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2 09:05:14

아라이 히로마사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7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1986년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오리온즈)
.360
아라이 히로마사
(킨테츠 버팔로즈)
.366
1988년
타카자와 히데아키
(롯데 오리온즈)
.327

일본의 야구인
파일:新井宏昌.jpg
아라이 히로마사
新井宏昌 / Hiromasa Arai
<colbgcolor=#eeeeee> 한국명 박종률 (朴鐘律)[1]
출생 1952년 4월 26일 ([age(1952-04-26)]세)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1952~1991)

[[일본|]][[틀:국기|]][[틀:국기|]] (1991~)
학력 PL학원고등학교 - 호세이대학
포지션 외야수, 1루수
투타 우투좌타
신장 174cm, 69kg
프로입단 1974년 드래프트 2위
소속팀 난카이 호크스 (1975~1985)
긴테츠 버팔로즈 (1986~1992)
지도자 오릭스 블루웨이브 1군 타격코치 (1994~1997)
오릭스 블루웨이브 1군 종합코치 (1998~1999)
오릭스 블루웨이브 2군 감독·타격코치 (2000~2001)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군 타격코치 (2003~2004)
오릭스 버팔로즈 1군 치프·타격코치 (2005~2006)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타격코치 (2007~2008)
오릭스 버팔로즈 2군 감독 (2010~2011)
오릭스 버팔로즈 1군 타격코치 (2012)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타격코치 (2013~2015)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군 타격코치 (2019~2020)
1. 개요2. 현역 시절3. 지도자 경력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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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재일 한국인 3세 출신으로 1991년 일본으로 귀화했다. 본명은 '박종률(朴鐘律)'[2]로 프로 지명 당시까진 본명을 훈독한 '아라이 카네노리(新井鐘律)'를 통명으로 사용했으나 프로 데뷔 후 등록명을 히로마사로 바꾼 뒤 귀화와 함께 본명까지 그대로 등록명인 히로마사로 변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역 시절 준수한 배트 컨트롤을 뽐내며 통산 2000안타, 300희생타를 기록한 교타자로, 은퇴 후 여러 프로팀에서 코치로 일하며 이치로 등의 명선수들을 길러냈다.

2. 현역 시절

2.1. 데뷔 이전 ~ 난카이 호크스

PL학원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70년 주장으로서 팀을 최초로 코시엔 결승으로 이끌고, 가을에 열린 국민체육대회에서 우승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이후 PL은 키요하라 카즈히로, 쿠와타 마스미 등을 배출한, 20세기 말을 대표하는 야구 명문고로 거듭난다.

그 후 고졸 시즌이었던 1970년 드래프트에서 킨테츠 버팔로즈의 9위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을 거부한 채 호세이대학 진학을 선택했고, 대학 시절에도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면서 2차례 리그 우승과 베스트나인 1회 수상을 기록하고 1974년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대회에도 대표로 뽑힌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프로에 입문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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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이 호크스 시절.

당초 아라이는 체구가 작아서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당시 난카이의 플레잉 매니저였던 노무라 카츠야가 TV로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경기를 관전하던 중 그의 뛰어난 배팅센스에 주목, 같은 해 드래프트에서 난카이 호크스의 2위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다.

입단 2년차인 1975년부터 주전 외야수로 정착한 시작한 아라이는 이후 장타력은 낮았지만 3할 전후의 타율을 기대할 수 있는 교타력과 준수한 주력, 작전 수행능력을 앞세워 팀 타선의 테이블 세터로 활약하며 2차례 베스트나인을 수상하는 등 난카이 호크스 최후의 황금기와 기나긴 암흑기를 지탱했고, 1979년과 1982년엔 2차례에 걸쳐 당시 퍼시픽리그를 대표하던 강타자 카토 히데지,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수위타자 경쟁을 벌였으나 2번 모두 아쉽게 타율 2위에 그치며 수상에 실패했다.

그러나 1985년 시즌엔 성적 부진에 빠지면서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고, 시즌 종료 후 노쇠화를 이유로 킨테츠 버팔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

2.2. 킨테츠 버팔로즈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a0ad75e7.jpg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노쇠화를 이유로 킨테츠로 트레이드된 아라이였지만, 킨테츠에서 당시 타격코치를 역임하던 나카니시 후토시를 만나 지도를 받으면서 오히려 프로에서의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킨테츠에서 후쿠모토 유타카의 연속 도루왕을 저지한 바 있는 호타준족의 1번 타자 오오이시 다이지로의 뒤를 잇는 2번 타자 역할을 맡게 된 아라이는 이적 첫 해인 1986년에 148안타, 리그 최다인 2루타 31개, 데뷔 이래 첫 두 자릿 수 홈런인 12홈런을 기록하며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했고, 이듬해인 1987년엔 타율 .366/184안타 13홈런를 기록하며 과거 2차례나 놓쳤던 수위타자 수상에 성공한 데 이어 베스트나인과 함께 생애 유일의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는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이 해 아라이가 기록한 184안타는 그 해 퍼시픽리그 최다안타이자 당시 퍼시픽리그 단일 시즌 최다안타 기록이었고, 1994년 자신이 가르친 스즈키 이치로가 210안타를 쳐내면서 이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3] 또한 2004년 킨테츠가 해체될 때까지 깨지지 않은 킨테츠 소속 선수의 단일 시즌 최다안타 기록이기도 하다.

1988년엔 10.19를 경험하기도 했고, 다음 해인 1989년엔 2번 타자이자 팀내 유일한 3할 타자로써 팀을 견인하며 그 해 킨테츠가 치열했던 우승 경쟁 끝에 9년 만에 퍼시픽리그를 제패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같은 해 일본시리즈에서도 팀은 충격적인 리버스 스윕으로 우승을 놓쳤으나, 아라이는 23타수 9안타, 타율 .391의 성적으로 교타력을 과시하며 일본시리즈 패전팀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선수에게 주는 감투선수상을 수상했다.

한편으로 난카이 시절엔 1번도 나가지 못한 올스타전에도 4번이나 출장했다. 다만 4번 모두 팬투표로 뽑힌 게 아니라 감독 지명으로 출장했다.

그렇게 킨테츠에서 1991년까지 준수한 활약을 이어갔지만 만 40세 시즌이었던 1992년에 노쇠화에 따른 극도의 성적 부진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 해 대망의 통산 2000안타, 300희생타를 달성하며 명구회에 가입하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전력 외 통보를 받으며 현역 커리어를 끝마쳤다.

통산 성적은 2076시합 출장, 타율 .291/OPS .737, 2038안타 88홈런 680타점 165도루 300희생타이며, 수상 기록으로는 1987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1989년 일본시리즈 감투선수상 및 골든글러브 1회, 베스트나인 4회 수상 경력이 있다. 이 중 통산 300희생타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5위이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해설가/평론가로 활동하다가 1994년, 당시 감독이자 긴테츠 시절의 은사 오기 아키라의 부탁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타격 코치로 취임했고, 후에 종합 코치와 2군 감독을 맡았다. 오릭스 선수였던 사토 가즈히로와 스즈키 이치로의 등록명을 "펀치"와 "이치로"로 각각 변경하도록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치로의 타격 지도를 맡으면서 이치로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타자로 우뚝서는데 기여했고 1995년과 1996년의 리그 우승, 1996년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오기와 함께했다. 그 후 오기가 2001년 성적부진으로 물러나면서 같이 오릭스를 떠나게 된다.

그 후 2003년부터 2년간 오 사다하루 감독이 이끌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타격 코치를 맡아 2003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다이에에 있으면서 이구치 타다히토, 마츠나카 노부히코, 조지마 겐지, 페드로 발데스100타점 4인방이 이끄는 '다이하드 타선'을 완성했으며, 2003년 다이에의 팀타율 .297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 기록으로 남았다.

2005년 오기 아키라 감독을 따라 오릭스 버팔로즈의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로 오릭스에 복귀했지만, 2006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07년과 2008년에는 다시 호크스로 돌아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지만, 2년간 타선의 타격성적이 저조하면서 해임되었다. 이후 2010년부터는 3년간 오릭스에서 2군 감독을 역임(2012년에는 타격코치도 겸임)했다.

2013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타격코치로 이적하여 마루 요시히로, 키쿠치 료스케 등의 신진 강타자들을 육성했으나 2015년 팀의 전반적인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코치직에서 물러난 이후엔 야구 해설자 및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다시 2019년에 호크스 2군 타격 코치로 복귀하여 2년 간 코치를 역임했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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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미인이다. 장녀는 2011년 미스 일본 미스 기모노에 선정되었으며, 3녀는 2012년 미스 일본 그랑프리에 선정되었다. 두 명 모두 모델로 활약.


[1] 개명 전 일본명은 한국명인 종률을 훈독한 아라이 카네노리(新井鐘律).[2] 1980년대 한국 야구계에서는 일본 이름을 한자로 읽은 박굉창(朴宏昌)으로 통했었다.[3] 1987시즌 당시 일본프로야구 전체 최다안타 기록은 센트럴 리그 기록이었던 후지무라 후미오의 191안타로, 센트럴리그 기록도 2005년 아오키 노리치카에 의해 경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