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8 09:10:13

1997년 외환 위기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이 사건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에 대한 내용은 국가부도의 날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정 사건사고 문서는 유머성 서술과 비하적인 표현이 제한되며, 사실관계를 작성할 때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야 합니다.
이 틀의 삭제 토론이 진행중입니다.


1. 개요2. 당시 상황3. 경과
3.1. 동남아시아 외환위기 발생3.2. 한국은 괜찮을까?3.3. 50만$까지는 묻지 않겠다3.4. 장애물에 직면하다3.5. 둑이 무너지다3.6. IMF 구제금융 신청3.7. 후유증과 복기
4. 원인
4.1. 정권 홍보 차원의 다량 외화 방출4.2. 대기업의 차입 경영과 금융기관의 부실화4.3. 원화 가치 고평가와 경상수지 적자4.4. 외환보유고의 비상식적 운용4.5. 외화자산과 부채의 만기갭(maturity gap)
5. 발생원인에 대한 다른 견해들
5.1. 민간경제 책임론5.2. 야권 책임론5.3. 펀더멘탈 문제론
6. 영향
6.1. 경제적 영향
6.1.1. 혹독한 구조조정 요구6.1.2. 변한 자가 살아남았다
6.2. 정치적 영향
6.2.1. 국방력에 미친 영향
6.3. 사회적 영향
6.3.1. 철도 및 항공 교통업계6.3.2. 자동차업계6.3.3. 체육계6.3.4. 대중문화/IT 업계6.3.5. 취업시장6.3.6. 물가6.3.7. 사회현상
7. 세계경제계의 변화8. 여담9. 관련 문서
9.1. 관련 외부문서
10. 연표
10.1. 1997년10.2. 1998년10.3. 1999년10.4. 2000년10.5. 2001년

1. 개요

1997년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금융정책으로 인해 각 기업들은 무분별한 차입에 의존하며 무분별한 과잉투자를 벌였다. 동시에 국외적으로는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로 인해 환율을 이용한 외국 자본의 차익 실현으로 인해 동남아시아의 통화 위기가 발생하였고, 동북아시아를 거쳐 세계 경제에 불안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 불안은 한국 뿐만 아나라 아시아 전체에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 이를 1997 아시아 금융위기(1997 Asia Financial Crisis)라고 한다. 인도네시아, 한국, 태국은 위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였고, 홍콩, 라오스, 말레이시아, 필리핀도 침체에 시달렸다. 브루나이, 중국, 싱가포르, 대만, 베트남 또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영향을 덜 받았다. 일본은 이미 침체에 들어가 있었기에 영향은 매우 적었다.

이러한 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 무분별한 차입으로 의존하던 국내기업의 외국자본의 단기부채의 만료와 아시아 경제에 불안을 느낀 외국자본의 급격한 유출로 인하여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게 되었고, 충격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기업의 파산이나 부도, 대량 실직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제 위기로 인하여 단기부채의 연장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환을 독촉받았다. 한국은 이러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이를 상환한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1997년에 발생하여 2001년 8월까지 약 4년간 지속되었다.

외환 위기 직전이 호황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 한국 경제는 이미 수출액 감소 대외채무 폭증 등 이상 증상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정부와 기업들은 구조개선 노력을 하지 않았고, 결국 외환 위기를 불러오게 됐다. 대규모 실직과 무더기 부동산 매각 금융불안 등이 일어나게 되었고, 외환위기 이후에야 체질 개선을 위해 IMF의 계획에 따라 전방위적이고 대규모의 구조조정이 실행되었다. 이로 인해 그 때까지 유지되어왔던 정부의 대책없이 낙관적인 중상주의적 정책에 숨겨졌던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평생 직장도 사실 그러한 구조에서나 가능했던 만큼, 고용 시장의 불안정도 결과론적으로 함께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이 IMF라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실행되다 보니, IMF의 영향으로 고용 시장이 불안정해진 것이라는 등, 대한민국 사회는 현재까지 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2. 당시 상황

구분(전기대비) 1997년 3분기 1997년 4분기 1998년 1분기 1998년 2분기 1998년 3분기 1998년 4분기
민간소비(C) +1.0% -1.0% -13.6% +0.2% +2.1% +2.3%
설비투자(I1) -8.7% -14.6% -24.8% -10.1% +1.0% +7.7%
건설투자(I2) +3.9% +0.7% -9.7% -6.5% -2.9% -0.7%
경제성장률(지출부문) +0.8% -0.6% -7.0% -0.6% +1.5% +2.3%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ECOS에 나와있는 외환위기 시절 경제성장률 지출부문. 정부지출은 빠져있다. 참고로 이것은 표에도 나와있지만 전년대비가 아니라 전기대비다. 기업 설비투자는 1997년 2분기 대비 1998년 2분기, 즉 1년 연간대비로 하면 -47.3%를 기록했다.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667613531b571e226cf14030abdf961c78f43239__mn701294__w600__h325__f57841__Ym201606.jpg
1997년 외환 위기가 일어나기 불과 몇 달 전인 3월 8일9월 18일 조선일보 지면에 나온 기사.
단, 이 기사는 IMFIMF 총재의 견해를 그대로 보도한 것이며, 9월 18일 다수의 언론이 같은 취지의 보도를 하였다. 국민일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3월 8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단독 인터뷰였으므로 타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다.) 당시 IMF의 발언은 위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결과론적으로는 거짓이 된) 낙관적 전망을 시장에 퍼뜨린 것에 불과하며, 1997년 9월경 IMF뿐만 아니라 BIS, OECD, 세계은행 등의 수장이 불과 며칠 사이에 동일한 취지의 발언을 하였고, 역시 다수의 언론에 의하여 보도되었다. 따라서 이것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 언론사(들)의 농간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조선일보도 외환 위기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의 기사를 다수 보도한 바 있다. # # #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84-00_01000501.jpg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76-00_01044727.jpg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83-00_01024518.jpg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80166-00_01195720.jpg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80163-00_01000612.jpg

파일:attachment/1997.jpg

1997년, 1998년의 뉴스 이 모든 뉴스가 불과 2년 만에 일어난 것이다! 출처는 1997년1998년MBC 뉴스데스크다. 출연자는 당시 평일 앵커인 이인용/김지은-정혜정, 주말 앵커인 권재홍/최율미. 단 대우그룹 부도는 1999년이다. 그 밖에 위의 스크린샷에서 언급된 기업들 가운데 일부는 외환위기 이후에 회생되었거나 부도를 당하지 않은 다른 기업에게 넘어가 이름까지 바뀌기도 하였다.


파일:attachment/1997년 외환 위기/97imfdealer.jpg
▲ 미친듯한 환율 폭등으로 절망감에 빠진 외환딜러들의 모습. 경제에 조금 무지한 사람이거나 배우지 않았다면 그런저런 상황이지만 경제를 조금이라도 배웠거나 경제에 빠삭한 사람이라면 저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는 쉽게 알 것이다. 저 사진에 나온 딜러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준다. 혹시 환율이 높으니 수출하기 좋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기업들이 도산하던 시점이라 수출할 물건이 그리 많지 않았고 많은 외채로 인해 많은 달러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팔 물건이 없는데 환율 높아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3. 경과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67-00_01082905.jpg
한국은 눈앞의 위기를 애써 외면하려 한다.
1997년 12월 미셸 캉드쉬 IMF 총재
"기아자동차와 진로, 한보, 대우 등 천문학적인 부채 위에 세워진 이른바 한국의 재벌 기업이 문제의 시작점이었다. 10대 재벌의 부채 비율은 500%를 웃돌았다. 상상하기 힘든 수치였다. 이들 재벌이 부채상환 불능상태에 이르면서, 11월이면 은행까지 채무불이행(디폴트)에 빠질 위기였다.
윌리엄 로즈 전 시티은행 부행장. 1997년 11월 국제채권위원단 의장 신분으로 방한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외채 상환은 해야 하는데, 당장 갚을 외화는(달러$) 없어서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문민정부IMF에다 "돈 좀 빌려주세요. 곧 갚을게요."라고 요청한 사건이다. 2008년 그리스 경제 위기 같은 사건 수준의 엄청난 재난이다. 그냥 돈을 빌려주고 제 때 이자를 쳐서 받으면 그만인데, 돈을 빌려주는 대신 명령대로 나라 경제 운영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IMF가 비판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문민정부까지 대한민국 경제는 무작정의 확장을 바탕으로 한 기업 투자와 정경 유착을 통해 성장한 중상주의를 연상시킬 만큼 극도로 비효율적인 구조였다. 그러한 상황인데 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한국이 IMF의 집행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국의 국가 주도적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부정일 뿐이다. IMF가 자선 단체도 아닌데 돈을 빌려줄 이유도 없는 나라에 뭣하러 돈을 빌려주겠는가? 청년실업이나 고용 불안이 IMF 때문에 심화되었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이것도 인과가 바뀐 것에 가깝다. IMF 이전이 호황처럼 '보였기' 때문에 고용 시장이 지금보다 훨씬 더 경직되었으므로 가능했던 현상이었을 뿐이고, 외환 위기로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면서 그동안의 외국의 차입(주로 일본)에 의존하며 부실하게 운영된 한국 경제의 밑천이 다 드러났을 뿐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즉, 외환 위기 사태 발생 전이었던 대한민국이 OECD에 가입한 1996년까지의 대한민국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불리던 시절을 누렸다고 했다. 그러나 1996년의 무역 적자는 무려 230억 달러에 달하며 외채는 천억 달러를 뛰어넘는 등, 이미 대내외적으로 장기적인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상당수의 한국 경제학자들은 잃어버린 10년을 겪던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며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에 급급했다. 즉, 현실 인식을 완전히 반대로 했다. 결국 외환 보유액 부족과 여러 가지 경제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지 못한 것이 발목을 잡게 되면서 이후의, 그리고 현재까지의 대한민국 경제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것도 주로 악영향이다.

3.1. 동남아시아 외환위기 발생

먼저 배경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1997년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전체에 닥친 것이다! 1997년 여름 태국부터 시작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부터 번진 외환 위기 는 같은 해 가을 한국을 연쇄적으로 강타했고, 직접적인 경제 위기까지는 아니었던 중국과 일본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태국은 1995년부터 자국 통화가 위기에 빠질 때 중앙은행 간에 서로 도와주기로 한다는 쌍무협정을 주변 국가들과 체결해 놓고 있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사들의 투자성 환율공격이 이를 연쇄적으로 터트린 것. 그런데 중국일본의 경우에는 동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동남아 지역의 투자가 증가하면서 일시적인 반사 이익을 좀 받긴 했다. 특히 중국은 동아시아 외환 위기로 동아시아 경제 블록 내에서 위상이 급격히 높아졌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 사태를 총체적으로 아시아 금융 위기(Asian Financial Crisis)라고 칭한다.

80년대 말 일본의 부흥에 힘입어 동아시아에서 대한민국대만이 그 뒤를 쫓아 치고 오르고 있었고, 그것을 본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까지 그에 따라 하기 시작한 이른바 안행 효과(雁行效果)가 일단 세계적 흐름의 배경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일본의 버블 붕괴까지 시작되며 '3저 호황'으로 경제 성장률이 오르기 시작했고, 기본적으로 당시 수출 주도형 국가들의 시스템은 자기 자본이 없는 국가지만 외국 자본을 많이 도입함으로써 자국 화폐 가치를 평가절하[1] 그 반사 이익으로 수출의 증대, 그렇게 생산되는 제품들을 통한 기술력 증대, 하여 결과적으로 자국의 경제적 부흥을 이끌어 내는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계속해서 잘 굴러가게 되면 자국의 자본이 적더라도 외국 자본을 통해 외국의 설비를 들여와 자국의 생산 기술을 올리며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기초과학과 기본기술을 올려 생산설비의 자체제작도 노려볼 수 있는 괜찮은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이미 그렇게 성장해 온 나라로서 싱가포르와 한국, 대만이라는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아주 좋은 케이스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보통 여기에 홍콩도 포함이 되나, 홍콩은 제조업이 아닌 금융업이 성장을 주도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다만 이 경우 수출의 증대 를 통해 자국의 국가경쟁력이 강화 되면 자국의 화폐가 평가절상[2]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경상수지 적자 상황이 나기 때문에 환율조작을 통해 다시 강제적으로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시켜야만 다시 수출을 할 수 있게 되고 경제가 굴러갈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기업고정자본형성이라는 고정투자로 투자 증가로 인한 경기확장으로 이어지게 만들었고, 이는 물가안정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경상수지와 경제성장률을 높이게 만들었다.

3.2. 한국은 괜찮을까?

하지만, 한국은 1996년에 GDP의 5%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를 맞았고, 정부는 사치성 수입재가 원인이라고 해명하며, 투자로 수출을 늘리는 투자조치를 취했지만 실패한다. 게다가 1997년 1월 미국에서 금리 인상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미국 내수가 일시 축소되는 동시에 미국 수입이 감소되어 수출주도형 국가들이 수출을 할 장소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산된 물품을 판매하는 것은 고사하고, 달러의 금리 인상을 통해 외국자본을 대량으로 유치한 국가들은 갚아야 할 돈이 늘어나는 사태를 맞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수출을 늘리기 위해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 시키는 순간 갚아야 할 돈이 더더욱 크게 늘어나는 상황도 맞게 되었다. 화폐의 평가절하를 못 하게 되자 기업들은 경상수지 악화를 견뎌야만 했고, 일시적인 수출량 부재에 이어 전에 계약해 둔 수입 물품으로 인해 유동자금 경색이 시작되어 재고품을 덤핑 판매로 자금을 수혈했으며, 최후의 보루로 단기부채를 끌어오게 된 것이다. 외환위기 직전 중반 한국은 자동차 덤핑 대미 수출로 미국의 반덤핑 무역 제재 법인 슈퍼 301조 조치를 받았던 게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김영삼 정부측에서는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매년 300억 달러를 유지한다는 걸 국민들에게 알리며 안심시켰으나, 실상은 정부 발표 외환보유액의 5배를 족히 뛰어넘는 17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외채가 확인된 것이다. 건물의 기둥이 균열나면 건물자체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폭삭 내려앉는것과 같다. 돈을 신용, 즉 적정 한도 이상으로 빌리면, 그리고 외환을 적정 수준으로 보유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좋은 사례다. 자세한 것은 이 기사를 참고.
  1. 한국은행이 97년 3월26일 외환위기 도래 가능성을 예고하고,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에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외화를 긴급차입하는 비상대책을 강구할 것을 건의했으며,
  2. 비슷한 시기에 한국개발연구원(KDI) 역시 위기 가능성을 시사하며 대책강구를 촉구하는 보고서를 발간했으나, 재정경제원에서 해당 보고서를 시중에서 회수하는 일이 있었다. 강경식 전 경제부장관은 외환위기와 이 보고서 회수건이 빌미가 되어 한나라당 입당이 무산된다.

그리고 한국도 괜찮지 않다고 하는 사람조차도 IMF가 올 줄은 차마 상상도 못했다.

3.3. 50만$까지는 묻지 않겠다

사실 정부에서도 마냥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뒤늦게나마 금융개혁법을 발표하는 한편, 중반기인 7월 무렵에는 "개인의 외환보유 한도를 50만 달러까지 출처를 문제삼지 않겠다"는 취지의 시행법령을 발표한 것이다. 즉 어떤 경로로든지 좋으니 1인당 50만불까지는 양지로 꺼내달라는 부탁이었던 것.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등장하는 금융인 윤정학의 실제모델로 알려진 박현주(58년생) 미래에셋증권 회장이 잘 나가던 금융사를 퇴사한 게 바로 이 무렵이다.

이런 노력 끝에 300억 달러 수준의 외환보유고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으나...

3.4. 장애물에 직면하다

전년도까지 동남아시아 금융시장을 무대로 앉아서 돈을 쓸어 담았던 종합금융회사(약칭 종금사)들과 OECD에 29번째로 가입해 선진국 클럽에 합류한 한국의 위상 문제, 그리고 12월의 대통령 선거가 발목을 잡게 된다.
  1. 30여개에 달하는 종금사들이 일본 등지에서 1년 이하 "단기 외채로" 끌어들인 돈을 다시 빌려주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상황이 점점 나빠지는 상황에서 12월, 1 ~ 2월인 만기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2. 94년에 수출 1,000억달러를 돌파하고, 95년에는 마침내 선진국의 기준처럼 여겨진 국민소득 10,000달러까지 도달한 문민정부의 경제성과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3. 96년 BIS비율의 도입으로 일본은행들이 한국에 빌려준 부채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4. 게다가 96년 총선의 압승으로 여권 단독 표결로도 통과시킬 수 있었던 각종 개혁 입법들이 정권 말 지지도가 급락한 YS와 거리를 두려는 여당의원들의 비협조로 통과하지 못하였다. 표결에 다수가 불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 10월과 11월 사이 정부는 환율 급등을 막기 위해 118억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었으나, 해외시장에서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다시 끌어올리지 못하고 무디스 등지의 신용평가회사들의 평점은 계속 하락하는 악재가 연이어 발생하게 된다. 이 와중에 대외부채상환용 외환마저 모두 다 써버려서 추후 있는 외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서 말한 300억달러 유지는 사실상 11월을 지나면서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 전이었다.

3.5. 둑이 무너지다

1997년 12월, 사태가 시작되기 직전의 국내 실업률은 3.1%로 집계되었다.[3] 그러나 98년 1월이 되자 실업률은 한달만에 무려 1.4%P나 폭등하여 4.5%까지 폭등하고 한달만에 무려 3300여개의 기업이 줄도산한다.[4][5] 다음해 2월이던 1999년 2월, 실업률은 무려 8.7%에 달해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하였다. 1999년 2월을 피크로 실업률은 감소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여파가 미쳐 취업난은 한국 경제를 괴롭히는 주요 문제다.[6][7]

1997년 10월, 외환위기 직전 노동부에 신고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원에 달해 수많은 직장인근로자들이 임금도 못받는 상황에 직면해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해 준다.[8] IMF의 전초전

3.6. IMF 구제금융 신청

11월 19일, 경제가 위기에 빠져들면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물러나고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이 새 경제 부총리로 임명됐다.

환율 변동 폭을 현행 2.25% 범위 내에서 10% 범위 내로 대폭 확대한다고 발표한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45-00_01040504.jpg

이튿날 11월 21일, 정부가 결국 국제 통화기금 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

IMF 구제금융 요청은 1970년대 '한강의 기적'에서 시작하여 1980년대~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대한민국의 지속적인 고도 경제 성장이 사실상 종료되었으며, 그러한 방향에 부실한 지점이 있다는 것까지 의미했다. 한국은 전세계에 국가 부도를 인정함과 동시에 국제기관의 품 안에서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회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가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IMF의 지원을 받은 나라들이 경제 주권을 포기할 정도라는 말이 있듯, IMF가 그냥 무조건적으로 돈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며 IMF의 명령에 따라 경제 운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도 상당했다. 그러나 당시 KBS 보도 중에선 부작용 관련 얘기가 별로 없었다.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는 김영삼 대통령과 3당 대통령 후보와의 청와대 만찬에 참석해 IMF 구제 금융의 불가피성을 설명한 뒤 그날 밤 10시에 IMF 구제금융 요청 사실을 공식 발표한다. 임창열 부총리는 그날 우리나라를 방문 중인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티모시 가이트너[9] 미국 재무부 차관보와의 잇단 접촉에서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2월 3일 IMF와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발표되었다.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101_b084.jpg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협상을 마치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장으로 나와서 협상의 타결 소식을 전했는데, 캉드쉬 총재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 지원할 자금 규모는 모두 550억 달러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먼저 550억 달러의 자금 조달 내역을 보면 IMF가 210억 달러,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 개발은행이 40억 달러 등 국제기구에서 350억 달러를 지원하는 데 합의했다. 사실상 경제주권을 IMF에 바친 셈으로 이후 4년간 한국 경제는 IMF의 경제 정책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KBS, MBC)

3.7. 후유증과 복기

경제위기 이전의 성장 이면이 봇물터지듯 드러나면서 대한민국은 경제위기 이후 한동안 벼랑 끝으로 추락했다. 단기간에 회복하긴 했지만 사회적, 경제적으로 막대한 후유증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양극화, 고용불안, 청년실업 등 이전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다시피 했던 문제가 현실로 나타났고,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도 자살률의 급증, 가정의 붕괴와 이혼 등의 암울한 그림자를 남겼다. 이 문제들을 보면 알겠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현재진행형 문제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외환위기가 거진 20년이 지난 2017년 이후에도 그 원인 규명에 대해서는 첨예하게 얽힌 이해관계로 인해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원인을 규명하려면 누구의 책임인지 여부를 당연히 논하게 되는데, 여기에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현재 자유한국당)과 우리나라 경제의 주축인 재벌이 묶여 버리기 때문이다. '경제는 보수'라는 슬로건을 앞세우는 보수진영에서 원인을 규명하면 당연히 직접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으므로 진영적으로 손해이다. 또한 이미 주류 언론, 재벌 기업과 깊은 관계를 맺은 보수정당 측에서 막판에 시도했던 개혁 입법들이 무산된 책임을 당시 야당에게까지 집요하게 물으면서 정치공세를 늦추지 않기 때문에, 논의가 길어지면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에게도 득이 되지 않기 때문. 사실 96년 총선에서 여당인 신한국당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정말 입법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면, 단독 표결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심지어 이인제 후보가 의원 6명을 데리고 탈당한 상황에서도 모든 야권의석보다 신한국당 의석이 더 많았기 때문.

당시 가계저축률 감소 추세를 수치로 보면, 92년에는 17.5%였던 것이 97년 12.6%로 줄었다. 물론 가계저축률 12.6% 수준이 과소비라면 겨우 3%대를 깔짝거리는 지금은 초 과소비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서민들은 '경기 침체'라는 단어 자체를 낯설어했으나, 현재는 경기침체는 물론이고 가계 소득이 악화되었으며 생필품 가격은 OECD에서도 탑클래스를 달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당시에는 웬만해선 저축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저축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면 오히려 중산층 정도는 된다는 소리다. 당장 일부 인식과 달리 대출의 상당수는 주택 거래나 투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활을 위한 신용대출이 많다는 통계도 있다. 저축률이 3% 대로 떨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 외환위기 이전의 가계저축은 실제로 감소했다기보다 사회보장부담의 증가에 따라 가계저축이 정부저축으로 이전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부저축률은 1982년에 5.5%를 달성한 이후 1997년에야 겨우 10%였다.

파일:external/img.khan.co.kr/l_2012121301001673200133322.jpg

그리고 가계저축률 하락에 발을 맞추듯 총저축률 역시 감소추세에 들어가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다만 상당수 대기업들이 호황기를 틈타 투자를 과도하게 했다가, 외환위기가 닥쳐온 후(혹은 닥쳐오기 직전에) 부도된 사례는 꽤 많았다. 예: 기아그룹, 한보그룹, 대우그룹, 뉴코아그룹, 해태그룹, 나산그룹, 쌍방울그룹 등등.

하지만 IMF 외환위기의 원인이 과다한 외채 때문이라고 하면 정답이거나 정답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최소한 자산 시장에 거품이 잔뜩 끼어서 경제 위기가 왔던 상황인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부동산 광풍은 3저 호황의 영향으로 시중에 자금이 넘쳐나던 노태우 정부 초 중 만기 때가 가장 심각했었고 그래서 집값과 전월세비 상승으로 체감하는 체감되는 경제 성장폭이 그렇게까지 높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자가용이 노태우 정부 시기에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되었고 거기에 1990년대 초반 신도시들과 주택 개발지구의 대대적인 분양으로 주택 물량이 쏟아져 나온 데다가, 토지공개념 3법과 부동산 거래 실명제로 완연히 가라앉던 상태가 되었고, 1996년에 약간의 반등이 보이기는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던 상황인데다가 주식시장 또한 1994년에 고점을 찍은 이후로 대체적으로 내리막을 걷던 상황이었다. 물론 이 때 부동산 침체의 영향으로 상당수 기업들이 아파트를 짓다가 파산하는 징조를 보이기는 했다. 다만 임금 상승률은 그동안의 저임금에 짓눌려서 노조 설립 붐 및 임금 인상 투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보다야 조금 못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집값과 전월세비의 인상이 이 때만큼은 더뎠던 관계로 소비가 크게 활발해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도 무조건적인 과소비가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가계저축률이 높았기 때문에 책임 전가라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4. 원인

4.1. 정권 홍보 차원의 다량 외화 방출

김영삼 정부는 1995년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였고, 1996년에는 이른바 선진국 모임이라 생각되던 OECD 가입에 성공한다. 이를 정권 차원의 치적으로 여기고 있는 김영삼 정부는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유지하기 위해 원화가치 고평가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김영삼 정부는 환율시장에 개입하여 수시로 다량의 외화를 시중에 방출하였다. 1997년 10월말에 외환보유고는 305억 달러였으나 12월 말에는 204억 달러로 무려 약 1백억 달러가 줄어들었는데 원화고평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방대한 외환보유고를 시중에 푼 것이다. 당시 외국인 투자는 일본이 가장 많이 하였는데 외환위기의 징조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은행들은 채권을 회수하여 달러로 바꿔가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에 덩달아 다른 나라들도 채권회수에 열을 올려 달러 부족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화를 이룩한 자신의 문민정부가 최소한 군사독재 시절보다 경제적으로 뒤쳐져서는 안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체제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내실 없는 정치적 이미지 메이킹에만 골몰했다. 위기의 순간에는 경제수석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있어야 함에도 오히려 김영삼은 민간경제 악화로 정권에 대한 비난이 생기면 곧바로 경제수석을 경질하는 행위를 수차례 반복했다. 수많은 경제인들이 한국의 금융시장이 심상치 않다는 무수한 경고를 주었음에도 그는 이것을 '구시대 군사정권 적폐 잔당들의 정치적 공세'로 치부하기 일수였다. 이 모든 것은 대통령 당사자의 경제에 대한 극도의 무지와 학습 의욕 결여에 있었고, 세상을 정치적으로만 사고하는 전근대성과 독단에 기인했다.

4.2. 대기업의 차입 경영과 금융기관의 부실화

외환위기 주범은 대기업의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그로 인한 금융기관의 부실화였다. 그러므로 서민들의 무분별한 소비 탓이 절대 아니며, 서민들이 소비를 많이 하면 그만큼 경제가 살아나면 살아났지 무너질 이유가 없다. 이른바 '과소비'를 많이 지적하는데 빚을 지지 않는 일반적인 과소비는 경기 침체로 인한 버블 붕괴로 이어지지, 이런 식의 국가 단위의 빚잔치로 가지 않는다. GDP 대비 가계 부채는 오히려 IMF 사태 이후인 2000년대 중반부터 급증하게 된다. 대기업이 얼마나 빚에 의존해서 경영을 했는지는 30대 재벌 기업의 평균부채 비율이 자기자본의 5배를 넘었다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1998년 4월 15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총 자산을 기준으로 삼아 30대 기업집단을 새로 지정해 발표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이들 신규 30개 기업집단의 1997년 말 총 자산은 435조 3천억 원으로 1년 동안 24.96% 증가하였다. 이는 환차손에 따른 부채 증가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자기자본은 오히려 1조 8천억 원이 줄었다.

이에 따라 30대 재벌 계열사 중 금융/보험사를 뺀 804개의 부채 총액은 1996년 말 269조 9천억 원에서 1997년 말에는 357조 4천억 원으로 급증하였다. 평균 부채비율이 386.5%에서 518.9%로 치솟았던 것이다. 반면 총 자산에서 자기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20.6%에서 16.2로 급하락하였다. 이 중 한라(-5천 7백억 원)와 진로(-5천 3백 60억 원)는 자기 자본이 마이너스 상태이며 뉴코아(1,793%), 해태(1,507%), 아남(1,275%) 등은 부채 비율이 1천%를 넘었다. 이에 비해 롯데는 부채 비율이 216.45%로 가장 낮았으며, 동국제강, 동부, 동아, 삼성, 쌍용, 한솔, 강원산업 등이 300%대를 나타내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300%의 부채비율은 결코 건실한 것이 아니다. 부즈앨런&해밀턴의 <한국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개혁을 이룬 국가에서 우량기업은 대부분 부채 비율이 100% 이하라고 한다. 외환위기 뒤 들어선 김대중 정부조차 재벌기업의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출 것을 요구했는데, 최소한 200% 이하로 낮춰야 무한 경쟁의 시대에 생존이 가능하단 얘기다. 때문에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당시 한국의 대기업들은 국민이 저축한 돈을 끌어다 덩치만 키워 겉만 그럴 듯 하고 속은 부실 덩어리였던, 즉 '허풍선'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업들이 허풍선에 불과했다는 것은 기업의 손익계산을 따져보면 알 수 있다. 단적으로 1998년 3월 20일 증권거래소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2월 결산법인 510개사는 평균적으로 1997년에 1천원어치를 팔아 10원을 손해 보는 헛장사를 했다. 이들 기업의 전체 매출은 1996년에 비해 19.5% 늘어난 441조 2,743억 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순이익은 1996년 3조 8천여억 원 흑자에서 4조 5천 5백43억 원 적자로 돌아섰다. 특히 이 중 26개 은행의 적자 규모가 3조 8천여억 원에 달해 전체 적자의 84%나 차지하였다. 기업의 차입 경영과 연속되는 부도에 따른 은행 경영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실제로 1997년 말 조흥, 한일, 제일, 상업, 서울, 외환, 신한, 국민은행 등 8개 시중은행의 무수익 여신[10]은 35조 7천 7백억 원으로 은행 총 여신 2백 52조 5천 8백억 원의 14.2%를 차지하였다. 그만큼 부실채권을 떠안고 있어 은행 대출이 위험하다는 증거이다.

국내 은행들의 부실한 경영 상태는 외국계 은행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1997년 한해 동안 국내 우량은행으로 손꼽히는 주택, 국민, 신한은행의 당기 순이익은 각각 1천 83억 원, 1천 44억 원, 5백 33억 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세 은행의 당기순이익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의 흑자를 미국계 은행인 시티은행이 냈다.

은행감독원과 금융계의 자료에 따르면 1997년 국내 26개 은행 중 18개 은행이 무더기 적자를 낸 것과 달리, 외국계 은행들은 사상 유례없는 흑자를 기록했다. 시티은행은 당기순이익이 2천 6백억 원에 육박하여 1996년에 비해 186%의 증가율을 기록했으며 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당기순이익이 9백 80여억원으로 전년도 대비 307%, 체이스맨해튼 은행은 750여억원으로 46% 가까이 증가했다. 1997년 한 해 동안 기업 부도가 도미노 현상처럼 이어지고 경기와 주가가 바닥을 치는데도 외국계 은행들의 순이익이 급증한 것은 무엇보다도 달러화 가치가 폭등했기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 경영 기법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문민정부 5년 동안 국내 은행과 이들 은행의 순이익 추이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국내 시중은행의 순이익이 1994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하강한 반면, 위의 외국계 은행들은 계속해서 상승세를 유지한 것이다.

국내 은행들의 이런 경영 부실화는 기본적으로 관치금융에서 시작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은행 등 금융권은 그 자체가 금융산업이기보다는 경제 개발을 위해 일반 기업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 관치금융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WTO 체제와 같은 무한 경쟁의 국제화 시대를 맞아 국내 은행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금융산업으로서의 경쟁력과 경영 노하우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것은 곧바로 국가와 금융기관의 신인도와 연결되었고,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렇듯 한국 경제의 추락은 약간 멀리서 보면 일본 노무라증권 금융연구소의 분석가 히라누마 마코토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1987년 6.29 선언 뒤의 자유화와 자율화 10년간 근육질의 경제 구조를 만들지 못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기업들이 자유화 후 국제 경쟁력을 높이지 못한 게 결정적 요인인 것이다.

또 그는 1992년 이후 재벌을 필두로 경제 전체가 단기외화 차입에 지나치게 의존한 게 중기적 요인이라 하며 "철강 분야의 포항제철이 한국 기업 중 세계 유일의 초일류기업일 뿐, 그 외엔 세계적 기업이 없다"고 말하였다. 더 나아가 아무리 반도체나 자동차 분야가 기간산업이라 하지만 세계적 메이커랑 거리가 멀다고 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기간산업을 재벌에 의존해 재벌들이 모든 업종에 손을 대는 이른바 '풀세트주의'로 사업을 구상하는 바람에 우량 전문화 기업을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라고도 주장하였다.

그는 재벌 그룹들이 기술자립을 위한 독자적 연구개발(R&D) 대신에 "기술은 사오면 된다"식의 손쉬운 기술도입을 통한 성장전략을 택한 것 역시 대기업 실패의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했으며, 더불어 재벌들의 방대한 상호지급 보증과 재벌총수에 의한 봉건적 경영이 파탄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하였다.

4.3. 원화 가치 고평가와 경상수지 적자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미국의 금리인상과 이에 따른 달러인덱스의 동향은 원화 가치 하락을 예상케 했는데, 당시 김영삼 정부는 원화 가치를 방어하려 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화 가치를 방어한다는 말은 달러 보유고를 내다 팔아 시장에서 원화 가치를 지킨다는 것이었고, 달러 보유고는 결국 무역수지 흑자와 외국자본의 투자로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금리인상은 기본적으로 달러의 유출에 무게를 얹는 신호였다. 이전 버전에는 엔화와 원화를 링크해 설명했는데 그것은 직접 관계가 없다. 원-엔 환율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으로 정해지지 않고, 그냥 한국 시장의 원-달러 환율과 일본 시장의 엔-달러 환율을 가지고 재계산한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원-엔 직접 거래 시장을 개설하려는 노력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있었지만 일본에서 시장 조성에 호의적이지 않아 무산되었다. 엔화가치의 하락이 한국의 원화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이를테면 한일 공통의 최대 경쟁시장인 미국에서, 더 싸진 엔화 때문에 일본산 상품의 수출경쟁력이 오르는 와중에 원화 가치가 비싼 채로 있으면 한국산 경쟁상품이 덜 팔리고, 한국이 달러를 못 벌(것 같으)면 원화 가치도 싸진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돌아온다.

이는 투자자들로 하여금 '원화의 평가절하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회의적 예측을 하게 만들었다. 또 원화가치 고평가는 한국 기업들의 대외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수출부진에 따라 현금흐름에 위기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의 경상수지는 1996년 - 229억달러로 막대한 적자규모를 기록하게 된다. 이러한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은 외국 투자자들이 국가경제의 펀더멘털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당시 한국의 경제적 펀더멘털이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98년과 같은 경제환란에 이를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이러한 회의감이 누적된 차에 태국의 바트화 위기가 심리적 트리거로 작용하면서 투자 자금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되었고, 이에 한국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원화 가치 붕괴와 연쇄도산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4.4. 외환보유고의 비상식적 운용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한국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돈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앨런 그린스펀(美연방준비위원회 의장)
각국의 중앙은행은 갑작스러운 대외결제의 증가에 대비하여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행은 보유외환을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유하지 않고 시중은행에 예치하였고, 시중은행 역시 이를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운용하지 않아 한국은행이 이를 국제결제에 사용할 수 없었고, 신용공급이 중단되자 갑작스런 외환부족에 대처할 수 없었다.

4.5. 외화자산과 부채의 만기갭(maturity gap)

당시 난립했던 비은행금융기관, 이른바 종금(종합금융회사)[11]들은 단기자본을 도입하여 장기대출로 자금을 운용하였다. 1976년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6개 종금사체제가 유지되었으나, 1990년대 들어서 김영삼 정부의 금융자유화정책에 따라 30개의 종금사가 난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자금의 조성과 운용의 만기가 불일치하는 것을 자산-부채 미스매치라고 하는데, 이 때 단기차입자금의 만기가 도래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만기불일치는 당시 외환업무에 경험이 없었던 종금사들의 경험부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장기 외화차입보다 단기 외화차입이 금리가 싸고 차입이 쉬웠기 때문에 단기 차입금의 리스크도 제대로 모르고 닥치는 대로 차입해서 다시 수익성이 높은 장기대출사업에 사용했던 것이다. 외화유동성 부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동남아 외환위기의 여파가 한국으로 다가올 때, 종금사들의 자금난은 한국경제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은행들의 단기차입마저 끊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종금사들은 외환위기 이후 대부분 문을 닫았다.

5. 발생원인에 대한 다른 견해들

5.1. 민간경제 책임론

투자만능론에 눈이 먼 민간이 큰 책임을 가진다는 주장. 비슷한 견해가 힘을 얻은 사례의 예로는 잃어버린 10년을 들 수 있다.

다만 정부는 과거 자산동결조치처럼 기업의 채무조정이 필요할 때 정공법보다는 편법을 씀으로써 금융업을 박살내고 대기업들의 편을 드는 등 애시당초 정부 정책 자체가 일단 투자 규모를 늘리고 보는 비합리적인 투자를 부추긴 점을 고려해야 한다. 사채 이자에 시달리는 기업인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추진됐던 조치였기 때문에, 자영업자들의 성원을 받기도 했다. 오죽하면 대우의 김우중 회장 등이 대마불사, 정부가 해주겠지 따위의 마인드를 가지고 안이하게 대처했다가 망했다! 애당초 포스코대한민국의 제조업 기업 대다수가 세계은행 등에서 채산성이 떨어진다는 판정을 받았다.

5.2. 야권 책임론

국내에서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 책임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실제로 김영삼 전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 행정부 관련 인사들이 DJ와 야당의 정리해고 같은 관련 법안 보이콧 때문에 초동 대응을 놓쳤다는 불만을 여러 경로로 표출한 적[12]이 있다. 굳이 따지자면 김대중이 신한국당의 "날치기를 막지 못한 결과물"이, 예전 군사정권도 금지하고 보던 "비정규직" 합법화와 인력업체의 창궐로 대한민국 노동계의 큰 해악을 끼쳤다는 막지 못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여권에서 정리해고안이 포함된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안을 단독 표결로 날치기 통과가 가능했을 만큼 의석 다수를 점유하며 단독 표결 통과가 가능할 정도로 총선에서 대승을 거둬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여당(신한국당)이 야당의 반대로 인해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던 것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 때는 YS의 차남 김현철정책 연구 및 여론조사를 담당여의도 연구소를 설립, 가동해 공천에 적극 관여해 성과를 거뒀는데, 입김이 점점 강해지자 이권으로 악용하는 기업들이 나타나면서 정권 말에 악재로 작용하기도 했다. 1997년 9월 이인제 경기지사가 의원 6명을 이끌고 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32석으로 79석의 국민회의 + 50석의 자민련을 뛰어넘는 과반수 정당 지위를 유지하였다.

1997년 6월 16일에 발표한 "중앙은행제도-금융감독체계 개편안"에 대한 금융개혁위원회 권고가 있었다. 한국은행의 은행감독권과 재정경제원의 증권/보험 감독권을 일원화한 금융감독원과 상위기구로 금융감독위원회를 총리실 산하로 출범, 금융감독 관련규정에 관한 제정/개정 권한과 금융기관 설립 인허가권은 재정경제원이 가지며, 특정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요구권/공동검사권과 금융통화위원회 의장 권한으로 통화 신용정책과 물가관리 목표 제시는 한국은행이 맡게 하는 금융개혁 법안이며, 당시 대한민국의 금융제도 정비로 건전성과 투명성을 강화하는 목표가 담겨있었다. 대다수의 내용이 IMF가 제시한 개혁안과 동일하다. 금융개혁위원회에서는 구제금융 요청 직전까지 위기가 일어날 수 있으며 개혁이 필요하다는 경고를 수차례나 국회나 교섭단체에게 보냈다. 이 개편안은 여권 단독표결로 밀어붙여도 통과가 가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선거 준비로 인한 대다수 의원들의 불참으로 법안 통과를 실패한다. 같은 해 봄부터 국회 안의 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은 위험하다고 주장하며 세미나도 했지만 외면이나 무시를 당하였다. 당시 김수한 국회의장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계속 나오지 않는 의원들 정말 명단 공개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게 뭡니까 지금! 정계 국회 마지막에! 라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자치적인 개혁으로 인한 극복을 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IMF 구제금융을 받은 직후 권고안에 따라 다시 통과되었다. 대한민국의 금융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내부 조정 메커니즘과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보다, 법안에만 매달렸던 점과 국민과의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한 것이 곧 실패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DJ의 재택근무 비서였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날치기 여파로) 여론이 먼저 뒤집어져서 야당이 굳이 나설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애초에 IMF 위기는 원화의 고평가, 외환보유고의 부실한 운용, 종금사의 채권운용 미숙 등으로 인해 발생한 금융위기에 가깝다. 그리고 당시 재경원이나 한국은행 등지 관료들의 노력으로 일본에서 1,000억달러 규모의 자금지원을 끌어들일 기회를 얻었지만, IMF 내 일본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철회된 건이 더 큰 사안인데, 야권을 탓하는 건 선거국면을 감안한 떠넘기기 성격이 강하다는 의혹을 살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KDI에서 97년 초에 위기 가능성을 시사한 보고서를 발간해 시중에 내놓은 걸 전량 회수한 게 강경식 부총리 산하의 재정경제원이다. 이 일과 외환위기 건이 빌미가 되어 강 전 부총리의 한나라당 입당이 거부되었다.

5.3. 펀더멘탈 문제론

경제 펀더멘탈(fundamental)이라는 어구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IMF 이후로, 당시 아시아 금융위기 가운데 한국 경제는 근본적으로 튼튼하다며 위기의 확산 가능성을 부인하려 하던 경제관료들의 수사가 언론을 타면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강만수 장관의 책에서 인용하자면 이렇다.[13]
경상수지 개선과 경제 구조조정을 위한 대책을 추진한 것은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다는 인식을 갖고있었다는 반증이다. 확실히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고 특히 경제수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 (중략) …대외신인도의 유지를 위한 전략 측면에서는 외국금융기관들이 급속하게 자금회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의 펀더멘틀은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그 말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 (중략) …내부에서도 펀터멘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 간부를 불러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도인 것은 사실이지만 외환사정이 날로 어려워가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다음 어떻게 대처하겠느냐고 물었다. … (중략)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는데도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고 비극이었다.

이것은 강씨나 우리 관료들의 창안은 아니고 외국의 평가이기도 했다. 외국 연구자들의 경우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한국은 산업구조가 튼튼하고 무역수지 흑자가 누적되고 있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1990년대 초중반 미국 연방준비제도에서 벌인 금리정책의 연쇄효과에서 비롯된 변동과 이에 따른 역내 외환시장 불안정에 금융부문의 문제가 터져나온 것이지 한국 경제 전반의 부실의 문제는 아니었기에, 인도네시아 등 다른 주요 피해국들에 비해 해외악성채무가 장기화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진단하는 것이 통설이다. 과도한 레버리지가 낳은 자본수지 왜곡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지만, (IMF 구제금융의 빠른 상환이 증명하듯) 단기적 유동성 악화의 초크포인트를 지나서라면 딱히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같은 신흥국으로 도매금으로 얻어맞은 측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연결되는 것이 IMF의 처방이 아닌 차라리 고정환율로 묶어놓고 여유자금을 방어에 쏟아부은 '말레이시아 방식'이 나았다는 자성론이다. 하지만 이는 더 나았을까는 둘째치고 애초에 현실적이지 않다. 1998년 1월에 외환보유고가 36억달러만 남았고 그나마 1/4분기에 대부분 지출될 예정이었던 우리나라와는 달리, 말레이시아는 180억달러를 환율방어에 쏟을 만큼 외환보유고에 여유가 있었다. 즉 하고 싶어도 말레이시아 방식은 불가능했다는 얘기. 추가적으로 말레이시아는 외환보유고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긴축재정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과는 반대로 오히려 양적완화를 통한 내수진작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했다. 더불어 말레이시아의 경우 보르네오섬 땅속에서 외환을 뽑아낼 수 있는 경제구조임에 반해 한국은 대외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라 외환의 부족은 말레이시아보다 더 치명타가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회의[14] 중 잠시 짬을 내어 강경식 한국 재정경제원 장관을 만났을 때도 나는 같은 우려를[15] 내비쳤다. 하지만 그는 (태국시장에 뛰어든) 외환투기꾼만 비난할 뿐 근본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또 대선이 눈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어서 집권당이 어떤 정책적 변화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관료들은 눈덩이 부채를 상환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금융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윌리엄 R. 로즈 전 시티은행 부회장(97년 당시 국제채권의원단 의장)

6. 영향


1997년 외환위기의 영향은 현재진행형이다. 당장 간단한 예시를 들자면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말단 공무원은 공부도 못하면서 별로 특기가 없는 사람들이나 일하는 곳이라 이야기하는 게 한국 사회의 중론이었고, 현대에도 나이 많으신 분들이나 보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공감되고 있기는 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1990년대 초반까지 대졸자의 수가 적었는데 거기에다가 경제가 호황이라는 점까지 겹쳐서 대학졸업을 하면 공무원보다 질 좋은 일자리를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봉급 수준이 별로인 공무원보다 돈 더 주는 사기업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 이후로는 공무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어, 공무원은 5급이든 7, 9급이든 응시생이나 합격자 대다수가 4년제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 이상이 다수이며 평소 본인이 공부를 잘 못했고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도전해서는 안 될 직종이 되었다.

6.1. 경제적 영향

IMF 주도의 신자유주의 처방을 받으면서 혹독하게 경제 체질이 바뀌었다. 문민정부 말기에 정부는 '세계화'를 외치며 신자유주의를 따르자고 했지만, 정작 한국 내의 모든 경제주체는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다. 물론 정부도 마찬가지. 누구도 준비되지 않은 무한경쟁의 세계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구조조정을 통해서 많은 기업들이 망했지만 살아남은 기업들은 더욱 강해졌다. 이 시기의 대기업들에 대해서는 "저승사자"라 일컬어졌던 이헌재 금융감독원 위원장[16]"악역"을 맡아 LG반도체 정리, 삼성자동차 매각 등 대기업들이 "확실한 시행이 전제된" 자체 구조조정계획을 세우도록 강하게 압박하여 30대 그룹 전원이 5일 만에 구조조정 계획수립 및 제출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이 구조조정계획을 다시 이헌재가 수장을 맡은 은행감독원에서 심사해 미비점을 보완하도록 독려하였다.

하지만 공적자금 180조원이 투입되었는데 그 중 70조원이 회수 불가 처리가 된 흑역사도 생겼다. 이 중 대우그룹의 부실로 투입된 공적자금이 29조 8천억원이었다. 살려서 회수한 돈이 더 많았지만, 그 중에 살리는 데 실패했거나 일부는 제도 미숙으로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공적자금 지원의 목적은 회사를 살려 업주에게 돌려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고용을 유지하고 산업생태계를 유지해 국가경제를 굴러가게 하며 회사를 살리는 데 있기 때문이었다. 회수 못 한 공적자금이라도 노동자 월급주는 데 들어갔다면 목적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어쨌든 최선은 회사가 자립하도록 하고 고용을 늘리면서 지원자금도 회수하는 데 있으니까. 2019년 초까지 68.9%가 회수되었다.

1997년 1월 재계 14위 한보그룹 부도를 시초로 3월 삼미그룹(26위), 5월 한신공영이 각각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자금난으로 부도 위기를 맞던 진로그룹은 4월에 부도유예협약을 급히 체결했으나 9월 진로 등 6개 계열사에 대해 화의신청했다. 대농그룹 역시 5월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했다. 7월에는 기아그룹(7위)가 부도나 하청업체 수만 개를 부도위기로 몰아넣었고, 철강/정유 등 연관산업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혀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기아사태 처리를 둘러싸고 김선홍 회장과 재경원이 힘겨루기를 하는 중에 노조가 파업해서 처리가 지연됐고, 이에 따라 국내경제 대외신인도 하락하고 외국투자자들이 철수하고 증권시장도 급속히 침체했다. 이에 정부는 10월 말 김선홍 회장을 경질시킨 후 진념 전 노동부장관을 법정관리인으로 선임해 한숨 돌렸다.

그 후에도 부도사태는 이어져 10월 쌍방울, 바로크가구, 태일정밀 등이, 11월 부도위기 중이던 해태가 화의신청하는가 하면, 뉴코아, 한라, 청구도 부도났다. 상황이 이리 되자 쌍용, 한화, 동아 등도 자금압박에 시달렸고, 이 중 쌍용은 쌍용자동차를 대우에 넘겨 한숨 돌렸다. 그 외 재벌그룹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렵긴 마찬가지였고, 당시 대기업들은 보유 부동산을 처분하고 매물로 내놨으나 매매가 제대로 안 됐다. 그뿐만 아니라 삼성, 현대도 대규모 조직감축 및 투자규모 축소 등을 발표했으며, 타 그룹들도 같은 조치를 내놓았다. IMF 관리 뒤에도 1998년 거평그룹, 1999년 대우그룹 등이 부도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대기업 부도행진은 증권 및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1997년 한보사태를 기점으로 관치금융에 익숙한 금융기관이 치명타를 입어 제일은행서울은행이 부실화됐고, 이후 잇다른 기업 부도행진으로 금융기관은 적자만 계속되어 동년도 9월 말까지 국내 25개 일반은행 및 6개 특수은행이 겪은 무수익 여신이 28조 2천 346억 원에 달했다. 특히 제일, 서은은 무수익 여신이 각각 4조 5,187억 원, 3조 4,568억 원으로 1, 2위를 차지했다.[17] 이러한 부실여신으로 인한 경영위기는 종금사들까지 덮쳤는데, 은행과 달리 담보 없는 종금사들은 태국 등 동남아에서 단기자금을 빌려다가 그 나라에 장기투자했었다. 그런고로 5월 태국 외환위기 때 해외 금융기관들이 돈을 회수하여 부실화됐다.

그런고로 1998~1999년까지 동남은행, 동화은행, 대동은행, 평화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 보람은행 등 여러 은행들도 모두 부도했거나 다른 은행과 합병되어 사라지기도 했으며, 보험업계에선 두원생명, BYC생명, 조선생명, 해동화재, 국제화재, 삼신올스테이트생명 등이, 증권업계에선 고려증권, 동서증권, 동방페레그린증권, 한국산업증권, 장은증권, 환은살로먼스미스바니증권 등이 각각 합병되거나 매각 혹은 퇴출되기도 했고, 설령 살아남았다 해도 외국자본 지분참여를 받아들여야 했다.


위의 동영상이나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30대 그룹 중에서 9개 회사만 남았다.

6.1.1. 혹독한 구조조정 요구

잘못을 했으면 계도를 할 것이지, 왜 죽도록 매를 때리는가?
ㅡ 같은 시기에 외환위기를 겪은 태국의 관료가 IMF의 "가혹한 처방"에 항의하면서 했던 말. 이 대사는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도 언급된다.

대한민국의 향후 10년을 IMF와 미국 재무부가 결정하였으며, 2010년대에도 이때 형성된 구조가 이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1997년 11월 12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동년 12월 3일 IMF는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승인했고, 더불어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개발은행이 4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여 총 350억 달러의 국제기관의 지원이 결정되었다. 다음날인 12월 4일 긴급히 55억 달러가 공수되었다. 그리고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호주가 지원을 결정함으로 200억 달러가 추가로 지원되어 총 550억 달러를 지원 받았다. 이 중 일본은행에서만 100억 달러 이상을 지원받았다.

여기까진 '국제통화기금' 이라는 단체명에 걸맞는 아주 시기적절한 조치였다. 하지만 IMF의 구제금융 210억달러가 한국에 유입되는 조건이 세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고금리, 다른 하나는 구조조정, 또 다른 하나는 공공재 영리화이었다.

첫째, 고금리. 시중 은행의 금리를 연 29.5%까지 올려야 했다. 당시 기준금리였던 콜금리는 40%였지만 당연히 콜은 하루짜리니까... 실제로 민간은행에 적용되는 기준금리인 RP(2008년부터 한국은행 기준금리 지표물이다) 금리는 27%까지 올라갔다. "고금리로 자본유입을 늘린다."는 명분이었지만 무수한 기업이 도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도 그럴 것이 금리가 인상되면 시중의 화폐유통이 경색되어 단기적으로 경기가 악화된다. 물론 실물경제 자체가 파탄나지 않는 한 단기적 악화는 원상회복이 될 수는 있으나 당장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 언제 원상회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시까지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확장을 거듭해온 국내기업들에게 초고금리는 기업의 부채상환부담을 가중시켜 연쇄부도를 발생시키고, 대량의 실업과 경기후퇴를 유발하였다.
결국 고금리정책은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98년 1월 하순에 국내 금융기관을 외국에서 인수 가능하게끔 하는 금융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IMF와 재협상해 이율을 낮추는 "항복 선언"을 하게 된다. 고금리정책의 이론 상으로는 "경기과열로 인한 물가상승 방어" 혹은 "경상수지가 급격히 악화된 국가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약"이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확인사살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극약처방이기도 하다. 또한 고금리 기조로 부채는 그 6개월간 오히려 더 늘었으며, 명예퇴직 후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개인사업자들은 높아진 이자를 갚기 위해 차환기채(돈 빌려 돈 갚기)를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채권시장은 "미약하다"는 표현으로 설명이 어려울 만큼 비활성화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투자자들의 자본 유출이 금리 때문이 아닌 동물적 감각에 의한 위험회피 목적임을 감안하면 현실성, 적절성 측면에서 비판이 나오는게 자연스러운 일. 결정적으로 당시 전년대비 1/3토막 난 주식시장으로 유입된 극소량의 외환이 고금리로 채권시장에 유입된 양보다 많았다.

게다가 고금리는 외자가 급했던 DJ정부의 다른 정책과 맞물려 현재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금융시장 개방 과정에서 일본 대부업 자본에 한국 시장을 열어준 것이다. 이 시기 일본 정부는 때마침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쿠자들의 자살보험 이용을 막기 위해 이자제한법을 만들었고, 그 영향으로 야쿠자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사채 사업의 수익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는 전통적으로 사채 관련 사업에 영향력이 있었던 나고야 계열 조직들의 입지를 크게 흔들었다. 야마구치 구미는 일본내에서 재일교포 간부 및 단원들의 비중이 높았고, 이들 조직원과 간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보유한 한국 내 커넥션을 활용하여 한국 사채사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정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사채를 단속하기 위해 만든 이자제한법 폐지를 진행하였고, 살인적인 고금리와 맞물려 일본계 사채업자들은 야쿠자조직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토종 대부업체들을 싸그리 밀어내 버리고 사업을 독점하게 된다. 산와머니로 대표되는 일본계 대부업체의 광고가 부쩍 늘어난것도 이것이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당시 가장 먼저 한국에 진출한 기업 중 하나인 아프로파이낸셜 대부(현재는 러시앤캐시로 유명한 기업)는 J&K 캐피탈이라는 일본 쪽 페이퍼컴퍼니가 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곳의 최윤 회장은 현재는 한국인임을 전면에서 강조하고 있지만, OK저축은행 문제로 국적 건이 논란이 되기 전만 해도 나고야 출신 및 나고야 대학원을 다녔다는 기록이 계속 남아 있었다. 결국 20년 정도가 되어 가는 2010년대에는 상장기업을 인수 경영하고, 기업인수합병의 큰 손으로 행동하고, 증권, 저축은행을 인수해 경영하는 데에 이르렀다.

둘째, 구조조정. 한국중공업, 한국통신, 한국전력, 담배인삼공사, 한국가스공사 등 굵직한 공기업들을 민영화 함과 동시에, 당시 공공부문 전체 인력의 20%인 14만 1천 명을 감원하였다. 그리고 대기업에서도 구조조정의 이름을 내걸고 명예퇴직, 희망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나올만큼 한국이 정말 막대한 빚으로 망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2008년 ~ 2015년 연간의 일부 유로존 국가들처럼 진짜 돈이 없는 경우와, 돈은 있는데 당장 상환할 외화만 부족했던 경우가 다를 수 밖에 없는 만큼 그 적절성 여부를 놓고 오늘날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전 산업계에 걸친 구조조정 유행으로 나온 것이 사내하청과 아웃소싱이다. 직영과 정규직을 줄이고 다단하청과 파견직과 비정규직을 대폭 늘리게 되었으며, 9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효과가 줄어들기 시작하던 낙수효과를 완전히 끊어 소득 양극화를 뚜렷한 사회현상으로 노출시켰다. 2010년대 노동관계 부조리의 많은 내용이 여기서 시작한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도 전보다 더 거세져 차기 정권인 김대중 정부는 노동운동권 자체를 경제활성화의 걸림돌로 보고 강경하게 나가기 시작했다. 1998년 만도기계 파업, 2000년 롯데호텔 및 사회보험노조 파업, 2001년 대우자동차 총파업이 대표적인 예이며, 이에 따라 구속 노동자 수도 늘어 문민정부 때 632명이던 게 2002년 기준으로 총 878명이 되었다.

사실 한창 어려울 때인 98년 전반기에 정말로 우리 경제에 도움되었던 건 해외 채권자들 특히 일본과의 채무조정(연장) 조치였다. 하지만 여기에 IMF가 한 역할은 미미하며, 포항제철 시절부터 대표적인 지일(知日) 인사인 박태준 전 국무총리가 협상에 나서서 이끌어낸 성과인 것이다. 그나마 일본 측은 미국 재무부장관 로버트 루빈의 압력 행사로 채무조정 약속을 틀었으며[18], 미국 재무부의 금융개방 개방, 수출다변화 정책 폐지 등의 요구를 수용한 후에야 비로소 IMF와 연결된 서구권 은행들이 대출 연장에 협조해주더라는 일화가 있다. 로버트 루빈은 노태우 정권 때 골드만삭스 회장 신분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해 사업을 하려 했지만, 우리 재경원 관리들의 비협조로 당국자를 만나는 일조차 여의치 않아 일이 틀어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금융가 어르신들의 탁상공론의 끝을 보여줬으며 차라리 채무재조정 외에 자금수혈, 만약 그것이 안되더라도 거시경제적으로 방임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고금리 정책이 아니었다면 비록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6.9%라는 재앙적 수준은 아니었을 거다. 경제회복은 어차피 드라마틱하게 폭등해 준 환율이 수출을 통해 이끌어 내주었을 것이고...

셋째, 공공재 영리화. 이집트의 빵 보조금 폐지, 볼리비아 수도 영리화 등에서 보듯 한국에서도 전기, 가스, 수도, 의료, 철도 등의 공공재 일부를 정부가 아닌 기업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참고로 이 부분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상태다.

이렇듯 가혹한 구조조치로 인해 오죽하면 사람들이 IMF를 조선총독부에, 감독관을 총독에 비유할 정도였다.

6.1.2. 변한 자가 살아남았다

다만 살아남은 기업들에게는 뼈아픈 충고가 되었다. 정말 300%~400%라는 (2010년대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부채율을 가진 건실한(?)[19] 기업들은 부채의 감축에 온 역량을 퍼부어 현재는 건실한 기업 치고 100%를 넘는 곳이 드물고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위기면역력과 긴축경영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잃은 것에 비하면 적은 소득이지만... 물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제는 조금만 경제상황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하면 긴축경영이다 위기상황이다 하여 신규채용억제, 인원감축, 아웃소싱, 비정규직 이용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지나칠 정도로 고용을 줄여 실업이 늘고 고용상황이 안 좋아지는 부작용도 있다. 솔직히 1997년 이전 당시 대학만 졸업하면 기업에서 모셔간다는 것이 사실이었던 것은 결국에는 그 과잉투자 때문이었으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신입 100명이 필요한 기업이 외환위기 이전에는 향후 성장할 것을 대비해서 입도선매 차원에서 정규직 150명을 채용했다면, 지금은 향후 나빠질 것을 대비해서 50명만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50명은 비정규직, 아웃소싱 등으로 채용하여 언제든 필요에 따라 줄일 수 있도록 바꾼 셈이 된다. 또 선단식 경영의 핵심이던 참모조직 '비서실'이나 '기획조정실' 등을 '구조조정본부'로 바꿨으나, 시간이 갈수록 문어발, 황제 세습 등 문제점이 점차 폭로되자 2003년 들어 삼성, 한화 등 일부 그룹을 제외하고 모두 조직이 해체되었다.

외환위기 이전 시대 회사들의 수백 %가 되던 부채비율은 IMF 이후 세대가 보면 기절할 노릇이지만 숫자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맞는 시각이라고 볼 수 없다. 이전에 그런 부채비율을 가지고도 기업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장과 매출과 고용이 계속 확장되어 왔던 것이 이전까지의 국내외 경제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90년대 들어 그것이 불가능해지고 있는데도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며, 그런 부채비율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수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지금의 신흥국 시장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로 부채비율 하나에만 매여 있지 말고 그 나라 자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파일:external/openstock.kiwoom.com/%C2%F7%C6%AE_IMF.jpg

수입선다변화 정책도 이 외환위기로 인하여 조기에 폐지되었다(1999년 7월 전면 폐지).

6.2. 정치적 영향

이로 인해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공약 당시 한국병을 반드시 고치겠다고 주장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인기가 절정을 달렸지만 1996년을 기점으로 지지율이 떨어지더니 오히려 임기말에 한국병을 고치기는 커녕 한국병을 부르게 한 원흉으로 전락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아가며 퇴임하였다. 대선을 앞두곤 신한국당 지지자들과 이회창 대선후보가 YS를 비난하고 YS 인형 화형식까지 펼치며 현직 대통령을 사실상 당에서 쫓아냈다. 사실상 외환위기가 김영삼의 정치생명에 사형선고를 내린 결정타였던 것이다. 퇴임 이후에도 김포공항에서의 빨간물 계란투척 사건, 고려대학교 특강 무산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김영삼을 특강자로 초청하였는데 이에 고대생들이 반발하는 뜻으로 김영삼이 탄 차가 학교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는 바람에 김영삼은 차안에서 수 시간 밀봉된 상태로 있었으며 꼼짝없이 차안에 갇힌 탓에 분유통에 소변을 봤다는 그야말로 굴욕을 당했다. 결국 김영삼은 강연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고대생 한 명이 김영삼에 손가락질을 하여 김영삼 개XX라고 욕까지 하는 바람에 민주산악회 회원들로부터 멱살을 잡히기도 하였다. 결국 그로 인해 고려대 총장이 학생들을 대신해서 김영삼에게 사과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때 김영삼과 동행했다가 곤욕을 치른 인물 중 하나로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화정 김병관이 있다. 김병관도 그 현장에서 "나 이사장인데..." 같은 소리를 해서 망신을 당했다. ~ 한국병은 과거부터 만연했으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단어의 원조가 한국병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

심지어 퇴임 뒤인 1998년 3월 당시 PC통신 유니텔이 네티즌 1,78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김영삼은 '역사상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인물' 1위에 뽑히고 말았던 것이다. 대통령 임기 초기인 1993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을 제치고 무려 인기유명인 1위에 올랐던 것을 생각한다면, 김영삼은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급전직하한 것과 다름없었다. 2위는 전두환 전 대통령. 반면 '존경받아야 될 인물' 1위로는 백범 김구 선생, 2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선정되었다. 그 뒤는 충무공 이순신, 세종대왕, 김대중 대통령이 뒤를 이었다. 사실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 경제가 망한 뒤에는 그와 관련해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가 기억나는 법이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경제적 업적을 남겼다고 알려진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리는 것이 특별히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1997년의 이 참사는 15대 대선에서 후보들 간에 'IMF 재협상론'을 놓고 격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신한국당한나라당이회창 후보에게 신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어느 나라를 봐도 나라가 부도가 난 때에 여당인 쪽이 차기 선거에선 지기 마련이다. 대선 경선 결과에 불복하여 독자 출마한 이인제 후보가 여당표 500만 표를 분산시키지 않았다면 김대중 후보의 당선은 아마 어려웠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이인제의 표가 과연 여당표였는가라는 의문을 가질수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국제적인 인지도를 통해 IMF를 비롯, 국제 외교로 경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부분과 자신이 이미 대중참여경제론 같은 경제학 책까지 집필한 경제 전문가였다는 것을 어필했었다. DJP 연합으로 인한 충청권 유권자들의 가세와 앞선 각주에 쓰여져 있듯 이인제 후보로 인한 득표 분산 등이 더 컸다는 분석도 많다. 자세한 건 15대 대선 문서를 참조.

그리고 국민의 정부 하에서 흔히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친 시장적 정책이 적극적으로 실행되었고, 이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전후무후하다고 할 정도였다. 신자유주의라고 하면 이명박 정부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오히려 이명박 정부는 IMF 이전에 가까운 국가주도 정책을 폈다. 그 예로 당장 대표 정책이 4대강 사업. 1996년 연말 여당의 1996년 노동법 날치기로 도입된 유연화된 노동제도도 서서히 진행되다가 이 위기로 인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물론 정리해고 같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 이전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직접 우리나라를 방문해 1997년 대선 유력 후보 3인(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모두에게 다음 대통령이 되면 IMF가 요구한 조치를 따르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아놓았던 데다가, IMF의 구제금융을 무조건 받아야만 국가 신용이 유지되는 상황이었기에 누가 당선되었더라도 정리해고 조치와 공공재 영리화를 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기는 하다.

곁다리 얘기로, 1997년 동아시아 외환 위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내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가장 크게 내홍을 겪은 곳은 인도네시아로, 30년간 독재를 해온 수하르토 대통령이 시민혁명에 의해 물러났고 이후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됐다. 인도네시아 치하에서 억압을 받던 동티모르가 독립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덤이다.

6.2.1. 국방력에 미친 영향

1997년의 외환 위기는 국방력의 증대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도입 과정에서 취소되거나 지연된 경우가 많았다. 아래의 경우가 극히 일부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한민국 공군은 1980년대 후반 F-16C/D 블록 32형(F-16PB/PBU)이 도입되고 1991년 KFP 사업으로 F-16C/D 블록 52형(KF-16)이 선정된 이후 1993년에 공군력 강화를 위해 F-15급 전투기 120대를 도입할 계획(1차 FX 사업)을 발표했고, 1996년 서울 에어쇼에 후보기종인 프랑스의 라팔, 러시아의 Su-30Su-37, 미군의 F-15C와 F-15E가 참가하여 시범비행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외환 위기로 국방비가 대폭 삭감되면서 사업이 일시 취소되었다가 도입 댓수를 40대로 줄여서 겨우 1999년에 FX 사업을 시작하여 F-15K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F-15K는 2차사업을 통해 총 61대까지 확보하였으나 원래 예정했던 120대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댓수였고 그나마 2018년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3차 FX로 F-35가 40대가 도입될 예정이지만 여전히 원래 예정한 120대에 비해 20여대가 적은 수준이다. 이후 F-15K는 2대가 사고로 추락하여 2019년 현재는 59대를 보유하고 있다.

그 결과 원래는 FX 사업 종료와 함께 퇴역해야 했을 F-4 팬텀의 경우, 2018년 현재 RF-4C와 F-4D는 퇴역했지만 여전히 F-4E는 현역에 남아있는 상태이고 2024년까지 운용할 예정이다. 하지만 로우급의 F-5KF-X가 어느정도 배치된 2030년에 전량 퇴역할 예정. 그나마 미디움급인 KF-16(블록 52형)이 원래는 120대만 양산되고 마무리 될 예정이었으나 외환위기 시기를 전후로 KF-16 추가 생산이 산자부 예산으로 진행되어 2000년대 중반 KF-16은 140대가 양산되었다. 그 결과 F-16 계열(F-16PBU, KF-16)은 2019년 현재 167대를 운용하고 있다.

게다가 1990년대 조기경보기와 공중급유기 도입 사업도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상당히 지연되었다. 정확히는 1990년대 후반에 조기경보기 도입 사업으로 E-767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조기경보기가 도입된 것도 2010년대가 되서야 E-737을 도입했다.

공중급유기 도입 사업도 상황은 비슷해서 1990년대부터 계획에 있었지만 1997년의 IMF 외환위기로 연기 되었고, 이후에도 E-X, 1차 FX 사업 등에 번번이 우선순위가 밀렸다. 영토 밖으로의 원거리 작전을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이후 조기경보기와 비슷하게 2010년대에 A330 MRTT가 선정되었고 2018년 하반기에 1호기가 도입되었다.

대한민국 해군도 본래 18척의 현대적인 구축함을 확보하기로 했던 KDX 사업이 대폭 지연되었고, KDX-1, 2, 3을 합쳐 총 12척으로 목표 수량의 2/3 밖에 도입하지 못했으며 특히 그중 가장 주력 임무를 담당해야 할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은 해외파병 임무까지 겹치면서 혹사당해 예상 수명보다 빨리 퇴역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이지스 구축함인 KDX-3 사업 자체가 불투명해져 원래 KDX-3급의 함급명으로 아껴뒀던 충무공 이순신의 존함이 KDX-2의 함급명으로 격하된 것도 그 영향이다.

게다가 1990년대 초반에 경량 항공모함(혹은 김영삼 항모)을 건조할 계획도 있었다. 물론 당시 국방부나 군 고위 관계자들이 '경항모의 도입은 주변국의 군비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며 결국 예산은 전액 삭감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때마침 터진 외환위기 때문에 계획은 공식적으로 백지화되었다.

대한민국 육군도 120mm 주포 장착 전차인 XK2의 도입 사업이 연기되어 K1 전차를 개량[20]한 K1A1 전차 추가생산으로 버텨나가야 했으며 AH-X(공격헬기 구매)도 진행될 예정이었다. 당장 AH-X 사업은 90년대 초반부터 구상되어왔으며 80년대말 중형공격헬기 AH-1S 도입 이후 공격헬기의 대형화 추세에 따르기위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IMF 사태에 따른 예산문제 등으로 표류하고, 2000년대 들어서는 KMH공격형에 우선순위가 밀려 잠정중단되었다. 즉 원래는 1990년대 초반부터 구상되어온 사업으로 AH-1 코브라를 대체할 목적으로 AH-64를 도입할 예정이었다. 역시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지연되서 이후 2010년대가 되서야 AH-64E의 도입이 완료되었다.

게다가 K1A1 전차의 경우 2010년까지 480여 대가 양산이 되었는데 IMF 외환위기로 예산 부족 등의 영향으로 약 480여 대에서 적은 수량이 양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나마 경제상황이 좋아지면서 다시 복구가 되었다. 그나마 XK2는 2007년에 시제 전차가 등장하고 2014년에 1차 양산분이 실전배치 되었고 2차 양산분 이후는 2019년부터 진행될 예정.

6.3. 사회적 영향

6.3.1. 철도 및 항공 교통업계

IMF 사태 직전까지만 해도 신도시 건설 및 교통수요 증가, 도로교통 인프라 치중 등에 따른 낙후 등으로 많은 역이나 공항 등의 시설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헬게이트가 열리는 곳이 많았다. 가뜩이나 2002 한일월드컵 유치에 성공하며 전체적인 철도 항공 교통시설의 확충이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고속철도, 신공항, 지역별 지하철 신설계획 등 대규모 SOC 확충 계획들이 세워졌는데, 문제는 이 계획들이 세워진 시기가 대부분 IMF가 터지기 직전인 90년대 초중반이었다는 것. 많은 SOC 확충 계획들이 착수하기도 전에 외환위기가 터졌고, IMF가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개입하면서 대부분 폐기되거나 갈아엎어졌다. 이미 벌여놓았던 공사들의 경우 공기가 늦춰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대부분 공사들이 월드컵 즈음까지는 완공하는 것으로 계획되었으나, 외환위기는 그 대부분의 계획을 지킬 수 없게 만들었다.

IMF 사태를 겪으면서 철도업계의 도시철도 사업도 큰 타격을 받았는데 서울 3기 지하철 계획서울 지하철 9호선과 3호선의 오금 연장을 제외하고 전부 폐지되었고, 부산 4호선과 5호선, 대구 3~6호선, 대전·광주 2~5호선, 인천 2~3호선, 부산 3호선 반송선(이후 4호선으로 분리된 그것) 등 수많은 계획들이 지연 및 변경되거나 폐지되었다. 이 때까지의 부산 4호선은 부산항 앞바다에 인공섬 해상신도시를 매립해 연결하는 노선으로, 이후 2011년 3월 30일에 개통한 부산 도시철도 4호선(반송선)과는 전혀 다른 노선이다. 서울의 3기 지하철 계획이나 부산 도시철도 5호선처럼 같은 시기에 외환위기로 백지화되었던 다른 노선들은 대부분 경전철로 대체되어 재추진 중이지만, 이 경우 노선의 핵심인 부산 앞바다 인공섬 계획 자체가 무산되면서 부활의 여지도 없이 완전히 폐기되었다. 추후 인공섬 대신 북항 재개발지구로 지정되어 개발이 한창 진행중에 있다. 또 대구지하철공사 측도 외환위기까지 겹쳐 1호선이 적자만 나자 빚을 갚기 위해 인력 감축을 거듭 감행했는데, 이는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를 야기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됐다.

많은 비용이 드는 당시 대부분의 지하 유인 운전 중전철 계획들은 현재 지상 무인 운전 경전철(모노레일 포함) 계획으로 대체되어 각지에서 건설되거나 운행되고 있다. 광주광역시 같은 경우는 1호선을 추후 계획 노선들의 환승용 보조 노선으로 먼저 착공하였지만, 2~5호선의 추후 계획이 전부 취소됨에 따라 1호선만 제대로 추진되어서 공기수송하는데 재정 부담의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다. 또한 고지가 눈앞이던 경부고속선 공사 또한 외환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도중에 공사가 중단되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고속선 완공을 제 시간에 이루지 못하였으며 대구~부산 구간은 도중 예산 절감으로 인해 고속선에 쓰이는 CWR 공법을 쓰지않고 기존 공법으로 레일을 깔았으며 이 구간의 고속선 공사가 끝날 때까지 기존 경부선을 전철화시켜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래도 다른 간선, 도시철도 계획들은 모조리 취소되었지만 고속철도 계획의 경우 이미 서울에서 부산 방향으로 60%이상(서울~대구) 토목 공사와 시설 설치(교각, 터널, 선로, 가선, 신호)를 완료해 놔 도중에 중단하기 뭐한 상황이었기에 정부에서 되도록이면 살리려 했다고 한다.

사실 국제통화기금이 전면적으로 각 지방자치단체도시철도 계획을 철폐한 것은 아니었다. 지자체들이 도시/광역철도를 계획할 때 민자사업을 유도하여 당시 위기에 빠진 기업들을 구제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의도는 좋았다. 계획상 보면 알겠지만 3기 지하철 계획이나 각 지방들의 철도 사업은 지금 추진하려 해도 각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을 엄청나게 압박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대규모 사업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100% 세수만으로는 불가능했고, 처음에는 민자사업을 다들 고민했었다. 서울 지하철 9호선 등 일부는 민자사업으로 사업이 성사된 것.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시 민자사업을 할 수 있을 법한 수준의 기업들이 외환위기 과정에 줄줄이 쓸려 나갔으므로 추진 주체가 없어서 무산된 것. 나중에 현대자동차그룹이 출자한 서울 지하철 9호선 정도만 부활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정부가 국고에 돈이 없는데 공공사업을 벌여 경기순환을 진작시킬 필요는 있었기에, 김영삼 정부 때 시작된 민자사업 형태의 공공사업 집행을 김대중 정부 때 크게 확대해 도로망을 확충하는 등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시행착오가 많아서 눈뜨고 코베이는 상황을 자초하기도 했고, 지역 정치인과 발주자와 채권자와 평가용역기관이 돈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이것은 김대중 정부 말기에 가서 고쳐지기 시작했고, 이후 정부는 민자사업을 엄격하게 심사하고 이미 집행된 사업에 대해서는 부채 재조정 등 뒷처리에 힘쓰는 처지가 되었다.

항공 교통 측면에서도 타격이 심했는데 수많은 외국 항공사들이 이 당시에 한국 노선을 단항하거나 운항 횟수 또는 운항 항공기 규모를 축소시켰다. 이때 철수한 다수의 외국 항공사들은 IMF 사태가 극복되고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후 하나둘씩 한국 노선 운항을 재개했다. 인천국제공항도 외환위기로 인해 개항이 지연되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1년 전인 2001년에야 간신히 개항되는데 성공했다. 아직도 여러가지 이유(대형 한국 국적사들의 텃세,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보다 작은 시장 규모, 안보 리스크 등)들을 이유로 복항하지 않고 있는 항공사들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콴타스가 있다. 그리고 대형 한국 국적사들도 이때 이용률이 저조한 상당수의 노선들을 정리했다. 한국 노선 철수 이후 아예 항공사 자체가 망하는 바람에 복항하지 못한 항공사들도 있다. 예를 들면 안셋 오스트레일리아 항공이나 스위스에어. 반면 핀에어아메리칸 항공처럼 외환위기 이전에조차도 한국에 관심이 없다가 2000년대 후반 이후에야 한국 노선에 취항한 항공사도 있다.

6.3.2. 자동차업계

현대자동차가 한국 시장의 최종 승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 동안 치열한 경쟁을 벌인 기아자동차대우자동차, 쌍용자동차가 모기업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매각됨에 따라, 기아차를 흡수한데다 유일한 국내 업체로 남은 현대차의 위상이 한층 높아지게 된 것이다. 삼성자동차가 가성비 및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A/S로 추격에 나섰다. 모든 조건 기간, 기한이 현대차보다 많았다고 한다. 예) 10만km까지 무상 돌봄(현대차 : 5만km) 그러나 기존 시장의 진입장벽을 극복 못하고 결국 르노에 지분 거의 대부분을 P&A로 매각하고 만다.

이 시기쯤에 양산할 예정이었던 스포츠 컨셉카인 르노삼성 SSC-1쌍용 W 쿠페가 이 사태로 취소되어 영원히 베이퍼웨어로 남게 되었다. 만약에 양산되었더라면 어울림 스피라보다도 5년~13년 앞선 국내 스포츠카로 등극했을 것이다. 굳이 5년~13년이라고 적은 이유는 스피라가 2002년부터 등장했지만 정작 양산화는 2010년에서야 진입하게 되었다.

6.3.3. 체육계

KBO 리그의 경우, 모기업이 직접 부도를 당한 해태 타이거즈쌍방울 레이더스는 선수를 팔아서(혹은 선수 임대) 연명했고, 이 때문에 하위권을 전전했다. 해태는 그나마 상황이 괜찮던 1996년 시즌을 앞두고 선동열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료 30억원을 받고 임대보냈으며,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자마자 이종범을 50억 이상의 이적료를 받으며 주니치 드래곤즈에 보냈고, 조계현을 5억에 삼성 라이온즈에 양도했다. 이듬해인 1998년 시즌이 끝나자 임창용을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에 20억원을 얹어 삼성으로 다시 보내야 했다. 또한 지명했던 유망주인 서재응, 김병현,최희섭이 MLB로 가는 것을 손가락만 빨면서 지켜보아야 했다. 쌍방울은 그마저도 없어서, 1997 시즌이 끝나고 박경완을 이근엽+김형남+9억에, 1998 시즌 중에는 조규제를 박정현+가내영+6억에 현대 유니콘스로 양도했다. 1998 시즌이 끝나자 김기태와 김현욱을 양용모, 이계성, 20억원과 묶어서 삼성과 트레이드를 했다. 게다가 쌍방울은 1999년에 2군도 아예 없애버렸다. 해태는 2001년 시즌 중 현대자동차그룹에 인수되어 KIA 타이거즈로 재탄생했고, 쌍방울은 아예 팀이 해체되어 SK그룹이 자유계약이 된 쌍방울의 선수단 및 지명권을 인계하고 SK 와이번스재창단했다. 즉 실질적으로 쌍방울을 흡수했으나 형식적으로는 구단 자체를 인수한 게 아니다. 게다가 하이닉스가 최대주주였던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 이전문제가 겹치면서 인천 야구의 정통성 논란이 터지게 되었다. 상세 내용은 삼청태 문서를 참고.

K리그의 경우 부산 대우 로얄즈현대산업개발에 인수됐다. 부산 아이파크는 대우 로얄즈 시절 축빠이던 대우김우중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안정환, 김주성 등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앞세워 K리그 최고의 인기구단중 하나이자 강팀으로 군림했었다. 그러나 대우그룹의 도산으로 구단 해체 위기까지 갔다가 간신히 현대산업개발에 인수된 이후로는 기업구단답지 않은 투자로 점차 상위권에서 밀려나더니, 끝내는 2015년 기업구단 최초로 2부리그인 K리그 2로 강등됐다. 야구도시로 알려진 부산이지만, 김용희의 588에 힘입어 롯데 자이언츠 이상의 인기를 누리던 90년대 대우 로얄즈를 생각해 보면...

대전 지역의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창단했던 대전 시티즌도 계룡건설을 제외한 다른 구성 기업들의 도산으로 계룡건설의 후원으로 근근히 버티다 끝내 2006년 완전한 시민구단으로 전환했다. 시민구단화 이후 고질적인 재정난으로 역시 2부리그나 들락거리는 신세. 이 여파는 실업축구라고 안심할 수는 없어서 1997년에는 국민은행 축구단한일은행 축구단, 기업은행 축구단, 이랜드 푸마가, 1998년에는 (구) 할렐루야 축구단과 한일생명 축구단, 주택은행 축구단이 모두 각각 해체되었다. 그리고 할렐루야의 이름만 계승한 끔찍한 혼종이 등장하게 되는데...

프로농구광주 나산 플라망스도 역시 모기업인 나산그룹이 망해서 이후 골드뱅크-코리아텐더로 2단 변신 후 2003년 말 KTF(현 KT)에 인수되게 된다. 한편 여자농구의 경우 남자농구가 프로화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프로화에 의지가 없는 팀들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프로화를 준비했으나 IMF 이전에 13개 팀이었던 것이 5개 팀으로 반토막 이상이 나는 후유증을 겪게 된다. 여자농구팀을 운영했던 다수의 팀들이 은행권 팀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는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음이 분명하다. 실업 리그였지만 거의 프로리그나 다름없었던 배구 역시 전설의 남자배구팀인 고려증권 배구단이 모기업의 부도로 1998년을 끝으로 해체됐고, 여자배구는 더욱 더 심한 상황이었던지라 9개 팀이 5개 팀으로 쪼그라드는 암흑기를 맞았다. 후지필름, 효성, 한일합섬, SK케미칼이 해체됐다.

민속씨름(프로씨름)의 경우 1997년에 부산조흥금고 호랑이, 세경진흥 사자(구 삼익가구 사자)가, 1998년에 일양약품 원비[21], 청구 청룡, 1999년에 동성[22] 백호(구 한보 멧돼지), 진로 두꺼비가 각각 해체되었다.

이 사태로 인해 올림픽아시안 게임에서 매회 메달을 따는 비인기 종목들도 안전할 수 없었다. 1997년에 국민은행은 테니스팀 및 사격팀을, 기업은행은 사격팀을[23], 해태그룹은 역도팀을, 극동그룹은 동서증권 양궁팀을, 동아그룹은 동아증권 탁구단을, 외환은행이 여자 탁구단을 각각 해체한 걸 필두로 1998년에 제일제당은 자사의 마라톤팀, 쌍방울그룹은 야구팀에 앞서서 쌍방울 마라톤팀과 석탑건설 아이스하키단을, 조흥은행은 사격팀을, 1999년에 주택은행은 사격팀, 2000년에 대우중공업이 테니스팀을 각각 해체했다. 그 여파 때문인지 몰라도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평소 10위권보다 낮은 종합 순위 12위라는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6.3.4. 대중문화/IT 업계

대중문화 업종도 심한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 산업 특성 상 국민생활이 윤택해야 꽃피는 게 문화인데 이 때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

특히 환율에 영향을 받는 외국 뮤지션 공연의 경우 갑자기 뛰어오른 환율 때문에 공연 기획사들이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물론 1998년 메탈리카 내한 때처럼 기획사에서 한국의 사정을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개런티를 25만 달러나 깎아주는 대인배적인 사례가 있기는 했다. 그리고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 분야는 투자자나 유통사들이 대거 발을 빼면서 기존의 시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현상을 겪기도 했다.

특히 1998년에 방송된 국산 애니메이션 스피드왕 번개의 경우, 당초 반응이 좋으면 세계무대를 배경으로 한 시즌 2 제작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흥행도 좋은 편이었으나 이 사태의 여파로 인해 그대로 시즌 2 제작계획이 엎어져 버렸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TV 방영을 시작한 바이오캅 윙고삼성그룹 계열의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프로젝트였지만 역시 외환위기로 삼성그룹이 해당 사업을 접게 되면서 이후 VHS 타이틀로만 출시되고 DVD로는 아예 출시조차 되지 않은 채 잊혀졌다.

출판만화 역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청소년보호법 파동의 여파와 외환위기 콤보로 1998년에는 성인만화잡지 <미스터 블루(세주문화)>, <매주만화(트루패밀리[24])>[25], <투엔티 세븐(도서출판 대원)>이, 2000년에는 <빅 점프(서울문화사)>까지 각각 폐간되었다.

기타 출판계도 1997년 고려원을 필두로 수많은 출판사나 도매상들이 부도를 내거나 문을 닫았고, 살아남은 출판사들조차 정부에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출판 트렌드도 시나 소설 대신 경제서적 중심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문인들도 주 독자층인 고학력/사무직 여성들이 대거 이탈하고 영상매체 보급으로 힘들어했다.

신문을 비롯해 케이블 TV, 비디오 유통, 게임, 영화배급 등의 대중문화산업에 참여했던 여러 대기업들도 관련 사업을 접는 상황이 벌어졌다. 1997년 대농그룹이 코리아헤럴드-내외경제신문을 신동방그룹에 넘긴 걸 시초로 하여 경향신문문화일보를 각각 소유한 한화그룹과 현대그룹은 1998년에 각각 두 신문사를 분사시켰고, 1999년 삼성그룹과 롯데그룹도 중앙일보국제신문을 각각 분리시켰다. 하지만 문화일보는 여전히 현대중공업의 영향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현대중공업 출자 공익재단이 상당수 지분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요 언론사들도 직제를 축소/개편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지역 언론사들도 사정이 좋지 않아 1998년에 부산매일이 폐간되었고, 2000년에 영남일보가 부도났다. 그 외에 1987년 정간법 제정 이후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던 영세 지방신문사들도 발행을 중단하거나 폐간하기도 했다.

별도로 '삼성영상사업단'이란 미디어그룹을 만들어 운영했던 삼성그룹Q채널, 바둑TV, 캐치원 등 케이블 TV 채널들을 중앙일보로 넘겼고 영화, 음반, 비디오 부문을 정리하거나 분사하였다. 시사영어사는 1997년에 교육채널 마이TV를 선경그룹에 넘겼고, 두산그룹 계열사 오리콤은 교육채널 두산슈퍼네트워크를 1998년에 재능교육으로 넘겼다. 현대그룹 역시 현대방송을 1999년 넥스트미디어그룹으로 넘겼다. 그 외에 한샘출판도 교육채널 다솜방송이 1998년 케이블 사상 최초로 부도를 맞자 이듬해 TV홈마트에 넘겼다.

게임 분야에서는 PC 게임의 경우 LG그룹 역시 게임사업부를 분사하여 현재의 한빛소프트로 분할 설립하였으며 비디오 부문은 정리하였다. 마찬가지로 SK그룹 역시 계열사 SKC 사업분야 중 하나였던 게임사업도 위자드소프트란 업체로 분사시켰으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비디오사업부는 정리되었다. 게다가 이 무렵에 번들 CD 경쟁시대 과열,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 및 온라인 게임 시장 확대 등으로 인해 국내 패키지 시장은 점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콘솔 게임은 마지막 대기업 정식수입 콘솔이었던 현대 컴보이 64가 현대 왕자의 난과 IMF까지 겹쳐서 망했어요가 되어버렸다. 이보다 그렇지 않아도 IMF 이전부터 수입선다변화, 일본문화 봉쇄 등의 영향으로 반쯤 블랙마켓이었던 상황에서 불법 보따리장수를 통한 정품 구매층조차 철처하게 박살이 나서, 2002년 PS2가 한국시장에 진출하기전까지는 PC 게이밍보다도 더 복사문제에 훨씬 둔감한 시장이 되어 버렸다. 타 소프트웨어 시장도 마찬가지여서 정부의 지원 해지로 수많은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들이 문을 닫거나 매각됐으며, 특히 부도 위기를 맞던 한글과컴퓨터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아래아 한글 개발중단 조건으로 한국마이크로소프트와 합작을 시도했다가 시민사회단체의 줄기찬 '아래아 한글 살리기 운동'으로 철회했다. 대신 '아래아 한글 8.15 특별판'을 1만 원에 출시해 국산 워드프로세서 사용을 권장코자 했다.

이외에 대우그룹 모기업 (주)대우도 비디오나 케이블 TV 관련 부문 역시 정리하거나 다른 기업으로 매각했다. 현재의 OCN이 초기에 대우에서 설립한 영화전문채널이다. 당시 삼성, LG, 대우 등은 TV와 VCR 등의 영상 및 음향가전 하드웨어를 생산,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련 소프트웨어 분야에도 손대면서 시너지효과를 얻고자 하였다. SK의 경우 SKC에서 비디오테이프와 CD 등을 직접 생산하였기 때문에 역시 영상, 음반 분야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신흥 미디어재벌이던 제일제당동양그룹이 그 빈 자리를 메꿨으며, 제작투자도 대기업 대신 중소 벤처창업투자사나 금융권 중심으로 변경됐다. 당시 소규모였던 몇몇 연예 기획사들이 잇따른 아이돌 그룹의 대히트로 대형화된 상태다. 또한 대종상의 후원기업인 쌍방울이 부도나면서 1998년에 대종상이 일시적으로 폐지된 적이 있다. 당시 스몰마켓이던 인터넷 업계도 좀 타격을 입었는데, 1998년 두산정보통신이 '인터피아'를 아이네트에 넘겼고, 한글과컴퓨터도 '심마니'를 데이콤에 넘겼다. 1999년 현대정보기술이 '신비로'를 온세통신에 넘겼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특기할만한 점은 나라종금 등등 일부 종금사들이 일본에서 끌어온 단기 차관을 연장시킬 방안으로 일본에 문화시장을 개방해야 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미투자협정에 따라 국산 영화 스크린쿼터를 축소해야 됐다는 것이었다. 경제난으로 투자 활력이 떨어진 문화산업계였던 만큼 이 조치는 큰 폭탄과 다름없었고, 정부가 스크린쿼터 축소로 선회하자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의 종말이 찾아온다'며 명동성당으로 몰려가 시위하기까지 했다.

이 무렵에는 만화 분야처럼 사실상 준개방 상태에 있는 분야가 적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중화문화권에 흡수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저력을 대통령 및 정부 관계자들이 언급하곤 했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사건이었던 것. 지금에 와서 보면야 선택권 면에서야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이것이 문화 침체기 이후에는 전화위복이 되어 문화시장의 혁신을 이끌어내 결국 한류가 나올 수 있지 않았냐는 시각도 드물게 있다.

사회적인 흐름으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경제적 부흥에 힘업고 '신토불이' 등의 레토릭으로 서서히 강해지고 있던 일종의 국수주의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걸 들 수 있다. 개인주의를 서구의 퇴폐적 풍습으로 여겨 배척하던 사회적 풍토가 어쨌든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아서, '한국적인 가치'에 대한 선호가 완전히 박살나고 자국혐오나 미국병도 심해졌다고 보는 사람도 꽤 있다.

그리고 1980년대를 비롯한 대중음악 순위 프로그램의 레전드였던 가요톱10이 폐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IMF 외환위기(구제금융) 때 "국민이 절망에 빠져있는데 연예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종영시켰다. 물론 진짜 목적은 긴축 경영의 일환이었다. 몸 값이 비싼 아이돌 가수들을 불러서 가요 프로그램을 찍는 것은 제작비가 많이 든다. 그 후 시청자들이 KBS에 전화를 하면서 항의를 하는 등 후폭풍이 엄청나게 안 좋게 되자, KBS에서는 땜빵용으로 <브라보 신세대>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방송했지만 당연히 인기를 끌지 못했고, 다시 가요톱10의 뒤를 잇는 대중음악 순위 프로그램 뮤직뱅크가 신설되어서 1998년 6월 16일부터 현재까지도 방송을 하고 있다.

한편 IMF 외환위기 당시 프리랜서 연출자들의 영화감독 데뷔작이 될 뻔한 <제이슨 리>(고석만) <쿠데타>(김종학) 두 작품은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무산됐고, MBC가 예전 인기 드라마 작품들을 재방영했으며, SBS는 김종학 감독이 프리랜서를 선언한 후 처음 연출한 모래시계모래시계를 시청하지 못한 비 수도권 민영방송 시청자들을 위한다.'라는 그럴싸한 명목 하에 98년 1월 14일부터 2월 22일까지 수목, 토일 4회 재방송하기도 했다. 특히 <모래시계>는 역대 한국방송작가상 드라마 수상작 중 유일하게 밤 9시 50분에 재방영됐는데 수목 시간에는 3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주말 시간에는 최고 시청률 49%, 평균 시청률 20%대로 높은 인기를 끈 KBS 1TV 용의 눈물 때문에 10%대 시청률로 손해를 봤다.

아울러, 이승연, 김희선 두 미녀 스타를 전면에 내세운 KBS 2TV 웨딩드레스는 "IMF 시대에 역행하는 사치성 드라마"란 지적을 산 데 이어 50% 이상의 시청률로 승승장구해 온 MBC 그대 그리고 나 탓인지 15%대의 저조한 시청률에 머물러 가족시청-주부시청이란 8시 주말극 경쟁구도에서 상대가 되지 못한 채 조기종영되는 수모를 당했다. 같은 채널 수목극 그대 나를 부를 때는 시작 전의 캐스팅 문제 뿐 아니라 기획의도의 변절(청년 경찰관과 청각장애라는 아픔을 딛고 밝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여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그렸으나 경찰과 범죄조직의 갈등의 내용만 다룸) 외에도 IMF 외환위기 뿐 아니라 98년 1월 14일부터 SBS가 모래시계를 수목,토일 4회 재방영하면서 시청률이 하락세를 면치 못하자 50부작에서 6편 축소된 44회로 축소 편성되었다. KBS는 <그대 나를 부를 때>를 끝으로 수목극을 잠정 폐지했는데 이 작품 외에도 일요아침드라마가 없어지기도 했다. 당시 KBS의 이금림, 정을영, 이영희 등 인기 작가-PD들이 SBS로 떠났는데, 이들이 SBS 이적 후 처음 선보인 작품들은 거의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쳤거나 평판이 좋지 않았다. IMF 이후 대부분 프리랜서 연출자들은 외주제작사로 가거나 프로덕션을 직접 설립하여 제작사 겸 연출자로 활동한 한편 방송사와 계약을 맺은 뒤 연출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차태현, 송윤아 등 자사 공채 출신 탤런트들이 전속계약 종료 후 MBC, SBS 등 타 방송사 열차를 타면서 KBS 드라마는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해외에서는 영화 타이타닉이 대박을 쳤다. 세계 최초 10억 달러 돌파 영화로 국내에서도 경제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울관객 197만이라는 사상 최대의 관객을 기록하였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관객 수를 집계할 때 서울 관객 수만 집계하였다. 아카데미과학은 마침 그 때를 틈타서 이전부터 넘치던 1/350 타이타닉호 모형을 해외에 엄청나게 팔아치우고 새로 뽑은 1/400 신금형까지 대박을 쳐서 IMF 시대를 운좋게 흑자로 넘길 수 있었다.

6.3.5. 취업시장

취업 시장은 구조 자체가 달라져 아예 지각변동이 일어나다시피 했다. 이전까지 공무원은 대기업 직원보다 급여가 적어서 인기도 낮았다. SKY급 상위권 대학교에서는 행정고시(5급 공채)나 일부 학생들이 지망했으며, 7급은 대기업 입사보다 더 아래로 보는 시선이 강했지만 2010년대에 청년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이들 대학교에서도 과거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7급, 9급에 입문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인력에 인색해지고,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되면 구조조정을 통해 직원들을 해고하는 일이 반복되자, 어지간해서는 해고될 여지가 없는 공무원으로 돌아서는 사람이 급증했다. 한 때는 경쟁률이 1:1도 되지 않았던 순경도 안정성 하나 때문에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는 7급 이상의 공무원은 대기업 직원보다 어렵다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을 것이다. 직업군인도 신청만 하면 대부분 장기복무를 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경쟁자가 넘쳐나고 말았다. 부대에서 간부들 군번을 살펴보면 87년 1명 88년 1명... 97년 1명 이런식으로 흘러가다가 이후 장기복무에 성공한 간부들이 가끔씩만 추가 되는걸 알수있다. 2010년대에 국가직 9급 공무원 지원자만 20만 명이 몰린다는 현상이 빙하기같은 취업시장의 모습을 방증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경찰대학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인기가 상승하였다.

그리고 IMF 사태 이전에 몇몇 유명 기업 생산직들은 산업체 부설학교를 통해 고등학교 학력을 주는 조건의 중졸 사원 모집으로도 원서만 넣으면 합격을 넘어서 한번에 수십명이 미달이 날 정도였으나#, IMF 사태 이후로는 경쟁률이 크게 올라서 고졸은 물론이고 대졸자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어 버렸다.

실직자들은 자신이 애써 실직당했다는 것을 자신 혹은 주변에게 부정하고 싶어서 아침에 양복 차림으로 출근하는 척하고 산에서 지내다 다니던 직장 퇴근 시간이 될 때쯤 귀가하는 이른바 등산출근 현상이 언론지상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등산'을 '오락실'로 바꾸면 한스밴드의 히트넘버 '오락실'의 가사내용이 된다.

이 시기 이후로 대부분의 기업이 45세 전후로 차장/부장까지 승진을 못하면 명예퇴직을 강요했다. 주요 대기업들은 1995-96년 연공서열제 폐지와 능력별 진급제 도입 이후. 그리고 추가로 96년에 통과된 IMF의 전초전 격이라고도 할수있는 노동법 날치기도 한몫을 했기도 했다.

당시의 취업시장 충격은 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났거나 어린이였던 사람들에게는 그 여파가 청년실업 등으로 현재 진행형이다. 더구나 호황이 아닌 불황과 어려움, 경제난 등만 겪으며 양극화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세대는 위축된 가치관 문제가 심각하다. 아래 기사에서 보듯 심각할 정도의 안정지향성 추구 등은 2018년 현재에도 계속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애초에 사회 제도가 바뀌게 된 것이 점진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경제 위기에 의해 급하게 바뀌다 보니 사실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다.

#명문대 → 교사·공무원…'꿈'은 사치가 된 아이들, 극단적인 안정성의 추구로 어린 학생들의 선호직업도 10년째 교사와 공무원이 1·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꿈이나 소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진 상태이다. 반상진 전북대 교육학과 교수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IMF 이후 학생들은 꾸준히 공무원, 교사 등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게 됐고 최근 양극화 현상의 가속화와 맞물려 과도한 안정성을 추구하게 됐다”고 한다. 교육부가 발표한 조사결과에서도 청소년의 꿈은 행복보다는 ‘안정’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IMF 직후보다도 IMF로부터 십년도 더 지난 지금이 더 안정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더 심해졌다. 그 당시에는 그래도 벤처기업이나 이런 쪽에 꿈을 가진 이들이 꽤 있었다.

6.3.6. 물가

이 사태 이후로 그전까지 고정되었던 과자 등의 식료품 가격이 크게 인상되었다. IMF 사태가 스태그플레이션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기 때문에 안 그래도 높은 실업률 때문에 개고생인데 물가까지 덩달아 올라가 버리니 대한민국 경제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아닐 수가 없다. 현재 과자의 과대포장을 생각하면 된다. 특히 빅파이새콤달콤이 대표적인 예. 빅파이 같은 경우에는 IMF 이후로 같은 가격에 크기는 더욱 작아졌다가, 다시 커졌을 때는 가격까지 덩달아 올라가면서 식감이 푸석푸석해지고 맛도 오히려 퇴보해 버렸다. 새콤달콤도 마찬가지로 IMF 사태 이전에는 7개에 100원이었는데 이 사태가 일어나자 6개에 200원으로 개수는 줄어들고 가격이 더 올라가 버렸다. 아이스크림, 빙과류도 이 가격 인상을 피할 수가 없었는데, 사태 이전에는 대개 200~300원이었다가 IMF 사태로 300~500원으로 올랐고 (같은 시기에 투게더의 가격은 1000원) 뒤이어 500~700원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현재 시판 중인 대부분의 초콜릿들이 카카오버터 대신에 팜유를 추가한 것도 이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덤으로 부라보콘역시 이 사태 때문에 단종될 뻔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식료품의 가격인상, 과대포장, 가격담합 등의 문제점들이 IMF 사태가 일어난 해부터 크게 급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비슷하게도 영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토블론 역시 브렉시트의 여파로 초콜릿의 양이 기상천외하게 줄어들었다. #

요식업계에는 롯데리아IMF버거나 IMF국밥 등 IMF 수식어를 단 염가 메뉴들이 생겨났고,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할 IMF 드립도 성행했다. 반대로 고가의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 등 고급 식당이나 해외 프랜차이즈 음식점들은 철수하거나 문을 닫았다.

6.3.7. 사회현상

국민은 피눈물 나는 세월을 견디고 버텨 위기를 극복해냈고 국가 경제는 더 크게 성장했지만, 외환위기가 바꿔놓은 사회경제구조는 국민의 삶을 무너뜨렸다.
- 2017.11.01 문재인 대통령이 새해 예산안 통과를 위한 국회 시정연설에서 (출처: 연합뉴스)
예전처럼 경제 발전이 지속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이제는 사회의 주류가 아니게 되었다. 청년층은 대규모 청년 실업에 마주치고 N포세대로 몰렸으며, 가족해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황금만능주의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IMF 이후 출산율이 급전직하하게 되었고, 이후 초저출산 상태가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출산율 문서를 참조 바란다. 당장 1998년 신생아 출생이 1997년에 비해 3만여명이 줄긴 했지만 다시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는가 싶더니 외환위기가 진정된 2000년 신생아(일명 즈믄둥이) 63만여명을 끝으로 근 20년 가까이 신생아 60만명선은 커녕 오히려 현재인 2019년 들어서는 30만명선도 위태해질 전망이다. 이러한 출산율이 급격히 줄어든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육현장으로, 2019년 현재 2000년생인 대1, 2001년생인 고3, 2002년생인 고2 사이의 학급수가 매 학년마다 2학급씩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해당 연도의 신생아 출생은 2000년 63만여명-2001년 55만여명-2002년 49만여명이었다. 단 2년 사이에 14만명이 줄어든 셈. 2007년 적돼지해, 2012년 흑룡해 등 일시적으로 출산율이 오른 적도 있었으나 전체적인 하락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10년대 중반 3년에 걸쳐서 태어난 출생아의 수는 1990년대 중반의 2년간 태어난 출생아 수보다 적다.(2014~16년 출생아수 약 128만명 < 1995~96년 출생아수 약 141만명.) 물론 출산율 급락의 원인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성급할 수 있으나, 당장 위의 외환위기가 완화된 2000년에 신생아가 증가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가 어려울 때는 적어도 출산을 미루는 것이지 않을까라는 정도는 유추할 수 있다. 초혼 연령이 늦어진 것도 그렇고. 1996년까지만 해도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28세, 여성 25세 전후였다. 하지만 2003~2007년도의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30~31세 여성 27~28세였으며 2014년 남성 33세 여성 30세. 한국인들이 흔히 쓰는 동아시아식 나이가 아닌 만 나이 기준이다. 초산 연령은 더 올라가서 1993년 26세였던 것이 2014년 32세로 상승했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 때문에 인구는 줄고 저성장이 예견되는 상황이라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성장이 덜할 뿐이다. 노인들은 노후 돈이 없으면 갈 곳이 없으니 절대 돈을 쓰지 않으며, 청년들은 돈이 없어서 못 쓴다. 이렇게 투자 가치가 높지 않은 시장인데다 일자리에 대한 공급은 수요를 한참 초과하고 있어 기업들은 인건비를 높여줄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다. 장기적인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 갖고 있는 자산도 중국이나 미국 등지로 돌려야 할 판이다. 실제로 한국의 해외 도피 자산은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 러시아 다음이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는 경제 스케일이 큰 것도 고려해야 하니 실질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막장인 러시아 다음이라고 보는 게 맞다.

국내에는 최소한의 투자조차도 꺼리지만 반대로 중국이나 제3세계 신흥국들에는 대기업들이 앞다퉈 투자하는 것이 명백한 증거다. 기업은 장기적인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시하며 신흥국이라는 대안도 존재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 동안 가장들의 수입으로 가정 경제를 꾸려가던 구조였으나, IMF를 기점으로 하여 그 동안 취업시장에서 물러나거나 참여하지 않았던 주부들이 취업시장에 대거 뛰어들게 됐다. 그래서 IMF 이후에는 맞벌이가 이전 시대와는 달리 당연한 것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사실 한국의 고용률은 IMF 이전보다 IMF이후가 더 높고 2000년대 이후 고용률이 크게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취업상황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팍팍해진 경제상황과 관계가 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여성의 경제적 참여가 원인이 되어 여권의 신장이 큰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으며, 기존까지 사회적으로 암묵되어왔던 사회적인 남녀불균형이 점차 바로 잡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교육에서 보다 심하게 배제된 기존 세대의 여성에 비해 점차 각 가정에서 여성에게 고등 교육을 시키게 된 것도, 그래야 먹고 사니까. 경제적 참여가 늘어나 발언권이 커져 인권 신장이 이루어진 예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근현대 대부분의 인권 신장은 이렇게 일어난다. 미국의 노예 해방만 해도 배경은 인본주의만이 아니라 기업가들이 흑인을 노동자로 쓰기 위해서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다만 그러다보니 가정 내에서 경제적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심각한 경우는 가장의 경제적 무능이 큰 문제가 되어 부부간의 이혼이 늘어나 가족 해체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기도 했다. 이 당시 초중고교를 다녔던 1980년대~1990년대 초반 태생의 사람들은 이 시기에 본인의 가정에서건, 주변에서건 IMF 때문에라는 이유로 여러 안 좋은 일을 겪거나 봤던 경험이 한 번쯤은 다들 있던 걸 생각해 보면 얼마나 큰 파급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진짜 막장이었던 사건들은 바로 자해를 한 뒤 폭력 범죄의 피해자인 것처럼 신고해서 보험금을 받으려다가 들통나버리는 사건도 많았다는 것이다. 한 택시 기사는 택시 강도를 당한 뒤 범인들이 자신의 발을 기차 선로 위에 고정시켜 놓고 도망가는 바람에 발이 잘렸다고 해서 뉴스에 실렸으나... 결국은 얼마 못가 자기가 보험금을 노리고 한 짓이었음을 자백하고 말았다.

또, 1998년에 경남 마산의 한 가정에서는 아빠와 어린아들만 있던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돈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다가 그 집 아빠가 돈이 없다고 하자 진짜로 자르고 도망친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도 알고 보니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가 친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뒤 강도 사건처럼 신고했다는 게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IMF에서 금융위기에 빠진 우리나라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 자본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이자율 상한선 폐지를 권고하자 이를 폐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고리 대금업이 성행하여 엎친데 덮친격으로 돈없는 서민들이 더욱 고통을 입었다. 얼마나 심했으면 연 2000%가 넘는 살인적인 이자율이 나왔을 정도. # 상술한대로 이 시기를 전후해서 러시앤캐시산와머니 같은 일본계 대부업체가 한국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1998년에는 금모으기 운동이 있었다. 또한 국민들이 동전 모으기 운동에 동참해 너도나도 집안 곳곳에 있는 동전을 모으다 보니 동전이 쏟아졌고, 그 여파로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에는 오백원 주화를 전체 통틀어서 8,000여개 밖에 발행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대부분 외국인이나 한국은행 직원들에게 주는 민트세트로 발행하였고, 현재는 수집상한테서 대략 기본 50만원 선에서 거래된다. 특히 사용하지 않은 것은 100만원 선에서 거래된다.

이외에 교육 분야에서도 대다수의 초, 중, 고교들이 통폐합되거나 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 물론 이때도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농촌에 많이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도시에도 있다. 특히 1999년도에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외에 대학교도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없어진 대학이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특수목적대학인 국립세무대학이 있다. 당시 세무대학은 학비 전액 무료, 전교생 기숙사 생활, 졸업후 국세청 8급 세무 공무원으로 특채되는 등 여러 특전이 주어져 입결이 연세대, 고려대 상위학과와 맞먹었다. IMF 사태 이후 서울대 중~하위학과 정도로 입결이 올랐다. IMF 외환위기로 인해 1999년을 끝으로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었고, 최종적으로 2001년에 폐교되었다. 폐교 이후 그 자리는 국세공무원연수원으로 쓰다가 최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혁신도시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국군간호사관학교도 같은 이유로 사라졌다가 2001년에 되살아났다.

사족으로 IMF 당시에는 농담조로 '나는 F학점이다'(I'm F(failed)), '나는 해고당했다'(I am Fired)라는 말이 유행했다. 실제로 이 부분은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 있었던 '가마솥'이라는 작품에도 나왔다. 심지어 '나는 좆됐다'(I'm Fucked)라는 표현도 있을 정도.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도 이 무렵에 회자되었다. 정확히는 "total crisis"라는 영어의 번역. 이것은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표현과 더불어, 언어의 마술사 박희태 전 대변인의 작품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 말을 그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며 그냥 이 무렵부터 유명해졌을 뿐이라고. 그리고 때가 때인지라 세기말과 엮여서 그런지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라는 말도 자주 쓰이기도 했다. 사실 1997년의 외환 위기가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국가가 위기에 대응하지 못한 무신경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후에 IMF를 가까스로 넘겼으나 오히려 사회적으로 비윤리적인 사건이 증가하게 되면서 '모럴 해저드'를 많이 언급하곤 했다.

파일:attachment/1997년 외환 위기/과소비.jpg

이미 언급했지만 7차 교육과정에서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외환위기의 원인을 사실과 달리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이라고 적혀 있는 것도 문제였다. 정부와 기업의 잘못, 그리고 사치품 수입과 해외여행 자유화를 앞장서 누린 부유층의 "과소비"를 애꿎은 일반 국민에게 뒤집어씌운 셈이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제공해야 할 교과서가 오히려 거짓선동하는 셈이다. 이 항목을 쭉 읽으면 알겠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국민 개개인의 과소비가 원인이 아니라, YS 정권의 '세계화' 정책의 대응 실패, 즉 시장개방에 따른 정부의 대응 미흡, 재벌들의 정경유착, 국가 경제체제의 구조적인 문제(펀더멘털)와 국제 투기자본의 자본 유동이 주 원인이라고 봐야 합당할 것이다. 그 덕분에 2010년도에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수정이 되지 않았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는 말처럼 90년대 중반에 국민들의 과소비 문제가 있긴 했다. 그러나 이것은 외환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외환위기의 원인인 과잉투자로 인한 일부산업의 호황으로 인해 일부에서 과소비가 일어난 것이다. 해외여행이나 외국산 구매 등으로의 외화유출이 갑자기 커지긴 했다. 그러나 이건 김영삼 정부 이전까지 비상식적인 규제로 통제했던 걸 풀면서 커진 것이고, 주요한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리고 지금 30대인 85~86년생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졸업 예정이어서 수학여행을 가야 하나 나라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고 졸업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86년생들이 피해를 많이 봤다. 어찌 보면 사회문제로 청소년들이 피해본 상황인 것. 여담이지만 이 시기에 태어난 97~99년생들(빠른년생까지 포함) 또한 초, 중, 고등학교의 수학여행이 계획만 세우는 단계에서 아예 가고 싶어도 못가는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단 00년생, 01년생 등의 경우 신종플루보단 나머지 문제로 못간 경우가 많아서 제외하였다. 워크아웃 종료가 01년임을 생각해보자. IMF로 나라가 힘들던 시기에 태어나 또 다른 심각한 한국의 병폐로 인해 고통받게 된 케이스. 그 중 가장 심각한 일로 꼽히는 세월호 참사는 정부 관료의 입이나 언론에서 IMF와 엮여 표현되기도 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1997-1998년생이었으니...

거기에 IMF 사태가 일어난 것을 노조가 노사분규를 일으키고 과도한 임금상승 등의 압력을 넣어 기업의 비용부담을 증가시킨 것이라는 식의 교육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이 정도되면 그냥 아무 말 대잔치라고 봐도 될 수준이다.

한편 이 사태의 파장으로 저 바다건너의 먼 나라에서 또 다른 사태가 벌어졌다.

7. 세계경제계의 변화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심한 구조조정 요구에 시달린 탓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역통화기금 창설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아시아통화기금 출범을 주창했을 정도. 그러나 IMF도 지역단위의 통화기금 체제가 들어서는 데에 딱히 찬성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어서 아시아만 통화기금기구 창설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2010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한중일이 공동으로 조성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hiang Mai Initiative)라는 금융협정이 공식 출범하게 되었다. 처음 협정이 체결된 것은 2000년 ASEAN+3 재무장관회의 때였다. 총 기금 1200억 달러 중 중국, 일본이 각각 32%, 한국이 16% 그리고 동남아 10개 국가가 총 20%를 분담한다. 물론 구제금융이라는 것이 아무 조건 없이 제공될 수는 없겠지만 대안이 존재하다 보니 그리스처럼 진짜 작정하고 막장짓만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필요한 수준 이상의 비상식적으로 과도한 구조조정 요구나 IMF가 작정하고 해당국가를 파산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IMF의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좁게는 대한민국이 맞이한 외환위기였지만 넓게는 동아시아 전체에 불어닥친 외환위기였을 만큼 그 후폭풍은 대단했다. 1997년 여름 태국에서 먼저 경제위기가 발생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웃나라들을 거쳤고, 이후 같은 해 가을에 한국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이 외환위기로 IMF의 개혁요구를 충실히 따른 대한민국의 사례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국고를 풀어 내수진작에 힘을 쓴 말레이시아의 사례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든 간에 동아시아 각국은 외환보유고에 거의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을 하게 되며, 2000년대 중후반 들어 전 세계의 달러화, 미국 국채 등을 거의 폭풍흡입하듯이 빨아들였다. 당장에 달러 보유고 상위 10위권 국가의 다수가 동아시아 국가다.

중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등 2000년대 들어 소위 BRICs라 불리는 신흥국들이 IMF의 현 체제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기존에 유럽의 독식 체제였는데 신흥국이 경제강국이 되었으니 미국과 유럽이 독식하던 IMF와 IBRD의 총재 자리를 넘보고 있다. 특히 2011년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가 성추행혐의로 중도 퇴진하게 되자 유럽과 제3세계는 서로 총재자리를 차지하려고 상당한 신경전을 벌였다. 2008년 이 사건보다 더욱 큰 부도 사태가 일어났었고, 그리스 발 유럽연합 위기로 서구권의 세계 통화 패권에 대해 더욱 더 불신이 깊어지는 가운데에서도 기존 기득권 층은 '지금 유럽에 IMF위기가 도래했으니 차기 총재도 유럽인이 해야 그리스 위기를 쉽게 헤쳐나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이미 유럽이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신흥국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커져 있다. 유럽에 IMF 위기가 도래한 시기가 유럽인이 총재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을 감안하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다.

결국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지분의 6% 이상을 신흥국에 넘기고 유럽 이사 2명을 줄여 신흥국의 참여권을 확대하는 구조개편이 합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최국인 대한민국의 역할이 매우 컸고, 대한민국 역시 IMF 쿼터에서 과소평가를 받았던지라 2010 G20 재무장관 회의를 통해 IMF 쿼터를 늘리게 됐다. 또한 2012년에는 그동안 관례적으로 미국이나 서유럽국가 출신이 맡아온 IMF 사무총장으로 중국 경제학자 린젠하이(林建海)를 임명했고, 뒤이어 세계은행 총재에 한국계 미국인인 김용(Jim Yong Kim) 전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을 임명했다. 이젠 미국과 유럽도 신흥국가의 입김을 무시할 수는 없는 셈.

8. 여담

  • 1970년대 석유 파동 때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이하 주요 국무위원들이 국내외에서 영업활동에 나섰다. 1970년대에 석유파동 당시 미국을 방문해 달러화 지원을 요청했던 김종필 국무총리는 사태 수습에 한창이었던 1998년에 다시 국무총리를 맡아 김용환과 함께 경제를 조율할 관료들을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역할을 맡았다. "저승사자"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이 시기에 구원투수로 등판, 30대 기업의 구조조정을 강하게 밀어붙여 1996년 말 기준 평균 387%의 부채율을 평균 200% 이하로 줄이고, 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을 8% 이상으로 강제해 재무구조를 강화하는데 성공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 순방 때마다 투자유치 활동을 겸하여 홈플러스의 모기업인 테스코 사가 이 무렵 한국 투자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지일(知日) 인사로 유명한 박태준 자민련 총재는[26] 포항제철 활동 당시 구축한 일본 인맥을 활용해 "단기차관→중장기로 전환"하는 협상을 벌여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일본 측에서 약속을 틀어버려 외교문제로 비화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우리나라와의 주요 협상을 앞두고 일본 측에 압력을 넣었다거나, 일본 측 관계자가 "우리도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는 부연설명까지 포함된 루머가 시중에 돌았지만, 아직까지 확인된 사실은 없는 상태. 문제의 차관 전환은 1999년에 다시 논의되어 성사된다.
  • 한국은행은 1997년 3월 26일 외환위기 도래 가능성을 예고하고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에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외화를 긴급차입하는 등 비상대책을 강구할 것을 건의한 건 뿐만 아니라 대통령 비서실이 김영삼 대통령이 외환위기를 인지했다고 밝힌 지난해 11월 중순 전까지 모두 23차례나 청와대 총리실 재경원에 심각한 외환사정을 보고하고 대책을 건의한 것으로 감사원의 기초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 당시 국민의 정부는 폭락한 국내 부동산시장을 떠받치기 위해서 외국자본의 국내 부동산 매수를 크게 허용해 주었고, 재외동포 등 비거주 한인이 국내 부동산을 살 때 제한을 풀고 '고국의 부동산을 사라'며 홍보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금 많은 부유층의 미분양 아파트 매수를 권장해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한시 면제 등 혜택을 주었다. 이것은 참여정부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을 타파하는 데도 그대로 재탕되어서 세제 혜택을 받는 다주택자가 많이 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의 정치적 후예인 문재인 정부 들어서 다주택자에게 세금을 더욱 늘리며 규제를 하게 되었다는 것.
  • 2015년 7월, 그리스의 제3차 구제금융시 한국의 IMF 사태와 비교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 관련된 루머로 통일교가 자신들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대만중국과 단교하고 다시 자기네들과 수교하는 조건으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지만 모두 사실 무근이다. 당장 대만도 자기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어서 그럴 처지도 못 되었다.
  • 베스트셀러인 '화폐전쟁(Currency Wars)'의 저자 쑹훙빙은 1997년 대한민국의 외환위기가 국제 유대 자본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국제 유대 자본이 저리 대출을 늘려 한국의 자산버블을 키웠다가 버블이 최고조에 이르자 갑자기 대출금을 회수하여 한국을 사실상 파산시킨 다음에 한국의 알짜 자산들을 걍 헐값으로 먹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양털 깎기 문서를 참조할 것.
  •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치를 경기장을 건설해야 하는데,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영국의 스포츠 도박업체 타이거 풀스 사가 한국 내 사업 허가를 조건으로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나선 적도 있다. 특히 이 일에 적극 나선 이벤트 사업가 송재빈의 수완으로 타이거 풀스 한국 지사가 설립됐으며, 나중에 시작된 정부의 체육복권사업인 토토의 지분도 사들여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 하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현재 송재빈의 지분은 사라진 상태.
  • 10년 뒤, IMF 사태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었던 강만수[27]가 이명박 정부의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년도 안 되어 경질 당했지만 산업은행장을 맡으며 이명박 정부에서 승승장구했다. 다만 정권말의 차관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비판만 받을 수는 없다는 평도 있다.
  • 1997년 정부가 IMF측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후 정확히 18년 되는 2015년 11월 22일, 공교롭게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 흔히 IMF 혹은 IMF 사태 라고 많이 이야기 하는데, 사실 IMF는 구제금융을 해준 기관인 것이지 외환위기의 원인은 아니다. 정확히는 97년 외환위기 사태가 맞다.일단은. 여하튼 이런 관계로 사람들이 이 사태를 항상 IMF 사태라고 부르며 IMF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 IMF 관계자들은 "우리는 한국 경제를 구제해준 기관 인데 왜 IMF를 나쁜 것처럼 말하느냐?"라면서 싫어한다고 한다. 허나 상술했듯 현대 한국의 미래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행위들을 강요한게 바로 IMF고 이는 IMF 자신도 시인한 사실이라 IMF는 한국인에게 영원히 까여도 할 말 없다.
  • 이 사건 최대의 피해자는 19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당시 대학 졸업을 코 앞에 두었던 1975년생 여학생과 재학 중 병역을 마친 1971~1973년생(방위 복무를 한 경우) 남학생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졸업 직전에 이 사건이 터져 취업시장에 큰 지각변동이 발생해 이 세대가 제대로 직격탄을 맞아 인생이 꼬이고 말았다. 유학을 가려는데 달러환율이 1,800원이 나왔다는 일화도 있다. 추가로 당시 수능세대인 1977년생(삼수생), 1978년생(재수생), 1979년생(고3)에서는 직업 장교로 평생을 보낼 수 있는 육군사관학교, 항공기 조종사가 될 수 있는 공군사관학교, 경찰관이 될 수 있는 경찰대학의 입결이 거짓말 수준으로 급상승했다. 또한 이들의 자식들인 현재 10대 후반, 20대 초반은 현재 들쭉날쭉한 노동정책과 막가파식의 교육정책으로 인해 혼란 그 자체다. 졸업만 하면 취업이 될줄알고 마이스터고나 특성화고가 잠시 떠오르는 계열이 되어 입학하고 보니 막상 아무런 지원도, 취업도 난항 그자체이며 부모세대의 자금력도 애매해 진학을 하는것도 문제다. 그렇다고 군대를 가자니 겨우 1만원 2만원 올려주고 우리 40%나 올려줬어요 >.< 하는 국가에 배신감과 회의감 등 수많은 문제들이 폭발하고 있다.
  • 경제가 이렇게 안 좋아지자 대학교 재학생들은 경제난을 피하는 방책으로 '에라이 차라리 군대나 가자' 스킬을 대량으로 시전하여 군대 입영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일부 부대는 막사를 긴급히 지어 올리는 등 군대는 한동안 병력 적체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몇몇 재학생들은 한총련 등 운동권 세력에 가담해 'IMF 재협상' 및 '정리해고 저지', '경제청문회 개최' 등을 외쳤지만 국민들로부터 별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 서울역, 영등포역 노숙자는 이 때 폭증했다고 해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도시공간 형성 특성 상 그 전에도 있었지만, 1998~2001년 사이에는 서울역앞 광장은 물론 시청 앞으로 나오는 지하도까지 노숙자가 가득했다.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 경우도 많았다.
  • 2013년 한종해 기자가 일요시사에 연재한 <망해도 잘사는 부자들>에 따르면, IMF 사태로 망한 재벌들 중 아직도 부를 누리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당장 해외로 도피한 한보그룹의 정태수나 쌍용그룹의 김석원, 동아그룹의 최원석이 그런 케이스.[28]
  • 2018년 11월,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IMF 사태를 소재로 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했다. IMF 사태가 터진지 21년 만에 영화 소재로 다뤄지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29] '재정국 차관'의 캐릭터 설정은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 강만수에서 따왔다 볼 수 있는데,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상술한 옛 교과서의 왜곡 서술과 엮어 생각하면 묘하다. 영화에서도 짤막하게 책임전가가 엉뚱하게 되었음을 지적하는 듯한 묘사는 있다. 여담으로, 강만수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또 한번 외환 60조를 날려먹는다. 이 영화에서는 IMF 대신 차라리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배째라 모드로 나갔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한다.
  • 외환위기 당시에 망할 뻔했지만 극적으로 살아난 재벌들이 여럿 있는데 크라운제과, 한라그룹이 그런 케이스이다. 크라운제과는 2004년에 해태제과를 인수하면서 화려하게 재기했고, 한라그룹은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현대중공업, KCC그룹 같은 친척 회사들의 지원끝에 다시 살아났다.
  • 공교롭게 IMF 외환위기 시기에 태어난 세대는 1997년 11월 21일생 ~ 2001년 8월 23일 출생자이다. 1997년생 중 1997년 1월 1일생 ~ 1997년 11월 21일 이전생은 외환위기 직전에 태어난 세대여서 같은 1997년생이라도 세대 차이가 나는 경우가 생기게 되고, 2001년생 중 외환위기가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이후에 태어난 2001년 8월 24일생 ~ 2001년 12월 31일에 태어난 세대는 외환위기 출생자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2001년생 이라도 세대차이가 나는 경우가 생긴다.

9. 관련 문서


9.1. 관련 외부문서

10. 연표[30]

  • 아래 내용 중 부도 관련 내용은 모두 굵게 표시한다.

10.1. 1997년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현 현대제철) 부도 처리 확정
1997년 1월 30일 (주)한보 및 재계 순위 14위 한보그룹 최종 부도 처리[31]
1997년 3월 19일 재계 순위 26위 삼미그룹 부도
1997년 3월 21일 한보건설 법정관리 신청
1997년 4월 7일 한보 청문회 시작(4/7 ~ 4/25)
1997년 4월 21일 진로그룹 부도, 진로그룹에 대한 부도유예협약 채택
1997년 4월 27일 진로그룹 6개 계열사 부도유예협약의 첫번째 대상으로 지정
1997년 5월 2일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20% → 23%)
1997년 5월 15일 국내 최대 제빵업체 삼립식품 부도, 수원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
1997년 5월 19일 대농그룹 부도유예협약
1997년 5월 30일 한신공영그룹 법정관리 신청
1997년 5월 31일 한신공영그룹 부도
1997년 7월 2일 태국 바트 화 폭락[32]
1997년 7월 15일 재계 순위 8위[33] 기아그룹 부도유예협약 체결(사실상 부도), 10대 재벌도 안심할 수 없다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 충격, 청와대 확대경제장관 회의
1997년 8월 14일 인도네시아 루피아 화 폭락
1997년 8월 15일 재경원 종금사에 외화자금 긴급지원 검토(3억$이상)
1997년 8월 25일 금융시장 안정 및 대외신인도 제고 대책
1997년 8월 26일 대농그룹 4개사 가운데 미도파만 회생시키고 나머지는 매각, 대농그룹 사실상 공중분해
1997년 8월 27일 무역관련 자본자유화 폭 확대조치 시행
1997년 8월 30일 재경원 증시 안정대책 발표
1997년 9월 1일 무디스 방한 협의(9/1 ~ 9/5), 주식매매수수료 자율화 시행
1997년 9월 10일 산업은행 외환채권 발행(15억불)
1997년 9월 19일 ASEM 재무장관 회의 및 IMF/세계은행 총회 부총리 참석
1997년 9월 22일 진로그룹 6개사에 대한 법정관리 신청
1997년 9월 29일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인 964원까지 상승, 사실상 거래 중단
1997년 10월 15일 쌍방울그룹 부도
1997년 10월 16일 태일정밀 부도, IMF 조사단 한국방문
1997년 10월 17일 대만 외환방어 포기
1997년 10월 18일 외국환 관리규정 전면 개정안 발표(외자유입 관련 자유화 조치)
1997년 10월 20일 당정 금융시장 안정대책 발표(근로자주식저축 1년연장, 한통주상장연기, 3년이상 투자 배당 소득분리과세)
1997년 10월 21일 IBCA, 현행 국가신용등급 유지 발표
1997년 10월 22일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1997년 10월 23일 홍콩 증시 폭락
1997년 10월 24일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 장기 : AA- → A+
  • 단기 : A1+ → A1
1997년 10월 27일 환율 1달러에 940원 돌파
무디스,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
  • 장기 : A1 → A2
  • 단기 : P1 → P2
1997년 10월 28일 미국 다우 존스지수 하루 만에 7.2% 하락, 한국 종합주가지수 500선 붕괴
미국 투자기관 모건스탠리 '아시아를 떠나라' 라는 보고서를 띄움
강경식 부총리는 한국은행에 외환시장 개입중단을 지시(재판에서는 불인정)
1997년 10월 29일 정부 금융시장 안정대책 발표(연기금3조 규모 주식매입, 채권시장개방확대, 기업구조조정)
1997년 10월 30일 외환시장 개장 8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또다시 폭등, 사실상 거래 중단
1997년 10월 31일 환율 급등으로 11월 1일부터 유가가 인상된다는 소식에 전국 주유소 북새통 진풍경 연출
1997년 11월 1일 재계 순위 24위 해태그룹 부도, 유가 인상
1997년 11월 3일 해태그룹 화의절차개시신청,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23% → 26%)
1997년 11월 4일 재계 순위 25위 뉴코아 그룹 부도[34]
1997년 11월 5일 블룸버그 "한국 가용 외환 보유고 20억달러" 보도
1997년 11월 6일 한국은행 실무진 한국은행 총재에게 IMF행 건의, 미셸 캉드쉬 IMF 총재 "한국 금융시장은 동남아 국가와 같은 위기상황 아니다"라고 언급해 한국의 신용도가 회복된 걸로 예측
1997년 11월 7일 주가 사상 최대 폭락
1997년 11월 10일 원화 환율 달러당 1,000원 돌파
1997년 11월 14일 강경식 부총리 르네상스 호텔[35]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고 청와대 보고에서 "미국 등 우방으로부터 돈을 빌려 보겠으나 여의치 않으면 IMF로 가야 한다"고 설명, 김영삼 대통령 사실상 IMF로 갈 것을 지시
1997년 11월 16일 캉드쉬 IMF 총재 극비 방한해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도착
1997년 11월 17일 AMF(아시아통화기금) 관련 차관회의(마닐라), 외국언론들 한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가능성 시사,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달러 긴급지원 검토 중이라 보도하나 재경원 '사실무근'이라며 부인
1997년 11월 18일 한국은행 정부에 IMF구제금융 요청 촉구
1997년 11월 19일 김영삼 대통령 오후 5시 기자회견에서 IMF구제금융 지원요청 발표를 재가받으려던 강경식 부총리, 김인호 경제수석을 전격 경질하고 통상산업부 장관 임창렬을 신임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으로 임명
임창렬 부총리 금융시장 안정 및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종합대책(환율변동폭 확대, 부실채권정리기금 확충, 부실금융기관 조속한 정리, 채권시장 추가 개방) 발표하지만 IMF 언급하지 않고 이는 이후 IMF와의 협상에 난행 요소가 됨
1997년 11월 20일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 방한, 1일 환율변동폭이 2.25%에서 10%로 확대되나 환율은 다시 확대된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해 사실상 거래 중단
1997년 11월 21일 김영삼 대통령은 박태준 자유민주연합 총재,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조순 한나라당 총재와 회담
오후 10시, 임창렬 부총리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 발표
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 구제금융 신청에 관한 대국민 특별 담화문 발표[36]
1997년 11월 23일 재정경제원 IMF 협의단(단장 강만수 차관) 편성, IMF의 실무협의단 1진이 입국
1997년 11월 24일 일본 야마이치증권 창립 반세기만에 파산 선고
1997년 11월 25일 IMF 실사단 공식활동개시, 국무회의 : 예금자 보호법 등 4개 법안 새행령 개정안 채결
금융시장 안정 및 기관투자가 주식매입 기반 확충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
  • 장기(2단계) : A+ → A-
  • 단기(1단계) : A1 → A2
1997년 11월 26일 IMF 휴버트 나이스 대표단이 김포공항 도착, 금융시장 안정 및 기관투자가 주식매입 기반 확충
국내 최대 해외여행사인 온누리여행사 도산
1997년 11월 28일 임창렬 부총리 일본 방문해 미쓰즈카 대장상과 원조회담에 들어갔으나 "IMF로 가지 않으면 지원은 없다"라는 대답만 돌아옴
무디스, 한국의 신용도를 A1에서 A3로 낮춤.
1997년 11월 29일 종합주가지수 400선 한때 붕괴
서울 힐튼호텔에서 한국 정부와 IMF간 지원 협상 사실상 합의
1997년 12월 2일 재경경제원(현 기획재정부), 고려종합금융[37] 등 9개 종금사 영업정지 명령
셰프라인 부도.
1997년 12월 3일 싱가포르 항공편으로 도착한 미셸 캉드쉬 IMF 총재 정부중앙청사에서 임창렬 재경부장관과 공식적인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해 대기성 차관 제공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 IMF 한국에 555억 달러 지원 확정
1997년 12월 4일 대기성차관협약(Stand-By Arrangement) IMF 이사회 승인
총 210억달러 승인 : 대기성차관 75억 달러, 보완준비금융 135억 달러
1997년 12월 5일 고려통상 계열 고려증권 부도
1997년 12월 6일 재계 순위 12위 한라그룹 및 영진약품 부도, IMF 1차 지원금 56억 달러 제공
1997년 12월 7일 대우그룹, 쌍용자동차 인수 최종 확정[38]
1997년 12월 9일 경남모직, 동양어패럴 부도, 엘칸토 화의신청.
1997년 12월 10일 환율이 3일 연속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하여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거래가 중단되고 기업어음(CP) 금리가 6일째 법정 상한선까지 치솟았으며 회사채 유통수익률은 법정 발행금리 상한선인 연 25%를 초과하는 등 금융시장 전반이 마비
무디스 한국국가신용등급을 준 Junk 수준으로 하향조정
  • 장기(2단계): A3 → Baa2(준 Junk)
  • 단기(1단계): P-3 → N∙P(투자부적격)
삼성제약 부도.
5개 종금사 추가 업무정지(대한∙나라∙신한∙중앙∙한화종금)
종금사 거래기업 및 개인예금자에 대한 지원
은행신탁계정의 CP 매입 한시적 허용
외국인 주식투자한도(50%) 12월 11일부터 적용 등
1997년 12월 11일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 장기(3단계) : A- → BBB-
자본시장 전면개방
외국인 투자한도(1인당 한도 50%로) 확대 : 개인당 7%, 종목당 26% 한도(12/10발표)
한국은행,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자금지원 발표
14개 종금사관련 지원: 7조 3,000억 원(은행, 종금, 증권)
채권시장 개방확대
대기업 무보증, 보증회사채 개방(10% → 30%)
대기업 무보증 CB투자 한도 확대(30% → 50%)
중소기업 무보증회사채 및 CB 투자한도 폐지
1997년 12월 12일 극동건설 계열 동서증권 영업정지, 법정관리 신청
1997년 12월 16일 정부 환율변동 제한폭 폐지(17일 시행), 제3차 경제대책회의 내용 발표
최고금리 확대 : 연 25% → 40%,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인투자 대폭 허용 등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야당의 김대중 후보 당선, IMF 2차 인출 이사회 승인
1997년 12월 19일 세계은행 및 ADB 자금지원 협상 완료
1997년 12월 21일 무디스,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하향조정
  • 장기(2단계) : Baa2 → Ba1(투자부적격)
IMF 협의단 방한
1997년 12월 22일 미국 립튼 재무부 장관 입국, 재무부 금융기관 외채만기 연장을 위한 정부지급보증 국회 동의
1997년 12월 23일 원화환율 사상 최고치 기록(1995원), 국공채시장 등 채권시장 전면개방
1997년 12월 24일 정부 IMF 구제금융 협상에 대한 신청 발표
1997년 12월 25일 IMF 및 주요 선진국 자금 조기지원 발표, 1997년 12월말 및 1998년 1월말에 걸쳐 100억 달러 조기지원 약속
1997년 12월 27일 재계 순위 35위[39] 청구그룹 부도[40]
1997년 12월 30일 IMF 20억 달러 조기 지원(3차 지원)
1997년 12월 31일 부실 종금사 처리를 위한 가교종금사(한아름종금)설립 완료

10.2. 1998년

1998년 1월 3일 기업구조조정 5대 원칙 천명, 이론배당락지수 368.85, 실제 385.49(+9.18)
1998년 1월 5일 노사정위원회 발족
1998년 1월 8일 IMF는 한국정부 3차 의향서 승인(20억 달러 인출승인)
1998년 1월 11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재계 4대그룹 총수와 만나 재벌개혁 5개항 합의
1998년 1월 12일 미쉘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 극비 방한, 청와대가 접견내용 발표
1998년 1월 14일 나산그룹(현 인디에프) 부도
1998년 1월 16일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
1998년 1월 18일 재계 순위 31위 극동건설 부도
1998년 1월 21일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41]를 수석대표로 유종근 전북지사[42] 등 250억달러 안팎의 단기외채를 장기외채로 전환하기 위해 국제채권단을 상대로 뉴욕 협상 시작
1998년 1월 25일 김용환 수석대표 귀국
1998년 1월 30일 재경원, 종금사 1차 폐쇄 대상 10개사 명단 발표(한화, 쌍용, 경남, 고려, 삼삼, 항도, 청솔, 신세계, 경일, 신한종금), 감사원 외환위기 특별감사 착수, 삼양식품 화의신청
1998년 2월 1일 파스퇴르 부도
1998년 2월 3일 S&P, 국가신용등급 3단계 상향조정
1998년 2월 6일 노사정 공동협약 체결
1998년 2월 8일 금융시장 안정 및 단기금융시장 개방계획 발표
1998년 2월 12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신정부「100대 국정과제」발표, 청와대에서 IMF 외환위기 현장감사 실시
1998년 2월 15일 외국인에 대한 인수, 합병 제한 완화
1998년 2월 17일 10개 종금사 인가취소(첫 금융기관 퇴출), IMF 한국정부의 4차 의향서 승인(20억 달러 인출승인)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3단계 상향 조정 - B+ → BB+
1998년 2월 19일 BIS 8%미달 12개 은행 경영 개선 조치
1998년 2월 24일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퇴임
1998년 2월 25일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
감사원은 이경식 전 한국은행총재, 강경식 전 재정경제부 총리, 김인호 전 경제수석에 대한 특별감사 착수
1998년 3월 2일 주식가격제한폭 8% → 12%
1998년 3월 6일 뉴욕에서 단기채권 외채의 만기 연장을 위한 설명회 개최
1998년 3월 7일 국내 대학 중에서는 처음으로 단국대학교 부도
1998년 3월 11일 1차 경제대책 조정회의(IMF체제 극복의 목표와 과제)
1998년 3월 12일 단기외채 2백 18억 달러 만기 연장
1998년 3월 18일 국내 1호 백화점 미도파 부도
1998년 3월 23일 IMF 서울사무소 설치
1998년 3월 24일 세계은행 1차 구조조정차관 20억 달러 승인
1998년 3월 26일 무디스, 한국 장기신용등급 전망 상향조정
1998년 3월 27일 IBRD 한국에 대한 1차 구조조정차관 승인
차관액 : 20억 달러 - 이자율 : 리보 +0.75% - 만기 : 15년(거치기간 5년포함)
1998년 3월 30일 무디스, 한국장기신용등급(Bal) 전망 상향 조정
1998년 4월 1일 금융감독위원회 공식 출범
1998년 4월 3일 외평채 40억 달러 발행
1998년 4월 9일 외평채 40억 달러 발행 성공
1998년 4월 10일 감사원, 외환 특감결과 발표및 수사의뢰 : 강경식 김인호 출국 금지[43]
1998년 4월 22일 IMF에 한국은행 외화대출 벌칙성금리 인하 요청
1998년 4월 27일 외국인 투자유치 종합대책 발표
1998년 5월 2일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서면 답변서 제출, IMF 6차 의향서 합의(금리정책에 대한 신축성 확보)
1998년 5월 3일 5차 경제대책조정회의, 외국인 투자업종개방 추가확대, 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 촉진방안과 중기비전
1998년 5월 9일 법무부, 강경식 체포동의요구서 임시국회 제출
1998년 5월 12일 재계 순위 28위 거평그룹 부도
1998년 5월 14일 중기대출만기 연말까지 연장
1998년 5월 16일 법원, 강경식 영장실질심사 위한 구인장 발부,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폐지
1998년 5월 18일 검찰, 강경식, 김인호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 혐의 구속
채권단 동아그룹 해체하고 동아건설만 남김
1998년 5월 20일 64조 원 규모의 금융 구조조정 재원(1차 공적자금) 조달 방안 마련
1998년 6월 5일 강경식, 김인호 구속 기소 및 환란 수사 결과 발표
1998년 6월 12일 5대그룹 간 빅딜 추진, 한국전력공사 등 9개 공기업 조기 민영화 확정
1998년 6월 15일 엔화 환율 8년 만에 최고치경신(1달러=146.85엔)
1998년 6월 18일 금감위, 퇴출 대상 55개 기업 발표(5대 그룹 20개사, 6∼64대 그룹의 32개사, 비재벌 계열 3개사)
1998년 6월 29일 금감위, 금융기관 구조개혁 조처(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 등 5개 시중은행 폐쇄 발표), 퇴출은행, 조건부 승인은행 발표
1998년 6월 30일 금융경색완화대책 발표
1998년 7월 1일 공기업 1차 민영화방안 발표, 재계 순위 32위[44] 한일그룹 부도
1998년 7월 3일 외환매입제한 폐지
1998년 7월 10일 개정 예금자보호법 시행, 환란 1차 공판을 발표
1998년 7월 11일 상업은행, 한일은행 합병 발표
1998년 7월 24일 IMF 7차의향서 합의(재정적자 GDP 4% 확대)
1998년 8월 12일 금감위, 20개 보험회사에 대해 경영 개선 조처
1998년 8월 17일 공기업 2차 민영화방안 발표
1998년 8월 19일 4개 보험사 영업정지
1998년 8월 25일 정부출연, 위탁기관 경영혁신 계획 발표
1998년 8월 28일 재경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및 기업교환(빅딜)에 대한 세제 지원 방안 마련
1998년 9월 4일 강경식, 김인호 보석 석방
1998년 9월 7일 재계, 사업구조조정 방안 발표
1998년 9월 10일 하나은행, 보람은행 합병 발표
1998년 9월 11일 국민은행, 한국장기신용은행 합병 발표
1998년 9월 20일 장은, 동방페레그린 증권 퇴출
1998년 9월 28일 대통령 경제기자회견 : 외환위기 재연 가능성은 없으며, 구조개혁은 지속추진
1998년 10월 7일 기아자동차, 현대에 낙찰
1998년 10월 19일 5대 재벌 계열 사업 구조조정 방안 발표
1998년 10월 28일 은행권, 117개 기업 워크아웃 대상 선정
1998년 12월 7일 정부·재계, 5대 재벌 구조조정안 합의
1998년 12월 17일 조흥은행이 현대종합금융, 강원은행과의 합병을 발표
1998년 12월 18일 IMF 긴급보완금융(SRF) 18억불 IMF 자금 중 처음으로 상환
1998년 12월 19일 무디스, 한국 신용등급 상향조정 검토 발표
1998년 12월 30일 IMF 긴급보완금융(SRF) 10억불 상환
1998년 12월 31일 제일은행, 뉴브리지 캐피탈에 매각(지분 51%)하기로 합의

10.3. 1999년

1999년 1월 19일 영국 피치,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조정
1999년 1월 25일 영국 피치,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한국 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B+에서 BBB로)
S&P, 한국 신용등급 투자적격 상향조정(BB+→BBB-), 국회에서 경제청문회
1999년 2월 12일 무디스, 한국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a1에서 Baa3으로)
1999년 3월 21일 금융감독원, 퇴출 및 여신중단 대상 80개 기업 중 25개사 정리
1999년 4월 1일 제1단계 외환거래자유화
1999년 4월 14일 김대중 대통령, "구조조정 약속 안지키면 5대 그룹도 워크아웃"
1999년 4월 19일 대우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대우중공업 조선 부문(현 대우조선해양) 매각, 김우중 회장 보유 주식 매각대금 3천억원 출연 등 구조혁신 방안)
1999년 4월 21일 부실 5개 생보사(동아, 태평양(현 동양생명), 한덕, 조선, 두원) 공개 매각 절차 개시
1999년 4월 23일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
1999년 5월 6일 종합주가지수 800 돌파
1999년 5월 19일 미셸 캉드쉬가 방한해 롯데호텔에서 기자 회견
1999년 5월 20일 현대전자, 빅딜로 LG반도체를 인수
1999년 6월 21일 결심공판(26차공판), 검찰 강씨 징역 4년, 김씨 3년 구형
1999년 6월 30일 삼성자동차 (현 르노삼성자동차) 법정관리 신청으로 삼성자동차·대우전자 (현 동부대우전자) 빅딜 무산
1999년 7월 1일 정부, 긴급자원지급 40억 달러 조기 상환하기로 IMF와 합의
1999년 7월 19일 대우그룹의 12개 계열사에 대한 합의서로 워크아웃 공식 신청을 발표
1999년 7월 20일 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 "김우중회장이 내놓은 담보는 처분대상" 발언
1999년 7월 23일 대우그룹 shock, 최대 하락폭 71.70포인트
1999년 8월 6일 대우그룹·GM 자동차 부문 전략적 제휴 양해각서 체결
1999년 8월 12일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 대책 마련(대우 구조조정 추진에 따른 금융시장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에 대한 대응 방안 강구해 8월13일 시행)
1999년 8월 20일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 대한 선고공판(27차공판)에서 무죄 판결
1999년 8월 26일 대우그룹의 유동성 문제 해결과 구조조정 추진을 위한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 워크아웃(기업개선 작업) 돌입
1999년 9월 1일 현대전자 주가조작, 회장 이익치 shock
1999년 9월 17일 제일은행, 뉴브리지캐피털과 매각을 위한 주요 조건에 합의하고 투자약정서
1999년 9월 18일 보완준비금융 135억 달러 9개월 앞당겨 조기상환 완료
1999년 9월 19일 제일은행 투자약정서(TOI) 체결, 11월 금융대란설에 대비 금융시장안정대책 발표
채권시장 안정기금 설립키로 결정하고 1차로 다음달 초까지 10조 조성
대우채권 환매비율 19991110(80%), 20000208(95%)로 환매요구 폭주로 인한 대란 가능성 상존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유럽, 아프리카 출국
1999년 10월 30일
~12월 1일
대우그룹 12개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 계획 확정
1999년 11월 1일 대우 회장대우그룹 사장단 퇴진으로 대우그룹 사실상 해체
1999년 12월 24일 대기성 차관 잔액 15억 달러 추가인출 중단

10.4. 2000년

2000년 2월 12일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및 화의 신청 종결 결정
2000년 2월 14일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양해각서를 하고 결과 체결을 못한 합의서
2000년 2월 17일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졸업 및 파업
2000년 2월 18일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및 화의 신청 종결
2000년 3월 14일 현대 정몽구 회장, 동생 정몽헌 회장의 해외출장 중에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 조치[45],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현대그룹 경영권쟁탈전 시작
2000년 3월 24일 귀국한 정몽헌 회장,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 회장의 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
2000년 3월 27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하면서 왕자의 난은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
2000년 4월 15일 대우그룹이 대규모기업집단 지정에 제외되면서 공식 해체
2000년 4월 23일 투자신탁 회사 구조조정 공적자금 투입 결정
2000년 4월 24일 IMF 협의단 채결
2000년 4월 25일 투자신탁에서 투자신탁증권 체제로 전환
2000년 5월 26일 현대투신 사태로 현대그룹 유동성 문제 표면화되자 채권단, 현대건설에 1000억원 긴급지원
2000년 5월 31일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 등 3부자 동반퇴진 및 5조9000억원 유동성 확보 등 자구안 발표
2000년 6월 11일 IMF 총재 호르스트 쾰러[46] 출국
2000년 6월 12일 최종 정책협의 종료 (동년 8월 IMF 이사회 승인), 프로그램 3년 동안 IMF와 정책협의 11회 실시
2000년 6월 13일 호르스트 쾰러 입국
2000년 7월 24일 한국기업평가, 현대건설 등 현대 8개 계열사 신용등급 하향조정
2000년 8월 6일 정부, 현대건설 워크아웃 돌입 경고
2000년 8월 13일 현대, 자동차·중공업 계열분리 및 1조5000억원 자금조달 등 추가 자구안 발표
2000년 9월 1일 현대자동차 등 자동차 계열사 현대그룹에서 분리
2000년 9월 7일 정부개혁추진위원회를 발족
2000년 9월 12일 정부, 공적자금 40조원 추가조성 결정
2000년 9월 20일 IMF 대기성차관 60억달러 조기상환 방침 발표, 00년 IMF연차총회시(체코 프라하) 정부대표 기조연설
2000년 10월 18일 현대건설, 5810억원 유동성 확보 추가 자구안 발표
2000년 10월 30일 현대건설 1차 부도
2000년 11월 3일 2차 29개 퇴출 대상 기업 발표, 삼성자동차, 삼성상용차, 진로종합식품, 진로종합유통, 우성건설 등, 현대건설은 채권단으로부터 퇴출 대신 조건부 회생 판정
2000년 11월 6일 대우자동차 1차 부도 처리
2000년 11월 8일 대우자동차 최종 부도 처리, 현대채권단은 현대건설 채무 만기연장 결의
2000년 11월 10일 동아건설 부도
2000년 11월 20일 현대건설, 서산간척지(총 3,082만 평) 매각 등 1조2974억원 규모 자구안 발표
2000년 12월 3일 대기성차관협약 및 프로그램 종료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 "국제통화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했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라고 공식 선언
2000년 12월 17일 예금보험공사, 5개 부실은행에 공정자금 1분 투입 결정

10.5. 2001년

2001년 1월 8일 대기성 차관 조기상환 개시
2001년 1월 16일 산업은행, 회사채신속인수 대상에 현대건설 선정
2001년 3월 5일 현대건설, 출자전환 동의서 제출
2001년 3월 28일 채권단, 자본잠식 상태인 현대건설에 2조9000억원 출자전환 결정
2001년 5월 11일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파산이 확정되어 동아그룹 해체
2001년 5월 18일 현대건설, 임시주주총회 통해 5.99대 1 감자 결의 및 심현영 사장 선임
2001년 6월 현대 채권단, 2조9000억원 출자전환 실시
2001년 8월 현대건설,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
2001년 8월 10일 정부 IMF에 조기 상환
2001년 8월 22일 김대중 대통령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방문
2001년 8월 23일 한국은행, IMF 구제금융 차입금 195억 달러 전액을 상환해 당초 예정보다 3년 빨리 IMF 관리 체제 종료


[1] 간단히 설명하자면 원-달러 환율 액면가를 높게 설정해[2] 상기의 평가절하의 반대상황으로, 원-달러 환율 액면가가 낮아지게 되는 상황이다.[3] 지난달 실업률 3.1% 4년 반만에 최고, 실업률 3.1% 최악 수준[4] 한달새 27만명 실직[5] 3월 실업률 6.5% 폭등[6] 실업률 8.7%... 사상최악[7] 실업률 8.7%... 사상최악2[8] 체불임금 6480억원[9]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부장관 인맥으로 분류되는 금융전문가로, 버락 오바마 정부 출범 후 08년 금융위기에 대처할 구원투수로서 미 재무부장관직을 맡게 된다.[10] 돈을 빌려줬다가 이자를 받지 못한 대출금.[11] 기업에 대한 종합금융지원을 원활하게 하고 금융산업을 균형있게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회사로서 예금·대출업무와 투·융자업무, 증권중개업무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회사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육성정책으로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위주로 전환되면서 외화자금 수요가 확대되고 기업의 자금수요가 점차 복잡·다양화됨에 따라 이를 충족하기 위하여 민간 중심의 외자 조달의 창구를 마련하고, 기업에 대한 복합적인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미국의 투자은행제도를 모델로 하여 설립되었다.[12] YS "IMF 맞은 책임의 65%는 DJ에게 있다"[13] 자세한 내용은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강만수 저 - pp.438-439를 참고[14] 1997년 5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회의[15] 금융시스템 유동성 과잉 문제. 자본이 밀물처럼 유입되지만, 빠져나갈 때는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요지[16] 김용환 부총재가 경제구원투수로 대통령 당선자에게 추천한 사람이다. 수험 5개월 만에 행정고시(6회)에 합격한 수재로 30대 중반에 행시 1회 출신들과 동일한 직위로 일할만큼 초고속 승진을 했지만, 1979년 율산그룹 해체 당시, 주무 담당자로써 책임을 지고 공직을 떠났다가, 20년 만에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것.[17] 원 출처: <1998 동아연감> p56.[18] 일본 관계자가 "우리도 살아야 하니 어쩔수 없다"고 말했다는 풍문이 돌았다[19] 1996년 말 30대 그룹 평균 부채율이 387%였다. 1998년 5월 부도난 30대 기업 거평 그룹이 부도 6개월 전까지 부채율 347%인 자사는 양호한 수준(두 번째 장, "부도 리스트~~~" 참조)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시절이었던 것.[20] 정확히 말하면 120mm 활강포를 기존의 K1 전차에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여 각종 문제가 발생하여 이후 포탑과 각종 부품 등을 재설계하였다. 즉 외형만 제외하면 사실상 신규 전차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21] 강호동이 씨름선수 시절 바로 이 팀 소속이었다.[22] 모기업은 동성종합건설이다.[23] 2004년 재결성.[24] 1996년 격주간으로 재창간될 당시 상호명은 미디어유니버스.[25] 모체인 주간야구가 스포츠신문들의 증면경쟁에 따른 기자스카웃이 이어지면서 93년 11월 말 없어져 폐간되었다가 96년 여름 격주간 형식으로 재창간됐다.[26] 김종필의 뒤를 이어 국무총리가 된다.[27] "6.25 때부터 누적되어 온 한국경제의 문제점을 내가 어떻게 해결하느냐?"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28]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부를 누려가며 살아간 게 맞는 지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정태수는 생사 여부를 공식적으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철저하게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것으로 보이고, 최원석은 동아예대 정도를 빼면 대부분의 재산을 잃었기 때문.[29] 외자에 종속 되어서라도 서민들과 중소기업을 죽여놓고 대기업만 건져서 가자고 하는 인물이다.[30] 위키백과 중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항목을 기반으로 일부 수정 및 보완을 하였다.[31] 이 한보그룹의 부도가 IMF 사태의 시발점으로 불린다. IMF 대신 한보 사태라 말해도 몸서리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한보 사태는 충격이었다. 한보그룹은 그 유명한 대치동 은마아파트 신화를 만든 회사로, 은마아파트의 초대박이 터지면서 건설업 외에 철강 등의 사업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철소를 짓는답시고 돈을 마구 끌어 쓰고 뇌물을 뿌려서 5조 원대 제철소 건설을 했지만 결국 부도가 났고, 이것이 IMF 사태의 예고편이었다. 한보의 부실경영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부실경영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본이었고 결국 한보의 부도처럼 부실경영을 하던 대기업들은 줄줄이 무너졌다. 이 때 직원들의 증언을 꼬투리 잡아 "머슴들이 뭘 알아"라고 한 대사는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그리고 사과상자를 뇌물로 사용한 것도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으로 사과상자를 주면서 맛있게 드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다만 사과상자가 국민들에게 알려진 건 95년 말-96년 초 전두환의 비자금을 은닉한 쌍용그룹의 회장 자택에서 사과상자 61억 원 어치가 나온 것이 시초.[32] 사실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실 가장 심대한 원인은 이것이다. 태국의 몰락으로 인해 동남아 경제가 파탄나고 이로 인해 일본과 한국의 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33] 위의 이미지에서는 4위라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8위였다.[34] 뉴코아는 한신공영그룹의 사위가 회장으로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한신코아백화점도 있었다. 뉴코아의 마트인 킴스클럽도 당시 회장의 성씨가 김씨였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부도 이후 한신코아는 사라졌고 뉴코아는 이랜드그룹에 인수되었다.[35] 1988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에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93년 르네상스 호텔로 이름을 바꾼다. 이후 2016년 1월1일부로 벨레상스 호텔로 다시 이름을 바뀌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 먹방을 찍은 곳이 이 호텔 4층의 가빈 중식당이다.[36] 정확히 18년 후 같은 날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했다.[37] 고려증권과 같은 고려통상 계열.[38] 이 일을 계기로 대우그룹은 삼성그룹을 뛰어넘고 재계 2위가 된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39] 1996년 기준.[40] 다른 부도 기업의 직원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청구그룹의 직원들은 특히나 고통을 당해야 했다. 회사에서 직원들의 명의로 14억의 대출을 받고서는 부도가 나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회사가 감당해야 할 빚을 직원들이 감당하게 되었다. 회사빚 떠안은 청구직원들, 푼돈 거래해 종일 은행업무 마비 (MBC) 청구직원 140명『회사빚 왜 직원이 갚나』집단訴 (동아) 이후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아는 분은 추가 바람. 이후 청구는 다시 부활하여 다원이라는 철거 전문 업체에 인수되는데 말이 인수지 실제로는 단물만 먹고 뱉은 격이라, 2013년 당시엔 짓던 아파트는 전부 완공 실패에 본사는 폐업한 피아노 학원이라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결국 청산됐다.[41]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대표[42]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경제고문[43] 감사원은 외환위기의 근원이 재경원이 금융 감독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한국은행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초래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44] 1996년도에 우성그룹을 인수했을 때는 17위까지 올라갔던 기업이다.[45] 현대의 자동차 부분을 맡고 있던 정몽구 회장 측은 현대증권으로 대표되는 그룹의 금융 부문을 노리고 동생 정몽헌 회장의 측근이자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신격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배제하려 한 것으로 사람들은 추측한다.[46] 독일의 정치인으로 2000년부터 2004년 3월까지 국제 통화 기금의 총재직을 역임했으며 2004년 7월 1일부터 독일의 제9대 대통령에 재임했으나 2010년 5월 31일 중도 사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