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05:17:16

니시 토시히사

니시 토시히사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1992~2005).svg파일:2002 JS 우승로고.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0 2002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6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신인
1995년
야마우치 야스히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니시 토시히사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7년
사와자키 토시카즈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9~2002년 센트럴리그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1998년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니시 토시히사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3년
이마오카 마코토
(한신 타이거스)
}}} ||
파일:니시 토시히사 2군감독.png
<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니시 토시히사
仁志敏久 / Toshihisa Nishi
생년월일 1971년 10월 4일 ([age(1971-10-04)]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이바라키현 코가시
학력 죠소가쿠인 고등학교 - 와세다대학
사회인야구 일본생명(1994~1995)
신장 171cm, 75kg
포지션 2루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5년 드래프트 2위(역지명)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6~2006)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007~2009)
랭커스터 밴스토머즈 (2010)
지도자 경력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내야 수비·주루코치 (2013~2020)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U-12 감독 (2014)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2군 감독 (2021~2023)

1. 개요2. 현역 시절3. 은퇴 이후4. 기타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소속 야구선수.

현역 시절엔 시노즈카 카즈노리의 은퇴 이후 공석이 되어 있던 요미우리의 2루수를 맡아 공수 양면에서 두루 활약하였으며, 이후 요코하마와 미국 독립리그를 거쳐 은퇴한 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약하다 현역 말년을 보낸 요코하마의 2군 감독을 역임하고 있다.

2. 현역 시절

파일:니시 토시히사 요미우리.jpg

죠소가쿠인 고등학교-와세다대학을 거쳐 사회인야구팀 니혼생명에서 2년간 뛰다 1995년 드래프트 1위 지명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입단 첫 해부터 주전 2루수, 3루수[1]로 뛰면서 타율 .270/OPS .703 7홈런 24타점 17도루를 기록해 1981년 하라 타츠노리 이래 구단 역사상 15년만의 센트럴리그 신인왕을 수상했고, 1996년 일본시리즈에서도 팀은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1승 4패로 우승을 내줬고 니시 본인도 시리즈 마지막 타자가 되었으나 팀 최다인 5안타를 쳐내며 시리즈 감투선수상[2]을 수상했다.

이듬해인 1997년부턴 다시 본래 포지션이었던 2루수로 전향했고, 이 해엔 타율이 2할 4푼대로 떨어지는 등의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으나 3년차부터 재차 타격이 나아지며 이후부터 요미우리를 대표하는 2루수로써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1999~2002년까지 4년 연속으로 2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2004년엔 커리어하이인 176안타, 타율 .289/OPS .804 28홈런 60타점을 기록하면서 당시 역대 최다인 259홈런을 날리며 사상최강 타선이라 일컬어지던 요미우리 강타선의 한 축을 맡았다.[3]

그러나 2006년엔 노쇠화와 손목 골절이 겹치며 64시합 출장, 타율 .185 1홈런 7타점으로 커리어로우를 기록했고, 시즌 종료 후 포수 오다지마 마사쿠니와의 트레이드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했다.[4][5] 요코하마에선 OPS 7할을 넘기지 못하는 등 노쇠화로 인해 요미우리 시절보다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2년 연속 10홈런을 치며 어느 정도 건재를 과시했으나 2009년에 또 다시 타격 부진으로 1할대를 찍으며 2006년과 별 다를 바 없는 성적을 기록했고 시즌 종료 후 요코하마에서 방출되었다.

이후 2010년 미국 독립리그 구단인 랭커스터 밴스토머즈에 입단하며 현역 연장을 노렸으나 이곳에서도 2할대를 간신히 찍는 부진한 성적에 그치며 결국 이 해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택했다.

통산 성적은 타율 .268/OPS .713, 1591안타 154홈런 541타점 135도루이다.

3. 은퇴 이후

은퇴 후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수비주루 코치를 역임했고, 2014년엔 U-12 감독을 역임하였다.

2021년부턴 현역 말년을 보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2군 감독을 2023년까지 역임하였다.

4. 기타

  •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8년 하계 코시엔 대회 개회식에서 시구자로 등판한 나루히토의 시타자로 나섰던 에피소드가 있다. 이 대회는 쇼와 시대 마지막 코시엔 대회이기도 하다.
  • 하라감독과 불화가 있었다는 소문은 많았는데, 본인이 이를 부정했다. 니시는 대스타였던 하라를 어렸을 때 부터 동경하고 있었고 신인이었을 때 하라의 등번호인 8번을 이어 받았을 때 니시 본인부터 놀랐다고 한다. 실제로는 하라감독이 니시에게 컨디션이 나쁘다면 2군에 가서 조정늘 거치고 니시 네가 컨디션이 올라왔다 생각되면 나에게 알려달라 했고, 2군에서 조정을 거치고 하라감독에게 연락을 했더니 바로 하라감독이 1군으로 콜업을 해줬다고
  • 일본에서는 일본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빅마우스 본인 주장이 강한 선수로 유명하다. 와세다 대학 때 주장으로 마지막 경기 때는 선수들과 본인이 짠 라인업을 감독에게 찾아가 이 라인업으로 경기를 하고 싶다며 라인업을 관철 시킨 일화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다.

  • 공교롭게도 니시가 요미우리를 떠난 이후 요미우리에서 2루수를 맡은 선수들이 외국인선수 포함 계속 보강을 하는데,도, 불안정한 상태로 부진할 성적을 거둬(첫 1년 동안은 괜찮다가 다음해는 부진이나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니시가 팀을 떠난 2007년 부터 요미우리의 2루수 중 2년연속 규정타석을 지킨 선수는 한명도 없다고 한다).일본에서는 이걸 니시의 저주라고 부른다.


[1] 초기엔 원래 포지션이었던 2루수로 뛰다가 3루를 지키던 신입 외국인 선수 제프 만토가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방출되면서 3루수를 맡게 되었다.[2] 패전팀에서 가장 잘한 선수에게 주는 상[3] 259홈런으로 한 시즌 팀 역대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홈런왕을 차지한 터피 로즈는 45개, 고쿠보 히로키는 41개, 아베 신노스케 33개, 다카하시 요시노부 30개, 로베르토 페타지니 29개를 담장 밖으로 날렸다. 그러나 팀은 리그 3위에 그쳤는데 타선은 파괴력에 비해 짜임새나 응집력이 떨어졌고 마운드가 붕괴하여 투타 밸런스가 엇박자를 그렸기 때문이다.[4] 당시 하라 타츠노리 감독과의 불화로 내쳐진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돌았으나 니시 본인이 이 설을 부정했다.[5] 여담으로 니시가 떠난 뒤 요미우리는 2루수 자리를 고정시키지 못하여 매년마다 여러 선수들이 번갈아가며 2루수를 맡는 통에 일본 야구 커뮤니티에선 니시의 저주 때문에 2루수들이 매년 물갈이되는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그나마 2019년 요시카와 나오키가 대두한 이후론 서서히 징크스가 풀려가는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