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나루히토/쇼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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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루히토가 황태자였던 헤이세이 시대(1989.01.08-2019.04.30.) 때 행보.2. 황태자 책봉
황태자 문장 |
1989년 1월 7일, 할아버지 쇼와 덴노가 사망하면서 당시 아버지 아키히토 황태자가 삼종신기를 받는 의식을 행하고 정식으로 일본 제125대 천황으로 즉위했다.
일본 현행 황실전범에서는 "황태자가 없는 경우에 황태손을 둔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천황의 적장손임에도 황태손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나루히토는 만 31세가 되던 1991년 2월 23일에 정식으로 황태자(皇太子)가 된다.
3. 결혼 소동
여기까지만 보면 별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으나, 문제는 그가 이때까지 미혼에다 약혼녀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결혼 적령기가 20대 중반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이 기다리다 못해 1990년에 먼저 대학 후배[1]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해서 이듬해에 마코 공주까지 낳자, 황실 안팎은 나루히토 황태자의 결혼 문제로 들끓었다.황태자비 후보 여성들 집중 취재영상. |
사실 그는 이미 1986년 10월 스페인 엘레나 공주[2]의 영접식에서 만난 한 여인을 사모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 오와다 히사시의 장녀로서 영접식 파티에 참석한 오와다 마사코. 국제사법재판소장으로 유명한 외교관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恆)[3]의 장녀로,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도쿄대학 법학부에 편입학하여 다니다가 1986년 외무공무원 상급채용 1종시험에 합격한 엘리트였다.
오와다 마사코에게 푹 빠진 나루히토 황태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끈질기게 계속 청혼했다. 그러나 마사코는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자유분방한 삶을 원한 데다가, 마침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으로 2년 과정의 연수를 떠나려던 참이었기에 정중히 거절한다. 게다가 외할아버지 에가시라 유타카(江頭豊)는 미나마타병 추문을 일으킨 칫소 社의 회장이었으므로[4], 마사코는 궁내청의 심사에서도 탈락한다.
그 후 나루히토 황태자는 결혼을 전제로 여러 여자들을 만났지만 진지한 관계까지 발전하지 못했고[5], 1990년에 2년 과정의 영국 연수를 마친 후 귀국한 마사코에게 다시 접근한다.
궁내청에서 "저런 흠 많고[6] 미천한(!) 여자는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했고, 황실에서도 계속 결혼 논란이 길어지자 안 좋게 여겼지만[7], 나루히토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와다 마사코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고집을 부렸다. 결국 궁내청과 황실에서도 백기를 들었고, 마사코가 받아들일 때까지 노력했다.
4. 결혼
1993년, 나루히토와 오와다 마사코의 결혼식 퍼레이드 |
마사코는 7년 만에 나루히토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이리하여 1993년 1월 19일, 오와다 마사코와의 약혼을 발표하고, 그 해 6월 9일 정식으로 결혼한다.
당시 한 청혼과 약혼 발표 기자회견에서 그가 한 말이 의미심장한데, "최선을 다해 마사코를 끝까지 지키겠습니다."였다. 언뜻 듣기에는 그냥 로망을 담은 발언인 것 같지만, 황실의 어투 특성과 하단에 나오는 황실의 상황을 고려할 때, 저건 자신들의 반대 세력
나루히토의 입장에서는 설령 궁내청이 시키는 대로의 고귀한 신분의 여자와 결혼한다고 해도 이미 물 밑에서는 동생과의 천황을 둔 권력다툼은 한창 벌어지고 있었고, 누가 황태자비가 되든 친 후미히토 파인 궁내청의 꼰대질에 시달릴 게 뻔한데,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다면 가급적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게 서로에게 좋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미치코 황후는 40년 동안 별의 별 생고생을 다 했지만 아키히토 덴노와 금슬이 좋고, 나루히토 황태자는 그런 부모님을 직접 보고 자란 사람이니 그러한 것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루히토와 마사코 황후는, 오래 전부터 쇼윈도 부부로 유명한 후미히토ㆍ키코 비 내외와 달리 주변에서 온갖 공격을 퍼부어도 그러한 것에 일절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금슬 좋은 모습을 상당히 많이 보여주면서 이상적인 부부가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 증명해보인 사람이다.
결혼식 영상 |
1993년 6월 9일,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의 결혼사진. 부모인 아키히토 덴노, 미치코 황후와 함께. |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부친인 아키히토 덴노와 매우 닮았다. 이 결혼사진에서 마사코 황후가 입은 전통의상은 쥬니히토에라고 한다. 나루히토 황태자의 의상은 황태자 전용 주황색 소쿠타이이며, 머리에 쓴 관은 스이에이노칸.
5. 정치적 입장
2014년 아베 신조 총리의 개헌 움직임을 놓고 "지금의 일본은 전후 일본 헌법을 기초로 삼아 쌓아 올려졌고 평화와 번영을 향유하고 있다. 앞으로도 헌법을 지키는 입장에 서서 필요한 조언을 얻으면서 일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2015년 2월 23일, 55세 생일을 맞아 나루히토 황태자는 패전 70년을 맞아 "일본이 전쟁의 비참함을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생일을 앞두고 지난 20일 도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전쟁의 기억이 흐려지려고 하는 오늘날, 겸허하게 과거를 돌아보고 전쟁을 체험한 세대가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비참한 경험이나 일본이 밟아 온 역사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사
나루히토 황태자는 여기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선 전쟁으로 일본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많은 이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고 많은 사람이 고통과 큰 슬픔을 겪은 것을 매우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두 번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도록, 과거의 역사를 깊이 인식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일본)는 전쟁의 참화를 거쳐 전후 헌법을 기초로 노력을 쌓아올려 평화와 번영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전후 70년이, 평화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본 국내 정치상황이나 아베 신조의 개헌 야욕 등을 놓고 보면, 사실상 아베 정권의 우경화에 대한 명백한 반대로 해석된다.한편 UN '물과 위생에 관한 사무총장 자문위원회'(UNSGAB) 명예 총재이기도 한지라, 2015년 4월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에서 열리는 세계 물 포럼에 대해 "수질 문제를 생각하는 좋은 행사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특히 앞서 다른 나라에서 열린 이 행사에 3차례 참석한 바 있었던지라 대구 행사에 직접 참석할지 여부가 상당한 주목을 끌었으나, 결국 3월에 불참을 통보했다. 만약 참석했더라면 전후 70년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냉각된 한일관계와 국민 감정 등의 복잡한 상황에 일대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겠으나, 아무래도 정치적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것 같다.[8]
2016년 8월 8일,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가 '대국민 담화'로 퇴위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명하면서 마침내 즉위하게 되었다. 아키히토 덴노는 재위 30년이 되는 2018년 다음해인 2019년 4월 30일에 생전 퇴위하고 나루히토 황태자는 2019년 5월 1일 양위받는다. 기사
6. 권력 다툼
모두의 반대 끝에 7년의 시간을 들여 오와다 마사코와 혼인에 성공하였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바로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본래 두 사람의 결혼에 일본 황실 내에서 유일하게 찬성하던 사람이 셋째 당숙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와 그 아내인 히사코 비밖에 없던 걸 보면 알다시피 거의 대부분 황실 사람들은 마사코와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나루히토 황태자의 강한 고집에 의하여 결국 황실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은 허락해줬지만, 궁내청도 일본 황실도 대단히 보수적인 집단이며 아키히토도 전통적인 의미에 참으로 충실한 인물이라서 만세일계[9]에 대한 집착은 다른 자들과 별다를 게 없던 사람이었다.[10] 거기에 황태자였기에 후대를 위해서라도 자녀, 특히 대(代)를 이을 남자아이를 낳길 강요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5살 아래의 남동생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가 황위를 강하게 탐내고 있었던 것이다. 후미히토의 권력욕 자체는 매우 오래되어[11] 후미히토는 본래 성적이 낙제임에도 불구하고 가쿠슈인보다 훨씬 상위의 대학에 부정 입학하려다 이를 안 아버지 아키히토가 저지해서 반강제적으로 가쿠슈인 대학으로 갔고, 그조차 부정 입학으로 겨우 통과했었다.[12] 본인은 자신이 가쿠슈인에 다니는 것 자체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여겼고, 대학에서도 여러 크고 작은 사고를 몰고 다니던 와중에 가와시마 키코와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다.[13]
나루히토가 오와다 마사코와 결혼하기 3년 전인 1990년에 이미 후미히토는 가와시마 키코와 혼인해서 이듬해인 1991년에 첫째 마코 공주를 낳았고, 나루히토가 혼인한 지 1년이 되었을 때인 1994년에는 둘째 카코 공주를 낳았다. 카코 공주가 태어나고 둘째도 딸이라는 사실을 안 키코 비는 곧장 산부인과 의사에게 "아들을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방법을 묻는 등, 아들을 낳아서 자신들이 황위를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자 친황태자파인 노리히토와 히사코 비 부부가 "황태자 부부가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또 낳으려고 하다니, 황실의 서열을 알고 맞게 행동하라"며 급제동을 걸었고, 이러한 반발에 대해서 노리히토의 주장이 합당하고 생각한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도 "황태자 내외가 아이를 가지기 전까지, 차남 내외는 더이상 아이를 낳지 마라"고 해서, 일시적인 시간벌이는 하게 되었다.
하지만 궁내청은 오래 전부터 후미히토의 편이었기 때문에 황태자 일가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큰 압박을 가했고, 결국 몸과 마음의 병을 얻은 마사코 황후[14]는 수 차례의 유산을 겪고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타격에 의하여 장기간 칩거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도 주변의 강한 압박 때문에 어떻게든 인공수정을 시도해서 성공했다. 이때 주변에서는 천황직을 잇기 위해서, 해당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성감별을 하여 아들을 임신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태아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인지, 나루히토는 "그쪽은 하늘(천운)의 뜻에 맡기겠다"고 하면서 정중히 거부하였다. 결국 2001년에 천신만고 끝에 태어난 아이는 딸인 아이코 공주였다.
그 이후 일본 각지에서는 또 다시 후대를 이을 남성을 낳아줄 것을 요구하는 여론이 생겨나서 다시 한 번 마사코 비를 압박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2년에 황실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나루히토를 지지, 옹호해주었던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가 심장병으로 돌연 사망했다. 노리히토의 부인인 히사코 비도 남편의 사후 황실 내 발언권(입지)[15]이 줄어들었기에 더 이상 나루히토를 지지해주지 못했다.
아키히토는 장남 내외에게 자식이 하나라도 태어난 것에 안도하기는 했지만, 아이코 공주는 천황직을 물려받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을 낳으라고 암묵적으로 요구했다. 나루히토는 아내 마사코 황후의 몸상태가 여전히 안 좋았고, 우여곡절 끝에 낳은 자녀인 아이코 공주를 잘 키우는 데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이코가 3살이 될 때까지는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뒤에도 마사코 황태자비는 더이상 임신하지 못하자[16], 아키히토는 결국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와 키코 비에게 대를 이을 아들을 낳으라고 우회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후미히토와 키코 비는 오래 전부터 황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아버지/시아버지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여러 가지 수상쩍은(?) 방식을 동원해서[17] 2006년 9월 6일,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를 낳는 데 성공하면서, 후미히토가 태어난 지 41년 만에 일본 황실에 귀하디 귀한 남자 황손이 태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귀한 남자 황손인 만큼 히사히토는 태어날 때부터 실질적으로 황태손(皇太孫) 취급을 받았고, 아키시노노미야 내외는 궁내청, 우익 세력과 손잡고 대대적인 여론전을 통해 당시 황태자 나루히토 부부가 거주하고 있는 '동궁(東宮)'을 향해서 수많은 압박을 가했다.
허나 세력이 약하기는 해도 나루히토는 엄연히 황실전범에 따른 '적장자와 적장손으로 이어지는 적통'으로써 정통성에 전혀 흠이 전혀 없었으며, 일개 종친과 서열 수준이 다른 '천황의 후계자인 황태자'라는 강력한 이점이 있었다. 이 이점만큼은 후미히토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후미히토와 키코 비는 처음에는 아키히토가 히사히토의 승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황태자 자리를 자신들로 바꿀 것을 기대했지만[18] 기대했던 것과는 정 반대로 흘러갔다.
아키히토 당시 천황은 "첫째는 첫째, 둘째는 둘째"라는 인식이 매우 공고했고 후미히토에 대해서 "네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좋다. 너는 천황의 자질, 그릇이 못 되고 흠결 없는 후계자인 형이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천황이 될 일이 없다."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19] 그러자 아키시노노미야+궁내청+우익은 아키히토가 죽고 나서 나루히토에게서 왕위를 빼앗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고, 15년에 걸쳐 주간지 등을 이용, 온갖 허위사실 및 사실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황태자 내외와 아이코 공주에 상당히 불리한 방향으로 여론전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동궁에서 제대로 된 활동을 못 하도록 온갖 공작들을 벌여 압박해서 이러한 여론전에 사람들이 믿게 만들게 했다.[20]하지만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은 너무 오만방자하고 후안무치했기 때문에, 점차 사람들은 각종 언론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저런 자들이 종사(宗嗣)를 물려받아도 되나?"라고 싫어하게 되었다. [21]
한편 나루히토도 가만히 왕위를 빼앗길 마음 같은 건 없었다. 본인은 외동딸만 둔 상황이기 때문에 만세일계에 대한 집착은 보이지 않지만 적장손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황실 후계자 교육을 철저히 받아 차기 군주로 자라온 그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왕족 그 자체이자 구심점이였다. 황태자는 자신과 가족들의 안전한 미래를 위해서 본인이 천황의 자리에 오르고 나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나 궁내청 및 주간지 등의 각종 불손한 세력들을 천황이라는 지위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동안 자신 일가를 공격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는 동시에 이들의 반역으로 떨어진 황실의 위엄을 다시 세울 것으로 보인다.
애시당초 지금까지 황태자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궁내청이나 아키시노노미야 일가, 그리고 극우들과 주간지들이 너무 매를 번 감이 있고,[22] 궁내청은 생전 퇴위 및 양위선언 이후에도 뒷수작을 부리다 일본 국민들에게 비난과 질타를 받기도 했다. 사실 인내, 독함, 총명함 모두를 겸비한 사람이 제대로 권력을 잡으면 매우 무섭다. 전근대 시절 같았으면 동생을 포함하여 자신의 공격에 가담한 전원 반역/불경죄로 모두 목이 날아가는 건 물론 부관참시까지 가도 무방한 짓거리를 현재 황실 상황이 자기네들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연하게 실시한 것이다.
자신의 유일한 자식인 외동딸, 아이코 공주는 여자라는 점에서 현 황실전범상으로는 상당히 불리하기 때문에, 이조차 무마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불리한 점을 한 번에 뒤집더라도 그 어느 누구도 불만을 가질 수 없게 만들 그만한 우수함을 반드시 일반 대중에게 보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루히토는 딸의 육아와 교육에 매우 공을 들였고, 마사코 황태자비도 여기에 동참해 자신의 총명함을 모두 쏟아부어 황실 최고의 재원(才媛)으로 성장시킨다.[23]
나루히토도 동세대 황족 중에서는 상당히 우수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사람이였고[24], 마사코 황태자비는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정평이 난 하버드 대학교 출신에 도쿄대 재학 중에 외무고시를 합격해 외교관 생활까지 했고, 외교관일 때도 외무성에서도 주목할 정도로 뛰어난 일솜씨를 가진 초일류 엘리트였다. 그런 만큼, 자녀 교육이라는 측면에서는 황족 버프로 억지로 대학을 졸업한 동생 후미히토보다 상당히 유리했다.[25]
아이코 공주가 성적이 우수하다는 것을 들으라고 뻔히 언론에 고의적으로 흘리고 도쿄대학 진학이라는 떡밥을 아주 오래 전부터 언론들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뿌린 것도 아이코 공주 자폐설 등과 같이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주간지 주도로 씌우면서 황태자 내외에 대해서 건강에 이상 있는 자녀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황태자에서 내려오길 강하게 압박하자 여론전에는 여론전으로 대응한 것이다. 또 마사코 황후도 주요 비판 요인이었던 원인 불명의 건강 문제로 인하여[26]칩거에 대해 몸을 최대한으로 회복시키면서 몸에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공무를 재개하는 것으로 최대한 비판의 소지를 덜고자 했다. 키코 비도 가쿠슈인에서 문무겸비의 우등생이었지만 후미히토가 교육에 별로 도움이 안 되고 지나친 억압이 오히려 아이의 성장에 방해가 된 건지 히사히토는 아버지나 친누나들과 마찬가지로 낙제에 가까운 성적을 내고 있는 게 기본적인 중론이다.[27]
이 시기 나루히토는 매우 바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엄청난 숫자의 공무를 하는 와중에도 가족들을 직접 일일이 신경써줘야 했고[28] 개인적인 공부에 매진하기까지 한 것 보면 그의 이러한 태도는 황족이라는 것을 배제하더라도 매우 대단한 것이다.
한편 궁내청과는 무작정 적대만 한 건 아니었는 데 궁내청 시종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모시기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했으며 직원들과 황실 출입 기자들같은 황실 관계자로부터 "황족의 기품과 고귀함을 갖추신 분"이라며 칭찬이 상당히 자자했다고 한다.[29] 나루히토는 황태자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타인에 대한 배려를 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항상 타인을 배려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뭐 아내와 결혼할 때 본의 아니게 아내에게 민폐를 주기는 했지만(...) 이건 나루히토가 프로포즈했을 때 한 말처럼 아내를 지켜주고[30] 그러한 모습을 본 아내는 남편을 걱정하면서 뒤에서 최대한 보조하려고 노력하는 등 부부 금슬이 좋으니...[31]
마사코 황태자비는 황태자비가 된 이후 공무에서 자신들의 동선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어주는 등의 태도를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는데, 남편인 나루히토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두 사람이 본인 성격대로 움직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우호적인 세력들이 생긴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사람들을 15년간 줄기차게 까왔던 후미히토 일파도 어떻게보면 대단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세력들과 단순히 잘 지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여론전을 돌릴 때 써먹기는 했을 것이긴 하지만 그건 나루히토 부부의 성격을 보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차원이였을 것이다.
2016년 중반에 접어들자 아키히토는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해서 그동안 후미히토 등의 준동으로 바닥으로 떨어진 황실의 서열을 바로잡고 천황의 자리를 우습게 보는 황실 세력들에게 권위를 보이기 위해 아키히토는 나루히토에게 생전 퇴위·양위선언을 하는 것으로 황태자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뒷통수를 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황실회의에서 지정된 후계자는 후미히토를 황사로 삼고 히사히토는 황실전범 상 책봉되지 않았을 뿐 태어날 때부터 황태손이었으니 "딸의 즉위는 한 물 건너간 게 아니냐"는 말이 많지만 즉위한 이후는 또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긴 하다.[32]
생전 퇴위 및 양위 선언이 나자마자 남편에 비하여 뛰어난 정치 감각을 가지고 그동안 황태자 일가와의 암투에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키코 비는[33] 히사히토의 즉위를 위해서 다음 대 천황인 황태자 일가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키코 비는 오랫동안 황태자 일가와 암투를 벌인 사이인지라[34] 황태자 일가는 가까워지려는 시도를 거부했다.
거기다 동궁에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서 어릴 때부터 "본인들의 의사를 존중한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35]랍시고 두 딸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방임한 것이 악수가 되어, 마코 공주가 결혼 논란으로 열도를 제대로 뒤집어놓고 카코 공주는 언니를 대놓고 옹호하면서 여론이 반전하게 된다.
2019년 차기 천황을 앞두고 나루히토는 "황실 또한 시대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즉위하면 그동안 황태자 집안에 대해서 반대 세력들을 숙청할 것임을 우회적으로 암시했다. 만일 후미히토와 키코 비가 왕위를 노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숙였다면, 나루히토도 히사히토가 종사(宗嗣)를 물려받는 것을 허락했거나, 황실의 안정을 위해서 4촌간 결혼이라는 걸 감안하고서 자신의 친딸인 아이코 공주와의 혼인을 고려해 히사히토에게 더 큰 힘을 주었을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미히토 내외가 생각 없이 온갖 난동을 부리고 황태자 일가를 위협한 대가는 컸다. 오히려 후미히토 일가는 역으로 자신들이 황실에서 내몰릴 판국이 되었다.[36]
이미 이 정도로 완전히 적대하게 된 이상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선택지는 현 황실 전범에 의거하여 황실의 대를 이을 유일한 남아라는 이점을 쥐고 있는 히사히토의 천황 즉위뿐이다. 히사히토에 대한 지지가 친누나 마코 공주,카코 공주 덕분에 사촌누나인 아이코 공주보다 많이 낮아져서 남자라도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이코 공주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우수하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줘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고, 나루히토 덴노가 히사히토를 차차기 천황 후계자로 정식으로 인정해줘야만 한다. 천황의 말 한 마디에 황실전범에서 허락되지 않는 생전퇴위조차도 마음대로 실행될 수 있었는데, 아이코 공주의 천황 즉위에 대해서도 "전례가 10번이나 있는데 왜 안 되냐?"라고 주장하면[37] 궁내청이나 극우들도 반박의 소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38]
하지만 위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아이코 공주는 여자이기 때문에 현 황실전범 상에서는 결혼하면 황족에서 나가도록 되어 있는 아이코 공주의 후사를 과연 황족으로 인정할 수 있는 지에 대하여 여계 천황이라는 이름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일단 히사히토는 남자인 만큼 성인이 되는 순간부터 궁가(미야케)의 창설이 가능하니, 하다못해 히사히토의 후손이라도 즉위하기 위해서는 2019년 5월 1일부터 천황이 되는 나루히토가 후계자로 밀고 있는 아이코 공주가 히사히토를 차기 천황으로서 인정, 인증해줘야만 한다. 그 때문에 키코 비는 히사히토를 훌륭히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고개를 숙여가며 나루히토 일가족과 히사히토가 가까워지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마사코 황후가 황태자비 시절에 혼자 집에 있는 히사히토가 걱정되어 아이코 공주랑 같이 놀게 해주려고 했으나 시종들의 반대와 키코 비의 반발이 너무 거세 그 뒤로 교류가 없었으니 말이다.. 나루히토 내외 입장에서는 그렇게 밀어낼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이러나?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키코 비가 히사히토를 키우기 위해 사용하는 수가 편협한 황족관과 맞물려 모조리 역효과로 나타나고, 후미히토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5살 위인 친형 나루히토를 사사건건 방해할 생각만 하고 있다. 거기다 후미히토는 특유의 무능함을 발휘해 두 딸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의 사고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기만 해서 오히려 국민들의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으니, 키코 비의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다. 나루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의 황위 계승 경쟁을 둔 암투는 한쪽이 즉위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나루히토의 생각대로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아이코 공주를 구 황족 가문(현재는 황족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지만 황실 피가 흐르는 후손들의 가문)의 아들과 결혼시킬 경우, 가장 큰 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여계 천황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코 공주의 부마(천황의 사위)는 오래 전부터 매우 엄격하게 사람을 뒷조사[39]하고 있으며, 히가시쿠니 가문을 비롯한 구 황족들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궁내청이나 일부 극우들조차도 "아이코 공주의 부마가 일반인이 아니라 구 황족의 남성이 된다면, 별 다른 문제없이 아이코 공주를 천황으로 등극시키면서 동시에 여계 천황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이용해서 궁내청 측으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을 수 있는 동시에 동생인 후미히토도 이러한 것에 대해서 마땅히 저항할 수 있는 건덕지가 없기에 그냥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점[40]에서 나루히토 덴노의 입장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점이다.
참고로 나루히토의 천황 등극 이후 궁내청은 아이코 공주의 부마 후보를 물색하는 동시에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될 경우를 상정해서 과거 여성이 천황이던 시절 기록들을 살펴보며 자료 수집에 돌입했다고 한다. 아이코 공주에 대한 문제를 나루히토가 말하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선수쳐서 현 천황에게 인정받아 수십 년 동안 저지른 반역 행위에 따르는 나루히토 덴노 주도의 궁내청 숙청의 여파를 최대한 줄이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7. 승계
2017년 2월 1일 황실회의를 통해 2019년 4월 30일,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를 하게 됨으로써, 2019년 5월 1일 나루히토 황태자가 제126대 천황으로 즉위하게 되었음이 공식 발표되었다. 나루히토는 슬하에 아들이 없기 때문에, 천황 즉위 후에는 남동생인 후미히토 친왕이 황사(皇嗣)로서 지금까지 나루히토 황태자가 해온 역할 만을 맡게 되며, 일본 정부는 아키히토 덴노가 4월 30일에 정식 퇴위한 뒤 상황(上皇)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2018년 1월 중 '아키히토 덴노의 퇴위와 나루히토 황태자의 즉위를 준비하는 위원회'를 발족한다. 새 천황의 즉위와 함께 사용되는 연호(元号)는 3월 중 의견을 취합하고 상반기 중 4월에 확정해 공식 발표한다는 방침이다.
즉위식은 2019년 10월 22일에 열기로 했다고 밝혔으며, 일본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즉위식 위원회를 올 가을에 발족시키기로 했다. 또 신 천황의 즉위와 함께 새로 시작되는 연호는 일본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사전에 발표하기로 했고, "행정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본은 5월 1일부로 변경하나, 일부 늦어지는 경우에는 구 연호를 사용해도 된다"라는 애매한 결론을 내었다.
새 연호는 아키히토 천황 재위 30년 기념식이 열리는 2019년 2월 24일 이후 발표하는 방향으로 조정이 이뤄지고 있다. 문제는 우익 및 일본 정부가 "새 연호의 조기 발표는 전례[41]에 맞지 않다"면서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신 천황 즉위 이후인 5월 1일 이후에 새 연호를 발표하는 게 민간 부분의 혼란을 최소화하는 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미 1월 1일이 아니라 5월 1일에 새 천황이 즉위한다는 것부터가 일본 내부에서 혼란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 데 여기에 연호 발표까지 그 이후로 미루어버리면 혼란이 더 가중될 것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일본 정부가 추진 중인 서머타임 재도입보다 여기에 행정력을 집중하라는 반응이 많다고.
결국 정부는 연호에 관하여 "1개월 전인 2019년 4월 1일에 발표할 것"이라고 하였고, 1개월 동안 새로운 연호로 교체하는 작업을 실시하고, 늦어질 경우에는 당분간은 구 연호를 사용해도 된다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즉위 이후 첫 정상회담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국빈대우로 초청해 회담을 갖도록 하는 계획을 고려하고 있다.# 결국 5월 24일~5월 28일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 과정에서 나루히토 덴노 내외와 만나는 게 확정되었다.
즉위식 중 카퍼레이드 사용될 차량은 토요타가 유력시 되고 있다.#
5월 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특별법'이 가결되었다. 특히, 골든위크 주간[42]이라 일본 관광업계에서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여성 천황 관한 문제가 여전히 진행 중에 2019년 1월 3일 도쿄신문에서 공개된 조사결과에 따르면 '남성 황족만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 현행 황실전범을 수정해 여성 황족의 황위 계승을 용인해야 한다.'는 의견이 84.4%였다.#
2019년 1월 7일 ‘도쿄신문’은 지난 3일 새로 즉위할 천황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의식 여론조사 결과를 내놨다. 조사 결과 일본인의 46%는 "국제사회와의 친선 활동"을, 42%는 "재난 재해 지역 위문"을 새로 즉위하는 천황에게 기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28%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22%가 "現 아키히토와는 다른 활동을 기대한다"고 답했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일본인의 70%가 곧 퇴위할 현재의 아키히토의 활동과 관련해 재난재해 지역 위문을 매우 높게 평가했고, 이어 국제친선활동(37%), 전몰자 위령식 참석(29%)을 꼽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천황이 현재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몰랐다고 한다. "새로 황위에 오를 나루히토가 재난재해 방지와 환경 보호를 포함한 ‘물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활동을 벌인다는 사실을 아느냐"는 물음에 일본인 74%가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43]
일본 황실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각은 대다수 매우 긍정적이었다. 응답자의 71%가 "황실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답했고, 천황에 대한 느낌을 묻자 응답자의 50%가 “친근감을 느낀다”, 19%가 “멋지다”고 답했다. 신토(神道) 양식의 즉위식 비용을 정부가 부담하는 것과 관련[44]해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일본 헌법에 위배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55%가 “문제없다”고 답했고, 6%의 응답자는 “더 신토 양식으로 해도 문제없다”는 답변을 내놨다.[45]
그러나 일본인 대부분은 새 천황의 즉위식을 예전보다 덜 화려하고 간소하면서도 복잡하게 치르기를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37%는 “과거 수준을 넘지 않도록 예식을 단순화해야 한다”고 답했고, 34%는 “예식을 대폭 간소화해서 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사실 지금의 일본 황실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비판이 부적절한 남성과의 결혼 문제를 일으킨 아키시노노미야 家와 궁내청에만 편향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모양. 한편 결혼 문제 등을 통해서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게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확인된 현 황실전범을 일부 개정하기를 바라는 움직임이 과거보다 더 크다고 한다.
2019년 1월 17일 기사에 따르면, 신 천황 즉위식 때 퍼레이드 차량으로 토요타 센추리를 선택했다. 1990년 아키히토의 즉위 당시에는 롤스로이스를 사용했으며, 1993년 나루히토와 오와다 마사코의 결혼식 때에도 사용되었지만, 2007년에 내구연한이 되어 폐차되었다고. 일본 정부는 오픈카의 비용으로 8,000만 엔을 확보했다고 한다. 퍼레이드 다음 날인 10월 23일[46]에는 외국정상들을 초청한 가운데 아베 신조 총리와 아베 아키에 여사 내외가 주최하는 만찬이 열린다. 장소는 900명 상당이 참석 가능한 연회장을 갖춘 도쿄 호텔 뉴오타니로 결정됐다. 이와 함께 식전위원회는 다음 달 24일 국립극장에서 진행되는 아키히토 덴노의 재위 30년 기념식 준비계획도 확정했다.
2019년 2월 22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1일 천황을 만나서 국내외 정세를 설명한 다음 날, 이번에는 도쿄고쇼를 방문하여 나루히토에게 국내외 정서를 설명했다고 한다. 보통 이러한 정세 설명은 천황에게만 하는데, 그걸 황태자에게 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47] 하지만 생전퇴위라는 이례적인 환경 속에서 퇴위 및 제위 등을 전담하고 있는 일본 내각과 차기 천황인 황태자와의 의사소통이 필요하고 신 천황 등극 이후 해외 귀빈 초청 등을 미리 조정을 해야 하는 걸 감안하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019년 3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연호 후보군들을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4월 발표 전에 통보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일본 헌법을 유지하면서 황실을 배려하려고 하는 조치로 보인다. 사실 일본 우익들 사이에서 신 연호는 일본 정부가 관여하는 것이 사실상 황실의 정치 관여 금지 조항에 위반되는 등의 문제가 있다고 보고 "신 연호 결정은 황실에서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상당히 많은데, 이러한 비판 여론을 어느 정도 회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는 게 일본 언론들의 지적.
요번 나루히토 황태자가 일본 제126대 천황으로 즉위하여 'OO덴노'라고 불리게 될, 새 연호(元号)는 이례적으로 중국 고전(古典) 의존도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데, 연호 선정을 관장하는 일본 정부(내각관방) 관계자는 3월 13일 국회 답변에서 연호 선정 절차에는 높은 식견을 가진 전문가들이 참여한다며 국문학자와 일본 사학자도 포함될 것이라고 밝혔다.# 해당 발표 이후 일부이긴 하지만 "신 연호는 일본 고사기 등 일본의 고전에서 신 연호가 나오는 게 아니냐"는 기대를 표시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아베 신조 총리의 성씨 첫글자인 '안(安)'이 연호에 포함될 것인지도 관건.#[48] 하지만 3월 28일 일본 관방장관은 "현재 언론 등에서 오르고 있는 신연호 관련 단어들은 연호 결정 조건들 중 하나에 위배되는 것이기에, 이를 배제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9년 4월 1일, 본인이 재위할 동안 쓰일 새로운 연호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발표로 레이와(令和, 영화)로 정해졌다. 참고로 신 연호 발표는 당초 예정보다 12분 정도 지연되어서 발표되었는데, 그 이유는 임시 각료 회의가 시작됨과 동시에 궁내청 장관(청장), 부장관이 각각 천황과 황태자에게 당시 기준으로 막 최종 결정된 신 연호를 급하게 통지해서 이에 대한 동의를 얻은 다음에 발표했기 때문이다.[49]
[1] 캠퍼스 커플이었다.[2]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장녀. 펠리페 6세의 큰누나.[3] 2018년 큰딸이 황후가 되기 전에 현역 은퇴를 선언해서 현재는 자택에서 막내딸과 같이 지내고 있다고 한다.[4] 단, 에가시라 유타카는 미나마타병 사건 이후 칫소 사의 회장이 되었기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다.[5] <일본 왕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라는 책에 의하면, 나루히토 황태자가 28살 때 진지하게 만나던 동갑내기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가쿠슈인 출신이었고, 그녀의 집안은 황실과도 돈독한 친분이 있었지만, 궁내청의 조사 결과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증조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며 조선을 수탈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침략자의 피가 흐르는 여성이 황후가 되면, 한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다만 나루히토 황태자의 제수인 키코 비는, 비슷한 문제가 있었는데도 황실로 시집올 수 있었다. 아마 둘째 황자의 비(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까다롭게 뽑은 듯하다.[6] 마사코 황후/결혼 전 항목에 들어가면 알겠지만, 사실 그 흠이라는 게 '나루히토보다 키가 크다', '딸만 낳은 집안 출신' 뭐 이 따위 것들이다. 완전 전근대 시절의 인식 그 자체다.[7] 당시 결혼 찬성파가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와 그의 아내 히사코 비뿐이었다.[8] 앞서 말했듯, 나루히토 황태자는 모두가 반대하던 오와다 마사코와의 결혼을 끝끝내 밀어붙였을 정도로 필요할 때는 저돌적인 타입이다. 때문에 천황 즉위 후 파격적인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상당하며 당연히 한국에 전격적으로 방문하는 것까지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걸 일본 내각이 반대한다 해도 이 사람의 강단 있는 성격을 고려하면 밀어붙이고도 남을 것으로 추측된다. 황태자 본인은 방한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아베 신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에 박근혜와 아베 신조의 정상회담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였는데, 일본 총리보다 일본 황실이 대한민국 대통령과 먼저 접촉하는 모양새가 자신의 체면을 구겨서라고. 또한 한국에서도 거절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안 그래도 박근혜 본인이 아버지와 더불어 친일 논란을 숱하게 불러온 전적이 있는 사람이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비록 반우경화 포지션을 취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국민이 대다수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 황실과 만난다는 것은, 또 친일파 논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컸다.[9] 천황가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일본 황실의 책무인데 이러한 것이 튀어나온 건 군국주의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즉, 만세일계 자체가 덴노의 신격화를 위하여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일본 천황 가문은 최소 2~3번 정도 바뀌었다고 추정하며 만세일계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게이타이 덴노를 기점으로 과거에 2~3번 바뀌었다는 추측부터 다이카 개신 이전 소가와 게이타이 덴노 직계가 초기 신라처럼 왕위를 공유하던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는 등, 고대부터 만세일계 따위는 없었다.[10] 사실 웬만한 군주라면 0순위 목표가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해서 대를 이어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툭하면 나오는 '종묘사직 보존'도 같은 맥락인 것.[11] 어려서부터 유독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 못한 데다가 부모님의 관심을 받고 자란 형은 인품이나 성적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별 다른 문제가 없는 너무나도 잘난 존재이다보니 그에 대한 열등감 등이 한데 뒤섞여서, 잘난 형님을 몰아내고 자신이 천황이 되면서 이러한 열등감을 해결하려고 한 게 아닌가라는 주장이 있다.[12] 후미히토는 1984년 가쿠슈인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는데, 그의 점수가 커트라인이 되어 1984년에는 가쿠슈인 대학 입학생이 유독 많았다고도 한다.[13] 일설에는 후미히토가 대학에서 만들었던 동아리는 그의 방탕한 생활을 보좌하기 위한 곳(하렘)이었다는 말도 있었고, 동아리 여학생들 중 마지막까지 후미히토의 곁에 남은 여학생이 가와시마 키코였다는 말도 있다. 애시당초 키코 비와의 결혼에 대해서도, 지저분한 말이 많다. 본래 후미히토는 키코 비 역시 다른 여학생들처럼 잠깐 가지고 놀다가 버리려고 했다인성이 쓰레기고 한다(이 과정에서 키코 비는 낙태도 몇 번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키코 비의 아버지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 교수가 이 사실을 알고서 격분하여 아키히토 덴노에게 직접 찾아가서 내 딸 책임지라고 강력하게 따지고 드는 바람에 결국 억지로 결혼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14] 사실 마사코 황후는 외교관 출신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 덕분에 해외(유럽, 미국)에서 오랜 시간 성장했다. 일본에 돌아와서는 외무고시에 합격, 별다른 차별없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외교관으로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시집간 일본 황실은, 상상 이상으로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 많은 곳이었다.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마사코 황태자비의 입장에서는, 정신적인 타격이 여느 일본인들보다도 더 심했을 것이다.[15] 일본 황실에서 남성 황족과 결혼한 여성의 발언권이라는 것은 전부 결혼한 남편의 권한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것은 한국 직업 군인 부인들끼리도 남편 계급에 따라서 부인들 사이에서의 계급을 정하는 것과 하등 다를 거 없다.[16] 사실 아이코 공주를 임신한 것에 대해서, 수차례 유산한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기적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마사코의 몸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다. 그러한 상황에서 국민들이나 황실에서는 계속해서 정신적인 압박을 줬으니 임신을 못하는 건 당연지사. 참고로 시어머니인 미치코도 이러한 압박 및 시어머니 등의 주도로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한 탓인지 수 차례 유산한 적이 있었는데 나루히토와 후미히토의 사이에도, 사야코 공주 이전에도 임신했다가 유산한 적이 있었다.[17] 인공수정을 통한 성감별로 아들을 낳았다는게 거의 정설이다.[18] 실제로 일본 황실에서도 이러한 전례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결과가 호겐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전이었지만(…) 자세히 설명하면 76대 고노에 덴노가 사망하자 적법한 후계자는 75대 스토쿠 덴노의 아들인 시게히토 친왕이었다, 그러나 74대 도바 덴노가 개입해 계승순위상 후순위였던 마사히토 친왕이 황태자 책봉절차도 거치지 않고 77대 고시라카와 덴노로 즉위하자 분쟁이 벌어진 것. 쇼군가에도 오닌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전이 있었다. 무로마치 막부 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아들을 얻지 못하자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가 사양하는 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들을 얻어도 후계자 자리를 반납할 일은 없다며 후계자 자리를 억지로 떠넘겼는데 뒤늦게 정실 히노 도미코 사이에서 늦둥이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본 것. 적통 아들이 태어났다 해도 이미 그럴 경우에도 후계자 자리를 반납할 필요없다고 약속받았고 요시미 본인에게도 흠이 없는 이상 적법한 후계자는 아시카가 요시미였다. 쇼군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일어난 분쟁이 결과적으로 수도인 교토에서 동군 16만, 서군 11만의 대군이 편을 갈라 싸우는 등 사실상 일본 전체가 전란의 불길에 휩싸이는 대규모 내전이 터졌다. 두 사건 모두, 적법한 후계자가 합당한 이유도 없이 밀려났다는 공통점이 있다.[19] 사실 아키히토가 후미히토에게는 '제왕학'을 가르치지 않고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둔 것도, "어떤 일이 있어도 후미히토에게 천황 자리가 돌아갈 일은 없다"이라는 무언의 선포였다. 애시당초 아키히토도 나루히토가 딸 하나만 낳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긴 하지만.[20] 아직 아기인 아이코 공주가 낯선 사람들(기자들)과 카메라 앞에서 낯을 가리며 숨자 자폐설을 퍼뜨린다던지(...), 일부러 동궁에서 일하다 그만둔 사람을 데려와 황태자 가족에 대해 증언시켜 사생활과 성격을 폭로하려고 하고(그러나 황태자 일가가 시종들을 잘 대우해줘 나쁜 소리는 1도 안나왔다),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은 마사코 황태자비의 문제이며 장차 황후가 될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기사를 내보내고, 병(적응장애, 우울증)으로 칩거중인 마사코 황태자비와 비교되어서 돋보이려고 일부러 공무를 더 열심히 하는 키코 비를 의도적으로 비교하는것도 모자라 아이코 공주의 외모와 마코, 카코 공주의 외모를 비교해 깎아내리는등 온갖 치졸한 언론 플레이를 다 시전했다. 자신들(궁내청+우익+주간지+후미히토 부부) 때문에 앓아누운 아픈 사람을 말도 안되는 소리로 깎아내린 것도 문제이지만, 아직 어린 공주들의 외모까지 비교하고 아기가 낯을 가렸다는 이유로 자폐가 있다는 설까지 퍼뜨린 점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괴롭혀왔는지가 보인다.[21]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황족으로서의 의무감과 사명감은 없으면서 황족으로서의 특권만 누리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후미히토 친왕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집안의 전통이자 가풍인 부정입학, 기자와 시종들 앞에서 벌어지는 부부싸움 라이브, 황실의 격과 맞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드러누운 큰 딸, 이 상황을 이용해 자유를 얻으려는 작은 딸, 성적은 죽어도 공개하지 않지만 중학교 부정입학 시도를 보면 말 안 해도 성적이 아버지를 닮은 게 뻔한 아들까지... 말 그대로 싸움과 갈등이 충만한 가정이다.[22] 일단 마사코 황태자비를 오랫동안 앓아눕게 한 데에 지분이 상당하고,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에 황태자 부부가 공식 초청을 받았는데도 몰래 후미히토 부부를 보내려고 했다가 아베 신조 총리에게 들켜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황태자 부부를 보내게 되자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20년 전 옷을 입히는 미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이건 겨우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일일이 다 나열하려면 여백이 모자랄 지경이다(...)[23] 예를 들면 초등과 상급반이 된 아이코 공주에게 마사코 황태자비가 일주일에 한 번씩 영어로 대화하는 시간을 두었고 역사, 국어 등은 나루히토가 담당했으며 서예 등 다양한 부분의 교육을 위해서 본인들 이외의 각종 부분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배우게 하는 등 상당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 때문에 아이코는 어린 시절부터 우수한 성적이었으며 초등학생 때부터 뛰어난 서예 실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24] 영국 명문 대학교에서 2년간의 해외 유학 경험이 있고, 당시 측근들에 의하면 나루히토의 영국 유학 시절의 성적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고 할 정도로 두뇌 명석한 인재였다. 애시당초 다카히토 친왕이 나루히토에게 역사학을 전공할 것을 추천한 것도 나루히토가 역사 관련되어 관심을 보인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나루히토의 뛰어난 두뇌 때문이라는 소리도 있었다.[25] 그나마 후미히토의 아내 키코 비가 학구적인 교육자 집안 출신에다가 가쿠슈인을 나온 사람이긴 하지만, 형님 마사코 황후의 뛰어난 학력에 질투를 느낀 나머지 키코 비는 황실의 권력을 남용해서 어거지로 박사 학위를 딴다. 이걸 보면 후미히토 일가 중에서는 그나마 낫긴 하지만 학부생 이상의 과정을 진학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26] 마사코 황태자비의 오랜 우울증과 적응장애는 공식적으로만 원인불명일뿐 일본 황실의 집요한 아들 타령과 말도 안되는 잡소리로 트집을 잡아대고 돌려까며 괴롭히는 궁내청+주간지+후미히토 부부의 합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27] 반대로 나루히토 부부도 같은 교육열이긴 했지만, 여러가지 문제 등을 우려해서 아이코 공주에 대한 지나친 억압은 자제했다. 아이코 공주는 이러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버지처럼 스스로 노력해서 성적을 유지/상승시키면서 그에 대한 보답을 했다.[28] 아내 마사코 황태자비는 일본 황실에 시집 온 이래로 쭉 우울증과 적응장애를 앓아왔고, 딸인 아이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시절부터 남자 아이들에게 매우 공격적인 이지메를 당하고 중등과 시절에는 식이장애를 앓았다. 게다가 주간지와 궁내청이 아픈 아내와 아이를 내버려두지 않고 물어뜯어대고 갖은 억측과 추측성 보도를 내보내니 나루히토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29] 나루히토가 심혈을 기울여서 키운 아이코 공주도 같은 평판을 듣고 있다.[30] 실제로 부친과의 관계가 안 좋아지고 자신의 지위가 위험해질 것을 각오하고 '황실에 마사코의 커리어와 인격을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 라고 인격 부정 발언을 했을 정도. 실제로 이 발언 이후 천황 부부 및 후미히토 일가와 틀어졌다. 다행히 천황 부부와는 "아이코 공주가 보고 싶으니 공주와 함께 와라" 라고 아키히토 측에서 화해 신청을 해 사이가 나아졌지만, 후미히토 일가와는 인격 부정 발언 이후 정양조차 하지 않고 지내왔다.[31] 틈만 나면 자신과 아이코 공주를 사랑해주고 늘 헌신하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낸다.[32] 당장 아키히토의 생전 양위도 예상한 사람이 없었다. 황실 전범에 특례법을 만들어서 생전 양위를 할 때 일본 정부가 아무런 제동을 걸지 않는 것을 보면 꼭 안된다고 말할 수 없다. 아이코 공주는 도쿄대 진학도 가능한 우등생이지만 히사히토는 아빠를 닮아(...) 성적도 아이코 공주보다 훨씬 못한데다 마코 공주가 결혼 가지고 드러누워 시위하는 도중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아킬레스건과 실체가(2대째 이어지는 부정입학의 전통, 후미히토와 키코의 품위 없는 언행, 아키시노노미야 자매의 황족으로서의 인식과 자질 부족, 불화와 갈등만이 가득한 가풍, 궁내청 및 주간지와 퓨전해 황태자 일가를 신나게 두들겨 패 온 것 등등) 만천하에 공개되는 바람에 사람들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로 천황 자리가 넘어가는 걸 몹시 싫어하고 있다.[33] 실질적으로 암투는 키코 비가 다 했다고 보면 된다. 남편 후미히토의 역할은 어그로성 발언으로 궁내청과 우익을 하나로 모으는 것 뿐...[34] 남편 후미히토는 논란만 벌였지 암투에서 제대로 한 게 없고, 대부분 키코 비가 주도했다.[35] 사실 아키히토 덴노 내외를 위시로 한 다른 황족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공과 사를 완벽하게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공을 사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이건 극우 논란을 일으킨 토모히토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큰딸 아키코 공주에게 "너는 황녀니까 세금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가르쳤을 정도다. 하지만 후미히토만은 오만방자, 후안무치한데다 "공사는 구별되어야 한다"며 사적으로 온갖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게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36] 물론 현 황실 상황으로 이들을 내보내는 건 힘들겠지만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후미히토 일가를 신적강하하라고 요구하거나 이를 거부하더라도 아이코 공주를 다음 천황으로 삼지 않고 후미히토 일가를 천황으로 삼는다면, 그 날에는 천황제 폐지를 요구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제법 나오고 있는 상태. 참고로 일본 헌법 1조에 의하면 일본 국민들의 총의에 의하여 천황이 존재할 수 있는데, 이는 일본 국민들이 천황을 거부할 경우 그 순간 천황제는 성립될 수 없다는 증거이니 이러한 여론이 강해지는 건 일본 황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치권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37] 일본에는 과거에 여성이 천황으로 즉위한 사례가 10번 있었다. 퇴위 후 복위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명수로는 8명.[38] 과거 여성 천황을 인정했던 왕조가 역성혁명 등으로 단절되고 남계 남성만이 천황이 될 수 있는 새 왕조가 내려온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이 8명의 여성 천황은 모두 게이타이 덴노로부터 이어지는 현 일본 황실에서 등장한 천황이다.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 에도 시대 출신으로 에도 시대의 고사쿠라마치 덴노는 200년 전 사람이라 전근대 시절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옛날도 아닌 셈. 참고로 생전퇴위 역시도 약 202년 전 에도시대때가 마지막이었다.[39] 농담이 아니고 진짜 뒷조사가 맞다. 궁내청이 정기적으로 흥신소에 의뢰해 부마 후보감들의 행실과 근황을 수시로 업데이트하고 있다.[40] 일단 타 미야케에 대한 간섭 행위 자체가 황실 예법에 어긋나는 데다가(이 때문에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해결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걸 무시하고 후미히토가 이거에 대해서 한 마디 하는 순간 후미히토의 장녀인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튀어나와 후미히토에게 역풍으로 들어온다.[41] 쇼와 덴노의 죽음으로 인하여 아키히토가 즉위할 때 신 연호인 헤이세이가 발표한 걸 예로 드는데, 일세일원제 체제에서 생전퇴위 자체가 일본에서는 유례가 거의 없으므로 기존의 사례와 비교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먼 옛날에는 생전퇴위 전례(202년 전 고카쿠 덴노의 생전퇴위)가 있었지만, 그땐 일세일원제가 아니므로 이번과 상황이 다르다.[42] 10일 동안 쉴 수 있다고 한다.[43] 이 때문인지 몰라도, 일본 언론들은 앞다투어 나루히토 황태자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보도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44] 사실 해당 논란은 후미히토가 2018년 12월 자신의 생일 기념한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들 중 하나로서 이 발언 때문에 궁내청과 일본 정부가 부리나케 뒷수습을 했었을 정도이지만 현 천황 즉위 때에도 논란이 되었다가 일본 최고 재판소에서 정식으로 기각된 바 있을 정도로 나름 오래된 논리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특정 정치 논리에 매몰된 극소수 집단의 항의였다면 이번에는 황족, 그것도 2019년 5월 1일 이후에는 천황 승계 서열 1위가 되는 사람이 이를 언급하였기에 그 파장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45] 사실 천황제 자체가 신토 양식의 중심이자 상징(象徴)이라는 걸 감안하면, "문제 없다"고 대답한 게 60%대라는 것 자체만으로 천황제 자체의 위기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을 정도.[46] 남동생 후미히토의 장녀인 마코 공주의 만 28세 생일이기도 하다.[47] 현 아키히토 덴노도 황태자이던 시절이던 1988년 총리로부터 정세 설명을 들은 적이 있으나 이는 당시 천황이던 쇼와 덴노가 병중이던 상황이라 가능했다.[48] 참고로 일본 연호에 자주 사용되는 한문들 중에서 '안(安)'도 약 19회 정도로 제법 등장한 편이다.[49] 사실 이건 당초에 없었던 일인데, 이는 일본 정치권 내에서 "신 천황 연호 결정 과정에서 천황을 배제하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여론을 고려하면서 발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