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7:31:09

마에다 토모노리

마에다 토모노리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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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994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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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 1940년, 1947년 ~ 1949년
<rowcolor=#ffffff> 1940 1947 1948 1949
키토 카즈오
라이온군
야마다 덴
한큐군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교진군
오오시타 히로시
토큐
카네다 마사야스
오사카
츠보우치 미치노리
킨세이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벳토 카오루
오사카
츠보우치 미치노리
킨세이
코즈루 마코토
다이에이
카네다 마사야스
오사카
오오시타 히로시
토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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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이와모토 요시유키
쇼치쿠
코즈루 마코토
쇼치쿠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이와모토 요시유키
쇼치쿠
카네다 마사야스
오사카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미나미무라 후카시
요미우리
스기야마 사토시
주니치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미나미무라 후카시
요미우리
카네다 마사야스
오사카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와타나베 히로유키
한신
스기야마 사토시
주니치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와타나베 히로유키
오사카
마치다 유키히코
코쿠테츠
아오타 노보루
타이요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타미야 켄지로
오사카
아오타 노보루
타이요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타미야 켄지로
오사카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모리 토오루
주니치
타미야 켄지로
오사카
사카자키 카즈히코
요미우리
모리 토오루
주니치
오와다 아키라
히로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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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토오루
주니치
나카 토시오
주니치
나미키 테루오
오사카
에토 신이치
주니치
콘도 카즈히코
타이요
모리나가 카츠하루
히로시마
나미키 테루오
한신
콘도 카즈히코
타이요
모리나가 카츠하루
히로시마
에토 신이치
주니치
콘도 카즈히코
타이요
후지이 에이지
한신
에토 신이치
주니치
콘도 카즈히코
타이요
시게마츠 쇼조
타이요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에토 신이치
주니치
나카 아키오
주니치
콘도 카즈히코
타이요
에토 신이치
주니치
나카 아키오
주니치
야마모토 카즈요시
히로시마
나카 아키오
주니치
콘도 카즈히코
타이요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에토 신이치
주니치
데이브 로버츠
산케이
야마우치 카즈히로
히로시마
타카다 시게루
히로시마
데이브 로버츠
아톰즈
야마모토 카즈요시
히로시마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니카 아키오
주니치
에지리 아키라
타이요
타카다 시게루
요미우리
타카다 시게루
요미우리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미즈타니 지츠오
히로시마
타카다 시게루
요미우리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에지리 아키라
타이요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스에츠구 토시마츠
요미우리
진 마틴
주니치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이노우에 히로아키
주니치
로저 레포즈
야쿠르트
하리모토 이사오
요미우리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하리모토 이사오
요미우리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찰리 매뉴얼
야쿠르트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마이크 라인백
한신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스기우라 토오루
야쿠르트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타오 야스시
주니치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짐 라이틀
히로시마
타오 야스시
주니치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나가사키 케이지
타이요
타오 야스시
주니치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마츠모토 타다시
타이요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야마사키 류조
히로시마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스기우라 토오루
야쿠르트
야마사키 류조
히로시마
마유미 아키노부
한신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요시무라 사다아키
요미우리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요시무라 사다아키
요미우리
카를로스 폰세
타이요
카를로스 폰세
타이요
짐 파초렉
타이요
히로사와 카츠미
야쿠르트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히코노 토시카츠
주니치
야마자키 켄이치
타이요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짐 파초렉
타이요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히로사와 카츠미
야쿠르트
로버트 제임스 레이놀즈
타이요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히로사와 카츠미
야쿠르트
래리 시츠
타이요
마에다 토모노리
히로시마
이이다 테츠야
야쿠르트
알론조 파웰
주니치
마에다 토모노리
히로시마
신조 츠요시
한신
알론조 파웰
주니치
마에다 토모노리
히로시마
글렌 브렉스
요코하마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알론조 파웰
주니치
카네모토 토모아키
히로시마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알론조 파웰
주니치
야마사키 타케시
주니치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스즈키 타카노리
요코하마
드웨인 호지
야쿠르트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스즈키 타카노리
요코하마
마에다 토모노리
히로시마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세키카와 코이치
주니치
타카하시 요시노부
요미우리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카네모토 토모아키
히로시마
신조 츠요시
한신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카네모토 토모아키
히로시마
이나바 아츠노리
야쿠르트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시미즈 타카유키
요미우리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아카호시 노리히로
한신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카네모토 토모아키
한신
시마 시게노부
히로시마
터피 로즈
요미우리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카네모토 토모아키
한신
아카호시 노리히로
한신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카네모토 토모아키
한신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타카하시 요시노부
요미우리
카네모토 토모아키
한신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우치카와 세이이치
요코하마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맷 머튼
한신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와다 카즈히로
주니치
맷 머튼
한신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쵸노 히사요시
요미우리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오오시마 요헤이
주니치
쵸노 히사요시
요미우리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맷 머튼
한신
쵸노 히사요시
요미우리
마루 요시히로
히로시마
맷 머튼
한신
유헤이
야쿠르트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츠츠고 요시토모
DeNA
후쿠도메 코스케
한신
히라타 료스케
주니치
츠츠고 요시토모
DeNA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마루 요시히로
히로시마
츠츠고 요시토모
DeNA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마루 요시히로
히로시마
네프탈리 소토
DeNA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마루 요시히로
히로시마
네프탈리 소토
DeNA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마루 요시히로
요미우리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사노 케이타
DeNA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마루 요시히로
요미우리
시오미 야스타카
야쿠르트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치카모토 코지
한신
치카모토 코지
한신
사노 케이타
DeNA
오카바야시 유키
주니치
치카모토 코지
한신
니시카와 료마
히로시마
오카바야시 유키
주니치
도밍고 산타나
야쿠르트
호소카와 세이야
주니치
치카모토 코지
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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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이이지마 시게야
다이에이
오오시타 히로시
토큐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이이지마 시게야
다이에이
오오시타 히로시
토큐
벳토 카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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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지마 시게야
다이에이
오오시타 히로시
니시테츠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호리이 카즈오
난카이
오오시타 히로시
니시테츠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세키구치 세이지
니시테츠
오오시타 히로시
니시테츠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토쿠라 카츠키
한큐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스기야마 코헤이
난카이
토쿠라 카츠키
한큐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오오시타 히로시
세이부
부스지마 쇼이치
토에이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스기야마 코헤이
난카이
부스지마 쇼이치
토에이
세키구치 세이지
세이부
스기야마 코헤이
난카이
타카쿠라 테루유키
니시테츠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타미야 켄지로
다이마이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타미야 켄지로
다이마이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요시다 카츠토요
토에이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타카쿠라 테루유키
니시테츠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호리고메 모토아키
난카이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부스지마 쇼이치
토에이
타카쿠라 테루유키
니시테츠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도이 마사히로
킨테츠
나가이케 토쿠지
한큐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도이 마사히로
킨테츠
조지 알트맨
오리온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나가부치 요죠
킨테츠
나가이케 토쿠지
한큐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조지 알트맨
오리온
나가이케 토쿠지
한큐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조지 알트맨
오리온
나가이케 토쿠지
한큐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나가이케 토쿠지
한큐
하리모토 이사오
닛타쿠홈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나가이케 토쿠지
한큐
하리모토 이사오
닛타쿠홈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돈 뷰폴드
타이헤이요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히로타 스미오
롯데
사사키 쿄스케
킨테츠
백인천
타이헤이요
히로타 스미오
롯데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레론 리
롯데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사사키 쿄스케
킨테츠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미노다 코지
한큐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쿠리하시 시게루
킨테츠
아라이 히로마사
난카이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쿠리하시 시게루
킨테츠
레론 리
롯데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시마다 마코토
닛폰햄
테리 윗필드
세이부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쿠리하시 시게루
킨테츠
아라이 히로마사
난카이
미노다 코지
한큐
시마다 마코토
닛폰햄
테리 윗필드
세이부
미노다 코지
한큐
시마다 마코토
닛폰햄
타카자와 히데아키
롯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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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노 테루미츠
한큐
카나모리 에이지
세이부
요코타 마사유키
롯데
아라이 히로마사
난카이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요코타 마사유키
롯데
아라이 히로마사
난카이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토니 브루워
닛폰햄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히라노 켄
세이부
타카자와 히데아키
롯데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후지이 야스오
오릭스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이시미네 카즈히코
오릭스
니시무라 노리후미
롯데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사사키 마코토
다이에
히라이 미츠치카
롯데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사사키 마코토
다이에
타카하시 사토시
오릭스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사사키 마코토
다이에
후지이 야스오
오릭스
이치로
오릭스
사사키 마코토
세이부
케빈 라이머
다이에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이치로
오릭스
사사키 마코토
세이부
다린 잭슨
세이부
이치로
오릭스
타구치 소
오릭스
무라마츠 아리히토
다이에
이치로
오릭스
사사키 마코토
세이부
터피 로즈
킨테츠
이치로
오릭스
시바하라 히로시
다이에
오오무라 나오유키
킨테츠
이치로
오릭스
타니 요시토모
오릭스
터피 로즈
킨테츠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이치로
오릭스
시바하라 히로시
다이에
셔먼 오반도
닛폰햄
타니 요시토모
오릭스
터피 로즈
킨테츠
이소베 코이치
킨테츠
타니 요시토모
오릭스
터피 로즈
킨테츠
오제키 타츠야
세이부
타니 요시토모
오릭스
터피 로즈
킨테츠
와다 카즈히로
세이부
타니 요시토모
오릭스
SHINJO
닛폰햄
와다 카즈히로
세이부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맷 프랑코
롯데
미야지 카츠히코
소프트뱅크
와다 카즈히로
세이부
이나바 아츠노리
닛폰햄
마츠나카 노부히코
소프트뱅크
와다 카즈히로
세이부
이나바 아츠노리
닛폰햄
모리모토 히초리
닛폰햄
오오무라 나오유키
소프트뱅크
이나바 아츠노리
닛폰햄
릭 쇼트
라쿠텐
쿠리야마 타쿠미
세이부
이나바 아츠노리
닛폰햄
이토이 요시오
닛폰햄
텟페이
라쿠텐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타무라 히토시
소프트뱅크
T-오카다
오릭스
쿠리야마 타쿠미
세이부
이토이 요시오
닛폰햄
우치카와 세이이치
소프트뱅크
쿠리야마 타쿠미
세이부
이토이 요시오
닛폰햄
우치카와 세이이치
소프트뱅크
카쿠나카 카츠야
롯데
나카타 쇼
닛폰햄
우치카와 세이이치
소프트뱅크
하세가와 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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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타 쇼
닛폰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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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
이토이 요시오
오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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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야마 쇼고
세이부
야나기타 유우키
소프트뱅크
키요타 이쿠히로
롯데
이토이 요시오
오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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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카와 하루키
닛폰햄
아키야마 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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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타 유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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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야나기타 유우키
소프트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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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야나기타 유우키
소프트뱅크
마츠모토 고
닛폰햄
시마우치 히로아키
라쿠텐
야나기타 유우키
소프트뱅크
만나미 츄세이
닛폰햄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타츠미 료스케
라쿠텐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슈토 우쿄
소프트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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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51번}}}
에토 아키라
(1989)
마에다 토모노리
(1990-1991)
스기타 이사무
(1992-1995)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31번}}}
카타히라 테츠야
(1989-1991)
마에다 토모노리
(1992-1993)
오바타 코지
(1994-2001)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1번}}}
야마사키 류조
(1983-1993)
마에다 토모노리
(1994-2013)
스즈키 세이야
(20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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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마에다 토모노리.jpg
마에다 토모노리
前田智徳 | Tomonori Maeda
출생 1971년 6월 14일 ([age(1971-06-14)]세)
구마모토현 타마나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76cm, 80kg
학력 구마모토 공업고등학교[1]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89년 드래프트 4순위 (히로시마)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0-2013)
지도자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타격보좌 (2013, 선수 겸임)

1. 개요2. 선수 시절3. 성격 및 인간관계4. 기타5. 연도별 성적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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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마에다 토모노리 현역.jpg
일본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뛴 前 야구 선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프랜차이즈 스타 중 하나로, 카와카미 테츠하루[2], 토요다 야스미츠, 나가시마 시게오, 오치아이 히로미츠일본프로야구의 대타자들이 한결같이 '타격의 천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선수. 스즈키 이치로마츠이 히데키도 존경하는 타자였으며 최고의 선구안을 가진 일본프로야구의 선인(仙人) 에노모토 키하치도 자신과 공통점이 많은 선수라는 발언을 했던 선수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만 2번을 당하는 등 유리몸 속성을 보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다. 무엇보다도 열악한 재정의 약소 구단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만 20여년을 뛰었다는 점으로 인해 카프 팬들에게는 쿠로다 히로키에 버금가는 성원을 받았다.

통산 성적은 23시즌 동안[3] 2188경기 출장, 타율 .302/출루율 .358/장타율 .484/OPS .842, 2119안타 295홈런 1112타점 68도루 76희생타 58희생플라이를 기록했다.

3할 타율을 11시즌이나 기록한 정교한 타격을 보유한 한편 통산 볼넷/삼진이 586볼넷 765삼진으로, 둘 모두 23시즌을 현역으로 뛴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적은 수치이다. 전성기 땐 매 시즌마다 500타석 가까이를 소화하면서도 꾸준히 BB:K 1.0에 가까운 수치를 유지했던 만큼 선구안이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볼넷을 얻어내는 것보다는 뛰어난 타격 기술을 바탕으로 일단 공을 맞추는 것에 집중했던 배드볼 히터 스타일의 강타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커리어 전부를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보낸 것 치고는 통산 홈런 갯수가 다소 부족해 보일 수 있는데, 젊은 시절 부상으로 여러 번 시즌을 망친 것을 감안하더라도 본래의 장타력에 비해서는 구장의 크기로 인해 홈런 갯수가 뻥튀기되었다는 평가 역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이가 40대에 접어든 점은 감안해야겠으나 마츠다 줌줌 스타디움으로 이전한 2009년 이후론 홈런을 단 2개밖에 치지 못했고, 이마저도 2010년 한 해에 기록한 것으로 이후엔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홈런을 치지 못했다.

2. 선수 시절

쿠마모토 공업 고등학교 시절 4번타자로써 모교의 코시엔 대회 4회 출장을 이끌면서 각 구단의 주목이 집중되었고 고향과 가까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부턴 상위 지명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까지 들을 정도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고등학교 졸업년도인 1989년 드래프트에서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만 마에다를 하위순번인 4순위로 지명했는데, 하필 드래프트 직전 누군가가 각 구단에 "후배가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구타당한 것을 알게 된 마에다가 분노하여 단신으로 그 학교로 찾아가서 후배를 구타한 학생들을 묵사발내버렸다"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다른 구단에서 지명을 몽땅 철회하게 되면서 히로시마만 마에다를 지명하게 된 것이었다.

마에다는 처음엔 드래프트 결과에 엉엉 울 정도로 실망하여 프로 입단을 거부했지만, 당시 카프의 담당 스카우터인 미야가와 타카오[4]"다이에는 지명을 철회했어도 우린 약속을 지켰다. 남자라면 (입단하겠다는) 약속을 지켜라!"고 강경하게 입단을 종용하는 한편 같이 타격이론에 관해 논의하는 등 끈질기게 마에다를 설득한 끝에 카프에 입단하기로 결정하면서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입단 후 스프링캠프에서부터 비범한 타격 재능을 선보였고 공격, 수비, 주루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입단 2년차인 1991년부터 주전 중견수 자리를 차지했다. 1991년 개막전에서 1번 타자로 선발 출장하여 첫 타석에서 데뷔 첫 홈런을 선두타자 홈런[5]으로 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고[6] 그 해 카프는 야마모토 코지 감독의 지휘 아래 센트럴리그를 제패하고 일본시리즈까지 올라간다.[7]. 1991~1994년에 4년 연속으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1992년 첫 규정타석 3할을 친 것을 시작으로 94년까지 3년 연속 3할 타율-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한다.

그러나 1995년 타격 후 1루로 뛰어가다 오른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며 데뷔 초창기의 뛰어났던 주루, 수비 신력이 크게 감퇴했다. 때문에 수비 포지션도 중견수 자리를 오가타 코이치에게 내주고 코너 외야[8]로 이동해야 했지만 늘 3할 전후의 타율을 유지하며 타격에서는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다. 90년대 중반 오가타 코이치, 쇼다 코조, 노무라 켄지로, 에토 아키라, 카네모토 토모아키등과 함께 히로시마의 핵타선을 이끌었고, 98년에는 타율 .335/OPS .938 24홈런 80타점[9]의 호성적으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스즈키 타카노리와 수위타자 경쟁[10]을 벌였다. 2000년엔 왼쪽 아킬레스건마저 다치며 79경기 출전에 그쳤다.[11] 2001년에도 지난 해 부상의 여파로 27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2002년부터[12]는 잔부상으로 매 시즌 20경기 가까이를 결장하기는 했지만 3할-20홈런대[13]의 성적을 유지했고, 30대 중반인 2005년에는 홈런 커리어하이인 32홈런을 쳤다. 2007년에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여 명구회에 가입한다.

그러나 2007년에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한 것과는 별개로 3할-20홈런에 실패하는 등 개인 성적이 하향세로 접어들었고, 이로 인해 2008년부터는 보다 발 빠르고 수비력이 좋은 젊은 외야수들을 기용하려는 팀 방침에 따라 주전에서 밀려나 대타로 기용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2013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에무라 마사야[14]의 투구에 손목을 맞아 골절상을 입었고[15], 그 해 10월 3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의 홈경기에서 은퇴식을 가지며[16] 24년 간의 현역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현역 시절 그의 홈런을 모아놓은 영상이다.

3. 성격 및 인간관계

일본의 야구 팬들 사이에서는 성격 나쁜 야구선수의 대명사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한창 전성기를 보내던 1998년 후반기에 자신에게 "마에다 씨 열심히 해주세요!"라고 응원을 보내던 여성 팬에게 큰 소리로 "너가 말 안해도 알고 있어!"라고 차갑게 대꾸하는 바람에 비판받기도 했었다. 이런 기질은 입단 때부터 있었는데, 데뷔 시즌부터 1984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고참 외야수 나가시마 키요유키에게 인사를 안 한다는 이유 등의 태도 문제로 핀잔을 들은 적이 있었다.[17]

사실 이런 의혹은 정확히 말하면 그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루머가 떠돌아다니는 선수가 굉장히 많다는 점에 기인한다. 특히 히로시마를 거쳐간 유명 선수들은 대부분 마에다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루머가 떠돌았는데, 일단 쿠로다 히로키가 그렇다. 심지어 쿠로다가 히로시마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마에다와 노무라 켄지로 감독이 없기 때문이라는 기사까지 나온 적이 있었다. 둘 사이의 서먹함은 마티 브라운 前 히로시마 감독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되기도 했는데, 브라운 감독은 투수진의 리더로 구로다를, 타선의 리더로 마에다를 찍었으나 쿠로다가 그 역할을 잘 해낸 반면, 마에다는 개인주의적인 성격이라 잘 되지 않았고, 두 사람 역시 잘 교류가 되지 않았다고 에둘러서 인정했었다. 카네모토 토모아키도 이런 루머가 있고 아라이 타카히로의 경우엔 이미 루머가 아닌 기정사실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 아라이가 FA 자격을 얻었을 때 히로시마에 남는 조건 중 하나로 요구했던 것이 마에다의 트레이드였는데 결국 성사되지 않자 한신으로 이적한 것이라는 찌라시까지 실렸을 정도.

이 루머들에 대해 정확한 사실은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일단 쿠로다가 히로시마로 유턴했을 때 마에다와 대담을 한 적이 있고, 둘은 그다지 친한 모습은 아니지만 상대를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쿠로다는 자신의 공을 마에다라면 능히 칠 수 있다고 치켜세웠고, 마에다는 전혀 그렇지 않고 실로 훌륭한 피칭이라고 구로다를 높여주었다. 과거에 부딪히긴 했을지 모르나 현재 시점에선 둘 다 나이도 먹었고 얼굴 안 보고 살 정도는 아닌 듯. 카네모토는 일찍이 마에다를 평하기를 "히로시마 시절의 강훈련을 견딘 것은 나와 마에다 뿐이다"라고 그를 인정했었다.

마에다가 다른 사람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타입이라는 얘기는 자주 들리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의 기분을 깔아뭉개고 나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조용히 혼자 사는 타입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그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낮을 가리긴 하지만 제법 겸손하고 예의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내린다.

입단 동기인 아사이 이츠키와의 에피소드는 그가 무작정 냉혈한은 아닌 것을 보여준다. 아사이 이츠키는 마에다와 히로시마 입단 동기생으로, 아마 시절 호쿠리쿠 최강의 타자로 불렸다. 그러나 입단 후 같은 외야수 포지션의 동기 마에다의 기술을 보고 주눅이 들 정도였다. 마에다는 1군에서 승승장구했으나 아사이는 2군에 주로 있었고, 기회가 주어질 때에도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는 듯 고난이 이어졌다. 그러나 대타 전문 선수로 대타 타율 3할이 넘는 실적을 올리게 되었고, 어느 순간 동기생은 둘만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런 메니에르병으로 아사이가 은퇴하게 되자, 마에다가 돌연 전화를 걸어서 아사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둘은 그 전까지는 한 번도 전화를 해본 적이 없는 사이였는데, 갑자기 마에다가 전화를 걸어온 것에 대해 아사이는 지금도 고마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18] 마에다는 아사이의 은퇴 경기에서 홈런을 포함한 4안타를 치며 맹활약했고, 2루로 달릴 땐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등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 기타

스즈키 이치로가 한참 두각을 나타내던 시절, 올스타전에서 마에다를 만난 뒤 어쩔 줄 몰라했던 일화가 있다. 이치로의 상징과도 같은 등번호 51번은 마에다가 신인 시절에 착용했던 번호로[19], 이치로가 이 등번호를 처음 착용한 것은 마에다를 목표로 삼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일본 야구계에 천재가 두 명 있는데, 하나는 마에다, 다른 하나가 이치로"라고 했었다. 마에다는 두견새를 죽이지 않고 기다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타입, 이치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타입이라고 평했다.
주니치 감독이었던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팀의 타자들에게 마에다의 타격폼 흉내를 내라고 했다. 타격폼은 따라할 수 있지만 특유의 임팩트나 타이밍, 리듬감은 그만의 것이다. 당시 주니치의 주축 타자였던 후쿠도메 코스케가 그의 타격폼을 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경기 후에도 반테린 돔 나고야에서 늦게까지 연습했다.

천재타자라고 사람들은 칭송했지만 목표치를 높게 잡고 목표 달성을 위해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으며 배트 그립 잡는 법, 타격 폼 등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노력파였다. 바로 이런 점이 에노모토가 자신의 현역 시절과 비슷하다고 했던 부분이다. 천재타자라는 주위의 말이 본인은 부담스러웠다고. 카와카미 테츠하루, 오 사다하루, 오치아이 히로미츠, 와카마츠 츠토무 등의 대타자들에게 찾아가 타격 지도를 부탁할 정도의 노력파였다.

상술했듯이 아킬레스건 부상 이후 주루플레이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002년 4월 6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는 2루 주자로 있던 상황에서 후속 타자인 루이스 로페스[20]가 안타를 쳤음에도 홈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타점을 날려먹었다는 생각에 불만을 품은 로페스가 덕아웃에 들어오자마자 마에다를 양 팔로 밀치면서 한 차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리 부상 이후 주루뿐 아니라 수비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말년엔 타격 능력이 죽지 않았음에도 발 빠르고 수비 좋은 외야수들에게 주전 자리에서 밀린 경험이 있어 센트럴 리그의 지명타자제 도입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본인과 같은 상황의 선수들이 구제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는 것이 찬성 근거.

2016년부터 TV 아사히 해설자로 근무 중이다. 위에 서술된 것처럼 현역 시절에는 과묵하고 까탈스러운 구도자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탓에 해설자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에 일부 카프 팬들이 당황하기도 했지만 현재까지도 해설자로 활발히 활동 중.

선동열이 일본프로야구 데뷔전[21] 당시 처음으로 상대했던 타자가 바로 마에다 토모노리이다.[22][23] 2017년 WBC 직전에는 해설자 자격으로 한국대표팀 훈련장을 찾아, 한국팀 투수코치인 선동열과 인터뷰를 가지기도 했다.[24]

이상훈의 일본프로야구 첫 시즌이었던 1998년 5월 20일 하마마츠 구장 경기에서 3번 타자로 출장하여 4번타자 에토 아키라와 함께 이상훈을 상대로 백투백 홈런을 합작한 적이 있다.

5. 연도별 성적

통산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점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colbgcolor=#dcdcdc> 1990
56 45 5 15 11 3 0 0 4 1 3 .256 .273 .326 0.598
1991 129 465 25 54 107 21 1 4 14 31 57 .271 .329 .359 .688
1992 130 585 89 82 152 23 3 19 18 54 51 .308 .375 .483 .858
1993 131 568 70 85 158 33 2 27 10 61 63 .317 .392 .553 .945
1994 123 554 66 66 158 26 0 20 4 57 56 .321 .389 .496 .885
1995 25 99 11 15 22 4 1 4 3 10 12 .256 .343 .465 .809
1996 105 435 65 54 124 20 2 19 0 34 61 .313 .368 .518 .885
1997 100 419 68 55 116 23 1 15 1 28 35 .304 .348 .487 .835
1998 127 551 80 71 169 36 0 24 5 41 54 .335 .388 .550 .938
1999 108 428 65 53 118 17 0 12 1 25 36 .301 .345 .436 .781
2000 79 284 44 32 62 14 0 13 0 18 39 .237 .283 .439 .722
2001 27 30 7 1 8 2 0 0 0 3 3 .296 .367 .370 .737
2002 123 462 59 50 130 11 1 20 0 37 38 .308 .364 .481 .845
2003 128 473 71 50 124 14 2 21 2 35 45 .290 .346 .480 .826
2004 121 438 70 45 127 28 1 21 2 23 38 .312 .355 .541 .895
2005 146 590 87 77 172 25 1 32 1 44 43 .319 .376 .546 .923
2006 134 522 75 66 148 22 1 23 2 40 42 .314 .371 .511 .882
2007 124 446 71 41 118 17 0 15 1 20 31 .285 .327 .435 .762
2008 84 186 29 11 47 4 1 4 0 8 24 .270 .306 .374 .680
2010 68 86 19 5 17 3 0 2 0 6 19 .221 .279 .338 .617
2011 52 51 13 0 11 3 0 0 0 5 8 .250 .333 .318 .652
2012 56 56 19 1 16 4 0 0 0 5 5 .327 .375 .408 .783
2013 12 12 4 0 4 0 0 0 0 0 2 .364 .417 .364 .780
NPB 통산
(23시즌)
2188 7785 1112 929 2119 353 17 295 68 586 765 .302 .358 .484 .842
  • 볼드체는 리그 1위.

6. 관련 문서



[1] 카와카미 테츠하루, 이토 츠토무, 아라키 마사히로 등을 배출한 구마모토를 대표하는 야구 강호고교다.[2] 구마모토 공고 직속 선배이기도 하다.[3] 2009년엔 2군에서만 뛰었다.[4] 1961~1974 시즌까지 히로시마에서 전문 대타로 활약한 선수로 통산 대타 출장(778), 대타 안타(186), 대타 타점(118) 역대 1위 기록을 보유중이다. 은퇴 후 30년간 카프의 스카우터로써 마에다나 키타벳푸 마나부, 오가타 코이치 등의 여러 스타 선수들을 발굴해냈으며 2016년 심부전으로 향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5] 1회 초/말에 팀의 1번 타자가 선두로 나서서 친 홈런.[6]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프로 첫 홈런을 개막전에서 선두타자 홈런으로 친 사례다.[7] 아쉽게도 일본시리즈에서는 5년 전 역스윕을 안겨준 장본인이자 당대 최강전력을 보유했던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배한다. 그 이후 카프는 하위권을 전전하다가 2016-18시즌에 3년 연속 센트럴리그 제패를 달성했고, 2016년과 2018년엔 일본시리즈에도 진출했으나(2017년엔 클라이맥스시리즈에서 패퇴하여 진출 실패) 2번 모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패배했다.[8] 처음엔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주전 좌익수로 뛰고 있어서 우익수로 뛰었고, 2003년에 카네모토가 FA한신에 이적한 뒤에는 마에다 본인의 노쇠화와 시마 시게노부 같은 신예들의 대두도 겹치며 좌익수로 이동했다.[9] 2루타(36개)와 총 루타수(277루타)에서 센트럴리그 1위를 차지했다.[10] 공교롭게도 이 해 양 팀의 최종전이 서로간의 맞대결이어서 두 선수의 수위타자도 최종전에서 판가름나게 되었는데, 당시 요코하마의 감독이었던 곤도 히로시가 "만약 마에다가 출장하면 스즈키는 결장시키고, 마에다는 전 타석 고의사구로 승부를 피하겠다."라는 발언을 하였고 마에다가 이에 분노하여 "팬들에게 꼴사나운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다. 고의사구나 받을 바엔 결장하겠다."며 스스로 출장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최종전에서 두 선수가 모두 결장해 버렸고, 타율이 2리 더 높았던 스즈키가 영 좋지 않은 모양새로 2년 연속 수위타자가 되는 찜찜한 결말을 맞이했다. 마에다는 결국 커리어 내내 타격 타이틀을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11] 이 여파로 2000 시즌 소화 후 취득한 FA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12] 이 해 타율 .308/OPS .845 20홈런 59타점을 기록하며 컴백상을 수상했다.[13] 예외로 2003년엔 타율이 .290에 그쳤다.[14] 치바 롯데 마린즈의 포수 에무라 나오야의 4살 터울 형이다. 야쿠르트에 2012년 드래프트 4위로 입단한 좌완투수로 2015년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15] 이 때 마에다가 에무라에게 고성을 지르고 에무라가 사과했지만 그 직후 마에다가 통증으로 쓰러지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16] 마지막 타석은 투수 앞 땅볼이었고, 마에다 켄타가 울면서 꽃다발을 전해주었다.[17] 그러나 이 일이 프런트에 알려지는 바람에, 나가시마는 프런트에게 팀 분위기를 저하시키는 꼰대로 찍혀 이듬해에 주니치 드래곤즈로 트레이드당했다(...)[18] 둘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鯉のはなシアタ― 141101 방송을 참조[19] 1992~1993년에는 31번, 1994번부터 은퇴할때까지 계속 1번을 착용하였다. 1993년까지는 야마사키 류조가 1번을 착용했다.[20] 히로시마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중 하나로 꼽히지만, 실력만큼이나 다혈질적인 성격으로도 유명한 선수였다.[21] 1996년 4월 5일 히로시마 시민구장.[22] 투수강습 내야안타 기록.[23] 참고로 선동열은 일본에서의 4시즌 동안 마에다에게 홈런을 허용한 적은 없다.[24] WBC 대한민국 국대의 예상 선발투수나 투수 운용계획을 묻는 날카로운 질문에 선동열이 잘 피해가는 답변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