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d1c24><colcolor=#fff> 기아그룹 起亞그룹 | Kia Group | |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다국적 기업) |
창립일 | 1944년 12월 21일 |
해체일 | 1997년 7월 15일 (부도유예협약 체결) 1998년 10월 7일 (기아자동차 매각) |
규모 | 대기업 |
유형 | 복합 기업, 기업 집단 |
창업주 | 김철호 |
회장 | 김철호 (1944~1973) 김상문 (1973~1981) 민경중 (1981~1990) 김선홍 (1990~1997) |
소재지 |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5-21[1]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5[2] (現 현대카드 빌딩 1, 2관) | |
사업 분야 | 자동차, 금융, 건설, 중공업, 전자, 자동차용 부품 제조업 |
웹 사이트 | (웹 아카이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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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아그룹 연혁 요약 |
역대 기업 광고 집약 |
2. 역사
2.1. 1997년 이전
기아그룹의 모태는 1944년에 창업주 학산(鶴山) 김철호가 세운 자전거 부품 생산업체 '경성정공'이다. 1952년에 '기아산업'으로 사명을 바꾸어 최초의 국산 자전거 '3000리호'를 만들었고 1959년부터 일본 혼다와 도요공업(現 마쓰다) 등과 기술 제휴를 맺어 1961년에 '기아마스타'란 상표명으로 오토바이 'C-100'을 만들어 이륜차 사업으로 확장했다. 1962년부터는 삼륜트럭 'K-360'을 만들어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다.1970년에는 '기아써비스'를 세워 사업 확장을 시작해 1973년에 썬공업과 동우정기를 인수해 '한국금형'과 '기아정기'로 각각 사명을 변경하였고, 1976년에 동국제강 계열이던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고 삼원제작소를 설립하였고, 1978년에는 남영금형공업을, 1986년에는 대한중기공업을 각각 인수했고, 같은 해 여의도 거산빌딩을 사서 사옥으로 쓰기 시작했다.
1989년 종합조정실을 발족해 그룹의 모양새를 갖추어 1990년대 들어 건설업과 금융업에까지 진출해 그 세를 불려나가 일약 재계 순위 10위권에 올랐다.
2.2. 1997년 부도, 그리고 해체
기아그룹은 1997년 기아차를 중심으로 기아중공업, 기아전자, 기아정기, 기아특수강, 기산 등의 28개 계열사에 직원 5만 5천 명, 1996년 자동차 수출 30억 달러, 재계 순위 8위의 거대 그룹이 되었다. 특히 다른 그룹들과 달리 특정 일가의 소유가 아닌 소유 분산이 잘 이루어져 있고 전문경영인 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는 모범 기업으로 인정받았다.[4]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소유 구조 때문에 강력한 재벌들 사이에서 매우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5] 1993년 자동차 산업 진출을 노리던 삼성그룹이 대량 주식 매입에 나서면서 삼성그룹과 기아그룹이 충돌하기도 했다. 여론의 비판을 받은 삼성이 지분 일부를 다시 매각하지만 삼성의 기아자동차 인수설은 끊임없이 제기된다.[6]이후 기아는 국제 경쟁의 격화와 경기 침체, 계열사의 부실한 경영 실적 등으로 1997년 봄부터 위기설에 휩싸이다가 결국 1997년 7월 15일 부도유예협약 적용 대상이 된다. 이후 28개 계열사를 14개로 줄이고, 기아차노조가 무분규, 임금 동결 선언을[7] 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으나 결국 10월 법정관리로 넘어가고 김선홍 회장 등 경영진은 완전 퇴진하게 된다. 외환위기의 혼란 속에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제시되지만 결국 1998년 10월 국제 입찰을 통해서 1999년 현대그룹의 현대자동차에 매각된다.[8]
기아그룹 부도의 원인으론 크게 두 가지가 거론된다.
첫 번째는 잘못된 수요 예측을 바탕으로 한 무리한 사업 확장. 기아그룹은 1990년대 아시아자동차, 기아특수강, 기산(건설, 부동산 개발) 등에 전폭적인 투자를 했으나 아시아차의 트럭과 기아특수강의 철강은 수요 예측이 잘못해 만성적인 공급 과잉이었고, 주택 건설에 뛰어든 기아산업은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인한 악성 미분양으로 엄청난 자금이 묶이고 말았다. 이 3개 계열사의 적자 때문에 기아의 부채가 눈덩이처럼 커졌다는 것.생사 갈림길 선 기아그룹 패인 분석
두 번째는 문민정부의 기아 부도 사태에 대한 대응이다. 당시 재계 8위의 기아그룹이 부도가 나면서 정치권과 여야가 기아그룹 처리 문제로 격한 갈등을 빚었고 임기 말의 문민정부는 이에 대한 명확한 수습책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은행장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아의 나눠 먹기식 경영 행태를 지적하며 기아 내부의 경영 실패를 비판했고 재경부의 고위 간부는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김선홍 회장을 강제 사퇴시킴으로써 기아 사태에 잘못된 대응을 했다고 비판했으며 정치권과 정부 내부에서의 정리되지 못한 중구난방식의 잘못된 대응이 기아 부도 사태를 심화시켰다고 1998년 9월 7일자 경향신문에서 밝혔다.[9]
세 번째는 삼성의 무리한 적대적 인수 추진과 갑작스러운 자금 경색에 따른 일시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기아그룹이 자금난 등으로 계열사 적자에 시달리다 1997년 3월 삼미그룹 부도로 인한 금융 시장의 경색에 유탄을 맞은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 재벌 중에는 부채 비율 1000% 재계 순위 10위의 한라 등 기아보다 재정 상태가 엉망인 곳도 많았다.[10] 더구나 기아그룹의 주축이자 주력사인 기아차는 흑자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부실한 계열사 몇 개만 정리하면 충분히 자력 회생이 가능했다는 주장이 당시 기아 임직원들 사이에선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11]
때문에 당시에도 일명 ‘삼성음모론’이 돌았지만 당시엔 물증은 없어 흐지부지됐는데, 나중에 ‘삼성 X파일 사건’을 통해 기아차 매각 앞뒤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아차 쪽에 금융권이 추가 지원을 하지 않도록 삼성이 정치권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인 정황이 실제로 드러나 삼성이 기아를 부도냈다는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졌다.#[12] 삼성이 삼성생명과 제2 금융권을 통해 기아의 자금 경색을 유도하고 정부를 압박해 기아 경영진 퇴진을 이끌어 냈다는 것. 이후에 기아차를 인수하려 했으나, IMF 사태 직후 삼성 역시 경영난으로 자동차 산업 철수를 결정하면서 인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 삼성은 1997년 초에 ‘기아차 성장 한계 봉착’ ‘자동차 업계 대대적인 구조조정 필요’ 등의 보고서를 공개해서 기아를 흔들기도 했다. 삼성자동차 보고서 파문 부도유예협약 직후인 8월에는 ‘쌍용, 기아차 인수가 필요하다’라는 삼성 내부 보고서가 유출되기도 했다. 1999년 외환위기 청문회 당시 김선홍 회장은 “삼성이 이를 바탕으로 금융 계열사 등을 통해 빌려줬던 5000억 원대의 자금을 거둬들였고, 결국 기아가 파산에 봉착했다”라면서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추가 이야기가 있는데, 1995년 당시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기아차 소하리 공장 출고장에 세워져 있던 신차 봉고 J2의 사진을 찍다 기아차 직원들에게 걸리는 바람에 기아와 삼성 간의 알력이 발생한 바 있고(1995년 6월 17일 한겨레 기사), 1997년 3월에는 중앙일보의 취재 헬기가 기아자동차 아산만공장(現 화성공장) 상공을 선회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1997년 3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참고로 봉고 J2 사진을 찍다 걸린 사건에 대해 삼성중공업에서는 사내 차원에서 중징계를 내리는 조치를 취했다고. #[13]
그러나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기 위해 소위 말하는 더러운 짓까지 해가며 물밑 작업을 열심히 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아가 법정관리를 신청했을 때 삼성은 당시엔 기아를 인수할 여력이 없었다. 부산 신호동 매립지에 무리하게 자동차 공장을 짓느라 초기 투자 비용이 상당했고, 거기에다 국가적으로 IMF 사태까지 터지자 삼성자동차는 바로 자본잠식 상태 및 경영난으로 기아그룹과 비슷한 상태의 부도 직전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기아를 인수하기는커녕 기껏 세운 삼성자동차마저 다른 회사에 넘어갈 판이었다. 결국 삼성은 기아를 인수하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해놓고도 제 앞가림도 못해 삼성그룹 자체가 소멸할 위기에 처했고, 삼성은 그렇게나 원하던 기아자동차가 현대 손에 들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삼성자동차는 프랑스 자동차 회사인 르노에 인수되어 르노삼성자동차(現 르노코리아)가 출범하게 된다.[14]
당시에 기아 부도 사태가 IMF 외환위기를 불렀다는 뉴스가 1998년 9월 7일 경향신문에서 보도되었다.[15]
부도가 나자 굉장히 특이한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회사의 실질적인 주인인 노조와 경영자가 정치로 회사의 위기를 풀어나가려 시도한 것이다. 적은 규모의 부정 혹은 부도였다면 14%의 지분율을 가지고 있던 노조가 1% 지분율의 경영자를 쫓아냈겠지만, 너무 부도의 규모가 크자 양측이 합심해서 정부를 상대로 정치적인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관련 기사
1998년 기아자동차 PR '완벽한 차로 보답하겠습니다' |
3. 기업 정신
3.1. 사시
1. 신용있는 회사
2. 노력하는 회사
3. 꿈을 가진 회사
2. 노력하는 회사
3. 꿈을 가진 회사
3.2. 사훈
1. 신용있는 사람이 되자
2.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
3. 꿈을 가진 사람이 되자
2.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
3. 꿈을 가진 사람이 되자
3.3. 사가
작사는 이은상, 작곡은 김동진이 맡았다.(1절)우리는 이 나라의 산업의 역군 / 힘차게 전진하는 슬기론 대열 시대를 선구하는 신념과 의욕 / 조국부강 이룩하리 우리 손으로 (2절)우리는 이 나라의 산업의 역군 / 가슴마다 꿈을 안은 보람찬 대열 새 지식 새 기술 슬기론 연구 / 새 역사 창조하리 우리 손으로 (후렴)기아의 깃발 아래 모인 동지들 / 협동과 사랑 속에 힘이 솟는다 우리 모두 정성껏 땀을 흘리자 / 겨레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 |
4. 역대 CI
<rowcolor=#fff> 1953~1964 | 1964~1986 | 1986~1994 | 1994~1999 |
5. 역대 그룹 임원
- 명예회장
- 김상문(1984~1997): 김철호의 장남.
- 기획조정실장
- 이기호(1989~1997)
6. 계열사 목록
6.1. 자동차 분야
- 기아자동차(現 기아): 1998년 현대그룹으로 매각됨. 범기아의 최대 기업이자 사실상 기아그룹을 잇는 기업이다.
- 아시아자동차: 1998년 현대그룹으로 매각 후 이듬해 기아자동차에 합병됨.
- 기아자동차판매: 이하 동일.
- 아시아자동차판매: 이하 동일.
- 기아대전판매: 기아자동차의 대전 지역 판매 자회사. 이하 동일.
- 기아모텍: 舊 서해공업. 스포츠카 '엘란'을 생산했던 업체로 알려졌으며 1999년 현대그룹에 편입됐다가 분리 후 2000년 '모텍코리아'로 변경했으나, 2001년 부도 맞고 2003년에는 안산공장을 중앙와이어산업(現 씨티엠), 광주공장을 캠스 등으로 각각 넘기고 2006년 폐업함.
- 기아기연(現 대림자동차): 1982년 대림공업에 매각 후 합병됨.[16]
6.2. 자동차 부품/중공업 분야
- 기아정기: 1999년 현대그룹에 매각됐다가 곧바로 한국프랜지공업에 넘어간 후 2001년부터 '카스코'가 됐으나 2005년 현대모비스에 인수된 후 2007년 합병됨.
- 기아중공업(現 현대위아): 1999년 현대그룹에 매각됐다가 얼마 안 가 독립해 2000년부터 '위아'가 됐으나 2002년 현대자동차그룹에 매각됨.
- 기아특수강(現 세아베스틸): 舊 대한중기공업. 1997년 그룹 부도 후 법정관리를 받다가 2003년 세아그룹에 매각됨.
- 한국에이비시스템: 1999년 현대그룹 합류 뒤 기아정기에 합병됨.
- 아주금속공업: 1997년 그룹 부도 후 법정관리를 거쳐 2003년 현대자동차그룹에 매각돼 메티아, 현대메티아로 각각 변경했다가 2014년 현대위아에 합병됨.
- 화천금형공업: 2000년 폐업함.
- 창원공업: 1997년 그룹 부도 후 2001년 위스코로 변경해 2002년 현대자동차그룹에 팔렸다. 2010년 현대위스코로 변경 후 2014년 현대위아에 합병됨.
- 기아전자: 1997년 그룹 부도 후 2000년 '본텍'으로 변경해 2002년 현대자동차그룹에 팔렸다. 2005년 현대오토넷에 합병됨.
- 모스트: 舊 아스텍. 독일 보쉬와의 합작사로 1997년 기아전자에 합병됨.
- 부기산업: 1999년 독립함.
- 대경화성(現 아이아): 1998년 화의 처분을 거쳐 2004년 현대자동차그룹으로 팔려갔으나, 2011년 SECO그룹으로 매각됨.
- 성산
- TRW스티어링: 1985년에 기아기공이 미국 TRW 사와 합작으로 세운 계열사. 1999년 이후 TRW가 대주주로 등극했다.
6.3. 건설 분야
- 기산: 舊 동양종합기술공사-동양종합기술건설. 1993년에 기아 임직원들이 사들인 뒤 1997년 들어 위장 계열사 판정받고 정식 편입됐으나, 이듬해 부도난 뒤 2017년 법인이 청산됨.
- 기산엔지니어링: 舊 호산엔지니어링.
- 삼안건설기술공사(現 삼안): 1998년 프라임그룹에 매각됐으나, 2011년 그룹 부도로 워크아웃을 받다가 2015년 장헌산업-한맥기술 컨소시엄으로 매각됨.
- 케이티
6.4. 금융/통신 분야
- 기아정보시스템: 舊 유니온시스템. 1999년 현대정보기술에 합병됨.
- 기아포드할부금융: 舊 기아오토파이넌스. 1999년 현대그룹에 편입된 후 자산 및 직원들을 현대캐피탈에 넘기고 청산됨.
- 기아인터트레이드: 舊 KM코퍼레이션. 기아차의 수출 전담사였으나 그룹 해체 후 법정관리를 거쳐 2000년에 퇴출됐고, 2010년에 법인이 소멸했다.
- 인터트레이드: 1994년 KM코퍼레이션에 합병됨.
- 기아경제연구소: 舊 한국경제연구소. 1999년경에 문을 닫았다.
- 기산상호신용금고: 舊 건국상호신용금고. 1998년 퇴출 후 2010년에 폐업함.
- 아신창업투자금융: 그룹 해체 후 1999년 현대그룹에 매각됐다가 이후 주인이 바뀌면서 코미트창업투자, 문화창업투자, 문화인베스트먼트 등으로 변경됐으나, 2015년 이후 자취를 감추고 '(주)마금'으로 존속 중이다.
6.5. 스포츠
-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現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 기아자동차 사이클단: 해체
6.6. 공익 재단
- 학산기술장학재단
- 학교법인 학산의숙: 舊 중야학원, 現 학교법인 아하브교육재단. 1976년 인수. 기아그룹 해체 후 어디에도 인수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표류했다가 2022년경 아하브교육재단에 인수되었으나, 인수 이후 학교법인명과 교명을 바꿈과 동시에 기아그룹 시절의 색채를 사실상 지워버렸다.
- (구)고암중학교: 1996년 폐교.
- 창녕공업고등학교 : 現 한국과학기술고등학교
7. 산하 단체/기관
- 기아연수원: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45-45에 소재했으며 1997년 대한생명으로 매각됨.
- 기아의 집: 세미나 및 연수 시설로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241-14에 소재했다. 現 블루몬테유스호스텔 건물.
- 기아협력회
- 기아설비협력회
8. 분가/분리 기업
- 삼천리자전거: 1979년, 기아산업으로부터 분사해 삼천리자공(주)을 설립, 1985년 기아그룹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해 독립했다.
9. 여담
- 기아그룹이 해체되기 전까지는 삼천리자전거를 범기아그룹의 일원으로 기아그룹 임직원도 삼천리자전거를 살 때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IMF 사태로 기아그룹이 공중 분해되고 기아가 현대자동차로 인수돼 마침내 기아 간판을 그룹 이름에서 떼어내 버리고 만 현대자동차그룹에서는 통합 이전의 기아 역사를 흑역사 취급하는 반면, 삼천리자전거에서는 기아그룹과 공통이던 사훈 등을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그룹의 정통성은 이제 삼천리자전거 쪽에만 남아 있는 셈이 됐다. 삼천리자전거의 대표이사인 김석환 대표 역시 기아그룹 창업주 학산 김철호 회장의 손자이자 김상문 전 회장의 아들이다.
- 기아그룹 사태 직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정부는 김선홍 회장의 퇴진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기아가 아시아자동차, 기아특수강 등 다른 계열사를 처분하고 기아차를 중심으로 자동차 사업만 살려나갈 수 있도록 사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밝혔고,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과 기아 인수설에 관하여 김우중 회장이 “기아차가 삼성으로 넘어가면 대우차가 위험할 수 있다, 기아차를 지원하겠다”고 김선홍 회장에게 말했지만 기아차는 결국 현대차로 넘어갔고, 대우그룹도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현대와 대우는 “어떤 경우에도 기아가 삼성에 넘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있있다. 대우그룹이 건재했었더다면 삼성과 현대를 향한 견제 차원에서 기아그룹을 적극 지원하여 국내 자동차 시장의 경쟁구도가 더욱 재미있었을거란 결과론도 있다.
[1] 現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3[2] 現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66길 3[3] 그룹 해체 후 당시 기아자동차가 사용하다가 2001년 기아차가 현대자동차와 함께 양재동 신사옥으로 이전하면서 현대캐피탈이 사용했고 지금은 현대카드가 사용하고 있다.[4] 당시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의 기아자동차 지분은 불과 1%로 소유주가 아닌 전문경영인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김선홍 회장은 비등기 이사였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된 이유는 당시 김석환 삼천리자전거 회장이 기업의 규모에 겁에 질려 자신의 아버지인 김상문 회장에게 스스로 기업을 맡지 못하겠다고 하소연을 했다는 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5] 마치 비스마르크 시절 유럽 내 유일한 공화국이란 이유로 타 군주국들에 은근 왕따당한 프랑스 제3공화국의 사례와 유사하다.[6] 삼성은 1994년 12월 자동차 산업 진출 허가를 받아서 삼성자동차를 설립했으며, 닛산에서 기술을 도입해서 SM5의 생산이 시작된 건 1998년부터다.[7] 당시 기아차 노조는 민주노총의 핵심 강성 노조로 유명했다. 1997년 1월,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에 항의하는 총파업을 주도한 것도 기아차 소하리(광명)공장. 현대차 노조를 포함해서 다른 곳이 머뭇거릴 때 제일 먼저 파업을 개시한 것이다. 이런 노조가 무분규 선언을 할 정도였다. 다만 기아차 노조를 마냥 강성 노조라고 보는 건 사실과 거리가 있다. 당시 기아차의 최대 주주(각 14%)는 종업원으로 구성된 우리사주조합과 미국 포드였다.[8] 공교롭게도 현대자동차도 초장기에 포드와 기술 제휴를 맺었고, 기아자동차(현 기아)의 방계 회사였다가 흡수합병된 아시아자동차도 역시 1970년대에 미쓰비시 후소와 기술 제휴를 맺은 적 있었다. 다만, 현대와 기아는 포드와 제휴에서 차이점이 있었는데, 현대자동차는 유럽포드와 기술 제휴를 맺었고, 기아자동차는 미국 포드와 자본 제휴를 맺었다. 여담으로 기아자동차의 승용차, 중소형 트럭 등의 기술 제휴처인 마쓰다가 과거 포드의 자회사였다.[9] 총체적 신한국병 대마불사 신화 터지다 1998.9.7 경향신문[10] 때문에 한라, 쌍용, 대우 등 다른 그룹들도 외환위기 이후 결국 망했다. 다만 한라의 경우 형제들의 도움으로 나중에 다시 일어서긴 했다.[11] 다만 부도 10개월 뒤인 98년 5월 30일, 법정관리를 맡은 유종렬 법정관리인의 보고서에 따르면 기아차의 흑자는 4조 원대의 분식회계로 만들어진 것이라 밝혔다.## 문제는 유정렬 법정관리인은 그 직전인 5월 21일 현대자동차 정세영 명예회장과 조용히 회동을 가진 바 있으며,#, 아래 서술된 바와 같이 삼성의 기아차 인수 작업을 고려했을 때 온전히 객관적인 평가로는 볼 수 없다는 것.[12]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 당시 삼성그룹이 정관계에 기아차 인수를 위해서 모종의 로비를 한 정황이 일부 드러나기도 했다. 삼성도 남의 회사 회계 부정, 그리고 다가올 1997년 외환 위기는 전혀 몰랐던 듯. 관련 기사[13] 이 사건 발생 후 몇 년 뒤에 출시된 삼성의 트럭이 SV110 야무진 트럭. 삼성중공업 산하에 자동차사업부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14] 삼성자동차의 실패는 삼성그룹 역사상 가장 크고 뼈아픈 실패로 손꼽힌다. 오히려 이때 미련 없이 자동차 산업에서 손을 털어버렸기에 지금의 삼성전자가 있을 수 있었다는 평가도 많을 정도.[15] 한국호의 침몰부른 기아부도 1998.9.7 경향신문[16] 대한민국 제5공화국시절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인해 당시 적자투성이였던 기아의 2륜 사업부를 대림에 강제로 매각시키다시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