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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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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우중.jpg
이름 김우중(金宇中)
출생 1936년 12월 19일 ([age(1936-12-19)]세), 대구광역시
본관 광산 김씨[1]
가족 부인, 슬하 2남 1녀[2]
직업 기업인
학력 경기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재단법인 한국기원 총재
초대 이후락 2~4대 김우중 5대 한화갑
대우그룹의 역대 회장
(초임) 초대 김우중 임시 장병주[3]
파일:attachment/KOR_FA.jpg
대한축구협회 회장
44대 45대~46대 47대~50대
이종환 김우중 정몽준

1. 개요2. 생애
2.1. 성장기2.2.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2.3. 위기와 몰락
3. 후일담4. 가족5. 관련 일화
5.1. 기업인 일화5.2. 개인적인 일화

1. 개요

대우그룹 회장.

한때 정주영, 이병철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재벌 신화 중의 하나였다.[4] 현재는 거대 경제범죄자와 망한 사업가 이미지다.

자본금 500만 원을 20조로 불리고[5] 포춘지에도 대서특필된 기업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한 성공 신화는 자그마치 21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분식회계를 통해 일궈낸 허황된 신화였고, 17조라는 어마어마한 추징금을 받았다. 참고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3년에 납부한 추징금이 1672억 원. 전두환의 100배이다.(...) 하지만 이건희도 자산이 20조를 채 못 넘기는데 기업인이 17조를 낼 수 있을리가... 내고 싶어도 못 내는 경우이기에 전두환의 추징금 환수때 반짝하더니 이제는 관심이 없다. 안습인건지 운이 좋은건지 언플을 잘 하는건지. 어느 날부터 베트남으로 도피했다. 1999년 12월, 중국 연태를 시작으로 베트남에서 3년 6개월동안 거처로 삼다 영국을 경유해 프랑스에서 정부의 도움으로 임시국적을 만들어 2005년까지 있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와 인터폴(...)의 압박으로 2005년에 귀국 했다. 1989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베스트셀러를 썼는데, 지금은 세계는 넓고 도망칠 곳은 많다라는 비아냥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2. 생애

2.1. 성장기

제주도 출신인 아버지 우당 김용하와 어머니 전인향 슬하 5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부친이 대구사범학교(지금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우당 김용하(1896∼1950년?)는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하귀리 출생으로 평양제2고보를 나와 일본 호세이대학 예과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제2회)를 졸업하였으며, 함경북도 종성중학교의 교사, 대구 사범학교 교장, 경성공립사범학교 교장, 이산공립중학교 교장, 조선 민족청년단 서울시단 이사, 서울대 상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학생과장, 정부 중앙물자행정처 기획국장, 중앙청소비조합 전무이사, 제주도지사를 역임하였다. 도지사에서 물러난 후 서울로 이사했다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고등학교 52회이며 동기생으로 배우 신구, 이종찬국가정보원장, 고건 전 국무총리,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이준용 대림그룹 명예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 등이 있다. 이종찬과는 둘 다 경기고 내에서 주먹패로 날렸다고 한다.

2.2.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이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친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서 바이어로 근무 하다 1967년 독립해 대우실업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창업초기에는 그저 그런 중소기업이었지만 창업 이후 유창한 영어 실력, 제2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린 뒤 해외 회사에 오퍼를 내고, 계약이 성사되면 그 때 돈을 갚는 독특한 자금동원 능력,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맥[6]과 경기고 인맥 등을 잘 활용해 창업 5년만에 100만 달러 수출을 기록했고, 특히 중동붐으로 엄청난 대박을 터트려서 불과 10여년만에 대한전선, 동명목재, 쌍용그룹 등 여타 쟁쟁한 기업들을 제치고 현대그룹, 삼성그룹, 럭키그룹에 이은 4대 재벌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전두환, 손영길 등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1973년 윤필용 사건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경기고등학교 동기생 이종찬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덕에 큰 화를 면하였다. 이후 신군부의 비호를 받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문(대우전자),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등을 인수하며 더욱 몸집을 불렸다. 기사1 기사2 특히 자동차 회사 인수 후에는 독일 만(MAN) 사와의 기술 제휴로[7] 잔고장이 적은 MAN 엔진을 개발, 이전까지 우리나라 운수업계의 골칫거리였던 차량 정비관련 비용을 크게 줄이는데 기여하게 된다.

이후 동유럽민주화, 시장개방 바람 등에 편승해 세계 경영을 주창하며 구 공산권 국가에 진출해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했다. 대우의 수입차 생산 거점기지였던 폴란드는 지방 공무원의 관용차가 대우차 구종이었고, 수도 바르샤바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까지 있다고 한다.

재벌 회장중에서는 제일 언론플레이를 잘하는 축이었고, 1989년 출간한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도 사실 언플의 일환이었다. 다른 언플성 책으로는 도올 김용옥이 대우측에서 모든 경비를 제공하여 김우중의 출장에 동행하고 난 후 쓴 기행문인 "대화"가 있다. 이 저서에서 김용옥은 상당히 김우중을 미화했는데, 당시 김우중은 다른 재벌 회장에 비하면 매우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IMF 이후에 밝혀진 김우중의 비리를 보면 이 책은 김용옥의 흑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룹 이미지 개선을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이 책은 구라 투성이였다. 이 책에서는 자신이 소명의식으로 기업을 하며 대우는 비생산적인 서비스업은 절대로 손 안대고, 자기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실제 김우중은 자신을 전문 경영인이라고 자처하고, 대우 사태 직후에도 2~3년 안에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없이 물러날 것을 채권단에 약속했다. 그리고 이 말은 다른 의미로 사실이 되었다(...).

"대한민국 원조 샐러리맨신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작 자체를 샐러리맨으로 시작해서 재벌 총수까지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고, 성장 과정에서 집안 배경, 인맥, 언플을 적극 활용하여 샐러리맨의 신화를 썼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 양반은 워커홀릭이였다.

2.3. 위기와 몰락

만렙 수준의 대인관계 능력과 돈 될만한 무언가를 찾는 상업적 안목로 대재벌의 반열에 올랐지만, 김우중 회장은 기술은 사오면 된다며 자체적인 R&D를 등한시하고 있었다. 당시 대우조선공업 기술연구소장이 기술개발을 중시해야한다고 했으나 기술이라는 건 필요할 때 밖에서 사오면 되는 건데 왜 쭈그려 앉아서 기술개발 하냐고 반박했다고.

월간 조선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과 상당히 대비될만한 의견들도 적지는 않은데, 물리학자 정근모박사의 경우 그가 과학기술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으며, 1998년에는 김우중 회장이 직접 기술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여담이지만 아들이 대우자동차 연구소에 재직했었다.

이러한 '기술은 사오면 된다'라는 워딩은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임팩트 때문인지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이후 타 대기업에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세계경기가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우수 R&D 인력을 증원하기도 하였다. 여러모로 대비되는 대목.

한편 1989년대 중반부터는 상기했듯 김우중 본인도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전자부문에서 브라운관용 고강성 CRT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과, 영국 워딩 기술연구소, 독일 뮌헨 연구소를 인수해 독자 플랫폼을 개발하는 등의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출처 : 신장섭 저, '김우중과의 대화'). 하지만 타 경쟁기업들도 비슷한 시기에 경쟁력있는 제품을 꾸준히 시연하고, 결정적으로 1997년 IMF 구제금융사태가 발생하면서 은행 차입을 통해 큰 판을 벌리는 대우의 경영 스타일은 발목을 잡게되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오히려 쌍용자동차를 추가로 인수하고[8] 폴란드, 베트남 등지의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대우 상표의 인지도를 크게 높이는 공격적인 경영을 하였다. 하지만, 팔리지 않는 제품을 해외 법인으로 밀어내어 수출 실적으로 잡고 당시 화두로 떠오른 구조조정을 소홀히 한 것이 문제였다. 현대, 삼성에서도 부채율 감소에 힘을 기울이던 상황이었지만, 대우그룹은 일본 증권가나 외국 평가 기관의 경고가 사전에 있었음에도, 상황을 매우 낙관적으로 전망하였던 것. 실제로 구조조정 계획을 초과 달성한 이건 직원 입장에선 좋은게 아닌데 삼성과 현대, 90% 이상 달성한 LG와 SK등과는 다르게, 대우는 18.5%에 그쳤다고 한다.

한편 대우가 청산 회사를 세우고 나서도 한동안 기업 청산을 못한 데에는, 상기한 팔리지 않는 제품들정부에서 빚으로 본 사업건들이 뒤늦게 빛을 봐 그것들의 흑자가 청산법인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등 장기적인 성과가 있었던 덕분이라고 한다. 일례로 2001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레간자와 라노스가 합리적인 가격대와 성능을 갖춘 차량으로 선정되기도 하였고 한때 북미 고객만족도 평가부문에서 현대ᆞ기아를 제치고 BMW의 뒤를 이어 4위를 차지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잠재력 좋은 학생도 중요한 시험대(위기)를 통과-극복해야 비로소 세간의 인정을 받는 법인데, 몸집불리기에 성공하며 LG그룹삼성그룹까지 앞선 2위 재벌이 된 대우의 내실은 부실해졌고, 결국 1999년 8월 26일, 어음 만기 사태를 이기지 못하고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공을 들이던 대우자동차 또한 부도 이후 2000년에 북미와 유럽에서 최대 실적을 거두며 좋은 수익을 거두었음에도 결국 2002년에 청산되었다.[9] 여담이지만 월간오토라는 잡지사에서 직접 1990년대 후반 중형차 3대장을 구매해서 실험했는데, 쏘나타 3는 핸들에 몸을 박고 크레도스는 의자가 뽑히고(!) 레간자도 박살이 났다. 사실 쏘나타 2는 북미 충돌테스트에서 B필러 앞이 무너질 정도로 차체강성이 쓰레기였던걸 생각하면 나아진건 맞는데... 뭐 그땐 안전테스트가 워낙 개판이라 직접 차를 사 충돌실험을 했을 때 그냥 전원 사망(...) 수준의 안전도를 자랑했으니..

동유럽을 비롯한 제 3세계시장은 소련붕괴 직후부터 개척에 들어가 2010년대에도 현지 주민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며 호감을 산 대우를 그리워 하는 시장 반응이 있었을 만큼 그 브랜드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중국에서는 절경으로 알려진 구이린(桂林) 지역에 대규모 호텔을 건립하는 한 편, 탁월한 접근력[10] 및 홍보 능력으로 현지의 관민(官民)들과 원활한 관계를 형성했지만, 모기업인 대우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대우자동차의 경우는 GM의 브랜드 일원화 방침으로 대우 브랜드의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11]

그룹 해체 이후 분식회계를 통한 사기 대출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면서 베트남으로 장기 도피하여 잠적하였다가 2005년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 때 공항에 나온 노동자들과 대우 피해자들이 몰려와서 그를 손가락질하거나 비난하였다. 한때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로부터 해외 도피자 명의로 공개수배를 받기도 하였다.[12] 2006년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 9253억 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2007년 말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사면되었다. 참고로 추징금이 전두환의 100배 가까이 된다. 물론 사면은 사면이고, 추징금은 내야 한다. 전두환의 추징금이 화제가 된 2013년에는 김우중 추징금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전두환은 재산이 있는 것이 너무도 뻔했기에 추징금 환수가 금방 이루어졌지만 김우중은 17조 원이 도무지 털어도 나오지 않을 돈임이 뻔해서인지 금방 묻혔다.

2000년 10월호 <월간중앙>에서 김 전 회장의 프랑스 니스 은둔사실이 특종 보도되었고, 현재도 김우중 개인의 세금체납액이 상당하다고 한다. 아들이 유령 회사를 통해 600억원대 해외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기사도 떴다.

3. 후일담

2014년 8월 신장섭 싱가폴 대학 교수와의 대담 형식으로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를 출간하고 출판기념회에 잠깐 참석해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악연이 대우를 해체한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일부에서 제기하는 김우중 회장이 대북사업에 소극적이어서 DJ정부에서 피해를 봤다는 음모론에 대해서는, 자신이 김일성, 김정일을 수십 번 만나서 독자적 커넥션을 구축하고 있었다고 밝혀 부정하였다. 전반적인 인터뷰의 요지는, 대우라는 기업의 낙관적 전망을 통해, 결국 투자나 추가 대출을 설득하는 CEO의 그것이다.[13]

몰락 후에는 추징금을 피해 사실상 재산의 대부분을 가족-친척들에게 분산시켜놓은 상태이다. 아들들에게는 유럽에서부터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있는 대규모 골프장 운영을 맡겨놓은 상태이며, 아내와 딸은 서울 종로 한복판에있는 아트선재센터의 운영권을 맡겨놓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은닉재산 추징을 위한 전두환법이 나오면서 김우중 전 회장의 재산 추징도 가능한게 아닌가하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전두환법은 어디까지나 비리공무원을 위한 추징법인지라 김우중 전 회장은 법의 적용을 벗어났다.

사실상 완전히 대우그룹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대우그룹과는 끈끈한 커넥션을 보유중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대우그룹의 계열사가 소유중이던 힐튼호텔을 대우그룹이 정리하는 과정에서 김우중 전 회장과 임대차계약을 맺었는데, 꼭대기 최상층 집무실을 25년동안 1년에 12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계약을 맺은 사실이 밝혀지기도했기때문이다.[14]

최근에는 주로 회고록 등의 출판과 경영자 교육을하며 베트남을 중심으로 주로 동남아권에서 활동중인데, 국내에서는 수입이 발생하면 바로 추징이 진행되므로 국내에서 다시 사업활동을 시작할 가능성은 제로라고 보면된다.

참고로 미국에서 김우중급의 분식회계를 지시한 엔론 전 회장 케네스 레이는 24년 형을 받았으나, 복역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5] 이 사람은 매출액만 터무니없이 부풀렸을 뿐 순이익을 부풀린 건 단 20%다. 아예 손해를 이익으로 부풀린 김우중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케네스 레이는 사실 바지사장 수준에 가까웠고 실제로는 그 밑의 CEO가 벌인 일이다. 무관심했던 케네스의 문제도 크지만 실제로 죄를 저지른 CEO는 더 큰 잘못이다. 당연히 이쪽이 더 많이 떼어먹었고 이쪽도 케네스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

사실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드물다는 말이 있듯, IMF 사태 전까지 거의 모든 대기업들이 분식회계를 저지른 의혹을 받는 건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절세 또는 금융혜택을 받는 경우가 많았던 고로, 그 시절 분식회계는 대기업들의 관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16]

하지만, 1998년 새로 출범한 국민의 정부에서 이헌재 금감원장을 통해 기업 부채율을 200%로 감축하도록 30대 그룹에 강공 드라이브를 건 것은, 첫째,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같이 죽게 생겼기 때문이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기세를 보이는 30대 그룹도 평균 부채율이 387%로, 1997년부터 1998년 2년 동안 재계 100위귄부터 상위 30대 기업까지 매월 도산 소식이 들려오는 현실이었다. 부채율 300% 초반의 거평 그룹 임원이 부도 6개월 전까지 "우리는 평균보다 낮은 양호 수준"이라고 인터뷰했을 만큼, 기업인들이 은행빚의 무서움보다는[17], 과감한 투자에 시선을 돌려 앞만 보고 달린 후유증이 경제 전반을 덮은 상태였던 것. 둘째, 처음부터 예외를 두면 추후 빠져나갈 수 있는 허점으로 악용될 여지가 컸기 때문이다. "계열사 업종 고려없이 200%로 감축하는건 말이 안된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자동차, 조선업의 특성을 고려해보면 부채율 200% 유지는 실현할 수가 없다는 반발이 있었지만, 이 역시 이헌재 금감위장이 악역을 맡았을 때 이미 얘기가 나와, 이 회사 사정, 저 회사 사정 감안하지 않고 예외 없이 30대 그룹 구조조정안 일괄제출이 통보된 상황이었다.

"구조조정 작업에 소홀히 하며, 오히려 막대한 부채를 빌미로 배짱을 보였다."고 말한 강봉균 전 경제부총리의 입장, 과거 대우통신 상무 직위로 일하던 시절 한국반도체 인수 실패로 계약금 회수에 몰두하다 자진 퇴사한 이헌재가 한국신용평가 사장으로 취임한 후 당시 다른 5대 그룹보다 재무 평가에서 계속 불리하게 레이팅 되었다는 대우맨의 증언,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국민의 정부 경제 관료들에게 반기를 들며 밉보여 꼬투리를 잡혔다는 의견 등이 있다. 여담으로 국민의 정부에서 이헌재는 낙하산으로 금융감독원장 자리에 앉기도 했다. 하지만, DJ의 야당 총재시절 신문에 연재되는 무협지면까지 빌려 교묘하게 DJ를 깎아내렸던 중앙일보[18] 그 상관격인 삼성그룹에게도 대통령 측근들이 손을 대지 않았던 점이나[19][20], 여소야대 국면, 당시 경제적 상황을 감안하면, 아무리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해도 자신을 기술자로 여겼던 이헌재의 행동반경이 보복 수준에 이르기 힘들다.[21]

비록, 호시절에 다른 5대 기업보다 기술개발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긴 했지만, 동유럽 및 동남아시아 시장을 선발적으로 개척한 상태였던 것, 조선소와 자동차회사를 운영하며 축적된 고급인력[22][23] 등을 감안할 때, IMF 시기에 있었던 위기를 단지 신정부의 군기잡기로만 치부하지 않고, 좀 더 심각하게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1999년의 대우그룹 사태의 모습이다.

미국 GM은 쉐보레 통합 이전 GM 대우 시절 경영 정상화에 대한 자금 지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다가 채권단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방관하는 모습을 보여 대우자동차는 GM에게 단물만 빨리고 "제 2의 쌍용차"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국내 전문가들을 통해 제기된 바 있었다. 실제로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당시 미국 정부의 관리를 받으며 Government Motors라 불리기까지 했던 제너럴 모터스의 위기탈출 1등 공신도 바로 대우가 보유한 이었지만[24], 그 직원들은...

전 세계 6개 연구소, 16개 생산기지, 19개 현지법인, 78개 해외판매망을 거느렸던 대우자동차가 GM의 생산기지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25]

참고 기사(김우일 前대우그룹 구조본부장 대행 단독 인터뷰):
기사 1
기사 2

4. 가족

  • 아버지 김용하(1896 ~ 1950) 교장, 납북
  • 어머니 전인항
    • 김우중(1936 ~ )
    • 부인 정희자(1940 ~ )
      • 장녀 김선정(1965 ~ )
      • 장남 김선재(1967 ~ 1990)
      • 차남 김선협(1969 ~ )
      • 3남 김선용(1975 ~ )

5. 관련 일화

5.1. 기업인 일화

파일:external/www.econotalking.kr/img_14127_3.jpg
  • 김우중은 전용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인식 그 크기의 회사 회장에 전용기가 사치로 보였을 것 같진 않다마는 등의 문제로 체코의 어느 공항 어딘가에 있다가 유럽 다닐때만 사용했다고. 사실 그가 활동한 동유럽 지역까지 매번 전용기를 타고 날아간다고 하면 유지비도 상상초월급이기에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1등석이 비싸 봐야 천만 원 단위이지만 전용기는 비슷한 거리를 갈 경우 연료비만 억대가 나온다. 해외출장이 특히 잦던 그가 계속 전용기를 탔다면 유류비 폭탄이 날아왔을 것이다.
  • 극성 축빠였다. 사원 체육대회에서 축구 경기가 열리면 선수로 몸소 출전해 풀타임을 뛰었다고 하고, 축구단 창단을 위해 당시 잘 나가던 여자 실업배구단까지 해체했다고 한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만든 부산 대우 로얄즈는 상당히 잘 나갔다. 현재 센텀시티 부지에 대우 로얄스의 축구전용구장을 지을 계획도 세워 놨을 정도였다. 삼성이나 금성야구을 창단하자 우리도 야구단을 창단하자는 간부의 제안을 즉각 거부할 정도였다. 이런 축구 사랑으로 아낌없이 축구에 투자하니 대한축구협회 회장도 역임했을 정도다. 다만 대한축구협회에서 물러난 계기가 좀 거시기한데, 김 회장이 축협에 자금줄을 대 주면 당시 실무진이 다 떼먹고 일처리 제대로 한 건 하나도 없었다.[26]이걸 보고 분개한 김 회장이 "내가 두 번 다시 족쟁이들과 상종하면 인간이 아니라 축생이오"라는 명언을 남기고 축구협회 일선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안정환의 해외진출도 김우중이 힘을 실어줘서 가능했다. 안정환이 이탈리아에서 씁쓸히 물러났던 이유 중 하나도 대우그룹이 기울면서 스폰서가 끊겼기 때문이다.
  • 광주와 특별한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등경기장 건립기금으로 향토기업인 금호아시아나그룹보다 많은 액수를 출연해 지역사회에서 큰 화제를 모은 적 있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활약으로 호남에서 야구붐이 일면서, 홈구장 건립에 1등으로 기여한 대우그룹의 이름이 호남 야구팬들에게 자연스레 인식됨에 따라 막대한 홍보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27]
  • 노조를 극렬히 반대하는 삼성그룹 가와는 달리, 동시대 재벌들과 비교하면 노조에 대해 진보적이고 관대했다고 한다. 대우가 FSO를 인수했을 때 조건이 3년 동안 자의적 퇴사를 제외한 모든 사원들의 안정적 고용이었다. 덧붙여서, 이에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 현재 인천시 부평구 을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과의 일화가 하나 있는데,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사태 때 노조[28]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공장 노동자들 내에서 영향력이 컸던 홍영표 의원과 노민추 소속 노조 중심인물들을 시청에 불러다가 즉석에서 직접 임금 협상을 했었다고. 그 결과 노조 측에서 요구한 임금 인상률 18%까지 아니어도 16.5%까지 인상시켜주었고, 노조와 노동자들의 복리후생을 철저히 약속했다고 한다. 또한 진보 노동운동에 참여한 홍영표 의원을 당시 경찰에서 예의주시하며 체포할 수 있는 것을 알아채 그를 자신의 자동차 트렁크에 숨겨 경찰이 둘러싼 시청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홍영표 의원은 그 후 대우자동차 공장의 지하 프레스실에 숨어 프레스실을 점거하고 대정부 농성을 계획하다 노동자로 위장한 경찰에 잡혀 결국 체포됐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대범함을 높게 산 김우중 회장은 그가 대우자동차판매에 복직할 때 영국시장에 고위직으로 파견시켜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룹차원에서 나이가 들어서 운동을 접고 취업을 하려던 운동권 인재들을 대거 특채하기도 했다. 김우중의 논리로는 "그사람들 자기 영달을 위해 싸운게 아니라 방향은 다르지만 공익을 위해 싸운거 아니냐"는 것. 사실 운동권에는 명문대 출신들도 많고, 조직관리나 선전등의 노하우도 있기 때문에 김우중은 그룹의 이미지도 개선하면서 좋은 인재를 쉽게 획득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분규 진압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여느 기업인과 마찬가지로 노조 분규는 철저히 진압했다. 1984~1985년 대우어패럴 노조활동 탄압[29], 1987년 8월 대우조선 파업 강제 진압 및 이석규 노동자 사망 사건 등의 노동운동 진압이 빈번하였다.
  • 그러나 그는 여느 재벌회장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입장에선 비판 일변도였다는 시각도 적지는 않은 편이다.[30] 특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뜨던 1989년, 당시 수배 중인 노동시인 박노해가 <월간 노동해방문학> 9월호(통권 5호)에 원고 400매 분량의 논평(오픈아카이브 기준 p261)을 실어 이 책과 김우중의 철학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이 논평은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란 책으로도 나왔다(오마이뉴스에 소개된 내용 일부). 하지만 그 박노해도 출소 이후 새천년 NHK 사건에 연루된 것이 알려지면서 이중잣대적인 행보를 보이고 만다는 점에서는 비판이 퇴색된 면도 있다.
  • 1990년대 초반에 북한의 "김일성" 부자와 면담자리를 갖기도 하였다. 임동원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따르면, 김일성이 우리나라 관료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우중 회장과 같은 사람 5명만 있으면 그 나라가 일어설 수 있다."고 상찬을 했을 만큼 마음에 들어했다는 후문.
  • 경영 스타일은 친화력 9단 + 일 중독 + 독불장군형으로, 대우그룹의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한창 때는 비서진도 일부러 체력이 좋은 남자 비서들을 골라서 선발했는데도 비서들이 김우중의 스케줄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몇달에 한 번씩 교체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식성도 이를 따랐는지 빨리 준비하고 먹을 수 있는 비빔밥이나 설렁탕을 즐겼다고. 하지만, 이렇게 상부에서 중요 정보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구조조정본부장을 만나보니 그룹 실상조차 제대로 모르더라."(강봉균 당시 경제수석비서관)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협력사였던 GM의 밥 루츠 부회장도 이 점을 비판하였지만[31], 당시 GM은 법정관리에 들어간 대우자동차와 지분 매각을 놓고 협상 중이었기 때문에,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비판적인 정보를 입수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볼 필요가 있다.
  • 김대중 대통령을 지나치게 믿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쪽보다는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했던[32] 연유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김대중을 믿었던 건 군사정권 시절, 신문에 이름 좀 오르내린다는 기업들은 여당에 후원금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여당 2, 야당 1의 비율로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야당 인사들과도 친분을 다졌던데서 연유한 것. 그리고 경기고등학교 후배로 대우그룹 임원을 지냈던 박정훈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내정간섭 수준의 각서까지 요구할 정도로 기세등등한 국제통화기금 하에서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이, 재계 총수들과의 자리를 마련, 1997년 외환 위기를 빨리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부탁하였지만, 회의가 끝나고 김우중의 후배인 타 재벌의 총수가 김우중에게 "어떨 것 같습니까?"하고 묻자 김우중은 "뭐 별일 있겠어. 다 들어서고 나면 처음엔 저렇게 군기를 잡잖아. 이번에도 별 탈 없을거야."라 말하며, 상황을 낙관하였다.[33] 다른 30대 그룹이 이헌재의 애정어린 독려(?) 후 5일만에 시행을 전제로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했지만, 김우중의 대우그룹은 오히려 당시 경영난에 처한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며 정부의 호감을 사는 한편, 추가 대출을 기대하는 대담한 발상을 실천에 옮긴다. 하지만, 당시(1998년) 대우그룹의 모기업이었던 (주)대우 한 회사의 부채만 22조 원(...). 참고로 당시 국가예산의 30%에 달하는 금액으로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998년 예산이 70조 정도였다. 그러니까 정부차원에서 정부출범에 대한 보은차원에서 부채를 다 보전해주고 싶어도 해주기 힘든 상태였다는 말.(...)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역시 김우중의 현실인식이 매우 낙관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34]
  • 대한민국에서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로 이미지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지만, 베트남에서의 평가는 현재까지도 매우 높다. 이는 대우가 베트남 진출할 때에 라이따이한에 대한 복지 지원, 현지인 대우 등에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존경하는 한국인으로 김우중을 꼽는 경우가 많다.[35]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이 선전한 것도 사실 대우가 에서 만들어 놓은 이미지의 수혜를 받은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방식은 다른 다국적 기업들도 본 받을 만한 것인데 많은 다국적 기업이 미성년자 노동, 개판인 직원 복지, 고용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 등으로 현지에서 욕을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에 가서는 "너희는 노조라는게 없냐?"고 욕을 엄청 먹었다고 한다(...). 김우중이 한국기준으로 본다면 그나마 노조에 관대했던 축에 들었지만 동유럽 기준으로 꽤 꽉막힌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에서도 노조를 중심으로 주축을 이루웠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당시 고용 안정을 이끌어 낸 것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2017년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에서 차별 대우 때문에 일어난 노동자 시위로 인해 현지에서는 김우중 회장의 현지인 대우와 복지 능력이 재조명받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5.2. 개인적인 일화

  • 재벌 총수라는 무게감에 걸맞지 않게 매우 간단한 식사를 즐겼다. 임원들과 중국음식점에 갔을 때는 짜장면 한그릇을 뚝딱 비우는데 15분도 채 안 걸려서 주변을 당혹스럽게 했으며, 해외 출장 때는 호텔 등에 있는 번듯한 레스토랑보다 사업장 인근의 허름한 식당을 애용했다고. 유럽 출장 때는 작업복 차림으로 공장을 둘러보다가 근처의 작은 식당에서 햄버거를 먹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는데, 훗날 도피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검찰 조사를 받을 때는 검사가 어떤 식사를 하겠냐고 묻자 라면사리를 넣은 김치찌개를 요청했으며 이는 해외 체류기간동안 한식을 거의 못 먹어서 그렇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 언플이라는 논란도 있는데, 해당 일화는 검찰쪽에서 직접 언급한 것이라서 애초에 성립되지도 않을 뿐더러, 과거 대우조선 사태(1989~1991) 때 거제도 옥포조선소로 시찰을 갈 때마다 근처의 허름한 중국집을 자주 들렀던 것을 생각하면 그냥 일반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식사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봐야 된다. 어차피, 김우중 회장도 소년기와 청년기 시절의 대한민국은 6.25 전쟁을 했고, 극소수 외엔 전부 가난했던 시절이라 당연히 음식같은 것도 풍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대우그룹의 회장으로 일했던 1980년대에도 마찬가지라서 새마을 운동같이 경제개발하던 시절이라 아무리 대기업 회장처럼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매일같이 귀족들마냥 비싼 음식만 먹고 살았을 것 같은 상류층들도 그렇게 많았던 때도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성공한 기업가들 대부분이 소탈하고 검소한 구두쇠같은 사람들도 정말 많은데다 흙수저 출신이었던 경우도 많아서...[36] 또한 아래에 나오듯이 김우중은 일 중독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을 도맡아하는 성향이 강했는데, 식성도 이를 따라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비싸다고 무조건 더 맛있는것도 아니다. 몸에 안좋을 수록 맛있다. 가격도 아주 비싸지도 않다라면의 맛은 라면만 낼 수 있고, 짜장면 맛은 짜장면만 낼수 있지 않는가? 대우그룹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중 김우중 회장의 출근길이 나온 적 있는데 밥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출근하는 차 안에서[37] 보온 도시락에 싼 아침을 먹는데 정말 소박하다 못해 이렇게 먹고 다녀도 되나 싶게 김치 썰어넣고 끓인 밥이 아침 고정 메뉴였다. 심지어 김우중 본인이 부르는 이름조차 개죽이었다고(...)
  • 부인 정희자 여사는 부군의 창업 초기부터 음식을 만들어와서 사원들과 같이 점심 식사를 했다고 한다. 현대 그룹 정주영 창업주의 부인 변중석 여사는 한술 더 떠서 직접 쑨 메주를 사원들에게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부부의 고향댁(강원도) 근방에 콩이 많이 났기에 상부상조를 하자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재벌가 창업주들이 세간의 시선과 달리 검약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 롯데그룹신격호 회장과 더불어 한국에서 아직까지 생존한 재벌기업 창립주이다. 대우가 망한 현재 유일하게 일선에서 활동하는 기업가는 신격호 회장 혼자 밖에 없지만... 신격호도 생존은 했는데 건강이 너무도 나쁘다. 치매 증세가 심각해서 자기 회사의 이름도 잊어버렸다.
  • 1936년생으로, 2019년 83세이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가 노태우 정부 시절 북한에 비공개 특사로 파견 갔을 때 김일성이 이미 50대에 접어든 자신과 40대 중반의 김정일을 두고 '젊은 사람'이라 불렀다고.(...) 말년에 김일성이 노망이 난 징조라 카더라 근데 80대인 김일성 시선에서 보면 50대인 김우중과 40대의 김정일은 젊은 사람 맞잖아?
  • 한류스타 이병헌의 양아버지이다. 1990년 11월에 아들 선재[38]가 미국 유학 도중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스물셋의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부인 정희자가 TV에서 이병헌을 보고서 "선재와 닮았다"고 하면서 호감을 느껴 이병헌과 친분을 맺었고, 노조의 반발로 접기는 했지만 이병헌을 위해 신형 세단 아카디아를 선물하려 했다고 한다. 회장님 개인 돈으로 선물하시면 됐잖아요 나중에 이병헌의 결혼식 때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재벌가 3세들이 꽤 있었는데 바로 김우중 부부와의 친분으로 만든 인맥이다.
  • 경기고 재학 당시 공부를 제대로 안해서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반에서 꼴찌였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걸 카더라라고 치부하기 이전에 당시 경기고등학교의 위상을 고려해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단 당시의 경기고는 서울대로 진학하는게 일반적일 정도로 당대 최강의 명문고였으며, 이 시절 연고대의 위상은 학비가 비싸서 지방국립대보다 위상이 낮았다. 그래서 대학 입시 상황 역시 서울대 전체 꼴찌가 지방 국립대 수석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학벌지상주의 세태였다. 이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위키러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21세기에 들어서야 서울대 하위와 연고대 상위가 배치표에서 겹치고 지방국립대의 위상이 낮아졌지만 예전에는 서울대 농대까지 다 돌고나서 지방 국립대의 순번이 오던 판국이다. 따라서 2011학년도 입시에서처럼 연세대 경영대 떨어지고 서울대 경영대 붙는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거기에 지방국립대에 갈 정도의 돈마저 없는 야심찬 수재들의 상당수는 육사에 갔다. 앞서 언급한 주먹패 전설을 감안하면 그들 중에서는 공부를 안했다는것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 연세대 졸업 이후 동문회장을 역임했고, 상경대학 건물 신축시 기부금을 내고 이 때문에 연세대 상경대학 본관의 명칭이 김우중 기념관이다. 또한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부지를 기증하는 등 여러 모로 연세대를 도왔다고 한다.고려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도 김우중 혹은 대우그룹이 기증한 건물이 있다는... 아주대학교나 제대로 도와주지. 한때 강연을 하려 연세대에 가자 학생들이 몰려와서 악덕 기업주라고 시위를 벌이자 굳은 살이 박힌 자신의 손을 보여주면서 '나는 이렇게 굳은 살이 박힐 정도로 일해서 돈을 벌었다. 학생들 중에서 나 정도로 고생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해서 학생들에게 일장연설을 했다고 한다. 확실히 김우중이 워커홀릭으로 평가받는 것은 사실이다.
  • 대우사태 이후 도피 루트가 굉장히 파란만장(...) 하다. 1999년 겨울에 중국 연태에 신설된 대우자동차 중국공장[41] 개소식 때 참여해 중국에 계속 머무른 것을 시작으로, 미얀마 - 라오스를 거쳐 베트남에서 3년 동안 은거해 지냈다. 이 때 한국 정부에서 김우중을 넘기라고 베트남 정부에 요청을 했더니 베트남 공산당 부서기가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국으로 치면 국무총리 급 인물이다. 공산국가 특유의 당이 행정부보다 우위인 특성상 일반적으로 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국가 최고지도자를 겸한다. 이 때는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 유감표명을 하기도 했고, 베트남측에서도 한국과의 경제협력에 많은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양국 관계가 매우 좋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우중 송환을 베트남측이 즉각 거부했다는 것은 그만큼 김우중이 베트남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는 반증. 그 후 프랑스에서 임시 국적을 얻어 2005년까지 지내다 결국 서울로 돌아와 자수하고 검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 1985년, 김우중과 형인 김관중(대창기업 회장), 김덕중(전 교육부 장관) 등의 형제들이 모여,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에 도서관을 짓고 이를 제주도에 기증했는데, 그 도서관이 아버지 우당 김용하의 호를 딴 우당 도서관이다. 본적지가 애월읍 하귀리로 되어 있다.
  • 아버지가 납북될 때 둘째 형도 납북되었는데 2003년 제8차 이산가족 상봉 당시 둘째 형이 살아있음이 알려졌다. 당시에는 김우중은 도망 다닐 때라서 만날 수는 없었지만.(...) 관련 기사1 관련 기사2
  • 대우그룹 경영 약 30년 동안 해외에 있던 시간이 17년이라고 하며 총 이동한 거리가 954만 km로 지구 240바퀴를 돈 양이라고 한다.
  • 자서전의 제목이자 그의 격언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2016년 한 언론 매체에서 조사한 '기업인들의 명언순위'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참고로, 1위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이봐. 책임자. 해 보긴 해 봤어?", 2위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였다. 여담이지만 대우그룹, 삼성그룹, 현대그룹은 IMF가 터지기 직전인 1980-1990년대 한국을 대표했던 Top 3 재벌그룹이였다.
  • 2012년부터 싱가폴 대학교의 신장섭 교수가 그와 극비리에 2년동안 나눈 비공개 대담록을 엮어 만든 '김우중과의 대화'가 2014년에 출판되어 잠시동안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대중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 서울대학교의 '근대법학교육백주년기념관'의 대강당 이름이 '주산기념홀'인데, '주산(宙山)'이 바로 김우중의 아호이다. 그와 같이 이름을 붙인 까닭은, 위 기념관을 건립할 때 공사비를 가장 많이 대어 준 사람이 바로 김우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 태영건설 회장 윤세영도 출연을 하였다. 그런데 왜 자기 모교도 아니고 자기 전공도 아닌 곳에 기부를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카더라.
  •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으로써 명성이 커서 가려진 감도 있는데, 부친의 영향을 받아 바둑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1983년 한국기원 2대 협회장을 지내기 시작하면서 프로 기사들을 대우그룹 임직원들의 바둑 선생으로 위촉하면서 그룹 차원에서 바둑에 소양을 쌓도록 했고, 홍익동 한국기원 기증과 국제기원 창설 등 바둑사업에 큰 공헌을 해 한국 바둑의 중흥기를 이끈 공헌자라는 높은 평을 받는다.
  • 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1990년대 파산 지경에 놓였던 시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는 대우그룹과의 합작 사업인 뉴욕 트럼프월드를 성공시키면서 부동산 개발업자로서의 명성을 회복하는데 김우중 회장은 상당히 파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빚더미에 올라있던 트럼프의 상황을 배려해서 대우는 트럼프라는 브랜드 사용료 만으로 매년 수백억을 지급했으며 이는 아무리 영화 출연 등으로 이미 명사였던 트럼프의 인지도를 고려한다 해도 과한 것이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김우중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거제 조선소와 대우차 공장 등을 둘러보고 대우 그룹 소유의 골프장에서 골프도 같이 쳤다. 서울과 대구, 부산 등에 여러군데 남아있는 트럼프월드는 이때 대우그룹과 트럼프의 인연이 남긴 유산. 도널드 트럼프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통령 당선이 되면서 이 일화가 재조명받기도 한 바 있었다.

[1] 40세손 '중(中)'자 항렬[2] 본래 3남 1녀였으나, 장남 김선재는 1990년 11월에 미국 유학 도중 교통사고로 요절했다.[3] (회장 대행ᆞ임시직, 재임 기간 1999~2001), (주)대우의 회사로,김우중의 도피로 인해 2001년까지 임시직을 맡아 수행하였다.그룹이 해체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다들 알다시피 부채의 규모가 막대하여 자신도 분식회계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 하였다. 현재는 일선에서 은퇴하여 세계경영회의 대표로 있다.[4] 그런데 자산규모는 1980년대 당시 10억 달러를 넘기지 못했다. 1987년 당시 포춘지에 나온 10억 달러 이상 자산가에 정주영, 이병철은 있지만 김우중은 없다.[5] 1960년대 후반일 때 500만 원이다. 이 때 500만 원은 2018년 기준으로 억 소리 나는 돈이다.[6] 아버지가 교장일 당시 대구사범학교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학하고 있었다.[7] 명문대 출신 또는 현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대우의 젊은 과장급 기술자들이 이때 독일로 산업연수를 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중요한 경험을 쌓게 된다.[8] 다만 이것에 대한 변을 하자면, 정부의 요청과 SUV쪽이 부실했던 대우차의 라인업을 보강하고자 하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이루어진 것이다.대우차가 보기에는 쌍용차의 부채비율을 자사에서 해결할 수 있을거라 판단하기도 했고...[9] 다만 북미에서는 퇴출당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적절하다. 왜나하면 당시 대우는 적자가 난 상황이었고, DMA(대우차 미국법인)가 대우차를 인수한 GM에 대우차 브랜드 사용허가와 딜러쉽 유지를 요구했지만 GM이 이를 냉혹히 거절한 것도 대우차보다 더 나은 인지도의 자회사가 있기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 내 자회사가 많은 GM과 기아밖에 없었던 현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대우자동차도 부도가 나지 않았다면 분명 미국시장에 신경을 썼을 것이 분명하고.[10] 정치계에선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전부터 여당 : 야당 = 2 : 1로 정치자금을 제공하고도 무사했으며, 1990년대 초반에 김일성을 만나 독자적인 대북 연결선을 구축하고도 별 탈없이 넘어갔을 정도다.[11] 다만 포스코대우 주도로 사우디를 시작해서 대우자동차의 부활을 다시 이루고자 했었지만, GM이 사우디 정부를 상대로 한 악랄한 로비와 쌍용차의 참여로 인해 결국 쌍용차가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포스코 본사 입장에서도 쌍용차에 자사 철강을 납품하고 있어서, 대우를 앞세워 자동차 개발에 착수하지 않아도 되다보니 내부에서도 대우출신 인사들과 포스코 본사 간부들간의 알력다툼이 심했다. 포스코에서는 계속 자동차사업을 진행하겠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일부 공직자들의 돈 빼돌리는 창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착공삽을 뜨기 전까지 섣부른 판단은 금물인 상황이다. 자세한 건 포스코대우 문서 참조.[12] 여담이지만 당시 대우자동차 노조 측에서 현상금으로 500달러(...)를 걸기도 했다.[13] 김우중은 차입으로 성공해서 차입으로 망했다라고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차입을 바탕으로 기업을 운영한 인물이다. 심지어 기술개발도 빌려오면 되지않느냐라는 식으로 생각할 정도로 인맥을 통한 경영에 집착했는데, 이러한 가치관은 과도한 차입으로 회사에 큰 타격을 준 이후에도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4] 힐튼 호텔 최상층 집무실쯤되면 1년이 아니라 한달에 수천만원단위로 계약이 되는 게 일반적이다. 다행히 해당 계열사가 힐튼호텔을 다른 기업에 팔면서 이 기묘한 계약이 드러났고, 법원 소송까지 올라가서 결국 이 터무니없는 임대차계약은 무효화되었다.[15] 사실 김우중급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 게 언론의 분식 회계 규모는 15억 달러인데 우리나라돈으로 약 2조 원 정도였지만 대우의 분식 회계 규모는 41조 원 + 사기대출 10조 원을 포함해 50조 원이 넘었다. 엔론의 수십배규모로 분식회계를 저지른 것이다. 엔론은 김우중의 대우그룹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다.[16] 다만 대우의 분식회계 규모는 다른 대기업들과 비교해봐도 남다른 규모긴 했다. 젊은 시절부터 차입경영을 선호했던 김우중은 당시 한국의 경영자들 중에서도 특히나 분식회계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알려져있다.[17] 물론, "이자는 휴일도 없다"는 격언이 당시에도 있었으나, 대출액수가 큰 대기업들이 은행이 주시할만한 거액을 빌리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장면도 많았던게 성장경제 당시의 풍경이었다고 한다.[18] 단, 남북관계에 관해서는 젊은 시절부터 관심과 공부가 깊었던 홍석현 사장의 영향으로 장기적인 관점을 유지. 의견 일부만 떼놓고 보면 DJ의 주장과 구분이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19] 5대기업 회장단과의 만찬에 참석하기 前, 이건희 회장이 직원들에게 "대기업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주의를 단단히 주었지만, 만찬이 끝난 후 이례적인 밝은 표정으로 나오는 장면이 포착돼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문화일보에서는 아예 1면 사진 밑에 "환한 모습의 이 회장"이라 써놨을 정도[20] 포니 정으로 잘 알려진 고 정세영 현대자동차 전 회장의 자서전에는 5대그룹 회장단과의 만찬에서 "수출 잘 하는 기업은 업고 다니겠다."는 말을 대통령당선자가 했다고 한다.[21] 특히 창당 후 대부분의 세월을 강한 야당으로 일관했던 한나라당에서 가만 놔두질 않는다.[22] 미국의 로켓발사대를 뜯어다 조선소 시설로 개조하는 능력과, 현대자동차처럼 신차개발시 부품까지 통째로 바꾸기보단, 기존 것에 개량한 부품을 넣는 방식으로 결과적으로 소비자 부담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들이다. 비록 자금사정으로 인해 이런 방식을 취하긴 했지만, 뒷받침해줄 자동차 기술진들은 김우중 회장이 의욕적으로 독일로 연수를 보내 배우게 했던 이들이었다.[23] 즉 대우차를 보유하고 관리만 잘 하면, 후속 신차 발표 및 업그레이드 모델에 적용된 신부품을 구해 끼워넣기만 해도 새차 산 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미국차들처럼 튼튼하게 차체를 만든다는 강점이 있었기 때문에, 세일즈 포인트로서도 유용.[24] 밥 루츠 전 부회장의 자서전인 빈 카운터스에도 나오지만, 석유가 풍부한 미국의 여건상 힘좋고 튼튼한 차량이 호황기의 주력상품으로 개발되고 소형차 개발은 등한시해, 1970, 80년대에 일본 제조사들이 치고 들어올 빈틈을 내주었다. 다만 이 책이 지적하는 정확한 내용은 상황이 안팎으로 안 좋아질 때 미국 업체들, 특히 제너럴 모터스에서 배기가스 및 연비규제와 당장의 시장 변화, 그리고 비용절감을 통한 이익 극대화에만 눈이 앞서 모든 라인업을 급히 소형화, 앞바퀴굴림화하다가 회사의 평판을 말아 먹은 건에 가깝다.참고로,그 책에서 는 자신에게만 충성하는지 신경쓰다가 회사를 말아먹은 독재자로 까였다.[25] 이미 (개인의) 성세가 끝나가는 상황에서는 이해관계가 얽힌 아군보다 적군 진영에 의탁하는 것이, 오히려 생명이나 세를 유지하는데 유리한 경우가 있다. 1999년 위기 때 손을 내밀었던 제너럴 모터스와 한국 정부 중 어느 쪽이 더 나았을지?[26] 최근 축사국을 중심으로 축협 개혁가라면서 이들을 축협 회장으로 미는데 정말 실소가 나온다.[27] 금호그룹은 한동안 이 일로 기업 평판에 타격을 입었다. 원래 금호 그룹에게 1순위로 광주의 프로야구단 창단 제의가 들어갔던 만큼, 만약 금호에서 야구단을 창설했으면 당시 버스회사 방식으로 운영되던 금호전자가 철수하지 않고 성세를 유지했을 것이라는 결과론도 있다.[28] 당시 대우차 노조 집행부는 현재의 강성 노조가 아닌 친기업 어용 집행부였다.[29] 이는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의 발단이 되었다.[30] 하지만 김우중 회장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그 자신이 거제도 옥포조선소에 근무하면서 회사안정과 노조문제를 직접 해결했다. 또 노동자의 집에 방문해 같이 식사를 하며 문제점을 경청하는 등의 일들을 생각하면 그는 다른총수들과는 유별난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그들의 입장을 이해라도 할 생각은 있었던 것.[31]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것은 최악이다. 많은 이들이 과거 대우 회장이 그런 독재자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직원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는지만 신경을 쓰다가 회사를 말아먹었다고 한다." -> 밥 루츠, 빈 카운터스, p.311. 해당 서적에서는 폭스바겐 회장을 비롯한 "유능한 독재자"의 사례를 소개하기 전에, 이런 식으로 자신이 생략하겠다고 했던 "무능한 독재자"의 사례로 김우중 회장을 살짝 언급한다.[32] 대출을 더 받을 수 있으면 틀림없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경제난 와중에도 오히려 공격적인 경영으로 세(勢)를 불렸다.[33] 공병호, 대한민국 기업흥망사, 해냄, 2011[34] 사실, 총부채가 140조에 육박하는 소프트뱅크같은 기업도 멀쩡히 존재하고 있듯이 부채규모가 꼭 회사 존속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1998년 10월 일본 노무라증권이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을 만큼, 쌍용자동차 인수 후 국내 2위의 재벌이 된 대우는 시장의 평가가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그 직후에 대우가 집중적으로 투자한 중국과 제3국 시장의 성장이 상황을 반전시킬수도 있었기에, 김우중 회장이 사안을 좀더 심각하게 바라보고 구조조정에 착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35] 할아버지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지금은 박항서 감독이다.[36] 대표적인 인물로는 현대그룹의 회장 정주영이 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의 흙수저에서 성공한 인물이다. 그리고,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한국 재벌 1세대는 가난하게 산 적이 많았고, 또 당시엔 넉넉히 썼다고 해도 지금 기준으로는 대단하지 않아보이는 것들도 많다. 2세대도 그런 부모세대를 어느정도 보고 자라기도 한다. 1, 2세대가 닦아놓아서 평안히 길을 가는 일부 재벌 3세가 지금의 금수저 생활을 누릴 뿐이다.[37] 물론 운전은 기사가 한다.[38] 서울 북촌 인근에 있는 '선재아트센터'가 바로 김선재의 이름을 딴 곳이다. 이곳의 관장은 지금도 김우중 전 회장의 부인인 정희자 씨이다.[39] 원래 일이 취미다라고 말할 만큼 일 중독자였다. 밥도 초스피드로 폭식 + 과식 스타일로 먹었는데도 소화불량에 걸린 적이 없다고 자랑했다나. 식사도 전투적[40] 대우 비디오 클럽을 거쳐 우일영상이 이때 만들어 졌으며 훗날 '시네마트'라는 브랜드로 독립되었다.[41] 현재는 상하이 GM산하로 운영주체가 바뀌어 운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