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14 18:59:41

제프 켄트


파일:external/cbssanfran.files.wordpress.com/jeff-kent.jpg
이름 제프리 프랭클린 켄트 (Jeffrey Franklin Kent)
생년월일 1968년 3월 7일
국적 미국
출신지 캘리포니아주 벨플라워
출신고교 Edison HS (Huntington Beach, CA)
출신대학 UC버클리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드래프트 20라운드 전체 523순위
소속팀 토론토 블루제이스(1992)
뉴욕 메츠(1992~1996)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96)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1997~2002)
휴스턴 애스트로스(2003~2004)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005~2008)
2000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MVP
치퍼 존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제프 켄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All-Star 5회 (1999–2001, 2004–05)
Silver Slugger 4회(2000–2002, 2005)
National League MVP 1회 (2000)
National League MVP투표 6위 (2002)
National League MVP투표 8위 (1997)
National League MVP투표 9위 (1998)
타점왕 5회 (1997, 1998, 2000, 2002)
2루수 통산홈런 1위 (351개)
2루수로서 6시즌 연속 100타점 이상 (1997–2002, 메이저리그 유일)
Hit for the cycle (1999)

1. 개요2. Jeff Can't? : 프로 초기 방황기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 애증의 존재, 배리 본즈와 함께4. 휴스턴 애스트로스~로스앤젤레스 다저스5. 켄트는 명예의 전당에 갈 수 있는가?6. 기타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전 야구선수로 메이저리그 2루수로써는 보기 드물게 장타형 타자 중 하나. 통산 성적은 17시즌 동안 타율 .290, 출루율 .356, 장타율 .500, OPS .856, 순장타율 .210, 2461안타, 377홈런[1][2], 1518타점, BB/K 0.52, wRC+ 123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역대 2루수 중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냈고 2루수로서 커리어를 마감한 야수 중에서 장타율이 .500 이상인 몇 안되는 선수이다. 다른 한명은 1920년대를 지배한 전설적인 2루수인 로저스 혼스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3] 선수와 비교된 것만으로도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김병현이 던진 공에 맞고 불같이 화내던 그 선수 맞다.

2. Jeff Can't? : 프로 초기 방황기

오렌지카운티에서 자라나고 UC버클리 대학을 나온 켄트는 1989년 드래프트에서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20라운드 전체 523순위 지명을 받아 커리어를 시작했다. 지명순위에서 볼 수 있듯이 크게 기대하고 뽑은 선수는 아니었으나, 마이너에서 파워 포텐셜이 폭발, 2루수로서 두자릿수 홈런을 칠 수 있는 기대주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 지명 후 4시즌만에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게 되었다. 팀에는 올스타 2루수 로베르토 알로마가 주전으로 있었기 때문에 초창기 켄트의 역할은 내야 백업이었다. 그러다가 주전 3루수 켈리 그루버의 부상을 틈타 주전 3루수로 기용되기 시작했고 2할4푼의 타율에 8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등 신인치곤 제법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켄트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토론토 구단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위한 결정적 트레이드 한방을 노리고 있었고 원래 주전 3루수였던 켈리 그루버가 복귀하게 되자 켄트를 트레이드 매물로 삼았다. 이 때 켄트(+톰슨)와 바꾼 선수가 뉴욕 메츠데이비드 콘. 콘이 블루제이스의 첫 우승에 공신이 되었기 때문에 토론토 입장에서는 별로 아깝지 않은 트레이드가 되었다.

리빌딩 중이던 메츠에 합류하게 된 켄트는 주전 2루수로 많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트레이드 이듬해였던 1993년 첫 풀타임 주전 2루수로 시즌을 소화하였고 타율 .271와 21홈런(팀내 3위), 80타점(팀내 3위)을 기록하며 바비 보니야, 에디 머레이라는 대타자들과 함께 팀 타선을 이끌었다. 하지만 실력과는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바로 인성(...). 신인 주제에 팀원들과의 사이가 영 좋지 않았고 신인 신고식도 거부하며 버클리 나온 남자라 이건가? 뉴욕 메츠의 클럽하우스 분위기를 메이저리그 최악으로 만들었다. 당시 메츠 클럽하우스는 보니야, 머레이 같은 흑인선수들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해 좋은 대학을 나온 백인도련님 켄트는 이런 분위기를 견뎌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절의 안좋은 이미지로 인해 한동안아직까지 켄트에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켄트가 메츠에 몸담은 3년 반 동안 메츠의 성적은 내셔널리그 최악이었고 팬들은 그 원흉으로 켄트를 꼽았다. Jeff Can't!! 하지만 켄트의 공격성적은 평균 이상의 2루수였다. 팀 분위기는 조져 놓으면서 스탯은 살뜰하게 챙기는 켄트가 팬들의 눈엔 미워보였고 이기적인 백인선수로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거기다 수비도 썩 좋지 못해 결정적일 때마다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선수단, 팬들의 불만에 이골이 난 메츠는 1996시즌 중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제프 켄트의 트레이드를 마침내 성사시켰는데 트레이드 내용은 메츠가 제프 켄트와 호세 비스카이노를 내주고, 인디언스로부터 올스타출신 2루수 카를로스 바에르가 + 베테량 내야수 알바로 에스피노사를 받는 것이었다. 두명 다 히스패닉계다. 켄트가 얼마나 속을 썩였으면..

켄트가 세번째로 몸담게 된 팀인 인디언스는 메츠와는 다르게 우승에 도전하는 강팀이었다. 특히 1996년의 타선은 메이저리그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강타선인데 성적이 조금 하락하던 바에르가를 켄트로 대체하여 살인타선의 완성을 꿈꾸었다.안 그래도 강한데.. 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고 월드시리즈 도전에도 실패했다.

불안한 내야수비를 실패의 원인으로 인식한 인디언스 구단은 제프 켄트, 호세 비스카이노, 훌리안 타바레스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보내고 당대 최고의 3루수 맷 윌리엄스를 얻는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기존의 3루수 짐 토미를 1루로 옮기고 3루에 맷 윌리엄스를 수혈, 반대급부로 켄트가 빠져나간 2루엔 베테량 내야수 토니 페르난데스를 영입하여 공격력과 수비력 동반 상승을 꾀하는 전략이었던 것.

맷 윌리엄스는 1996년까지 10년동안 자이언츠에서 뛰며 사랑받은 프렌차이즈 스타였고, 실력으로도 3할 3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선수였다. 반면 켄트는 2루수치곤 괜찮은 공격력을 갖췄지만 공격력의 이점을 상쇄시키는 수비력, 그리고 정체된 기량이 문제였으며, 실력 외적으로 소문도 안좋은 선수였다. 켄트와 함께 넘어간 비스카이노는 주전급 내야수였지만 파워와 스피드 어느 한쪽이 특출난 면이 없는 선수였다. 그리고 훌리안 타바레스는 1996 시즌 5점대 방어율의 불펜투수였다. 사실 이 트레이드는 배리 본즈맷 윌리엄스의 불화가 원인으로, 본즈와의 파워게임에서 밀린 윌리엄스가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던 것이 발단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루어질리가 없던 트레이드. 자이언츠 팬들은 엄청난 사기극이라며 광분했다.

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 애증의 존재, 배리 본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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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마주치면 큰일날듯

자이언츠 팬들은 사랑하던 윌리엄스를 떠나보내는 것은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했지만 그 대가가 켄트와 떨거지들이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신임 단장 브라이언 세이빈이 트레이드를 성사시키고 비공식적으로 100만달러를 건네받았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세이빈은 연일 공세를 퍼붓는 팬들과 지역언론을 잠재우기 위해 비공식 기자회견을 요청하였는데 이 기자회견은 "I am not an idiot."(나는 바보가 아닙니다.)란 말로 유명해졌다.

세이빈은 새 구장 건축을 위해 맷 윌리엄스를 내보내야만 했었고, 신인 유격수 리치 오릴리아, 3루수 빌 뮬러, 그리고 윌리엄스 트레이드로 데려온 선수들이 가세함으로서 팀이 더 좋은 성적을 올릴 것이라고 호소하였다. 아울러 바비 보니야를 영입하여 배리 본즈와 함께 킬러B를 재결성 시킬 것이란 계획도 밝혔다.결국 그런 영입은 없었다. 사탕발림, 사기공갈ㅋㅋ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켄트는 배리 본즈를 만나게 되고 당시 전성기였던 골드글러버 1루수 J.T. 스노우와 함께 클린업을 이룬다. 본즈와 스노우가 좌타자였으므로 주로 4번 타석에 들어섰다. 3번 본즈, 4번 켄트, 5번 스노우. 그리고 자이언츠에 맞은 첫시즌, 더스티 베이커 감독의 전폭적 지지하에 155경기 출장 .250 .316 .472 29홈런 121타점으로 홈런-타점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더니,

1998년 재능이 드디어 만개하면서 리그 최고 타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시즌 성적은 타율 .297, 출루율 .359, 장타율 .555, 31홈런과 128타점! 2000년에는 본즈를 제치고 리그 MVP를 수상하며 자신이 본즈의 조력자가 아닌, 그와 경쟁할 만한 선수임을 알리게 된다. 159게임을 출장해 타율 .334, 출루율 .424, 장타율 .596, OPS 1.021, 33홈런, 196안타, 125타점이라는 아름다운 스탯을 찍었고, 거기에 0.986의 수비율로 수비까지 원숙해지며 최고의 야수가 되었다. 특히 타점 생산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는데, 아메리칸리그에 후안 곤잘레스가 있다면 내셔널리그에선 제프 켄트가 타점 머신이었다. 자이언츠에서의 6년간 매시즌 100타점을 돌파했으며, 도합 689타점을 기록, 2루수의 한계을 파괴했다.(6시즌 연속 100타점 2루수는 유일무이) 본즈와 켄트는 순망치한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타석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켄트는 3번타순에서 허구한 날 출루하던 배리 본즈의 우산효과를 톡톡히 보았고, 본즈는 뒤에 켄트가 버티고 있는 덕분에 투수들이 함부로 자신을 피하지 못하였다.

켄트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2002년까지 뛰면서 1번의 MVP와 3번의 실버 슬러거 수상, 3번의 올스타전 출장을 하게 된다.Willie Mac Award 1회 추가 켄트가 합류하기 전 70승도 넘기기 힘들었던 자이언츠는 켄트&본즈 결성 후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의 강호로 다시 올라섰으며 매해 90승이상을 올리며 포스트시즌의 단골이 되었다. 2002년도엔 월드 시리즈까지 올라 애너하임 에인절스를 상대로 우승을 목전에 두었지만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아쉽게 역전패하고 만다. 켄트 커리어에선 이 순간이 우승에 가장 가까웠던 순간이었다. 빌x먹을 원숭이

하지만, 경기 외적으로 켄트와 본즈의 사이는 물과 기름처럼 사이가 정말로 안 좋았다. 드래프트 1라운더, 야구선수 집안, 거만한 천재 스타일인 흑인 배리 본즈와 하위라운더로서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온 백인 우월주의자[4] 제프 켄트는 성장배경부터 성격까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다. 어느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냐면 둘이 더그아웃에서 난투극을 벌이던 장면[5]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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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와의 갈등도 모자라 구단 운영진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2002 시즌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자이언츠 구단에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제프 켄트가 자신의 트럭을 세차하다가 넘어져 손목이 골절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구단은 시즌 중이 아님에도 안도하며 무사히 개막까지 돌아오기를 바랐는데, 신문 보도로 오토바이 묘기를 부리다가 얻은 부상임이 밝혀지며 제대로 욕먹고 찍혀버렸다. 명백한 계약위반으로 고소당할 위기까지 처했지만 간신히 넘어갔다.

4. 휴스턴 애스트로스~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2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이 만료된 후 샌프란시스코는 켄트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게 된다. 이는 상기된 '손목 부상 사건'이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6] 샌프란시스코 생활을 청산하게 된 켄트는 자신의 텍사스 농장에서 가까운 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2년 1,900만 달러(2005년 팀옵션 900만) 계약을 맺고 네번째 팀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애스트로스의 레전드 크레이그 비지오는 켄트가 오게되면 자신의 포지션이었던 2루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 하였고 실제로도 실천하였다. 이 정도로 애스트로스는 우승에 올인한 상황이었다. 켄트는 자이언츠시절보다 조금 떨어진 성적이긴 했어도 2년간 OPS 8할대 후반과 200타점을 쏟아내며 비지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타선의 이름값이 높았지만 가장 기여가 높은 선수는 켄트(와 랜스 버크먼)라고 할 수 있었다. 2004년 10월 2일엔 2루수로서 통산 288번째 홈런을 쳐내며 라인 샌드버그를 넘어선 올타임 리더가 되는 기쁨을 맛보았다.오오 그해 가을, 켄트와 애스트로스는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까지 이뤄냈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아쉽게 패하며 또 한번 우승에 실패했다. 애스트로스 구단은 2005년 팀 옵션으로 걸려있던 900만 달러를 포기하고 연봉삭감을 전제 조건으로 재계약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켄트가 받아들일리가 만무. 아직 잘나가던 젊은 오빠 켄트는 자신의 고향팀 LA 다저스와 3년 2100만달러의 계약을 보란듯이 채결했다.

'예전보다 수비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다저스에선 1루나 3루로 갈 것이다', '극악의 투수구장 다저 스타디움을 쓰게 된 켄트의 성적이 대폭 하락할 것이다' 등 말이 많았지만 결과는? 그런 거 없다. 파크펙터와 나이 따위는 발라버리는 대활약을 펼치며 다저스 입단 첫해 29홈런 105타점을 쏟아내며 OPS .889를 찍었다(...). 켄트에 이은 팀내 홈런2위가 15개의 최희섭이었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38세 2루수가 팀 타선의 리더가 되는 진귀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참고로 이 성적은 재키 로빈슨 이후 다저스 2루수로는 최고의 성적이었다.

이듬해인 2006년에는 복사근 부상으로 시즌 초반을 결장하며 407타석밖에 소화하지 못했지만, 타율 .292에 14홈런을 기록하며 여전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07년엔 다시 건강한 시즌을 보내며 .320의 고타율에 20홈런 79타점으로 러셀 마틴, 맷 켐프, 안드레 이디어, 제임스 로니 등의 젊은 타자들을 이끌었다. 켄트의 기량이 남아있음을 확인한 다저스는 1년 1150만 달러에 켄트와 재계약하였다. 하지만 천하의 켄트도 41세가 되자 힘에 부쳤는지 타율 .280, 12홈런 59타점을 기록하며 한물간 모습을 보였다. 결국 다저스는 연장계약을 제시하지 않았고 켄트는 다시 FA시장에 나왔다.

수비 부담을 없애고 지명타자로 뛴다면 더 활약할 수 있다는것이 대부분의 예상이었으나, 켄트는 해를 넘기도록 어느 팀과도 계약하지 않았고 결국 2009년 1월 22일 "가족과 더 오랜시간을 보내고 싶다"라고 말하며 은퇴를 선언했다.

중간에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끼기는 했지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꽃피운 선수가 불구대천의 라이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했기 때문에 당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팬덤 사이에선 배신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양 팀 간의 경기에서 중계석에 종종 와서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팬들도 워낙 뛰어난 타격을 선보인 선수라는 점, 애초에 샌프란시스코 프랜차이즈 스타는 아니었던 점과 본즈랑 맨날 티격태격했던 점을 들고, 또한 시간도 많이 지나다보니 후안 유리베처럼 팀을 우승시킨 후 비교적 훈훈하게 다저스로 떠난 사례[7]도 나오면서 예전같이 천하의 개쌍놈까진 아니라 그냥 얄미운 정도라고. 또한 커리어의 전성기가 샌프란시스코 시절이기 때문에 만약에라도 명전에 자이언츠 모자를 쓰고 갈 가능성이 높은 점에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면이 있다고 한다.

5. 켄트는 명예의 전당에 갈 수 있는가?

타격성적만 따져보면 통산 타율이 3할도 안되고, 400홈런도 못 때렸으며, 3천안타는 고사하고 2500안타도 못 쳐냈지만 이 양반이 은퇴할 때까지 2루수를 지켰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명예의 전당에 충분히 들어갈 자격이 있다. 특히 명예의 전당은 포지션별로 입성한 선수들의 누적스탯 편차가 굉장히 큰 편인데, 심지어 수비부담이 큰 유격수의 경우는 OPS 7할도 못넘은 타자도 간판급 수비 하나만으로 명전을 간다. 게다가 켄트의 누적스탯에서 홈런과 타점은 2루수로서 역대 최고수준으로, 100년이 넘는 MLB에서 2루수 중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냈고 은퇴 시점에서 로저스 혼스비와 더불어 통산 장타율이 5할을 넘어가는 유이한 2루수에 약물혐의에서도 자유로운 청정타자다. 공개적으로 성장호르몬 복용자 적발을 위한 MLB 선수 대상 혈액검사를 지지하기도 했을 정도. 때문에 켄트가 은퇴했을 때 몇수만에 몇퍼센트의 확률로 입성하느냐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았지 입성 자체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그가 은퇴하는 시점이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즈, 마이크 무시나, 프랭크 토마스, 톰 글래빈 같은 굇수들의 은퇴시기와 겹치는 바람에 시간은 좀 걸려도 언젠가 입성하겠지하고 생각했다.

다만 실버슬러거 4회, MVP 1회, 올스타 5회라는 절륜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골든글러브를 매년 거의 수집하다시피 하고 클린업과 테이블 세터를 넘나들면서 불꽃같은 전성기를 거쳤던 로베르토 알로마나 수상내역에서 밀릴게 없고 오히려 3000안타-400도루라는 진귀한 마일스톤까지 세웠던 크레이그 비지오같은 타자들에 비해 홈런과 타점을 제외하면 누적과 WAR에서도 밀린다는 점[8], 수비지표라고 보기엔 애매하지만 그래도 내야수로써의 수비 실적이라 할 수 있는 골든글러브를 단 한차례도 못받았던 점, 그리고 600타석 이상 들어선 시즌 딱 6시즌이라는 점은 HoF 투표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통산 타석이 10000타석을 못넘겼다(...) 사실 유리몸이라기 보다는 커리어 초반에 감독과 선수들간의 알력때문에 밉보인게 크다

이 문제때문인지는 몰라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첫해인 2014년도에 다소 당혹스러운 15.2%의 득표율을 보였다. 몇년간은 쟁쟁한 후보들이 많기 때문에 투표율이 오를 가능성이 별로 없다. 후보유지기간이 기존15년에서 10년으로 단축된 것도 악재. 솔직히 켄트같은 선수가 못가면 말이 안 되서 현지에서도 논란이 좀 있는 문제다. 현역 시절에는 다들 당연히 간다고 이야기했는데 정작 투표 들어가니 예상밖의 결과가 나와 당혹스러워하는 의견이 많다.

다음해인 2015년도에도 작년과 별 차이없는 14%의 득표율을 보였고, 2016년도 득표율은 16.6%로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제 3번째 투표이기에 좀 더 지켜볼 필요는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입성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성적과는 다르게, 켄트는 팀원이나 구단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데다가 백인우월주의론자로 찍혀서 밉보임을 받았는데, 문제는 언론과의 관계 역시 최악이었다는 것. 이 점이 명예의 전당을 가기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 중. 거 있잖아 피묻은 양말의 예도 있고

2017년에는 16.7%, 2018년에는 14.5%를 길기록하며 10%대에서 계속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대로라면 입성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는 상황. 2019년 역시 18.1%에 그쳤다.

6. 기타

  • 켄트는 여러모로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친숙한 선수인데, 먼저 박찬호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선발투수로 활동하던 시절 박찬호에게 삼진과 아웃카운트를 헌납하던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즉, 박찬호의 호구. 그리고 허구연 해설위원이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코치연수를 받던 시절 자주 만나 파워식샤 조언을 해줬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가 토론토에서 코치연수를 받던 시절에 제프 켄트 선수와 식샤를 했는데요. 그 때는 이렇게 클 줄은 몰랐스요. 그리고 최희섭은 다저스시절 그에게 밀려 플레툰시스템으로 나왔고 둘이 팀내 홈런 1, 2위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만큼 다저스가 장타력이 부족했다.
  • 김병현콜로라도 로키스에서 선발투수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던 2005년 7월 4일, 김병현과의 벤치클리어링으로 인해 또다시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호구 각인시켰다. 로키스와 다저스가 경기를 벌였던 이 날, 1회초 2사에서 3번타자로 출장한 제프 켄트는 볼카운트 0스트라이크 1볼에서 김병현의 공에 등을 맞았다. 이미 4월 25일에도 김병현에게 공을 맞았었고 이 것을 고의로 판단한 켄트는 불같이 화를 내며 김병현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김병현 역시 니가 와! 맞짱뜨든지켄트에게 천천히 걸어오며 일촉즉발의 상황이 일어났고 결국 양 팀의 선수들이 모두 달려나와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났다.[9]
  • 알로마가 공격도 공격이지만 넓은 수비범위와 안정적인 연결동작을 가진 최고의 수비수였고, 비지오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활화산 타선의 시발점 역할을 한 리드오프였다면 켄트는 2루수로서 클린업 트리오에 낄 수 있는 유니크한 선수였다. 수비부담이 더 큰 유격수에선 1960년대 어니 뱅크스가 활약하며 500홈런을 기록한 이후 칼 립켄 주니어가 데뷔하여 3000안타 400홈런을 기록했다. 그가 은퇴할 무렵에도 알렉스 로드리게스, 노마 가르시아파라 같은 거포형 유격수들이 튀어나왔지만 2루수는 지금도 한 시즌 30홈런 100타점 OPS .900 이상을 찍어줄 수 있는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물다.
  • 리얼리티 쇼 서바이버의 24번째 시즌에 참가했지만 탈락했다. 탈락하고서 무릎 인대까지 다치자 분통을 터뜨렸는데, "ㅅㅂ 내가 현역 때 번 돈이 얼만데 100만불 벌자고 무인도까지 와서 생고생임? 사실 100만불도 아니여, 오바마가 세금 팍팍 때려서 60만불밖에 안됨."이란 말을 남겼다.(...)[11] 그러곤 국내팬들이 켄트보고 법규한테 아직 덜 쳐맞았다고 사람되라고 카더라. 그러나 웬만한 서바이버 애청자는 이걸 듣고 빵터졌다 카더라.
  • 불꽃을 던지는 사나이의 비둘기 폭파사건 당시 상대 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뒤 죽은 새를 잡고 실실 웃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적도 있다(...)일종의 추억을 새기는 기념품 같은건가?


[1] 홈런만으로 장타력을 평하기엔 뭐한 것이, 커리어 대부분을 투수 친화 구장에서 보낸지라 홈런 수에서 손해를 좀 봤다. 대신 2루타 수가 매우 많아서 역대 21위에 랭크된다. 게다가 통산 순장타율이 2할을 넘어간다는 것만 봐도 뛰어난 장타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현재 MLB 2루수 중에서 켄트의 2루수 홈런기록을 깰만한 가장 유력한 후보는 로빈슨 카노인데 카노는 2005년 MLB 데뷔 후 2017년까지 13시즌 동안 301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지금 같은 기량을 3~4시즌 정도 유지하면 충분히 노려 볼만하다. 참고로 켄트가 데뷔 후 같은 기간 동안 때려낸 홈런 갯수는 302개다. 물론 카노는 2018시즌 금지약물인 이뇨제 사용이 걸려서 켄트와의 비교가 무의미해졌다.[3] 혼스비의 통산 타율은 0.358로 MLB 역대 우타자 최고 타율이며 타이 콥에 이은 통산 타율 2위이다. 통산 OPS가 10이 넘어가는건 덤이다.[4] 단순 루머라고는 하나 현재까지 켄트가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5] 2002년 6월 25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원정경기.[6] 그리고 자이언츠는 본즈와 8명의 땅꼬마들로 이루어진 팀이 돼버린다.[7] AT&T 파크에서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온 그에게 우승반지 수여식을 열어줬고 선수들과 팬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유리베는 그야말로 2010 우승의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까지 않는 것. 게다가 다저스 가서 적절한 삽질을 해주며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까방권을 얻고 있다.[8] bWAR = 55.2, fWAR = 56.1. 둘다 60을 못넘는다.[9] 훗날 김병현 인터뷰에 따르면 '고의로 맞혔다'라고 했다. 전날 제프 켄트가 인터뷰 중에 '콜로라도에 야구 제대로 하는 놈 누구 있나?' 수준의 디스를 해댄지라, 팀내 고참급(확실히 팀 내에선 토드 헬튼 다음의 커리어였다.)인 김병현이 손수 응징했다고...[10] 2013년 초반 급기야 어틀리가 켄트의 통산 rWAR를 넘어섰다(...)[11] 켄트 본인은 오바마를 매우 매우 싫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가 대표적인 백인우월주의자 메이저리거였으며, 동성결혼 반대에 15000달러를 투자한 호모포비아에 마지막으로 모르몬 신자이기 때문. 오바마는 흑인이며 2012 대선에서 동성결혼을 찬성했으며 모르몬 신자인 롬니를 탈락시켰다. 이만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