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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농구협회가 주최하는 아마추어 농구 대회. 애칭은 점보시리즈[1]이며 마스코트는 코끼리이다. 약칭은 '농대'.2. 역사
2.1. 대회 출범부터 한국프로농구, 한국여자프로농구 창설 전까지
1983~84년 시즌부터 매년 겨울에 열린 성인농구 최대의 축제이자, 현 KBL/WKBL의 전신 대회이다. 한국 농구의 대중적 확산과 기반을 닦고 1990년대 농구 붐을 일으킨 원동력이었다. 원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을 가지고 있던 여자농구의 인기가 더 높았는데[2]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남자농구가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역전되었다.[3] 그리고 1980년 후반 이후에는 남자농구의 인기에 여자농구가 완전히 묻혀버려서 농구대잔치 하면 남자농구의 대회로만 착각하는 일이 많다. 대회 창설 이후부터 프로화 이전까지 존재한 실업팀[4]들은 이 시기가 사실상의 세미프로 단계라고 봐도 무방하다.농구대잔치가 본격적으로 확립된 이후에는
- 실업-아마추어 8개 구단: 기아자동차[5], 현대전자[6], 삼성전자, SBS, 상무, 기업은행[7], 한국은행, 한국산업은행[8]
- 당년 대학 리그 성적 상위의 6개 대학: 3대 강호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 그 외 건국대, 경희대, 단국대, 동국대, 명지대, 성균관대, 한양대 등
80년대 중반까지는 실업팀들에 의해 리그가 주도되었다. 대학 리그에선 최강이었지만 아직 전력이 완전치 못했던 한기범, 김유택의 중앙대는 1984년도에 허재가 입학하게 되면서 전력이 강화되어 84-85 시즌에 실업 최강 현대, 삼성과 삼강구도를 이루었고, 85-86 시즌과 86-87 시즌엔 대학팀 최초로 결승전에 진출하는 등 센세이션을 일으켰다.[9] 허재는 용산고 시절부터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을 정도로 전국구 스타였는데 중앙대에 입학 후엔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슈퍼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87-88 시즌엔 이전 시즌 심판의 편파 판정에 불만을 품은 중앙대 감독이 농구대잔치 출전을 거부했었는데 '허재가 없는 농구대잔치는 관중이 줄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했다.
1986년도에 신생팀 기아산업이 창단하였고 한기범, 김유택, 유재학 등이 포진해 있는 상태에서 1988년도에 허재가 입단하게 되면서 기아는 창단이래 첫 우승을 하게 된다. 이후 5연패를 포함 총 7회 우승을 하게 되는데[10], 특히 기아의 허동택 트리오는 기아자동차가 당대 최강 기아 왕조를 구축하는데에 한몫했다.[11] 89-90 시즌에는 김유택과 유재학이 빠지고 강동희가 입단하기 전인 상태에서 허재, 한기범, 정덕화 등의 활약으로 우승했고, 1994년엔 중앙대 출신 김영만의 가세로 허동만 트리오를 구축하며 기아가 우승하는데에 한몫한다. 오직 실력으로만 승부를 보았던 중앙대-기아자동차는 협회와 심판의 편파 판정과, 연고대-현대-삼성이 가하는 폭력 농구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러다 이후 '한국 농구 최대의 중흥기'라 불리는 1993년부터 1996년까지는 대학팀들의 돌풍 시대였다.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우지원 등이 기라성처럼 버티고 있는 연세대가 1993~94 시즌 우승을 차지하고, 1994~95, 1995~96 시즌도 연세대와 함께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전희철, 현주엽 등이 포진한 고려대 또한 대학돌풍의 주역으로서 정규리그에서 실업팀들을 잇달아 연파하며 엄청난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다.[12]
무서운 건 이 돌풍이 더 엄청날 수도 있었다는 것.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김훈 등이 버티던 연대는 93-94시즌에 괴물센터 서장훈이 입학하면서 단번에 우승을 차지했고(MVP 서장훈), 문경은이 졸업한 94-95시즌에도 정규리그 전승을 거두며 최강포스를 뽐냈다. 그런데 시즌 막판에 이상민이 부상으로 아웃되며 전력 누수가 생겼고, 삼성의 폭력농구로[13] 서장훈이 큰 부상을 당하며 그 공백을 못 이기고 탈락한 것이다. 이후 서장훈이 한국농구에 환멸을 느끼며 1년 유학하고 돌아온 뒤 실업선수들이 모두 참가한 마지막 시즌인 96-97시즌에 다시 우승했다. 즉, 연대는 서장훈 입학 이후 프로출범전에서 4년 중 2년을 우승했는데[14], 우승 못한 2년은 둘 다 서장훈이 없었다. 이상민과 서장훈이 있었다면 95시즌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당연히 연대였으며, 96시즌에 서장훈의 공백에도 연대가 4강까지 갔다는 걸 생각하면(이상민이 졸업했지만 PG 황성인이 입학해 그의 공백을 메웠다) 서장훈이 있었다면 96시즌에도 당연히 강력한 우승후보였을 것이다.[15] 즉, 삼성의 폭력 농구만 없었어도 아예 연대 왕조가 열릴 수도 있었다.[16]
TV 중계는 당시 대회를 공동 주최했던 KBS가 사실상 독점했는데 당시 중계진이었던 이명용 캐스터-유희형 해설위원[17] 콤비가 선보이는 입담 역시 농구팬에게 재미를 선사해 주었다. 1994/95 시즌부터는 MBC, SBS도 중계권을 확보했다. 특히 서울방송 실업농구단을 운영했던 SBS가 갈수록 중계의 규모를 늘려갔고 훗날 KBL의 태동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2.2. 프로 출범 이후
그러나 KBL이 1997년 공식적으로 출범하면서 실업팀들이 대부분 프로팀으로 전환되었고 일부 남은 실업팀들도 1997년 외환 위기 속에 해체되었으며, 1995~96 농구대잔치까지 활약하던 오빠부대의 주역들이 졸업하고 프로로 떠나면서 언론과 팬들의 관심도 자연스레 KBL로 옮겨졌다. 결국 농구대잔치에 남은 건 대학팀들과 상무 뿐이었고, 여자부도 외환위기 속에 연달아 팀이 해체되고 남은 팀들은 한국여자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프로로 전환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농구의 저변과 인기를 대중적으로 크게 확산시키고, 현재 KBL 구단들의 모태가 되는 팀들이 바로 농구대잔치 때 형성된 실업팀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농구대잔치가 한국 농구 발전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8]
3. 문제점
2012~13 시즌 이후 KBL의 신인 드래프트 일정이 9월로 앞당겨지면서, 대학을 아직 졸업하지 않은 4학년 선수들이 재학생 신분으로 프로에 진출하게 되었다.[19] 즉 일반적으로 11월 말~12월 초에 열리는 농구대잔치 개막시점에서는 대학팀의 4학년 선수들이 빠져나가 KBL에서 뛰고 있기 때문에, 대학팀의 전력이 비정상적일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험이 쌓인 4학년들의 공백으로 인한 팀 전력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남은 1~3학년으로만 구성된 대학팀의 로스터는 인원수 자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특히 대학농구리그 시즌이 끝나고 비시즌기로 인해 컨디션이 저하된 선수들이나, 부상으로 이탈한 선수를 제외하게 되면 12인 로스터를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팀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각 대학의 2학기 수시 모집에 합격하여 입학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선수들이 입학예정자의 신분으로 각 대학팀에 합류하여 대회에 뛸 수 있게 허용하고 있지만, 각 대학의 수시합격자 발표일정 문제나 각 고등학교의 차출요구 수용여부와 같은 부분에서 여전히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20]
상무의 경우 위와 같은 문제를 겪지 않으므로 상대적으로 안정된 전력을 가지고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대학팀과의 전력 격차를 더 크게 벌리면서 밸런스의 불균형이라는 또다른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 대회 역대 우승 구단을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상무는 대학팀을 크게 따돌리고 대회 우승을 휩쓸고 있는 추세이다.[21] 결국 최근에는 이런 이유들로 인해 농구대잔치의 출전 자체를 포기하는 학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22], 대회의 규모와 의미도 점점 축소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2년에는 KBL 프로팀과 상무, 그리고 상위권 대학 5개팀이 참가하는 프로-아마 농구 최강전이라는 이름의 컵 대회가 신설되었는데, 오히려 이 대회가 과거 KBL 출범 이전 중흥하던 농구대잔치의 형식을 계승하는 대회로써 팬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2016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급기야 2018년에는 저조한 참가신청 때문에 대회 개최가 아예 무산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이대로라면 대회 존속마저 불투명한 상황. 공식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2019~2023년에도 열리지 않아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4. 역대 우승 구단
4.1. 남자부 - 프로 출범 전
연도 | 우승 | 준우승 | 대회 MVP |
1983-84 | 현대전자 | 삼성전자 | 이충희 |
1984-85 | 삼성전자 | 현대전자 | 임정명 |
1985-86 | 현대전자 | 중앙대학교 | 이충희 |
1986-87 | 박수교 | ||
1987-88 | 삼성전자 | 기아산업 | 김현준 |
1988-89 | 기아산업 | 현대전자 | 유재학 |
1989-90 | 한기범 | ||
1990-91 | 기아자동차 | 정덕화 | |
1991-92 | 삼성전자 | 허재 | |
1992-93 | 강동희 | ||
1993-94 | 연세대학교 | 상무 | 서장훈 |
1994-95 | 기아자동차 | 삼성전자 | 허재 |
1995-96 | 상무 | 김유택 | |
1996-97 | 연세대학교 | 서장훈 |
4.2. 남자부 - 프로 출범 후
1997년 프로 출범 이후에는 프로팀은 참가하지 않고, 상무팀과 대학 팀이 참가하는 형태로 바뀌었다.연도 | 우승 | 준우승 | 대회 MVP |
1997-98 | 연세대학교 | 경희대학교 | 서장훈 |
1998 | 중앙대학교 | 한양대학교 | 조우현 |
1999-2000[23] | 연세대학교 | 김주성 | |
2000 | 상무 | ||
2001-02[24] | 상무 | 중앙대학교 | 현주엽 |
2002-03[25] | 연세대학교 | 상무 | 김동우 |
2003 | 상무 | 방성윤 | |
2004 | 중앙대학교 | 전정규 | |
2005 | 상무 | 고려대학교 | 박지현 |
2006 | 중앙대학교 | 허효진 | |
2007 | 동국대학교 | 강병현 | |
2008 | 상무 | 건국대학교 | 양동근 |
2009 | 연세대학교 | 유병재 | |
2010 | 건국대학교 | 양희종 | |
2011 | 명지대학교 | 함지훈 | |
2012 | 고려대학교 | 상무 | 박재현 |
2013 | 상무 | 연세대학교 | 윤호영 |
2014 | 경희대학교 | 이정현 | |
2015 | 고려대학교 | 김시래 | |
2016 | 단국대학교 | 최부경 | |
2017 | 연세대학교 | 이승현 |
4.2.1. 남자부 - 구단별 우승 횟수[26]
우 승 | ||
상무 | 11회 | 2001-02, 2005, 2008, 2009, 2010, 2011, 2013, 2014, 2015, 2016, 2017 |
기아자동차 | 7회 | 1988-89, 1989-90, 1990-91, 1991-92, 1992-93, 1994-95, 1995-96 |
연세대학교 | 6회 | 1993-94, 1996-97, 1997-98, 2002-03, 2003, 2004 |
중앙대학교 | 5회 | 1998, 1999, 2000, 2006, 2007 |
현대전자 | 3회 | 1983-84, 1985-86, 1986-87 |
삼성전자 | 2회 | 1984-85, 1987-88 |
고려대학교 | 1회 | 2012 |
4.3. 여자부 - 프로 출범 전
연도 | 우승 | 준우승 | 대회 MVP |
1983-84 | 코오롱 | 동방생명 | 김복순 |
1984-85 | 국민은행 | 한국화장품 | 공현자 |
1985-86 | 태평양화학[27] | 동방생명 | 차선용 |
1986-87 | 동방생명 | 국민은행 | 김화순 |
1987-88 | 서울신탁은행 | ||
1988-89 | 성정아 | ||
1989-90 | 국민은행 | 삼성생명 | 조문주 |
1990-91 | 삼성생명 | 국민은행 | 최경희 |
1991-92 | |||
1992-93 | SKC | ||
1993-94 | 국민은행 | 삼성생명 | 이강희[28] |
1994-95 | SKC | 정은순 | |
1995-96 | 현대산업개발 | 정선민 | |
1996-97 | 삼성생명 | 국민은행 | 정은순 |
1997-98 | SK증권 | 삼성생명 | 유영주 |
1998 | 삼성생명 | 현대산업개발 | 박정은 |
4.4. 여자부 - 프로 출범 후
1998년 프로 출범 이후에는 프로팀은 참가하지 않고, 실업팀과 여자대학 팀이 참가하는 형태로 바뀌었다.연도 | 우승 | 준우승 | 대회 MVP |
1999 | 숙명여자대학교 | 성신여자대학교 | - |
2000 | 용인대학교 | 이화여자대학교 | 김성은 |
2001-02 | 김천시청 | ||
2002-03 | 김천시청 | 용인대학교 | 박명애 |
2003 | 성신여자대학교 | 김성은 | |
2004 | 수원대학교 | 전지혜 | |
2005 | 용인대학교 | ||
2006 | 수원대학교 | 권혜미 | |
2007 | 김천시청 | 사천시청 | 김민정 |
2008 | 수원대학교 | 홍정애 | |
2009 | 동아백화점 | 김천시청 | 배영경 |
2010 | 김천시청 | 국일정공 | 한서윤 |
2011 | 동아백화점 | 사천시청 | 한연호 |
2012 | 사천시청 | 김천시청 | 박언주 |
2013 | 김향미 | ||
2014 | 박근영 | ||
2015 | 김선혜 |
4.4.1. 여자부 - 구단별 우승 횟수[29]
5. 역대 스폰서
- SK텔레콤 (1994~1995(012배) / 1998(넷츠고배))
- 한국통신(001배) (1995~1996)
- 엔케이텔레콤 (1997~1998)
- 코맥스 (2000~2001)
- 세원텔레콤 (2001~2003)
- 우리은행 (2003)
- 한국산업은행 (2004~2006)
- KB국민은행 (2007~2013)
- 신한은행 (2014~2017)
[1] 83년 농구대잔치 출범때 정식명칭이 점보시리즈였으나, 이듬해 84년 2차대회부터 농구대잔치가 정식 명칭이 됐다.[2] 198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은 세계 톱5의 실력을 뽐냈던 아시아의 강호였다. 1983년까지 FIBA 여자 월드컵에서 10위권 내 최상위권에 늘 자리했고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구기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본선 결승전에 진출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3] 남자부의 인기가 여자부의 인기를 앞지른 것은 같은 실내 스포츠인 배구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여자배구 역시 인기가 사그라들면서 일반 관중보다 각 소속팀 모기업 직원들로 구성된 이른바 '넥타이 부대 응원단'이 더 많은 시절도 있었다. 여자배구의 인기도는 김연경의 등장 이후 1980년대의 수준을 완전히 회복했으나 여자농구의 인기는 여전히 남자농구보다 뒤처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남자 배구의 경우에는 올림픽 예선도 탈락하는등 국제 대회 성적이 좋지 못한 반면, 여자배구의 경우에는 꾸준히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내면서 여자배구의 인기가 남자배구를 오히려 역전했다.[4] 원칙상 회사나 단체 등에 소속되어 있어 평소에는 일을 하고 취미로 운동을 하는 아마추어 팀.[5] 기록상으로는 모비스가 기아 시절의 기록을 승계하고 있지만 모비스 구단 입장에서는 기아와의 연계성을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6] 83년 출범 후 현대 농구단으로 명명. 이후 89~90시즌부터 현대전자로 변경[7] 기업은행 농구단 중 선수단만 1997년 초 나산그룹이 인수해 광주 나산 플라망스로 재창단됐고 수원 KT 소닉붐이 명맥을 잇고 있다.[8] 한국은행 농구단과 산업은행 농구단은 1997년 해체됐고 두 팀의 남은 선수들을 모아 신생팀이 창단되는데 이 팀이 원주 나래 블루버드였다. 현재 이 팀의 명맥은 원주 DB 프로미가 잇고 있다.[9] 이 당시는 심판이 2명이었는데 훗날 한기범이 회고하기를 결승 상대였던 현대는 심판 2명 포함 7명이 뛰었기 때문에 중앙대가 절대 우승할 수 없었다고 했다.[10] 88-89 ~ 92-93시즌, 94-95 ~ 95-96시즌[11] 여기에 한기범까지 더한 조합이 과거 중앙대학교 농구부였다. 실업팀을 꺾은 대학팀의 시작이었고, 그들이 그대로 기아자동차로 입단했던 것이다.[12] 하지만 고려대는 매번 플레이오프에서 기아에게 털리며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하였다.[13] 삼성이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7위였는데, 그대로라면 2위로 미리 진출한 당시 최강 고대와 맞서야 했다. 이 때 삼성은 마지막 경기를 일부러 져서 8위로 떨어지면서 토너먼트 상대로, 1위로 진출했지만 이상민이 빠져 해볼만하다고 생각한 연대를 선택했다.[14] 출범 후 서장훈이 한 번 더 우승을 이끌었지만 이때는 프로출범 이후여서 직업농구선수들이 없는 순수 아마추어 대회라 국내 최고 수준의 대회가 아니었다.[15] 국내선수들 중 완벽히 매치업하는 게 불가능했던 서장훈은 거의 치트에 가까운 존재였다. KBL 출범 후에도 전성기의 서장훈은 외국인선수가 막거나 김주성이 막아야했는데, 당시 농대엔 외국인선수는 물론이고 김주성급의 존재감을 지닌 빅맨이 없었다.(한기범은 2미터5 장신에 뛰어난 선수였지만 파워나 운동능력 면에서 김주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장훈 하나만 뛰어나다면 버틸 수 있었겠지만 이때 연대엔 특급 포인트가드 이상민과 슈터 우지원까지 있었다.[16] 사실 연세대만 피해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 당시 연세대 최희암 감독도 평소 선수들에게 폭력 농구를 하라고 지시하는 스타일이었다. 피해를 당한 선수는 안 되었지만 감독 입장에서 보면 그대로 돌려받은 셈이다. 게다가 연세대란 이유로 편파 판정의 득을 보기도 했었다.[17] 한국 농구 역사의 가드 계보에서 첫 머리에 꼽히는 인물이자 전규삼 송도고 농구부 감독의 초대 수제자.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농구 금메달 획득의 주역이었다. 이후에는 스포츠 행정가로 많이 활동했는데 2014년부터 1년여간 KBL 심판위원장을 맡았다.[18] 당장 겨울 스포츠 경쟁종목이었고 비슷하게 전성기를 누린 뒤 프로화를 거쳤던 한국 배구는 농구대잔치와 같은 권위의 대회였던 슈퍼리그(백구의 대제전) 자체가 사라졌다. 지금까지도 농구대잔치가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아마 농구의 저변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19] 얼리 엔트리의 경우에는 3학년[20] 실제로 2014년 농구대잔치에서는 연세대학교의 수시합격자 발표 일정이 농구대잔치 개막 이후로 예정되어 있어서, 모든 학교가 입학예정자를 엔트리에서 빼고 대회에 참석할지, 아니면 연세대를 제외한 학교들만 입학예정자를 엔트리에 포함시켜서 대회를 치를지와 같은 부분에서 조율의 어려움이 있었고 대회가 파행으로 치닫기 직전까지 흘러갔다.[21] 이듬해에 프로팀들까지 물리치고 프로-아마 최강전에서 우승한 2012년의 고려대를 제외하면, 상무는 최근 농구대잔치에서 우승을 내준 일이 없다. 결승전에서도 대부분 가비지 스코어로 대학팀들을 누르고 우승컵을 가져갔다.[22] 대학팀들은 이제 대학부끼리 겨루는 컵 대회로 농구대잔치 대신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 쪽에 관심을 두고 있다.[23] 원래는 1999년에 열려야 할 대회가 2000년 1월에 개최되었다.[24] 실제론 2002년 1월에 개막하였다.[25] 실제론 2003년 1월에 개막하였다.[26] 횟수가 많은 팀부터 적되, 같은 횟수일 경우 더 최근에 경험한 팀부터 기록한다. 굵은 글씨는 각 구단별로 가장 오랜 기간 연속으로 우승한 경우를 표시.[27] 부천 KEB하나은행의 전신이 신세계 쿨캣이고 신세계의 전신은 태평양 농구단이다. 다만 하나은행 농구단은 태평양 시절의 기록을 승계하지 않고 있다.[28] 야구인 강성우의 아내다.[29] 횟수가 많은 팀부터 적되, 같은 횟수일 경우 더 최근에 경험한 팀부터 기록한다. 굵은 글씨는 각 구단별로 가장 오랜 기간 연속으로 우승한 경우를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