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8 05:10:53

후지무라 후미오

후지무라 후미오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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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10 No.11 No.23
후지무라 후미오 무라야마 미노루 요시다 요시오
한신 타이거스, 틀:한신 타이거스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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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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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 현재
초대
모리 시게오
(1936)
2대
이시모토 슈이치
(1936~1939)
3대
마츠키 켄지로
(1940~1941)
4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2~1944)
5대
후지무라 후미오
(1946)
6대
와카바야시 타다시
(1947~1949)
7대
마츠키 켄지로
(1950~1954)
8대
키시 이치로
(1955)
9대
후지무라 후미오
(1956~1957)
10대
타나카 요시오
(1958~1959)
11대
카네다 마사야스
(1960~1961)
12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2~1965)
13대
스기시타 시게루
(1966)
14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67~1968)
15대
고토 츠구오
(1969)
16대
무라야마 미노루
(1970~1972)
17대
카네다 마사야스
(1973~1974)
18대
요시다 요시오
(1975~1977)
19대
고토 츠구오
(1978)
20대
돈 블레이싱게임
(1979~1980)
21대
나카니시 후토시
(1981)
22대
안도 모토오
(1982~1984)
23대
요시다 요시오
(1985~1987)
24대
무라야마 미노루
(1988~1989)
25대
나카무라 카츠히로
(1990~1995)
26대
후지타 타이라
(1996)
27대
요시다 요시오
(1997~1998)
28대
노무라 카츠야
(1999~2001)
29대
호시노 센이치
(2002~2003)
30대
오카다 아키노부
(2004~2008)
31대
마유미 아키노부
(2009~2011)
32대
와다 유타카
(2011~2015)
33대
카네모토 토모아키
(2016~2018)
34대
야노 아키히로
(2019~2022)
35대
오카다 아키노부
(2023~2024)
36대
후지카와 큐지
(2025~)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일본시리즈 진출(리그 2~3위) / : 단일리그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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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일본프로야구 MVP
야마모토 카즈토
(난카이 호크스)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타이거스)
고즈루 마코토
(쇼치쿠 로빈스)[1]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오리온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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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3루수 베스트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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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 1940년, 1947년 ~ 1949년
<rowcolor=#ffffff> 1940 1947 1948 1949
미즈하라 시게루
도쿄쿄진군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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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요기 신지오
오사카
우노 미츠오
코쿠테츠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코다마 리이치
주니치
코다마 리이치
주니치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레온 리
야쿠르트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반스 로우
주니치
야마사키 류조
히로시마
잭 하월
야쿠르트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레오 고메스
주니치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레오 고메스
주니치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에토 아키라
요미우리
에토 아키라
요미우리
이와무라 아키노리
야쿠르트
스즈키 켄
야쿠르트
타츠나미 카즈요시
주니치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이마오카 마코토
한신
이와무라 아키노리
야쿠르트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요미우리
무라타 슈이치
요코하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요미우리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모리노 마사히코
주니치
미야모토 신야
야쿠르트
무라타 슈이치
요미우리
무라타 슈이치
요미우리
엑토르 루나
주니치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카와바타 신고
야쿠르트
무라타 슈이치
요미우리
미야자키 토시로
DeNA
미야자키 토시로
DeNA
타카하시 슈헤이
주니치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미야자키 토시로
DeNA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rowcolor=#ffffff> 2025 2026 2027 2028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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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나카타니 쥰지
한큐
카케야마 카즈오
난카이
카케야마 카즈오
난카이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카츠라기 타카오
다이마이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코다마 하루토시
킨테츠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코다마 하루토시
킨테츠
코다마 하루토시
킨테츠
코다마 하루토시
킨테츠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코다마 하루토시
킨테츠
토니 로이(1)
니시테츠
모리모토 키요시
오릭스
쿠니사다 야스히로
난카이
아리토 미치요
롯데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아리토 미치요
롯데
아리토 미치요
롯데
아리토 미치요
롯데
아리토 미치요
롯데
아리토 미치요
롯데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아리토 미치요
롯데
후지와라 미츠루
난카이
아리토 미치요
롯데
시마타니 킨지
한큐
시마타니 킨지
한큐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아리토 미치요
롯데
아리토 미치요
롯데
스티브 온티베로스
세이부
스티브 온티베로스
세이부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마츠나가 히로미
한큐
마츠나가 히로미
오릭스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마츠나가 히로미
오릭스
마츠나가 히로미
오릭스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마츠나가 히로미
다이에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하츠시바 키요시
롯데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스즈키 켄
세이부
카타오카 아츠시
닛폰햄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이마에 토시아키
롯데
호세 페르난데스
라쿠텐
그렉 라로카
오릭스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코야노 에이이치
닛폰햄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케이시 맥기
라쿠텐
긴지
라쿠텐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브랜든 레어드
닛폰햄
젤러스 휠러
라쿠텐
마츠다 노부히로
소프트뱅크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스즈키 다이치
라쿠텐
무네 유마
오릭스
무네 유마
오릭스
무네 유마
오릭스
쿠리하라 료야
소프트뱅크
<rowcolor=#ffffff> 2025 2026 2027 2028 2029
(1) 당해 득표수 1위는 난카이 호크스의 쿠니사다 야스히로였으나, 당시 쿠니사다가 2루수 부문에서도 득표수 1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당시 복수 포지션에서의 수상을 금지한 규정상 쿠니사다는 득표수가 더 많은 2루수 부문만 수상하고 대신 득표수 2위였던 토니 로이가 3루수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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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74px-Fumio_Fujimura_1948.jpg
한신 타이거스 No. 10
후지무라 후미오
藤村 富美男
<colbgcolor=#fefe01> 생년월일 1916년 8월 14일
사망 1992년 5월 28일 (향년 75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일본 히로시마구레
포지션 투수, 2루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조건 173cm, 79kg
프로입단 1936년
소속팀 오사카 타이거스 (1936~1958)
지도자 경력 오사카 타이거스(1946, 1950~1957)
도에이 플라이어즈(1964~1965, 1967~1968)

1. 개요2. 선수 시절3. 지도자 시절4. 이후5. 에피소드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前 선수, 감독, 해설자. 일본야구를 대표하는 전설의 강타자이며 한신 타이거즈의 초대 "미스터 타이거즈"로 한신의 초창기를 빛낸 선수였다.

2. 선수 시절

고코 중학 졸업 후 1936년 한신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갓 출범한 프로야구에 원년멤버로 발을 들였다. 학창시절 강속구 투수로 명성을 떨쳤던 후지무라는 투수와 내야수를 번갈아 맡으면서 젊은 나이에 한신의 주축 선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1939년 군대에 징집당해 4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43년 제대 후 다시 한신에 복귀하여 프로리그가 중지된 1944년 까지 한신의 주축 선수로 맹활약 했다.

1945년 2차대전이 끝나자 프로야구는 다시 부활하였고, 후지무라는 투수 겸 3루수로 여전히 팀의 중심축을 지켰다. 1946년에는 감독 겸 선수로 플레이 하기도 했고[3] 그해 투수로 13승을 거두면서 타자로서도 0.323의 준수한 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1947년 이후 타격을 살리기 위해 3루수로 전업하였고[4] 이때부터 중장거리 스타일이던 후지무라는 슬러거로 변신하기에 이르렀다. 1948년 시즌 처음으로 두자리수 홈런(13개)를 기록하더니 이듬해 1949년엔 무려 46개의 홈런[5]으로 캐리어 첫 홈런왕 타이틀을 쥐며 바야흐로 후지무라 전성시대를 열어젖히게 된다. 또한 1950년 그가 기록한 191안타는 스즈키 이치로가 1994년 210안타로 경신할 때까지 무려 44년간 NPB 사상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으로 남았다.[6] 동시에 146타점을 기록했는데, 2005년 이마오카 마코토가 147타점으로 경신할 때까지 55년간 한신 프랜차이즈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타점이었다. 팀 후배인 벳토 카오루다이너마이트 타선을 구축하며 타 팀에 공포스러운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무려 37인치 길이의 배트(일명 빨래장대)를 풀스윙하여 홈런을 뻥뻥 날려대는 장타자로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일본 야구 역사상 37인치나 되는 배트를 쓴 선수는 후지무라 뿐이었고, 후지무라가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37인치 배트는 지금도 생산되지 않고 있다.[7]
또한 수비에서도 후지무라는 진가를 여실히 발휘하였다. 3루 수비는 날렵하거나 화려하진 않았지만 투수를 보던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항상 수비 위치를 3루 베이스에서 두 걸음 정도 뒤로 잡았고, 타구가 날아오면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달려나와 포구하여 1루에 총알같이 송구하는 모습은 팬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같은 3루수의 레전드나가시마 시게오가 이 후지무라의 플레이에 감명받고 3루수를 맡게 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

후지무라는 전후 10년간 프로야구의 슈퍼스타 이자 한신의 대들보로 시대를 풍미했고, 강타와 호수비 그리고 파이팅 넘치는 패기로 50년대 초중반 까지의 프로야구 부흥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강렬한 라이벌 의식[8]을 갖고 요미우리 전에선 평소보다 더한 허슬플레이로 강하게 맞서며 요미우리와 한신 경기의 인기를 한 차원 더 높이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17년 현역생활 동안 후지무라는 수위타자 1회, 홈런왕 3회, 타점왕 3회를 차지했고, MVP 1회, 베스트나인 6회를 수상했다. 덧붙여 2게임 연속 만루홈런사이클링 히트 2회라는 진기록도 보유하고 있다.[9]

한편으로 후지무라의 성격은 지독한 고집불통에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했으며 지는 것을 죽기보다도 싫어했다. 현역 시절 라이벌이던 요미우리의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시합 전 인사를 건네도 후지무라는 번번히 못본 척 무시하였고, 1948년 한신에 입단한 벳토 카오루가 미남 슬러거로 인기를 높이며 자신의 명성을 위협하자 동료이자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경원시 하기도 했다. 벳토가 홈런을 치고 들어와 동료들과 악수를 나누는 와중에 후지무라는 뒤돌아서서 외면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10] 이런 성격 때문에 스즈키 이치로가 후지무라의 시즌 최다안타 기록을 1994년에 경신하자, 야구계에선 "후지무라 사후에 경신했기에 망정이지(후지무라는 1992년 타계했다), 생전에 그랬다면 아마 말도 못하게 불쾌해 했을듯" 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1956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 한신 감독을 지내다가 불명예 퇴진 후 1958년 다시 한신 선수로 깜짝 복귀했지만 부진한 성적만 남기고 완전히 선수생활을 정리하였다. 통산 성적은 17시즌 1558경기 출장, 1694안타 224홈런 1126타점 타율 0.300.

3. 지도자 시절

파일:external/www.asahi.com/TKY200707070363.jpg
한신 감독 시절(우측). 좌측은 카와카미 테츠하루.

앞서 말했듯이 1946년 잠깐 감독직을 겸했던 후지무라는 1955년부터 1956년까지 다시 감독 겸 선수로 1957년엔 전임 감독으로 3년간 한신을 이끌었다. 성적은 3위-2위-2위로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지만, 독선적인 성격으로 인해 선수들에게 많은 반감을 사고 말았다. 1957년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는 후지무라와의 재계약을 추진했으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선수들이 당시 한신 주장이던 가네다 마사야스[11]를 중심으로 일제히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후지무라 배척운동"을 벌이며 후지무라를 강하게 보이콧 했고, 결국 후지무라는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 당시만 해도 가네다는 강압적인 팀 분위기를 바꾼 인물로 신망을 얻었고 훗날 한신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8년 시즌에 한신의 현역 선수로 복귀했지만 24경기 출장(그나마 선발출장은 1경기였다.)에 3안타, 타율 0.115 라는 초라한 성적을 뒤로 한채 완전히 은퇴했고, 동시에 20년 넘게 정든 팀 한신을 떠났다.

이후 코쿠테츠 스왈로즈토에이 플라이어즈에서 코치 직을 수행했지만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다만 토에이 시절엔 오오스기 카츠오의 재능을 알아보고 비록 입단테스트 결과가 안좋게 나왔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를 "이 녀석 소질이 있습니다. 만약 토에이가 받아주지 않으면 제 친정팀에 추천할 겁니다" 라고 설득하여 토에이 유니폼을 입혔고, 훗날 그가 양대리그 사상 첫 1천안타를 치는 강타자가 되는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4. 이후

닛폰 테레비와 오사카 스포츠 등의 언론매체에서 해설가 또는 평론가로 일했다. 한때 TV 탤런트로 드라마[12]에 레귤러 멤버로 출연한 적도 있다. 호쾌해 보이는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을 전혀 못했으며, 단팥빵사이다같은 단 음식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팀 선배이자 감독으로 한신에서 같이 활동한 마츠키 켄지로가 "그 녀석(후지무라)은 항상 사이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그래서였는지 1988년 당뇨병이 발병하여 죽을 때까지 병원과 보호시설에서 병마와 싸웠고, 결국 1992년 5월 28일 당뇨병으로 인한 신부전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75세. 후지무라가 별세하자 한신 구단은 한신 고시엔 구장에 조기를 걸고 고인을 애도하였다.

1974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또한 그의 현역시절 등번호였던 10번은 현재 한신의 영구 결번 이다.

5. 에피소드

4살 연하의 동생이었던 후지무라 타카오(藤村隆男)도 형과 함께 오사카 타이거스에서[13] 투수로 활약했다. 비록 레전드였던 형만큼의 임팩트를 남기진 못했으나 이쪽도 1952-53년에 2년 연속 20승을 마크하고 1952년엔 최고승률 타이틀을 수상하였으며 통산 135승 97패, 역대 20위의 평균자책점 2.652를 기록하는 등 한 세월을 풍미한 투수였다. 중간에 타자로 전향했던 형과 달리 평생 투수로 뛴 것을 긍지로 삼았다고. 은퇴 후엔 히로시마, 킨테츠, 한신에서 코치를 역임했으며 형이 죽고 1년 후인 1993년 12월 25일에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73세.

1954년 7월 25일 주니치 드래곤즈 와의 홈경기 도중 후지무라가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주심을 폭행하여 퇴장 처분을 받자 홈팬들이 분노하여 구장 내에서 난동을 벌였고, 경기가 1시간 7분 가량 중단되었다. 난동은 진정되었지만 자신의 퇴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후지무라는 자기 타순이 되자 무작정 타석에 나와 심판의 퇴장 명령에 불복하며 계속 뻗대었고, 이에 팬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그라운드에 난입하는 등 도저히 경기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결국 심판은 한신의 몰수 게임 패배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후지무라는 난동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어 출장 정지 처분을 받으며, 그 경기까지 이어가고 있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1,014경기 에서 허무하게 종지부가 찍히고 말았다.[14]

게다가 후지무라의 출장정지를 막기 위해 그라운드에 나와 일부러 심판에게 강하게 어필하며 몸싸움을 벌인 마츠키 켄지로 감독마저 같이 출장정지를 먹었고, 이 일로 인해 마츠키는 감독을 사임하여 한신을 떠났다.

요미우리 레전드 나가시마 시게오의 우상이기도 했는데 야구계기가 후지무라 후미오때문이다. 이로 인해 어릴때는 간토출신임에도 골수 타이거즈 빠돌이였다.


[1] 센트럴 리그.[2] 퍼시픽 리그.[3]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고졸출신 감독이란 기록을 세웠다.[4] 투수를 완전히 폐업하진 않고 1951년 까지 틈틈히 마운드에 올랐다.[5] 이는 전 시즌에 카와카미 테츠하루오시타 히로시가 세운 25홈런을 경신하는 시즌 기록이기도 했다.[6] 2010년 에는 한신의 맷 머튼이 214안타를 기록하며 구단 기록에서도 2위로 내려앉았다.[7] 그보다 1인치 아래인 36인치 배트도 웬만해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 다만 두산 베어스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활약하던 타이론 우즈는 36인치짜리 배트를 애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두산에서 뛰던 당시 국내의 배트 제조업체 관계자가 우즈의 36인치 배트를 보고 "이걸 어떻게 휘둘러?" 라면서 혀를 내둘렀다.[8] 무라야마 미노루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9] 한국에도 하루에 만루홈런 2개이틀에 걸쳐 만루홈런 2개가 있다.[10] 이 때문 이었는지, 벳토는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즈로 트레이드 되었다.[11] 재일동포 출신으로 한국 이름은 김정태(金正泰). 1960년 한신 감독에 취임하여 한국계로는 두번째로 일본 프로야구의 감독이 된 인물이다. 참고로 최초는 무려 요미우리 자이언츠 플레잉감독인 이팔룡. 그러나 장훈의 증언 이외에는 자세한 정보가 없어 한국계인지는 확실치 않다. 해당 문서 참조[12] 그것도 그저그런 드라마가 아니라 초인기시리즈인 필살 시리즈. 1977년작 '新・必殺仕置人 (신・필살사치인)'에서 암살자 모임의 수장인 '토라(虎)'로 등장한다. 암살에 사용하는 무기는 현역 시절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37인치 길이의 배트(일명 빨래장대)였다. 한 에피소드에서는 금속구를 던져 살상을 일삼은 배신한 암살자에 대해 그 금속구를 그대로 풀스윙하여 처치한 장면도 있다.[13] 단 타이거스 원클럽맨이었던 형과 달리 이쪽은 중간에 타이요 로빈스(1946~1947), 사회인야구팀 우에라구미(1948)를 잠시 거쳤으며, 형의 감독직 존속 문제로 소동이 일어났던 1957년에 고향팀 히로시마 카프로 이적해서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14]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일본 프로야구의 연속 출장 기록은 기누가사 사치오가 2,215경기로 후지무라를 훌쩍 뛰어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