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8 21:46:00

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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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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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이종범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o4a4woaUar1sqk8veo4_r1_250.png 프로야구 30주년 Legend All-Star BEST 10
in 2011. KBO-NAVER
장효조
OF / 삼성
이순철
OF / 해태
양준혁
OF / 삼성
김재박
SS / MBC
박정태
2B / 롯데
한대화
3B / 해태
선동열
P / 해태
장종훈
1B / 빙그레
김기태
DH / 쌍방울
이만수
C / 삼성

선동열의 수상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2005 2006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dywc2m8WK1sqk8veo4_r1_540.png
1986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1988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1989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1990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1991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1993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86 1989, 1990 KBO 리그 MVP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86, 1989, 1990, 1991 KBO 리그 다승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85~1991, 1993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87,1989,1990,1991 KBO 리그 승률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93, 1995 KBO 리그 구원왕
}}} ||
선동열의 보유 기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보유 기록
통산 최저 방어율 1.20
한 시즌 최저 방어율 0.78
시즌 0점대 방어율 3회[1]
한 경기 최다 탈삼진 18개[2]
한 경기 최다 투구 232구
통산 최저 WHIP 0.80
한 시즌 최저 WHIP 0.538
한 시즌 최다 완봉승 8회
통산 최다 완봉승 29회
통산 최고 승률 0.785
통산 최저 HR/9[3] 0.15개
통산 최저 자책점 220점
통산 최소 피볼넷 342개
통산 최다 방어율왕 8회
최다 이닝 무피홈런 319이닝
최다 이닝 무실점 49⅓이닝[4]
통산 포스트시즌 최다 탈삼진 103개
통산 한국시리즈 최다 탈삼진 79개
특정팀 상대 최다 연승 20연승 롯데[5][6]
통산 최다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 6회
}}} ||
선동열의 역대 등번호 / 감독직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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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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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 현재
-1 {{{#050403 1대}}}
주성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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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50403 2대}}}
김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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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50403 3대}}}
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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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50403 4대}}}
김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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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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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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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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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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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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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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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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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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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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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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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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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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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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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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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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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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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엽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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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조창수
-1 {{{#050403 '''2대'''}}}
김응용
(198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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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2001~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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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유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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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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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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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환
(2006~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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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현
(200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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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201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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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2015~2019)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감독대행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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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8번
장진범(1983~1984) 선동열(1985~1995) 영구결번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2번
결번 선동열(2004) 조경현(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0번
결번 선동열(2005~2010) 신희섭(2011)
KIA 타이거즈 등번호 90번
변강득(2011) 선동열(2012~2014) 김선진(2015~ )
}}} ||
파일:선동열.jpg
{{{#C8AB37 KIA 타이거즈 No.18}}}
선동열 (宣銅烈 / Sun Dong-Yol[7])
생년월일 1963년 1월 10일 ([age(1963-01-10)]세)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출신지 광주광역시 광산구[8]
신체 키 184cm, 몸무게 97kg
학력 송정동초-무등중-광주일고-고려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5년 1차지명 (해태 타이거즈)
소속팀 한국화장품 야구단 (1985)
해태 타이거즈 (1985~1995)
주니치 드래곤즈 (1996~1999)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2004)[9]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05~2010)
KIA 타이거즈 감독 (2012~2014)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2006[10], 2015[11], 2017[12])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7[13], 2017~2018)
응원가 Jimmy Davis & Charles Mitchell
- 'You are my sunshine'[14][15]
종교 천주교(세례명: 타데오)[16]

1. 개요2. 소개3. 선수 시절4. 지도자 시절5. 플레이 스타일
5.1. 선동열 효과
6. 각종 기록들7. 선동열과 최동원8. 기록 관련 여담
8.1. 선발투수 논란8.2. 시대 논란
9. 대중문화10.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투수, 前 삼성 라이온즈KIA 타이거즈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전임 감독. 이미지는 매우 상반되긴 하지만, 선수 시절, 감독 시절에 역대급 임팩트를 남긴 사람이다.

2. 소개

현역 시절 별명은 무등산 폭격기, 국보급 투수, 멍게(피부가 안좋아서), 선뚱(야구게임 슬러거의 선동열이 뚱캐라서) 등이 있다. 주니치 시절엔 나고야의 태양(성이 'Sun'이라서), 호빵맨(앙팡만)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17]

팀에 선동열 하나 있으면 우승 전력으로 평가받았다. 아니 우승이 당연시 되었다. 주요 개인기록은 통산방어율 1.20으로 0점대 방어율만 3차례 기록하였다. 타이틀로는 리그 MVP 3회, 골든글러브 6회, 트리플 크라운 4회, 방어율왕 8회[18], 다승왕 4회 등의 역대급 기록과 타이틀들을 보유하였고 당연히 모두 역대 최고기록이다. 1980~1990년대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에서 에이스로서 6차례 우승(통합 우승은 3번)에 기여하였다. 주요 개인기록도 무시무시한 수준이지만 선동열만이 갖고있는 자잘한 기록들 역시 무시무시한 수준인데 한 경기 최다 탈삼진 (18개)[19], 한 시즌 최다 완봉승 (8회), 최다투구이닝 무피홈런 (319이닝), 특정팀 상대 최다연승 (롯데상대 20연승) 등 현역시절 그의 커리어에는 이런 무섭기까지 한 기록들이 잔뜩 쌓여있다. 34살의 나이에 KBO 출신으로는 최초로 해외리그(NPB)에 진출하여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는데 첫 해는 고전했지만 이후 세이브 1위(구원 2위)까지 기록하는 등 리그 최고수준의 마무리로 활약하다 은퇴했다. 선동열의 성공은 이후 이종범, 이상훈, 구대성, 이승엽 등 국내 탑선수들이 일본에 진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처럼 선수시절 그의 기록은 당대 최고이자 역대 최고. 간단하게 그야말로 Untouchable. 그러나 감독 시절 성적은 '스타 플레이어는 명 감독이 되기 어렵다' 말의 대표 주자로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2004년 삼성의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로[20] 취임하며 김응용 삼성 감독 아래서 감독 수업을 받았고, 이듬해 2005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취임하여 우승 2회,[21] 2위 1회, 4위 2회, 5위 1회를 기록했다. 일반적인 팀이라면 나쁜 성적은 아니나 감독으로 부임하는 동안 계속되는 성적하락, 주축 선수들에 대한 혹사 논란,[22] 레전드 홀대[23] 등으로 재임기간 동안 많은 팬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선수시절 친정팀인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영입되었으나 5위 1회, 8위 2회를 기록하며 좋지 못한 성적으로 팀을 암흑기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레전드(이종범) 은퇴종용, 주축선수들에 대한 혹사 논란 등은 다시 반복되었으며 삼성에서 받던 비판이 다시 KIA에서도 이어지며 결국 불명예스럽게 감독직에서 퇴장하였다.

3. 선수 시절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선동열/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지도자 시절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선동열/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플레이 스타일

파일:SUN_pom.gif
선동열의 투구폼

기본적으로는 우완 정통파 파이어볼러 투수로, 특이하게 허리를 이용해 공을 던지는 타입. 허리를 이용한 피칭은 선동열이 독보적 존재로 롱런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한데, 허리를 이용해 던지니 다른 투수들보다 어깨를 덜 쓰게 되고, 이에 더불어 150km대의 당대 역대급 광속구까지 뿌릴 수 있었던 것이다.[24] 선동열이 이런 피칭을 구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체가 좋았기 때문이다.

선동열의 투구폼은 하체를 이용해 릴리즈 포인트를 최대한 앞으로 끌고 나오는 타입으로, 공을 끌어올려 던지기까지의 과정에서 강한 허리 힘을 이용해 공에 체중을 싣는 형태다.[25] 또한 릴리즈 포인트가 다른 투수들보다 앞에 있었던 덕분에 타자들이 체감하는 구속은 더 빨랐고, 이 때문에 선동열은 최고의 투수로 군림했다. 하지만 허리를 많이 쓰는 투구폼으로 혹사를 당하다 보니 특이하게도 선동열은 항상 어깨부상보다는 허리부상을 달고 다니곤 했다.[26]

당대에는 피지컬, 제구력, 주자견제능력, 멘탈과 센스 등등 투수가 갖춰야 할 여러 가지를 다 갖춘 완전체 투수로 평가받았으며 이는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파일:SUN_Silder.gif 파일:SUN_slurve.gif
선동열의 슬라이더[27] 선동열의 슬러브

구종 면에 있어서는 포심이 주에 슬라이더를 가미하는 전형적인 투 피치 투수로, 보통 투 피치 투수는 선발로 살아남기 힘들지만 선동열의 경우 압도적인 피지컬과 뛰어난 구종 덕분에 선발로 오랫동안 살아남은 케이스이다. 특히 슬라이더는 KBO 역대 최고의 마구로 꼽힌다.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기본적으로는 종슬라이더로, 여기서 선동열은 커브를 가미해 슬러브를 던지기도 했고, 커터성 슬라이더를 던지거나 하는 등 다양한 슬라이더를 구사했으며, 구사하는 슬라이더에 따라 구속이 120km에서 130km을 넘나들곤 했다. 최모 전 심판은 선동열의 슬라이더를 "컷패스트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선동열은 슬라이더 외에 다른 변화구를 던지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손가락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선동열의 컴플렉스기도 했다. 선동열은 손가락이 길었던 이강철이나 정민철을 부러워했으며, 이광우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 사이를 찢는 수술 또한 고려했을 정도로 손가락 컴플렉스가 심했다. 이외에도 릴리즈 포인트를 줄이는 특유의 투구폼 역시 변화구 구사에 독이 되었는데, 손목을 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28] 선동열이 장착 시도한 변화구 중 체인지업은 딱 평균 수준이었고, 포크볼은 그 이하였다. 때문에 이들 변화구는 가끔 다른 구종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커브에 대해서는 가끔이나마 던졌으며 수준급이었다는 한대화의 증언이 있으며 NPB 시절 KBS 중계에서 커브성 공을 구사하는 장면이 나간 적이 있다. 커브를 잘 구사하지 않은 것은 폼이 달라지는 차이가 컸기 때문으로 추정.
파일:SUN_curve?.gif
선동열의 커브

최고 구속은 대학시절이던 1982년 9월 15일 기록한 156km/h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일본 측 기록으로 존재하나 정작 당시 신문에서는 최고 구속은 153km이라 보도하였기 때문에 그 진위가 의심된다. KBO에서는 1995년 7월 25일 기록한 155km/h이 최고 구속이며, 선발 경기에서는 1991년 6월 14일 기록한 154km/h이 최고 구속이다. NPB에서는 1997년 7월 6일 기록한 154km/h이 최고 구속이다. 평속의 경우 선발 시절에는 140km/h 초반, 마무리 시절에는 140km/h 중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최고구속에 대해 논란이 있긴 하나 1990년대 들어서야 스피드건이 보편화된 고로 이전의 구속 자료는 찾기 어려우며, 있다 해도 95년 찍은 최고구속과 비슷할 것으로 추측된다.

신기하게 특정 선수들에게 약한 편이었다. 선동열이 홈런을 맞아도 평소 잘 치는 사람에게 맞은 경우가 부지기수고... 이런 선동열 킬러로는 유승안, 김동기 등이 있었다.

5.1. 선동열 효과

최강의 투수로 군림했던 만큼, 선동열은 존재 하나만으로 타자들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존재였다. 선동열이 나오는 경기는 대체로 포기하는 분위기였다고. 일례로 빙그레 이글스가 선동열을 상대하게 되었을 때 당시 최고참이던 유승안은 자포자기하면서 "오늘 못 이길 게 뻔한데 만약 이걸 이기면 선수단 전원에게 10만원씩 돌리겠다"고 했다.[29]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어도 타자들은 선동열 나오기 전에 한 점이라도 더 내기 위해 스윙을 서두르거나 도루를 일찍 시도했고, 번번히 타이밍을 놓쳐 삼진당하거나 견제사당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존재감만으로 상대 타자들을 흐트러뜨린 투수는 선동열 외에는 아직까지 전무후무하며, 그나마 근접하게는 오승환 정도가 있었다.

해태 김응용 감독은 이를 잘 이용하곤 했으며, 그게 큰 효과를 보인 것이 1988년 한국시리즈 6차전이다. 5회초 해태가 간신히 점수를 내자 김응용 감독은 손가락 부상으로 나갈 수 없던 선동열을 불펜에서 몸을 풀게 했다. 결국 상대팀이었던 빙그레는 1점밖에 못 내고 완패.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부상당한 선동열이 빙그레를 달아나게 했다고 할 정도였다.[30]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동열 효과'는 일본 진출 첫해 선동열의 엄청난 부진에 영향을 주었다. 선동열이 누군지 모르는데 국내에서처럼 심리적으로 억눌릴 리가 있나. 이를 두고 당시 하일성 KBS 해설은 선동열이 안일해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선동열 효과 때문에 타자들이 알아서 아웃카운트를 적립하고 선동열을 분석할 엄두조차 못 내는 이런 환경 속에서 항상 최고일 수밖에 없는 선동열은 자연스레 나태해졌고, 이 때문에 일본에 진출해서 그렇게 털렸다는 것. 또 FA제도가 없던 시절이라 아무리 잘해도 구단이 놓아주지 않으니 해외진출을 위한 체계적인 준비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선동열은 1996시즌이 끝나고 3천 구 투구와 폼 수정 등의 강훈련을 통해 비록 한국에서만큼 극강의 위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리그에서 알아주는 마무리로 도약하는 데 성공한다.[31]

6. 각종 기록들

파일:/image/382/2012/07/20/47927482.2_1_20120720204306.jpg
2012년 7월 20일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매치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이 때 TV에 소개된 투수 선동열의 통산기록이 새삼스럽게 화제가 되었다. 아니 누구어디에서 한 해에만 34개나 맞던데 거기가 문젠가.
  • 한국프로야구 입상내역
    • 평균자책점 1위 8번 85~91년 7년 연속 포함
    • 다승 1위 4번 89~91 3년연속 포함
    • 승률 1위 4번 89~91 3년연속 포함
    • 삼진 1위 5번 88~91 4년연속 포함
    • 구원 1위 2회 (93, 95)
    • 골든글러브 6회 수상 (86, 88~91, 93 투수부분 최다 수상자)
    • MVP 3회 수상 (86, 89~90)
    • 투수 트리플 크라운 3회 달성(89~91 방어율, 다승, 삼진, 승률 모두 1위, 86년의 경우 다승, 방어율, 삼진은 1위였으나 승률이 2위였고 당시의 트리플 크라운은 삼진이 아닌 승률이 포함된 의미였다. 오늘날의 의미로 보자면 트리플 크라운을 4회 달성하였다. 참고로 투수 트리플 크라운은 선동열을 제외하면 류현진윤석민이 단 1회 달성했을 뿐이다.) 승률 2위가 된 이유는 이 시즌 승률 1위는 최일언. 김형석이 최동원을 상대로 마지막 경기에서 3루타를 쳐내며 최일언이 패전을 면했고, 승률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다만 이때는 탈삼진 부문이 없었다.
    • 노히트 노런 1989년 7월 6일 대 삼성전에 달성
    • 2005, 2006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한국시리즈 우승 2회 달성.
  • 보유 기록들(역대 10위 내 기록만 기록)
    • 역대 단일 시즌 평균 자책점 1, 2, 3, 5, 6, 7, 9위
    • 역대 단일 시즌 R/9(9이닝당 실점) 1, 2, 4, 5, 6, 7, 8위
    • 역대 단일 시즌 WHIP(이닝당 출루 허용) 1, 3, 4, 5, 6, 7, 8위
    • 역대 단일 시즌 K/9(9이닝당 탈삼진) 2, 3, 4, 9위
    • 역대 단일 시즌 K/BB(볼넷 대 삼진 비율) 1, 2, 5, 6위
    • 역대 단일 시즌 OAVG(피안타율) 1, 2, 5, 6, 9위
    • 역대 단일 시즌 이닝 5위
    • 역대 단일 시즌 탈삼진 5, 6위
    • 역대 단일 시즌 다승 6, 9, 10위

10위권내의 기록이다. 50위 권으로 확대되면 더 많은 선동열의 이름을 볼 수 있다.

7. 선동열과 최동원

'선동열과 최동원 중 누가 나은가' 하는 질문은 30년을 넘게 이어져온 한국야구 최고의 논쟁 떡밥이다.

프로야구 출범이후의 성적으로만 비교하면 누적으로나 비율로나 선동열이 최동원을 압도하는 것이 사실이다. 일단 비율스탯으로 통산 방어율이 2배 차이이며, 누적스탯 역시 선수생활이 길었던 선동열이 크게 앞선다. 스탯을 처음 접한 젊은 팬들은 '응? 이 둘이 라이벌이라고?'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 최동원의 1970-80년대 등판일지를 보고 나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다.[32]

대체로 선과 최를 실제로 보아온 1980년대 당시의 야구인들은 최동원의 카리스마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박혀있지만, 그 이후의 세대에서는 비교거리가 기록 밖에 없다보니 아무래도 최고 투수 하면 선동열에 대한 인지도가 우세하다.그러나 최동원은 바로 그 선동열이 존경한 우상이었으며, 아마시절부터 숱한 혹사로 어깨가 망가진 투수를 늦게 생긴 프로에서의 스탯만으로 평가절하 하는것은 가당치 않다. 선동열과 최동원 본인들부터가 라이벌인 동시에 서로를 크게 존경하는 사이이므로, 누구 한 명을 띄우기 위해 반대편을 까내리는 것은 선동열과 최동원 두 사람 모두를 욕보이는 일이다. 이는 시대가 다른 박찬호나 류현진을 끌어와서 한국야구 최고투수를 논할 때도 마찬가지.

대결과 관련된 항목은 선동열 VS 최동원 항목 참조.

8. 기록 관련 여담

8.1. 선발투수 논란

에이스 투수를 선발등판으로 고정시킨다는 현대야구의 상식과는 달리 선동열은 선발보다는 계투 등판이 더 많다. 이를 가지고 계투로 낸 성적이므로 순수 선발스탯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계투가 선발보다 가치가 낮다고 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소화 이닝이 선발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이다. 즉,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더라도 소화이닝이 적다보니 어지간해서 오래 던진 선발투수들보다 공헌도가 떨어지는게 가치분석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선동열은 전업마무리로 뛰기 전까지는 대부분 시즌 규정이닝을 채웠으며, 1985년부터 1995년까지 등판 경기수 2위, 이닝 3위로 상위권에 있다. 등판일지를 보면 현대야구 기준으로 보면 오마이숄더!를 외칠만한 등판기록을 볼 수 있다. 팀내 최고 투수를 마구잡이로 등판시키면 혹사논란이 나오는게 일반적인 상식인데(1980년대에는 보편적인 기용법이었지만) 선동열의 경우에는 기록 폄하의 논리로 작용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최동원처럼 선발로 나오면서 불펜급 등판간격을 기록한 경우는 물론 예외. 애초에 국내에서 선발투수 불펜투수 마무리 투수 세분화한 것은 1990년대 중반 LG 이광환 감독이 최초이고, 다른 감독들의 반응은 "왜 잘 던지는 투수를 4일씩이나 썩혀??" 였고 1994년 LG가 우승하면서 조금씩 다른 팀에도 퍼진 것이다.

또한 얼마 안 되는 선발 출장 기록에도 불구하고 한국야구 통산 최다 완봉 기록은 선동열이 제일 많다. 프로 6년차까지인 1991년까지 선동열은 29번의 완봉승을 기록했고 밑에 있는 공동 2위는 완봉 20개로, 이를 달성한 사람은 100완투를 한 윤학길과 300경기 넘게 선발등판한 정민철이다.

현재의 시각으론 선동열이 선발로 출장한 횟수가 적어 선동열의 전체 커리어상 포지션을 스윙맨이나 구원투수로 볼 수는 있겠지만, 1990년대 마무리 투수는 현재의 1이닝이 마무리가 아니었고 7회 심하면 6회에도 올라와서 경기를 책임지는 중무리였다. 임창용의 경우만 중무리로 알지만하지만 임창용은 마무리인데도 3회부터 나온적도 있다 ㄷㄷ 원조는 선동열이었다. 1993년에는 시즌 후반 한경기를 선발로 뛰고 나머지 경기는 모두 불펜으로 나왔는데 정규 이닝을 채울 정도였다. 또한 선발로 등판했을 때는 최고의 선발로 활약했으므로 선동열이 선발로서 부족하다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또한 선동열의 커리어 하이인 1986년의 경우에는 선발등판 횟수가 가장 많았던 시즌이라는 점을 생각해도 마구잡이 등판이 오히려 악영향으로 작용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이 부분은 선동열뿐 아닌 1980년대 투수 대부분에게 해당한다. 선동열이 '이닝 수가 적고 불펜으로 뛰며 관리받은 투수'라는 인식이 있는 것은, 오직 그의 비교대상이 최동원이기 때문이다. 최동원이 비정상적으로 혹사당한 것이지 선동열이 적게 던진 것이 결코 아니며, 최와 선의 선수생활 기간과 비율 및 누적스탯 등을 비교해보아도 선동열은 관리(?)[33]받은 값을 충분히 해내고도 남았다.

또한 이닝과 실점을 함께 평가하는 종합가치누적평가 스탯이라 할 수 있는 WAR스탯에서도 선동열이 통산, 단일시즌 모두 1위이다. 단일시즌 투수로 가장 높게 평가되는 장명부의 1983 시즌보다 1986년의 선동열이 높은 WAR을 기록하는 것에 대한 논쟁이 이미 여러차례 있어왔는데, 사실 한국의 세이버매트릭스 커뮤니티 내에서 이에 대한 논쟁은 이미 지나간 떡밥에 가깝다[34].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장명부의 이닝과 자책점에서 선동열의 이닝과 자책점의 차 만큼의 이닝과 자책점을 기록한 가상의 투수A가 대체 선수 미만의 투수이기 때문. 다시 말해 선동열의 WAR+기여도가 음수인 가상의 투수의 WAR=장명부의 WAR 이다.

8.2. 시대 논란

간단하게 말해 선동열이 활약한 시대는 야구 수준이 매우 뒤떨어졌기에 그의 기록에는 거품이 끼었다는 주장이다. 사실 그 시절에 태어나 자신의 시대에 전설이 된 선동열의 기록을 이런식으로 평가절하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이런 좀 억지스런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전형적인 빠가 까를 낳은 케이스이다. 열성적인 팬들이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최동원, 김시진 등과 비교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대 최고의 한국인 투수로 꼽히는 박찬호[35]와 현재 한국인 최고 투수인 류현진과 비교하며 그들이 선동열만 못하다는 주장을 해대는 탓에 이런 논쟁이 생겨난 것이다. 류현진은 좀 다른게 국내야구팬들은 기록상으로 비교해도 조정방어율을 감안하면 선의 근소우세, 미국 진출하기 전엔 엠팍을 비롯한 야구 커뮤니티에서 선과 류를 비교하면 선의 약간 우세였고 미국진출 후인 현재는 평가가 달라진 것... 한국 야구 수준을 높게 보지 않았던 엠엘비 팬들이 류현진 포스팅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고 트리플A 수준급으로 쳐주는 NPB[36]에서 어느 정도 성적을 찍어준 선동열을 좀더 높이 평가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선동열을 높게 쳐주던 논거가 류현진이 상위리그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면서 평가가 완전히 뒤집혔다.

선동열이 KBO 역사에 남을 방어율을 기록했던 시절, 그에 가려 방어율 타이틀을 따지는 못했지만 방어율 순위 수위권을 기록했던 다른 투수들의 성적도 2000년대 중후반의 방어율 1위 투수들보다 훨씬 뛰어났던 점을 생각하면 선동열의 전설적인 0.대 방어율이 이제와서 조금은 현실감 있어 보이는게 사실이긴 하다. 1986년 방어율 순위는1위 선동열: 0.99 2위 최동원: 1.55 3위 최일언: 1.58 4위 김용수: 1.60 5위 김건우: 1.80 6위 장호연: 1.90 이었다. 그러나 스탯티즈 기준 1986 선동열 시즌은 1983 장명부 1986 최동원 1994 이종범 2003 심정수 2015 테임즈를 제치고 역대 WAR 최고 시즌을 찍었기에 압도적이었다는걸 부인하기 어렵다. 108여경기 시즌에서 262이닝 던지고 0.99 찍은것은 투고타저 시즌이라하더라도 압도적인것은 맞다.

그리고 선동열은 게으른 천재라는 점이다. 당시 선동열은 등판전날까지 밤새 술먹고도 완봉을 할 정도로 양민학살을 하던 투수였다. 그가 뛰었던 85~95년까지 투수 MVP는 선동열뿐이다. 그만큼 선동열에게 동기부여를 줄 수 있는 경쟁자도 마땅히 없었기 때문에 선동열이 더 노력할 이유가 없었다.[37] 그리고 92년 1시즌을 망치자 동기부여를 얻어서 93년에 엄청난 성적을 거둔 점과 NPB로 진출해서 첫시즌을 망하고 나서 늦은 나이에 엄청난 훈련을 했는데 김응용 감독이 "한국에서 저렇게 훈련했으면 30승은 했을거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리고 2번째 시즌에 3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도 일본 최고의 마무리로 2시즌동안 활약했다. 즉 시대가 달라졌다면 선동열은 게으른 천재가 아닌 노력하는 천재가 되었을 것이고 1점대 통산방어율은 불가능하더라도 최고의 선수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동열이 외국인 타자를 접해보지 않았다고 폄하 받는데 선동열은 국내에서 외국인 타자들을 상대한 적은 없지만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외국인 영입이 무제한[38]인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그냥 맹목적인 까에 가깝다. 1998년 첫 KBO 외국인 선수가 한국에 왔을 때 NPB에서 1996년엔 털렸지만 1997~1999년에는 양호한 활약을 했고 양리그의 용병 수준차이는 말하면 입아픈 정도.[39]

역사가 유구한 메이저리그에서도 19세기 스핏볼 시절 스탯까지 인정하고 2차대전 이전 투수 월터 존슨을 역대 최고 투수로 뽑는데 그 시절 수준드립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사이 영의 100년 전의 511승도 현대 야구에선 나오기 불가능하지만 기록은 기록으로 존중해 준다. 다만 KBO 한정이라면 시대보정을 감안해도 가장 압도적인 선수임은 분명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적 없는 선동열이 역대 최고 한국인 투수 반열로 꼽히기엔 무리가 많다. 간혹 만약을 가정해서 특히 1997년도에서의 NPB -> MLB로 조정해서 계산한 WAR의 수치도 2.6이었기 때문에 MLB에서 통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선동열이 아예 메이저리그에서 뛰어 본 적도 없는 상황에서 선동열의 메이저리그 활약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야만없.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동열의 기록을 폄하하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데는, 선동열이 지도자가 된 후 삼성과 기아를 말아먹고 결국 자카르타 참사라는 결과가 나오면서 이에 분노한 야구팬들이 선수 시절의 선동열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이유도 있다. 축구의 홍 모씨와 비슷한 경우.

9. 대중문화

한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로 알려져서 대중문화의 등장인물로 나오는 일이 좀 있다.
  • 2012년 영화 퍼펙트 게임에는 양동근이 선동열 역을 맡았다.
  • 2005년 영화 스카우트에서는 선동열이 사건의 주된 모티브가 되며, 등장신은 거의 없다. 거의 유일한 등장신으로는 마지막에 갈비 15인분을 먹는 장면 뿐... 한지붕 세가족의 순돌이 역의 아역배우 출신 이건주가 선동열 역을 맡았다.

10. 여담

  • 2010년대에도 130km/h대의 공을 던질 수 있다고 한다. 삼성/기아 계투진이 무너지면 우스갯소리로 차라리 선동열이 올라오라고 할 때도 있다. 실제로 은퇴한 후 몇 년이 지나고 감독과 코치들이 특별전을 펼쳤을 때, 선동열이 마무리 투수로 등판해서 하체는 쓰지않고 상체만 쓰면서도 130km/h대의 직구를 꽂아넣는가 하면 전성기 때와 흡사한 슬라이더를 보여 주기도 했다. 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투수 제이미 모이어같은 경우 선동열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130km/h대 공으로 현역 선발 투수로 커리어를 지속했던걸 보면...
  • 2006년도에 2년차인 오승환은 아직 자신과 비교하려면 멀었다는 발언을 한적이 있다. 그 이유는 자기는 16m 지점에서 공을 뿌렸는데 오승환은 말 그대로 18.44m 지점에서 공을 놓는다고.선동열 감독, "오승환 나보다 못해!" 실제로 오승환이 18.44에서 놓는건 아니고 더 배워야 한다는말. 공 끝이 좋다는 칭찬도 같이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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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올스타전 식전행사로 열린 25년 올스타 vs 연예인야구단과의 경기에서 1회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하체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던지면서도 130km/h가 넘는 공을 던졌다. 결과는 1이닝동안 이휘재, 윤종신, 허준호를 상대로 각각 삼진, 파울플라이, 삼진을 얻어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최고구속은 134km/h 허준호 삼진잡는 장면. 이 2006년 경기는 준비를 거의 하지 않고 던져서 저런 공이 나온 것이다. 몇 주간 준비를 하고 나왔던 2005년 올드스타전에서는 경기 전 구속 측정 이벤트에서 139km/h로 2위를, 경기를 마무리하러 나와서는 무려 140km/h를 던졌는데, 다음날 올스타전 방송인터뷰에서 손민한권오준은 전날 경기를 보고 자신들에게 한숨이 나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파일:attachment/b0051210_4cbd91159fa09.jpg
  • 이름을 표기할 때 선동렬(宣銅烈)과 선동열 양쪽을 왔다갔다하지만, 한국어 문법상 사람이름에서는 두음법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고[40] 본인의 습관에 따라 결정하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문법적 원칙은 선동렬이 맞지만 선동열이라고 해도 문법상 전혀 하자가 없다. 따라서 본인이 어릴 때부터 선동열로 사용해오고 KBO에서도 '선동열'이라는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있으므로 선동열이라고 적어야 될 것이다. 이는 김응용도 마찬가지.
  • 소싯적에 말술을 자랑하는 굉장한 술꾼이었다. 특히 프로에 들어와서는, 예컨대 상대 선발이던 MBC 청룡정삼흠(고대 시절 둘도 없는 절친)을 경기 전날 저녁에 불러내서 다음 날 새벽까지 부어라 마셔라 해놓고, 그 날 저녁 그 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운드에 올라 사이좋게 무실점의 투수전을 이어갔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근데 이 일화는 두 선수가 대단하다긴 보다는 당시 프로야구 수준이 얼마나 낮았다는것을 보여준다.
  • 그리고 학창시절 태릉선수촌에서 친분을 쌓은 농구계의 대표 말술 농구선수 허재농구대잔치 일정 차 광주로 내려왔을 때, 경기를 마친 허재를 불러내어 밤새도록 술을 펐다고 한다. 물론 계산은 선동열이 했고... 술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허재도 3차, 4차까지 가는 강행군에 기진맥진 하며 선동열에게 끌려다녀야 했고, 후에 허재는 처음으로 '술 먹다 죽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아득해졌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차에 야밤이 되어 광주시내에 문을 연 술집이 눈에 띄지않게 되자, 허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선동열이 어떤 주점 앞에서 내려진 셔터를 두들기며 "나 선동열이요. 문좀 열어 주소" 하자, 주인이 셔터를 벌컥 올리고 반색을 하며 선동열과 허재를 안으로 들였다고(...). 결국 견디지 못한 허재는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바로 숙소로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이렇게 실력과 주량으로 리그를 평정했던 두 종목의 대표가 붙은 전설의 매치업은 선동열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전날 그렇게까지 마신 선동열이 걱정이 되어 신문을 확인해보니 "해태 선동열, 오늘도 완봉승!" 이란 기사가 떡 하고 올라왔다고 한다. 다만 완봉승에 대해선 허재가 무릎팍도사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다(말이 안되는게, 농구대잔치는 겨울에 하는데 프로야구 시즌과 겹칠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 천하의 주당[41]인 선동열이었지만, 마실 술 다 마시고도 몸 관리만큼은 철저했고 시합에서도 꾸준히 제 실력을 보여주었기에, 철권통치의 아이콘 김응용 감독도 선동열에겐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김응용은 야구만 잘 한다면 그 선수의 사생활에 관해선 절대로 터치하지 않았다. 반면 실력은 그저 그런 선수가 일탈을 저지르면 말 그대로 헬게이트를 여는 권능을 보여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양승호.[42][43]
  • 다만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 간이 나빠졌다는 진단을 받았고, 이후 그동안 즐겼던 술과 담배를 모두 끊었다고 한다. 이후로는 건강에 신경쓰면서 개인운동도 많이 하고 있다고.
  • 몸관리 부분을 추가하자면, 지금은 고인인 아버지 선판규씨[44]가 선동열이 어릴 때 부터 몸에 좋다는 것은 천리 밖에서라도 구해와 먹였다고. 이나 개구리 정도는 양반이었고, 심지어 오소리생피까지 들이킬 정도였다. 잘못 섭취했다간 기생충 크리 요즘 생각하면 정말 그런걸 먹는다고 몸이 좋아지는지는 의문.
  • 1980년대 전성기 시절 광고를 찍었는데, 선동열은 당시 안국약품[45]이 생산하고 판매한 '투수코친'이라는 약품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선동열이 약품에 효능에 대해서 말하는데, 선동열의 목소리가 아니라[46] 성우 한상덕이 더빙한 목소리다. 이 더빙은 디시인사이드에서 합성으로 가끔 사용되기도 했다.
  • 한국프로야구에서 굵직한 기록과 사건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름이 유명하긴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성씨( 씨)이기 때문에 선동열과 관련된 기사에서 헤드라인을 뽑을 때 그의 이름 대신 성씨를 영어로 바꾼 'SUN'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야구 아는 사람은 SUN만 봐도 다 선동열로 알아 듣는다.
  • 선동열이라는 이름은 대학교에서도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선동열 학점. 선동열 학점이라 함은 바로 선동열의 최전성기 시절의 방어율이 학점으로 나오는 현상이다. 평균적으로 1.3 정도면 선동열 학점 확정. 2018년 현재는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커쇼급 학점이라고 하는듯.
  •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많은 경기에서 오심이 많이 나와 선동열의 항의가 빈번했다. 그때 당시엔 비디오판독제도가 활성화 되지 않았고 선동열의 항의부분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카메라로 애매한 판정을 확인할 때 덕아웃에서 본 선동열의 눈이 경기를 바로 앞에서 판단하는 심판보다 정확한 판단을 했다. 다시 프로야구로 돌아오시면 심판으로 돌아오셔도 괜찮으실꺼 같다..
  • 파일:/image/001/2015/01/30/PYH2015013003070006100_P2_99_20150130131804.jpg
    아들이 특전사에서 부사관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2015년 1월 임관식 때 옷깃 각도를 잡아주는 계급장을 달아주는 장면.
  • 일본 시절 굉장히 많이 노력했던 걸로 유명한데 일본어 공부 역시 열심히 했던 걸로 유명하다. 그 결과 현지인 못지않게 일본어 실력이 상당히 출중하다. 그리고 2017 WBC 대회 때 일본 기자들과 인터뷰했는데 20년이 지나도 여전한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보여준다. #
  • 흑역사 혹은 웃긴 추억이 있다. 이종범, 양수경Two&One투애니원 아니다이라는 그룹을 결성한 적이 있었다.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해태가 하도 연봉을 짜게 줘서 이거라도 해본거다. 결과는 처참. 앨범이 거의 안팔렸다.

  • 패션센스가 특이한 편인데 위 사진들에서도 보이듯 바지를 최대한 끌어올려 입는 것을 좋아한다. 다리 길어 보이라고 바지를 끌어올려 입는 것인데, 어째 나이가 들수록 더 끌어올려 입는다. 사실 선동열 젊은 시절이던 80년대만 해도 바지 안에 옷 집어넣고 바지 끌어올려 입는 건 매우 흔한 패션이었지만 유행이 바뀌어 자연스러운 신체라인을 추구하게 된 2010년대 들어서는 매우 촌스러운 패션이 되어버린 것. 더군다나 얼굴이 큰 편이라 작은 상체가 도드라져 보여 더 부자연스럽다. 여튼 야구팬들 사이에선 바지 팽팽하게 끌어올려 입는 80년대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패션감각은 공 던지는 솜씨와는 다르게 빵점이다.
  • 세가의 다이너마이트 베이스볼 '97 오프닝에서 타자 배트를 몇 개나 파괴하는 것(…)으로 나온다. 끝에는 홈런을 맞지만.[47]

[1] 1986, 1987, 1993년(규정이닝 기준)[2] 13이닝 기록으로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은 류현진의 17개이다.[3] 9이닝당 피홈런 개수[4] 여기서 말하는건 선발+구원이닝이다. 1986년 8월부터 1987년 4월까지. 2위기록도 1995년에 46⅓이닝으로 선동열이 보유. 선발무실점 기록은 2012년 서재응이 깼다.[5] 1988. 8.11~1995. 9.26[6] 참고로 이 기록은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고, 거기서 은퇴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즉, 롯데가 선동열에게 패전을 안겨서 깨진 기록은 아닌 셈.[7] Sun Dong-Yeol라고 알려져있는데 WBSC의 공식 등록명은 Sun Dong-Yol이다.[8] 광산구 송정동 출신이다. 출생 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산군이었다.[9] 사실 수석코치로 오기 전인 2001~2003 시즌은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아, 스프링캠프에서 인스트럭터로 선수들을 지도한 적이 있다.[10]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11] 2015 WBSC 프리미어 12[12]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13]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14] You are my sunshine! 광주의 태양! 기아의 선동열! 워어어어~ You are my sunshine! 광주의 태양! 기아의 선동열 각동님 감독님~[15] 세상에… 감독에게도 전용 응원가(?)가 있다! 승장 감독 인터뷰 시에 관중석에서 응원가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KIA 한정. 삼성 시절에는 그런 거 없었다. 이 곡은 오정복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 잠시 쓴 적이 있었으며, 안양 KGC인삼공사 농구단에서 공격시 응원가로도 쓴다.[16] 대구 대교구 100주년 기념 성당의 건립에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참고로 이 성당은 범어대성당으로 불리며, 대구대교구의 공동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대구에 사는 가톨릭 신자라면, 진심으로 감사할 일.[17] '나고야의 태양'은 국내 언론들이 갖다붙인 국내한정 별명에 가깝고 일본에서의 주 별명은 앙팡만.[18] 11시즌 중 그가 규정이닝을 채운 8시즌 모두 방어율 1위였다. 그야말로 마운드의 지배자.[19] 연장 기록까지 포함이며 한 경기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은 류현진이 2010시즌에 17개의 삼진을 잡으면서 가지고 있다[20] 사실상 투수진 운영 전권은 선동열이 하게 되었다.[21] 선동열의 감독 실적을 저평가하는 사람들은 이 때 우승은 삼성이라 가능했다고 한다.[22] 대표적으로 이 시기 삼성의 주축 투수진이었던 배영수, 권오준, 권혁 등은 선동열 감독 시절 한 번씩 수술대에 올랐다.[23] 양준혁, 김한수의 은퇴종용과 이승엽 복귀 거부 등. 이외에도 박한이, 임창용을 대놓고 홀대하는 등의 행동을 저질렀다.[24] 실제 선동열은 이런 투구폼을 바탕으로 하루 3천 구 투구 등의 무지막지한 훈련을 했음에도 말년까지 140~150킬로대의 강속구를 던졌다. 만약 선동열이 다른 투수들처럼 어깨로 던졌다면, 선동열은 10년여를 장기집권하고 일본까지 진출해 최강 마무리로 군림한 올타임 레전드가 아닌, 고작 몇 년 에이스로 군림하다 일찍 쇠락해 30대 초반 은퇴하는 당대 에이스의 전형적인 테크트리를 탔을 것이다.[25] 선동열이 감독 시절 오승환이 자기보다 멀었다고 말한 것이나, 박찬호에게 팔각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의 행동은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에서 기인한 게 크다.[26] 물론 어깨부상도 당한 적은 있다. 1992년 시즌 걸렸던 건초염이라던가.[27] 한일 슈퍼게임에서 찍힌 것이다.[28] 때문에 선동열은 슬라이더를 손목을 비틀지 않고 던졌다.[29] 문제는 그 경기를 이겼다. 그것도 노히트 노런으로. 빙그레의 이동석(야구선수)이 무사사구 노히트 노런으로 완벽히 해태를 틀어막아버린 것이다. 이 때 실없는 사람으로 몰릴 뻔했던 유승안은 결국 상조회에 10만원을 내는 것으로 퉁쳤다고 한다.[30] 사실 이런 행동은 선동열의 커리어에 손해를 가져다 주었다. 경기에 중간 투입되지 않아도 불펜에서 자주 몸을 풀었는데, 불펜에서 몸을 푸는 것만으로도 그만큼 쉬어야 하기 때문. 때문에 선발 등판의 기회는 또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이는 선동열의 커리어에서 선발 등판율보다 계투 등판율이 최동원, 김시진 등에 비해 절대적으로 높은 것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닝소화가 매우 적다고 국보급 투수가 맞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의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31] 다만 일본진출 첫해 부진했던 기본적인 이유는 달라진 스트라이크존에 적응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프로야구의 스트라이크 존은 일본의 스트라이크 존보다 양옆으로 볼 하나씩 더 들어가는 크기였던 데다 선동열이 던지는 슬라이더가 기본적으로 그런 형태의 스트라이크존에 유리한 변화구이기도 하고... 때문에 1996시즌 이후 실시한 강훈련은 스트라이크존 적응에 주된 목적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32] 예를 들어, 프로에서 최동원의 최고업적은 누가뭐래도 1984년 KS 7경기 중 5경기에 등판하여 4승1패를 기록하며 롯데 우승을 하드캐리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최동원은 프로출범이전인 1981년 코리안시리즈에서 6경기 중 6경기 전부에 등판하였고, 그 해 정규시즌 소속팀의 한시즌 324이닝 중 206이닝을 혼자 소화해낸 투수였다.[33] 어디까지나 최동원과 비교해서..[34] 다만 이를 두고 '내가 보기엔 장명부가 더 뛰어난데 WAR은 과연 엉터리 스탯이구나'(...)라는 주장 덕택에 논쟁이 더 커진 감이 없지 않다.[35] 아시아 투수 전체로 확대해도 박찬호보다 커리어에서 우위에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투수들은 노모 히데오구로다 히로키 뿐이다.[36] 선동열이 활약한 1990년대 NPB는 메이저 진출이 본격화 되기전 노모 히데오, 스즈키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 사사키 가즈히로 같은 수퍼스타들이 많았고 MLB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MLB와 수준차이면에서 보면 오히려 현재보다 수준 높다는 평이 있었다. 하지만 극소수의 정상급 선수들이 MLB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해서 나머지 선수들의 실력도 뛰어날 것이란 보장은 없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저들이 활약했던 시기는 이미 20년이 다 되어간다. 20년 동안 NPB의 수준이 퇴보했다는 얘기인가?[37] 당시 해외 리그로 가는 것도 힘들었는데 대표적으로 1980년 그리고 1981년의 최동원이나 김시진이 있었다.[38] 1군 엔트리는 4명 등록에 3명 출전 제한이다. 투수만 4명, 타자만 4명 등록은 안 된다.[39] 이거에도 반론은 있을 수 있는데 선동열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일본 시절 성적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있다. 일본에서 성공적인 마무리였고 사사키와 비교해볼 때 구원투수로는 메이저에서 성공할 수도 있다고 보지만 메이저가서 선발로도 10승이니 15승이니 하는 것은 건초염 이후 국내에서도 선발로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것. 결국 선발로 성공여부를 논하려면 용병 타자와도 상대하지 않았고, 리그 전체를 통틀어서 시속 150km 넘는 공이 찍히는 일 자체가 드물었던 1986~91년 시대의 선동열로 비교를 해야된다는 논리이다.[40] 라틴 문자로 표기할 때도 제각각. 이런 거야말로 통일하고[41] 오죽이나 말술로 당대에 유명했던지 스카우트라는 영화의 OST에는 선동열배 술먹기 대회라는 노래까지 실려있다.[42] 어느날 양승호가 훈련 시간보다 일찍 야구장에 들어왔는데 그 이유가 낮잠 좀 자려고였다고 한다.(...)[43] '낮잠을 집에서도 자면 되지, 왜 집에서 안 자고 거기서 자?'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잘 생각해보자. 야구 시즌은 여름이 주가 된다. 요즘이야 에어컨과 선풍기가 있지만 양승호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 에어컨과 선풍기가 보편화가 되어있지 않던 시절이다. 양승호가 말하길 무등구장엔 바람이 솔솔 잘 통하는 정자 하나가 있었다고. 거기가 시원해서 잠이 잘 왔다고 한다.[44] 宣判奎. 1921~2006, 당시에 광주 송정동에서 송정여관과 목욕탕을 운영하였다고 한다.[45] 토비콤을 만드는 그 회사 맞다.[46] 참고로 인터뷰 등을 보면 실제 선동열의 목소리는 의외로 괜찮은 편이다. 전라도 억양이나 사투리가 있어서 그렇지.[47] 해당 게임 오프닝 영상에서는 12구단의 간판 마무리 투수가 타자 배트 파괴하는 기믹을 얻었다. 즉, 주니치의 간판 마무리로 인정받았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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