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29 11:35:04

터피 로즈

터피 로즈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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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마쓰나카 노부히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터피 로즈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br] 1997, 1999, 2001~200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 나인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4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8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지명타자 부문 베스트 나인
야마사키 타케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터피 로즈
(오릭스 버팔로즈)
야마사키 타케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9, 2001, 2003년 퍼시픽 리그 최다 홈런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4년 센트럴 리그 최다 홈런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9, 2002, 2008년 퍼시픽 리그 최다 타점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7년 퍼시픽 리그 최고 출루율

보유 기록(NPB)
역대 최다 퇴장 14회
외국인 선수 통산 최다 홈런 464개
외국인 선수 통산 최다 득점 1,100점
외국인 선수 통산 최다 루타수 3,509루타
외국인 선수 통산 최다 볼넷 958개
외국인 선수 통산 최다 삼진 1,655개
최연장 타점왕 40세
양대 리그 홈런왕 퍼시픽리그 1999년, 센트럴리그 2004년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번호 4번
스티브 롬바르도지
(1989~1990)
터피 로즈
(1990~1993)
마이크 브럼리
(1993)
시카고 컵스 등번호 25번
칸디 말도나도
(1993)
터피 로즈
(1993~1995)
루이스 곤잘레스
(1995~1996)
{{{#FFFFFF [[보스턴 레드삭스|보스턴 레드삭스]] 등번호 29번}}}
스콧 뱅크헤드
(1993~1994)
터피 로즈
(1995)
후안 벨
(1995)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등번호 20번
타카야나기 이즈미
(1988~1995)
터피 로즈
(1996~2003)
해체[1]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20번}}}
이리키 유사쿠
(1997~2003)
터피 로즈
(2004~2005)
토요다 키요시
(2006~2010)
{{{#ffffff [[오릭스 버팔로즈|오릭스 버팔로즈]] 등번호 8번}}}
나카무라 노리히로
(2006)
터피 로즈
(2007~2009)
고토 슌타
(2011~)
}}} ||
파일:230615 터피 로즈.jpg
칼 데릭 "터피" 로즈
Karl Derrick "Tuffy" Rhodes
[2]
생년월일 1968년 8월 21일 ([age(1968-08-21)]세)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출신지 오하이오 신시내티
학력 웨스턴 힐스 고등학교 (오하이오)
신체 182cm, 100kg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6년 드래프트 3라운드 (전체 68번, HOU)
소속팀 휴스턴 애스트로스 (1990~1993)
시카고 컵스 (1993~1995)
보스턴 레드삭스 (1995)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996~2003)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4~2005)
오릭스 버팔로즈 (2007~2009)
도야마 GRN 선더버즈[3] (2015~2016)
지도자 도야마 GRN 선더버즈 야수 코치 (2015~2016)

1. 개요2. 선수 경력3. 연도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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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일본프로야구 선수. 일본프로야구 13년간 464홈런을 때려 외국인 선수로서는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NPB 최다 퇴장기록의 보유자(총 14회).

2. 선수 경력

1986년 드래프트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지명받고 1990년에 처음으로 MLB 무대를 밟게 된다. 마이너리그에서는 호타준족형 타자로 주목받았으며, 싱글 A 시절에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이미지[4]와는 다르게 65도루를 기록한 적도 있다. 1994년 시카고 컵스 소속일 때는 개막전에 선발 출장하여 드와이트 구든을 상대로 4타수 4안타, 3홈런을 치는 인상깊은 장면을 만들기도 했다.영상 그러나 이후에는 메이저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뒀고, 로즈를 리드오프로 키우려 한 팀 수뇌부와 슬러거가 되고 싶어한 본인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1996년 일본으로의 이적을 결심하게 된다.


2001년 9월 24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마츠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당시 프로야구 타이기록이었던 시즌 55호 홈런을 때려내는 장면.[5] 이 해는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구단 사상 마지막 리그 우승 시즌이었다.[6]

1980년대 말부터 주포 역할을 해온 랄프 브라이언트가 부상으로 이탈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한 로즈는 괴력의 파워를 자랑하며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슬러거로 자리잡았다. 1999년 40홈런을 치며 첫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했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당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소속이었던 베네수엘라 출신 슬러거 알렉스 카브레라[7]와 함께 퍼시픽리그 홈런왕 경쟁을 펼치게 된다. 2001년에는 괴물같은 홈런 페이스로 당시 오 사다하루가 보유했던 한 시즌 55홈런 갱신을 눈 앞에 뒀으나, 전설적인 오 사다하루의 시즌 홈런 기록이 외국인에 의해 깨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일본 야구계의 엄청난 견제로 인해 결국 타이기록에 그치며 신기록 달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킨테츠의 우승 경쟁 대상이었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을 역임 중이던 오 사다하루는 로즈에게 "기록을 깼으면 한다"라는 말을 건넸지만, 정작 다이에를 포함한 상대팀 투수들은 타석에서 로즈를 맞이하는 족족 피해가는 공만 연달아 던졌고, 결국 55호를 친 이후의 경기에선 홈런을 단 1개도 치지 못하며 타이기록에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견제에 격분한 로즈는 상대팀 선수들이나 기자들한테 "당신들에게 난 그저 외국인 선수일 뿐이다"란 자조적 표현이 낀 디스를 남기기도. 1년 후 55홈런 고지에 오른 라이벌 알렉스 카브레라 역시 똑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8]

그래도 2001년 타율.327/OPS 1.083[9], 55홈런 131타점의 괴물같은 성적을 올리며, 타율 .320/OPS 1.064[10], 46홈런 132타점으로 타점왕, 출루율 1위를 차지한 4번 타자 나카무라 노리히로와 함께 강타자들이 즐비했던 '이테마에 타선(いてまえ打線)'의 클린업 듀오로 활약하며 상대 투수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킨테츠의 리그 우승을 이끌어낸 공로로 MVP를 수상하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2001년 이후에도 꾸준히 40홈런-100타점-OPS 9할을 기록하며 킨테츠와 퍼시픽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2003년 시즌 종료 후 다년 계약을 원하던 로즈와 단년 계약을 제시한 킨테츠와의 의견 차이로 재계약 협상이 결렬되면서[11] 8년간 뛰어왔던 킨테츠를 떠나게 된다.

킨테츠를 떠난 후 2004년 명목상 연봉 5억 5천엔의 2년 계약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게 되었는데, 입단회견 당시 기자들 앞에서 "추가 조건까지 합치면 연봉 총액이 10억엔을 넘는다"라는 폭탄발언을 하는 바람에 당황한 통역이 허겁지겁 이를 부정하는 해프닝이 터지기도 했다. 요미우리 이전 첫 해인 2004년에 역대 최다인 259홈런을 기록하여 사상최강 타선으로 일컬어지기까지 한 요미우리 강타선의 주포로 맹활약하며 타율 .287/OPS .955 45홈런 99타점을 기록, 오치아이 히로미츠 이래 사상 2번째 양대리그 홈런왕을 달성하며 센트럴리그에서도 명불허전의 장타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로즈 자신도 이때까진 순조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요미우리에서 은퇴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엔 팀이 개막 4연패를 찍으며 일찌감찌 하위권으로 처지는 등 극도의 부진을 보였고 로즈 자신도 작년보다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4월 26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알렉스 라미레스가 친 큼지막한 타구를 적극적으로 쫓지 않는 바람에 결승점을 헌납하여 이날 경기를 지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고 당시 수비주루 코치였던 히로타 스미오가 로즈의 이 수비에 대해 태만한 수비라고 질책하자 격분하여 히로타의 멱살을 잡고 밀치는 등 격하게 소동을 부리는 사건이 있었다. 거기에다 경기 후 로즈는 화가 풀리지 않은 나머지 만류하는 통역까지 막으며 기자들에게 일본어로 직접
"이거 기사로 내라. 오늘 경기 진게 내 탓이라고 히로타 씨가 그랬다.
투수들이 모두 얻어터지는데 저렇게 얻어터진 게 내 탓인가? 아베도 송구를 똑바로 던지지 않았고 키요하라도 전력으로 뛰지 않았는데 왜 내 탓만 하는 건가?
투수도 나쁘고 죄다 나쁜 놈들이다! 자이언츠 씨X 같은 놈들! 존나 싫다![12] 나 도쿄로 돌아갈꺼다!
일본에서 10년이나 뛰었는데도 선수에 대한 존중이 없다! 이건 차별이다!"
라고 격한 욕설까지 써가며 구단 수뇌부, 선수단을 싸잡아 디스하는 폭언을 연발하는 대형사고를 쳐버렸다.

결국 이 사건 때문에 로즈는 벌금을 내게 되었고 컨택과 수비에서 난조를 보인 것과 더불어 시즌 후반에 리빌딩을 위해 신인 선수들을 밀어주려는 구단 방침으로 인해 주전에서 밀려나면서 데뷔 후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미달하는 등의 성적 부진(타율.240/OPS .815 27홈런 70타점[13])으로 인해 이 해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에서 방출당하게 된다. 여기에다가 이 사건 때문에 요미우리는 구단 자체적으로 외국인 선수들이 일본어를 잘해도 로즈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절대 일본어로 인터뷰를 못하게 했으며, 인터뷰 시 반드시 통역이 붙게 했다. 덕분에 이승엽알렉스 라미레스는 일본어 실력이 출중하고 둘다 인성이 훌륭함에도 요미우리시절 내내 일본어로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 뭐 이 정도로 대형사고를 쳤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조치긴 하지만.[14]
다만, 이승엽의 경우 우승 축승회[15]에서 기자에게 직접 일본어로 소감을 말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많은 일본팬들이 "이승엽이 저렇게 일본어를 잘햇어?", "통역보다 더 잘하는 듯" 이라며 깜짝 놀랐을 정도.

이외에도 요미우리 시절엔 팀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던 모양인데, 자신이 자주 소외당했다고 주장할 정도. 사실 당시 요미우리는 워낙 타 팀의 강타자들만 포지션 가리지 않고 수집하다 보니 수비, 주루 등이 영 좋지 않았고[16] 팀의 짜임새에도 문제가 많았다. 로즈를 타카하시 요시노부 등과 동시에 기용하기 위해 킨테츠에서 줄곧 코너 외야만 소화했고 이미 3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든 로즈를 중견수로 옮기기도 했으니 수비에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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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신시내티 레즈와 마이너 계약을 맺으며 MLB 시범경기에 출장했으나, 부진을 보이며 마이너행을 통보받고 3월 21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만,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를 흡수합병한 오릭스 버팔로즈 구단 관계자에게 "나 어깨 다 나았음! 일본에서 야구 하고싶은데.." 라고 전화를 걸었고, 2007년 일본프로야구에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일본 복귀 후 팀의 주전 지명타자로 뛰며 2년 연속 40홈런을 때렸는데, 2007년에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야마사키 타케시[17]와 40대끼리 홈런왕 경쟁을 펼치다 좌측 무릎 관절 통증으로 인해 경기 출전을 포기, 3년만의 홈런왕 타이틀 획득을 아깝게 놓치고 말았다. 나이를 잊은 듯한 꾸준한 활약과 버팔로즈 프랜차이즈를 대표하는 선수라는 상징성에 팀 내에서는 사실상 프랜차이즈 스타, 미스터 버팔로즈 대접을 받았다.

2009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84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는데, 그 와중에도 22홈런을 때려냈다. 그러나 오릭스 구단의 리빌딩 방침에 의해 로즈는 2009시즌을 끝으로 재계약을 하지 못하며 일본 리그를 떠나게 되었다. 은퇴 뒤에는 농구선수인 아들 뒷바라지에 전념하고 있다가 2015년 긴테쓰 시절의 팀동료였던 요시오카 유지[18]가 감독으로 있는 일본의 독립리그 BC리그의 팀인 도야마 GRN 선더버즈(富山GRNサンダーバーズ)에 입단하여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5년만의 현역복귀.

팔을 위쪽으로 쭉 뻗어 배트를 치켜들고 흔드는 독특한 타격폼으로도 유명했다. 긴테쓰 시절 함께 클린업을 이뤘던 우타자 나카무라 노리히로 못지 않게 특이한 타격폼.

3. 연도별 기록

역대 기록(MLB)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1990 HOU 38 101 21 6 1 1 12 3 4 13 12 .244 .340 .372 .712 0.1
1991 44 152 29 3 1 1 7 12 2 14 26 .213 .289 .272 .562 -0.6
1992 5 4 0 0 0 0 0 0 0 0 2 .000 .000 .000 .000 -0.1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1993 HOU/CHC 20 65 15 2 1 3 12 7 2 11 9 .278 .400 .519 .919 0.5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1994 CHC 95 308 63 17 0 8 39 19 6 33 64 .234 .318 .387 .705 0.4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1995 CHC/BOS 23 45 4 1 0 0 4 3 0 3 8 .098 .156 .122 .278 -0.5
MLB 통산
(6시즌)
225 675 132 29 3 13 74 44 14 74 121 .224 .310 .349 .660 -0.1
역대 기록(NPB)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1996 긴테쓰 130 564 147 29 1 27 80 97 11 57 122 .293 .363 .517 .880 4.1
1997 135 607 157 37 0 22 88 102 22 87 109 .307 .409 .509 .917 6
1998 134 579 127 25 0 22 81 70 15 81 120 .257 .359 .441 .801 3
1999 131 565 148 38 1 40 94 101 5 69 115 .301 .388 .627 1.015 6.6
2000 135 589 143 25 2 25 85 89 6 58 134 .272 .345 .470 .815 2.9
2001 140 643 180 19 0 55 137 131 9 83 140 .327 .421 .662 1.083 8.2
2002 138 613 145 31 2 46 94 117 5 71 140 .272 .361 .596 .956 5.7
2003 138 614 140 16 0 51 94 117 7 98 137 .276 .391 .608 .999 6.3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04 요미우리 134 601 150 17 0 45 95 99 3 72 147 .287 .377 .577 .955 4.5
2005 101 445 91 9 0 27 54 70 2 55 125 .240 .337 .478 .815 2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07 오릭스 132 554 135 19 0 42 75 96 0 88 147 .291 .403 .603 1.006 5.9
2008 142 600 138 31 1 40 82 118 2 95 145 .277 .394 .583 .977 5.5
2009 84 346 91 15 0 22 41 62 0 44 74 .308 .402 .583 .985 2.8
NPB 통산
(13시즌)
1674 7319 1792 311 7 464 1100 1269 87 958 1655 .286 .381 .559 .940 63.5

[1] 2004 시즌 종료 이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병합되었다.[2] NPB 등록명은 タフィ・ローズ 이다.[3] 독립리그 야구단. 킨테츠 시절 전 동료였던 요시오카 유지의 요청을 받아 코치 겸 선수로 활동했다.[4] 사실 일본에서도 처음 3시즌 동안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했고, 2년차인 97년에는 22도루(8도루사)로 호타준족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줬다. 또 킨테츠의 마지막 우승연도인 2001년엔 비록 9개긴 하지만 팀내 최다도루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사실 이 해 킨테츠는 리그 최하위의 평균자책점 4.98을 기록한 막장 투수진을 커버한 그 막강한 타선과는 별개로 팀 도루가 고작 35개에 그치며 리그 꼴찌를 기록한 데다 테이블 세터였던 오오무라 나오유키미즈구치 에이지의 도루수 합계가 고작 8개에 그쳤을 정도로 기동력이 좋지 못했다.[5] 이 날 마츠자카는 로즈의 55호 허용에 더해 나카무라 노리히로에게 역전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완투패를 당하는 굴욕을 맛보았다.[6] 리그 우승은 이틀 후인 9월 26일에 같은 곳에서 확정짓게 된다. 그 유명한 3점차로 뒤지고 있는 가운데 터진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으로.[7] 이후에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다.[8] 결국 성역과도 같았던 오 사다하루의 시즌 홈런 기록은 아시아 기록으로서는 2년 뒤인 2003년, 한국프로야구의 이승엽의 56홈런으로 아시아 기록이 깨졌고, 12년 뒤인 2013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블라디미르 발렌틴이 60홈런을 때려내며 이승엽의 기록도 경신함으로서 일본프로야구에서의 시즌 최다홈런기록으로 남게된다.[9] 출루율 .421, 장타율 .662[10] 출루율 .434, 장타율 .630[11] 당시 킨테츠는 전해인 2002년 시즌오프 때 FA가 된 거포 프랜차이즈 스타 나카무라 노리히로를 잡아놓기 위해 무리하게 거액을 쓴 데다가 이미 재정상의 문제로 망하기 직전이라 다년 계약을 해줄 돈 자체가 없었고 실제로 로즈가 떠난 2004년 시즌 종료 후 해체되었다. 로즈는 이런 구단 내부 사정을 잘 몰랐던 것. 어찌보면 내부사정에 무지할 수밖에 없는 외국인으로서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라 볼 수도.[12] 이 욕설은 과장이 아니며, 당시 로즈는 Fucking, 헤타쿠소(ヘタクソ) 등 격한 욕설을 쓰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13] 외견상으론 낮은 타율을 빼곤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당시 일본프로야구가 래빗볼 시대로 일컬어지는 고반발력 공으로 인해 극악의 타고투저 상태였기 때문에 로즈의 성적이 그렇게 돋보이진 못했다. 거기다 당시 기본 연봉만 5억 5천엔을 받던 고액 연봉의 외국인 선수였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기대에 못 미친 성적이었던 것은 확실했다.[14] 다만 이승엽오릭스 버팔로즈에 가서도 한국어로 인터뷰를 했으며 후일 한신 타이거스에 진출한 오승환은 당연히 한국어로만 인터뷰했다. 그래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뛰었던 김무영의 경우는 일본어로 인터뷰를 한 걸 보면 요미우리만 유독 통역을 거치게 하는 방식을 고수하는 듯하다.[15] 샴페인 파티[16] 200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역대 최다 기록인 팀 홈런 259개로 미칠듯한 뻥야구를 했지만 팀 도루는 정반대로 역대 최저 기록인 25개에 그치며 스피드와는 거리가 한참 먼 모습을 보여줬다.[17] 일본 현역 최고령 홈런왕이다. 터피 로즈와 동갑.[18] 킨테츠 해체 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해 암울하던 라쿠텐의 첫 시즌에 팀내 수위타자(.282)가 되었다. 물론, 그 시즌 라쿠텐의 승률은 요시오카 본인의 타율보다 1리 낮았다(.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