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4 12:18:46

루이스 곤잘레스

Luis Gonzalez. "루이스 곤살레스"라고 쓰기도 하며, 흔히 애칭삼아 루이곤조라고도 불리는 모양.

1. 풀럼의 축구 선수2. 전직 메이저리거
2.1. 현역 시절
2.1.1. 안습한 시절2.1.2. 디백스에서 터지다2.1.3. 부진과 은퇴
2.2. 이야깃거리
3. 일본프로야구 소속 야구 선수

1. 풀럼의 축구 선수

2. 전직 메이저리거

파일:external/loveofbaseballpodcast.com/Gonzo.jpg
이름 Luis Emilio Gonzalez
생년월일 1967년 9월 3일
국적 미국
출신지 플로리다 주, 탬파[1]
포지션 외야수 (주로 좌익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88년 드래프트 4라운드
소속팀 휴스턴 애스트로스 (1990-1995, 1997)
시카고 컵스 (1995-1996)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1998)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1999-2006)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7)
플로리다 말린스 (2008)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2001
2001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홈런 더비 우승자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루이스 곤잘레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제이슨 지암비
(뉴욕 양키스)
1999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안타왕
단테 비솃
(콜로라도 로키스)
루이스 곤잘레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토드 헬튼
(콜로라도 로키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영구결번
20 42 51
루이스 곤잘레스 재키 로빈슨 랜디 존슨


전직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외야수. 흔히 루이곤조라 불린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BK" 김병현과 한솥밥을 먹을 때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2] 별명은 곤조 (Gonzo)[3]

2.1. 현역 시절

2.1.1. 안습한 시절

부모가 쿠바 망명객 출신으로[4]의 집권 이후 탬파 시의 서부에 있는 동네에서 자라, 토마스 제퍼슨 고교를 졸업했다. 이 때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티노 마르티네즈. (아래 이야깃거리 참조) 그 후 사우스앨라배마 대학을 거쳐 1988년 드래프트로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3년간 마이너리그에서 뛰다 1990년 더블A에서 24홈런을 치고 시즌 후반에 빅리그로 콜업되었...지만 빅리그 울렁증에 시달렸는지 겨우 1할의 타율만을 기록한다. 하지만 1991년에는 시카고 컵스에 있던 그렉 매덕스를 상대로 한 경기 2홈런을 작렬하고, 50개의 장타 (2루타+3루타+홈런)를 치면서 애스트로스 프랜차이즈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심지어 한 경기에 5타점이나 먹는 영양사 노릇까지 도맡았...지만 시즌이 한창 달아오른 그 해 8월에 어깨 부상이 터지는 바람에 암흑기가 시작된다.

1992년에는 2할 4푼의 타율과 10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제대로 부진했으며, 1993년 3할대의 타율과 15개의 홈런을 기록한 뒤로, 1994년 ~ 1997년 4시즌 동안 고작 79타점밖에 기록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1995년 한때 컵스로 트레이드되기까지 했으나 1997년 FA 자격을 얻고 휴스턴으로 돌아온다.돌곤돌

그렇지만 돌아온 휴스턴에서 곤잘레스는 부진하기만 했고, 휴스턴은 밀접한 트레이드 관계를 맺고 있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 곤잘레스를 보내버린다. 그런데 곤잘레스는 디트로이트 때부터 오픈 스탠스 타격폼을 쓰기 시작했고, 그 덕인지 처음으로 20홈런을 넘겼을 뿐만 아니라 통산 1,000안타와 500타점을 디트로이트에서 기록하기도 했다. 게다가 같은 해 아내가 세 쌍둥이를 낳기까지 했으니, 디트로이트에서 성적이 좋아진 이유는 혹시 분유버프 때문은 아닐까? (...) [5]

2.1.2. 디백스에서 터지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꼴트로이트 옆동네의 힘세고 강했던 탑리블랜드에게 묻히면서 꼴찌로 전락했고, 리빌딩의 하나로 카림 가르시아와 곤잘레스를 트레이드시켜 버린다.[6]
처음에 디백스는 곤잘레스를 뉴욕 메츠에서 데리고 온 버나드 길키와 좌익수 플래툰을 돌렸으나, 우익수 토니 워맥이 부상으로 폭망하자 길키를 우익수로 돌리면서 마침내 곤잘레스는 주전 좌익수 자리를 찾게 된다.

1999년 디백스는 우타자 약쟁이맷 윌리엄스-제이 벨스티브 핀리-루이스 곤잘레스가 터지면서 무려 100승을 거두며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고, 같은 해 곤잘레스는 30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우고 3할 26홈런 111타점 (그리고 45개의 2루타)을 기록하며 올스타전에까지 출장하게 된다. 2000년에는 투수진이 패망했음에도 불구하고 3할 31홈런 114타점과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으며, 미일 슈퍼 게임에도 출장한다.

마침내 2001년에는 커리어하이를 찍는데, 시즌 초반부터 약쟁이 신이 된 배리 본즈, 새미 소사와 홈런 레이스를 벌이며 57홈런(리그3위[7]) 142타점을 기록한다! 오오 곤조신 오오.. 게다가 이 해에 디백스는 랜디 존슨커트 실링의 활약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월드시리즈 진출에도 성공한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pg2_2001gonzalez_576.jpg
그리고 그 상대는 뉴욕 양키스. 하지만 디백스는 존슨-실링, 마무리 김병현활약 그리고 7차전에서 곤잘레스가 터뜨린 끝내기 안타로 (그리고 그 상대는 마리아노 리베라였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2.1.3. 부진과 은퇴

곤조는 2002년과 2003년에도 25홈런을 넘기며 활약했지만, 세월이 따라주지를 않아 2004년부터 부진을 거듭하더니, 포풍현질의 부작용으로 재정적으로 흔들리던 디백스는 결국 2006년 곤잘레스를 놓아주기에 이른다. 왜냐면 우린 하얗게 불태웠거든... 그 후 다저스와 말린스를 전전하다 2008년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통산성적은 타출장 .283 .367 .479에 2591안타 354홈런 128도루

여담으로 디백스에서 옵션이 거절되어 홈경기에 들어선 마지막 날 기립박수를 받았는데, 김병현이 당시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발투수였고 그날 김병현은 신발끈을 고쳐묶으면서 디백스의 레전드가 기립박수를 받는 시간을 오래 갖게 해준바 있다.

2.2. 이야깃거리

  • 피트 로즈를 존경한다고 밝혔다. 2001년 4월 한 달에 13홈런이나 치는 타이 기록을 세우자, 로즈가 루이곤조한테 축하 편지를 보내기도.
  • 위에서도 밝혔듯, 티노 마르티네즈와는 죽마고우 사이이다. 2001년 월드시리즈에서는 루이곤조가 디백스 소속으로, 마르티네즈가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 나와, 친구의 대결이라는 진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티노 마르티네즈와 미겔 바티스타과 빈볼 시비 때문에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날 때에도 가장 먼저 달려와 친구를 말렸다. 오프 시즌에는 가족끼리 밥도 함께 먹을 만큼 절친이고 티노가 처음 내셔널리그로 왔을 때 조언도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
  • 실력 만큼이나 팀 분위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리더 스타일이다. 민훈기 기자는 "빅리그를 취재하면서 만난 많은 선수들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괜찮았던 선수가 루이스 곤잘레스였습니다. 과거 김병현을 가끔 취재하러 가면 늘 친절한 미소와 호의를 보였던 그에 대한 기억이 따뜻하게 남아있습니다."라고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안타 직후, 그에게 수많은 선수들이 몰려와 끌어안고 환호하는 와중에, 루이곤조는 누군가를 찾아서 두리번 거리며 돌아다니다 발견하고 힘껏 안아주는데.. 누구보다 마음 고생이 심했을 김병현 선수였다. 2001년 월드시리즈 DVD에도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BK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모든 한국인이 지켜보고 있어.'라고 활짝 웃으며 격려하는 모습이 나온다.
  • 2002년 시즌 시작을 앞둔 인터뷰에서 디백스 라커룸에는 주로 크리드와 같은 미국 락밴드의 음악을 틀고 있는데, BK가 한국 음악을 가져오면 틀어줄 거라고 답했다. 본인도 한국 음악이 궁금했던 모양.
  • 단점이 지적되면 본인이 이를 커버하려 노력하는 성실한 스타일. 오픈 스탠스이면 장타를 쳐내는데 불리하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량을 늘려 손목힘을 강화, 20홈런 이상 꾸준히 쳐주는 선수로 발돋움했다. 외야 송구의 스피드나 파워는 부족한 편인데 타격 실력이 좋아지면서 외야수 출장 회수가 많아지자, 결정적인 순간에 정확한 홈 송구로 주자를 아웃시키는 장면이 자주 잡혔다.
  • 2011년 피닉스에서 열린 올스타 전야 퓨처스게임에서 월드팀 (그러니까, 해외 출신으로 입단했거나, 히스패닉/아시안계 등등인 선수들로 모인 팀)의 감독을 맡았는데, 미국팀의 감독을 맡은 마이크 피아자가 영어로 유창하게 영어식 선수 이름들을 달달 읽어내고 윙크까지 날리는 동안 우리의 곤조는 생소한 중국계 이름, 히스패닉계 이름 (쿠바계이긴 하지만 루이곤조는 일단 태어날 때부터 미국인이니깐..), 한국 선수 이름을 읽으나 생고생을 했다.

파일:gonzo.jpg
  • 하지만 곤조 본인은 강경하게 부정하고 있다. 루이곤조의 약물설에 회의적인 사람들의 가장 큰 논거는 그의 근육 벌크업이 두드러지진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홈런 치는 스타일 자체가 오픈 스탠스를 이용하여 몸을 빠르게 회전, 배트에 공이 맞는 임팩트 순간에 힘을 집중시키는 스타일이다. 실제로 국내 팬들이 루이곤조를 보면서 '일견 호리호리해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홈런을 쳐내는 걸까' 궁금해 했을 만큼 체형 변화가 심하지 않았다.[8]
  • 루이스 곤잘레스가 홈런을 많이 친 것 같지만 30홈런 넘는 시즌은 두번(2000년 31개, 2001년 57개) 정도로, 기본적으로는 20홈런 전후의 중장거리형 타자였다. 단지 2001년에 플루크가 심하게 터졌을 뿐이다.[9]
  • 그러나 한편으론 이 점이 바로 루이곤조의 약물설에 힘을 싣는 이유들 중 하나다. 그 플루크가 워낙 역대급 플루크라는 것. 이전까지 31홈런이 최고 기록이었던 그가, 대부분의 타자들의 장타력이 황혼기에 접어드는 나이 34에 난데없이 무려 57 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1997년 전까지 야구 역사상 57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베이브 루스, 로저 매리스, 행크 그린버그, 지미 폭스 단 4명에 불과했다.[10]
  • 그런데 이런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는데 루이곤조는 그 해 NL 홈런 순위 3위에 불과했다. 1위와 2위엔 야구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약쟁이들이었던 배리 본즈새미 소사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 이 시즌에 NL MVP 10순위 내에 5명이 자신의 홈런 커리어하이를 갈아치웠다. 때문에 루이곤조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동시기에 홈런 수가 단기적으로만 급격히 증가한 브래디 앤더슨, 브렛 분, 그렉 본, 헨리 로드리게스[11] 역시도 의혹이 증명되거나 선수가 시인하진 않았지만 약물 의혹이 짙은 선수들이다.
  • 이 시즌에 루이곤조는 총 419루타를 기록했고, 이는 역대 MLB 단일시즌 최다루타 10위 기록으로 루 게릭조 디마지오 사이에 위치하는 기록이다. 이 해 루이곤조의 IsoP[12] 수치는 0.363이었는데, 참고로 들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 38년간 단일 시즌 최다홈런 기록을 세웠던 1961년의 로저 매리스가 IsoP .351이었다. 이 시즌 이후로 루이곤조는 단 한번도 30홈런, IsoP 0.250조차 기록하지 못했다.
  • 쉽게 말해서 상기한 약쟁이들이 루이곤조와 동시대에 활동해서 루이곤조의 기막힌 스탯들이 비교적 묻혔는데, 만일 저 약쟁이들과 달리 루이곤조는 약 없이 순수히 정정당당한 제 실력으로 이 스탯을 기록한 게 사실이라면 야구 역사에 길이 기억되어야 할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루이곤조를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자. 루이곤조와 동시기에 활약했으며 커리어 스탯도 비슷하고 마찬가지로 영구결번을 받은 에드가 마르티네즈는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입성한 반면, 루이곤조는 첫해에 광탈한 배경엔 이러한 의혹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13]
  • 즉, 커리어로 따져도 루이 곤조가 에드가 마르티네즈보다 나으면 나았지 부족할 게 없는 것. 심지어 에드가는 지명타자였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한정으로 '반쪽짜리 타자'라는 편견도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명전 투표단의 평가는 이 정도로 극명하게 대조된 것이다. 에드가 마르티네즈는 명전 투표 첫해인 2010년에 36.2% 득표했고 이후로도 계속 증가하여 2019년에 85.4% 득표로 기어코 입성했다. 루이 곤조는 명전 투표 첫해인 2014년에 0.9% 득표했다.] 현지에서도 약이냐 약이 아니냐의 논란은 아직도 있는 편.

3. 일본프로야구 소속 야구 선수

한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내야수를 보았던 모양이지만, 위의 루이곤조랑 동명이인인지라 상대적으로 묻혔다. 이쪽은 오른손잡이. 이승엽과 함께 뛰긴 했지만 이승엽도 이 시기에는 부진했던지라... 그 후 2008년 도핑 적발로 방출되어 콜로라도 로키스와 마이너 계약을 했지만 몇년 째 소식이 없다. 추가바람.


[1] 플로리다가 워낙 따뜻한 지방이다보니 스프링 캠프도 플로리다의 탬파나 마이애미를 중심으로 (아니면 애리조나라든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마이너리그 팀들도 탬파를 중심으로 몰려 있고. 그래서인지 탬파 출신이거나 탬파에서 야구를 배운 선수들이 꽤 많다. 스티브 가비 (LA 다저스), 드와이트 구든 (뉴욕 메츠), 웨이드 보그스 (탬파베이 레이스), 게리 셰필드 (저니맨), 프레드 맥그리프 (역시 저니맨), 티노 마르티네즈 (뉴욕 양키스), 루 피넬라 (전 시애틀 매리너스 감독), 토니 라루사 (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 등등...도저히 셀 수가 없이 많다![2] 2001년 월드시리즈 당시 홈런을 맞고 주저앉은 BK를 마크 그레이스가 얼른 가서 일으켜주는 장면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유달리 고참이 많았던 디백스에서 김병현은 여러 모로 챙겨주고픈 막둥이 포지션이었다. 김병현이 타석에서 활약하자 커트 실링이 배트를 쿠킹호일로 말아 김병현에게 실버 슬러거 트로피를 만들어준 것도 유명한 일. 월드시리즈 DVD에도 고참 선수들이 '많이 힘들었을 텐데, 병현 킴에게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라며 활짝 웃으며 인터뷰할 때 김병현이 우승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삽입하기도 했다.[3] 곤조는 흔히 곤잘레스의 애칭으로 자주 쓰이며, MLB에서 가장 유명한 곤조는 MVP출신 거포 약쟁이 후안 곤잘레스 (텍사스 레인저스)였으나, 혹자는 구분을 위해 후안곤조/루이곤조라고 나누기도 한다. 후안 곤잘레스는 다른 닉네임인 이고르를 쓰기도 하고.[4] 따...딱히 쿠바 사람들이 흑화되어버린 독재자 풀겐치오 바티스타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혁명으로 집권한 카스트로도 만만치않게 자유주의자들을 갈궈댔다. 아마 곤조의 아버지도 카스트로가 싫어서 미국으로 왔을지도..[5] 아들 하나, 딸 둘을 출산했고 아들 Jacob은 2017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2라운드로 지명되었다.[6] 그리고 곤잘레스 대신 데려온 그렉 제퍼리스는... 그리고 호랑이네는 멸망했다.[7] 본즈 73개, 소사 64개 이은 3위. 이 기록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시즌 홈런 역대 1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8] 실제로 2018년 타격 포인트를 앞에 형성하여 장타력을 크게 향상시킨 무키 베츠와,2017년 어퍼스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20홈런을 기록한 엘비스 앤드루스의 예가 있기 때문에 2001년 성적만으로 루이곤조가 약을 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9] 비슷한 시기 루이스 곤잘레스 한명만 홈런 플루크가 터진게 아니었다. 당시 주전 유격수 제이 벨의 경우 1999년 전년대비 18개를 더친 38홈런 커리어하이를 찍었고, 주전 중견수 스티브 핀리도 99,00시즌 2년연속 30+인 34,35홈런 커리어하이, 주전 우익수 레지 샌더스는 00시즌 애틀랜타에서 11홈런밖에 못쳤지만 01시즌 디백스에서 커리어하이 33홈런을 쏘아올렸다.[10] 이 중 3명은 명예의 전당 문 부수고 들어간 선수들. 로저 매리스는 손목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가 너무 짧았고 누적 스탯이 부족하여 15수 끝에 결국 입성 실패했다.[11] 마침 전부 체형이 호리호리한 타자들[12] Isolated Power. 절대 장타율. 타자의 완력을 나타내는 세이버매트릭 통계.[13] 심지어 에드가 마르티네즈와 시애틀은 우승은 커녕 아직까지도 월시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루이 곤조는 월시 7차전 끝내기 안타를 치는 등, 2001년의 대활약으로 애리조나의 현재까지도 유일한 우승을 일구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