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22:20:07

카메이 요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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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e5a1d> 감독 83 아베 신노스케
1군 76 니오카 토모히로 (헤드코치 겸 타격수석코치) · 74 무라타 요시노리 (종합코치) · 81 스기우치 토시야 (수석투수코치)
77 우츠미 테츠야 (투수코치) · 78 카와이 마사히로 (내야수비코치) · 79 카메이 요시유키 (외야수비·주루코치)
88 사네마츠 카즈나리 (배터리코치) · # 아나부키 이쿠오 (트레이닝코치)
2군 73 쿠와타 마스미 (2군 감독) · 75 안도 츠요시 (헤드코치) · 71 야마구치 테츠야 (수석투수코치) · 72 오타케 켄 (투수코치)
85 와키야 료타 (내야수비·주루코치) · 82 스즈키 타카히로 (외야수비·주루코치) · 87 하시모토 이타루 (타격코치) · 89 카토 켄 (배터리코치)
# 이시모리 타카시 (트레이닝코치)
3군 70 코마다 노리히로 (3군 감독) · 86 후루키 시게유키 (타격코치) · 100 미사와 코이치 (수석투수코치)
104 노가미 료마 (투수코치) · 105 요시카와 다이키 (내야수비코치) · 103 킨죠 타츠히코 (외야수비·주루코치)
102 이치카와 토모야 (배터리코치) · 108 박석민 (육성코치) · # 존 터니 (트레이닝코치)
순회 84 쿠보 야스오 (순회투수코치) · 110 젤러스 휠러 (순회타격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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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이 요시유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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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藤健太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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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島治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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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筒井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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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夏 1936夏-1943 1936夏-1948 1936秋 1937秋
<rowcolor=#f49c00>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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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青田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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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村政美)
1937秋 1939-1958 1943-1952 1943 1943-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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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다 히로시
(須田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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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畑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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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黒沢俊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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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松原博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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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山菊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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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野光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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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村不可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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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手塚明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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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本敏雄)
1948 1951-1953 1951-1952 1953-1954 1955-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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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樋笠一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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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尾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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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柏枝文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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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与那嶺要)
파일:일본 국기.svg 나가시마 시게오
(長嶋茂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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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崎一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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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松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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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貞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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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沢義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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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昌彦)
1959-1962 1960-1968 1962-1980 1963 1964-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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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국기.svg 아이바 요시히로
(相羽欣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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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田勝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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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中久寿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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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倉照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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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永勝也)
1965 1965 1967 1967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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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柴田勲)
파일:일본 국기.svg 스에츠구 토시미츠
(末次利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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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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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畑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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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トマソ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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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原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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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辰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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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クロマティ)
1981 1981 1982-1995 1983-1984 1984-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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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만 국기.svg 루밍쑤
(呂明賜)
파일:일본 국기.svg 코마다 노리히로
(駒田徳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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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村禎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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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ラウ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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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ラッドリー)
1988 1988-1992 1990-1998 1990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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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井浩郎)
1995-1998 1995-2002 1996 1997-2005 1997-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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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橋由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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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ルティネ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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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ペタジー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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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久保裕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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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燁)
1999-2014 1999 2003-2004 2004-2006 2006-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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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岡智宏)
파일:일본 국기.svg 아베 신노스케
(阿部慎之助)
파일:일본 국기.svg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小笠原道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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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ラミレス)
파일:일본 국기.svg 초노 히사요시
(長野久義)
2006 2007-2019 2007 2008-2011 2011-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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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국기.svg 무라타 슈이치
(村田修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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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ペ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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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セペダ)
2012-2017 2013-2014 2013 2014-2015 2014
<rowcolor=#f49c00>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제8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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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田泰示)
파일:일본 국기.svg 사카모토 하야토
(坂本勇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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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井大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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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亀井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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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ジョーンズ)
2014-2015 2015~ 2015 201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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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クルー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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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ゲレー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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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丸佳浩)
2016 2017-2018 2018 20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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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田翔)
2022
1) 연도는 해당 선수가 4번 타자로 1경기 이상 출장한 해.
2) 볼드체일본야구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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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9 2012

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반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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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쉽
{{{#c7bc69 우승코치}}}
2023

파일:WBSC 프리미어 12 엠블럼.svg
2024 프리미어 12
은메달(코치)
2024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25번
미사와 코이치
(2004)
<colcolor=#fff> 카메이 요시유키
(2005~2006)
이승엽
(2007~2010)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35번
오치 다이스케
(2006)
카메이 요시유키
(2007~2009)
쿠도 타카토
(2009)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9번
시미즈 다카유키
(2002~2008)
카메이 요시유키
(2009~2021)
마츠바라 세이야
(2022)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79번
아이카와 료지
(2019~2021)
카메이 요시유키
(2022~)
현역
}}} ||
파일:쿄진카메이.jpg
<colbgcolor=#000000><colcolor=#fd5a1e> 요미우리 자이언츠 No.79
카메이 요시유키
亀井 善行 | Yoshiyuki Kamei
출생 1982년 7월 28일 ([age(1982-07-28)]세)
나라현 야마토코리야마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우에노미야타이시고등학교-주오대학
신체 178cm, 82kg
포지션 1루수, 3루수, 외야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2004년 드래프트 4위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5~2021)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외야수비·주루코치 (2022~)

1. 개요
1.1. 프로 입단 전1.2. 프로 입단 후
1.2.1. 2005년1.2.2. 2006년1.2.3. 2007년1.2.4. 2008년1.2.5. 2009년1.2.6. 2010년1.2.7. 2011년1.2.8. 2012년1.2.9. 2013년1.2.10. 2014년1.2.11. 2015년1.2.12. 2016년1.2.13. 2017년1.2.14. 2018년1.2.15. 2019년1.2.16. 2020년1.2.17. 2021년
2. 플레이 스타일3. 평가4. 여담5. 연도별 기록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의 전 외야수 현 1군 수비, 주루코치.

1.1. 프로 입단 전

유년기 시절에 7살 위의 형에게 캐치볼을 배워 초등학교 1학년에 야구를 시작해 중학교때는 보이즈 리그 「올 야마토」의 에이스로서 전국 대회, 보이즈 리그 일본 대표로서 세계 대회를 제패했다. 우에노미야타이시고등학교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2000년 봄 고시엔 대회 본선에 출전했다. 1회전에서 메이토쿠의숙고등학교에 패배하였다. 여름의 고시엔부 예선은 준준결승에서 간사이대학 부설 중.고등학교 상대로 패배를 하였다. 도쿄의 주오대학 경식야구부에 진학하고 난 이후에는 내야수(주로 지명 타자)로서 1년 봄부터 레귤러로 출장을 했다. 2학년이 되자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도쿄도 대학 야구 리그에서 MVP 1회·베스트 나인 3회를 수상해, 4학년 때에는 도쿄도 통산 10번째 통산 100안타를 달성, 주장으로서 2004년 추계 리그에서 25년만의 일부 우승에 공헌했다. 같은 해의 세계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일본 대표로 뽑혀 은메달 획득에 공헌하였다. 리그 통산 108경기 출장, 401타수 101안타, 타율.252, 13홈런, 53타점.

2004년의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4라운드 지명을 받아 입단을 하였고 그의 프로 생활이 시작됐다. 등번호는 25번을 부여받았다.

1.2. 프로 입단 후

1.2.1. 2005년

2005 년 , 2군에서 타율 .320,10 홈런 6 도루로 활약하며 시즌 중반에 1군으로 승격, 프로 첫 안타 · 첫 타점을 기록했다. 시즌후에 결혼을 발표했다.

1.2.2. 2006년

2006 년 3 월 31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개막전에 8번 우익수 로 출전해 3타수 2안타 4타점으로 활약했다. 6월 29일 요코하마 전에서 야마구치 슌 상대로 프로 데뷔 첫 홈런을 날렸다. 그러나 65 경기 출장에 그쳐 타율도 간신히 2할을 넘는 정도 밖에 남기지 않았다.

1.2.3. 2007년

이승엽이 등번호 25를 이 해부터 착용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등번호를 35번으로 변경하였다. 1번타자 후보로 기대되었으나 전년보다 출장 기회를 줄여 20경기에서 23타석에 머물렀다. 오프시즌에는타카하시 요시노부와 함께 오키나와현에서 자율 훈련을 실시했다.

1.2.4. 2008년

2008년은 타니 요시토모의 부진으로 개막 6 시합째에 2번 타자로서 기용되자, 4월 3일의주니치 드래곤스전에서 1번·다카하시 요시노부, 3번·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 함께 가와카미 켄신로부터 구단 9년만이 되는 3자 연속 홈런을 쏘아 팀의 시즌 첫 승리에 공헌을 하였다. 5월부터는 1번 타자로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로부터 구단 9년만이 되는 3연속 홈런으로 자리잡았다.7월 25일에 1군 복귀하지만, 타니와의 병용이 계속 되었다.이 해는 96경기에 출전해 타율 0.268, 5홈런, 23타점의 성적을 냈다.주니치 드래곤스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서 부상당한 스즈키 다카히로 대신 2차전에서 1번으로 주전 출전. 14타수 7안타 1타점의 활약으로 팀의 일본 시리즈 출전에 공헌을 하였다. 일본 시리즈에도 출장하고, 2차전에서는 오누마 코지 상대로 안타를 뽑아냈고 7차전에서는 5번을 맡아 첫 회에 상대 선발 니시구치 후미야가 자신의 타석에서 폭투하여 선취점이 들어가, 여전히 1사 2·3루의 찬스였지만 2루 땅볼로 물러나 득점하지 못했고, 후속도 무너졌다. 2회 사카모토 하야토의 솔로 홈런으로 2점 리드를 벌리지만, 이후 세이부 투수진 계투 전에 주자를 내보내지 못하고 8회 역전당해 우승을 놓쳤다.7차전은 무안타로 끝나 버려, 전술의 폭투로 선제 후의 찬스를 놓친 것이 영향을 주는 형태가 되어 버렸지만, 일정한 활약을 보였다.다음 해부터는 시미즈 다카유키의 이적으로 빈 등번호 9번을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1.2.5. 2009년

2009년은 개막전의 3월에 개최된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의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는데 쟁쟁한 선배, 경쟁자들을 다 제치고 뽑혀서 인터넷상에서는 스즈키 이치로에게 건방지게 훈수를 두는 후배라는 밈이 붙었다. [1]
시즌에서는 규정타석에 선 적도 없이 실적이 부족한 카메이가 선택된 것은 수비를 높게 평가하고 있던 타카시로 노부히로 내야 수비주루 코치의 강력한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정규 시즌에는 1번 우익수로 개막전 선발 출전. 당초에는 컨디션이 오르지 않아 다니와 함께 기용되었지만, 4월 25일의 주니치전에서 좌완 이와세 히토키로부터 대타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때려냄으로써 투수의 좌우에 관계없이 스타팅으로 기용되게 된다. 이승엽의 부진으로 5번 타자로 자리를 굳혔고 이후 1루수 기용도 늘었다. 하지만 6월말쯤부터 25타석 무안타, 8월에는 28타석 무안타로 슬럼프를 겪었지만 시즌 25홈런 중 18홈런 74삼진 중 50삼진을 7월 이후 기록했다.구단 기록에 이은 끝내기 홈런 3개로 첫 규정타석에 도달.자기 최다인 134경기에 출장했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상대로 일본 시리즈에서도 제5차전에서의 타케다 히사시로부터 동점 홈런을 날리는 등, 일본 제일에게 공헌해 우수 선수상을 수상.오프에는 첫 타이틀이 되는 골든글러브상을 수상하게 되어 연봉도 증가했다. U-26 NPB 선발 대 대학 일본 대표에게는 오버에이지로 출장.한일 클럽챔피언십도 5번 우익수로 출전해 승리에 기여했다.

1.2.6. 2010년

2010년은 개막부터 5번 타자로 기용되었지만 전년의 활약으로부터 일전해 부진에 빠져, 거듭되는 부상도 있어 3번의 2군행을 경험. 루키 초노 히사요시의 대두 영향으로 출장 기회를 빼앗겨 71 시합의 출장에 머물러, 타율.185, 5홈런, 17타점의 성적에 끝났다.11월 6일, 감액 제한을 웃도는 30%감소한 연봉 4200만엔에 계약 갱신했다. 추계 캠프에서는 「유례없는 재주가 있다」라고 평가하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의향으로 3루수로의 포지션 변경이 결정되어, 실전에 있어서의 수비 연습의 기회를 요구해 호주 리그에도 참가했다.

1.2.7. 2011년

2011년, 1월에 등록을 외야수에서 내야수로 변경.3루수 개막 스타팅은 신외국인인 라스티 라이얼에게 내줬지만 라이얼의 부진과 다른 야수들의 부상이 잇따르면서 점차 출전 기회가 늘었다.5월 14일 히로시마전에서 홈런·3루타·2루타를 치고, 1타만 더 치면 사이클 안타 달성이 되는 활약을 펼쳤다(제4타석에서 범퇴, 사이클 안타 없음).그런데, 이 시합전의 연습중에 녹타구의 직격탄을 맞아 오른손 약지가 골절된 것이 다음날에 판명, 팀을 이탈했다. 6월 11일에 복귀해 부진한 사카모토 하야토를 대신해 1번 타자로 스타팅 출장해, 자신의 첫 선두 타자 홈런을 날렸다. 그러나 한때 3할을 기록했던 타율도 시즌 중반 이후 급락.우익수, 중견수, 좌익수, 1루수, 3루수로 지킬 수 있는 모든 포지션에 주전 출전을 했고 타순도 1·2·6·7·8번을 경험하는 등 111경기에 출전했지만 정위치 확보에 실패했다.

1.2.8. 2012년

2012년, 3루수로 새로 FA로 영입한 무라타 슈이치와 경쟁을 다툴 예정이었지만, 팀 사정 때문에 주로 외야수로 출장. 5월 2일 히로시마전에서는 자신의 수비 실수로 팀이 패배.경기 후 하라 감독은 볼썽사납다.밤새 자지 말고 반성해 달라"고 혹독한 코멘트를 했다. 그러나 다음날 같은 카드로 오명 씻는 결승 홈런을 쳐 울먹이면서 히어로 인터뷰에 응했다. 또 이 플레이로 5월 조지아 혼상을 받았다.9월 22일-야쿠르트전의 9회초에 공식전에서 처음으로 2루의 수비에 들어갔다.그러나, 4월에 두부 사구로 코골 골절, 7월에 왼쪽 엄지 염좌 등 부상에 괴로워한 적도 있어 레귤러 재탈취는 완수하지 못했다.타율.236에 장타율.409로 장타력을 발휘했지만 2010년을 밑도는 60경기, 117타석을 뛰는 데 그쳤다.2012년의 일본 시리즈·2012년의 아시아 시리즈 제패에 공헌.

1.2.9. 2013년

2013년 1월 7일에 등록명을 「亀井 善行」로 변경하는 것이 발표되어 등록도 외야수로 돌아왔다. 그러나 캠프인 직후의 2월 2일에 지나친 연습으로 왼쪽 종아리의 근육 파동을 발병해 전선 이탈.4월 19일에 2군으로 실전 복귀해 공식전 7경기에서 타율.188이었지만, 5월 3일에 1군 복귀하였다. 같은 달 10일의 요코하마전에서 4년만의 자기 최다 타이인 1경기 4타점을 기록했고 또 25일의 오릭스전에서는 구단 통산 5500승을 자신의 4년만의 역전 끝내기타로 결정했다.복귀 후는 주전으로 정착해, 주로 2번·우익수로 선발 출장하는 등 86시합에 출장했다. 도호쿠 라쿠텐 골든 이글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파인 플레이로 가장 대회를 열광시킨 선수로서 특별상 베이스볼 히어로즈상을 수상했다.

1.2.10. 2014년

2014년 2월 26일 경기 전 연습 중 내야수비 도중 공을 잡을 때 오른손 타구를 맞아 오른손 검지 첫 마디 골절로 진단된다. 그 후 수술을 받고 회복, 5월 17일의 2군전에서 실전 복귀해, 5월 31일의 대 오릭스전에서 1군 복귀.7번 우익수로 선발 출장하자 0-0으로 맞이한 연장 12회초에 마하라 타카히로로부터 결승의 솔로 홈런을 날렸다.그 후도 우익수의 주전으로서 선발출장을 계속해, 승부 강한 타격과 수비로 팀 승리에 공헌. 팀을 2번째 교류전 우승으로 이끌어, 교류전 MVP를 획득했다. 69경기 출장하면서 3할 가까운 타율을 남겼다.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한신과 대전.팀은 직구 4연패로 패퇴했지만 3차전에는 랜디 메신저, 4차전에는 노미 아츠시로부터 각각 솔로홈런을 터뜨리는 등 부진했던 타격진에서 레슬리 앤더슨과 함께 기세를 올렸다.10월 21일, '일본 프로야구 80주년 기념 경기'의 한신·요미우리 연합 팀에 선출되었다는 것이 발표되었다.

1.2.11. 2015년

2015년 7월 7일 야쿠르트전에서 프로 데뷔 첫 4번 타자를 맡았고 요미우리의 84대 4번 타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이에 카메이는 “요미우리의 4번타자니까요. 쉽지 않은 거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7월 16일에, 제1회 WBSC 프리미어 12의 일본 대표 제1차 후보선수로 선출된 것이 발표되었다. 또, 시즌내내 비록 규정타석에는 아직 11타석 부족했지만, 4년만의 100 시합 이상 출장해 타율.272, 6홈런, 35타점의 성적을 남겼다.

1.2.12. 2016년

2016년은 개막전부터 6번·좌익으로서 선발 출장을 계속했지만 6월 16일의 출장 등록 말소부터 9월 2일의 재등록까지 하반신의 부상등으로 약 3개월 2군조정을 피할 수 없게 되는 등 66 시합의 출장에 머무른다.계약 갱신에서는, 거의 삭감 제한 같은 수준인 2000만 다운의 연봉 5000만엔에 도정을 찍었다.

1.2.13. 2017년

2017년은 개막부터 대타 출전이 잦아, 6월 18일의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는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기록하는 등 자주 결승타를 날렸다. 후반전부터 왼쪽에서 주전 출전이 잦아졌고 최종 109경기 출장으로 타율 자체는 평범했지만 득점권 타율은 3할 후반의 고타율을 기록하기도 해 타점의 갑절이 넘는 타점을 기록했다.

1.2.14. 2018년

2018년은 개막 2군 스타트였지만, 양다이강의 부상 이탈로 1군으로 승격하자, 초노 등 다른 외야수의 부진등도 있어 주전 출전이 증가했다. 8월 1일의 DeNA전에서 2009년 이래 9년만의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시즌 중반까지는 호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8월 이후 피로도 있어 급실속했다. 좌투일때는 스타팅을 벗어날 기회가 많아 타율은 0.254에 그쳤지만 123경기에 출전해 자신 9년만에 두번째 규정타석에 들어섰다.

1.2.15. 2019년

2019년은 전년과 달리 개막 초부터 정규 외야수로 쓰일 기회가 늘었고, 중반전부터는 1번 타자로 기용됐다.전년에 이어 규정타석에 들어서면서 홈런, 타점은 전년과 비슷했지만 경력 2위인 131경기에 출전해 타율은 크게 웃도는.284를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했다.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서는 2차전까지 무안타도 3차전에서는 첫 회에 릭 밴덴헐크로부터 선두타자 홈런, 두 번째 타석에서도 한때 동점 솔로 홈런을 터뜨려 두 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이 시리즈에서 팀은 승수 없이 4연패에 빠졌지만 최근 2연타석 홈런의 활약으로 시리즈 감투선수상을 수상했다. 시즌종료 후 연봉 협상에서 프로 15년째에 첫 1억엔 연봉을 진입하여 4000만엔 인상한 1억1000만엔에 사인했다.

1.2.16. 2020년

2020년 7월 9일의 한신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9회초에 후지카와 큐지로부터 라이트 앞으로 적시타를 쳐, 이것이 구단 사상 최고령(37세 11개월) 1000개 안타에 도달했다. 8월 13일에 자신 10번째의 끝내기 타를 기록해, 수훈 인터뷰에서는 “시합시간 3초였습니다만”이라고 코멘트했다. 이 해는 마츠바라 세이야의 대두나 제라스·윌러가 가입한 적도 있어, 비록 선발출장은 잦았지만 대타로의 차례가 증가했다. 또한 9월 25일에 왼쪽 다리 내전근 위화감 때문에 등록을 말소되었다.이 말소 이후에는 시즌 중 1군 승격하지 못하고 51경기 출전에 그쳤다.한편 일본시리즈에 복귀해 1차전에서 3차전까지 선발 출장해도 무안타에 그쳤다.4차전에선 스타팅에 빠졌고 9회초 2사 1, 2루의 찬스에서 대타로 등판했지만 2루수 뜬공으로 물러났고 시리즈 마지막 타자가 돼버려 일본시리즈는 2년 연속 4연패의 수모를 당했다.

1.2.17. 2021년

2021년 3월 26일의 개막전에서 9회말에 선두타자 고바야시 세이지의 대타로 등장해, 미시마 가즈키 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쳤다.개막전에서 대타 끝내기 홈런은 프로야구 사상 최초이다. 6월 5일의 홋카이도 니혼햄 파이터스전에서 통산 100호 홈런을 달성했다. 10월 21일,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발표했고, 10월 23일 도쿄돔에서 은퇴식이 거행되었다. 5회말 스가노의 대타로 마지막 타석에 섰다. 결과는 3루 땅볼로 물러나며 16년간 프로생활을 마무리했다. 경기 종료후 은퇴식이 진행되었다.

2022년부터는 1군 외야수비, 주루코치로 부임했는데, 49년만에 1경기 6도루 기록이 나왔다.

2. 플레이 스타일

201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는 슈퍼 유틸리티 플레이어의 조상님쯤 되는 선수로, 주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백업이라고 볼 수도 없는 백업 이상 주전 미만의 그 어딘가인 커리어를 보냈다.

1, 3루 및 코너외야를 다 볼 수 있었는데, 어깨가 특히 강한 편이라 커리어 후반부에는 외야로 주로 뛰었고, 골드글러브도 외야로 타서 외야수로 등록되긴 했으나 팀이 원하면 코너내야와 코너외야 어느 자리든 끼워맞출 수 있는 윤활유와 같은 선수였다. 수비력이 뛰어나고 발도 빨랐지만 방망이는 그에 미치지 못해서 커리어를 주로 백업으로 보냈다. 카메이의 포지션인 1,3루와 코너외야라는 자리 자체가 파워포지션이고 용병과도 경쟁을 해야 해서, 교타자인 카메이의 타격은 더더욱 돋보일 수가 없었다.

일본 스타일 야수하면 생각나는 우투좌타의 교과서같은 선수로, 불필요한 동작이 일체 없는 깔끔한 다운스윙이 특징이다. 커리어 내내 3할은 한 번도 쳐 본 적이 없지만 00년대 후반~2010년대 초중반의 극 투고타저 시대에 불규칙하게 출장하면서도 2할 6~8푼은 보장해줄 수 있는 괜찮은 컨택을 지닌 선수였으며, 도루 갯수도 많지는 않지만 주루 자체는 빠른 편. 단 선구안은 꽤 좋지 않아 기복이 좀 있었다.

그러다가 09년 풀시즌 출장에 .290에 25홈런이라는 플루크 시즌을 기록했는데 이 시즌은 특히 시즌 후반기에 18홈런을 몰아칠 정도로 후반기 2개월간 미친 활약으로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캐리했고,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까지 받았을 정도로 타격 포텐셜 자체는 있던 선수였다. 플루크를 제외하고라도 항상 OPS 7할대에 5~10개 정도를 기록해 줄 수 있는 홈런과 도루는 스타군단인 교진에서는 주전으로 삼기엔 한 끗 모자라지만 백업치고는 과분할 정도로 뛰어나서 항상 1군에 한 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쏠쏠하게 쓰였다.

특히 고액선수투자를 많이 하는 교진답게 카메이의 포지션인 코너 내외야는 주로 용병이나 FA로 채우기 마련이었지만 워낙 교진의 FA 잔혹사가 화려한지라 FA 먹튀들도 많았는데, 그들이 먹고 튄 자리를 채우는 것은 항상 카메이였고, 교진도 아무리 망해도 빈 자리를 카메이가 메워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또 새로 FA를 구입할 수 있었던 견실한 선수. 카메이 본인도 FA 먹튀가 워낙 많았던 요미우리에 있었던 덕에 커리어 1천 안타를 기록할 정도로 꽤 많은 출장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스타 선수가 되기에는 재능이 약간 모자랐지만, 1군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좋은 B급 선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FA영입 많이 하면서 순혈 따지는 팀답게 교진 순혈 베테랑은 은근 적었는데, 야수조에서는 카메이가 교진 순혈로서 리더십을 발휘해 후배들을 이끌고 팀웍을 다지는 역할을 했던, 단순히 숫자 그 이상이었던 선수.

2009년 플루크로 25홈런을 쳐 버린 후 장타맛에 취해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늘리고 홈런을 노리는 어퍼스윙으로 스윙도 바꾸었으나, 이로 인해 신체 밸런스가 무너져 2010~12년 대략 3년간 2할5푼도 못치는 엉망진창인 타격을 보였다. 그러나 근육을 빼고 타격폼도 레그킥에서 토탭으로 컨택에 집중하는 식으로 타격폼을 바꾸면서 다시 정교함을 되찾아, 비록 장타력은 다시 잃었지만 교타자로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에 부정적이며, 무작정 웨이트로 파워만 늘리는 것에 부정적인 쪽에서 반면교사처럼 제시하는 사례가 바로 카메이의 사례.

3. 평가

전체적인 커리어는 눈에 띄지 않지만[2], 그래도 커리어 통틀어 요미우리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유틸리티 플레이어이며 실제로 하라 타츠노리 감독도 카메이의 은퇴 기자회견에서 곤란할 때는 카메이를 믿는다. 나에겐 야구, 자이언츠의 수호신이었다라고 할 만큼 현역시절 믿고 맡길 수 있는 선수였다.

일본프로야구 팬들에게는 기록보다 기억으로 남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통산안타가 1069안타라는 점에서 절대 평범한 기록은 아닌데, 이 사람이 주전경쟁에서 제친 선수들이 외부 FA로 거액의 돈을 주고 사왔으나 노쇠화로 수비가 안 되거나, 부상당해서 못 나오거나, 원래 수비를 못 하거나 하는 선수들이라 그들의 공백을 잘 메우며 17년간 요미우리에서 뛰어왔다는 건 절대로 평범한 기록이 아니다.[3]

4. 여담

  • 현역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홈런으로는 2014년 5월 31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노 히트 노 런을 기록한 가네코 치히로의 승리를 날려먹은 홈런을 꼽았으며, 가장 대단했던 투수는 타석에서 공이 떠오른 후지카와 큐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의외로 팬들이 밥 먹을 때 알아보는 일이 없었다고.
  • 일본프로야구 팬, 특히 요미우리 팬들에게는 항상 투지가 넘치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타선이 부실한 상황에서도 팀이 필요할 때 해결사 역할을 해 주면서도, 2017년 롯데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쳤지만 직전 타석까지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흘린 눈물은 일본프로야구 팬들의 가슴에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2019년 일본시리즈에서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선수들의 헹가래를 끝까지 남아 지켜보기도 했다.
  • 친화력이 상당히 좋아, 나카지마 히로유키 선수가 요미우리로 올 때 대인관계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하고 후배들에게 밥을 많이 사줬다고 한다. 또한 선배들에게도 굉장히 예쁨받아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식사나 술자리에 많이 데려갔다고 한다.
  • 호주 프로야구 리그 멜버른 에이시스에서도 2010년~11년 파견되어 뛴 적이 있다.
  • 얼굴이 잘생긴 편이라 얼빠도 은근히 많았다.
  • 스포츠호치와의 인터뷰에서는, 은퇴 후 비시즌에는 콧수염을 기르는 듯하다.[4] 또한 의외로 부정적인 사고가 강한 편이라, 후배 선수들 중에서는 요시카와 나오키 선수와 성격이 비슷하다고 밝혔다. 요시카와 나오키, 마츠바라 세이야 등 후배이자 제자들을 아끼는 편.
  • 경기가 끝나고 집에서 목욕을 하는 걸 즐기는데, 집에 오면 목욕물이 미지근해지는 경우가 많아 데움 버튼을 한 번 더 누른다고 한다.

5. 연도별 기록

파일:NPB 로고.svg 카메이 요시유키의 역대 NP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05 요미
우리
20 45 6 2 0 0 1 1 0 1 15 .143 .182 .190 .372 -0.5
2006 65 151 29 12 1 3 13 18 1 5 8 .206 .233 .369 .602 0.1
2007 20 23 3 1 0 1 3 3 1 3 7 .158 .261 .368 .629 0
2008 96 298 74 21 3 5 41 23 7 14 43 .268 .311 .420 .731 1.2
2009 134 547 142 25 4 25 79 71 12 45 74 .290 .354 .510 .864 5.7
2010 71 220 38 13 0 5 22 17 4 9 38 .185 .228 .322 .550 -0.2
2011 111 308 70 13 2 3 27 24 7 14 43 .246 .283 .338 .621 0.8
2012 60 117 26 7 3 2 12 11 0 4 13 .236 .270 .409 .679 0.5
2013 86 324 76 17 0 3 31 25 3 17 36 .257 .298 .345 .643 -0.2
2014 69 268 71 17 1 8 31 26 3 19 30 .296 .352 .475 .837 1.4
2015 109 432 104 21 0 6 42 35 8 40 59 .272 .338 .374 .712 0.6
2016 66 240 57 14 0 3 21 23 0 11 35 .252 .287 .354 .641 -0.1
2017 109 277 62 16 0 6 20 47 1 27 38 .251 .328 .389 .714 0.7
2018 123 461 107 20 0 13 47 49 4 36 70 .254 .315 .393 .708 1
2019 131 503 128 27 2 13 67 55 9 45 91 .284 .346 .440 .786 2.9
2020 51 156 36 7 0 2 21 17 0 11 21 .255 .310 .348 .658 0
2021 92 206 40 12 0 3 15 17 1 13 47 .215 .270 .339 .609 -0.4
NPB 통산
(17시즌)
1413 4576 1069 245 17 101 493 462 61 314 698 .257 .311 .397 .708 13.5

6. 관련 문서



[1] 이번 대회에서는 3경기 출전에 1안타 1희생타 1도루를 기록했다.[2] 그나마 팬들에게 각인되는 시즌은 카메이에게 있어서 커리어하이인 2009년 시즌이 유일하다.[3] 이 때문에 요미우리 팬 사이에서는 2010년 떨어진 성적에도 불구하고 부상당한 마츠모토 테츠야, 수비 못 하는 알렉스 라미레스, 초노 히사요시, 노령화로 수비력이 떨어진 다니 요시토모, 허리수술로 빠진 타카하시 요시노부 대신에 자주 나와 최다출장 기록을 세우며 "틈이 생기면 카메이(隙あらば亀井)"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4] 요미우리는 현역선수가 수염을 기르는 게 금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