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6298><tablebgcolor=#006298>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24 시즌 코칭스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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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298><colcolor=#ffffff>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No.89 | |
야기 히로시 [ruby(八木, ruby=やぎ)][ruby(裕, ruby=ひろし)] | Hiroshi Yagi | |
출생 | 1965년 6월 8일 ([age(1965-06-08)]세) |
오카야마현 타마노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히가시 상업고교 |
신체 | 182cm | 76kg |
포지션 | 1루수, 유격수, 3루수, 외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6년 드래프트 3순위 (阪神) |
소속팀 | 미츠비시 자동차 쿠라시키 오션스[1] 한신 타이거스 (1987~2004) |
지도자 | 한신 타이거스 2군 타격코치 (2009~2015)[2]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타격코치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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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한신 타이거스 소속의 내야수로 히야마 신지로에 앞서 원조 대타의 신(代打の神様)으로 불리던 선수였다. 2022년까진 한신 이외에 다른 팀의 선수나 지도자 생활을 한 적이 없는 프랜차이즈 스타이기도 했다.2. 커리어
2.1. 프로 입단 이전
오카야마현 타마노시 출신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히가시 상업고교로 진학한 이후에는 2학년 때 4번타자를 맡았다. 2학년 때 오카야마현 고시엔 예선에서 카와이 마사히로가 있던 오카야마 남부 고등학교를 이겼지만, 고시엔 출전권이 걸린 최종 결승에서 오카야마 간사이 고교에 패하며 고시엔 진출 실패. 고3 때는 사이드암 투수로도 마운드에 선 적 있었지만, 1라운드에서 구라시키 상업고에 패하며 고교 시절 내내 고시엔에 진출하지 못했다. 고교 시절 라이벌로는 사사키 마코토[3]가 있었다. 다만 프로지명을 받지 못해 미츠비시 자동차 사회인 야구단에 들어갔고, 1986년 3순위로 한신에 지명되며 프로로 진출했다.2.2. 한신 타이거스 초기
1987년엔 69경기나 출전하며 가능성을 보여 줬으나, 1988년엔 단 9경기 출장에 그쳤다. 대신 마이너리그에 유학을 가면서 구단에서 나름 미래 자원으로 분류해줬다. 1989년 여름부터 주전 3루수가 되었다. 카케후 2세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으며, 최종적으론 해당 시즌에 102경기 출전, 16홈런 40타점으로 가능성을 보여줬다. 1990년에는 커리어 하이인 28홈런을 기록하였고, 당시 감독 나카무라 카츠히로는 깜짝 상자(ビックリ箱)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이는 예상치 못한 데서 한 방을 날린다는 의미였다. 1991년에도 22홈런으로 완전히 주전급 야수로 정착했으며, 1992년에도 21홈런으로 팀의 중거리포로 활약했다. 1992년 9월 11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는 9회말 끝내기 홈런을 치는 듯 했으나 야쿠르트의 필사의 어필으로 끝내기가 취소되는 아쉬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다만 야기 히로시의 리즈시절은 딱 1992 시즌까지였다. 이후 부상을 입는 불운도 있었지만, 동시기에 카메야마 츠토무[4], 신조 츠요시, 와다 유타카, 히야마 신지로, 토마스 오말리[5] 등에게 밀리기 시작하며 주전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고, 1996년엔 1군에서 1경기도 못 뛰며 전력외로 분류될 뻔 했으나, 당시 한신에 재취임한 요시다 요시오 덕분에 잔류할 수 있었다.2.3. 한신 타이거스 후기
대타로 기용되었을 때의 모습. 100타수 29안타 21타점 타율 .290. 등번호 3번은 세키모토 켄타로[6]를 거쳐 오오야마 유스케가 달고 있다. |
1997년부터는 전문 대타[7]로 자신의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해당 시즌에는 대타 타율 4할을 기록하며 요시다 요시오 감독으로부터 대타의 신(代打の神様)이라는 별명을 받게 되었다. 1998년 초반엔 대타 타율 5할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내기도 했다. 투수 타석이나 기타 승부처에 대타 야기 히로시 라고 방송이 나오면 고시엔을 흥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2004년까지 대타로 질기게 선수생활을 이어갔으며, 가끔 선발로도 나왔다. 2003년에는 잠시나마 4번 타자를 맡기도 했는데, 이 해 한신은 18년 만의 리그 선두권 독주라는 상황이었으나,[8]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선수가 없다시피해서(...)[9] 팀의 구심점 역할도 하면서 2003시즌 암흑기 탈출 및 한신의 18년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호시노 센이치 감독을 헹가레칠 때도 야기 히로시와 야노 아키히로가 제일 앞장을 섰다고 한다. 2004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고 해설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통산 1368경기 3303타수 817안타 126홈런 479타점. 대타 출전 기록은 400타수 94안타 13홈런 98타점. 히야마 신지로가 관련 기록을 갱신하기 전까지는 한신 최다였다.
3. 은퇴 및 그 이후
은퇴 후 마이니치 방송에서 해설자 생활을 했으며, 산케이 스포츠에 칼럼을 쓰기도 했다. 2009년에 한신의 2군 코치로 돌아왔으나, 2015년 다시 현장을 떠나 마이니치와 산케이로 돌아왔다. 2020년 이후로는 카노 케이스케, 아카호시 노리히로 등과 함께 유소년 야구 육성에 전념했다.오랫동안 재야에 있다가, 2023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타격코치를 제의받아 코치 경력을 다시 이어나가게 되었다. 한신 시절 팀 후배였던 신조 츠요시 감독과 함께하게 되었다.
4. 관련 문서
[1]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인 야구팀.[2] 2012년에 한해 2군 수석코치도 역임했다.[3] 난카이 호크스 - 세이부 - 한신 이렇게 3팀에서 프로생활을 했던 외야수. 야기와는 1965년생 동갑이었으며, 고졸 이후 바로 난카이에 들어갔다. 난카이에서 첫 3년간은 백업 멤버였으나 1987년을 기점으로 포텐이 터져 난카이 말년과 다이에 초창기때 주전 외야수였다. 1994년 세이부로 이적했으나 성적이 점점 떨어졌고, 1999년엔 한신으로 와서 야기와 한솥밥을 먹다 2000년을 끝으로 은퇴.[4] 1992 시즌부터 가능성을 보여준 유망주였다. 도톤보리 강 구이다오레 인형이 이 선수를 닮았기로 유명했다. 덕분에 그 인형은 샌더스 동상처럼 당하지 않으려고 튜브를 목에 두르고 자신은 수영 못한다는 말풍선을 달은 적도 있었다.[5] 1991~1994 시즌까지 한신의 주포를 맡았다. 다만 1994 시즌 이후 재계약이 결렬되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는데, 이적한 첫 해에 야쿠르트를 일본시리즈 정상까지 올리면서 한신을 후회하게 만들었다.[6] 야기가 은퇴한 후,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세키모토 켄타로가 3번을 달았다. 세키모토는 원래 44번을 입단부터 2004년까지 달았다.[7] 센트럴 리그나 내셔널 리그처럼 투수도 타석에 서는 리그라면 대타의 가치가 지명타자가 있는 리그에 비해서 더 올라간다. 물론 지명타자가 있는 퍼시픽 리그, 아메리칸 리그, KBO 리그라고 대타의 가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명타자 없는 리그에서의 대타의 중요성은 상상을 초월한다.[8] 2003년 이전에 제일 성적이 좋았던 1992년의 경우는 우승팀부터 최하위까지 10경기 이내에서 왔다갔다하는 초 접전 상태였다. 심지어 상술한 9월 11일 야쿠르트전의 경우 당시 두 팀간 승차가 없었다![9] 당시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한신 이적 첫 시즌이었고, 야기 본인을 제외하면 그나마 1992년 경험이 있었던 선수가 히야마 신지로와 쿠지 테루요시(이쪽은 야노 아키히로, 타이호 야스아키와의 트레이드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갔다가 다시 한신에 온 선수) 뿐이었다. 심지어 히야마의 경우 92년에는 입단 첫 시즌이던 데다 주전 멤버도 아니었다. 당시를 경험했던 또 다른 멤버 중 한 명인 신조 츠요시는 메이저리그에 가 있었다가 2004년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