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닐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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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 | ||||
존 올러루드 (토론토 블루제이스) | → | 폴 오닐 (뉴욕 양키스) | → | 에드가 마르티네스 (시애틀 매리너스) |
신시내티 레즈 등번호 21번 | ||||
스키터 반스 (1984) | → | 폴 오닐 (1985~1992) | → | 잭 도허티 (1993) |
뉴욕 양키스 등번호 21번 | ||||
스캇 샌더슨 (1991~1992) | → | 폴 오닐 (1993~2001) | → | 라트로이 호킨스 (2008) |
모건 엔스버그 (2008) | → | 폴 오닐 | → | 영구결번 |
YES Network | |
<colbgcolor=#132448><colcolor=#ffffff> 뉴욕 양키스 No. 21 | |
폴 앤드루 오닐 Paul Andrew O'Neill | |
출생 | 1963년 2월 25일 ([age(1963-02-25)]세) |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브룩해븐 고등학교 - 오터베인 대학교 |
신체 | 193cm / 90kg |
포지션 | 우익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81년 드래프트 4라운드 전체 93번 (CIN) |
소속팀 | 신시내티 레즈 (1985~1992) 뉴욕 양키스 (1993~2001) |
해설위원 | YES Network Analyst (2002~)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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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던 전 야구 선수.2. 선수 생활
2.1. 신시내티 레즈
1981년 드래프트로 레즈에 입단, 1985년에 빅리그에 데뷔했고 1988년부터 팀의 주전 외야수로 자리잡는다. 이후 1990년 월드 시리즈에서 레즈가 우승함으로서 주전 멤버로서 처음으로 우승 반지를 획득했고 1991년에는 2할 5푼대의 타율에도 불구하고 28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생애 첫 올스타전에도 출전한다. 그리고 1992년에는 .246 14홈런 66타점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1993시즌을 앞두고 로베르토 켈리를 상대로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되었다.2.2. 뉴욕 양키스
레즈에서 6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음에도 인내심이 떨어지고 화를 자주 냈던 탓에 공갈포에 가까웠으나, 양키스에 온 이후 돈 매팅리에게 조언을 듣고 참을성을 기르며 컨택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팀의 핵심 타자로 거듭난다.
1993년 .311 20홈런 75타점으로 생애 첫 3할 시즌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94년에는 .359 21홈런 83타점으로 수위타자에 오르며 최고의 시즌을 보낸다. 이후 1998년까지 6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으며,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4년 연속 100타점 이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오닐이 뛰던 시절은 양키스의 황금기였기에 우승 반지도 1996년, 1998년, 1999년, 2000년 4개나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오닐은 이 시기 양키스의 클럽하우스에 폭발적인 승부욕을 심어놓은 주역으로 인정받으며, 이 네 번의 우승에 성적으로써는 몰라도 마인드로써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다.[1]
2001시즌에도 39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267 21홈런 70타점 22도루의 성적으로 타선의 한 축을 담당하며 양키스에서의 다섯 번째 월드 시리즈를 맞게 되지만, 키 큰 왼손 괴물과 핵이빨을 들고 다니던 방울뱀한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오닐은 그 시즌을 마지막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며 은퇴하게 된다.
통산 성적은 타율 0.288, 2,107 안타, 281 홈런, 1,269 타점으로 레즈 시절의 공갈 기질 탓에 명예의 전당에 가기엔 아쉬운 편이지만 그래도 나름 리그 수위권에 들어가는 타자였던 만큼 우수하다.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간간히 뉴욕 양키스의 자체 중계 방송 채널인 YES 네트워크에서 캐스터 마이클 케이와 함께 해설을 맡고 있다.2007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는 2.2%의 득표율에 머물러 탈락했다.
2022년 뉴욕 양키스는 폴 오닐의 번호 2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였다. 판데믹 셧다운으로 기념행사를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23년 시즌 초에야 그를 초대해 공식적으로 영구결번 지정 행사를 열었다.
4. 플레이 스타일
전형적인 중장거리형 타자로, 비록 30홈런 시즌은 없지만 풀타임 주전이 된 1988년부터 은퇴시즌인 2001년까지 14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꾸준한 선수였다.레즈시절에는 장타 위주의 스윙으로 정교함은 부족한 모습을 보였으나 양키스로 이적한 이후에는 공을 잘 맞추는 데에 집중했고, 그 결과 기존의 장타력을 유지하면서 정교함과 선구안까지 갖춘 강타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5. 이야깃거리
- 성격이 불같아서 중요한 순간에 삼진을 당한다거나 하면 스스로 열받아서 방망이를 패대기치곤 했다. 전사(Warrior)라는 별명도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붙여준 별명. 실력도 실력이지만 특히 그의 이런 강한 승부근성은 클럽하우스 분위기에 긍정적으로 작용했고, 비운의 타자 돈 매팅리와 달리 3연패 시절 양키스 왕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양키스 팬들에게 아직도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 뉴욕 양키스에서는 2022년까지 오닐의 등번호 21번을 비공식으로 아무에게도 달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2] 이후 오닐이 은퇴하고 21년 뒤인 2022년 2월 23일, 양키스가 오닐의 21번을 드디어 정식으로 영구 결번시켜주었다.
- 야빠들에게는 2001년 월드 시리즈에서 디백스의 김병현에게서 안타를 쳐내 역전극의 서막을 만든 장면으로도 익숙하다. 정작 끝내기 홈런은 지느님이 쳤지만...
- 1989년 7월 5일 레즈 시절에 주자가 2루에 있는 상황에서 오닐의 앞으로 안타가 날아왔는데, 오닐이 이걸 포구하지 못하고 더듬자 2루 주자가 홈으로 뛰는걸 저지하기 위해 공을 발로 차서 내야로 보내 주자의 득점을 막아낸 적이 있다 # 이것 때문에 베이스볼 레퍼런스의 폴 오닐 페이지에는 다른 선수들에게는 없는 'Kicks' 항목이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무려 왼발잡이다.[3]
- 201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미시간 대학교 외야수로 활동한 조카 마이클 오닐이 양키스에게 3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마이클 오닐은 양키스 산하 마이너에서는 더블 A에서 뛴 것을 마지막으로 2016년 방출되었고 이후 레인저스, 브루어스 같은 팀들과 마이너 계약을 맺으며 선수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결국 빅리그 데뷔에는 실패했으며 2019년을 끝으로 더 이상 선수 기록이 없는걸로 보아 야구를 그만둔 듯하다.
- 뮤지션으로도 유명한 버니 윌리엄스와 덕아웃에서 합동 공연을 자주 했다고 한다. 윌리엄스가 기타리스트라면 오닐은 드러머였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둘 다 양키스의 영구결번으로 남았다.
6. 관련 문서
[1] 이로서 양키스에서 영구 결번된다. 당시 최고의 투수였던 로저 클레멘스가 양키스로 왔을 때 원래 그의 번호였던 21번을 받으려 했다가 실패했을 정도로 오닐은 양키스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2] 그 예시로 오닐의 현역시절 로저 클레멘스가 양키스로 이적해왔을 때 그 역시 21번을 달고 뛰었었기 때문에 오닐에게 21번을 양도 받으려고 롤렉스 시계를 비롯한 여러 선물을 조공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로켓은 양키스에서 22번을 달고 뛰었다.[3] 오닐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신시내티는 저 경기에서 졌다. 다름 아닌 마무리 투수의 끝내기 폭투로...[4] 폐가 좋지 않은 가족력이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