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2-03 12:39:26

데이비드 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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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커리어 전체를 보여주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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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게임 달성의 순간
이름 데이비드 브라이언 콘 (David Bryan Cone)
생년월일 1963년 1월 2일
국적 미국
출신지 미주리캔자스시티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81년 드래프트 3라운드
소속팀 캔자스시티 로열스 (1986)
뉴욕 메츠 (1987~1992)
토론토 블루제이스 (1992)
캔자스시티 로열스 (1993~1994)
토론토 블루제이스 (1995)
뉴욕 양키스 (1995~2000)
보스턴 레드삭스 (2001)
뉴욕 메츠 (2003)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1992 1996 1998 1999 2000
1994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잭 맥도웰
(시카고 화이트삭스)
데이비드 콘
(캔자스시티 로열스)
랜디 존슨
(시애틀 매리너스)

1. 소개2. 학창 시절3. 현역 시절
3.1. 캔자스시티 시절3.2. 메츠 시절3.3. 토론토 시절3.4. 다시 캔자스시티에서3.5. 양키스 시절3.6. 그 후
4. 플레이 스타일5. 은퇴 이후

1. 소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16번째 퍼펙트게임의 주인공이며 다섯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80~90년대의 명투수로 애칭은 Coney.

통산성적은 18시즌 동안 194승 126패, 3.46ERA, 2898.2이닝, 2668 삼진, 1137 볼넷, K/9 8.28, BB/9 3.53, K/BB 2.34, HR/9 0.8, 56완투 22완봉을 기록했다.

트위터도 한다. @dcone36

2. 학창 시절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난 콘은 어렸을 때부터 만능 스포츠맨으로 이름을 날린 지역의 스타였다. 헤이든 가톨릭 고등학교에 입학해 쿼터백으로 풋볼팀의 지구 우승을 이끌었고, 농구팀에서는 포인트 가드를 맡았다. 하지만 그 학교엔 야구팀이 없었다. 야구에 대한 열정도 뜨거웠던 콘은 밴 존슨 리그라는 여름 리그에 참여하며 야구까지 섭렵하게 된다.운동덕후

연고지에서 나온 재능있는 선수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된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콘의 야구경력이 부족함에도 1981년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라는 높은 순위로 그를 지명하였다. 콘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본격적인 야구경력이 시작되었다.

3. 현역 시절

3.1. 캔자스시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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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스 입단 후 루키-싱글A에서 두 시즌 동안 선발투수로서 22승7패 ERA 2.21를 기록하며 기대에 부응하는 가능성을 보였으나 부상으로 1983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리며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다. 부상 복귀시즌인 1984년 더블A에서 8승12패 ERA 4.28을 기록하였고 트리플A로 승격한 1985시즌엔 9승15패 ERA 4.65로 부진했다.

선발투수로서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로열스구단은 1986시즌부터 콘을 릴리프로 컨버전 시켰는데 이것이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8승4패 14세이브 ERA 2.79을 기록한 콘은 이 시즌에 가까스로 메이저리그 데뷔를 이루어 냈다.[1] 하지만 오래 활약하지 못했고 확장 로스터 기간에 조금 더 던지며 최종적으로 22.2이닝 ERA 5.56이라는 초라한 루키시즌 기록을 남겼다.

3.2. 메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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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로열스는 1987시즌에 앞서 3대 2 트레이드로 콘을 뉴욕 메츠로 보낸다. 그리고 콘은 트레이드된 메츠에서 본인의 커리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2년만 더 기다리지

트레이드가 된 이후 첫 시즌이었던 1987년, 콘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5승 6패 ERA 3.71이라는 쏠쏠한 성적을 냈고 메츠는 일찌감치 본전을 뽑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8년부터 콘은 본격적으로 포텐이 터지게 된다.

당시 드와이트 구든을 앞세워 막강한 마운드를 자랑했던 메츠였기에 콘은 1988시즌을 불펜에서 시작하게 되었지만 5월 첫째 주에 땜빵으로 선발기회를 얻었는데 이 경기에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를 완봉으로 제압하는 사고를 치게 된다. 이후 선발 로테이션에 편입되어 전반기를 9승 2패 2.52 ERA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마쳤으며 올스타 게임에도 나서게 되었다. 전반기의 놀라운 활약은 후반기에도 이어져 시즌 최종 성적은 20승 3패 231.1이닝, 2.22 ERA, 213K를 기록하게 된다.[2] 콘의 활약에 힘입어 뉴욕 메츠는 시즌 100승을 거두며 NLCS에 진출하지만 오렐 허샤이저가 투혼을 보인 LA 다저스에게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1991년까지 4시즌 연속 10승 이상을 거두고 20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약물로 망한 드와이트 구든을 대신해 한물간 메츠 마운드의 에이스이자 내셔널리그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특급 우완투수로 올라서게 되었다.

3.3. 토론토 시절

1992년 콘은 메츠와 토론토와의 트레이드로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이적한다. 토론토는 포스트 시즌에서 콘의 활약을 기대하며 그를 영입했고 이적 이후 콘은 2.55 ERA와 4승을 거두며 최종 성적 17승 10패, 2.81 ERA를 기록, 정규시즌에서도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포스트 시즌에서도 1승 1패 방어율 3.22로 역시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캐나다 팀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본인의 커리어 첫번째 우승반지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의 우승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3.4. 다시 캔자스시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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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시즌이 끝나고 FA 자격을 얻은 콘은 고향팀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선택한다. 콘이 데뷔 팀으로 돌아온 것은 당연히 고향팀인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캔자스시티 기반의 기업가이자 로열스의 구단주 유잉 카프만의 투자가 가장 큰 이유였다.

캔자스시티는 인구수 100만명도 안되는 스몰마켓이었지만 리그 정상급의 페이롤을 유지하는 팀이었다. 이것은 순전히 구단주 한명의 열정으로 이루어 낸 것이었다. 유잉 카프만은 아름다운 야구전용구장을 짓고 고액연봉선수를 영입하기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콘은 계약 첫해에 기대에 조금 모자란 성적을 내지만 1994년에 개막후 8연승, 6월 이후 6연승을 거두며 맹렬히 질주하더니 16승4패 ERA 2.94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시애틀 매리너스랜디 존슨을 제치고 마침내 사이 영 상을 차지한다.[3]

그러던 1993년,시즌 도중 구단주 유잉 카프만이 암투병 끝에 사망하자,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 로열스는 콘을 토론토로 트레이드 시킨다.

3.5. 양키스 시절

하지만 콘은 다시 온 토론토에서도 오래 있지 못했고, 1995년 시즌 중반에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된다. 양키스에 합류한 첫시즌에 18승을 거두며 볼티모어의 마이크 무시나에 이어 리그 다승 2위를 기록한 콘은 팀을 와일드 카드까지 이끌며 믿을 수 있는 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가치를 인정받고 양키스와 재계약까지 따냈지만 FA 첫 시즌인 1996년 정맥류 수술을 받으며 시즌 대부분을 날려먹고 후반기에 복귀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콘은 계속 부진했지만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6이닝 1실점으로 시리즈 양키스의 시리즈 첫 승을 안겨주었다.

이듬해 97시즌엔 승운이 따르지 않았지만 12승 6패 ERA 2.82를 기록하며 에이스 역할을 해낸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엔 부진했고 팀도 월드 시리즈에 오르지 못했다. 다행히 98년엔 지난 시즌의 불운을 보상받듯 생애 두번째 20승을 기록하였고, 사이영 투표 4위를 차지했다. 98시즌엔 무엇보다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이 뛰어났는데 중요한 경기마다 결정적인 활약하며 양키스에서의 2번째 우승, 개인통산 3번째 우승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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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계약이 끝난 콘은 800만 달러에 양키스와 1년 재계약을 하며 양키스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1999년 7월 18일에는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16번째의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그날은 돈 라슨[4]요기 베라가 시구 시포를 하고 경기를 보고 있었다..겹경사

한국나이 37세의 시즌임에도 콘의 위력은 줄어들지 않았고 시즌내내 좋은활약으로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2년 연속 맹활약하며 개인통산 네번째 우승반지를 얻었다.

3.6. 그 후

99시즌 맺은 1년 계약이 만료된 콘은 2000년 시즌을 앞두고, 다시 1년 1,200만 달러에 양키스와 재계약한다.그러나 콘은 2000년 시즌 4승 14패 ERA 6.91의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양키스와의 세번째 재계약에 실패한 콘은 2001년 양키스의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와 가까스로 계약했으나 9승7패 ERA 4.31로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내고 시즌이 끝난 후 팀에서 방출되었다.이후 콘은 2003년 뉴욕 메츠에 입단하였으나 부진과 부상이 겹쳐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5월 28일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4. 플레이 스타일

우완 파워 피처로 전성기 때에는 삼진을 잡는 능력이 준수했다. 200개 이상 탈삼진을 잡은 시즌이 6시즌이며 1990~1991년에는 2시즌 연속으로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했다. 1991년 10월 6일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19K 완봉승을 달성했는데 이 기록은 한 경기 탈삼진 기록 중 역대 2위였다. 또한 1이닝 9스트라이크, 3K를 달성한 25번째 투수이기도 하다.

많은 탈삼진을 잡았던 비결은 바로 당시 최정상급의 슬라이더와 제구력. 상황에 따라 갑자기 팔 각도를 쓰리 쿼터에서 사이드암까지 다양하게 변화시켰는데, 슬라이더에 더욱 심한 움직임을 주는 투수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콘의 슬라이더는 "라레도(Laredo) 슬라이더"라는 별칭까지 만들어져있다.

다만 커리어 말년 (2000년)에 쓰인 콘에 관한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기 때문에 등판 간격을 지켜 등판하면 잘 털리므로 더 많은 휴식일을 줘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동시대 활약한 매덕스, 존슨, 글래빈이 40살이 넘어서도 커리어를 지속했다는 걸 생각하면 만 40세에 커리어가 끝난게 아쉽기는 하지만 이건 콘의 몸 관리를 탓하기 전에 저들이 너무 괴물이라서..

5. 은퇴 이후

이후 콘은 양키스의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009년에는 구단의 부탁을 받고 팬들에게 새 양키스타디움의 고급 좌석을 사달라고 전화로 부탁하는 일을 맡기도 했고, 2010년에 이후로 올드 타이머 데이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폴 오닐, 존 플라허티 등등처럼 YES 네트워크에 간간이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비추고 있다. 대체로 원정 경기에 많이 나오는 편. 지금은 코네티컷 주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1] 팀의 에이스이자 1989년 사이영 상 투수인 브렛 세이버하겐의 구원투수로 데뷔[2] 사이 영 상을 충분히 노려볼만한 성적이었지만 그 해 사이 영 상은 24승이나 거둔 프랭크 비올라가 차지했다.[3] 사이 영 상을 받기에는 살짝 부족해보이는 성적이지만 1994년은 선수 노조의 파업으로 시즌이 일찍 끝났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며 훌륭한 성적이다.[4] 돈 라슨은 1956년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