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백기완 白基玩|Paik Ki-wan | |
출생 | 1932년 2월 29일[1] |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 (現 황해남도 은률군 장련리) | |
사망 | 2021년 2월 15일 (향년 88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장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
본관 | 수원 백씨 |
부모 | 아버지 백홍렬, 어머니 홍억재 |
형제자매 | 4남 2녀 중 넷째 |
배우자 | 김정숙 |
자녀 | 슬하 1남 3녀[2] |
학력 | 황해도 일도초등학교 (4학년 중퇴)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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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동해방 백기완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썼던 마지막 말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썼던 마지막 말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사회운동가, 시인, 작가.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 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유래가 된 시 "묏비나리"를 짓기도 했다.
2. 일생
1932년 1월 24일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白弘烈)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부 백태주(白台周)는 장련면의 유지였고 1919년 3.1 운동 당시 수천 장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배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22년 장연농민공제회의 초대 회장으로 재임했고 1923년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 장련지부 설립에도 참여했다. 부친 백홍렬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장련청년회 집행위원, 장련청년동맹 검사위원을 역임한 인텔리였다. 두 부자는 1923년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수해와 지진 피해가 있었을 때와 1934년 삼남 지방 수재 당시 의연금을 기부하고 구휼에 힘쓰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도 하였지만 백태주가 독립군에 군자금을 지원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된 후 고문으로 옥사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로 인해 1942년 국민학교를 중퇴한 그의 학력은 국민학교 4학년에서 끝났다.[3] 6.25 전쟁에 소년병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왼쪽부터 10대, 30대, 40대.[4] |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열린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재야운동권에 독자후보로 추대돼 선거에 입후보했지만 야권 후보 단일화와 군부독재 종식을 촉구하면서 중도 사퇴했다. 당시 양김을 넘어 3김 단일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5년 뒤인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야운동권의 독자 후보로 추대돼 출마했지만 5위로 낙선하였다.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입장에서는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이후 처음으로 참여하게 된 직선제 대통령 선거의 후보다. 이 때 얻은 1%의 득표율과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본부의 조직은 현 제도권 진보정당의 선조인 건설국민승리21의 모체로서 의의가 있다.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으며 2000년대 들어서도 비정규직·해고 노동자들의 전국 투쟁현장을 비롯해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용산참사 투쟁,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 이명박 정권퇴진운동, 민중총궐기 등에 참여했고 다치기도 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집회에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꾸준히 참석했다. 7차 광화문 촛불 집회에 참석한 백기완 소장. 27초와 3분 50초 부분에 나온다.[5]
2017년의 모습 |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수필집을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이기도 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1980년에 그가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의 일부분을 차용하여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항일민족론'(1971),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1979),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두 어른'(2017) 등 평론·수필집을 비롯한 다수의 저작이 있다.
경평대항축구전이 한창이던 시절 성장했고 스스로도 축구선수가 되려다가 집안이 몰락하여 좌절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름을 검색해 보면 의외로 축구 관련한 기사가 나온다. 특히 2002년 월드컵 전후로는 순우리말 축구 용어를 쓰자고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정몽준과의 대담에서도 그러했고 신문선과의 대담에서[6] '슛'을 '때려', '골인'을 '꽈이 탕'[7]으로 쓰자는 등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강력하게 순화할 것을 주장했다. 실제로 1990년대에 비해 '스로 인'을 '던진다'[8]로 바꾸어 쓰는 등 순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저 '꽈이 탕'만은 당시 대부분의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저게 대체 뭔 생뚱맞은 소리?"란 반응을 보였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의 초청으로[9] 국가대표팀 선수들에게 특강을 한 적도 있다.
열렬한 국어순화론자로, 위에 언급한 축구 용어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되도록 순우리말을 썼다고 한다. 덕분에 분명 한국어로 말하는데 주위에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꾸준히 밀던 단어 중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등과 같이 성공적으로 사회에 안착시킨 것들도 있기는 하다.
2018년 4월 경 심장병 수술 때문에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폐질환 투병 중 결국 2021년 2월 15일 새벽 4시 향년 88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 중에는 2년 만에 조문했다.
3. 사후
2024년 5월 초, 종로구 대학로에 그의 일생을 기념하는 '백기완 마당집'이 세워졌다. 위치는 그가 생전에 통일문제연구소를 운영했던 곳이기도 하다.4. 기타
- 본인은 백범 김구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구는 1898년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 수감되었다가 탈옥했는데 그의 조부 백태주가 백범이 황해도 은율땅을 지날 때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 후 그의 부친 백홍렬이 그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백범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는 백범을 따르게 되었다. 백범도 그를 좋아해서 그가 즐겨 읊던 한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를 휘호로 써서 주기도 하고 중학교까지 학비를 대주리라 약속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다만 위의 내용은 백기완 본인의 일방적 주장으로 김구가 쓴 글이나 다른 김구 측근들의 증언에서 확인된 바 없다.
- 김구 외에도 생전에 장준하와도 인연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1974년 유신 정권의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함께 군사재판을 받아 투옥되기도 했다. 장준하의 사후 장준하를 기리는 편지와 글을 쓰는 등 본인이 장준하와의 깊은 관계를 가졌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백기완 혼자만의 주장일 뿐 장준하가 백기완과 과연 친분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백기완이 좌익 쪽인 것에 반해 장준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했어도 엄연히 정치 스펙트럼을 따진다면 보수 및 반공적인 사상을 줄곧 유지했기 때문에 사상의 차이도 컸다.
- 문재인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이승만, 박정희의 묘역을 참배하자 "문재인 어린 놈이 말야"라고 말하며 격분하였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 정부 시절에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받은 피해자이기도 했다.
- 2012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분단의 책임을 미국에게 돌리는 입장을 밝혔으며 미국에 대한 적대감도 가감없이 드러냈다. 이 기사에서 그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침략’으로 규정한다거나 ‘미 제국주의’ 같은 발언을 쏟아냈다. # 해당 기사에서는 주한 미국인의 강간 범죄가 일년에 십 만건씩 있었다는 검증되지 않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 그가 사망한 후 장례위원회가 서울시의 반대에도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을 진행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서울시는 서울광장 사용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백 소장의 분향소가 무단으로 차려진 데 대해 장례위원회 측에 변상금을 산정해 부과하기로 했다. 당시 서울은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로 100인 이상 모임이 금지됐는데도 영결식 방문자가 1,000명을 넘겼기 때문에 감염병예방법 위반 혐의로도 고발 조치할 예정으로 전해졌다. # 그런데 무혐의로 종결됐다. 이유는 밝힐 수 없다고 경찰이 말했다. #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13[11]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700 (1.55%) | 낙선 (5위) |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14[12] | [13] | 2,234 (1.85%) | 낙선 (3위) | |
1987 | 제13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후보 사퇴 | [14] | |
1992 | 제14대 대통령 선거 | 238,648 (1.00%) | 낙선 (5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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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32년 1월 24일[2] 장녀 백원담, 장남 백일, 차녀 백미담, 3녀 백현담.[3] 황광우, 백기완 - 인물연구 : 민중후보 백기완의 일대기, 사회평론,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 92권 12호 참조.[4] 81kg의 거구였으나 고문으로 몸이 반쪽이 됐다.[5] 저 때 부르던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6] 이 자리에는 이천수가 배석하고 서형욱 등이 옆에서 정리하였다.[7] '꽈이'는 과녁을 뜻한다고 한다.[8] 북한에서는 이전부터 던지기라고 사용하긴 했다.[9] 강연회 자리에서 청중을 휘어잡는 백기완의 모습을 히딩크가 인상깊게 보았다고 한다.[10] 김용균의 어머니[11] 용산구 을[12] 영등포구 갑[13] 조재천 전 내무부 장관이 이끌던 군소 정당.[14] 야권 단일화를 주장하며 후보를 사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