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table bordercolor=#fefe01> | 한신 타이거스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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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지 관련 정보 | 간사이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고시엔 일대 · 오사카부 오사카시 | |
일본시리즈 우승 ★★ | 1985 · 2023 | |
리그 우승 (10회) | 1937 추계 · 1938 춘계 · 1944 · 1947 · 1962 · 1964 · 1985 · 2003 · 2005 · 2023 | |
클라이맥스 시리즈 | 2007 · 2008 · 2010 · 2013 · 2014 · 2015 · 2017 · 2019 · 2021 · 2022 · 2023 · 2024 | |
시즌별 요약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구단 상세 정보 | 역사 · 선수단 · 역대 등번호 · 역대 선수 · 유니폼 · 응원가 · 사건사고 · 한신아재 · 커널 샌더스의 저주 · JFK(한신) · 4466566664 | |
주요 인물 | 감독 후지카와 큐지 · 선수회장 나카노 타쿠무 | |
주요 명장면 | 백스크린 3연발 · 일본프로야구 최장시간 소요 경기 · 2014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 고의사구 끝내기 안타 2022년 센트럴 리그 3위 | |
경기장 | 1군 한신 고시엔 구장 · 고시엔 기간 교세라 돔 오사카 · 2군 한신나루오하마 구장· 지방구장 머스캣 스타디움 | |
홈 중계 채널 | / | |
기타 정보 | 한신 본선 ·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 전통의 일전 · 도쿄온도 · 죽음의 원정 | |
관련 틀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 선수 · 역대 감독 · 영구 결번 ·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
1. 개요
1992년 9월 11일에 시작해 12일 새벽에 끝난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장시간 소요 경기.2. 스코어보드
1992년 9월 11일 18:00, 한신 고시엔 구장 (관객 수: 45,000명[A]) | |||||||||||||||||||
선발투수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R | H | E | |
야쿠르트 | 이토 아키미츠 | 0 | 0 | 3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3 | 8 | 2 |
한신 | 나카고미 신 | 1 | 1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3 | 18 | 0 |
2.1. 1회초 ~ 9회초
당시 한신과 야쿠르트가 1게임차 이내에서 접전을 펼치고 있었던 상황에서, 한신이 이기면 선두 탈환의 가능성이 생기는 상황이었다. 야쿠르트는 선발 투수로 이토 아키미츠,[2] 한신은 선발 투수로 나카고미 신[3]을 내세웠다.두 선발은 각각 이토가 3.2이닝 3실점(2자책점)으로 조기강판, 나카고미는 6.1이닝 3실점을 기록했고, 이후 경기는 불펜 싸움으로 흘러가 9회 초까지 양측 다 3-3 동점으로 팽팽하게 경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2.2. 9회 말
9회 말, 한신이 2사 1루로 끝내기 찬스를 얻었고, 이 때 타석에 들어선 야기 히로시가[4] 7회 말부터 구원 등판한 야쿠르트의 오카바야시 요이치[5]와의 풀카운트 승부 끝에 오카바야시의 슬라이더를 받아쳐 고시엔 좌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타구를 날렸고, 2루심 히라코 키요시(平光清)는 끝내기 홈런을 선언했다.그러나 곧바로 야쿠르트의 코칭스태프, 외야수 모두가 총출동해 타구가 바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담장을 맞고 넘어갔다고 격렬히 항의했다. 좌익수 죠 토모히로[6]와 중견수 이이다 테츠야[7]가 심판에게 어필을 넣은 데 이어 곧바로 노무라 카츠야 감독도 어필에 가담했고, 결국 4심 합의 끝에 항의가 받아들여지면서 인정 2루타가 되었다.
이 당시엔 비디오 판독은 커녕[8] 심판 합의 판정제조차 없었던 탓에 한 번 플레이가 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다시보기를 할 방법도 없었고 판정이 바뀔 확률도 그만큼 훨씬 적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 기어이 판정을 번복시킨 야쿠르트가 그저 대단할 뿐. 여담으로 이렇게 난리가 나는 와중에 한신 고시엔 구장에는 경기가 끝났다고 방송 카메라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 7분부터 보면 된다.
야기 히로시의 타구에 대한 상세 분석
2.3. 한신의 항의
당연히 다 이긴 줄 알았던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게 생긴 한신은 이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은 맹렬히 항의에 나섰고 일부 선수단은 덕아웃 밖으로 철수하기까지 할 정도로 강하게 불만을 표출했다. 이로 인해 경기는 약 37분 가량 중단되었고 처음에 홈런을 선언했던 2루심이 오심의 책임을 지고 심판직을 은퇴할 테니 제발 경기를 재개해 달라고 설득했지만 나카무라 감독은 끝까지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당시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의 한 마디가 압권이었는데,それは俺には関係ない! 俺たちには今日の1試合が大事なんだ!
그런 건 나하곤 관계 없다! 우리에겐 오늘 이 한 경기가 중요하다![9]
그런 건 나하곤 관계 없다! 우리에겐 오늘 이 한 경기가 중요하다![9]
끝내기 취소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신은 위의 나카무라 감독의 말처럼 필사적으로 항의했으나, 이미 4심 합의로 끝내기는 취소된 상태였고, 급기야 눈앞의 사태에 분노한 일부 한신 팬들이 그라운드에 난입하다 연행되기까지 하는 등 역으로 한신은 경기 지연[야구규칙7.03(a)] 및 관중에 의한 시합 지연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몰수패를 당할 지경[야구규칙7.03(b)]에까지 몰렸다. 이후, 당시 한신 구단 사장을 역임하던 미요시 카츠히코까지 설득에 나선 끝에 겨우 경기가 재개되었다.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은 경기 재개에 앞서 선수단을 모은 후 이 말을 남겼다.
みんな、何とか受け入れてほしい。ただ、この試合は絶対に落とせない。力を合わせて戦ってくれ!
모두들, 어떻게든 받아들였으면 한다. 하지만 이 시합을 놓칠 수는 없다. 힘을 합쳐 싸워다오!
모두들, 어떻게든 받아들였으면 한다. 하지만 이 시합을 놓칠 수는 없다. 힘을 합쳐 싸워다오!
2.4. 연장전
야쿠르트는 오카바야시 요이치를 그대로 놔뒀고[12], 한신은 계투를 연달아 투입하며 연장 15회까지 경기를 끌고 갔다. 연장 15회 말, 한신이 2사 만루 끝내기 찬스를 잡았으나 타자였던 야마와키 코지[13]가 찬스를 살리지 못하면서[14], 9월 12일 0시 26분에 경기는 종료되었다. 공교롭게도 야마와키 코지의 다음 타자는 야기 히로시였는데, 어떻게 결판이 나든 야기 히로시는 타석에 설 일이 없었지만 그 상황에도 야기 히로시는 타격 서클에서 스윙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야기는 훗날 "(끝내기 홈런이 취소된 것이) 분한 나머지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라고 회고했다.이 날의 경기 시간은 무려 6시간 26분으로 2022년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장시간 소요 경기로 남아있다. 당연히 한신 전철은 귀가가 늦어진 관람객들을 위해 고시엔역 출발 임시열차를 편성해야 했다.
2.5. 그 이후
이 경기는 1위 야쿠르트와 2위 한신간의 순위 싸움이 걸린 3연전 첫 경기였으며[15], 한신이 이기면 순위가 역전되는 상황이어서 중요도와 주목도도 엄청나게 높은 경기였다. 여담으로 다음 2경기를 모두 한신이 이기며 결국 순위가 뒤집어졌으나, 한신이 시즌 마지막 15경기에서 4승 11패로 무너지면서 다시 야쿠르트가 1위를 탈환했고[16], 결국 10월 10일 고시엔에서 열린 마지막 홈경기+직접대결 1차전에서 야쿠르트가 2 - 5로 한신을 꺾으며 1992년 센트럴리그 패권을 건 대격전은 야쿠르트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1992년 센트럴 리그 순위표 | |||||||
순위 | 구단 | 시합[17]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우승 | 야쿠르트 스왈로즈 | 131 | 69 | 61 | 1 | .531 | - |
2위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30 | 67 | 63 | 0 | .515 | 2.0 |
한신 타이거스 | 132 | 67 | 63 | 2 | .515 | 2.0 | |
4위 | 히로시마 토요 카프 | 130 | 66 | 64 | 0 | .508 | 3.0 |
5위 |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 131 | 61 | 69 | 1 | .469 | 8.0 |
6위 | 주니치 드래곤즈 | 130 | 60 | 70 | 0 | .462 | 9.0 |
이후 한신이 야쿠르트에게 패하며 7년 만의 우승의 꿈이 물거품이 된 다음 날인 10월 11일에 이 경기의 재경기이자 한신, 야쿠르트 양팀의 1992년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가 진행되었고, 이 경기는 4 - 3으로 한신이 승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아래는 재경기 당시의 스코어표.
1992년 10월 11일, 한신 고시엔 구장 (관객 수: 53,000명[A]) | |||||||||||||||||||
팀명 | 선발투수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
야쿠르트 | 마스다 마사유키[19] | 0 | 0 | 0 | 1 | 0 | 1 | 0 | 1 | 0 | 3 | 7 | 1 | ||||||
한신 | 나카다 코지[20] | 1 | 0 | 0 | 0 | 2 | 1 | 0 | 0 | X | 4 | 9 | 0 |
3. 기타
- 오심을 인정하고 은퇴를 약속한 히라코 키요시 2루심은 약속대로 시즌 종료 후 프로야구 심판직을 은퇴하였으나 은퇴 후에도 닛폰 방송 야구 해설이나 마스터스 리그 심판 등을 맡는 등 야구 관련 활동을 이어나갔다. 1994년에는 '심판 실격―그래도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판하였다.
4. 출처
- 阪神の歴史を左右したかもしれない 「6時間26分」の日本一長い激闘。(한신의 역사를 좌우했을 지도 모르는 6시간 26분 일본 최장 혈투)
- まさかの誤審・・・八木の幻サヨナラ弾(설마하던 오심… 야기 히로시의 환상의 끝내기 홈런)
[A] 단 이 당시 관중 집계는 담당 직원이 관중석을 대충 훑어보고 계산하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 관중수보다 부풀리는 경우가 많았기에 실제 관중 수는 기록상 관중 수보다 차이가 있을 가능성이 많다.[2] 1963년생 도쿄도 에도가와구 출신의 로컬 보이 투수. 테이쿄 고등학교-혼다 사회인야구팀을 거쳐 1986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하여 주로 선발로 활약하며 통산 87승 76패 21세이브, 평균자책점 4.01을 기록했고, 1988년엔 마무리 투수로 뛰었는데 이 해에 계투로만 55시합 122.2이닝을 등판하여 18승 9패 17세이브를 기록하면서 규정이닝 미달 다승왕을 차지하는 이색적인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은퇴 후 바로 코치, 프런트로 전임하여 야쿠르트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2022년 현재는 프런트 편성부장으로 부임 중에 있다.[3] 1970년생 야마나시현 카이시 출신의 고졸 유망주 투수. 1988년에 한신 타이거스에 드래프트 1위로 입단했고 이 해부터 선발로 정착해서 9승 8패, 평균자책점 2.42로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이 후엔 팔꿈치 수술로 2시즌을 통째로 날린 후 다시 선발로 복귀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2001년까지 한신에서 뛰었고, 이후 2002년부터 대만프로야구 슝디 엘리펀츠에 입단하여 2005년까지 주축 선발로 활약한 뒤 은퇴했다. 다만 대만에서 뛰던 중 당시 대만 야구계에 만연하던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은퇴 후 관련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흑역사가 있는데, 나카고미 본인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일본으로 빨리 귀국하기 위해 혐의를 일부 인정하긴 했으나 승부조작엔 결단코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4] "대타의 신"이란 타이틀로 유명한 선수이기도 하나, 이 당시엔 주전 3루수로써 20+홈런 이상을 기대할 수 있는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하고 있었다.[5] 1968년생 파라과이로 이주한 일본인 가정 출신의 투수로, 중학교 3학년 때 가족들이 부모님의 고향인 고치현으로 귀경하여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후 센슈대학을 거쳐 1990년 드래프트 1위로 야쿠르트에 입단한 유망주였다. 데뷔 시즌인 1991년부터 마무리 투수를 맡아 45시합 106.2이닝 12승 6패 12세이브, ERA 3.94의 출중한 성적을 남겼고 이 해엔 선발 투수로서 커리어하이인 34시합 197이닝 12완투 3완봉 15승 10패 ERA 2.97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견인한 데 이어 같은 해 일본시리즈에서도 1,4,7차전 선발로 등판해 3완투 30이닝, 1승 2패 ERA 1.50라는 미친 성적을 찍으면서 팀은 아쉽게 세이부에 3승 4패로 졌으나 본인은 시리즈에서의 맹활약으로 감투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데뷔 첫 2년간의 지나친 혹사로 인해 이후엔 계속해서 부상과 수술을 반복하며 1994년(22시합 171.2이닝 11승 5패 ERA 2.99)을 제외하곤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고 팀이 3차례의 일본시리즈를 우승하는 최전성기를 누릴 동안 본인은 시리즈에 1차례도 등판하지도 못하는 불운을 겪는 끝에 결국 10년만인 2000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친정팀의 투수코치, 스카우터를 거쳐 현재는 구단 편성그룹 과장으로 부임 중.[6] 1969년생 치바현 나라시노시 출신 외야수로 1987년 드래프트 6위로 야쿠르트에 지명받았다. 2년 연속 2군 도루왕을 석권한 빠른 발을 살려 우승 시즌이었던 1992~93, 95시즌에 준주전으로써 쏠쏠히 활약했지만 이이다 테츠야, 이나바 아츠노리 등 당시 야쿠르트 외야진이 워낙 쟁쟁했기에 주전에 정착하진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로 척추 부상까지 당하면서 출장 기회가 급락했다. 결국 1999년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었고 그 해를 끝으로 은퇴. 여담으로 유명성우 카와스미 아야코가 이 선수의 팬이었다고 한다.[7] 1968년생 도쿄도 쵸후시 출신의 로컬보이 선수로, 타쿠쇼쿠대학 코료 고등학교를 거쳐 1986년 드래프트 4위로 야쿠르트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엔 포수를 맡았으나 빠른 발을 살리기 위해 1990년 2루수로 전향해 이 해부터 주전에 정착했고, 1991년부턴 외야수로 전향하여 이후 7년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야쿠르트를 대표하는 리드오프로써 맹활약을 펼쳤다. 외야수 전향 2년차였던 이해엔 125시합에 출장하여 타율 .294(521타수 153안타)/OPS .756, 7홈런 42타점 33도루를 기록하여 도루왕,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석권하는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고 일본시리즈에서도 양팀 최다인 11안타(타율 .367)를 치면서 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이나바 아츠노리, 마나카 미츠루 등의 쟁쟁한 외야수들이 대두하면서 1998년부터 준주전급, 대타로 격하되었고 2005년 신생팀 라쿠텐 이글스로 이적하여 2년간 뛴 후 은퇴했다. 은퇴 후 야쿠르트, 소프트뱅크 코치를 거쳐 현재는 모교의 비상근 코치로 활동 중.[8] 스마트폰은 커녕 단순 휴대전화마저 사치품 취급받고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노트북 컴퓨터는 커녕 당시 컴퓨터는 Windows 3.0이 주 운영체제였던 데다 CRT 모니터가 대세던 시절이었다. 그나마도 Windows 3.0은 일반인용 OS가 아니었다 보니 어지간한 가정엔 보급조차 되지 않아 일반인들은 사용할 수 없었고 학교나 회사에만 조금씩 있던 시절이었다.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보급이 시작된 건 바로 다음해 Windows 3.1이 개발된 1993년.[9] 후일 나카무라 카츠히로는 야기 히로시를 위해서라도 물러설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야구규칙7.03(a)] 2: 어느 한 팀이 고의로 시합을 길게 끌어가거나 조기에 끝내려고 한 것이 명백할 경우, 그 시합을 몰수경기로 규정하여 고의로 시합 시간을 조정하려 한 팀의 패배로 처리한다. / 4: 구심이 시합 재개를 선언했음에도 경기 진행을 거부하여 1분 이상 경기를 속행시키지 않을 경우 그 시합을 몰수경기로 규정하여 경기 진행을 거부한 팀의 패배로 처리한다.[야구규칙7.03(b)] 구심이 일정한 사유(그라운드 상태 불량, 그라운드 난입 등의 관중 소동)로 시합을 일시 중지한 후, 구장 관리인 측에 시합 재개를 위한 준비(그라운드 정비 혹은 소동을 일으킨 관중 퇴장)를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이 의도적으로 이행되지 않아 경기 재개에 지장을 일으킬 경우 그 시합은 몰수경기로 규정, 원정팀의 승리로 처리한다.[12] 오카바야시 요이치는 7회부터 15회까지 9이닝 무실점을 기록했고, 이는 중간계투 한 경기 최장 투구이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상 2번째 선발로 나서서 완봉을 한 셈이다 추가로 오카바야시는 9월 29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전에서도 9회 초 2사 동점 상황에 등판하여 14회까지 던지다가 마에다 토모노리에게 끝내기 홈런을 얻어맞아 패전투수가 되기도 했다.(기록은 4.1이닝 2실점, 13회 초에 팀이 1점을 추가하며 승리 찬스를 얻었으나 곧바로 13회 말에 동점으로 날려버렸다.)[13] 1962년생 오사카부 시죠나와테시 출신 선수로 1981~1995년까지 한신에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뛰었다. 은퇴 후 한신에서 코치, 기록원을 역임했으나 2018년 교류전 도중 몰카 혐의로 체포되면서 구단에서 해고되었다.[14] 사실 이것도 야마와키의 앞 타자 토마스 오말리를 고의사구로 걸러서 이리 된 것이었다.[15] 당시 야쿠르트와 한신뿐 아니라, 타이요랑 주니치를 빼면 나머지 4팀 모두가 우승권에 몰리는 초 접전 상태였다. 심지어 일찌감치 우승경쟁에서 탈락한 채 꼴찌를 다투던 타이요, 주니치마저도 시즌 막판에 뒤늦게나마 상승세를 타면서 우승권과 10경기차 이내에서 물고 물리는 접전을 벌였다. 아래 순위표를 보면 알겠지만, 결국 이해 센트럴리그는 전구단 60승대라는 역대급으로 낮은 승차로 시즌이 끝났다.[16] 이 기간 중 최종전을 제외한 13경기에서 한신은 야쿠르트와의 직접대결을 1승 4패로 제대로 말아먹었고, 결국 10월 6~7일 야쿠르트와의 진구구장 원정경기 2연전을 모조리 내준 데 이어(특히 10월 7일 경기는 3 - 1로 앞서가던 경기를 9회 말 3점을 내주며 역전 끝내기 패배로 날려버렸다.) 10월 9일 마지막 희망이었던 주니치 전까지 패하면서 다음 경기이자 최종전이었던 야쿠르트와의 고시엔 2연전을 모조리 잡아 동률 플레이오프로 끌고 가지 않는 이상 우승이 불가능한 상황에 몰렸다.[17] 1990~2000년 센트럴리그는 무승부가 나온 경기에 대해 무조건 재경기를 치르도록 규정했다. 따라서 기본적으론 130시합 제도(26시합x상대 5구단)이나 구단별로 무승부 숫자에 따라 시합수가 다르다.[A] [19] 1969년생 이바라키현 키타소마군 출신의 우완투수로, 치바현립 인바메이세이 고교-코쿠시칸대학을 거쳐 1991년 드래프트 3위로 야쿠르트에 입단했으나 입단 후 8년 간 36시합 1승 5패, ERA 5.05의 미미한 성적에 그친 채 1999년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20] 1964년생 미국 네바다주 출신(3살 때 오키나와현으로 이주)의 좌완투수로 미군 공군장교였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코난 고교 시절 3연속 고시엔 출장 등의 실적을 주목받아 1983년 드래프트 3위로 한신에 지명받았고 2년차인 1985년부터 1군 데뷔+선발 정착을 이루어 그 해 한신의 첫 우승을 경험했으나 이후 곧바로 팀의 암흑기가 도래하는 바람에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소화하고도 패만 무지막지하게 쌓다가(1991시즌 종료 기준 33승 66패) 1군 데뷔 8년 차였던 이 해에 그간의 고생이 비로소 빛을 발하며 35시합(217.2이닝 30선발 13완투 2완봉) 14승 12패 194탈삼진 ERA 2.53의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만약 한신이 이 해 우승했다면 MVP 수상이 가장 유력했을 정도. 그러나 이 시즌 후엔 팀의 암흑기 복귀+본인 성적 원상복구 크리(...)가 쌍으로 찾아오면서 급격히 입지가 줄었고, 결국 1996년 FA를 선언하여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했으나 치바 롯데에서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2년 만에 은퇴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