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그 월터 브라젤 Craig Walter Brazell | |
출생 | 1980년 5월 10일 ([age(1980-05-10)]세) |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제퍼슨 데이비스 고등학교 |
신체 | 190cm / 95kg |
포지션 | 1루수, 지명타자 |
투타 | 우투좌타 |
프로입단 | 1998년 드래프트 5라운드 (뉴욕 메츠) |
소속팀 | 뉴욕 메츠 (2004) 캔자스시티 로열스 (200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08) 한신 타이거스 (2009~2012) 치바 롯데 마린즈 (2013~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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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국적의 전직 야구선수. 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다.2. 선수 경력
고교때부터 야구선수로 통산 130홈런을, 고교 풋볼팀 쿼터백으로도 활약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러나 풋볼 시합 중 무릎 부상을 당해 풋볼은 포기하고 야구에 전념하게 되며, 고교졸업 후 메츠에 5라운드로 지명된다. 고졸이 5라 지명이라는 점에서 꽤나 기대가 컸던 선수였다.입단후에는 마이너리그 낮은 레벨에서 좀 헤맸고 6년만에 MLB를 밟았다. 2004년 마쓰이 카즈오가 부상을 당하자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콜업, 24경기에 출전해 타율 0.265 1홈런 3타점을 기록했는데 이 1홈런은 그의 메이저리그 처음이자 마지막 홈런. 그러나 이후로는 마이너에 너무 오래 있으며 성장이 정체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다저스, 로열스 산하 마이너로 옮겨가며 계속 마이너에서 뛰었지만 콜업은 07년 로열스에서 한 번뿐이었다.
그런데 매년 15개도 간당간당하던 선수가 07년엔 마이너리그에서 뜬금없이 39홈런을 치며 마이너 홈런왕 자리에 올랐고, 이 경력 덕분에 일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오퍼를 받게 되어 08년에는 일본에서 뛰게 되었다. 1년 계약에 연봉은 1억 엔.
08년은 세이부에서 개막전 4번타자를 맡으며 출발했는데 시즌초반 폭풍같은 활약으로 홈런도 27개나 쳤고, 6월 월간 MVP로 선정되기도 하며 잘나갔다. 그러나 극단적인 풀히팅만을 선호하는 타격스타일 덕에 타구가 우익수 쪽으로 집중됐고, 이로 인해 타 팀이 브라젤 전용 시프트로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후반기부터는 성적이 폭락했다. 아예 8월부터 두 달 가량 홈런을 치지 못했을 정도. 설상가상으로 스윙을 하다가 어깨를 다치고 10월에는 머리에 사구까지 맞으며 포스트시즌 출전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구단으로 재계약 포기를 당하며 씁쓸하게 일본을 떠나게 됐다.
이후 볼티모어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으나 시즌 전에 짤리고 미국 독립리그에서 간신히 선수생활을 이어갔는데, 당시 용병 케빈 멘치가 부진해서 대체용병을 찾던 한신 타이거스가 대체 무엇을 봤는지 독립리그에 있던 브라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어찌저찌 일본 복귀를 하게 되었는데 1군 등록 첫날부터 4경기 연속 홈런을 쳤고, 8월에는 장남이 태어난 날 1이닝 2홈런을 치는 등 클러치 활약을 했다. 9월에 무릎 부상을 당하며 컨디션 관리차 선발과 대타를 오가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온 경기들은 큰 활약을 했고, 시즌의 절반 정도인 300타석 좀 못되게 나왔는데 2할9푼에 16홈런을 치며 한신의 가을야구를 이끌며 큰 인기를 얻었다.
당연히 2010년 재계약을 했는데, 이 해 인생시즌을 썼다. 6월 3타석 연속홈런을 비롯해 무려 시즌 47홈런을 기록한 것. 홈런왕이 유력했으나 49홈런을 친 알렉스 라미레스 덕분에 47홈런을 치고도 홈런왕을 못했다. 5번타자를 맡으며 팀의 주포로 활약했으나 또 시즌 후반에 컨디션이 저하되며 성적이 차츰 떨어졌고, 결국 이 해 리그 우승은 주니치에게 빼앗겼다. 포스트시즌에서도 큰 활약을 하지 못했고 3위인 요미우리에게 스윕을 당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어쨌든 생에 첫 올스타에도 출전해서 올스타전에서 홈런도 쳤고 고시엔을 홈으로 2할9푼에 47홈런, 113타점을 치고 베스트나인에 뽑히는 등 인생시즌을 치르며 200%이상 인상된 2억엔+옵션으로 2년 연장계약을 맺으며 인생역전을 이뤘다.
2011년은 이 해부터 반발력 낮은 통일구가 도입되며 극단적인 투고타저 양상의 시즌이 되었는데, 브라젤도 예외가 아니어서 4월에는 홈런을 하나도 못 쳤고 5월이 돼서야 첫 홈런을 쳤다. 이 해 일본프로야구 통산 100홈런을 기록했으나 오른쪽 대퇴근 부상으로 인해 한달 가량 빠지기도 하는 등 다사다난한 시즌을 보냈고 2할8푼에 16홈런 69타점으로 전년도에 비하면 아쉬운 활약을 보였는데 2012년은 설상가상으로 나이가 많아진 조지마 켄지, 아라이 타카히로가 1루로 기용되기 시작하면서 자리가 없어졌다. 파리그라면 지명타자로라도 쓰겠지만, 세리그는 지명타자가 없기에 1루와 대타를 오가며 2할 3푼에 12홈런을 쳤고 시즌후에는 보류명단에서 제외되었다.
2013년에는 역시 독립리그에서 뛰다가 용병 타자 화이트셀이 부상으로 떠나게 된 치바 롯데 마린즈와 계약을 맺으며 대체용병으로 일본리그에 돌아왔다. 롯데 역시 넓고 바닷바람이 부는 구장때문에 장타자에 목마른 구단이었고 일본에서 27홈런, 47홈런을 쳐본 브라젤은 긁어볼 만한 복권이었던 것. 역시 지명타자, 1루수, 대타를 오가며 출장했는데 62경기에서 2할6푼 11홈런을 쳤다. 홈런 갯수는 한신 마지막 해와 큰 차이는 없었지만 롯데의 홈구장은 바닷바람이 부는 투수구장인지라 11개로도 팀내 홈런 2위였다. 더군다나 저 11개는 시즌 절반도 안 치른 62경기만에 친 것을 감안하면 기대 이상의 활약. 거기에 2억엔씩이나 먹던 한신 시절과는 달리 싼 가격에 들어온지라 대체용병치고는 굉장히 쏠쏠하다는 평가를 들으며 재계약에 성공했다. 14년에는 전년도처럼 대타와 땜빵 위주로 뛰다가 머리에 사구를 맞았고 디스크까지 터지며 35경기만에 그대로 시즌아웃.
이후 현역 은퇴를 발표했고 고향에서 아내와 필라테스 스튜디오 운영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3. 플레이 스타일
극단적인 풀히터로 강점도 약점도 극명한 타자였다. 고교통산 130개 넘는 홈런을 친 슬러거에 일본에서도 2군시절 연습하다 2군구장 창문 여럿 깨먹었다고 하는 파워히터로 대단한 파워가 강점이었다.그러나 몸쪽 공에 약하고 파워히터들이 대부분 그렇듯 극단적 풀히팅만을 고수하다 보니 타구 방향이 일정해 시프트로 이를 대응해낼 수 있어서 세이부 시절엔 7월까지 27홈런을 쳤던 타자였음에도 후반기에는 속수무책으로 유린을 당하는 등 약점이 극명했다. 또한 우투와 좌투 상대 타율이 4푼 가량 차이나는 선수로 좌투에 약한 것 역시 약점. 한신 입단 후에는 와다 유타카 코치가 밀어치기도 연습시켰고, 아예 무릎에 끈을 매고 이 밑으로 오는 슬라이더는 치지 말라는 특별 교육을 시키는 등 특별훈련을 통해 어느정도 밀어치기도 가능한 선수가 되었고 확실히 한 단계 스탭업을 했다. 유능한 타격코치였던 와다 유타카의 명작 중 하나.
또한 고교시절 풋볼하다 다친 무릎은 평생 그를 괴롭혔는데, 무릎 때문에 달리기가 힘들어 1루까지 5초가 넘는 똥차중의 똥차였고 1루 수비도 범위가 매우 좁았다. 바운드 송구도 깔끔하게 받아내고 번트 수비도 잘하는 분명 글러브질은 매우 좋은 수비수였는데, 무릎 때문에 외야 수비를 볼 수 없었으며[1] 1루 수비도 좁은 범위가 약점이었다.
또한 패스트 스타터 기질이 있어서 항상 시즌 전반기에 활약이 좋았고, 후반부가 되면 페이스가 떨어졌다. 미국 시절에도 이래서 가을의 확장 로스터 때 메이저에 못 올라갔고, 일본에서도 포스트시즌에서는 활약이 별로였다. 원인은 역시 무릎으로 무릎 때문에 런닝을 통한 체력훈련도 쉽지가 않아서 시즌 후반부가 되면 퍼져버리는 것이 일상이었고 종종 무릎부상이 재발해 스타팅에서 빠지는 경우도 잦았던 유리몸, 아니 유리무릎.
타석에서는 굉장히 공격적인 타자로, 걸어 나가기보다는 되든 안 되든 방망이부터 내고 보는 화끈한 성격으로 매 시즌 타율과 출루율이 얼마 차이가 안 났다. 무릎 때문에 어차피 걸어나가봤자 주자로서는 별 도움이 안 되었기 때문에 택할 수밖에 없던 타석 접근법. 이렇게 장타력은 좋지만 상대적으로 출루율이 별로였다는 점 때문에 주로 3번 도리타니-4번 아라이의 뒤를 받치는 5번이나 6번 타자로 배치되어 활약했다. 그래도 한신에 오며 밀어치기를 배워 제법 타율이 오른 덕에 결과적으로 타율이 높아 출루율도 높은, 좋은 타자였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몰아치기에 능한 타자인 점은 큰 강점이었는데, 슬럼프로 1달씩 홈런을 못 친 적 역시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일본에 오기 직전 시즌 뜬금없는 마이너 홈런왕부터 오자마자 전반기 27홈런, 한신 복귀 후 4경기 연속홈런, 재계약후 1시즌 47홈런을 치며 거액 계약을 따냈고, 롯데의 스카우터가 온 날 딱 마침 만루홈런을 쳤고, 롯데 첫 시즌 재계약이 걸린 포스트시즌에서 끝내기 홈런을 치는 등 타격감이 올라 있을 때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미친 듯한 홈런쇼를 보이며 인생의 중요한 상황에서 꼭 홈런을 쳤고 덕분에 일본리그에서 7시즌이나 보내며 평생 벌 돈을 다 벌 수 있었다.[2]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교훈을 주는 선수.
4. 기타
일본에서 인생역전을 이룬 선수다 보니 일본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선수였다. 아들의 미들네임을 Koshien이라고 할 정도로 애정이 있었으며, 일본 음식도 잘 먹어 규동을 좋아했다고 한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 세이부 구단에서 얻어준 집 근처에 요시노야가 있어서 우연히 사먹게 되었는데, 맛에 완전히 반해버려서 매일같이 사먹게 되었다고. 한신 시절에도 구단에서 준 아파트는 좋은데 근처에 요시노야가 없어서 아쉽다는 농담을 하거나, 미국에 가서도 규동이 너무 먹고 싶어서 미국의 요시노야에 찾아가 규동을 먹었다고 할 정도로 규동 매니아. 나중에 롯데 시절에 선수 프로듀스 메뉴로 브라젤 파워 스태미너 규동이 출시되었을 정도.아내는 필라테스 강사에 아들이 3명인 아들부자라고 한다.
또한 성격이 불같은 선수로 2010년, 2012년에 한번씩 퇴장을 당했다. 2010년은 심판 판정에 불만을 가져서 심판에게 욕을 해서 퇴장, 2012년은 히로시마전에서 투수의 몸에 맞을 뻔하자 투수와 기싸움을 벌였는데, 히로시마 벤치에서 야유하자 벤치로 쳐들어가서 난투극을 벌였다(...). 일본야구 사상 최초로 벤치 도발로 인한 벤치클리어링.[3]
바로 이 벤클 때 나온 게 일본의 유행어인 "아라이가 잘못했네, 아라이가" 였다. 자세한 내용은 아라이 타카히로 항목 참조.
여튼 일본리그 통산 성적은 7년 뛰고 2할 6푼에 133홈런 ops.800, 연평균 내 보면 20홈런도 안 되는 장수용병치고는 애매한 수준이었는데, 2010시즌이 너무 대단한 시즌이어서 통산성적에 비해 오래 뛸 수 있었고 인기도 많았다. 딱 1시즌만 잘했고 그 1시즌 덕분에 일본리그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었으며 선구안과 좌상바가 약점, 고질적 부상 부위(이승엽은 손가락, 브라젤은 무릎)가 몰락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한신의 이승엽이라고도 할 만한 선수. 통산성적도 거의 비슷하다.
[1] 2012년 조지마와 아라이를 1루로 쓰게 되면서 브라젤을 외야로 쓰려고 시도는 해 봤는데, 달리기가 너무 느려 눈 뜨고 못볼 수비범위 때문에 결국 실패로 끝났다.[2] 일본에서 7억엔 조금 넘게 벌었다. 대강 600~650만 달러 정도. 한 5~6년 정도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뛴 선수정도는 되는 셈이다.[3] 물론 벤치 난입 자체는 최초가 아니다. 80년대에도 외국인 타자가 상대팀 덕아웃으로 쳐들어와서 난장판이 벌어진 적이 과거 살벌했던 벤클을 자랑하던 일본프로야구에선 간혹 있었다. 벤치 쪽에서 도발을 걸어서(...) 생긴 벤클이 최초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