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07:52:45

아카호시 노리히로

아카호시 노리히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우수 신인
킨죠 타츠히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아카호시 노리히로
(한신 타이거스)
이시카와 마사노리
(야쿠르트 스왈로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3, 200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1, 2003~2006, 200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1~2005년 센트럴 리그 최다 도루

NPB 보유 기록
연속 타석 무홈런 2528타석[1]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53번
커트 밀러
(1999~2000)
아카호시 노리히로
(2001~2009)
[2]
타테야마 요시노리
(2014)
}}} ||
파일:아카호시 노리히로 프로필.jpg
아카호시 노리히로
赤星憲広 | Norihiro Akahoshi
출생 1976년 4월 10일 ([age(1976-04-10)]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아이치현 카리야시
학력 아이치현립 오부 고교 - 아지아대학
신체 170cm, 66kg, A형[3]
포지션 중견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2000년 드래프트 4라운드 (전체 47번, 한신)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2001~2009)
국가대표
[ 펼치기 · 접기 ]
올림픽 2회 (2000, 2003[4])
응원가 CD판(2001)[5]
한신 1번(2001~2002)[6]
한신 2번(2003~2004)[7]
한신 3번(2005~2009)[8]
배우자 토쿠하라 에리(1988년생, 2022년 결혼 ~ 현재)
SNS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LINE BLOG 아이콘.svg 파일:라인 아이콘.svg

1. 개요2. 프로 생활 이전3. 프로 시절4. 현역 은퇴 이후5. 플레이 스타일6. 여담7. 연도별 성적

[clearfix]

1. 개요

파일:아카호시 노리히로 도루.jpg
일본의 전 프로야구선수이자 현 야구해설자, 탤런트. 2000년대 한신 타이거스 부동의 주전 중견수이자 테이블 세터로 활약했던 선수였다. 데뷔 시즌이었던 2001년부터 2005년까지 5년 연속으로 센트럴리그 도루왕을 차지했던 준족이었고[9] 총 6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한신 외야수비의 중책으로 한신 팬들에게 대단히 높은 인기를 구가했던 선수였다. 별명은 성인 아카호시(赤星)의 붉은 별이라는 의미에서 따온 ‘레드스타’, ‘붉은 혜성’ 등이 있었고, 팬 이미지에서는 '빨간색', '3배 빠르다'와 엮어서 샤아 아즈나블로 그려지거나 했다.[10]

대학과 사회인야구를 거쳐 25살이라는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프로에 입성했고, 불의의 부상과 희귀병으로 9년 만에 일찍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만 했으나 헤이세이 시대에 가장 많은 도루를 기록했고, 2021시즌 종료 기준 일본프로야구 통산 도루 9위에 해당하는 381도루를 기록하며 한신 구단 최다 도루 기록을 가지고 있는 등 짧은 기간이었지만 야구계에 나름의 족적을 남긴 선수이기도 하다.[11][12]

2. 프로 생활 이전

어릴 적부터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아카호시는 야구를 포함해 수영, 축구 등 여러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장기였던 스피드는 유치원 시절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본인 왈 “뭘 해도 잘해서 재미가 없었다”고. 야구부 코치를 맡고 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야구부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그만두기 전까진 아카호시를 굉장히 엄하게 훈련시킨다고 예고하자, “그럴거면 축구할거야!”라며 축구부 입부를 택한다. 결국 아버지가 코치직을 그만두고 나서야 야구부에도 가입한다.[13][14]

중학교 때는 내야수로도 뛰었는데 당시 야구부 내에서 스피드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아카호시 본인보다 발이 빨랐던 선배를 만나고 승부욕이 생겨 노력에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15] 이때부터 지루해하던 야구에 열정적으로 임하게 되었고, 어렸을 적의 마인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중학교 졸업 이후 고시엔 진출을 희망하던 아카호시는 사립학교로 진학하는 대신 현립 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하여 아이치현립 오부 고등학교 야구부[16]에 들어간다. 본인은 코시엔 진출은 희망했지만 단순히 야구 성적만을 위해서 가는 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파일:아카호시 노리히로 고등학교.jpg
고등학교 시절에도 주로 내야수로 뛰었는데, 고등학교 이전까진 본디 우투우타였지만 당시 야구부 감독이 아카호시의 빠른 발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우투좌타를 해볼 것을 권유하면서 좌타자로 전향했고, 이후 고교 시절 3년 내내 주전으로 활약한다. 빠른 발을 이용해 넓은 수비범위를 가져가는 2루수유격수를 주로 맡았는데 아이치현 출신답게 주니치 드래곤즈타츠나미 카즈요시를 매우 동경했다고 한다. 170cm의 작은 키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마찬가지로 173cm의 비교적 작은 키에 같은 우투좌타라는 점, 그리고 자신의 고향 연고팀인 주니치에서 맹활약하던 타츠나미는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훗날 밝혔다. 이때 당시 팀의 주요 득점 패턴은 아카호시가 어떻게든 1루에 출루하고, 2루와 3루로 도루를 한 다음, 스퀴즈로 1점을 짜내는 방식이었다. 해당 방식이 나름 잘 먹혔는지 팀은 1993년, 1994년 춘계 코시엔 대회에 2년 연속 진출할 수 있었다.[17] 그러나 1993년 대회에선 2루수로 출전했고, 1994년엔 유격수로 출전했는데 아카호시가 2년 연속으로 치명적인 실책을 연달아 범하면서 팀은 결국 2년 모두 첫 경기에서 패하고 짐을 싸야했다.[18]

이후 고등학교 졸업이 다가왔지만, 체격이 너무 작았던 아카호시는 대학야구나 사회인야구로 가서 경험을 쌓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스카우트들에게도 지적을 받았고, 대학 진학을 계획하게 된다. 고향 아이치현에 있는 츄쿄대학에서 교원 면허 취득을 목표로 시험을 봤으나 불합격했고[19] 이후 다른 입시 진로를 고민하던 도중 도쿄에 있는 아지아대학에서 권유가 들어왔는데, 역시 교원 면허 취득이 가능해 아카호시는 아지아대학 진학을 결정한다.[20]
파일:아카호시 노리히로 대학교.jpg
대학교에서도 1학년 때부터 주전 내야수 자리를 얻었고 2학년 때부터 외야수로 본격적으로 전향하여 아지아대학이 소속된 동도대학 1부 리그 베스트 나인 3회에 통산 타율 .279 3홈런 27타점 45도루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졸업년도인 1998년엔 메이지진구 야구대회에서 우승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지아대학 야구부에선 특유의 빡센 군기와 많은 훈련, 공부량으로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아이치현에서 처음 상경해 오부 고교 출신 최초로 도쿄도 대학 야구 연맹에 속한 야구부에 속하게 된 아카호시는 자기가 여길 왜 왔지하면서도 포기하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고 한다.

훗날 아카호시는 이때를 회상하며 “프로에 갈 수준까지 성장한 것은 기술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지아에 진학한 덕분일 것이다.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4년 간 야구에 몰입하며 지옥 같은 생활을 견딘 덕에 지금 이렇게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음은 틀림없다.”라고 말하면서도 아지아 시절에 대해 엄청 질색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 중 화룡점정 같은 말이 “그곳에 들어가서 야구를 시작한 날부터 끝나던 날까지, 한 번도 들어가서 잘 됐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한번 더 그곳에서 4년을 보내라고 한다면 진짜 무리다. 몇 억을 줘도 무리다. 이젠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였다. 훈련이 그렇게 빡센 것을 알았다면 진학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 그 와중에 아카호시가 계획했던 교원자격증은 사회과 교원 면허를 땄다. 아예 야구 선수가 되지 못하면, 고등학교 선생이 되어서 야구부 감독을 하고 싶었다고.

그래도 대학 4년 간의 경험과 진구 대회 우승이라는 경력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아카호시는 다시 한 번 프로야구를 지망했으나 여전히 작은 체구가 문제점이었다. 이후 아카호시는 사실상 체념하고 사회인 야구팀이었던 JR 동일본에 입사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다. 다른 야구 팀에서도 어느 정도 제의는 있었지만, 이쯤 되니 먹고 살 길이 걱정이어서 직장의 안정감을 중시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강화 지정 선수[21]에 선정된 아카호시는, 치바 롯데 마린즈한신 타이거스의 캠프에 참가하였는데 이때 당시 한신의 감독이었던 노무라 카츠야가 아카호시의 스피드를 보고 당시 팀의 준족이었던 타카나미 후미카즈[22] 와 대결을 붙였는데, 아카호시가 더욱 빨랐다. 본인은 이때 ‘혹시, 아직 프로의 가능성이 남아있는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고.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본선에도 로스터에 올랐다. 등번호는 26번. 그러나 많은 기회는 받지 못했고 주로 대주자로 경기에 나섰다. 최종 성적은 5경기 나와 2타수 무안타 2도루. 한국과의 예선전에도 9회말 1루 대주자로 투입되어 2루 도루에 성공했고 타구치 소의 안타 때 홈으로 질주했으나 이병규의 다이렉트 홈 송구에 잡히고 말았다.

올림픽도 끝나고 혹시나 싶어 소속팀이던 JR 동일본의 차장 자격까지 취득한 아카호시는 놀랍게도 한신 타이거스의 4라운드 지명을 받게 된다. 한신 감독이던 노무라 카츠야발 빠른 놈이 부족하니, 하나 건져보자는 의미로 4라운드에서 뽑은 선수. 실제로 스카우트가 “(녀석은) 다리 뿐이에요”라고 하자 '9회말 동점 만루 상황에서 대주자로 쓸란다'는 코멘트도 했었다고 한다.[23][24][25]
파일:아카호시 노리히로 입단회견.jpg
본인의 입단회견에서 노무라 카츠야 감독과 함께[26]
아카호시는 올림픽에서도 주전으로 뛰지 못했는데 프로에서 활약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지만 “해고되는게 무서워서 안가는 것보다, 일단 들어가서 해고되는 것이 후회는 안할 것이다”라는 생각에 한신 입단을 결정했다. 당시 주전 중견수였던 신조 츠요시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뉴욕 메츠로의 이적이 결정되었던 때 입단했으며, 입단 기자회견에서 '신조 선배의 빈 자리는 내가 채우겠다!'고 발언해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는 '신조 선배의 빈 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하려다가 잘못 말한 거라고 한다.[27]

3. 프로 시절

F1 세븐의 1호차가 되어 노무라 감독의 총애를 받은 아카호시는 허리 디스크 병력 때문에 복귀가 늦었지만 1군 캠프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체격과 타격 스타일 탓에 타구가 내야수 머리도 넘어가지 않던 수준이었던 아카호시에게 노무라 감독은 빠른 발을 살리기 위해 아예 공을 3루수-유격수 사이 쪽으로 굴리고, 몸쪽 공에 대처하며, 출루율을 높이기를 지시했다. F1 세븐 2호차였던 후지모토 아츠시[28]와 같이 사이좋게 팔에 고무 밴드를 감고 땅볼 치는 연습을 했다고. 그리고 ID 야구의 대표격이었던 노무라 감독답게 주루를 위해선 투수의 볼 배합도 익혀야 한다고 지시하며 아카호시는 해당 사항을 익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렇게 개막 1군 로스터에 들게 된 아카호시는 데뷔 첫 안타를 3월 31일 요미우리전에서 번트 안타로 기록했고[29], 이후로 주전 2번자리를 차지하며 입단 1년차에 도루왕, 신인왕,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자신의 발언대로 신조의 빈 자리를 훌륭히 채웠다.[30] 한신 구단으로서도 1956년 요시다 요시오 이후 45년 만의 도루왕 배출이자, 사상 처음으로 신인왕, 도루왕을 동시에 수상한 선수가 나오자, 아카호시의 등번호였던 53번을 주전 선수들이 주로 다는 낮은 번호로 변경하자고 건의했다.[31] 하지만 아카호시는 자신이 프로에서 출중한 활약을 펼치면서 달았던 53번에 나름대로 애착이 생기게 되어 차라리 자신의 색을 입히겠다며 거절했다.

이후 2005년까지 5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하며 일약 한신의 1번 중견수 자리에 자리잡았다.[32][33][34] 2002년에 노무라 카츠야 감독이 물러나고 작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을 역임했던 호시노 센이치가 신임 감독이 되었지만, 이 해에도 아카호시는 여전히 중용되었다. 그런데 이 해에 스피드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다리 장비를 스스로 벗었다가 4월 18일 주니치전에서 자신이 친 타구에 맞아 오른쪽 정강이뼈가 골절되어 3개월 동안 결장하게 되었고, 복귀 후에도 기량 회복이 더뎌지면서 결국 규정타석에 미달한 채 78경기 출장에 타율 .252, 출루율 .311로 전년 대비 타율이 4푼, 출루율도 6푼 가까이 떨어지는 등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이렇게 부진한 와중에도 26도루를 기록하며 2년 연속으로 도루왕을 수상했다.[35]
파일:아카호시 노리히로 끝내기.jpg}}}||
파일:아카호시 노리히로 끝내기 (2).jpg
||
본인의 프로 인생 9년간 가장 기억에 남은 플레이로 꼽은 장면
(좌) 2003년 9월 15일 히로시마전 끝내기 안타를 치고 / (우) 끝내기 안타 이후 호시노 감독과

2003년엔 같은 외야수카네모토 토모아키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FA로 한신에 이적하면서,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스프링 캠프부터“아카호시는 대주자 요원이라고 대놓고 평가절하할 정도로 아카호시의 입지에 위기가 찾아왔다.[36] 하지만 실제로는 2년 연속 도루왕에 부상이 있어도 2할 중후반은 쳐줄 수 있는 아카호시를 호시노는 이미 주전 중견수로 낙점하고 있었고 아카호시를 채찍질하기 위해 일부러 아카호시를 평가절하하는 코멘트를 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맞이한 2003시즌에서는 한신 부동의 2번 타자로 풀타임을 뛰었고 규정타석 타율 3할을 달성하며 타격감도 회복, 61도루를 기록하며 3년 연속 도루왕을 기록함과 동시에 한신 구단 역사상 최다 도루 기록을 갱신했다.[37] 그 결과 처음으로 올스타전에도 참가할 수 있었고, 시즌 내내 무실책으로 수비율 100%를 달성하며 두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 해의 아카호시의 맹활약을 상징하는 명장면으로 9월 15일 대 히로시마 전에서 끝내기 안타로 팀의 승리를 이끌면서 한신의 매직 넘버가 1로 줄어들었고, 같은 날 마지막으로 우승 가능성이 남아있던 2위 야쿠르트가 요코하마에게 패배하면서 한신의 18년 만의 리그 우승과 비밀번호 종결을 사실상 자신의 손으로 확정짓게 되었다. 당시 앞 순번 타자였던 이마오카 마코토고의사구로 출루하며 1아웃 만루 상황이 되었고 호시노 감독에게 무엇인가를 듣고 타석에 선 아카호시는 초구를 곧바로 안타로 연결하며 경기를 끝냈는데, 경기 이후 히어로 인터뷰에서 호시노가 있는 힘껏 갖다와라!(思い切りって行って来い)라고 말하였다고 밝혔다.

이후 2003년 일본시리즈에선 7차전까지 전 경기 출장했지만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1차전에서 훌리오 줄레타가 끝내기 안타를 날릴 때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다 왼쪽 팔꿈치 안쪽 측부 인대가 손상되어 전치 1개월 수준의 부상을 입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선발 출장을 이어갔으나 인대 부상이 타격에 악영향을 끼치면서 결국 23타수 4안타 1도루 3삼진 타율 .174에 출루율도 .208로 시리즈 팀 평균이었던 .253에 미치지 못하는 등 아쉬운 성적을 남겼다. 이후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 국가대표로도 선발되었으나 부상 때문에 자진 사퇴하였다.

오카다 아키노부 체제에서도 부동의 주전을 맡던 아카호시는 2004년과 2005년에도 각각 64도루와 60도루를 달성하며 통산 1000도루의 전설인 후쿠모토 유타카 이후 처음으로 3년 연속 60도루를 기록함과 동시에 센트럴리그 사상 최초로 5년 연속 도루왕 수상을 달성했다. 또한 세 시즌 모두 규정타석 타율 3할을 달성하며 타격에서도 출중한 성적을 기록했고, 특히 2005년엔 4할에 육박하는 출루율(.392)을 기록하며 한신의 2005년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2004년 미일야구 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미일야구에서 8경기 모두 1번타자 중견수로 풀타임 출장하여 32타수 10안타 타율 .312 4볼넷 7도루로 맹활약하며 당시 MLB 올스타로 방일한 데이비드 오티즈에게 “수트 케이스에 넣어서 데리고 돌아가고 싶다며 인정받았다.

이후 2005년엔 통산 250도루를 달성했고 전술했다시피 6월 12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교류전 홈경기에서 에지리 신타로[38]를 상대로 본인의 통산 3번째이자, 마지막 홈런을 기록한다. 이 홈런은 홈구장인 한신 코시엔 구장에서 친 처음이자 마지막 홈런이기도 했다.[39] 이 해에 190안타를 기록했는데 그 중 165개가 단타로, 스즈키 이치로가 기록했던 일본프로야구 한시즌 최다 단타 기록을 경신했지만, 같은 해에 아오키 노리치카가 169개를 기록하는 바람에 기록은 얼마 가지 못했다.[40] 2번째로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한신도 2년 만에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2005년 일본시리즈에 진출했으나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33-4로 박살났다. 아카호시 본인도 시리즈 4경기 동안 교체 없이 풀로 출장했음에도 타율 .142(14타수 2안타)로 부진하며 팀의 참사를 막아내지 못했다.[41] 본인도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큰 굴욕이라 했을 정도.

2006년부터는 이마오카 마코토에 이어 한신의 선수회장을 맡았고 2년 연속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 이 해엔 35도루를 기록했으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아오키 노리치카가 리그 1위인 41도루를 기록하며 6년 연속 도루왕에 실패했다. 이전 시즌보다 현저히 도루가 줄었는데, 본인은 이에 대해 자신에 대한 상대 팀들의 대응책이 강구되면서 기존엔 도루를 할 수 있던 타이밍에 출발해도 아웃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에 도루수를 줄이는 대신 출루 상태에서의 위압감으로 상대팀 배터리에게 부담감을 주는 방식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꿨다고 한다.[42] 또한 타율과 출루율에서도 모두 하락을 겪어 골절상을 겪은 2002년 다음으로 안 좋은 성적을 기록한다. 프로 생활에서 부침을 겪기 시작하자 아카호시 본인의 심적인 압박이 컸다고 한다.

2007년엔 토리타니 타카시와 타순을 바꾸어 2번으로 주로 출장했고 다시 타율 3할을 기록하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2006년 경부터 목과 팔에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이 시즌에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경추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아카호시 본인은 괜찮다며 복귀했지만 경기력에도 조금씩 영향이 가기 시작해, 여름 이후로는 도루를 기록하지 못했고 결국 이 해 도루수는 24개에 그쳤다. 그 외에도 5월 4일 히로시마전에서 다이빙 캐치 시도로 디스크가 악화되어 3주간 결장했고, 9월 23일 야쿠르트 전에서도 허리에 공을 맞아 요추 돌기가 골절되며 역시 몇 경기를 결장해야만 했다. 여러모로 고통이 잇따랐던 시즌이긴 했으나 그래도 이해 통산 1000안타-300도루 마일스톤을 달성했다.

이후 2008년엔 본인이 오프시즌부터 꾸준히 해온 목 강화 운동과 구단 측의 배려로 전 경기 출전을 하면서도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도루수도 41개로 준수했지만 야쿠르트의 후쿠치 카즈키에게 불과 1도루 차이로 1위를 내주면서[43] 또 다시 도루왕 수상에 실패했다. 또한 본인의 프로 통산 최고 타율을 .317로 갱신했고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3년 연속 규정 타석 무홈런에 2089타석으로 연속 타석 무홈런 신기록을 세우는 한 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요시다 요시오의 기록과 타이기록인 350도루를 10월 12일에 달성하면서 일본프로야구 역대 15위에 올랐다. 이런 아카호시의 활약 등으로 팀은 전반기에 매직넘버가 켜질 정도로 역대급 상승세를 보였으나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후 주춤하다 한때 13게임차나 떨어져 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역전 우승을 허용하는 참사를 겪었다. 아카호시는 우승과 도루왕을 모두 눈앞에서 놓친 셈이 되었다.

2009년엔 개막하자마자 2번째 경기 만에 기존 요시다 요시오의 기록을 경신하며 한신 구단 사상 최다 도루 기록 보유자가 되었고 FA권리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즌 초부터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진통제를 맞아가며 경기에 나섰고, 8월 2일 아베 신노스케와 홈에서 충돌하며 며칠간 결장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몸을 사리지 않던 아카호시의 플레이들이 쌓이고 쌓여 9월 12일 코시엔에서 열린 요코하마전에서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3회 초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친 우중간으로의 타구에 아카호시는 다이빙 캐치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는데, 이 플레이로 경추 디스크가 악화됨과 동시에 중심성 척수 증후군을 입었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트레이너에게 업혀서 경기장에서 빠져나가야 했을 정도로 큰 부상이었고, 이후 니시노미야시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아 다리는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감각이 둔해졌을 뿐만 아니라 손가락 등의 말단 부위에 후유증이 남게 되었다. 부상을 입은 직후에는 다시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하던 아카호시는 한결 안심하고 내년에도 뛰겠다는 일념으로 재활훈련을 시작하였으나, 결국 구단측으로부터 은퇴 권고를 받게 되었다. 또한 의사에게서도 같은 부위에 또 부상을 입으면 불수의 가능성, 심지어는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권고를 듣고 결국 아카호시는 12월 9일에 기자회견을 열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기자회견에서 "부상이 없었다면 후배들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더 뛸 수 있다는 자신은 있었다" "완전히 불태운 기분이 아니다" 같은 표현으로 은퇴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했지만, 잦은 부상을 부른 플레이들에 대해선 "뛰어든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야구선수의 본능으로서 했던 일이니깐요. 그보다도 '조금 더 다가갔다면 잡을 수 있었을텐데..'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라며 본인의 입장을 밝혔고, 3할에 조금 못 미친 본인의 통산 타율 .295에 대해서도 프로에서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몰랐다며 자랑할 만한 숫자라고 하였다. 이후 본인의 의지로 별도의 은퇴시합은 열리지 않았고, 그의 선수 생활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4. 현역 은퇴 이후

아카호시의 갑작스러운 은퇴로 한신 구단은 등번호 53번을 준영구결번으로 지정해, 사용하기에 적합한 선수가 나타날 때까지 비워두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등번호 53번은 잠시 메이저에서 돌아온 투수인 타테야마 요시노리가 달다가 다시 결번이 되었고 2018년 시마다 카이리에게 계승되었다. 그 시마다는 2018년 오픈전에서 주전 중견수의 가능성을 보여주나 싶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 2군으로 내려가며 묻힌 상태.

은퇴 후엔 요미우리 신문 산하의 닛폰 테레비요미우리 TV 등에서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하며 방송계에서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11년 시즌 종료 후 와다 유타카의 감독 취임과 동시에 코치직을 제안받았으나 컨디션 문제를 이유로 거절했고, 이후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감독직에 오를 때에도 코치직 제안이 왔으나 이때도 고사했다.

한신 외야수비의 중핵이었던 아카호시가 갑자기 은퇴함에 따라 불어닥친 후폭풍이 꽤 거셌는데 은퇴 후 몇 년간 한신의 외야 수비라인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노쇠화로 인해 수비가 나쁜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2010년에 입은 어깨부상으로 그야말로 소녀어깨가 되어버렸지만 연속출장기록 및 센트럴 리그지명타자 제도가 없다는 점 때문에 꾸준히 좌익수로 기용되던 상황. 연속출장 기록이 중단된 이후에도 수비를 나설 경우 좌익수로 기용되었다. 게다가 역시 수비가 좋지 않아 좌익수에 적합한 맷 머튼우익수를 봤고 결국 메이저에서 리턴한 후쿠도메 코스케를 영입하며 코너 외야 정리. 아카호시의 자리인 중견수는 신인급 선수들이 돌아가면서 7~8년간 거의 자유석 수준으로 운영되며 간신히 버티다가[44] 2019년에 신인으로 입단한 치카모토 코지가 주전으로 자리잡은 이후에야 안정화됐다. 이렇듯 한신의 외야에서 큰 역할을 해준 선수였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많은 한신 팬들이 아카호시의 이른 은퇴를 아쉬워하며 그를 그리워했다.

5. 플레이 스타일

파일:아카호시 노리히로 도루 (2).jpg
誰が1番を打っても、存在感としては赤星の3分の1にも満たないんじゃないか。
누가 1번 타자로 나서도, 존재감으로는 아카호시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ㅡ 오바나 타카오,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종합코치 및 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45]
赤星を塁に出すのはソロホームランと同じだから、警戒しすぎるぐらいでちょうどいい。
아카호시를 루에 내보내는 것은 솔로 홈런과 같으니까, 경계하는 수준으로 알맞다.
노무라 카츠야, 당시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아카호시에게 한번에 12개의 견제구를 던지게 하며.

전형적인 올드스쿨 리드오프. 170cm의 단신으로 호리호리하다 못해 깡말라보이는 외모를 지녔으며 이미지대로 발 하나는 미친 듯이 빨랐다. 좌타자로 타격 이후 1루까지 3.74초, 번트 시도땐 3.50초까지 기록할 수 있는 스피드 스타로 루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도루 문제 때문에 상대 투수들에게 부담이 되는 선수였다. 요미우리의 우에하라 코지는 본인의 유튜브에서 가장 상대하기 싫었던 주자로 꼽았던 적이 있을 만큼 루상에서 위압감을 보여준 선수였다.

타격에서는 3할 타율을 5차례나 기록했을 정도로 컨택 능력이 괜찮았지만, 갖다 맞춘 뒤 발로 뛰어나가는 전형적인 슬랩히터라 은퇴할 때까지 9년동안 5,000번 정도의 타석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홈런이 고작 "3개"에 단 한 시즌도 장타율 4할을 넘겨본 적이 없었다. 체감이 안 간다면, 그 이대형조차 통산 9홈런을 기록했고 선수 시절 딱 한 해나마 장타율 4할을 기록한 적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된다.[46] 2,528타석 연속 무홈런이라는 일본 기록도 갖고 있다.[47] 대신에 발로 만든 3루타는 제법 많으며, 볼넷도 적지 않게 얻어냈기에 출루율도 높아서[48] 리드오프를 맡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였다.

수비에서는 노쇠화한 카네모토 토모아키, 히야마 신지로, 이후의 사쿠라이 코다이 등 전반적으로 수비범위가 넓지 않은 선수들이 주로 포진한 한신 외야에서 중견수로 뛰면서 빠른 발을 살려 먼 거리를 빠르게 달려 공을 잡는 러닝 캐치 등의 호수비를 많이 선보였다. 아카호시의 수비 범위가 워낙 넓다보니 노무라 카츠야 감독은 아카호시의 어깨가 약하지만 타구를 향해 뛰어가기만 해도 주자는 (아카호시가 공을 못잡을지 보장할 수 없어) 정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만 다이빙 캐치나 슬라이딩 캐치 같은 허슬 플레이를 많이 보여준 부작용으로 잔부상에 시달리다 결국 선수생명은 물론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척추 손상을 입으며 전성기에 반강제로 은퇴를 하게 된 비운의 선수. 아카호시의 선배격이자 통산 도루 역대 1위를 기록한 후쿠모토 유타카[49]가 해설자로 아카호시의 플레이를 보며 자주 지적했던 부분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우려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 되었다.

6. 여담

2003년부터는, 그 해에 자신이 기록한 도루 수만큼의 휠체어를 병원이나 양로원에 기증해 왔다.[50] 은퇴시점까지 총 301개의 휠체어를 기부하였다. 간호사였던 누나에게 '병원에 휠체어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은 일, 그리고 작은 키와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이었던 프로야구선수가 현실로 이루어졌으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꿈을 나누어주고 싶다는 자신의 희망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51] 한신 타이거스의 선수회장으로 재임하던 당시에도 한신 고시엔 구장에 더 많은 휠체어가 들어올 수 있도록 구단 측에 요구하는 등의 공헌으로 2004년 골든 스피리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2005년에 아카호시는 야구를 통해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다음 세대에도 전하고 싶다는 생각에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야구팀 레드스타 베이스볼 클럽을 설립했다. 당시 아이들이 야구를 할 장소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2004년에 오릭스 블루웨이브킨테츠 버팔로즈의 합병, 단일 리그제 도입 논의에 따른 선수들의 파업이 일어나 위기감을 갖고 청소년팀이 조직된 J리그처럼 프로야구의 밑거름이 될 부분을 구축하고 싶다는 동기도 있었다고.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한신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휠체어 기부 등의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 인품도 좋은 선수였지만, 의외로 불 같은 면이 있는지 방송 카메라 앞에서 관객을 향해 대놓고 분노를 표출하는 사건을 저지른 적도 있다. 2008년 5월 24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9회 역전 2타점 적시타를 치면서 경기 MVP로 선정된 아카호시가 히어로 인터뷰를 하던 도중이었는데, 원정팀 선수가 히어로 인터뷰를 할 때에는 장내 마이크를 켜지 않기 때문에 관중석에서는 인터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느 관중이 '하나도 안 들린다!'며 농담성 야유를 던지자 이에 아카호시가 "(마이크가) 안 들어가 있다고, 이 자식아!(入ってねんだよこの野郎!)"라고 일갈한 것.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질문 전후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거친 말을 방송 마이크에 잘 들릴 정도로 지르는 모습이 정말 뜬금없게 보인다. 워낙 갑작스러웠던 탓에 기자는 마이크를 뺄 수도 없었다.[52]

현역으로 뛰던 당시엔 ZETT의 야구 용품을 애용했는데, 시드니 올림픽에 나갈 당시 다른 메이커들로부터는 냉대를 받았지만, ZETT는 정중히 자신에게 대해준 것에 감동했다고. 이후 스타덤에 오르고 나서도 선수들이 잘 쓰지 않던 ZETT사의 제품을 꾸준히 이용했다. 아예 본인이 스파이크의 개량을 세부적으로 요구하는 등 아주 적극적으로 제품을 써왔는데, 훗날 아카호시는 타사의 제품을 썼으면 400도루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ZETT사와의 신뢰관계가 도루 20, 30개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였다.

2012년에는 오사카부 카타노시에서 대회 실행위원장을 맡은 제1회 Ring of Red 카타노시 자선 마라톤을 개최하였다. 약 5,000명의 주자가 참가했는데, 2013년엔 규모가 좀 더 커져 약 6,000명의 주자가 참가하였다.

2013년 고시엔 대회에서 연속 커트로 논란이 된 치바 쇼타에 대해 간접적으로 프로에서 성공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한 바 있다.

초등학생 시절 축구선수로도 활동해서 그런지 프로야구선수였지만 엄청난 축빠로 알려져있다. 은퇴 후에는 평론가의 지위를 이용해서 J리그 취재나 월드컵 특집등에 나와서 코멘트를 하는 등 축빠기질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축구선수들과 인맥이 야구선수보다 두텁다는 반쯤 진담이 돌아다닐 정도.
파일:아카호시 노리히로 코난.jpg
명탐정 코난 극장판 18기 이차원의 저격수에서는 성우로 나왔다. 배역은 자신의 이름과 동일한 아카호시. 한국에선 박 형사로 로컬라이징되어 나왔다.

선수시절 사용했던 등번호인 53번은 한국의 이대형과 같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빠른 발을 주무기로 삼아 리드오프로 활약하며 도루왕을 여러 번 수상한 것, 주 포지션이 중견수였다는 것까지 일치한다.

또한 본인의 야구관이 독특한 것으로 유명한데, 도루에 대해선 발의 빠르기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주자의 기분과 용기라며 본인의 예시를 들며 귀루 등의 불필요한 생각을 하지 않고 도루나 진루에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적이 있다.[53] 또한 도루를 할 때는 주자도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공 한개를 지켜봐야 하는 타자는 볼카운트의 부담감이 가중되기에 뛴다면 최대한 빨리 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54] 실제로 아카호시의 도루 381개 중 초구에 140개, 2구째에서 100개가 기록되었다. 그리고 아카호시는 좌완 투수가 우완투수보다 도루하기 쉽다고 여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한국의 전준호김일권, 미국의 리키 헨더슨도 비슷한 말을 한 것과 같은 논리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도루에 대해 본인의 지론으로 아카호시식 도루라는 개념이 유명하다. 계산식은 아카호시식 도루 = 도루 - 도루자 * 2. 도루자를 왜 2배를 하느냐면, 도루자는 주자가 사라짐과 동시에 아웃카운트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아카호시식 도루가 0이라는 건 도루 숫자가 도루자 대비 딱 2배라는 것이고 공교롭게도 세이버매트릭스에서 주장하는 도루의 효율성과도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보통 세이버매트릭스에선 도루성공률 70% 미만인 경우에는 도루를 손해로 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 엄밀히는 64%가 세이버상 손익 0. 0보단 높아야 의미가 있으니 70%선을 기준으로 여기는 것. 이를 응용한 공식으로 아카호시식 도루저지 공식도 있다. 아카호시식 도루저지 = 도루 저지수 * 2 - 도루 허용 수. 다만 이 응용 공식은 생각보다 허점이 많은데, 투수의 슬라이드 스텝 같은 변수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조가 닛폰햄 감독에 부임하면서 한 닛폰 테레비 인터뷰에서 이 둘은 진지하게 주루에 관련된 토론을 했는데[55], 신조는 후지카와 큐지를 한신 감독, 아카호시를 한신 코치로 추천하였다. 그리고 천만 엔을 주겠다며 아카호시를 임시코치로 모시려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 인연인지 실제로 2022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스프링캠프 임시코치로 선임되었다.

전술했다시피 2022년 결혼 이전까지는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아왔다. 본인은 어려서부터 야구를 해서 쉴 틈이 없었지만 은퇴 이후 여유로운 시간에 빠져버려 휴일엔 집에 머무는 생활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TV 드라마 시청을 즐겨해, 방송되는 드라마는 죄다 녹화해 1.5배속으로 정주행을 한 뒤, 맘에 드는 작품들을 따로 엄선해 계속 보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은퇴 이후 게임인 프로야구스피리츠에 2019년 버전에 해설로 참여했다. 이후 2021 버전에서도 해설로 참여하며 동행을 이어갔다.
파일:아카호시 노리히로 성화.jpg
고향 카리야시의 대표로 선정되어 2020년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에 주자로 참여하였다.

7. 연도별 성적

  • 푸른 글씨는 NPB 최다,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역대 기록
연도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출루율 장타율 WAR
2001 한신 128 438 .292 128 9 4
(4위)
1 70 23 39
(1위)
50 64 .372 .338 2.5
2002 78 310 .252 78 7 4
(2위)
0 36 12 26
(1위)
15 56 .311 .300 1.2
2003 140 551
(3위)
.312 172
(3위)
17 7
(3위)
1 90
(4위)
35 61
(1위)
45 76 .378 .374 3.8
2004 138 570
(5위)
.300 171 20 6
(3위)
0 96
(3위)
30 64
(1위)
49 85 .356 .356 2.9
2005 145 601
(3위)
.316 190
(3위)
15 9
(1위)
1 119
(2위)
38 60
(1위)
69
(4위)
90 .392
(4위)
.376 5.8
(3위)
2006 142 566 .269 152 13 3
(5위)
0 84 20 35
(2위)
60 94 .344 .302 3.2
2007 121 400 .300 120 12 1 0 61 19 24
(2위)
39 58 .368 .335 2.1
2008 144 556
(3위)
.317 176
(3위)
15 1 0 94
(1위)
30 41
(2위)
73
(3위)
87 .398
(3위)
.347 4.6
2009 91 338 .263 89 9 1 0 48 8 31
(3위)
26 54 .322 .296 0.2
<rowcolor=#373a3c> NPB 통산
(9시즌)
1127 4330 .295 1276 117 36 3 698 215 381 426 664 .365 .340 26.2


[1] 2005년 6월 12일 당시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교류전에서 에지리 신타로에게 친 홈런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홈런을 치지 못하였다.[2] 부상과 희귀병으로 인해 조기에 은퇴하게 된 아카호시의 사실상 준영구결번으로 여겨졌다. 잠시 등번호를 이어받은 타테야마도 입단회견에서 곤혹을 표했을 정도. 타테야마 이후로도 3년, 총 7년의 결번 기간 이후 현재는 대졸 신인인 시마다 카이리의 번호로 쓰이고 있다.[3] NPB 공식 프로필[4]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예선 한정.[5] それ行け赤星 打て打て赤星 それ行け赤星 打て打て赤星 (나아가라 아카호시 쳐라 쳐라 아카호시x2) 데뷔 초창기 응원가 CD에 수록된 곡으로, 아래 1번 응원가가 유용되면서 CD판으로만 남았다. 응원가 유튜브 찾아보면 촌스러워서 안 쓰인게 잘됐다는 평이 많다[6] ゴーゴーレッツゴー赤星 バックスクリーンめざして 火を噴く一撃 俺達のヒーロー (고고 렛츠고 아카호시 백스크린을 향하여 불을 뿜는 일격 우리들의 히어로). 야마구치 시게유키, 아유카와 요시후미에게서 유용되었다.[7] フィールド駆け抜ける 世界一のスプリンター 期待と夢乗せて 走れ赤い彗星 (필드를 달려나가는 세계 제일의 스프린터 기대와 꿈을 싣고서 달려라 붉은 혜성). 가사의 세계(世界, 세카이)를 발음이 같은 세리그계(セ界)로 바꾼 경우도 있는데 セ界 쪽이 훨씬 더 유명하다. 2004년 응원가를 제작했던 중호연합회가 저작권 사칭 논란으로 사실상 퇴출되면서 교체.[8] シャープな打球 グランド突き抜けろ 走れレッドスター(Let's Go!) 赤星 チャンス切り開け, (날렵한 타구 그라운드를 꿰뚫어라 달려라 레드 스타 (Let’s Go!) 아카호시 찬스를 열어나가라).[9] 총 9시즌 동안 단 한 차례도 리그 도루 순위 3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3위는 은퇴 시즌인 2009년의 기록으로, 부상으로 50경기를 날렸는데도 3위에 든 것이다. 2009년을 제외하곤 모두 2위 안에 들었다.[10] 실제로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마이라이프 모드에서 종종 정말로 레드 스타로 등록명을 바꾸는 경우가 있었다.[11] 통산 도루 기준으로는 타카하시 요시히코나 고 마사유키같이 그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한신 재적 선수들도 있지만 이들은 타 구단에서 기록한 도루들이 합산된 기록이고 한신 구단에서만 기록한 도루는 아카호시가 최다이다.[12] 또한 헤이세이 기록 역시 스즈키 이치로처럼 다른 선수들이 헤이세이 시대에 일본에서 뛴 기록이 있지만 역시 헤이세이 시대(1989년~2018년) 내에 NPB에서 기록한 도루만으론 아카호시가 최다다. 2위는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뛰었던 아라키 마사히로. 또한 누적 뿐만 아니라 2004년 기록한 64도루도 헤이세이 시대 단일 시즌 최다 도루 기록에 해당한다. 이쪽의 2위 기록은 1997년 마쓰이 가즈오가 기록한 62도루다.[13] 축구부에 가입을 먼저 해 축구를 더 좋아하던 아카호시는 6학년 때 아이치현 대표팀의 공격수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야구부에 주장으로 뽑히자 겸직이 어려울 것 같아 결국 축구를 포기한다.[14] 이 당시 1대1 찬스가 와도 슛을 안하고 동료에게 패스를 하는 등 어려운 길을 고집하는 독특한 성격을 가졌었다고 한다. 본인은 “주어진 능력으로 간단히 이기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성격은 많이 바뀌긴 했으나 간단히 이겨나가는 걸 싫어하는 점은 여전하다고.[15] 해당 선배의 이름은 키토 켄스케로 훗날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트레이너가 된다.[16] 1980~9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축 선발 투수진의 일원이자 헤이세이 유일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던 마키하라 히로미의 모교이기도 하다.[17] 아카호시가 나온 오부 고교 야구부는 현립 고교이지만 당시엔 나름 강팀으로 1964년과 1980년 여름 코시엔, 1981년 봄 코시엔 출전 경험이 있는 팀이었다. 1980~81년 당시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던 선수가 앞 각주에서 언급했던 마키하라 히로미였다. 아카호시의 졸업 직후 1995년에도 봄 코시엔에 3회 연속으로 진출하였고 이후 성적 부진의 시기를 거치기도 했으나 2008년 여름 코시엔에 28년 만에 진출하게 되었다.[18] 여담이지만 아카호시가 졸업한 1995년엔 구마모토현 대표였던 죠호쿠 고교에게 승리하며 봄 코시엔 1차전 잔혹사를 끊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16강에서 효고현 대표인 신코가쿠엔 고교에게 패배하며 우승에 실패했다.[19] 본인이 밝히기로는 10:1의 경쟁률을 보이던 1차까진 합격을 했으나, 2차 시험 소논문에서 대책을 안 세우고 들어갔더니 실패했다고 한다. 본인을 포함해 8명 중에 7명이 떨어졌다고[20] 애초에 아지아대학은 학교 자체는 썩 좋은 학교가 아니지만 야구부만큼은 굉장히 잘 나가는 곳이라 그런지 훈련도 공부도 엄청 강제하는 곳이라서 교원 면허 취득 가능이 아니라 강요 수준이었다. 사실 교원 면허를 취득하고자 추가 수업을 들으면 훈련량을 줄여주기 때문에 어지간히 공부에 뜻이 없어도 훈련을 덜 하기 위해 야구부원들이 너도나도 교원 면허를 취득한다고 한다(...)[21] 한국의 국가대표에 비슷한 개념이다.[22] 정작 이 선수는 프로에서는 16년을 뛰었지만 만년백업이라 통산 59도루에 그쳤다. 시즌 도루 커리어하이는 10개이며 통산 도루성공율은 71.1%.[23] 이후 노무라 감독은 아카호시 등의 팀 내의 발빠른 유망주 7명을 묶어 'F1 세븐'이라는 이름으로 홍보했다. 80년대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에서 활약한 타카기 유타카-카토 히로카즈-야시키 카나메의 '슈퍼카 트리오'의 활약에 빗댄 표현이자 상위호환을 목표로 한 표현. 여담으로 이들은 각각 1~7호차로 불렸다. 이 F1 세븐의 멤버는 아카호시 노리히로(1호차, 통산 391도루), 후지모토 아츠시(2호차, 통산 27도루), 오키하라 요시노리(3호차, 통산 14도루), 카미사카 타이치로(4호차, 통산 15도루), 히라시타 코지(5호차, 통산 21도루), 마츠다 마사시(6호차, 통산 3도루), 타카나미 후미카즈(7호차, 통산 59도루, 위에서 서술한 캠프에서 아카호시 상대로 달리기에서 진 그 선수이다.)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객원 멤버 취급받던 타나카 슈타(통산 38도루)가 있었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아카호시와 아래에 서술할 후지모토 아츠시 빼고는 전원이 빠른 발을 이용한 대주자 요원에 그쳤다. 그나마 도루를 많이 한 게 59도루의 타카나미였다,[24] 실제로 ‘4라운더 아카호시 하아?’ 라는 밈이 생길 정도로 아카호시의 4라운드 지명은 한신 팬들 사이에서 논란거리였다. 당시 한신이 뽑은 8명 중 가장 많이 까인 선수가 아카호시였고, 그 다음으로 많이 까인 선수는 “이 지명은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노무라의 원대한 계획일 것이다.” 라고 까인 7라운더 후지모토 아츠시였다. 그리고 둘 다 프로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이 둘 외에도 세는나이 30살로 입단하게 되어 “프런트는 온실 샐러리맨이다.” 라고 까이게 만든 오키하라 요시노리(6라운더)는 주전은 못 했어도 내야 유틸 백업으로 나름 뛰었으며, 팬들이 왜 8라운더인지 이해 못 하겠다면서 150대 공도 홈런을 펑펑 칠 것이라고 가장 극찬한 카지와라 코지는 1군 통산 3타석 무안타를 기록하고 폭망했다. 그나마 팬들의 예측이 맞아떨어진 선수가 “얘는 처음 보는 애라 할 말도 없다.”라고 한 5라운더 카토 타카유키로 1군 기록 없이 4년만에 잘렸다.(닛폰햄의 좌완투수와는 동명이인이다. 이쪽은 우완.) 그 외에 2라운더 다테 마사시와 3라운더 카노 케이스케는 모두 4라운더 수준이라고 까였는데, 실제로 다테는 짧고 굵게(6시즌) 카노는 가늘고 길게(17시즌) 뛰며 1군에서 꽤 많이 나왔지만 성적은 썩 좋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1라운더 후지타 타이요도 2라운더 급이라고 아쉽다는 평가를 받았고, 후지타는 13년 동안 현역생활을 했으나 세이부에서 불펜으로 1년 반 잘 한 것 외에는 주로 2군에 박혀있던 그냥 생존왕이었다.[25] 이때 한신 팬들의 일화와 훗날 오오야마 유스케 중복해라 사건 덕분에 한신 팬들은 선수를 못 본다는 이미지까지 생겼다. 이때 한신 팬들이 놓쳤다고 아까워한 선수들로는 네이치 히로타카(요미우리 4라운더), 우에무라 카즈히로(오릭스 3라운더), 츠치야 텟페이(주니치 5라운더)가 있었는데 네이치는 6년간 1군에 한 번도 못 올라갔고, 우에무라는 14년 동안 26경기에 나와 4안타를 기록하며 대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방출되지 않았는지부터 연구 대상인 전형적인 생존왕이었다. 유일하게 성공한 선수가 타격왕과 베스트나인을 거머쥔 텟페이였는데 텟페이는 20대 후반에 통일구 도입과 함께 성적이 급락하며 전성기가 짧았고, 주전급 선수 치고는 이른 33살로 은퇴했다.(우에무라 카즈히로랑 동갑에 같은 해에 프로에 가 놓고 통산 4안타인 우에무라보다 고작 1년 늦게 은퇴했다.)[26] 가장 오른쪽이 아카호시다. 왼쪽 정장이 노무라 카츠야 감독. 가운데의 선수는 같은 해 2순위로 입단한 다테 마사시(伊達昌司) 선수다. 다테는 데뷔 첫 3년간(이중 2003년은 닛폰햄에서 활약) 중간계투로 나름 준수하게 활약해줬지만 이후 롱런하지 못하고 한신, 닛폰햄, 요미우리 3구단을 떠돌다 6년만에 은퇴했다.[27] 이때 신조와 아카호시가 한신의 기숙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었는데 신조가 “내 뒤의 센터(중견수)를 부탁해”라고 말한 것을 아카호시는 20년이 넘도록 기억하고 있었다. 참고로 신조는 둘이 본 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먹었다.[28] 아카호시의 입단 동기로, 아지아대학 시절 한 학년 후배였으나 허리 디스크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고 전문학교와 사회인야구를 거쳐 프로에 데뷔했다. 상술했지만 후지모토는 아카호시랑 다르게 프로에서 도루는 거의 하지도 못했으며 규정타석을 채운 해에도 도루가 한 자릿수에 머물렀지만 대신 앞에서 언급한 다른 F1 세븐 멤버들과는 달리 순조롭게 주전 유격수, 2루수로 정착하여 아카호시와 함께 2003, 2005년 한신의 우승을 견인하고 2004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로도 선발되는 등 아카호시 다음으로 나름 준수한 커리어를 이어갔다. 이후 토리타니 타카시, 세키모토 켄타로 등에게 밀려 2007년부터 출장기회가 격감하면서 팀내 입지가 줄어들자 2009년 출장기회를 늘리기 위해 FA를 선언하여 2년 1억엔 계약으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으나 야쿠르트에서도 부상과 성적 부진으로 주전에 자리잡지 못하면서 결국 2013년 은퇴했다. 비록 아카호시보단 빈약한 커리어이긴 했으나 최종적으론 F1 멤버 중 가장 오랫동안 프로에서 현역으로 뛰었다. 은퇴 후 2015년부터 한신의 내야 수비주루 코치로 복귀.[29] 첫 출장은 3월 30일 개막전 요미우리전 9회 대타였지만, 3루 땅볼로 물러났다.[30] 아카호시는 이후로도 골든글러브를 총 6회 수상했는데, 신조는 한신 시절 골든글러브를 7회 수상하였다.[31] 주전 선수들이 주로 다는 번호가 낮은 번호인 점도 있지만 특히 아카호시가 단 53번이 쓰레기(ゴミ, 고미)라고 읽을 수 있는 번호라서 변경을 제안했다고 한다. 아카호시 본인도 처음엔 해당 번호를 싫어하기도 한 것이 제안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32] 2003년까지는 중장거리형 타자였던 2루수 이마오카 마코토가 1번 타자였고 아카호시는 2번에 주로 배치되었다. 본격적으로 1번 타자로 정착한 것은 이마오카가 클린업 트리오로 이동한 2004년부터였다.[33] 2003년 한신 주전 라인업엔 이마오카 마코토(2루수)-아카호시 노리히로(중견수)-카네모토 토모아키(좌익수)-히야마 신지로(우익수)-조지 아리아스(1루수)-카타오카 아츠시(3루수)-야노 아키히로(포수)-후지모토 아츠시(유격수)-투수. 대타 요원으로 야기 히로시, 세키모토 켄타로 등이 있었다.[34] 2005년 한신 주전 라인업엔 아카호시 노리히로(중견수)-토리타니 타카시(유격수)-앤디 시츠(1루수)-카네모토 토모아키(좌익수)-이마오카 마코토(3루수)-히야마 신지로(우익수)-야노 아키히로(포수)-후지모토 아츠시(2루수)-투수. 대타 요원으로 카타오카, 세키모토, 셰인 스펜서 등등이 있었다.[35] 2위는 22개를 기록한 요미우리 자이언츠니시 토시히사. 이해 센트럴리그는 유독 도루수가 적었다. 10도루를 넘는 선수가 아카호시 본인, 요미우리의 니시와 시미즈 타카유키(12), 히로시마의 후쿠치 카즈키(16), 히가시데 아키히로(12), 요코하마의 이시이 타쿠로(19)와 보이 로드리게스(10), 주니치의 아라키 마사히로(16) 8명 뿐이었다.[36] 당시 한신의 외야엔 FA로 이적한 카네모토에 더해 기존부터 한신을 지켜온 히야마 신지로나 하마나카 오사무 등 외야에서 뛸 수 있는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카호시는 아예 카네모토가 제발 오지 말아달라고 빌었다고 한다.[37] 도루 기록에 있어선 카네모토가 아카호시를 배려해주며 타격을 해줘서 기록을 갱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38] 3수까지 하면서 와세다대학에 들어간 것으로 유명했던 선수였다. 프로에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주로 불펜 요원으로 활약했고, 2014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은퇴했다.[39] 아카호시는 데뷔시즌인 2001년 8월 4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 원정 경기에서 1번째, 2003년 8월 6일 메이지진구 야구장 원정 경기에서 2번째 홈런을 기록했다. 여담으로 아카호시에게 통산 2호 홈런을 맞은 타카이 유헤이는 훗날 외야수로 전향하여 한 시즌뿐이긴 했지만 시즌 20홈런을 기록하는 등 준수한 타격을 보여주며(통산 882안타 66홈런 타율 .291) 야쿠르트의 2015년 우승에 공헌했다.[40] 아오키는 이 해 센트럴리그 최초의 200안타를 달성하면서 신인왕, 수위타자, 최다안타, 외야수 베스트나인을 독식했다.[41] 그러나 이 와중에도 2도루를 기록하면서 준족 하나는 건재함을 보여줬다.[42] 이후 아카호시의 2006년부터 2009년 4년 동안 평균 도루 개수는 많이 줄어 연평균 32.75개를 기록했다. 이마저도 24도루를 기록한 2007년이 조금 깎아먹은 것. 기존엔 3년간 매년 60도루를 했으니 많이 줄긴 한 것이다.[43] 후쿠치는 이듬해에도 같은 도루수로 2년 연속 도루왕을 수상했다.[44] 그나마 2014년에는 유틸리티맨 마에다 야마토가 좋은 수비를 보이며 골든글러브를 따는 등 활약했으나, 부상과 타격 부진, 다른 포지션 땜빵 등의 이유로 꾸준히 활약하진 못했다.[45] DeNA가 인수하기 전 TBS가 운영하던 베이스타즈 시절의 마지막 감독이었다.[46] 이대형의 이 9홈런 중 하나는 인사이드 파크 홈런이다. 즉 발로 홈런 하나쯤 만들 만도 한데, 그러지도 못했다는 것. 그리고 이대형이 유일하게 장타율 4할을 찍은 2014 시즌의 경우 KBO 자체가 어마무시한 타고투저 성향이었단 점은 감안해야겠으나, 아카호시가 현역이던 시절 일본프로야구도 일명 래빗볼로 대표되는 반발력 높은 공인구가 쓰이던 시절이라 타고 기질이 없지는 않았다. 여기에다가 아카호시의 한신이 홈으로 쓰는 한신 고시엔 구장이 홈런은 잘 안 나오지만 외야가 좁아서 외야수비가 어렵지 않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47] 여담으로 KBO에서는 강한울이 데뷔 이후 1545타석 이후에 첫 홈런을 쳤으며, 연속 타석 무홈런 최고 기록은 이용규의 1640타석 연속 무홈런이다.[48] 통산 출루율이 .365로 타율보다 7푼이 높고 출루율 커리어 하이는 2008년의 .398. 이 해엔 심지어 홈런을 하나도 치지 못했음에도 .317/.398/.347 OPS .745의 슬래시라인을 기록하며 무홈런 타자임에도 2자릿수 홈런 타자 수준의 OPS를 찍었다.[49] 사실 1,000회가 넘는 통산 도루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그렇지, 후쿠모토는 현역 시절 통산 2500안타, 200홈런을 달성하고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을 기록하는 등 공수주 양면에서 아카호시보다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명선수였다.[50] 비슷하게 이대형도 도루 갯수당 10만원씩 기부하자는 취지로 2010년에 660만원을 기부한 적이 있다.[51]키움 히어로즈 소속 이용규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꿈의 높이는 자로 잴 수 없다.[52] 이는 훗날 아카호시를 대표하는 말이 되어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의 제목도 “아카호시 노리히로의 안 들어가 있다고”(赤星憲広の入ってねぇ~んだ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53] 아카호시는 2004년 시즌 당시 시즌 초반 히로시마전에서 얼굴에 사구를 맞아 잠시 타격감을 잃었고, 루에 나가는 기회가 줄어들자 도루의 개수도 줄어들어 마음이 다급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리드 폭을 넓게 가져다가 견제사도 당하는 등 슬럼프를 크게 겪었다.[54] 이는 2003년 시즌의 본인 뒷 타석에서 도루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카네모토를 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55] 신조가 본인의 도루관에 대해 물어보자 의외로 리드폭이 그다지 넓지 않다고 대답했다. 베이스 흙 바깥으로 나가면 귀루를 쓸데없이 생각하게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