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2 20:09:23

나루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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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Imperial_Seal_of_Japan.svg.png 일본국 제126대 천황
[ruby(徳, ruby=なる)][ruby(仁, ruby=ひと)]
나루히토
파일:나루히토 천황.png
출생 1960년 2월 23일 ([age(1960-02-23)]세)
일본국 도쿄도 치요다구 궁내청 병원
재위 2019년 5월 1일 ~ (재위 중)
즉위식
(예정)
2019년 10월 22일 (도쿄 고쿄)
연호 [ruby(令, ruby=れい)][ruby(和, ruby=わ)](레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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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徳, ruby=なる)][ruby(仁, ruby=ひと)](나루히토)
[[칭호#s-3|어칭호]] [ruby(浩宮, ruby=ひろのみや)](히로노미야)
부모 부황 아키히토 상황, 모후 미치코 상황후
형제 2남 1녀 중 장남
후미히토 친왕, 구로다 사야코
배우자 마사코 황후
자녀 1녀 아이코 내친왕
학력 가쿠슈인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박사 수료
신체 165cm
십이지 쥐띠 (경자년) }}}}}}
1. 개요2. 생애3. 기타4. 상훈(賞勳)

1. 개요

일본의 제126대 천황. 125대 천황 아키히토미치코 상황후의 2남 1녀 중 장남이다. 2019년 4월 30일에 아버지 아키히토가 생전 퇴위함으로써, 2019년 5월 1일일본의 차기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일본 역사상 2번째로 고령인 나이에 즉위했다.[1][2] 다만 워낙 평균연령이 옛날보다 상당히 높아지는 시대의 천황이기 때문에 이 59세의 나이가 아주 많다고 볼 수는 없다.[3] 현재 세계의 군주들 중 유일하게 Emperor라고 불리는 군주이다.

즉위 1달 전인 4월 1일 열린 각료회의를 통해 연호를 결정했는데, 나루히토가 사용하게 될 연호레이와(令和)로 결정되었다. 레이와 시대는 2019년 5월 1일 0시 부로 시작되었으며, "행정처에서는 신 연호를 따라가나 일상 생활에서는 구 연호인 헤이세이를 2019년까지는 허용한다"는 일본 정부의 말이 있다. 현재 재위하고 있음에 따라 금상천황(今上天皇), 줄여서 금상(今上)이라 불린다. 그리고 훗날 나루히토가 사망하게 되면 '일세일원제의 원칙'에 따라 '레이와 덴노' 로 불리게 될 것이다.[4]

어린 시절에 받은 칭호는 히로노미야(浩宮).[5] 일본 황실로부터 받은 문양 문장은 가래나무. 아내 마사코 황후와의 사이에 외동딸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내친왕)을 두었다.

2. 생애

1960년 2월 23일 오후 16시 15분, 당시 황태자 부부였던 아키히토 황태자미치코 황태자비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도쿄궁내청 병원에서 태어났다.

본래 일본 황실출산은 궁성 내의 산전(宮中産殿)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통이자 관례였으나, 미치코 황태자비는 이 전통과 관례를 깨고 병원에서 첫 아이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浩宮 徳仁)를 낳았다.

이름은 「명명의식(命名意識の儀)」[6]에서 할아버지 쇼와 덴노에 의해 지어졌다. 이름의 유래는 사서오경 중용 제32장 구절에서 인용해 따왔다.

미치코 황태자비는 1965년 둘째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1969년 셋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도 궁내청 병원에서 낳았다. 그 이후부터 다른 일본 황족들도 역시 병원에서 출산을 했다.

2.1. 유년 시절

파일:갓 태어난 나루히토.jpg
1960년, 나루히토를 낳고 궁내청 병원에서 퇴원하는 미치코 상황후.[7]
귀한 아기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창문을 열었느냐고!!
파일:external/mainichi.jp/0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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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6FE30E3-0A3E-489B-9D7D-55FD45815AA4.jpg

미치붐(ミッチーㆍブーム)[8]이 정점에 달한 시절, 황태자 부부의 혼인 바로 이듬해 태어난 귀하디 귀한 맏아들 나루히토는 엄격한 황실 후계자 교육, 즉 미래의 천황 교육에 순응하며 곧고 예의 바르게 성장하였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과 능숙하게 어울리지 못하며, 자신의 생각을 자유로이 표현하지 못한다는 평도 받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장래 천황이 될 후계자[9]이기 때문에 그는 5살 아래의 남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9살 아래의 여동생 구로다 사야코에 비해 대단히 엄격하게 양육되었다고 한다.

미치코미국인 소아과 의사 벤저민 스포크 박사가 쓴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라는 육아 서적을 영어 원서[10]로 읽으며 자녀교육에 대해 공부했고, 공무 때문에 아이들을 시종에게 맡길 때면 자신이 메모한 육아 지침[11]을 주며 그에 따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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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첫 돌을 맞은 나루히토 천황.

첫 돌 기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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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월에 찍은 가족사진에서. 온 가족에게 둘러싸여 애정과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파일:후미히토와 나루히토.jpg

파일:45AF1919-6FC7-4D47-B6D9-49311EE65D07.jpg

5살 아래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1965년생)과 함께.

파일:3E5428AF-7ED0-4BB7-9DD2-4D5E256A9670.jpg

1967년 4월, 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하는 나루히토. 어머니 미치코 상황후와 함께. 이후 가쿠슈인 중등과(남중)와 고등과(남고)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에 진학한다.

그동안 일본 황실의 관례로는 주로 생물학[12] 등의 자연과학 전공이 대세였으나, 나루히토는 1982년 3월에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고 가쿠슈인 대학 대학원에 높은 성적으로 진학하였다.[13] 이후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머튼 칼리지에 유학하여 템즈 강의 수운사에 대해 연구하였고[14], 1988년 가쿠슈인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파일:9E71696D-4CB3-4DDB-95A7-A063F5809C26.jpg

1980년 2월 23일, 갓 성년(만 20세)을 맞이해 고쿄에서 거행된 성인식(成人式の礼)에 전통예복을 입고 참여하는 당시의 나루히토.

성인식 영상

어느 가는 곳마다 나루히토를 알아보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는 일본과 달리, 영국에서의 나루히토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다른 학생들처럼 평범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편히 지내고,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자유로이 외출하고[15], 손수 청소를 하고 물건을 구입하는 등. 2년간의 영국 유학 이후로, 어릴 적의 막연히 인내심이 깊던 성격에서 보다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게 되고, 일본 내에서만 교육받아 형성되던 닫힌 세계관[16]이 확장되어 세계를 보는 「안목(慧眼)」, 선진적인 새로운 사상과 진보적인 성품을 새로 배워왔다고 한다.

나루히토의 유년시절 영상[17]

2.2. 황태자 시절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나루히토/헤이세이 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나루히토의 황태자 책봉 이후 즉위 이전까지의 행보에 관한 내용이다.

2.3. 즉위 후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나루히토/레이와 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나루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한 이후의 행보에 대한 내용이다.

3. 기타

유년 시절부터 교양 교육의 일환으로 바이올린비올라를 배웠고, 그중 비올라는 가쿠슈인 아마추어 관현악단에서 수석을 했을 정도의 엄청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독주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실내악이나 관현악 연주회에 종종 참가하고 있는데 2004년에 한일 우호 특별 기념음악회에서 한국의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정명훈,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아라이 에이지, 러시아의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함께 모차르트피아노 4중주 제1번을 협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파일:/image/003/2007/01/22/NISI20070122_0003687371_web.jpg

2007년에도 '우정의 다리 만들기'라는 이름의 한중일 합동 실내악 콘서트에 참가해 한국의 정명훈(피아노)과 안동혁(콘트라베이스. 서울시립교향악단 수석), 중국의 자오징(첼로), 일본의 카시모토 다이신(바이올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과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를 협연했다. 위 사진은 2007년 공연 때 촬영된 사진으로 왼쪽에서 4번째 비올리스트가 나루히토 황태자. 가쿠슈인 아마추어 관현악단의 OB 콘서트에서도 정기적으로 참가해 공연하고 있는데 2013년에는 도호쿠 대지진 당시 쓰나미에 휩쓸려 말라 죽은 고목으로 만든 비올라로 연주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위의 결혼식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18] 성우나 아나운서 못지 않은 맑고 시원한 목소리에다가 청산유수처럼 말을 잘한다. 해당 영상에서 잠깐 나왔던 남동생과 여러모로 대비되는 부분. 여담으로 어머니 또한 목소리가 곱기로 유명한 점을 감안하면 모전자전인 듯.

대한민국 정치인 중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와 많이 닮았다.[19] 특히 1993년 나루히토의 결혼식 사진의 경우, 원희룡과 도플갱어 수준(…).

나루히토가 정장 차림으로 시구를 하는 사진이 있는데, 이것은 과거 1988년 제70회 고시엔 기념식 때 기념 시구를 한 사진. 당시 그는 황태자의 신분이 아니라 고작 황태자의 장남이라는 일개 황족인 상태[20]에서 시구식을 했다. 천황 직계 황족이 시구식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일본 내에서 상당히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타자였던 니시 토시히사[21] 선수는 "황족이 던진 공을 칠 경우, 주변으로부터 '불경하다!!'는 비난을 들을까봐 일부러 공을 안 쳤다."고 고시엔 100회 기념 인터뷰에서 발언했다. 실제로 당시 시구식 영상을 보면, 타자인 니시 선수는 의도적으로 몇 박자 늦은 타이밍에 천천히 배트를 휘두른다는 느낌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22]

이후 2018년 100회 야구 고시엔 개회식에도 참석했다. 시구는 하지 않고 기념 연설만 하였다. 이때는 아내 마사코 황태자비와 함께 참석했는데 나루히토 부부가 고시엔에 함께 참석한 것은 이번이 최초이다. 이 해 더위가 대단했던 관계로 대회가 오전 9시부터 시작했는데도 더위가 심해서 나루히토는 선수들과 관객들을 배려해 4분 남짓으로 짧게 연설을 끝냈다. 그런데 나루히토 이후에 연설을 한 인사들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연설을 해서, 일본 현지에선 '황태자 전하께서 선수들을 배려해서 짧게 연설을 하였는데 너희들은 눈치가 없냐'라는 비판이 나왔었다.

초등학생때부터 좋아한 야구[23] 이외에도 테니스[24], 검도를 하거나 등산[25]을 하는 등 몸을 쓰는 데에는 상당한 재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혼 후에도 역시 운동을 좋아하던 마사코 황태자비와 운동하는 장면들을 자주 보여주었다. 2019년 궁내청이 나루히토 59세 생일 기념으로 공개한 영상을 보면, 패럴림픽 시각장애 달리기 메달리스트의 보조를 하면서도 그렇게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이런 것으로 보면, 신체 능력은 나이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별도로 사진촬영도 상당히 좋아하는 편으로, 영국 유학 당시에 시간이 나면 친구들과 테니스를 치거나 아니면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 게 일과였을 정도였다.[26] 결혼 이후 나루히토의 주요 피사체는 자연 풍경 혹은 가족들이라고 한다.

애처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첫눈에 반했던 마사코 황후에게 7년에 걸친 구혼을 했는데, "전력을 다해서 당신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말로 결혼에 골인하게 됐다. 물론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일관되게 지켜왔는데, 2004년 일본 황실에 큰 파문을 낳았던 인격부정 발언이 대표적인 사례다.[27] 나루히토의 애정은 마사코 황후가 기회가 될 때마다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한다는 점을 봐도 분명하다.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할 때 보이는 표정이나 행동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없으면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사실 나루히토의 구혼이 마사코 황후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트렸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원망을 해도 이상하지가 않은데 말이다. 그만큼 나루히토의 애정과 책임감을 마사코 황후가 인정하고 고마워한다는 뜻이다.
어렵게 얻은 귀한 딸 아이코 공주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나루히토의 적극적인 육아 참여는 일본에서도 화제였는데 그는 직접 딸의 기저귀를 갈아줬다. 또 언론 앞에서 황태자가 아기 캐리어를 직접 매고 휴가를 보내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물론 일본 황실 최초였다. 이는 '육아는 여자의 몫'이라는 인식이 강한 일본에서, 그것도 지금보다 더 보수적인 2000년대 초반에서, 무엇보다 아직도 1000년 전을 살고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극보수적인 황실의 남성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적극적인 육아참여 부분이다. 그는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틈만나면 아이코 공주를 어떻게 키울지 고민하는 발언을 했고, 자기 나름의 육아방침을 열심히, 꾸준히, 자주 얘기하였다. 황태자 부부는 아이코 공주가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 부모와 아이가 함께 하는 리듬체조 발달 코스를 들었는데, 마사코 황후가 몸이 아파 참가하기 어려우면, 나루히토가 직접 딸과 함께 와서 참여했다고 한다. 간과하면 안될 게 이 당시 나루히토는 부부가 나누어서 해야 할 수많은 공무를 혼자서 하랴, 자신을 위시로 한 집안 전체에 대한 황실 내외의 음해세력들의 음험하기 짝이 없는 공작을 막아내랴, 몸이 아픈 아내 신경써주랴, 외국어 등 개인 공부를 하랴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딸을 위한 어떻게든 시간을 내 참석할 만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딸에게 쏟아부었다. 아이코 공주가 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마찬가지라 시간이 나면 그는 딸의 등하교길을 함께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아이코 공주의 영상 중에는 해외로 떠나는 나루히토를 배웅하러 나와서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시무룩해하는 모습도 있다. 반대로 해외공무에서 돌아오는 날엔 활짝 웃으면서 설레는 표정으로 기다리는 모습도. 부녀 간의 돈독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 물론 오냐오냐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코 공주가 등교거부를 할 때는 "이제는 학교에 가야해"라며 대화를 통해 어린 딸을 설득했다. 아이코 공주가 거식증으로 고생할 때는 "만든 사람의 성의를 생각하라"며 혼내면서 밥을 먹게 하였다. 이처럼 부모의 깊은 애정이 자칫 잘못하면 과보호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적절한 훈육을 해주었고, 그 결과 이러한 애정에 근거한 훈육 등으로 올바르게 자란 아이코 공주는 명석한 두뇌 외에도 성숙하고 예의바른 성격으로도 주변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것을 잘 볼 수 있는 게 나루히토 천황 내외와 아이코 공주가 다 같이 승합차에 탑승할 때 좌석 배치이다. 보통 황태자인 나루히토가 사람들이 잘 보이고 기자들도 자신의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위치의 앞 좌석이 아니라 사진 찍히기 어려운 맨 뒤 좌석에 앉고, 사람들이 잘 보이고 기자들도 사진 잘 찍을 수 있는 앞 좌석에는 마사코 황후, 아이코 공주을 태운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습관이 일본의 상징인 덴노가 되면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으나 2019년 5월 11일 상황 내외와 첫 식사를 하러 고쿄에 갔을 때도 이런 방식으로 타고 고쿄로 들어와서 앞으로도 이런 식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황사가 된 남동생 후미히토 일가는 후미히토 부부, 마코 공주/카코 공주, 히사히토가 각각 따로 차량을 타고 다니고 있다.


그 외에 역대 천황 중에서도 유일하게 해외에서 2년간 유학 경험이 있기에 영어 실력이 매우 뛰어나서 물에 관련된 국제적인 학회 발표 자리에서도 외국인들과 영어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나 뉴욕에 가서도 무리없이 영어로 연설을 하거나, 네덜란드 순방 시에도 빌럼알렉산더르 국왕과도 무리없이 영어로 대화하였다.[28] 또한,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도 공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특히 스페인어나 프랑스어는 정기적으로 전문가를 불러서 도구고쇼에서 공부한다. 스페인어 교사를 담당하고 있는 한 스페인인[29]의 증언에 의하면, 나루히토 덴노가 스페인어를 배우려고 한 이유는 과거 멕시코에서 관심분야인 물 관련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스페인어를 배울 필요성을 느끼고 궁내청에 요구해서 해당 전문가를 부른 것이라고. 이후 친분이 있는 스페인의 펠리페 6세[30]와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스페인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2019년 기준으로 나루히토가 스페인어를 배운 지 10년 정도 되었으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부 중에 대충하는 일 없이 매사에 진지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31]

1976년고구려 왕들을 주신으로 모시는 코마 신사를 방문하여 참배한 바 있다.

지금은 수정되었으나, 예전에 올라온 사진은 가르마가 아닌 올백머리로 나왔는데, 해당 사진은 2010년 1월 26일 일본 도쿄에 있는 UN 대학[32]에서 찍힌 사진으로 평소에는 가르마를 타고 있다.

영국 유학시절 브룩 실즈를 좋아해서 기숙사 벽에다가 산 사진 옆에다가 브룩 실즈의 사진을 걸어두었을 정도이다. 그걸 잘 아는 유학시절 미국인 친구가, 나루히토가 1985년경 유학을 마치고 바로 귀국하지 않고 방미했을 때 자신의 집에 찾아온 나루히토를 위하여 브룩 실즈와 만나게 해주었다. 그 만남에 나루히토는 상당히 좋아했다. 그 이후인 1990년에 브룩 실즈의 방일시에도 그녀를 초대해서 만나기도 해서, 당시 몇몇 언론들은 "일본 황족 최초로 외국인 며느리가 들어오는 게 아니냐"는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그 대신 지금 부인 마사코와 결혼했지.

원래 술을 좋아하고 의외로 술이 쎈 편[33]이라고 하지만, 결혼을 계기로 술을 끊었다고 한다. 술을 일절 못하는 아내 마사코 황후를 배려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종종 시종 등과 술을 마신 적이 있다는 보도를 봐서는, 술을 완전히 끊은 건 아니고 아내가 있는 자리에서 음주하는 것 자체를 최대한 자제하는 걸로 보인다.

거기에다가 일본 국민들에게 열려진 황실을 꿈꾸는 사람답게 황태자 시절에는 딸 아이코 공주를 아내와 같이 양육하거나 등 뒤에 딸을 업고 아내와 함께 등산을 하거나 해외 공무 도중 외국인과 셀카를 찍어서 그 외국인의 SNS에다가 사진을 올리도록 해주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천황이 된 이후에 바쁜 틈에도 주변 지인들을 통해서 영국 왕실 등 유럽 왕실들처럼 일본 황실도 공식 SNS를 개설해서 평상시 황족들의 생활들 일부를 공개할 지에 대한 질문을 하고 다니면서 상당히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하는 등 여러가지 면에서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4. 상훈(賞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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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126대 덴노로 등극한 2019년 5월 1일의 즉위 첫 행사 당시의 사진이다.
  • 대훈위국화장경식(大勲位菊花章頸飾): 본 사진에서 목에 패용하고 있는 훈장. 일본에서 가장 높은 훈장이며, 상징적 국가원수로서의 권위를 상징한다. 수훈일은 당연히 레이와 원년 5월 1일 덴노로서의 즉위 행사 직전에 열린 일본 내각 각료회의에서 결정되었다.
  •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勲位菊花大綬章): 장경식 다음으로 높은 훈장으로, 적법한 황위계승자임을 상징한다. 황태자가 된 건 1991년이지만, 그보다 빠른 1980년에 수여받았다. '대수'라는 표현대로 원래 어깨에 걸치는 형태지만 본 사진에선 부장을 패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것보다 상급 훈장을 수훈받았기에 부장을 패용하게 된 것이다.
  • 동화대수장(桐花大綬章): 본 사진에서 어깨에 매고 있는 훈장이 바로 이것으로, 수훈일은 레이와 원년 5월 1일 덴노로서의 즉위 행사 직전에 열린 일본 내각 각료회의에서 결정되었다.
  • 문화훈장(文化勲章): 본 사진에선 패용하고 있지 않으나 일본 정부에 의하여 레이와 원년 5월 1일 덴노로서의 즉위 행사 직전에 열린 일본 내각 각료회의에서 수여받는 것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 일본적십자사금색유공장(日本赤十字社金色有功章): 이 또한 어떤 의미에선 황족이라는 이유로 주는 훈장이다. 본 사진에선 패용하고 있지 않다.

이 외에도 오스트리아, 벨기에, 바레인, 덴마크, 독일, 그리스, 헝가리,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말레이시아, 노르웨이, 필리핀, 포르투갈, 카타르, 스웨덴, 스페인, 통가, UAE로부터 받은 훈장이 있다.

[1] 최고령 즉위 천황은 나라 시대에 살았던 61세의 49대 덴노인 코닌 덴노. 3번째 고령 즉위 천황은 아버지 아키히토로, 아키히토는 55세에 즉위했다.[2] 한국의 경우 비슷한 나이대에 즉위했던 국왕으로 강종(고려)이 있다(사실 강종은 만 나이론 나루히토와 동일한 나이로 즉위했다). 더 많은 나이에 즉위한 왕으로 64세(만 63세)에 즉위한 신라지증왕도 있다. 그래도 영국에 현재진행형으로 70세를 넘긴(…)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보다는 빨리 즉위했다.[3] 현재의 60대 초반의 건강상태는 과거 40대 후반과 비슷할 정도이다.[4] 아키히토 또한 '헤이세이 덴노'라고 불리는 것은 사후의 일로, 재위 도중에는 외국에서는 '아키히토'라는 본명으로 부르고, 일본에서는 폐하, 금상천황으로 불렸다. 퇴위 후에도 상황(上皇)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사망 전까지는 본명이나 연호로 부르지 않는다. 생존 중의 아키히토를 헤이세이 덴노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고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5] 덴노와 황태자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개인 이름으로, 친왕의 자녀는 받지 않는다. 궁가명과 비슷한 용도로 쓰이고, 성씨처럼 쓰이기도 한다. 장남은 황태자에 책봉되기 전까지만, 차남 이하와 딸들은 결혼하기 전까지만 사용하기 때문에, 일종의 아명이라고 이해하면 된다.[6] 생후 7일을 맞이해서 이름을 지정해주는 황실 의식이다.[7] 옆에 앉아 있는 심술궂은 표정의 여성은, 당시 동궁(東宮)의 궁녀장(宮女長)이자 시녀였던 마키노 쥰코(牧野純子)이다. 쥰코는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한 마츠다이라 노부코가 손수 추천한 인물이니,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는 뻔한 일이다.[8] 아키히토와 평민 쇼다 미치코의 약혼과 결혼으로 인해 생긴 일본의 사회 현상이다. 평민인 미치코가 황태자와 '테니스 코트에서 자유 연애'에 의해 결혼에 이른 것, 미치코가 가톨릭미션스쿨 출신이었음 등을 언론이 보도해 일본 내에서 큰 화제가 된다. 이를 계기로 당시 아키히토 황태자 부부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흑백)텔레비전이 보급되는 등 제2차 세계 대전일본의 경제, 패션, 매스컴, 미디어 등의 영역에서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더 자세한 것은 미치코 상황후 문서 참고.[9] 아버지 아키히토 황태자가 1순위, 그 뒤를 이어 나루히토 친왕이 2순위[10] 미치코 상황후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영어를 잘 했다.[11] 이 지침은 나루 짱 헌법(ナルちゃん憲法)이라고 불리며 많은 일본 부모들의 공감을 산 베스트셀러(육아 필독서)가 되었다.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12] 나루히토의 할아버지인 쇼와 덴노와 큰고모 히가시쿠니 시게코생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와 남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도 조류(새)를 연구했다. 후미히토 친왕은 조류 외에도 메기를 연구하기도 했다. 또한 여동생 구로다 사야코도, 시집가기 전 조류연구소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13] 나루히토에게 사학과 진학을 권유한 사람은 종조할아버지, 즉 아버지 아키히토 천황의 작은아버지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항목 보면 알겠지만, 다카히토 친왕 본인도 고대 오리엔트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였다.[14] 아키히토 천황의 사촌동생인 토모히토 친왕의 큰딸 아키코 공주도, 가쿠슈인 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유학한 바 있다. 아키코 공주는 미술사를 공부하여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5] 물론 궁내청 소속 경호원들이 몰래 숨어서 따라다니며 경호했겠지만.[16] 기존 일본 황실의 보수적인 관념[17] 황실의 장손(대들보)이자 차기 천황으로서의 인생을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8] 영상의 1분 51초, 3분 51초 부분이 나루히토가 직접 부모에게 올리는 인삿말이다.[19] 원희룡은 1964년생으로, 나루히토보다 4살 젊다.[20] 그로부터 1년 후에 할아버지인 히로히토가 서거하면서 아버지인 아키히토가 천황에 오르고, 아키히토의 장남인 나루히토가 공식적으로 황태자가 되었다.[21] 와세다대학으로 진학하여 일본생명 경유 199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2010년 독립리그를 마지막으로 은퇴. 이승엽과도 한솥밥을 먹은 적 있다.[22] 사실 일반적으로 시구 시에는 보통 타격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거나, 그냥 설렁설렁(?) 배트를 휘둘러 헛스윙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시구자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 자칫하면 시구자가 땅볼이나 라인드라이브 타구에 맞아 다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종범장나라의 시구를 굳이 받아쳐서 하마터면 장나라가 다칠 뻔한 것 가지고 아직도 씹히는 걸 생각하면 쉽다.[23] 나루히토의 동창생의 증언에 의하면, 초등학생 때 학우들을 직접 섭외해서 그 친구들과 같이 야구를 했었다고 한다.[24] 이건 테니스를 좋아하는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 참고로 나루히토 황태자의 경우에는 아버지 아키히토의 타법을 그대로 흉내내서 하지만, 남동생 후미히토는 다른 방법으로 치는 편이다.[25] 대한민국문재인 대통령처럼 등산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학창시절에는 일본 각지 산들을 돌면서 등산했고, 영국 유학 당시 기숙사 벽에다가 산 사진을 걸어두었을 정도로 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편이다. 최근에도 기자들과 웃으면서 등산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 덕분에 키코 비2019년에 뜬금없이 히사히토를 데리고 험준한 산에 올려보낸 이유에 대해, "등산을 좋아하는 나루히토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신빙성 높게 회자될 정도라고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키코 비가 등산객들을 막아버리면서 상당한 불편함을 주었다는 점. 이는 전통적인 황족관을 가진 나루히토의 입장에서는 키코 비의 행동은 황족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걸 증명해주는 것인지라, 더욱 거리를 두게 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데 감히 우리 가문에 기어올라? 실제로 해당 보도에 대해서 궁내청 직원들도 "키코 비가 너무 수세에 몰린 나머지 실수한 것 같다"고 했다.[26] 참고로 영국 유학 당시 현지 특파원들이 자신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한 사진을 찍을 때는 나루히토는 의도적으로 잘 찍힐 수 있도록 자세나 위치를 스스로가 잡아주었기에, 기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네들을 배려해주는 태도에 감동했다는 증언들이 있다.[27] 기자회견에서 "마사코의 커리어나 이에 기초한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라고 폭탄발언을 던져, 아내를 음해하던 궁내청을 견제하려 했다. 이 발언의 파장은 매우 커서 아키히토 당시 천황이 궁내청 장관을 통해 질책을 할 정도였고, 이 발언 이후 황태자 교체론이 심심치 않게 나올 정도였다. 물론 신중하고 현명한 나루히토가 자신의 발언이 빚을 논란을 모르고 했을 리 없다. 자신의 입지를 흔들리게 할 일임을 알면서도, 아내를 지키기 위해선 말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수하고 작심 발언을 던진 것이다.[28] 그의 아버지 아키히토도 영어 실력이 있지만 최근의 해외 순방 영상들을 보면 나이가 들어서인지 예전만큼 유창하지 않은 듯 말을 많이 아끼는 것처럼 보이며, 해외에서 행하는 장문 연설의 경우 그냥 일본어로 한다. 그 외에 히로히토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대화할 때 영어로 했다는 말이 있다.[29] 사실 이 분은 일본 외무성의 스페인어 강사로도 활동 중이라고 한다.[30] 펠리페 6세 국왕은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는 등, 나루히토와의 공통점이 제법 되는 편이다.[31] 이러한 공부에 대한 진지한 모습은 가쿠슈인 재학시절 때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 등에 의하여 계속 나오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영향을 받은 아이코 공주 역시도 공부에 있어서 상당히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32] 명칭만 대학일 뿐 실제로는 인류의 존속, 발전, 복지에 관한 세계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학자, 연구자들의 국제 공동체다.[33] 술이 엄청 쎄서, 한 술집에서 가게에 진열된 술의 반절 이상을 시켜서 마신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술에 취해 뻗었을 때, 나루히토는 술을 다 마시고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나루히토도 단 한 번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동생 후미히토가 자기보다 먼저 결혼했을 때였다고 한다. 물론 나루히토가 취한 건, 어렸을 때부터 아끼던 사랑스러운 동생의 결혼을 축하하다 보니 취해버린 것이라고. 참고로 두 사람 사이가 본격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한 건 나루히토가 결혼한 이후부터였고, 그러한 대립의 절정이 바로 히사히토 출생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