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1 19:21:03

카타오카 아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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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73 타츠나미 카즈요시
1군 88 카타오카 아츠시(수석코치) · 76 오츠카 아키노리(투수코치) · 83 야마이 다이스케(투수코치)
75 와다 카즈히로(타격코치) · 86 우에다 요시노리(타격코치) · 80 오다 코헤이(포수코치)
71 도노우에 나오미치(내야수비·주루코치) · 79 오니시 다카유키(외야수비·주루코치)
2군 89 이노우에 카즈키(2군감독) · 77 오치아이 에이지(투수코치 겸 육성코치) · 82 아사오 타쿠야(투수코치)
78 모리노 마사히코(타격코치) · 84 후쿠다 노부마사(타격코치) · 72 오노 쇼타(포수코치)
81 모리코시 유토(내야수비·주루코치) · 87 나카무라 유타카(외야수비·주루코치) · 85 와타나베 히로유키(육성코치)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외야수육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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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일2군 가타오카.jpg
<colbgcolor=#003595><colcolor=#ffffff> 주니치 드래곤즈 No.88
카타오카 아츠시
片岡 篤史 | Atushi Kataoka
출생 1969년 6월 27일 ([age(1969-06-27)]세)
일본 교토부 쿠세군 쿠미야마초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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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PL학원고등학교 - 도시샤대학
신체 188cm, 95kg
투타 우투좌타
포지션 3루수, 1루수
프로입단 1991년 드래프트 2라운드 (닛폰햄)
소속팀 닛폰햄 파이터즈 (1992~2001)
한신 타이거스 (2002~2006)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코치 (2010~2012, 2016~2018)
주니치 드래곤즈 2군 감독 (2022~2023)
주니치 드래곤즈 수석코치 (2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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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프로 입단 전3. 프로 입단 후4. 현역 은퇴 후
4.1. 한신 타이거스 코치 1기4.2. 한신 타이거스 코치 2기4.3. 주니치 드래곤즈
5. 여담

1. 개요

일본의 전 야구선수이자 주니치 드래곤즈 수석코치.

2. 프로 입단 전

타츠나미 카즈요시와 동년배에 같은 PL학원고등학교 출신이다. 타츠나미는 바로 주니치에 지명을 받아 프로로 갔으나, 카타오카는 도시샤대로 진학하여 리그전 통산 91경기, 311타수 100안타, 타율.322, 10홈런, 48타점. 베스트 나인 4회를 수상하고 1991년 드래프트 2라운드로 당시 도쿄를 연고로 하던[2] 닛폰햄 파이터즈에 지명되었다.

3. 프로 입단 후

1년차인 1992년부터 3루 레귤러로 정착, 125경기를 출전하며 431타수 125안타 10홈런 53타점, 타율 .290 출루율 .342 장타율 .413을 기록했다. 타카무라 히로시 킨테츠 투수와 신인왕 경쟁을 했으나, 타카무라에게 패했고 대신 카타오카 본인은 특별상을 받았다.

1993년엔 8홈런, 1994년 11홈런, 1995년 6홈런을 치며 나름 주전~준주전을 오가며 활약했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 매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으며, 특히 뛰어난 참을성과 선구안으로 많은 볼넷과 높은 출루율을 기록했다. 1998년엔 113사사구를 기록, 자신의 고교 대선배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기록을 갱신했고 본인은 리그 최고출루율(.435)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러나 1999년에는 부상을 입어 1군에서 빠지기도 하는 등 전년도보다 경기 출전이 다소 줄어들었다. 그 해에 데뷔했던 고졸신인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통산 두 번째 탈삼진을 허용하기도 했다.[3] 2000년엔 개인 통산 100홈런을 기록하는 등, 개인 한 시즌 최다 홈런인 21홈런에 희생플라이 7개[4]를 기록하고 사사구 101개로 사사구 1위를 2년 만에 탈환하는 등 공격에서 족적을 남겼다. 2001년엔 다시 부진에 빠지고 부상도 있어 출전 기회가 줄었고, 2001년 시즌 종료 후 FA 권리를 행사하고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했다.

한신 시절인 2002년엔 타율 .228, 11홈런 46타점에 그쳤다. 그러나 바로 다음 시즌인 2003년엔 타율 .296, 출루율 .366, 장타율 .497에 12홈런 55타점을 기록, 팀의 암흑기 탈출 및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5] 다만 2004년부터 에이징 커브가 겹치고 출전 기회가 줄어들더니, 2006년을 끝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은퇴 경기는 공교롭게도 주니치 드래곤즈 전이었는데, 자신의 고교 동창이던 타츠나미 카즈요시[6]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다. 경기 이후 헹가래는 타츠나미 외에도 다니시게 모토노부[7], 후쿠도메 코스케[8], 이노우에 카츠키[9] 등이 참석했다.

통산 성적은 1569경기 출전, 타율 .270, 출루율 .367, 장타율 .422, OPS .789, 1425안타, 164홈런, 717타점, 714득점.

4. 현역 은퇴 후

4.1. 한신 타이거스 코치 1기

해설자 및 평론가로 재야에 있다가 2010년부터 한신 타이거스의 1군 타격코치에 취임했다. 2010년엔 맷 머튼, 크레이그 브라젤, 카네모토 토모아키, 토리타니 타카시, 아라이 타카히로 등이 포진한 강타선을 만들긴 했으나, 1위 주니치와 단 1경기 차이로 2위에 머물렀다.

2011년, 공인구가 통일구로 변경되면서 찾아온 극한의 투고타저 시즌에 적응하지 못하고 4위로 마감, 2012년엔 타선이 더 막장화되며 5위에 머무르자 그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4.2. 한신 타이거스 코치 2기

사퇴 이후 다시 해설자 및 평론가 활동을 재개하다가, 2015 시즌 종료 후 카네모토 토모아키 감독의 부름을 받아 다시 한신 1군 타격코치로 복귀했다.

그러나 1기 시절만도 못한 처참한 팀 타선을 만들어 코치 평판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코치 부임 이후 우타자들에게 우측으로 밀어치는 타격을 강조하며 타격 지도를 했는데 문제는 이 타격 지론을 위해 우타자들에게 2루 땅볼을 치게 하는 연습을 자행하여 플라이볼 혁명이 도래한 현대야구에서 시대를 역행하는 방식의 코칭으로 팀 타선을 막장으로 만들어버렸다.[10] 그 절정은 2018년으로 일찌감치 팀 타격 주요 지표들은 리그 최하위권으로 곤두박질 치고 2017시즌 20홈런으로 가능성을 보인 나카타니 마사히로가 처참하게 망했으며 오오야마 유스케는 규정타석 미달임에도 한때 리그 병살타 1위에 오르는 등 여러모로 충격적인 결과를 남겼다.

여기에 요카와 나오마사[11]가 2군에서 하마나카 오사무 코치의 지도를 받고 1군에서 준수한 타격을 보이고 카타오카의 그릇된 코칭으로 인해 타격 부진에 빠졌던 우메노 류타로오오야마 유스케가 팀 내 코치들이 아닌 나카무라 노리히로의 유튜브 채널을 참고하고[12] 타격폼을 수정해 성적을 끌어올리자 카타오카의 코칭은 2군 코치들과 유튜브만도 못하다는 인식까지 박혀버렸다.

급기야는 모회사의 주주총회에서 팀 성적 부진을 보다못해 코칭스텝 인사에 개입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타선 침체의 책임을 물어 카네모토 감독과 함께 경질되었다.

4.3. 주니치 드래곤즈

이후 2022년 주니치의 감독으로 취임한 타츠나미 카즈요시와의 PL 학연으로 2군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2년 연속 최하위로 꼬라박으면서 최악의 평판을 듣고 있다. 2023년 주니치 드래곤즈 1군이 처참하게 망한 것에 가려져 그렇지, 2군의 상태는 1군을 가볍게 능가하는[13] 막장 상황이었다.

주니치로 가서도 변함없이 최악의 평판을 듣고 있었지만 23시즌 종료를 앞두고 내년부터 1군 수석 코치로 영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와 팀의 미래는 더욱 암담해졌다.

5. 여담

  • 주니치 2군 감독으로 복귀하기 전엔 유튜버로도 잠시 활동했다. 지도자로서의 평가는 바닥에 가깝지만 입담은 쓸만해서 해설자와 유튜버 시절에는 꽤 인기가 있기도 했다.


[1] 2023 시즌 종료 후 선임 발표가 나왔다.[2] 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돔을 같이 쓰고 있었다.[3] 1999년 4월 7일 닛폰햄 vs 세이부 전. 1번타자 이데 타츠야 - 2번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3번타자 카타오카 아츠시 이렇게 타순이 짜져 있었고 오가사와라는 투수 땅볼 처리, 이데와 카타오카는 삼진으로 물러갔다.[4] 당해 퍼시픽 리그 최다[5] 2003년 한신 주전 라인업엔 이마오카 마코토(2루수)-아카호시 노리히로(중견수)-카네모토 토모아키(좌익수)-히야마 신지로(우익수)-조지 아리아스(1루수)-카타오카 아츠시(3루수)-야노 아키히로(포수)-후지모토 아츠시(유격수)-투수. 대타 요원으로 야기 히로시, 세키모토 켄타로 등이 있었다.[6] 카타오카의 마지막 타석은 좌익수 타츠나미의 머리 위를 넘어가는 2루타였다.[7] 당시 주니치 주전 포수였다.[8] 카타오카와 타츠나미에게는 PL학원고교 후배이기도 하다.[9] 타츠나미 카즈요시와 비슷한 시기에 주니치에서 뛰던 준주전급 외야수. 타츠나미에 가려 그렇지 이쪽도 프로 선수 생활은 주니치에서만 했다. 다만 선수 은퇴 후에는 한신에서 코치를 역임한 적도 있었다. 2024년부터 주니치 2군 감독이 될 예정이다.[10] 이론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었다. 훗날 오릭스 버팔로즈타구치 소 코치가 해당 이론을 통해 와카츠키 켄야에게 우측으로 밀어쳐 좋은 타구를 보낼 수 있는 타격을 장착시켰고 그 결과 와카츠키는 이전과 다른 좋은 타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같은 이론을 추구했음에도 결과는 전혀 달랐던 이유는 카타오카의 구시대적인 야구관과 코치로서의 역량 차이, 그리고 타격 기대치가 거의 없던 수비형 포수인 와카츠키와 달리 하술할 한신 선수들은 파워히터 포텐셜을 갖춰 미래의 우타거포로 기대치가 있었다는 점이 큰 차이다.[11] 2022년까지 1군 백업 코너 내야수 및 좌익수였다. 그러나 오오야마 유스케와 수비 포지션이 겹쳐 출전 기회가 적었고, 2022년 연말에 열린 현역 드래프트에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했다.[12] 정확히는 당시 같이 한신 타격 코치를 맡았던 히라노 케이이치의 권유로 시청하게 된 것. 그 덕분인지 히라노는 카타오카와는 달리 2021년까지 한신의 1,2군 코치직을 수행했다.[13] 2군 웨스턴 리그 최하위였다. 그것도 다른 팀들과 20경기 이상 차이가 났으며 승률은 당해 1군 타격왕 미야자키 토시로보다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