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그룹 부도 이후 현재까지 |
D[dday(1997-0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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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철강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한보철강을 설립하였으나 당진제철소를 지을 돈이 없어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 등 정계 유력인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약 5조원의 불법 대출을 받았다. 그러나 정태수는 이 돈의 대다수를 다른 사업에 투자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결국 덜미가 잡혀 5조 원의 빚을 떠안고 당진제철소가 부도 처리되었고 이 여파로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과 한보그룹도 줄줄이 부도되었다.
재계 14위 대기업이 갑자기 5조 원 규모의 빚을 지고 부도나자 이 여파로 금융권의 자금경색을 초래했다. 이후 부채비율이 과중했던 주요 대기업들이 대출 상환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나락으로 치달았고, 이에 삼미그룹, 진로그룹, 대농그룹, 한신공영, 기아그룹, 쌍방울그룹, 뉴코아그룹을 비롯한 다른 기업들도 줄줄이 부도가 나면서 1997년 외환 위기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평가받는 사건이다.[1]
2. 경과
한보그룹이 부도가 나면서 발생한 추악한 경제범죄 사건으로 정태수 회장이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 등 정계 유력인사에게 뇌물을 준 사건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불법대출액은 5조 7,000억 원이다.[2]
수서 비리 사건으로 이미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였던 한보그룹은 정태수 총회장의 욕심에 의해 철강 사업에도 마수를 뻗치게 되었다. 그러나 열악한 자금 조달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은행의 차관. 당시 은행들은 상당부분 독립된 지금과 다르게 정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은행을 통해 자금 조달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손을 잡아야만 했다. 이에 정태수는 은행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인들 위주로 대형 로비를 벌였다.
정태수는 국회 출석 자리에서 1조 원을 빌려 제철소를 짓는다면 자신이 10조 가치의 공장을 만들어 주겠다며 호언장담했고 이는 TV에도 그대로 전파를 탔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시간이 지날수록 금액이 불어나 결국 5조 원대의 계획으로까지 번졌다. 한보는 정부의 비호 아래에서 대출받은 금액을 가지고 제철소를 만들었지만, 대출을 받음과 동시에 문어발식으로 인수합병 및 세력확장을 호전적으로 진행해 자금이 들어와도 메꿀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결국 정태수는 꼬리가 잡혀 1997년 5월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고 실제 감사 결과 차관 5조 7,000억원 중 2,000억원만 사용된 사실이 드러나 그의 행적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지어졌던 한보철강 당진제철소는 바로 부도처리 되어 포항종합제철이 위탁운영하기에 이르렀다. 당진제철소와 거래를 놓은 백수십여 개의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다. 당진시(당시 당진군)의 경제는 당연히 불황을 넘어서 붕괴 수준에 빠졌다.[3]
결국 모기업 (주)한보는 2002년 진흥기업과 일본 야마토공업에 분할매각되어 한보건설[4] 및 YK스틸로 분사됐고 한보철강공업은 포항제철 위탁경영, 법정관리를 두루 받다가 2000년 네이버스 컨소시엄, 2003년 AK캐피탈컨소시엄[5]이 각각 사들이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2004년에 INI스틸과 현대하이스코 컨소시엄[6]이 인수하였다. 현대그룹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에서 소모하는 고품질의 철강물량이 많기 때문에 1977년부터 자체 제철소를 가지고 싶어했지만 포항제철을 밀어주는 정부에 의해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매각 초기부터 유력 인수후보자로 점쳐지고 있었고 처음에 몇 번 튕기다가 인수하였다. 다만 당진제철소의 설비들은 완공되어 가동중인 것보다는 건설 중단된 것들이 많았는데, 전기로·냉연설비[7]는 인수자 측에서 완공하여 가동에 들어갔지만 제철소의 핵심인 용광로는 한보철강에서 신기술을 도입한다며 코렉스 장비를 도입하였으나 도입 초기부터 대량생산체제에 적합하지 않은 비효율적인 장비라고 비판받았고, 인수자 측에서 공정률 90%인 설비를 완공하지 않고 뜯어서 인도 제철기업에 매각하고 2010년 즈음이 돼서야 고로를 새로 설치했다.
3. 피해자 박석태
박석태는 1938년[8]에 출생하여 1966년 제일은행에 입행하였다. 그의 책임감 넘치는 성격과 근면한 성품은 동료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1997년 퇴사 당시에는 상무 자리까지 올라가 있었다.1997년 한보 사태가 발생하면서 정부는 한보그룹의 비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과정에서 제일은행과의 불법대출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청문회로 강제로 불려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그 청문회에서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1995년 한보가 유원건설을 인수할 때 제일은행과 불법대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4월 28일 서울 망원동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빨랫줄에 목을 맨 것을 딸이 발견해 신고했으나 이미 숨졌다고 한다. 자살 원인으로는 청문회 당시 국회의원들이 박석태에게 심리적으로 부담감을 준 것과 은행장의 구속 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평소에 유약한 성격이었고 체중이 10kg 이상 줄어들었다고 알려졌다.
사망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도 청문회 증인들에 대한 인격 침해 및 의원들의 발언 수위 문제가 수면에 떠올랐고 박 상무에 대한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4. 여파
한보철강 부도 후 검찰이 먼저 수사에 착수해 1월 30일 정태수 한보 총회장을 조사한 뒤 이튿날에 구속했다. 이 과정에서 정태수가 대출 및 사업 인허가 과정에서 정관계 및 금융계 인사들에게 청탁한 후 그 대가로 막대한 뇌물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한보 리스트가 정치, 사회상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수사가 금융계 및 정치권으로 확산되었다.2월 1일부터 6일까지 한보철강에 부정대출을 해 준 신광식 제일은행장, 우찬목 조흥은행장, 이철수 전 제일은행장 등 전/현직 은행장 7명이 불려가 조사받고 이 중 3명이 구속되었다. 또한 동월 10~12일까지 여당인 신한국당 홍인길, 정재철, 황병태, 문정수,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 권노갑 의원, 김우석 전 내무부 장관 등 5명이 소환되어 조사받고 뇌물수수죄로 구속되었다. 이 외에 여야 중진 의원들과 전현직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불려가 조사받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국회에서 청문회가 개최되어 그 과정에서 한보 관련 비리를 둘러싸고 김영삼 대통령 차남 김현철의 연루 의혹이 드러나며 이후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전현직 은행장 3명이 마찬가지로 징역을 받았으나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유야무야되었다. 한보그룹은 한보철강에 대한 경영권을 상실했으며 전술했듯 한보철강과 거래를 놓았던 170여곳 이상이 모두 도산하여 어음부도율이 크게 올랐다. 그러나 주가와 금리 등의 외환지표는 한보부도 이후에도 의외로 안정세를 보였다.# #
그리고 당시 정태수가 서울구치소 청문회에서 했던 발언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상수 의원: "3000억원을 빌려줬으면 부도가 안난다" 라고 얘기하는데
정태수 회장: 그렇습니다.
이상수 의원: 증인의 직원은 말입니다. 검찰에 나와서 하는 얘기를 "3000억원이 나와봤자 두 달을 버틸 수 있는 돈입니다" 라고 얘기했어요.
정태수 회장: 그것은, 자금이라는 거는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9]이 어떻게 압니까!
정태수 회장: 그렇습니다.
이상수 의원: 증인의 직원은 말입니다. 검찰에 나와서 하는 얘기를 "3000억원이 나와봤자 두 달을 버틸 수 있는 돈입니다" 라고 얘기했어요.
정태수 회장: 그것은, 자금이라는 거는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9]이 어떻게 압니까!
무려 계열사 월급쟁이 사장을 '머슴'이라고 표현한것이 문제였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 재벌이 가진 시각의 한 단면을 보여준 발언이기도 했다.[10] 심지어 청문회 출석 당시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일 터지면 꾀병 부리는 전형적인 회장님의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정태수 전 총회장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는데 출소 이후 다시 자신에게 한보철강을 돌려준다면 잘 키워 보겠다며 호언장담했지만 때가 때고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이는 늙은이의 노망으로 치부되었다. 이후 정태수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강릉영동대학교 교비 횡령 혐의로 또다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도중 해외로 도피했다.[11]
그러다가 2019년 6월 부회장이자 회장의 4남인 정한근이 오랜 기간 도피 끝에 두바이에서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윤종섭)는 2020년 4월 1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재산국외도피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하고 401억여 원을 추징했다. 2021년 1월 22일 서울고법 형사8부도 양측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유지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진 이유를 IMF 외환위기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 진짜 이유는 바로 한보 사태와 이로 인해 김현철이 구속된 것이다.[12] 실제로 한국갤럽이 조사한 김영삼 지지율에 따르면 1997년 2~5월 14%였던[13] 김영삼의 지지율은 1997년 5~8월 7%로 떨어졌고[14], 이후 김영삼의 지지율은 8%(1997년 8~11월)/6%(1997년 11월~1998년 2월)에 불과했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난 후 박근혜를 제외하면 역대 최저 지지율이다.
[1] 재계에서는 한보 사태를 97년 외환위기의 시발점으로, 99년 대우그룹 부도와 해체를 절정으로 보고 있다.[2] 연도별 정부재정규모 통계를 보면 1997년 정부재정이 100.3조 원으로 나온다. 즉 당시 정부재정의 약 5.7%에 이르는 수치다. 2023년 소비자물가지수로 환산하면 무려 11조 1720억 원이다! 어느 정도의 거액이냐면, 재계 서열 2위 SK 회장 최태원의 재산이 12조 원이다.[3] 후술할 것처럼 현대가 제철소를 인수하고 고로를 설치한 뒤인 2012년에야 시 승격을 이루었다.[4] 이후 신창건설, LIG그룹을 거치며 'SC한보건설', 'LIG한보건설'로 각각 바뀌다가 2010년 LIG건설에 합병됨. 그리고 한보건설을 인수한 LIG도 한보처럼 재벌놀이에 심취했는데 부실이 매우 심해진 LIG건설은 법정관리 후 현승컨소시엄에 매각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법정관리 신청전에 CP(기업어음)를 발행하는 등의 무리수를 두었고 이것 때문에 사주들은 구속당하고 투자자들에게 보상하기 위해서 알짜였던 LIG손해보험을 매각하는 처지가 되었다.[5] 권철현 연합철강 창업주의 아들 권호성이 주도함.[6] 이 두 회사는 나중에 합쳐져 현대제철이 된다.[7] 맨 위 사진에 해당하는 위치. 현재는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A지구로 구분한다.[8] 그가 자살할 당시 기사에서는 그의 나이를 59세라고 표기했다.[9] 계열사 사장[10]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출연한 김용명은 정태수의 망언에 말을 잇지 못했고 윤보미는 돈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구나라며 기가 찬 모습을 보였다.[11] 다만 후술할 4남 정한근이 압송될 당시 이미 2018년에 사망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12] 일단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의 친인척이 구속된 사건인 데다가 김영삼이 청렴을 강조했던 것과 비교되어 국민들의 충격과 분노는 더욱 컸을 것이다.[13] 1996년 11월~1997년 2월에도 1996년 노동법 날치기 등의 여파로 28%를 기록했다. 이게 반토막난 것.[14] 김현철은 1997년 5월 17일 구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