대해서는 확실히 틀린 거라며 단호히 부정한다. 그리고 같은 컷에서 나레이션을 빌려 얼마 후 일본 정부가 약육강식의 사상을 부국강병이라는 미명 하에 추진했다며 직접적으로 비판하기까지 했다.
- 사쿠라 대전 시리즈: 상단에 언급된 히로이 오지의 작품. 일본 제국 시절을 미화하냐는 의혹과는 상반되게, 오히려 제국주의를 사정없이 비판한다. 2편의 주제도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반전이며, 최종 보스는 아예 초강경한 극우 군인이다.
- 왕도의 개
- 일본인과 천황: 위의 맛의 달인을 만든 카리야 테츠가 만든 만화다. 맛의 달인 자체는 요리에 대한 만화라서 우익에 대한 비판은 지나가는 얘기 수준으로 나오는데 반해, 이 만화는 대놓고 우익을 씹는 작품이다. 만화의 주제도 일본의 군주제를 노골적으로 비판한 것과 천황의 존재를 악용하여 자기들의 억지 주장을 정당화한 극우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하는 것이다[65]. 때문에 이 만화의 작가인 카리야 테츠는 우익들에게 살해 협박까지 받았으며, 때문에 호주로 이민을 간 뒤에는 귀국을 거부하고, 자료 조사 때나 1,2년 정도 머무르다가 호주로 되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하는 실정이다[66].
- 일본침몰: 아예 원작자인 코마츠 사쿄부터가 과거 일본공산당의 당원으로서 활동한 이력이 있는 좌익 중의 좌익이며, 그가 쓴 일본침몰의 내용 중에는 "이것은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한 인과응보다!"라는 대사까지 포함되어 있다.
- 잔향의 테러: 이쪽은 우익만 까는게 아니라 아베 신조 정권까지 까는 등 엄청 강도 높고 노골적이게 비판을 가하며 패전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제에 발버둥 친다거나 헌법 개정 등 일본이 국가적으로 저지르는 만행들도 깐다.
- 조커 게임 - 과거 일제시대 군인들을 비꼬거나 풍자하는 스토리를 가지고있다. 그외에도 상당히 강도높은 비판이 많다.
- 제독의 결단: 코에이에서[67] 내놓은 태평양 전쟁기의 일본군 해군이 전쟁을 수행하던 것을 고증하는 게임인데, 문제는 게임 자체가 극우들을 게거품물고 쓰러지게 만드는 요소들을 엄청나게 포함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거나,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68] 및 이 와중에 등장하는 일본군 육군의 병신짓이 잘 고증되어있는 등, 당시의 일본군과 이들을 옹호하는 극우들을 한큐에 까는 작품이다.
- 지금, 거기에 있는 나: 지금, 거기에 있는 나정부와 권력세력에 의하여 철저하게 세계의 인권과 생존권을 유린하는 전개가 도드라지도록 나오는데, 이 모습은 전체적인 주제의식으로 나타나 더 나아가서는 충격적인 참상을 보여주며, 교훈적인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독재, 전체주의, 제국주의, 인권유린, 소년병, 카미카제, 위안부 등의 소재가 적나라하게 나오는데, 일본 제국시절이라고 말을 안했을 뿐이지 뭔가 찔리는 극우세력에 의하여 많은 욕을 먹은 작품이기도 하다.
- 최종병기 그녀: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옥쇄를 다짐하겠다는 부사관에게 조용히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돌아가라는 치세의 대사만 봐도 드러난다. 우익 뿐만 아니라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 콘크리트 레볼루티오 초인환상
PSYCHO-PASS- 작품 내 악으로 묘사되는 '시빌라 시스템'의 정체가 마치 현재 일본 정부와 비슷하게 풍자되어 묘사된다. 다만 직접적인 우익 언급은 거의 없어 애매하다.- UN-GO - 이 작품은 천황까지 부정할 정도로 일본에 대해 상당히 노골적인 디스를 한 작품이다.
애니메이션들을 보면 Production I.G와 본즈사의 작품이 많다. 이는 제작사들 성향이 우익과 거리가 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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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현대 기준 일본에서 Ethnic nationalism이 아닌 단순 Nationalism을 지칭할 때에는 '민족주의'(民族主義)라는 용어보다는 '내셔널리즘'(ナショナリズム)이라는 용어가 선호된다. 일본에서 '민족주의'는 전적으로 Ethnic nationalism을 의미하는데, 이는 과거 천황제 파시즘과 결합해 야마토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웠던 극우 민족주의를 연상시키는 데다가, (야마토 민족이 아닌) 류큐인이나 아이누인같은 전통적 일본 내 소수민족까지 배제하기 때문에 현재의 주류 보수우익에서 거리를 두는 편이다. 보수주의/분파 | }}}}}}}}} |
[1] 독일의 경우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패전 직후 나치 정권이 붕괴되었고 이탈리아도 무솔리니의 처형과 함께 파시스트당이 몰락했다. 하지만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본토가 침략당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러한 정황이 소련의 남하를 우선적으로 막으려던 미국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최고위 수뇌부를 제외한 대다수 중간 간부급의 일본군 전범들이 전범재판에서 실형을 면한 채 계속 직책을 유지하였고, 기시 노부스케는 전후 일본의 총리가 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에서는 패전에도 불구하도 전쟁을 지휘한 정치 세력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기득권을 유지한다. 이러한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각종 정치인의 망언 등 수정주의적 시각이 정치권 내 주류로 자리잡았다.[2] 단 아베 신타로는 계파 상 보수방류였지만 정치적 이념은 보수본류와 더 가까웠다. 사토 에이사쿠 역시 비슷했다.[3] 그 아베 신조의 아버지이다.[4] 특히 평화헌법 수호를 중시하는 '비둘기파'들이 많이 빠져나갔다.[5]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외교에서는 강경한 모습을 보였지만 내치에서는 자유주의적인 모습을 보인 무계파 정치인이다.[6] 물론 2022년 현재는 자민당 단독 과반이기에 공명당을 내치고 넣는 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의원내각제 특성 상 장기간 단독 과반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서 멋모르고 내쳤다가는 나중에 내각 구성이 어려워져 차기에는 집권 자체를 못할 수도 있기에 사실상 가능성이 낮다.[7] 독일의 사례에 대입해보면 일본 제국은 1차 세계 대전 당시까지의 독일 제국과, 1947년 이후부터 2차 아베 내각 이전까지의 일본은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독일과 비슷하고 2차 아베 내각 이후의 일본은 조금 극단적인 비유이나 대공황 이후 혼란에 빠져서 나치가 점점 세력을 키워가던 1930년대 초중반의 독일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참고로 우파 정당인 자민당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다 일본 제국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는 일본 사회의 특성상, 일본의 우경화는 일본의 정치 주류가 좌파에서 우파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연합국 점령 이전까지의 체제 및 근대사의 열강 중 하나였던 일본 즉, 일본 제국으로 회귀하는 것에 가깝다.[8] 그나마 언론상에서 우파 인물들이 말할수있는 높은 수위의 욕이다. 한술 더 떠서 넷 우익은 아예 '빨갱히(아카히)'나 '아사삐'같은 원색적인 비하어를 쓴다.[9] 일명 재특회[10]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조지프 나이는 단순한 대학 교수가 아니라 국제정치학계의 세계적인 거물학자로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는 직접 행정부에 참여해서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입안하였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도합 10만 명을 핵심으로 한국과 일본을 미국의 하위 군사동맹국으로 묶어놓고 이 바탕위에서 중국의 해양 진출을 견제하면서 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한다는 나이 이니셔티브는 지금까지도 미국 정부의 기본 정책이다. 원래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정권은 재정적자를 이유로 주한미군 전면 철수, 주일미군 대폭 축소로 방향을 정했으나, 클린턴 집권 이후 조지프 나이는 장래에 미국의 유일한 경쟁자가 될만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재정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동아시아 지역에 반드시 거대한 미군을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1] 식민지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식민지를 확보한 초반이라면 몰라도 후반에는 오히려 식민지를 운영하는데 드는 유지비가 식민지를 통해 얻는 소득보다 한참을 웃돌았으며, 식민지인들의 저항 운동을 진압하거나, 자국의 인재를 식민지에 파견하는 등 식민지 관리하다가 오히려 본국 관리가 소홀해지는 등의 문제로 국가 역량을 약화시켰다. 또한 당시 일본군 군국주의로 미쳐돌아가던 시기였는데 군국주의는 생산활동 없이 소비만 하는 군을 국가 최우선으로 여긴다는 점으로 인해 끊임없이 국가 역량을 소모하며, 이 역량 감소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국민을 전쟁터로 내몰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로 인해 군국주의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부터 1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 쌓았던 근대화의 역량을 전부 날려먹었다. 그리고 미국의 역코스 전쟁과 연이은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으로 날려먹은 국가 역량을 다시 쌓을 수 있었다.[12] 멀리 갈 것도 없이 아베 신조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도 친한파였다. 그리고 헤이세이 오지상인 오부치 게이조 역시 친한파이다.[13] 그러나 당시에는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까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일본군이 얼마나 미쳐돌아갔는지를 국민들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고도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던 시기였기에 잃어버린 20년이 지속되는 지금처럼 국민들의 불만이 쌓일 일이 그닥 없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을 중국과 소련, 북한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인식도 존재했다. 실제로 일본의 우경화가 지속되고 독도 도발이 본격화되던 시기는 잃어버린 10년이 지속되어 잃어버린 20년이 되면서 '이러다 일본이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크게 자리잡던 시기와 일치한다. 거기다 한국이 한강의 기적이라는,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하는 전대미문의 성장을 보여주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GNP의 역전이 일어나고, 삼성이 소니를 잡는 등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일본인들의 불안감은 더욱 가중되면서 우경화가 촉발되었다.[14]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좌파적 환경운동의 노선이 아닌 일본의 공동체주의를 중심으로 한 우익들이 모여서 시작한 반핵 데모.[15] 1998년에 출범한 국민의 정부의 경우 김대중 오부치 선언과 일본 대중문화 개방 등을 통해서 일본에 포용적인 정책을 해왔기에 예외. 다만 2001년에 있었던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 왜곡과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강경대응을 취했다. 이 때문에 일본 문화 개방도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다만 김대중은 노무현과는 다르게 한일관계가 파국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민간차원에서 일어나는 불매운동을 정부차원에서 막아버렸다. 또한 이런 불매운동을 지원해서 지지율을 높이자는 비서실장 박지원의 주장에 즉각 호통을 치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한일관계를 이용할 수는 없소 불매운동을 당장 중단하라'는 일화까지 남겼다. 그 덕분에 한일관계는 극적으로 회복되어 2002 한일월드컵을 일본과 함께 무사히 성공적으로 치르게 된다.[16] 일본 우익의 대부분은 한반도에 6.25 전쟁과 같은 남북간 전면전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17] 46회 중의원 선거 19.86%에서 47회 중의원 선거 4.39%로 폭락[18] 자민당이 미 CIA에게 거액의 지원을 받는 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실은 외교 문서로까지 공개되었지만 일본 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19] 호소카와총리, 주일미군 철수 주장[20] 일본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진영에서 러시아나 중국은 싫지만 그들의 전체주의적인 체제에 대해서 인상적이라고 평가하는 부류들도 있다. 하나같이 권력 중독 새디스트 소시오패스들인것 같다.[21] 아시아 주둔 미군과 미군기지 되찾기 운동[22] 다만 이 사람은 온건 우파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해당 문서로. 그는 취임기 당시에는 한국에서 욕을 엄청 먹었지만 현재는 아베 신조라는 더한 인간이 나오면서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23] 헌법개정과 주변국, 특히 한국과의 갈등을 인위적으로 극대화하여 독도를 분쟁지역화시키고 일본 재무장을 실현시키고자 했다.[24] 혐한은 아니었지만, 한국을 자국의 제국주의 정책의 희생양으로 삼거나, 일본이 우경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다. 극우 군국주의자들에겐 까였을지라도 당대 기준에서도 입헌 리버럴+보수주의 중도우파 성향이었다.[25] 당장 사장부터 극우,혐오발언을 서슴치 않으며 회사 내부 규칙에도 이것이 스며들어있다.[26] 일본의 경우 대체적으로 정치권 등에서 강하게 우경화를 주장하면 언론에서 이성을 되찾자는 식으로 톤을 낮춘다.[27] 애초에 일본 젊은층들은 좌우를 떠나서 아예 정치에 관심이 없다.[28] 옆나라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박근혜 퇴진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마침 아베 신조 퇴진 운동이 벌어진 시기도 박근혜 퇴진 운동이 끝난 직후였다.[29] 한국으로 치면 대충 변희재 이상 연배 정도라고 볼 수 있다.[30] 현재 일본 황실은 일본 정치권의 우경화 행보를 꾸준히 견제하고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 등의 주변국에서 극우 성향으로 알려졌던 후미히토 황자조차도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우려하는 발언을 했다. 후미히토의 경우, 극우주의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31]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아키히토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사과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가 일본 국민들의 어그로를 끌었을 때에 정작 본인은 "그렇게 할 의향이 있다."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은 찌라시에 의한 가짜뉴스로 밝혀졌다. 애초에 천황은 일본 제국 멸망 이후로는 국정에 1도 개입할 수 없어 정치 발언을 할 수 없다.[32] 왜 전부가 아니냐면, 친한파나 친중파인 일본인의 상당수가 연예인을 비롯한 예체능계 인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경화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정치인들, 기업인들, 그리고 소설가, 영화 감독 등의 예술가들이다.[33] 미국 내 히스패닉들이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같은 도널드 트럼프의 강성 쇄국정책을 반대하는 것과 결을 같이한다.[34]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미국의 전 국회의원인 마이크 혼다. 이들은 일본의 우경화와 군국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계라는 이유로 자국에서 차별받기도 했으며, 그 차별적 시선을 무마하기 위해서 일본 제국을 타도한다는 명분 하에 자원 입대했던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오늘 옆의 전우가 쓰러지고 내일은 내가 쓰러질지도 모르는 전쟁의 참혹함과 그에 따른 전쟁의 고통을 몸으로 겪은 세대로 그런 전쟁을 되풀이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현 일본의 재무장과 위안부 문제나 우경화 문제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35] 다만 노나카 히로무가 정계에 몸담던 시절의 자민당은 포괄정당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36] 2000년대 초반에 같은 당 소속 어느 후배 정치인이 대놓고 노나카에게 "부라쿠민 천민 출신을 총리에 세울 수는 없다"라는 망언을 했다가 쌍욕을 먹었는데, 그 사람이 다름아닌 우익 인사 아소 다로. 아소 다로는 요시다 시게루의 외손으로서 정치 명문가 금수저 집안 태생이었다.[37] 같은 이유에서 혐한 인사로 유명했던 부라쿠민 출신 정치인인 하시모토 도루도 현재는 혐한 성향을 거두고, 친한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전과는 다르게 한국의 편을 들어주는 모습을 제법 보여주었다.[38] 정치적으로는 극렬 좌파 성향이다.[39]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1Q84에서 극좌 또한 깐 바 있다. 작중에서 '선구'라는 사이비 종교 단체는 본래 극좌 계열의 자연친화주의적 공동체였다가 종교 법인화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된 것으로 나오며, 그 선구의 자매 단체였던 '여명' 또한 아사마 산장 사건을 모티브로 한 가상의 사건인 '모토스 산장 사건'의 주범으로 등장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눈에는 극과 극은 통하는 것으로 보이는 듯하다.[40]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사람은 누가 공짜로 여행을 보내준다면 흔쾌히 가는 것이고, 여행비를 지원해주는 사람에 대해서 따지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이런 후원자의 의도와 반대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일단 마르코폴로 잡지에는 몽골 여행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실려 있긴 하지만,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를 지켜야하는 일본 사회의 정서 상, 상대가 극우건 뭐건 간에 감사인사 하나 안 하면 되려 욕을 먹는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41] 당시에 집안 전체가 나가사키에서 잠시 떠나있었기에, 가족 중에 사상자나 피폭자가 있었던 건 아니나, 원폭 투하로 인해 집과 재산이 모조리 박살나서, 집안이 완전히 몰락하여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42] 일본에서 국민밴드급의 위상을 지닌 밴드이다. 이 사람들은 친한파의 대명사로 불리는 초난강을 뺨칠 정도로 친한의 끝장을 보여주는 이들이다.[43] 평화 헌법을 개정하려는 자민당의 속내도 문제지만, 평화 헌법의 개정을 위해 자위대에게 폭넓은 권한을 부여하려는 개정안을 통과시킬 때의 과정 또한 옆 동네의 날치기 통과를 쌈싸먹는 문제 투성이었다.[44] 한때는 혐한이었으나 최근에는 아베 반대파로 전향하게 된 애니메이터 히라마츠 타다시가 이 자의 팬이다. 특히, 히라마츠는 이 자의 팬이 되면서부터 한일 경제 전쟁에 대해 일본이 잘못했다며 철저하게 한국을 옹호하고 있으며, 한국과 전쟁을 해서 독도를 빼앗자고 주장한 마루야마 호다카 의원을 디스하기도 하였다.[45] 애초에 이 사람은 좌파 성향이니 극우라면 가루가 되도록 까고도 남을 사람이다. 즉 일본은 좋아하지만, 일본의 정치 성향은 싫어하는 사람이다.[46] 생각해보자. 친중 성향이라서 자국의 군국주의화에 반대하던 사람이다. 물론 그의 친중 성향이 이 정도로 과격하지는 않지만, 분명 자국의 우경화를 뺨치는 시진핑의 독재와 티베트 및 위구르에 대한 박해와 강제적인 동화정책, 그리고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거의 대부분을 자국의 위성국으로 삼으려는 계획인 A2·AD 계획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47] 이 점에서 아시아주의를 주장했던 안중근이나, 쑨원이 그의 작품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반대로 아시아주의를 빙자해서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자국의 침략 야욕을 미화한 도조 히데키 등은 그야말로 음흉한 악당으로 묘사되고 있다. 심지어는 자국 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이토 히로부미나 무츠 무네미츠 같은 사람들도 제국주의자라는 점 때문에 철저한 악인으로 묘사된다.[48] 일본공산당 내에서 벌어진 비민주적인 행태에 분노한 것이 컸다. 동시에 마침 그가 말레이시아 이민을 준비하느라고 어차피 정당 활동이 어렵기도 했다.[49] 2020년에 오카다 모토야 회장이 경영권 세습 중지를 선언하고 퇴임하면서, 공식적으로 오카다 가문이 경영에서 손을 뗐다.[50] 2020년에도 아베 신조가 연루된 가케학원 스캔들이라는 부정부패 사건을 폭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인 신문기자의 제작비를 지원한 바 있다.[51] 공교롭게도 전 오너 가문인 오카다 가문 최후의 경영주인 오카다 모토야의 작은남동생인 타카다 마사야가 주니치신문의 정치부장으로 재직 중이다.[52] 상술한 리테라나 일간 겐다이가 잘해야 군소 언론사 수준에 불과한데 비해, 주니치신문은 대기업이다. 게다가 지역 언론사이면서도 발행부수면에서나 사회적 영향력에서나 진짜 전국지인 산케이 신문을 크게 압도하는 전국지 수준의 거대 언론사이며, 후지 TV 계열사를 포함한 여러 신문사나 방송사에 대대적으로 출자하는 일본 언론계의 큰손인데다, 일본프로야구의 구단 중 하나인 주니치 드래곤즈를 소유하고 있어서 대중적인 인지도도 매우 높다.[53] 흔히 만화가로 알려져 있는데 아니다.[54] 이 사람은 위의 미야자키 하야오나, 사카모토 류이치, 오에 겐자부로급으로 진보 성향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 이렇게나 극우를 노골적으로 씹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55] 다만, 당원은 아니었다.[56] 도게자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서 도게자는 진정으로 사죄의 뜻을 밝힐 때나 하는 것이다.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에서 달군 철판 위의 사죄랍시고 불판 위에서 도게자를 하는 장면이 나온 걸 생각해보자.[57] 영화 이치 더 킬러를 보면 카키하라 마사오가 야쿠자 두목들 앞에서 사죄드린다며 자신의 혀 끝을 잘라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일본인들 사이에서 사죄드린다는 말은 이를 자신의 목숨(=자결)으로 갚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식의 과격한 발언이다. 하토야마 유키오가 얼마나 강경한 성향을 지녔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58] 다만 오해를 피하기 위해 기재하자면 내각총리대신으로 재직중에 한 것은 아니다. 퇴임 후 방한했을 때의 일이다.[59] 사실 극우뿐만 아니라, 일본공산당같은 진보정당들에 심지어 한국의 정치인들도 하토야마 유키오의 도게자에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무라야마 도미이치나, 고노 요헤이같은 한국에 우호적인 정치인들이 한국을 대상으로 진지하게 사과하는 일은 꽤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도있는 사죄를 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60] 한국 내에 거주하는 사람이라서 여기에 등재하는게 맞는지에 대해 이론의 여지는 있을 수 있지만, 일본 국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므로 일단 여기에 서술한다.[61] 참고로 후지타 사유리는 재일 한국인이 아니며, 혈통 상으로나, 국적 상으로나 분명한 일본인이다.[62] 문서로 이동하면 알 수 있지만 사쿠라 대전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을 경우를 가정한 대체역사물이다.[63]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키테레츠 대백과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문제의 그 장면에서 중일전쟁 시기의 중국 다롄으로 시간여행을 하던 강기태와 코로스케 일행에게 관동군 병사들이 냅다 총을 갈겼다.[64] 그러나 3편의 일본군은 난이도가 상당하게 나와서 풍자한 건지 미화한 건지 헷갈린다는 농담에 가까운 반응도 나왔다.[65] 카리야 테츠 본인의 공화주의 성향 때문인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군주제를 만악의 근원 취급하고 있으며, 자국의 우경화에 대해서도 이게 다 천황 때문이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실은, 극우들 뿐만 아니라, 좌파면서도 군주제 자체에 대해서는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으로 보던 일본인들까지 뒤집어지게 만들었다.[66] 카리야 테츠의 호주 이민은 순전히 자녀교육때문이었고, 일본인과 천황은 이민간 뒤에 만든 작품이지만, 호주라는 나라 특유의 진보주의적인 분위기의 영향을 깊게 받은 덕에, 원래부터 있었던 그의 진보적인 성향에 불을 지르게 되었다. 그렇게해서 나온 작품이 바로 일본인과 천황과 맛의 달인이었던 것이다.[67] 삼국지 시리즈로 유명한 코에이 맞다.[68] 플레이어가 뭔가를 하려고 하면 육군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엄청 재수가 좋지 않은 이상 열에 아홉은 '육군은 해군의 제안을 반대한다.'며 플레이어가 뭘 하게 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