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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규 李錫圭 | Lee Seok Kyu | |
출생 | 1966년 11월 29일 |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 |
사망 | 1987년 8월 22일 (향년 20세) |
사인 | 노동조합 시위 중 우측 흉부 최루탄 피격에 의한 사망 |
학력 | 용북중학교 |
본관 | 전주 이씨 |
직업 | 노동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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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대우조선 노동조합 소속 노동운동가이다.2. 일생
1966년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용북중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 직업훈련원에서 1년간 배워 대우조선(현 한화오션)에 취직하였다. 다소 내성적인 그는 간혹 동료들에게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토로하기도 했으나,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며 힘든 조선소 작업에 성실히 임했다.그러나 대우조선 노동자들에게 1985년부터 1987년까지의 3년은 악몽의 시기였다. 임금은 거의 동결에 가까웠고, 급기야 1987년에는 3만명 중 1만6천명 감원이라는 직격탄까지 맞았다. 기아 임금으로 벼랑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불만이 높아지는 가운데 1987년 초, 군 입대를 앞둔 노동자들이 작성한 유인물 수천장이 현장과 기숙사 등지에 뿌려지면서 투쟁이 시작되었다. 사측은 부서이동, 파견근무, 해고 등으로 맞섰지만 불붙기 시작한 노동조합 결성 투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방위산업체에서 5년 근무하면 군 복무가 면제되기 때문에 한눈 팔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던 노동자들은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는데, 이석규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8월 11일에 결성된 대우조선 노동조합은 회사와 협상을 시작하였다. 협상이 진행되던 22일, 교섭 과정에서 사측의 무성의와 지연작전에 지친 노조 대표는 최초의 요구안에서 몇 걸음 물러나 ‘기본급 2만원 인상, 현장수당 2만원 인상, 가족수당 1만원 신설’ 안을 제시하였으나, 사측은 이를 결렬하였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1차로 호텔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백골단에 의해 구타당하며 바닷가로 쫓겨갔고, 2차 호텔 진입 때 경찰측이 웬일로 평화시위 시 길을 터주겠다고 제안하자 앉아서 행진을 계속하였으나 경찰은 사정없이 최루탄을 난사했다. 이 과정에서 이석규는 오른쪽 가슴에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쓰러졌고, 결국 그는 병원 이송 후 오후 3시 30분경에 눈을 감고 말았다.
3. 사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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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망에 분노한 동료들은 "돈도 필요 없다. 이석규를 돌려달라!"며 그의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을 용접으로 봉한 뒤 24시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변호사 노무현과 이상수 등 각계 인사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장례준비위원회가 발족됐다. 유족들에게서 장례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위임받은 장례준비위는 노조 집행부와의 연석회의에서 장례를 ‘전국 민주노동자장’으로 하고, 장지는 망월동 묘역으로 하되 묘지를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모란공원으로 하도록 합의했다.
그런데 8월 24일, 친척 행세를 하던 특전사 소속 육군 소령 이청수[1]가 유족 대표가 되면서 상황이 묘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유족들과 사측이 갑자기 장지를 남원의 선산으로,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자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 장례위원회는 장례식을 ‘민주국민장’으로 치르기로 최종 결정을 내리고, 장례절차에 앞서 정부의 공식 사과와 피해보상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장례절차를 두고 유족 및 사측과 장례위원회의 의견대립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24일 밤 노조 집행부는 회의를 소집해 살인경찰 즉각 구속과 정관용 내무부장관 등 관련자 즉시 파면, 당국의 공식 사과 및 최루탄 사용 중지, 피해자 보상, 회사측의 휴업조치 철회, 노조탄압 중지 등을 장례식의 선결조건으로 내세우며, 이것이 수락될 때까지 장례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8월 25일,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정부와 사측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기자들의 취재를 금지하는 한편 ‘고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순국 경과보고 제2차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밤 장례위원회는 “노조의 요구 가운데 ‘임금인상 3개항’을 먼저 타결하고 장례절차를 협의하며, 장지는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한다”는 2개항을 제시하고, 위로금은 그룹 회장 김우중의 재량에 맡기자는 전격적인 타협책을 제안했다. 그러나 26일 정부는 치안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해 외부 불순세력의 침투에 대해 발본색원하겠다는 강경방침을 고위 당정회의에서 결정했으며, 국무총리 김정렬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쟁의 진압과정에서 근로자 1명이 목숨을 잃은 것은 대단히 가슴 아프고 유감스럽지만, 외부세력이 개입하여 전통적인 장례절차를 무시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영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26일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진행된 교섭에서 노조와 회사는 양자가 제시한 중간선에서 임금인상액을 타결하는 등 총 17개항에 합의했다. 이를 전해들은 조합원들은 “20일간의 투쟁을 기본급 5,000원 인상으로 바꿀 수 없다” “이석규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해명과 사과 한 마디 없다”고 강력하게 반발하며 집행부를 성토했다. 그러나 노조 집행부는 재야인사들과 조합원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장례 준비를 서둘렀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양동생 노조위원장, 유족과의 3자 면담에서 장지마저 남원으로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렸다. 흥분한 노동자들은 노조 사무실로 몰려가 거세게 항의하는 한편 뜯었던 영안실을 다시 봉해버렸고, 결국 노조 집행부는 장례식 당일인 28일 새벽 1시쯤 장지를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노조 측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유족들은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남원으로 떠나버렸고, 경찰과 회사측은 사전에 계획된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슬비가 내리던 8월 28일 오전 10시 경, 영안실 문에 굳게 용접됐던 쇠막대가 지게차에 의해 뜯어졌다. 그의 시신을 실은 꽃상여를 앞세우고 대우조선 종합운동장까지 가는 동안 동료들은 내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고, 노동자와 지역 주민 등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드디어 영결식이 거행됐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였던 권인숙이 <그대! 강철같이 살아나시라>라는 조시를 낭독하자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크게 오열하며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오후 3시쯤, 회사버스 26대와 관광버스 2대 등에 분승한 1,500여명의 노동자들은 영구차를 앞세우고 망월동 묘역으로 향했다.
운구 행렬이 고성3거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15t 덤프트럭이 튀어나와 도로를 막았다. 그와 동시에 주변 야산에 잠복해 있던 2,500여명의 전의경과 백골단이 몰려나와 노동자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장례집행위원 등 재야인사들을 연행한 뒤, 탈취한 시신을 싣고 유유히 남원으로 달려갔다.[2] 장례 당일 저녁 6시를 기해 전국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고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추모대회’도 5만여 경찰병력에 의해 원천봉쇄됐다. 정부는 추모제와 관련해 총 64명을 구속했으며, 이소선 등 10여명을 수배 조치했다. 관련 보도자료
사후 16년 만인 2003년에 그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4. 참고자료
- <실록 민주화운동: 우리 강물이 되어(유시춘 등 5인 공저)> -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사망'. 경향신문사. 2005. p248~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