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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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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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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c224> 제1-3대 제4대 제5-9대 제10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rowcolor=#ffc224> 제11·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rowcolor=#ffc224>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rowcolor=#ffc224> 제20대
윤석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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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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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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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민주공화당 박정희 당선
2 신민당 김대중
3 국민당 박기출
4 민중당 성보경 사퇴
5 자민당 이종윤
6 정의당 진복기
7 통일사회당 김철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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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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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민주정의당 노태우 당선
2 통일민주당 김영삼
3 평화민주당 김대중
4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5 사회민주당 홍숙자 등록 무효
6 일체민주당 김선적 사퇴
7 한주의통일한국당 신정일
8 무소속 백기완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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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4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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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민주자유당 김영삼 당선
2 민주당 김대중
3 통일국민당 정주영
4 새한국당 이종찬 사퇴
5 신정치개혁당 박찬종
6 대한정의당 이병호
7 무소속 김옥선
8 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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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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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한나라당 이회창
2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당선
3 국민신당 이인제
4 건설국민승리21 권영길
5 공화당 허경영
6 바른나라정치연합 김한식
7 통일한국당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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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평화민주당 심볼.svg 파일:평화민주당 글자.svg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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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대중
권한대행
박영숙
2-3대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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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민주연합당 심볼.svg 파일:신민주연합당 글자.svg 총재
초대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민주당 총재 및 대표

파일:민주당(1991년) 로고.svg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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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aaa
<rowcolor=#003990,#0070BB> 기호 정당 이름 비고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민주당 김대중 당선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민주당 이기택 낙선
민주자유당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 후보 경선
통일국민당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자유민주연합 제15대 대통령 후보 경선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 후보 경선 }}}}}}}}}}}}}}}

파일:민주당(1991년) 로고.svg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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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aaa
초대
김대중
이기택
2-3대
이기택
4대
홍영기
박일
신민주연합당 총재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및 총재권한대행
민주당 총재
새한국당 총재 통합민주당(1995년) 총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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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9A4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svg 새정치국민회의 정대철 낙선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svg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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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가로 로고.svg 총재 및 총재권한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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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2대 총재
김대중
초대·2대 권한대행
조세형
3대 권한대행
김영배
4대 권한대행
이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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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총재 및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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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36px;"
{{{#181818,#e5e5e5
총재와 지명직대표최고위원 병행
초대 총재
김대중
권한대행
한광옥
1-2대
서영훈
3대
김중권
4대
한광옥
}}}}}}
{{{#!wiki style="margin: -6px -1px -36px;"
선출직대표최고위원
5대
한화갑
6대
정대철
7대
박상천
8대
조순형
비대위
한화갑
}}}
{{{#!wiki style="margin: -6px -1px -36px;"
대표
9-10대
한화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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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 초대부터 4대까지의 대표최고위원은 총재가 임명하는 지명직 대표최고위원이다. 5대부터 8대까지의 대표최고위원은 선출직 대표최고위원이며 그후 대표로 바뀌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평화상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40%"
{{{#!folding [ 20세기 수상자 ]
{{{#!wiki style="margin:-6px -1px -10px"
1901년1902년1903년1904년1905년
장 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윌리엄 크리머국제법학회베르타 폰 주트너
1906년1907년1908년1909년191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드리크 바예르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1911년1912년1913년1914년1915년
토비아스 아서르
알프레트 프리트
일라이휴 루트앙리 라퐁텐수상자 없음
1916년1917년1918년1919년1920년
수상자 없음국제적십자사수상자 없음우드로 윌슨레옹 부르주아
1921년1922년1923년1924년1925년
칼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프리드쇼프 난센수상자 없음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도스
1926년1927년1928년1929년1930년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비데
수상자 없음프랭크 켈로그나탄 쇠데르블룸
1931년1932년1933년1934년1935년
제인 애덤스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
수상자 없음노먼 에인절아서 헨더슨카를 폰 오시에츠키
1936년1937년1938년1939년1940년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로버트 개스코인 세실난센국제난민 사무국수상자 없음
1941년1942년1943년1944년1945년
수상자 없음국제적십자사코델 헐
1946년1947년1948년1949년1950년
에밀리 그린 볼치
존 모트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
수상자 없음보이드 오어랠프 번치
1951년1952년1953년1954년1955년
레옹 주오알베르트 슈바이처조지 C. 마셜유엔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수상자 없음
1956년1957년1958년1959년1960년
수상자 없음레스터 B. 피어슨도미니크 조르주 피르필립 노엘 베이커앨버트 루툴리
1961년1962년1963년1964년1965년
다그 함마르셸드라이너스 폴링국제적십자사마틴 루터 킹유엔아동기금
1966년1967년1968년1969년1970년
수상자 없음르네 카생국제 노동 기구노먼 볼로그
1971년1972년1973년1974년1975년
빌리 브란트수상자 없음헨리 키신저
레득토 (수상 거부)
숀 맥브라이드
사토 에이사쿠
안드레이 사하로프
1976년1977년1978년1979년1980년
베티 윌리엄스
마레드 코리건
국제앰네스티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1981년1982년1983년1984년1985년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레흐 바웬사데즈먼드 투투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1986년1987년1988년1989년1990년
엘리 비젤오스카 아리아스유엔 평화유지군달라이 라마 14세미하일 고르바초프
1991년1992년1993년1994년1995년
아웅 산 수 치리고베르타 멘추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조지프 로트블랫
퍼그워시 회의
1996년1997년1998년1999년2000년
카를루스 벨루
조제 하무스오르타
지뢰금지국제운동
조디 윌리엄스
존 흄
데이비드 트림블
국경없는의사회김대중}}}}}}}}}{{{#!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40%"
{{{#!folding [ 21세기 수상자 ]
{{{#!wiki style="margin:-6px -1px -10px"
2001년2002년2003년2004년2005년
유엔
코피 아난
지미 카터시린 에바디왕가리 마타이국제원자력기구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2006년2007년2008년2009년2010년
그라민 은행
무함마드 유누스
앨 고어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마르티 아흐티사리버락 오바마류샤오보
2011년2012년2013년2014년2015년
엘런 존슨 설리프
리마 보위
타우왁쿨 카르만
유럽연합화학무기금지기구말랄라 유사프자이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2016년2017년2018년2019년2020년
후안 마누엘 산토스핵무기 폐기 국제운동드니 무퀘게
나디아 무라드
아비 아머드 알리세계식량계획
2021년2022년2023년2024년2025년
마리아 레사
드미트리 무라토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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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1960년 8월 13일 윤보선 대통령 대한민국
1963년 12월 5일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
1967년 6월 23일 육영수 영부인 대한민국
1979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 대한민국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 12월 7일 홍기 영부인 대한민국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전두환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이순자 영부인 대한민국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김옥숙 영부인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김영삼 대통령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손명순 영부인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이희호 영부인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권양숙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김윤옥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9일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문재인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김정숙 영부인 대한민국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빌헬미네 뤼브케 영부인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 2월 1일 2월 7일 이스마일 나시루딘 국왕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7일 틍쿠 인탄 자하라 왕비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시리낏 끼띠야콘 왕비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5일 장제스 총통 중화민국
1968년 5월 10일 5월 18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에티오피아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반티에우 총통 남베트남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티마이아인 제1부인 남베트남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하마니 디오리 대통령 니제르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아이샤 디오리 영부인 니제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 엘살바도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영부인 엘살바도르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오마르 봉고 대통령 가봉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조세핀 봉고 영부인 가봉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 세네갈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영부인 세네갈
1980년 5월 11일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국왕 사우디아라비아
1980년 5월 14일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1981년 6월 25일 수하르토 대통령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5일 시티 하티나 영부인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9일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1년 6월 29일 틍쿠 아프잔 왕비 말레이시아
1981년 7월 6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필리핀
1981년 7월 6일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 필리핀
1981년 10월 13일 로드리고 카라소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1년 10월 13일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영부인 코스타리카
1982년 5월 10일 사무엘 도 대통령 라이베리아
1982년 6월 7일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자이르
1982년 6월 7일 보비 라다와 영부인 자이르
1982년 8월 25일 압두 디우프 대통령 세네갈
1982년 12월 21일 케난 에브렌 대통령 터키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대통령 수단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영부인 수단
1983년 9월 10일 후세인 1세 국왕 요르단
1983년 9월 10일 누르 왕비 요르단
1984년 4월 9일 하사날 볼키아 국왕 브루나이
1984년 4월 21일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국왕 카타르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 감비아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치렐 자와라 영부인 감비아
1985년 5월 17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 파키스탄
1985년 5월 20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6년 9월 4일 4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영국
1986년 9월 4일 4월 16일 보두앵 국왕 벨기에
1987년 4월 7일 아메드 압달라 대통령 코모로
1988년 11월 3일 이스칸다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8년 11월 3일 자나리아 왕비 말레이시아
1989년 11월 3일 11월 20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 서독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프랑스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다니엘 미테랑 영부인 프랑스
1990년 6월 21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대통령 파라과이
1990년 11월 5일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 헝가리
1991년 9월 13일 아즐란 샤 국왕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13일 투안쿠 바이눈 왕비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25일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 멕시코
1992년 8월 13일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대통령 과테말라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피델 발데즈 라모스 대통령 필리핀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이멜리타 마르띠네즈 라모스 영부인 필리핀
1994년 11월 7일 11월 21일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대통령 칠레
1994년 12월 5일 12월 9일 레흐 바웬사 대통령 폴란드
1995년 2월 7일 2월 16일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1995년 2월 21일 3월 6일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독일
1995년 3월 28일 4월 3일 젤류 미테프 젤레프 대통령 불가리아
1995년 6월 26일 7월 7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 9월 26일 9월 29일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아르헨티나
1996년 7월 23일 9월 4일 알바로 아르수 대통령 과테말라
1996년 7월 23일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대통령 브라질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스페인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왕비 스페인
1996년 11월 26일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국왕 말레이시아
1996년 12월 10일 12월 15일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우크라이나
2000년 2월 22일 3월 3일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대통령 이탈리아
2000년 2월 22일 3월 6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 프랑스
2006년 3월 12일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 알제리
2007년 3월 26일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2007년 3월 28일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국왕 카타르
2009년 5월 13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카자흐스탄
2009년 11월 12일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페루
2012년 5월 30일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 스웨덴
2012년 11월 21일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대통령 아랍에미리트
2018년 10월 8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프랑스
2019년 하랄 5세 국왕 노르웨이
2021년 6월 14일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대통령 오스트리아
2021년 6월 16일 펠리페 6세 국왕 스페인
2021년 6월 16일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왕비 스페인
2021년 8월 25일 이반 두케 대통령 콜롬비아
2021년 9월 21일 보루트 파호르 대통령 슬로베니아 }}}}}}}}}

삼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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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wiki style="margin: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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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2위
이순신 반기문
3위 4위 5위 6위
박정희 세종대왕 노무현 정주영
7위 8위 9위 10위
이건희 김수환 김대중 김구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이순신
2위 3위 4위 5위
세종대왕 노무현 박정희 김구
6위 7위 8위 9위
정주영 유관순 김대중 반기문
10위 11위 12위 13위
안중근 부모님 신사임당 이국종
14위 15위 16위 17위
이건희 안창호 문재인 김연아
※ 응답수 50명 미만인 18위부터는 공개하지 않음.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예능인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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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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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의 각 해마다 시사저널이 각 분야의 전문가 1000명에 칸타퍼블과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했으며, 최대 3명까지 중복응답이 가능하였다. 해당 틀에는 1위만 기재함.
1990 1991 1992 1993 1994
노태우 김영삼
1995 1996 1997 1998 1999
김영삼 조사안함 김대중
같이 보기: 한국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종합) / 여권 정치인 / 야권 정치인 / 법조인 / 경제인 / 언론인 / 문화예술인 / 연예인 / 스포츠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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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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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의 각 해마다 시사저널이 각 분야의 전문가 1000명에 칸타퍼블과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했으며, 최대 3명까지 중복응답이 가능하였다. 해당 틀에는 1위만 기재함.
2000 2001 2002 2003 2004
김대중 노무현
2005 2006 2007 2008 2009
노무현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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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金大中 | Kim Dae-jung
파일:Kim_Dae-jung_presidential_portrait.jpg
출생 1924년 1월 6일[1]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
(現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길 255)[2]
사망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사저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촌로6길 10 (동교동)[3]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김대중대통령묘소
재임기간 제15대 대통령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서명
파일:김대중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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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본관 김해 김씨[4]
부모 아버지 김운식, 어머니 장수금[5]
형제자매 이복누나 김안례, 이복형 김대봉
남동생 김대의, 김대현
여동생 김진찬
배우자 차용애 (사별)[6]
이희호 (재혼)[7]
자녀 김소희[8],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
학력 목포제일공립보통학교[9] (졸업)
목포공립상업학교 (졸업 / 22회)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외교대학원 (정치학 / 박사)[10]
병역 병역면제 (징집상한연령 초과)[11][12]
종교 천주교 (세례명: 토마스 모어)[13]
신체 173cm, 69kg, A형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5(민), 6, 7, 8, 13, 14
약칭 DJ
창씨개명 豊田 大中 (とよた だいちゅう)
후광(後廣)[14] }}}}}}}}}
파일:김대중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1. 개요2. 약력3. 일생4. 평가5. 별명6. 정치적 성향
6.1. 민주화 운동6.2. 국정 전반6.3. 외교적 성향
7.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8. 여담
8.1. 방송 출연8.2. 그의 이름을 딴 시설이나 단체8.3. 종교
9. 저서10. 어록
10.1. 북핵 관련10.2. 제15대 대통령 취임사
11. 가족 관계12. 각종 타이틀13. 대중 매체에서14. 명예 박사 학위15. 수상 내역16. 선거 이력17. 소속 정당18. 둘러보기

[clearfix]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2. 약력

3.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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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호남 태생 대통령이자 직접 선거로 선출된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소속 대통령이다.[21] 삼김시대의 일원 중 한 명이다.

본래 해운 회사신문사를 경영하던 청년 사업가 출신으로 민주당 신파에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야당 정치인이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까지 대통령 선거에서 계속 낙선을 거듭해왔으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DJP 연합을 통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으며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였다. 또한 1998년 대통령 취임 당시 74세로 역대 대통령 중 최고령이었다.

대북 유화책인 햇볕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6월에는 사상 최초로 북한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2003년에 임기를 마치고 2009년 8월 18일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과 호흡곤란증후군으로 향년 85세로 사망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3.1. 국민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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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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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김대중/평가로 분리되어 있다. 햇볕정책에 관련된 평가는 당 정책의 문서에 분리되었다.

5.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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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치적 성향

구 공산권의 붕괴 이후 트렌드에 따라서 중도개혁주의를 내세웠는데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추구했다.[22] 같은 민주화 운동가 출신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비교하자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유보수주의 성향에 가까웠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회자유주의에 가까웠다. 그래서 정치나 문화적으로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려고 노력했고 경제적으로는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노선을 걷되, 경제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노력하는 제3의 길 노선을 병행하였다.[23] 민주화 이후 첫번째로 민주당계 정당이 배출한 대통령으로서 대통령들과 비교하자면 가장 보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24] 대외적으로는 한미동맹을 우선시하면서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햇볕정책을 주창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추진하는 등 일본과의 관계도 원만히 했다.

6.1.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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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권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민주인권 투사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 버마(미얀마)의 아웅산수지 여사와 함께 이름이 잘 알려진 민주화 운동가이기도 하다.

특히 만델라와는 70 ~ 80년대 민주 투사로 활동하며 극심한 탄압으로 투옥 및 망명을 거친 행적을 시작으로 대통령 재임, 자신을 투옥하게 만든 전 대통령을 용서한 전적[25], 노벨 평화상 수상 이력까지 두 사람의 생애가 겹치는 부분이 많아 한겨레에서 '아시아의 만델라'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원래 김대중 납치사건을 제외하면, 70년대 ~ 80년대 초반만 해도 김영삼, 김대중 두 민주화 운동가들이 외신에 비슷한 비중으로 다뤄졌지만, 80년대 중반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으로 망명간 DJ가 재미교포 및 현지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함에 따라, 해외 인지도를 크게 쌓게 된 것. 대통령에 당선되고서도 인도네시아의 위협을 받던 동티모르에 파병을 하고, 세계 여론을 움직였으며, 완전한 정계 은퇴 뒤에도 미얀마의 민주운동에 후원하는 등 꾸준한 민주화 운동 행보를 보였다.

나중에는 만델라와 개인적인 인연도 닿아, DJ가 대선에 출마하자 만델라 측에서 딸을 통해 수감생활 27년을 함께한 낡은 시계를 선물했고, 김대중도 답례로 지난 20년간 정치활동을 하면서 쓴 낡은 가방을 선물했다고 한다. 만델라가 쓴 책을 DJ와 보좌진들이 번역한 저서가 한국에서 출간되기도 했으며, 2001년 만델라의 두번째 방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과 공동 기자 회견을 진행하기도 했다. 위 사진도 당시 사진. 2009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에 대해 애도했고, 만델라도 세상을 떠나자[26] 이희호 여사가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보편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주장한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와 충돌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김대중과 리콴유 두 사람 뿐만 아니라 각국의 석학들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학술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

그동안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6.2. 국정 전반

사실상 대한민국의 첫 리버럴 성향의 대통령이었으며, 사회, 문화의 전반에 있어서 여러 권위주의군부독재의 잔재를 타파하려 노력했다. 부정부패 논란은 많았지만 어쨌든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지향해 정부 내의 여러 악습들을 사라지게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또한 여성가족부를 신설하고 페미니스트 운동가 출신 한명숙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여성주의적 개혁도 시도했다. 또한 햇볕정책 등 당시까지의 대통령들과는 정반대의 외교적 모습을 보여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리버럴 성향이라고 평가받을 업적이 많은데, 일본 대중문화 개방, 영화사전심의제 폐지를 비롯한 여러 규제 철폐부터, 권위주의 타파 정책 등 사회문화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다수 시행하였다. 또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시행하여 IMF 사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러 경제정책을 시행한 것을 보면 꼭 노동계에 우호적인 성향이었던 것도 아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빅딜 조치나 정부주도의 IT산업 진흥에 대해 관치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한 쪽에서는 신자유주의, 다른 쪽에서는 관치주의라는 지적을 한 셈이다.[27]

1996년 연세대 사태 직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가 연세대를 방문하여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규탄하며 "과격한 학생운동은 이제 끝이 나야 하고 한총련은 자진해산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며칠후 "김대중 씨는 신념도 양심도 없고 의리와 도덕도 지킬 줄 모르는 너절한 인간"이라며 맹비난했다.# 당시 안기부장이 국민회의 측에 김대중 총재에 대한 신변위협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을정도.# 이어 임기 첫해 인 1998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99년초 한총련 소속 대학생 3명이 청와대 앞에서 `김대중은 퇴진하라'는 문구가 씌어진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99년 7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을 수여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북한은 김대중을 강하게 비난하였다.#[28][29]

자세한 내용은 김대중/평가 문서로.

6.3. 외교적 성향

김대중 정부 때는 주변국이나 국제관계에서 마찰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좋은 일본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연설로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선언,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안정된 일본과의 관계,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북한과의 관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 도와주고 구명을 요청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인 미국과의 관계가 모두 좋았다.

냉전 당시 외교적으로 미국소련 사이의 중립을 주장했지만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집권 당시엔 미국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같은 정당이었지만 미국과 많은 마찰이 있었던 노무현 정권과 대비되는 부분. 1970년대 지미 카터 정부는 도덕주의, 인권주의를 표방하며 남미, 아시아의 친미국가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는 인사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김대중이 그 중 한명이었다. 지미 카터는 집권당시 주한미군 철수를 내세워 박정희 정권과 마찰을 빚었는데, 김대중의 민주화 운동 행보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서 1980년 김대중 구명을 전두환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카터의 후임 레이건 정권은 전두환 정부를 지지해주고 있었지만 정부 차원에서 김대중 석방을 '권고'를 했다.[30] 이로 인해 미국에 잠깐 피신하기도 했고, 그들의 도움을 계속 받아왔기에 김대중은 미국에 개인적인 감사함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는 당시 대북 포용정책을 펼치던 빌 클린턴 정권과는 밀월 관계였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이후 조지 워커 부시 정권이 출범해 대북강경책을 내세우자 마찰을 빚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후 민주당 정권에 비해 보수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나 사실 이것에 대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이르기까지 36년을 이어온 보수정권 시절 진보나 재야 민주화세력들이 그만큼 억눌린채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되었으므로 진보나 NL반미쪽의 목소리가 IMF 외환위기로 여야 정권교체가 터지자 조명받기 시작한 것도 있다.[31]

특히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클린턴 전 대통령 본인이 학생 시절부터 진보 민주주의 인권운동 사회활동가부터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원조 사회운동 활동가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 존중하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본인이 말하기도 할 정도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 곧바로 클린턴 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고 싶다는 메세지를 밝혔으며[32] 당시 청와대 의전 비서관의 증언에도 다른 서구권 지도자와는 달리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경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떠날 때나 도착할 때 차가 도착하거나 떠나는 현장까지 와서 차에 탈 때 까지 배웅하고 지켜보며 고개를 숙이면서 까지 인사를 하는 등 인권운동가가 대통령이 된 끝판왕 테크트리 선배의 대우를 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넬슨 만델라와 비슷한 느낌으로 서구권에서 민주진보 계열 세력에서 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크쇼 등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소개할 때면 아시아의 만델라라고 소개한다. 특히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제기한 것에 감사를 나타내고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합의가 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한 승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33]

즉, 정치인으로의 행보(외교술)가 곧 그 사람의 사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셈. 후임이자 같은 민주당계 진영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미 관계에 있어서 보다 냉정한 모습을 보인 건 맞지만, 김대중은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정치인이었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는 주한미군은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고 동북아 균형을 위해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은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34]

1997년 10월, 미국일본이 미일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고 자위대의 영향력을 해외로 확대하는 법안인 미일가이드라인을 체결하자[35] 당시 미일가이드라인에 대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후보는 "미일가이드라인의 골자는 유사시 자위대한반도에 진출하여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하는 것이 큰 문제"며 "주권국인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이런 법안이 통과된 것과 우리정부의 무관심과 무능에 분노할일"이라고 김영삼 정부 시절 외교부의 일처리를 비판했다.남북정상회담 개최될 것 김대중후보 발언 한겨레 신문이 그 해 10월 20일 대선후보들 응답을 표로 정리한 바에 따르면, 김대중 후보는 통일 후 주한미군 주둔 여부에 대해 "반드시"라 답했고, 유사시 자위대의 한반도 군사개입에 대해 "한국의 사전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97대선 정책대결로(정리 : 한겨레 신문)

또한 1980년 5월 13일에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 공산 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남한에 대해 폭력에 의한 그들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 경고한다"면서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여 북한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하야 한다"라고 발표하였던 적이 있다.

또한, 김대중은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나타냈는데, 예를 들어, 조선로동당 규약에서 남조선의 사회주의화 조항을 삭제하라고 발언하던지, 일본에서 반유신 기자회견을 할 때, '공산주의'와 싸워서 자유를 얻어내야 한다고 하던지 그러하였다.

김대중은 김영삼과 달리 대만에는 방문하지 않았지만, 1997년 대선 때 대만 측에게 IMF 차관을 요청하였다. (물론 거절했지만) #

이에 따라 사망한 뒤 객관적으로 판단을 하는 경향이 대세가 되고 있는데 당장 영화 공작의 경우처럼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북한 정권이 공식 우편으로 우체국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원한다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는 공작도 있었는데 이런 식의 논란에 대해서도 정말 북한이 자신보다 경제규모가 30배나 큰 대한민국의 대선에 개입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그럴 수 있는 국가적인 여력이나 자금이나 있는지 이런 얼토당토 않은소리에 넘어갈리도 없는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 당연히 위의 우편물 사건도 반 DJ쪽에서 벌인 정치공작이었음이 드러났다.[36]

그의 임기말이던 2002년 12월, 청와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근(2002년 당시) 붉어진 반미감정에 대해 공무원 190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문제로 비약돼 ‘미군 나가라’고 하는 것은 안된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필리핀이 수빅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미군을 나가라고 했을 때 일부에선 설마 나갈까 했지만 미군이 철수, 경제와 국방에 큰 문제가 생겼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안보를 위해 미군을 있도록 하는 것이고, 미국은 미국대로 동북아 안정을 위해 와 있다”면서 “미국은 우방으로서 국가 이익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미SOFA는 일본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라면서 “운영에 있어서 개선하기로 미국과 합의했으며 얼마든지 개선하면 된다”고 말하며 주한미군의 여전한 중요성을 밝히며 대통령직을 마무리했다.[37]

7.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

7.1. 동교동계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자택이 마포구 동교동에 있기 때문에 김대중 계파의 일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교동계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상도동계 및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과 연대해서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민주화 이후 그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이 먼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임기 말에는 1997년 외환 위기 등으로 위기에 처한 뒤 정권 교체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이로 인해서 1998년, 김대중이 정권을 잡게 된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각개약진하였다. 권노갑을 비롯한 상당수 동교동계 주류들은 이인제를 지원하였고, 동교동계의 또다른 실력자 한화갑은 스스로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양쪽 다 노사모를 앞세운 노무현 바람(노풍)에 우수수 떨어지게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계파였지만 김대중 퇴임 후, 노무현이 정권을 잡고 난 뒤 열린우리당이 새천년민주당과 분리되고 진보적인 색채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17대 총선에선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줄줄이 낙선했으며, 구성원들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순 없는지 연로해감에 따라 대부분이 정계에서 자취를 감춘데다 남아있는 정치인도 여러 군데로 흩어져 현재 동교동계를 자처하는 인물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상태다.[38] 그리고 구심축이던 김대중까지 사망함에 따라 동교동계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세대가 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들도 이념에 따라 친노 - 친문, 비문재인 등으로 갔다.

7.2.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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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랬던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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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되고 말았다.
김대중 씨는 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
김영삼[39]
김대중은 숨쉬는 것 빼고는 다 거짓말.
김영삼
이른바 양김이라 불리면서 민주화 정치인의 쌍두마차였지만 제13대 대통령 선거3당 합당 때문에 둘은 사이가 무척 나빠졌다.[40] 그러나 김대중 서거 직전에 김영삼이 병원에 찾아와서 화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하는데, 혼수상태였던 김대중에게 김영삼은 화해하자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한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 문서에서 서술.

그리고 2015년 11월 22일에 김영삼이 향년 87세로 서거하면서,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보낸 양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7.3.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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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동지이자 대통령 선·후임자로서 궂은 일, 좋은 일도 많았고, 서로 사이가 나빴던 적도 없진 않았다. 가장 나빴었던 시절은 노무현 정부 초기 자신의 심복이었던 박지원이 불법대북송금 사건으로 감옥에 갔던 시기다.[41]

하지만 그럼에도, 사적으로는 김대중은 노무현을 굉장히 아꼈으며, 노무현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자 크게 충격을 받았고 장례식에도 일가족들과 직접 참석해 노무현의 영정 앞에서 직접 분향할 때 엄청나게 통곡을 했고, 노무현의 죽음을 두고 "내 몸의 반쪽이 무너진 느낌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42]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치레는 많았어도 기본적으로 강골이어서 어느 정도는 건강했던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으며, 결국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8. 여담

파일:external/ppss.kr/%EA%B9%80%EA%B5%AC4.jpg*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과 정도경의 결혼 축하 선물로 보인다. 본문 내용은 '야설(夜雪)' 이란 제목의 한시. 작품 오른쪽에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로 적혀 있으나 사실 조선 후기 문신 이양연(李亮淵)의 작품이다.
  • 서예에 상당히 능하여 경매에서 꽤 비싸게 팔리기도 한다. 최고작은 4100만원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민주회복조국통일”이다. #
  • 죽을 고비만 다섯 차례[43] 겪어 본 흔치 않은 이력의 정치인이다. 군사 정권 시절에는 친정부 성향의 언론들로부터 온갖 마타도어에 시달렸으며, 시국사건에 얽혀 징역을 살았다. 이런 DJ 옆에서 같이 정치 생활을 했던 측근들도 고통 분담(?)에 동참, 연혁이 오랜 측근일수록 감옥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며[44], 김옥두, 한화갑 같은 경우는 김영삼의 측근 김동영과 더불어 고문까지 받은 대표적인 측근 정치인으로 꼽히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인 대통령직까지 수행했지만, 그 도달 과정은 한창 능력을 발휘할 40대 ~ 50대 시기에 정권 차원에서 가한 박해를 감내하는 가시밭길이었던 것.[45]
  •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고생을 많이 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온갖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전두환에 의해 대한민국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렇게 역경이란 역경이 모두 닥쳐와도 다 견뎌내고 기어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 점을 빗대어 겨울을 버티고 피어난다는 인동초(忍冬草)가 별명이 되었다. 민주화 투쟁에서의 수많은 시련, 대선에서의 수많은 고배를 겪으면서도 기어이 대권을 쟁취한 그에게 붙여진 가장 대표적인 별명이다.
  • 일베 등 극우 커뮤니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등학생이었던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고등학교 교사에게 찾아가 "센세. 와따시데쓰. 아노 다이쥬데쓰요.(선생님 접니다, 그 다이쥬[46][47]입니다)"라고 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실제로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고등학교 일본인 은사인 무쿠모토 이사부로(椋本伊三郎)를 만난[48][49] 적이 있다.
  • 김대중, 노무현의 연설을 모두 담당했던 강원국의 말에 따르면, 김대중은 생각의 과녁이 너무 멀어 맞히기가 어려웠고, 노무현은 과녁은 가까우나 막 움직여서 맞히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비슷한 비유로 유시민김대중은 높은 산이라 우러러보기에는 좋으나 오르기에는 힘들고, 노무현은 낮은 언덕이라 함께 오르기에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두 표현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미세한 차이를 잘 보여준다.
  • DJ가 신문을 10여개씩 챙겨보면서 뉴스, 정보를 갈구했던 탓에 그의 측근들은 늘 머릿속에 뭔가 소식을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MBC 아나운서 출신인 정동영 의원 같은 경우는 한 발 더 나아가, 막 정계에 입문한 초년병 시절이었는데도, 박지원과 함께[50] 새벽 6시에 김대중 총재에게 일일 브리핑을 하는 생활을 6개월 동안 한 적이 있다. 이 생활이 고됐는지 정 의원은 자신의 후임자가 정해지자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는 소회를 밝힌 적도 있다.
  • DJ는 자신이 신임하는 측근들에 대해서는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챙겨주는 것으로 잘 알려졌다. 한 번은 박지원 비서실장이 야당 대변인이던 시절 아침 회의 때부터 술냄새를 풍겨 다른 참석자들이 눈살을 찌푸리면 "대변인이 밤새 을 한 모양이군요. 기자들과 술을 마시는 게 대변인의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하며[51] 이런저런 사람들을 분위기를 풀어주곤 했다.
  • 평소 반 걸음만 앞서가는 글쓰기를 강조했다.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너무 앞서가지 마라. 따라오지 않으면 잠시 멈춰서서 들어라. 이해해줄 때 까지 설득하라. 그래서 의견을 맞추라"고 강조한다.
  • 그 밖엔 "손을 놓지 마라. 두세걸은 앞으로 나서면 마주 잡은 손이 떨어질 것이고, 따라올 수가 없다. 늘 그들 안으로 들어가 읽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란히 가서도 안된다. 발전이 없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상고를 졸업하고 일본 대학 진학을 계획했지만, 재정 문제로 장학제도가 매우 잘 갖춰진 만주 건국대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징병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진학을 포기했다. 건국대학에 진학해도 병역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만주 건국대는 오히려 평소에도 학업과 무술 연마, 군사 훈련을 병행했던 터라, 재학생들의 징병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2차 대전 말기 무렵, 미국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군을 끌어들였으며, 이때까지 만주에서 철수하지 못하고 남아서 부역한 일본인, 한국인 생존자는 대부분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한이 남았다고 밝힌바가 있다. 대선 공보 및 네이버 프로필에는 경희대학교 석사 학력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명예 석사 학위이다.
  • 평생 정치만 해왔다고 알고있는 사람이 많지만, 소싯적에는 선박 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처음부터 전업 정치인으로 나선 동지 YS(김영삼)보다 경제 현안 파악측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고, 여기에 DJ 본인이 꾸준한 공부[52]로 시대 조류를 면밀히 파악하고 대응하고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53] 그리고 전쟁 후 모든 게 부족하던 시절에 신문사를 운영했기에, 사장(김대중)이 직접 기사를 작성해 올리는 경우도 많았던 덕분에, 상대방 말을 받아적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한다. 김영삼이 선친 김홍조 옹의 장례식장에서 "받아적는 것 하면 김대중 아이가?"라며 옛일을 회상했을만큼, 젊은 시절 국회의원 김대중의 상징적인 모습이었다는 후문.
  •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기도 하다. 초선 의원 시절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표결 직전 의사 진행 방해 발언 필리버스터원고 없이 5시간 19분 동안 연설했는데, 이는 '세계 최장 시간 국회 연설'로 기록되었다. 반대로 의회 연설 쪽에서는 미국의 상원의원 '제임스 스트롬 서먼드(James Strom Thurmond)'가 24시간 18분 동안이나 연설을 해 최장 시간을 기록했다. 그러나 서먼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련 내용에 대해서만 연설한 게 아니라, 할머니의 비스킷 레시피 같은 온갖 꼼수를 총동원해 시간을 끈 것이었다.[55] 후에 더불어민주당이 테러방지법 처리를 최대한 늦춰보려고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들었을 때 (기네스북에 등재된 건 아니지만) 김광진은수미정청래이종걸 순으로 이 최장 기록을 갱신했다.
  •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했을 때 일본 대사관에 설치된 분향소에서 조문을 한 적이 있어 경향신문에서 이 사건을 취재하여 당시에 논란이 된 바 있었다. [56]
  • 2001년 3월, 김대중 전 대통령 방미 당시 갓 취임한 조지 워커 부시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매우 어색한 분위기를 보이며 부시 전 대통령과 대북 관계에 대해 심한 의견 충돌을 보이기도 하였다.[58] 부시 전 대통령은 '미국과 합의한 내용을 북한이 지키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구상을 지지하지만(북한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나는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고,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하고 협상하는 문제는 미국이 결정할 문제로써 우리는 지금 당장 해야 한다든가 그런 의견을 표시한 바 없다', '부시 대통령께서는 북한에 대해서 생각을 솔직하게 저한테 말씀해 주셨는데, 그 점은 참고하겠다'라고 답하며 서로간의 격한 입장 차만 표명한 채 둘의 어색한 만남은 마무리되었다.[59][60]
  • 고향 음식인 홍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14대 대선에서 패배하고 1993년 영국으로 떠났을 때에는 동교동계흑산도 홍어영국으로 공수하는 정성까지 들였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홍어를 좋아했던 것과 관련해 일화가 하나 있다. 야당 총재 시절 당직자가 김대중의 심부름으로 목포시의 수산물 시장에서 홍어를 샀는데, 그 당직자가 계산을 한 다음 혼잣말로 "선생님께서 이거 보시면 참 실하다고 좋아하시겠네"라고 말하자 돈을 세던 주인이 깜짝 놀라 혹시 김대중 총재를 이야기한 거냐고 되물었다. 이에 당직자가 맞다고 얘기하자 주인이 황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더 큰 홍어를 가져왔다고.[61]

  • 바닷가에서 자라서 어류 요리는 웬만한 미식가 수준으로 잘 알고 있었는데, 상술되었듯 제일 좋아하는 해산물이었던 홍어는 맛만 보고도 신선도를 알아 맞추는 수준이었다고 한다.[62] 또 입맛도 까다로운 편이어서, 홍어가 영 신선하지 않다거나 해서 본인 입에 안 맞으면 관련 담당자들에게 '오늘 홍어는 별로였다'고 꼭 짚고 넘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 이 밖에도 설렁탕을 먹을 때는 깍두기 국물을 넣어서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곤 했고,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에는 종종 야식으로 라면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 전 대통령의 건강을 염려한 이희호 여사가 김 전 대통령에게 잔소리를 해 야식 메뉴를 견과류로 바꾸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 그 외에는 중국 요리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종류가 다양하고 맛과 양도 만족스러워서라고 할 만큼 대식가적인 면모도 있었다. 그런데 김정기 전 경호원의 말에 따르면 정작 식사량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군것질을 매우 좋아해서, 음식을 조금씩 자주 먹는 성향의 사람이었다고. 군것질을 너무 좋아한 것도 건강에 안 좋지만(...)
  • 김정기 전 경호관의 증언에 따르면 아이스크림인 빵빠레를 엄청나게 좋아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건강 문제 때문에 이희호 여사가 빵빠레를 못먹게 하려고 청와대 인사들에게 남편 빵빠레 금지령을 내렸는데, 당연히 몰래 잘만 먹었다고 한다. 가끔씩은 이희호 여사 앞에서 '나 오늘 빵빠레 먹었다~~!'(...) 이러면서 놀리기도 했다고.
  • 스트레스 받는 날은 아이스크림 메뉴가 비비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풀릴 때 까지 비비빅을 2~3개까지 우적우적 씹어먹었다고 한다. 팥을 좋아해서 비비빅 말고 붕어빵도 좋아했다고 한다.
  • 장옥추 전 비서의 음식 일화에 따르면, 식사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5년도에 프라이드 치킨을 처음 접했을 때 치킨을 처음 맛보고선 점심과 저녁에도 치킨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며 치킨을 비서진들에게도 하나씩 권했다고 한다. 치킨을 나눠 주면서 꺼내던 말이 '아까운 건데, 정말 맛있다'라며 치킨을 찬양했다고 한다.[63] 퇴임 이후에는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먹었다고 했는데, 어김없이 치킨은 물론이고 족발도 자주 시켰다고 한다. 라면도 좋아해서, 남편이 라면 먹는 것을 싫어하여 이희호 여사가 외출하는 날이면 오늘은 라면 먹는 날이라고 몰래 라면을 끓여먹었다고 한다. 청와대 입성 이후 주치의가 건강 문제로 라면을 먹지 말라고 한 이후로 라면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통령 시절에도 라면을 좋아했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계속 즐겨 먹은 듯하다.
  • 손성실, 문문술 청와대 조리사들의 말에 따르면 된장도 좋아했다고 한다. 청와대 시절 밥상에는 항상 생야채와 된장을 함께 올렸다고 한다. 홍어회도 된장만 있으면 한 접시를 전부 비웠다고 한다. 청와대 주방장들은 DJ의 찌개로 된장찌개를 꼽았다.
  •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도 밥 대신 과자, 빵 등 군것질을 하기도 했다. 후원금이 넉넉했을 것이니 사먹는 것은 문제가 없었을 듯 하다. 그런데 좁은 감방 안에서 달콤한 고칼로리 식품을 많이 먹기만 하니, 정치참여 불이행 서약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출국할 때는 살이 엄청나게 쪄버렸다. 이를 두고 부인 이희호동교동계 당원들은 "(세간에서는) 감옥갔다 오면 고생해서 야위어보이는게 정상이라 여길텐데, 이렇게 살이 쪘으니 호의호식 한줄 알겠다"고 놀리곤 했다고.[64]
  • 정계 은퇴 번복[65]을 통해 항간에서는 대통령병에 걸린 환자라는 비난까지도 있었다. 이건 서슬 시퍼런 군사 독재 정권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측면도 있지만 군사독재가 끝난 1992년에서도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계 은퇴를 약속했으나 또 번복했다.
  •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영결식 때 추도사를 직접 써서 읽기로 했지만 당시 정권인 반대 진영이었던 이명박 정부가 난색을 표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김영삼, 전두환 등의 다른 전직 대통령이 참석하는데 김대중 한 사람만 추도사를 읽으면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다. 김대중이 읽으려던 추도사는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다. 관련 기사
  • 공인된 장소에서는 표준어를 사용했지만, 사석에서는 서남 방언을 고집했다고 한다. 측근들이 자제하라고 당부했지만 끝끝내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스스로를 호남의 자랑이라고 생각했으며, 매체에서 서남 방언을 하는 캐릭터가 부정적인 역을 자주 맡는 것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예:모래시계#)
  • 뉴욕한인회장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박지원 의원은 1983년 미국 워싱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이후 인생이 변하게 되었다. 박지원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큰 감명을 받고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 저의 삶이 부끄럽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벽돌 하나라도 놓는 그런 생각으로 살겠습니다." 이후 박지원은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고 다선 국회의원, 민주당 원내대표, 비대위원장을 거쳐 국민의당 원내대표, 비대위원장, 당대표 등 굵직한 정치 경력을 추가해 왔다.
  • 시대적인 배경으로 인해, 그 시절을 산 어르신들이 그렇듯 일본어가 능숙했으며, 영어는 감옥에서 영문법 책을 읽으며 독학해, 미국 방송사 ABC의 나이트라인[67] 봉두완 아나운서와[68] 함께 출연할만큼 실력을 쌓았다. 외국어 어휘를 늘리는 데는 그 나라 문학 작품을 읽는 게 매우 도움된다는 외국어 공부 지론도 갖고 있었다고. 2차례의 외국 망명을 거치며 외국의 주요 인사들을 만났는데, 덕분에(?) DJ는 대통령 당선 전부터 나름 풍부한 외교 경험을 쌓으며 일가견을 갖게 되었으며,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 투쟁으로 쌓은 세계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과 역대 최고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해외 순방을 그리 많이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역대 대통령들 중에 김대중만큼 미국, 중국, 일본의 행정수반과 두루 원만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주도적인 포지션을 가졌던 자는 없었을 정도로 능수능란한 외교를 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 때문인지 영어 발음은 그다지 좋지 않고 영어에서 사투리 억양이 나온다. #7분 20초경 부터
  • 젝키 팬덤 이야기와 관련해서 나무위키조작질 해놓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도 그렇다. 아래와 같이 써놨다.
대통령이었던 시절 손녀가 청와대에서 뮤지컬 '알리바바와 도적들' 를 공연하러 왔던 젝스키스의 매니저에게 맞은 적이 있다. 정작 본인은 못 봤다고 한다.[69] 사실 당시 젝스키스의 소속사는 문제가 많은 기획사로 지금은 망해가는 중이다.
사실관계를 보면 청와대에 공연하러 왔을 때 일도 아니고, 젝키 영화 개봉 때 극장에서 팬들이 저지선을 무너뜨려 제지하는 도중 매니저한테 맞았다고 한다. 매니저 본인이 밝힌 이야기다. 기사
그리고 때린 것이 분명 잘못된 행동이지만, 당시 젝키 팬덤의 행동이 막장인 측면이 컸다. 젝키 멤버의 불알을 잡고 자기 것인 마냥 안 놓은 일도 있고, 달리는 차 뒤에 매달려서 대형사고가 날뻔 한 적도 있고, 한 멤버는 팬들이 계속 쫓아와 울면서 경찰서로 들어가 도와달라 한 적도 있다.[70] 팬들은 막장으로 굴고 그걸 매니저는 때려서 막고... 미개했던 시절이다. "문제가 많은 기획사"라고 하는 얘기도 사실관계를 보면 허위 루머가 태반이다. 애초에 망조가 들었다는 것도 소위 말하는 젝키 악성 팬덤이 그리도 싫어하는 창업주 이호연이 사망한 후의 일이고.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로.
  •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최고령인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당시 나이는 만 74세 1개월. 다만 재임 시점 기준으로 최고령이었던 대통령은 1960년 4월 하야 당시 만 85세였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71]
  • 인권을 중시하던 대통령이다보니 국민의 정부 때부터 한국에서는 사형이 한 번도 집행되지 않았으며 더불어 사형수를 감형해주기도 했다.[72] 참여정부에서도 이 기조를 이어 몇몇 사형수를 감형했다. 정권이 바뀐 이후 사형수의 감형 사례는 없지만 사형은 여전히 집행하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따라서 2017년 5월 25일 기준으로 한국은 사형제는 존재하나 실시하지 않는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어 오고 있다.
  • 2017년 10월, 대한민국 검찰청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과 보수 단체 관계자가 서로 주고받은 이메일을 입수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에 작성된 이 이메일에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김 전 대통령을 폄훼하며 고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취소해달라는 청원을 넣을 계획이 담겼다고 한다. YTN 보도 게다가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를 위한 사전 공작으로 반독재 인권상이기도 한 라프토상의 수상 취소도 획책했다.경향 보도 이 사실이 알려지자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 민주당국민의당 호남계의 반응은 당연히... 민주당은 "이명박이야말로 정치 보복의 화신이다"라며 비난을 퍼부었고, 박지원 의원은 본인 페이스북에 "천하의 못된 짓은 다 모아 자행한 이명박과 이명박 정부 주동자, 그리고 가담자는 철저히 발본색원해서 처벌해야 한다. 이명박을 당장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격정적으로 주장했다. #
  • 선거 후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대통령이다. 수많은 선거에서 지고, 정계은퇴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대통령이 되어서 그런지, 선거 후에 가장 많이 언급이 된다. 이는 보수, 진보정당 가릴 것 없다. 최근에는 장제원이 황교안에 대해 평가하면서 언급하기도 했다.
  • 정치인 홍준표가 DJ의 식사자리에 초대받았으나 결국 거절하고 YS에게 갔다는 건 유명한 일화.[73] 참고로 13대 대선 당시 홍준표 본인은 경상도(창녕군), 부인 이순삼 여사는 전라도(부안군 줄포면) 출신인지라 정치적 논쟁이 잦았고, 합의 끝에 '한주의통일한국당'이라는 군소정당의 교주 출신 후보 신정일에 투표하기로[74] 결정했지만 이순삼 여사는 남편 몰래 김대중에 투표를 했다. 이를 나중에 알게 된 홍준표는 부인과 또 싸우고(...) 무척 서운해했다고 한다.
  • 한 때, 개인차량으로 1999년식 현대 에쿠스[75]를 보유했었는데, 처음에는 큰 아들 김홍업의 명의로 운행했으나, 퇴임 이후부터 서거하기 전까지 개인 차량으로 보유해왔다고 한다. 서거 후인 2009년 말 6,000만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에 중고매물로 올라와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이럴거면 현대자동차가 회수해서 전시해야 되는거 아니냐? 이와 별개로 15대 대선 후보 시절에는 현대자동차가 제공한 현대 다이너스티 방탄 리무진을 타고 다녔고,[76] 의전용으로 에쿠스 리무진[77]도 보유한 바 있다.
  • 2022년 기준 유일하게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민주당계 정당 출신 대통령이다.
  • 서예, 작문, 영화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것과 별개로, 노래는 못 부르는 음치였다.

8.1. 방송 출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도전과정 중, DJ에게 의미가 있었던 문화계 사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당시 인기가도를 달리는 MBC의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한 것.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서 이경규예고도 없이 DJ의 자택(동교동 자택이 아닌 일산 자택)을 기습 방문했다. 김대중의 회고에 따르면 아침 운동을 하러 집 대문을 열었더니 이경규와 제작진들이 있었다고.무릎팍도사에서 김영희와 이경규가 밝힌 후기 김대중은 그동안 자신에게 심어졌던 이미지를 180도 바꾸는 데 성공한다. 당시만 해도 기성 정치인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대단히 생소한 편이었고, 특히 DJ는 언론에 줄곧 과격, 투쟁, 사상가, 마키아벨리의 이미지로 비춰졌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김영희의 웃는 모습이 그치지 않을 정도로 이경규를 들었다 놨다 했다. 몰래카메라를 의심하는 부분이 백미. 이로 인해 김대중은 앞서 말한 강한 이미지를 희석하고 인간적이고 유머있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DJ는 이게 고마웠는지 나중에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DJ의 재택근무 비서였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희가 사고를 친 것을, 이경규가 일산의 DJ 자택까지 동행해 방송이 나갈 수 있도록 도운 것이라고 한다. 방송이 나간 후 박지원 대변인이(훗날 청와대 비서실장)이 “DJ의 정치인생 40년 가운데 웃는 모습이 TV로 나간 것은 처음”이라며 고마워 했다는 후문.

둘째, KBS에서 절찬리에 방영되는 사극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이 탄 말에 DJ라는 인장이 지워지지 않은채 방영되는 방송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진짜 방송사고가 맞았지만[78], 언론들이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 파장이 갈수록 커졌다. 배추머리 김병조 같은 거물도 말 한 마디(망한나라당)에 방송인 생활이 끝나는 등 '오독고'가 아직 과한 시대였던터라, 언론에서 주목할수록 드라마 관계자의 속이 바싹 타들었다고.

한편 1997년에는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해서 직접 일한 적도 있었다. 일의 종류는 남대문시장에서의 옷 판매.

임기 첫해인 1998년,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 홍보영상에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한국이 변하고 있습니다. 오셔서 새로운 한국을 만나십시오."


8.2. 그의 이름을 딴 시설이나 단체

  • 행사
    • 김대중마라톤대회

8.3. 종교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생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세례명토마스 모어. 원래는 특별한 종교를 두지 않았고, 김대중의 부모 역시 그 시대 여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성리학)를 신봉했기에 김대중도 그 영향을 따랐으나,[79] 정치 신인이던 1957년, 은사이자 독실한 가톨릭 정치인이었던 장면 요한과의 인연으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게 되었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당시 장면의 세력이었던 민주당 신파 정치인들은 보스 장면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대중도 이 중 1명이었다.

참고로 세례를 서울대교구 약현성당에서 받았는데, 당시 세례를 주었던 신부가 "교회를 위해 순교할 마음으로 정치하며 살아가시오!"라며 토머스 모어를 세례명으로 정해주었다고 한다.[80] 김대중 본인은 처음 세례명을 전해들은 순간 "하필 목 잘린 사람 이름을 지어주시나...?'' 싶어 깜짝놀랐다고 한다.[81] 이 세례명대로 김대중은 이후 파란만장한 정치 여정을 걷게 됐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정의구현사제단 등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천주교 인사들과 교류하며 지냈고, 미국 망명을 떠난 이후에도 미국 성당에 꾸준히 출석했다.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명동성당에서 축하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대선에서 함게 경쟁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함께 참석했는데, 이 두 사람이 함께 미사에 나온 건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청와대에 있는 와중에도 신부가 꾸준히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고, 퇴임한 이후에는 자택 근처 서교동 성당에 다니며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2009년 선종 당시 장례 방식도 거의 천주교적인 양식으로 치루어졌다. 이외에도 천주교계에서 직접 각 성당에 빈소를 마련했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집전으로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뤄주기도 했었다.[82] 참고로 김대중은 임종 직전 자신이 다니던 서교동성당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불교와도 인연이 깊은데,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시절인 1987년 11월 24일에 익산시에 위치한 원불교 중앙총부를 내방하여 당시 종법사인 대산 김대거로부터 '중산(中山)'이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1994년 3월 17일에는 원광대학교에서 한국 대학 첫 명예정치학박사를 받았다. 또한 총무처에 지시해 원불교 교정원장을 15대 대통령 취임식 단상으로 올려 의전해줬다. 즉, 원불교가 정부 행사에서 4대 종교로 참여할 수 있도록 큰 협력을 해준 셈이다. 대통령 취임 후 2001년 8월에는 부산원음방송, 9월에 서울원음방송[83]을 개국하도록 협력해줬다. #1 #2

참고로,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종교는 개신교(감리회)이다. 혼인성사를 받을 당시 특별히 관면을 본 듯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살아생전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의 신앙을 존중하며 살아왔고, 김대중은 이희호의 교회 행사나 기도회 등을 같이 다녔다. 또한 매년 열린 김대중의 도쿄 납치 사건 생환 기념 미사때도 두 부부는 늘 함께 참석해서 기도했다. 김대중과 김홍일, 김홍업은 천주교, 이희호와 김홍걸은 창천교회에 다녔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가장 모범적인 가족의 예.[84]

이러한 김대중의 영향으로,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상당히 많다. 박지원, 정동영 등이 동교동계에 합류한 이후 김대중을 따라 가톨릭을 믿게 된 케이스이며, 특히 가톨릭이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서포터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아 진보진영 정치인 중에서 가톨릭 신자이거나 세례를 받은 정치인들이 상당히 많다. 반면 보수정당인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개신교 신자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는 민주당 구파의 보스였던 조병옥과 이를 계승한 김영삼이 개신교 신자였고 이들이 그대로 이어져 3당 합당으로 지금의 보수 정당이 탄생한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에 영향을 받고 개신교를 믿는 의원들이 많은 것이다. 물론 보수정당에서도 이회창, 이준석, 나경원, 한승수처럼 가톨릭 신자들도 없지 않아 있다.

9. 저서

생전에 모은 책들이 있는 서재가 통째로 도서관이 될 정도로 독서를 즐겼고, 이를 바탕으로 적지 않은 수의 책들을 집필했다. 이를 두고 김종필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교하며 '김영삼이 읽은 책보다 김대중이 쓴 책이 더 많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자신의 생각을 쓴 책부터 맨 마지막 자서전까지 차곡차곡 저서들을 썼지만 그중에서도 자서전이 주목할 만한데, 일부 다른 대통령의 그것처럼 변명으로 일관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본인의 치부가 될 수 있는 출생 이야기까지[85] 솔직하게 꺼냈다. 물론 정치인의 자서전이니만큼 각도의 문제가 있지만 매우 솔직한 것에는 틀림없다.
  • <분노의 메아리> (1967년)
  • <내가 걷는 70년대> (1970년)
  • <독재와 나의 투쟁> (1973년, 일본어판)
  • <김대중 옥중 서신> (1984년)
  • <행동하는 양심으로> (1985년)
  • <대중경제론> (1986년, 한•영어판)
  •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 (1987년)
  • <공화국 연합제> (1991년)
  •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1992년)
  • <세계 경제 8강으로 가는 길> (1992년)
  • <한국의 통일> (1993년)
  •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3년)
  • <나의 길 나의 사상> (1994년)
  •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넬슨 만델라 자서전)(1994년) - 번역서
  • <김대중의 21세기 시민 경제 이야기> (1997년)
  • <나의 삶 나의 길> (1997년)
  • <대중참여경제론> (1997년)
  • <내가 사랑한 여성> (1997년)
  •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 (1997년)
  •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8년)
  • <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1999년)
  • <경천애인> (2002년)
  • <21세기와 한민족> (2004년)
  • <통일지향의 평화를 향하여> (2007년)
  • <김대중 자서전> (2010년) - 유고작

10. 어록

DJ는 당대의 일류 달변가이며 연설가였다. 직설적이고 강하게 정의를 호소하는 연설에도 뛰어났으며 독재 정권에 아부하는 관료를 주례 서는 신부에 비유한다거나, 미국이 아폴로 호를 발사할 때 그런 사람들도 달나라에 보냈으면 좋겠다는 발언 등 재치있는 유머를 사용해서 시사를 비판하는 연설 방식도 사용했으며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 아래의 글을 보듯이 수많은 숱한 어록을 남겼다. 대표적인 명언을 제외하고는 연도 역순으로 정리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중시했던 사조로, 본래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 생전의 DJ는 "서생적(= 선비의)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문장과 더불어 이 어구를 전매특허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YS대도무문처럼 DJ상징하는 사자성어이다.[86]
비서실장: 골프가 재밌는 운동이라는 데요, 한 번 배워보시죠?

DJ: (시간이)얼마나 걸립니까?

비서실장: 한 3 ~ 4시간 걸립니다.

DJ: 이 한 권이요, 책이! 그걸로 책을 한 권 읽을 수 있어요.
골프를 배워보라는 권유에 답한 말.
삼촌네 호떡도 맛있어야 사먹는 법입니다.
정대철 전 의원에 따르면, DJ는 속담, 사자성어, 비유법 등으로 긴장된 분위기를 풀곤 했다고 한다.[87]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2009년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6.15 남북 공동성명' 9주년 기념 행사 연설 中[88][89]
(중략)... 우리는 우리 시대에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라던 사람답게 사는 세상[90], 남북(南北)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계속 유지를 계승하여 반드시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면 노무현은 사망해도 사망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해도 노무현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노무현의 주검은 하나의 주검에 그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영웅', '쾌남아'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노무현 前 대통령 장례식추도사.[91]
전쟁은 40대 이상의 장년층이 일으키고, 전쟁터에서는 20대가 죽는다.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40대 이상을 전선으로 보내자.
노무현 대통령 추모 연설 중에서[92]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2009년 1월 7일 그의 마지막 일기장에서.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 경제, 남북관계의 3대 위기에 처해있다.
2009년 1월1일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한국은 국민들의 피와 으로 민주주의를 일궜습니다. 한국은 이제 민주주의의 튼튼한 뿌리 위에서 세계의 큰 봉우리가 될 것입니다. 반면 일본은 민주주의를 스스로 일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군국주의에 사로잡혀 급격히 우경화되고 주변국과 큰 갈등을 일으킬 것입니다.
2006년 10월 강연회 ‘한반도의 현실과 4대국’에서.영상[93]
용 그려놓고 눈 안 그린 격입니다.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 측 국가정상 서명을 김영남[94]의 것으로 하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제안에 답한 말.
대한민국 건국은 공산주의자들의 극단적인 반대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 우리 국민은 상상 이상으로 침착하게 대응해서 압도적인 투표율로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을 선출시켰습니다. 그때 UN에서는 한국의 선거를 시찰하러 왔습니다. 시찰단은 전국을 돌아본 결과 국민의 압도적인 참여와 질서정연한 선거를 보고 어떠한 문제도 제기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한만 선거하는 데 대해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던 사람들도 국민의 의사가 우선 가능한 지역에서 정부수립을 하겠다는 데에 일치했습니다. UN은 대한민국 수립의 과정이 모두 합법이고 국민의 의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고함으로써 우리는 UN의 승인을 받고, 공산권을 빼놓고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이렇게 가혹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199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주년 기념사 일부.
국민이 주인대접을 받고 주인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 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 취임사 연설 중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자는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머뭇)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중략)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한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여러분과 같이 금할 길이 없습니다.
1998년 2월, 제 15대 대통령 취임사 연설 중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지, 거짓말을 한 적은(= 상대를 속이려 든 적은) 없습니다.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에 대해 DJ가 답한 요지.[95]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1995년 7월 정계 복귀 회견에서 기자들의 집요한 은퇴 번복[96] 질문에 답한 말. 달변의 DJ도 이날만큼은 맥을 못추었다고 한다.[97]
정치 안해요, 제가 안해요. 이건 내 문제니까 내가 안하는거요 누가 날 강제로 시킨다는거요.
1994년 북핵 위기 당시 귀국한 DJ에게 기자들이 정계 복귀 여부를 질문하자 답한 말.[98][99]
우리나라(한국)가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는데, 그 요인 중 하나가 내부 분열 때문이에요. 구한말을 보세요. 서재필 박사는 개화로 가자, 녹두장군 전봉준은 외세를 배제하자 했지만, 두 분 다 봉건 체제를 타파하자고 했어요. 개혁을 하자는 입장에서 보면 서재필과 전봉준이 다르지 않아요. 그리고 서로 비슷한 시대를 살았어요. 그런데 한 번도 서로 만나 생각을 교환하지 못했어요. 만일 두 사람이 만났더라면, 우리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나는 김일성 주석이 살아 있을 때 꼭 대좌를 해서 우리 민족의 진운을 논의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안 돼서 안타까운 심정이에요.
1994년 7월, (김영삼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을 며칠 앞둔 날, 북한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듣고[100]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
1993년 출간된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망원경으로도 현미경으로도 (해당 사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논리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잡담이며, 경험의 검증을 거치지 않는 논리는 공론이다.[101]
과거 독재 정권의 통치를 받으면서 반독재투쟁을 하다가, 갓 해방된 나라의 지도자들과 대화를 해보면 (...중략...) 아마도 독재 치하에서 하도 억압을 받으며 할 말을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자기 주장을 먼저 피력하려는지도 모릅니다. 대화란 아예 존재할 수도 없는 환경에서 살아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중략...)
노태우 대통령은 한때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었으나, 차츰 자신이 말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세 사람 중에 제일 나은 편이었을 것입니다.
군사정권 사람뿐만 아닙니다. 그들과 싸운 재야인사나 학생들과 대화를 해보거나, 그들의 회의 장면을 보면, 정말 말을 많이 합니다. 한 번은 10여 명의 재야인사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한 분이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장장 한 시간을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매우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허물없이 농담을 했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합니까? 나 같으면 그 말을 10분이면 하겠소. 그리고 민중 민중 하는 분들이 왜 그렇게 민중이 알아먹기 힘든 어려운 말을 사용합니까?"해서 유쾌한 폭소가 터진 일이 있습니다.
김대중의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
가장 대화가 힘든 상대는 운동권 학생이나 노동자 대표들입니다. 매우 이성적이고 이쪽 말을 경청하는 사람도 많지만, 상당수는 자기 주장만이 옳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타락했고 반동이라는 식으로 단정하곤 하여 참 어이가 없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중략) 민주주의를 위해서 독재와 싸운다는 사람들이 남에게 말할 권리를 주지 않고, 내 주장만 한다는 것은 하나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대중의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
(1)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의 틀을 가지고 인간의 역사를 해석했습니다. (중략) 살다 보면 역경도 만나고 순경도 만나는 게 인생입니다. 늘 고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역경이라도 잘 대처하면 득이 되고, 순경이라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는 아무리 힘들고 감당하기 벅찬 삶이라 하더라도 극복하지 못할 역경은 없는 법입니다. (중략)

(2) 나는 주역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큼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만물은 음(陰)과 양(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陰)이 있고 양(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음(陰) 속에 양(陽)이 있고 양(陽) 속에 음(陰)이 있으며 그것이 음양설의 핵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어 보이는 역경도, 지나고 나면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그리고 대응 여하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것이 큰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커다란 행운이 굴러 들어온 것으로 알고 기뻐했던 일이 오히려 불행의 씨를 잉태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대응을 잘못해 복이 화근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

(4) 결국 우리의 대응 여하에 따라 행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찾아오는 순경과 역경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어떠한 경우라도 슬기롭게 대처하여 역경을 순경으로 만들거나 그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입니다. 또 순경을 잘 활용하여 성공의 길로 나가며 좋은 환경의 유혹에 끌려 자기 자신이 타락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세는 항상 이러한 마음의 자세와 최선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내용 중[102]
(1) 미국이 다른 나라는 그냥 두고 대한민국만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 계획을 세운 걸까요? 만일 우리가 미국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더 많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기업인들이 외자와 시설재를 도입할 때, 정부와 결탁하여 외국의 시설재 판매 기업에 요구하여 도입 가격을 늘리고, 허술한 물건을 불리한 조건으로 반입해 온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2) 1천만달러짜리 시설을 1천3백만 달러로 늘려 계약해 가지고 3백만 달러를 빼돌리는 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를 싸게 사올 수도 없고, 애프터 서비스도 제대로 못 받고, 로열티도 비싸게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니 물건 값을 깎을 대로 깎고 좋은 시설을 유리한 조건으로 사들인 나라들과 경쟁해서 이길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중략...)

(3)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 정부와 기업인의 잘못은 덮어두고 일방적으로 미국이나 일본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국민 다수는 나의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받아들이는 주장을 해야 합니다.
1993년 회고록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74쪽 ~ 175쪽. 일부 재야 인사들의 과격한 반미 주장에 대해 답한 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103]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며 통일의 희망이 무지개같이 떠오르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
제14대 대통령 선거 연설
통합을 하려면 상대에게 내 것을 다 준다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70%를 주고 30%를 갖는다는 마음으로 해야 가능하다.[104]
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지만,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게 참된 용기 입니다.
1987년 9월 8일 광주 그랜드 호텔 간담회에서.
민주주의는 절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느 역사를 보나 민주화를 위해서는 희생과 땀이 필요하다.
저서 '옥중서신'(1984년) 중에서.
전진해야 할 때 주저하지 말며 인내해야 할 때 초조하지 말며 후회해야 할 때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옥중서신 중에서.
봉두완: (토론 종료 직전에) 지금까지 김대중 씨가 말한 인권 유린은 박정희 정권 때의 일이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인권 유린도 없다.

김대중: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인권 유린에 관해 내가 한 말은 나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국제사면위의 82년도 보고서에 있는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정부의 미국 국무성 82년도 인권 보고서에도 그대로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네 정부가 보증합니다.
1983년 10월, 감옥 복역(80~82) 당시 영어를 독학[105],테드 카풀이 진행하는 심야 뉴스 프로그램 <나이트라인(Nightline)>에서 5공 정부를 대표한 패널 봉두완과 영어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1994년 미 의회에서 이북측에서도 신뢰할만한 대북 특사 파견 필요성을 설득하는 연설도, 영어로 원고를 작성해 40여분간 진행한 것이었다고.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총통시대가 오는 것입니다![106]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연설.
내가 정권을 잡으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내는 동시에 돈이 많다고 해서 나라나 사회의 형편도 생각지 않고 사치와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유세와 특별세를 받는 일대 조세혁명을 단행할 것을 공약합니다.
1971년 4월 18일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 장충단 공원 연설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온갖 정성과, 온갖 결심으로써 박정희 씨에게 마지막 충고하고 호소합니다. 박정희 씨여! 당신에게 이 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일천의 양심이 있으면, 당신에게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 할 지각이 있으면, 당신에게, 4.196.25때 죽은 우리 영령들 주검의 값에 대한 생각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3선 개헌만은 하지 마라!
1969년 효창운동장 연설[107][108]

10.1. 북핵 관련

빌 클린턴: 햇볕정책이 무엇입니까?
DJ: 햇볕정책은 우리가 독창적으로 만든 게 아닙니다. 미국에서 이미 검증된 정책입니다. 중국이 화해-협력을 하니깐 개방을 하고 나왔습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강공으로 몰아칠수록 꽁꽁 빗장을 닫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햇볕을 쬐면 국제 사회로 나옵니다. (햇볕정책은)미국이 이미 검증을 한 정책입니다.
빌 클린턴 : (경청 후..) 제가 조수석에 앉겠습니다. 남북관계는 김 대통령께서 운전석에 앉으십시오.
1998년 6월,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서[109]
북한은 핵을 만들 의사도 능력도 없다. 만약 그들이 핵을 만든다면 내가 모두 책임지겠다.
김대중 본인의 말이 아니라, 누군가 "짜깁기"한 것이다. 91년 6월 북한 김영남 외무상의 핵능력 발언 + 03년 대북송금특검 책임발언의 결과물.

2000년대 들어 북한 핵 관련, 정말로 발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복한 민족이고, 천추의 한이다.
대통령 퇴임 후 예방한 민주당 의원들에게 했던 말. 미국-북한, 일본-북한 수교 지원을 시작으로, 종래에는 북한의 핵 불능화, 남북불가침선언,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남북철도를 연결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했던 김대중-클린턴 구상이,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의 당선으로 무산되었던 일에 대한 아쉬운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110]
미국은 악을 행한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1953년 북한과 전쟁중에 대화를 해서 휴전협정을 성립시켜 오늘날까지 한반도에서 50년의 평화를 유지하게 만들었습니다. 닉슨은 중국을 찾아가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그 결과 중국을 개혁, 개방으로 유도해 오늘날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습니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고 비판했지만, 그 악마와 대화해 소련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여, 오늘의 민주화를 실현시켰습니다. 대화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이익이나 세계평화에 필요하면 악마와도 대화를 해야 합니다. 오늘의 한반도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입니다. 그 당사자가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이 문제가 해결 되겠습니까?
2006년 10월 18일, 세계지식포럼에서, 내용전문(11번째 문단부터)
북한의 핵야욕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선택 가능성이 있다. 첫째, '군사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중국, 한국, 러시아뿐 아니라 일본조차도 이에 대해 반대하고 있고, 북한이 군사적 공격에 대해 저항할 경우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또다시 참혹한 재앙을 겪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이 같은 재앙을 겪을 가능성에 대해 확고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두 번째로는, '경제적 징계'조치로 평양정권의 숨통을 죄어서 넘어뜨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북한은 궁핍함도 견딜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그리고 그 경우 중국이 원조를 거부한 채 북한을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궁지에 몰린 북한이 군사 기술을 팔아 넘기려는 유혹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징계의 효율성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대화'만이 유효한 선택 가능성으로 남는다... 좋든 싫든 북한체제는 중국 또는 베트남의 자취를 따라 변화해 가고 있다. 지금까지 '속도는 느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움직임'이다. 대화를 하며 접촉 및 교류 기회를 확대하는 것만이 신뢰의 분위기를 만듦으로써 개방을 촉진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외부로부터 강요될 수 없다. 북한에서든 다른 어느 곳에서든.
2007년 프랑스 르몽드지와의 인터뷰에서.#

10.2. 제15대 대통령 취임사

국난극복과 재도약의 새 시대를 엽시다
오늘 저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수립 50년만에 처음 이루어진 여야간 정권교체를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면서 온갖 시련과 장벽을 넘어 진정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 여러분께 찬양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저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김영삼 전임 대통령, 폰 바이체커 독일 전대통령,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전대통령,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위원장 등 내외 귀빈을 비롯한 참석자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취임식의 역사적인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가 실현되는 자랑스러운 날입니다. 또한 민주주의와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려는 정부가 마침내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이 정부는 국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참된 `국민의 정부'입니다. 모든 영광과 축복을 국민 여러분께 드리면서 제 몸과 마음을 다바쳐 봉사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3년후면 새로운 세기를 맞게 됩니다. 21세기의 개막은 단순히 한 세기가 바뀌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혁명의 시작을 말합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탄생한 인간혁명으로부터 농업혁명, 도시혁명, 사상혁명, 산업혁명의 5대혁명을 거쳐 인류는 이제 새로운 혁명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유형의 자원이 경제발전의 요소였던 산업사회로부터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정보사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보화혁명은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들어 국민경제시대로부터 세계경제시대로의 전환을 이끌고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는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손쉽고 값싸게 정보를 얻고 이용할 수 있는 시대를 말합니다. 이는 민주사회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도전에 전력을 다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에게는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에 우리는 당면해 있습니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같이 밀려오는 만기외채를 막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나마 파국을 면하고 있는 것은 애국심으로 뭉친 국민 여러분의 협력과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그리고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EU국가 등 우방들의 도움 덕택입니다.

올 한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찌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냉정하게 돌이켜 봐야 합니다. 정치,경제, 금융을 이끌어온 지도자들이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에 물들지 않았던들 그리고 대기업들이 경쟁력없는 기업들을 문어발처럼 거느리지 않았던들 이러한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파탄의 책임은 국민 앞에 마땅히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의 어려움 속에서도 국민 여러분께서는 놀라운 애국심과 저력을 발휘하셨습니다. 우리는 IMF시대의 충격속에서도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의 위업을 이룩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 모으기'에 나섰고 이미 20억달러가 넘는 금을 모아 주셨습니다. 저는 황금보다 더 귀중한 국민 여러분의 애국심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한편 우리 근로자들은 자기 생활의 어려움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임금을 동결하는 등 고통분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수출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지난 3개월간 연속해서 큰 규모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애국심과 저력에 대해 세계가 경탄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정부는 대화를 통해 대타협으로 국난극복의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저는 이 일을 이루어낸 노.사.정 대표 여러분께 국민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국회의 다수당인 야당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난국은 여러분의 협력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든 것을 여러분과 같이 상의하겠습니다. 나라가 벼랑끝에 서있는 금년 1년만이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온 국민이 이를 바라고 있다고 믿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이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외교, 안보 그리고 남북문제 등 모든 분야에서 좌절과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정치개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국민이 주인대접을 받고 주인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국정이 투명하게 되고 부정부패도 사라집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어떠한 정치보복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정부가 고통분담에 앞장서서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한과 기능을 민간과 지방자치단체에 대폭 이양하겠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데에는 더욱 힘쓰겠습니다. 환경을 보존하고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작지만 강력한 정부', 이것이 `국민의 정부'가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우리의 경제적 국난을 극복하고 우리 경제를 재도약시키는 일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병행시키겠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습니다. 결코 분리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다같이 받아들인 나라들은 한결같이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시장경제만 받아들인 나라들은 나치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참담한 좌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들 나라도 2차대전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같이 받아들여 오늘과 같은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발전하게 되면 정경유착이나 관치금융, 그리고 부정부패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겪고 있는 오늘의 위기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해서 실천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물가를 잡아야 합니다. 물가안정 없이는 어떠한 경제정책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똑같이 중시하되 대기업은 자율성을 보장하고 중소기업은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양자가 다같이 발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철저한 경쟁의 원리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품질좋고 가장 값싼 상품을 만들어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는 기업인이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기술입국의 소신을 가지고 21세기 첨단산업시대에 기술강국으로 등장할 수 있는 정책을 과감히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벤처기업은 새로운 세기의 꽃입니다. 이를 적극 육성하여 고부가가치의 제품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벤처기업은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서 실업문제를 해소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대기업과 이미 합의한 5대 개혁, 즉 기업의 투명성, 상호지급보증의 금지, 건전한 재무구조, 핵심기업의 설정과 중소기업에 대한 협력, 그리고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책임성 확립은 반드시 관철될 것입니다.

이것만이 기업이 살고 우리의 경제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정부는 기업의 자율성을 철저히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나 기업의 자기개혁 노력도 엄격히 요구할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수출 못지않게 외국자본의 투자유치에 힘쓰겠습니다. 외자유치야말로 외채를 갚고 국내기업들의 경쟁력을 강화하며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농업을 중시하고 특히 쌀의 자급자족은 반드시 실현시켜야 합니다. 농어가 부채경감, 재해보상, 농축수산물 가격의 보장, 그리고 농촌 교육여건의 우선적 개선 등 농어민의 소득과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겠습니다.

애국심과 의욕에 충만한 자랑스러운 국민 여러분과 같이 올바른 경제개혁을 추진해 나간다면 우리 경제는 오늘의 난국을 반드시 극복하고 내년 후반부터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저는 확실히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를 믿고 적극 도와주십시오.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해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건강한 사회를 위한 정신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존중되고 정의가 최고의 가치로 강조되는 정신혁명 말입니다. 바르게 산 사람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하는 그런 사회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고통도 보람도 같이 나누고 기쁨도 함께 해야 합니다. 땀도 같이 흘리고 열매도 함께 거둬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혁명과 바른 사회의 구현에 모든 것을 바쳐 앞장서겠습니다. 노인이나 장애인들도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따뜻하게 감싸주어야 합니다. 저는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한숨짓는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런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높은 교육수준과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21세기의 정보화사회에 큰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입니다.

새 정부는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가 지식정보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컴퓨터를 가르치고 대학입시에서도 컴퓨터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나가겠습니다.

교육개혁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대학입시제도를 획기적으로 개혁하고 능력위주의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청소년들은 과외로부터 해방되고 학부모들은 과중한 사교육비로부터 벗어나게 하겠습니다. 지식과 인격과 체력을 똑같이 중요시하는 지.덕.체의 전인교육을 실현시키겠습니다.

이러한 교육개혁은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것을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굳게 다짐합니다.

우리는 민족문화의 세계화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통문화속에 담겨있는 높은 문화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겠습니다. 문화산업은 21세기의 기간산업입니다. 관광산업, 회의체산업, 영상산업, 문화적 특산품 등 무한한 시장이 기다리고 있는 부의 보고입니다.

중산층은 나라의 기본입니다. 봉급생활자, 중소기업 그리고 자영업자 등 중산층이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여성의 권익보장과 능력개발을 위해서 적극 힘쓰겠습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남녀차별의 벽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청년은 나라의 희망이자 힘입니다. 그들을 위한 교육과 문화, 그리고 복지의 향상을 위해서 정부는 아낌없는 지원대책을 세워 나가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21세기는 경쟁과 협력의 세기입니다. 세계화 시대의 외교는 냉전시대와는 다른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외교의 중심은 경제와 문화로 옮겨갈 것입니다. 협력속에 이루어지는 무한경쟁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무역, 투자, 관광, 문화교류를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우리의 안보는 자주적 집단안보가 되어야 합니다. 국민적 단결과 사기넘치는 강군을 토대로 자주적 안보태세를 강화하겠습니다. 동시에 한미안보체제를 더욱 굳건히 다지는 등의 집단안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한반도에서의 평화구축을 위해 4자회담을 반드시 성공시키는데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분단 반세기가 넘도록 대화와 교류는 커녕 이산가족이 서로 부모형제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냉전적 남북관계는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합니다. 1천3백여년간 통일을 유지해온 우리 조상들에 대해서도 한없는 최책감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남북문제 해결의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1991년 12월 13일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이 바로 그것입니다.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협력과 불가침, 이 세가지 사항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이미 남북한 당국간에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실천만 하면 남북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통일에의 대로를 열어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북한에 대해 당면한 3원칙을 밝히고자 합니다.

첫째, 어떠한 무력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셋째,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남북간에 교류협력이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북한이 미국, 일본 등 우리의 우방국가나 국제기구와 교류협력을 추진해도 이를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새 정부는 현재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경수로 건설과 관련한 약속을 이행할 것입니다. 식량도 정부와 민간이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지원하는데 인색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북한 당국에 간곡히 호소합니다.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나이들어 차츰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남북의 가족들이 만나고 서로 소식을 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 최근 북한이 긍정적인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점을 예의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와 학술의 교류, 정경분리에 입각한 경제교류도 확대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한 남북간의 여러 분야에서의 교류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우선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의합니다.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새 정부는 해외동포들과의 긴밀한 유대를 강화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해외동포들이 거주국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면서 한국계로서 안정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적극 돕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전진과 후퇴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고난을 딛고 힘차게 전진합시다. 국난극복과 재도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갑시다.

반만년 역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얼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민족수난의 굽이마다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구한 자랑스러운 선조들처럼 우리 또한 오늘의 고난을 극복하고 내일에의 도약을 실천하는 위대한 역사의 창조자가 됩시다. 오늘의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읍시다.

우리 국민은 해낼 수 있습니다. 6.25의 폐허에서 일어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선두에 서겠습니다. 우리 다같이 손잡고 힘차게 나아갑시다. 국난을 극복합시다 재도약을 이룩합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드높입시다.

감사합니다.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11. 가족 관계

  • 아버지: 김운식 (1895년 ~ 1974년)
  • 어머니: 장수금 (1893년 ~ 1972년)
    • 남동생: 김대의 (1927년 ~ 1997년)
      • 제수: 민병숙 (1930년 ~ )
    • 남동생: 김대현 (1932년 ~ )
      • 제수: 이숙자 (1933년 ~ )
    • 여동생: 김진찬 (1933년 ~ 1976년)
  • 前 배우자: 차용애 (1927년 ~ 1959년)
    • 장녀: 김소희 (1946년 ~ 1947년)
    • 장남: 김홍일 (1948년 ~ 2019년)
      • 며느리: 윤혜라 (1951년 ~ )
    • 차남: 김홍업 (1950년 ~ )
      • 며느리: 신선련 (1954년 ~ )
  • 배우자: 이희호 (1922년 ~ 2019년)
    • 3남: 김홍걸 (1963년 ~ )
      • 며느리 : 임미경 (1966년 ~ )

12. 각종 타이틀

  • 최초의 기업인 출신 대통령
  • 유일한 호남 출신 대통령
  • 가장 서쪽에서 태어난 대통령[111]
  • 민주화 이후 동남 방언을 사용하지 않은 셋뿐인 대통령[112]
  •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대통령
  • 유일하게 연합정권을 세운 대통령[113]
  • 당대표(당시 명칭 총재)와 대통령직를 겸임한 마지막 대통령
  • 대한민국 역대 최고령으로 취임(74세)한 대통령
  • 정계 입문부터 대통령 당선까지 최장기간[114]
  • 대선에서 최다 낙선당선된 대통령[115]
  • 역사상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한 대통령
  • 역사상 유일한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116]
  • 유일하게 3명의 자녀가 국회의원에 당선된 적이 있는 대통령[117]
  • 유일하게 지하철역에 이름이 들어간 대통령[118]
  • 윤보선과 함께 사별 이후 재혼 경험이 있는 둘 뿐인 대통령[119]
  • 20세기 마지막 대통령이자 21세기 첫 대통령
  • 최초의 사형수 출신 대통령
  • 2022년 기준 유일하게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민주당계 정당 출신 대통령

13. 대중 매체에서

김영삼, 김종필처럼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장식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를 다룬 드라마도 많다. 다만 삼김시대를 제외하면 모두 그가 야인이거나 야당 총재 시절에 방영된 작품이어서 그런지 JP, YS와는 달리 전문 배우가 없다.

14. 명예 박사 학위

15. 수상 내역

  • 1981년 -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 1987년 - 미국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 인권상(조지 미니상)
  • 1987년 -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 1993년 - 한국애서가클럽 애서가상
  • 1994년 - 미국 유니온신학대학교 유니온메달
  • 1998년 -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 1998년 - 무궁화 대훈장
  • 1998년 - UN 인권협회 인권상
  • 1999년 -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 2000년 - 라프토 인권상
  • 2000년 - 노벨평화상
  • 2000년 - 국제평화상
  • 2000년 -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
  • 2001년 - 세계정치지도자상
  • 2002년 - 국제행동을 위한 의원연합의 민주주의 수호자상
  • 2003년 - 늦봄통일상
  • 2003년 - 제7회 만해상
  • 2003년 - 칠레 대십자 훈장
  • 2003년 - 제11회 춘사대상영화제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공로상
  • 2006년 - 코리아 소사이어티 선정 밴플리트상
  • 2007년 - 제1회 자유상(베를린 자유대학)
  • 2011년 - 제1회 동학농민혁명대상

1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2[124]

[[무소속|
무소속
]]
3,391 (9.98%) 낙선 (5위)
1959 6월 재보궐선거 강원 15[125]

파일:민주당 1955년 글자.png
8,483 (28.13%) 낙선 (2위) [126]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6,538 (30.98%)
1961 5월 재보궐선거 7,698 (36.50%) 당선 (1위) 초선[127]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3[128]

파일:민주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22,513 (56.10%) 재선[129]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29,279 (56.28%) 3선
1971 제7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5,395,900 (45.25%) 낙선 (2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4,969,050 (44.28%) 당선 (2번) 4선[130]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평화민주당|
파일:평화민주당 글자.svg
]]
6,113,375 (27.04%) 낙선 (3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3,783,279 (19.26%) 당선 (11번) 5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6,004,578 (29.17%) 당선 (1번) 6선[131]
제14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8,041,284 (33.82%) 낙선 (2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4,971,961 (25.30%) 낙선 (14번) [132]
1997 제15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0,326,275 (40.27%) 당선 (1위) [133]
역대 선거 벽보[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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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대중 국회의원 선거.jpg
파일:김대중 1971.jpg
제7대 국회의원 선거벽보 제7대 대통령 선거 선거벽보
파일:김대중 1987.jpg
파일:김대중 1992.jpg
제13대 대통령 선거 선거벽보 제14대 대통령 선거 선거벽보
파일:김대중 1997.jpg
제15대 대통령 선거 선거벽보 }}}}}}}}}

17.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
1945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45 - 1946 정당 해산

조선신민당
1946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46 - 194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1947 - 1949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49 탈당


파일:대한청년단 글자.png
1949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49 - 1956 정계 입문

민정당

(

[[무소속|
무소속
]])
1956 창당준비위원회


[[무소속|
무소속
]]
1956 이탈


파일:민주당 1955년 글자.png
1956 - 1961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61 - 1963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정당 해산


파일:민주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1963 - 1965 창당


[[민중당(1965년)|
파일:민중당(1965년) 흰색 로고타입.svg
]]
1965 - 1967 합당[135]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1967 - 1969 합당[136]


[[무소속|
무소속
]]
1969 자진 정당 해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1969 - 1972 정당 재등록


[[무소속|
무소속
]]
1972 - 1987 납치 사건
내란음모 조작 사건
미국 망명
정치활동 금지


[[통일민주당|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87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8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평화민주당|
파일:평화민주당 글자.svg
]]
1987 - 1991 창당


[[신민주연합당|
파일:신민주연합당 글자.svg
]]
1991 당명 변경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1991 - 1995 합당[137]
정계 은퇴


[[무소속|
무소속
]]
1995 정계 복귀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2000 창당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0 - 2002 합당[138]


[[무소속|
무소속
]]
2002 - 2009 임기 말 탈당[139]
정계 은퇴
사망

1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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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 행동하는 양심 · 앙망하옵니다
가족 아내 이희호 · 아들 김홍일 · 아들 김홍업 · 아들 김홍걸
역대 선거 제7대 대통령 선거 · 제13대 대통령 선거 · 제14대 대통령 선거 · 제15대 대통령 선거
사건사고 1964년 국회 필리버스터 · 김대중 납치 사건 ·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 김대중 직선제 반대발언 모함사건 · DJP연합 · 불법 대북송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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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연립여당 자유민주연합 · 민주국민당
정책 및 방향 햇볕정책 · 대중참여경제론 · 일본 대중문화 개방 · 국민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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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001년 재보궐선거 · 제7호 태창호 사건 · 2001 한일 컨페더레이션스컵 · 이용호 게이트 · 여성부 출범 · 인권위 출범 · 테러방지법 파동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족 · 육군 CH-47 올림픽대교 추락 사고 · 인천국제공항 개항 · 예지학원 화재 사고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002년 재보궐선거 ·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 한일 월드컵 · 제2연평해전 · 이석기 검거 · 홍삼 게이트 · 최규선 게이트 ·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 · 2002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1.25 인터넷 대란 · 대구 지하철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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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강원도 구 휘장.svg 강원도 제5대 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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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광순 박충모 김명윤 이찬우 이교선
횡성 원성 영월 정선
양덕인 윤길중 태완선 장춘근 신인우
철원 김화 인제
황학성 신기복 김준섭 김재순 김대중
고성 양양 명주 삼척 울진
김응조 함종빈 최준길 최경식 김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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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라남도 휘장(~2000)_white.png 전라남도 제6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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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갑 여수·여천 순천·승주
유수현 정래정 김대중 이우헌 조경한
담양·장성 보성 장흥
박승규 김선주 신형식 이정래 길전식
강진·영암 완도 해남 무안 나주
김준연 최서일 민영남 배길도 정명섭
곡성·화순 광산 함평·영광 진도
양회수 박종태 정헌조 이남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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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라남도 구 휘장.svg 전라남도 제7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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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갑 여수·여천 순천·승주
정성태 정래정 김대중 이우헌 김우경
담양·장성 보성 장흥
고재필 이현재 서민호 이중재 길전식
강진·영암 완도 해남 무안 나주
윤재명 정간용 김병순 배길도 이호범
곡성·화순 광산 함평·영광 진도
양회수 박종태 윤인식 이남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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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8대).svg 전국구 제8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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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당
29석
김종필 정일권 백두진 ~~~~ 길재호
김형욱 권오병 ~~~~ 황종률 이동원
이종우 유봉영 홍승만 모윤숙
최용수 이해랑 강병규 강성원
문창탁 권일 김성두 신광순
박태원 박철 전정구 장덕진
이도선 김현숙 편정희 김옥자
노진환
신민당
24석
유진산 김대중 홍익표 김홍일
김의택 유청 정헌주 이종남
이세규 편용호 김준섭 채문식
이상조 신도환 김재화 김용성
강필선 오세응 유성범 정규헌
이대우 오홍석 박종률 김윤덕
}}}
}}}}}}

파일:신민당1967.png 제8대 국회 전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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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산 김대중 홍익표 김홍일 김의택 류청
정헌주 이종남 이세규 편용호 김준섭 채문식
이상조 신도환 김재화 김용성 강필선 오세응
유성범 정규헌 이대우 오홍석 박종률 김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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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평화민주당 심볼.svg 파일:평화민주당 글자.svg 제13대 국회 전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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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 송현섭 이동근 최봉구 김영도 이경재
김주호 이교성 이형배 허만기 김대중 문동환
최영근 조승형 정기영 조희철
}}}}}}}}} ||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전국구 제13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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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38석
채문식 <colbgcolor=#003990> 윤길중 <colbgcolor=#003990> 정석모 <colbgcolor=#0A84E9> ---- 강영훈
이병용 박태준 김동인 이광노
이원조 김종곤 김인기
이동진 이도선 지연태
박철언 조경목 ---- 최창윤 최재욱
유기천 나창주 서상목 박승재
---- 손주환 이상하 김장숙 양경자
이상회 홍세기 김길홍 강재섭
김정길 조남욱 이재황 이민규
신영순 도영심 심기섭 안찬희
최상진
평화민주당
16석
박영숙 송현섭 이동근 최봉구
김영도 이경재 김주호 이교성
이형배 허만기 김대중 문동환
최영근 조승형 정기영 조희철
통일민주당
13석
송두호 이행구 노흥준 유승번
황대봉 문준식 석준규 권헌성
최이호 박종률 김운환 김성룡
김남
신민주공화당
8석
김인곤 정시봉 연제원 ---- 이희일
김두윤 신진수 옥만호 신철균
권오석
}}}
}}}}}}

파일:민주당(1991년) 로고.svg 제14대 국회 전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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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B] 이기택 강창성 장재식[B] 이우정[B] 나병선[B]
신진욱[B] 김옥천 장준익[B] 이동근 국종남 김충현[B]
강희찬 박정훈 박일 김옥두[B] 박은태 장기욱
김말룡 양문희 박지원[B] 이장희[C] 남궁진[D] 배기선[D]
최병욱[C] 장정곤[C] 김유진[C] 서호석[C] 장광근[C] 박명서[C]
한원석[C] 김용덕[C] 정양숙[C] 고홍길[C]

[B] 임기 중 사퇴.[B] 임기 중 사퇴.[B] 임기 중 사퇴.[B] 임기 중 사퇴.[B] 임기 중 사퇴.[B] 임기 중 사퇴.[B] 임기 중 사퇴.[B] 임기 중 사퇴.[B] 임기 중 사퇴.[C] 승계.[D] 승계 전 사퇴.[D] 승계 전 사퇴.[C] 승계.[C] 승계.[C] 승계.[C] 승계.[C] 승계.[C] 승계.[C] 승계.[C] 승계.[C] 승계.[C] 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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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전국구 제14대 국회의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민주자유당
33석
---- 김영삼 ---- 박태준 ---- 김재광 ---- 노재봉
권익현 이만섭 ---- 정석모 안무혁
---- 이원조 ---- 최병렬 ---- 김종인 ---- 김광수
---- 박재홍 강선영 정시채 ---- 최운지
강용식 ---- 김영수 ---- 김영진 ---- 강신옥
서상목 윤태균 박구일 곽영달
이명박 이환의 강인섭 김동근
---- 최상용 ---- 주양자 이현수 노인도
---- 구천서 ---- 조용직 ---- 구창림 박근호
유성환 이재명 정옥순 김찬두
김사성 이연석 이민헌 이수담
---- 배길랑 김정숙 김현배 박승웅
진경탁 허세욱
민주당
22석
---- 김대중 <colbgcolor=#009d68> 이기택 <colbgcolor=#009d68> 강창성 <colbgcolor=#009A44> ---- 장재식
---- 이우정 ---- 나병선 ---- 신진욱 김옥천
---- 장준익 이동근 국종남 ---- 김충현
강희찬 ---- 박정훈 박일 ---- 김옥두
박은태 장기욱 김말룡 양문희
---- 박지원 이장희 ---- 남궁진 ---- 배기선
최병욱 장정곤 김유진 서호석
장광근 박명서 한원석 김용덕
정양숙 고홍길
통일국민당
7석
문창모 양순직 ---- 정주영 ---- 조윤형
최영한 이건영 정장현 강부자
이용준
}}}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민주당계 진영 관련 문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000,#e5e5e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민주당계 정당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svg파일:깨어있는 시민연대당 배경.svg파일:민생당 흰색 로고.svg
우상호 이민구 김정기, 이관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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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치인 국회의원 · 광역자치단체장 · 당대표
지식인 진보파일:1px 투명.png시민사회 김상조 · 조희연 · 조국 · 김동춘
자유주의 유시민 (진보) · 황석영 (보수) · 조순 (보수) · 장하성 · 최장집 · 이근식
단체 · 정파 친노/친문 친문 · 친노 · 정세균계 · 이낙연계 · 양승조계
동교동계 비문 · 동교동계 · 호남계 · 박지원계
제3지대 친안 · 손학규계 · 민주당계 보수
진보파 박주민계 · 이재명계 · 정동영계 · 민평련
노동조합 · 시민단체 참여연대 (진보)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진보) ·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보수) ·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보수) 한국여성단체연합 (진보) · 민주언론시민연합 · 개혁 국민운동본부 ·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 정의기억연대 · 노사모 · 희망제작소 ·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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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분상 공식적으로는 1926년 1월 6일인데 사망 당시 생년월일이 기사마다 제각각으로 보도하여 김대중 측근에서 1924년 1월 6일로 통일적으로 표기해달라고 부탁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에는 1925년 12월 3일생으로 되어 있는데, 음력 1925년 12월 3일이 양력으로 1926년 1월 16일에 해당하므로 양음력 변환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 오류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43년 당시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와 상의 끝에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했다고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었다.[2] 원적은 신안군 하의면 대리. 인근의 오림리와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며 이곳에 선영이 있다.[3] 생전 거주지. 동교동계의 뜻이 바로 이 집이다.[4] 안경공파 14세손. 증조부 김태현(金台鉉), 조부 김제호(金濟浩), 아버지 김운식(金雲植)이 각각 경파(京派) 17세손, 18세손, 19세손 항렬자를 사용한다.[5] 개명전 이름은 장노도다.[6] 1927년 4월 28일생으로, 1945년 김대중과 결혼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959년 6월 25일 사망했다.[7] 2019년 6월 10일 사망했다.[8] 김대중이 차용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지만 어린 나이에 사망함.[9] 지금의 목포북교초등학교.[10] 사회 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다니지 못한 것에 대해 상당한 콤플렉스를 느꼈다고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등원한 6대 국회 시절부터 소속된 위원회(재정경제위원회)에서 '1시간 발언을 위해 10시간 이상을 준비'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덕분에 차츰 입지를 넓혀나갈 수 있었다고. 그리고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외교대학원에서 논문(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주의, 진보원칙의 발생 및 발전에 관하여(1945~1991))을 제출하고 구두시험을 거쳐, 정식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출처: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203 ~ 210쪽)[11]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 시절 일본군에 차출될 뻔 했으며 6.25 전쟁 시절 북한군에게 잡혀 죽을뻔한 일화는 유명하다.[12] 6.25 전쟁 당시 해군 예하 전남지구 해상방위대 소속으로 전투 일선에 참여했다고 본인이 주장했으나, 대한민국 해군 측에서는 "해군 본부"에는 이와 관련한 기록이 없다고 밝혔고, 언급되었던 '전남지구 해상방위대'는 부대가 창설된 목포 지역의 해군에 그 문서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뤄봤을 때 해당 부대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경에 해체하였고, 처음부터 정식 해군 편제된 조직이 아니라 "목포 현지에서 창설"되어 군 조직과 협력하는 자경단에 가까운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인이 민원만 넣어도 주장의 진위를 바로 확인할 수 있고, 이 점을 본인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에 해상방위대 주장이 거짓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편 일제강점기 시절 김대중의 병역사항은 '고령으로 인한 징집면제'이다.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운회사에 들어가 일했기 때문이다.[13] 김대중의 대부가 바로 장면 전 총리이었다. 김대중은 굉장히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일부 민주당계 의원들 및 그의 대부분의 측근들은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천주교로 개종하거나 천주교를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의 약 30% 이상 되는 의원들 종교가 천주교 신자이며, 당연히 세례명까지 받는다.[14] 호는 '후광(後廣)'으로 그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따와 지은 것이다.[15] 초암 김연 선생이 차린 서당으로, 소학, 천자문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16] 입학 당시 수석으로 입학했다. 입학 당시 기사[17] 당시 기사[18] 당시 기사[19] 인제군[20] 목포시[21]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소속 대통령은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회간접 선거로 선출된 윤보선이다. 다만 이때는 의원내각제라서 윤보선은 상징적 국가원수에 불과했다. 대통령제에선 김대중이 최초이다.[22] 김대중이 일본으로 잠시 피신가 있었을 때의 인터뷰를 보면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라고 언급했기에 김영삼과 같이 자유주의를 지향했었다.[23] 92년 대선 패배 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3가지 주제(제3의 길, 지리와 국가 발전의 상관관계, 영국 명예혁명사)를 고민해보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제3의 길을 주창한 영국 석학 앤서니 기든스(1938년생)가 한창 활동 중이라 관련 자료, 정보를 구하는 것도 쉬웠다.[24] 어찌 보면 보수정당 장기집권 시대에서 민주당계 정당으로 정권이 이양되는 과도기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막 정권교체가 됐는데 급진 진보 정책을 펼치기에는 부담스러우므로...[25] DJ 본인만 용서하는 게 아니라, 영국 명예혁명 사례를 들어 지지자들을 설득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영국인들은 쫓겨난 제임스 2세의 망명길을 사실상 막지 않았고, 프랑스에 거점 세력을 마련해 손자대까지 왕권 수복을 꾀했는데도, 이를 손대지 않고 자연스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도록 놔두었다는 것. 그러면서 정치 보복 대신 당사자가 명예 회복을 하는 게 더 낫다는 것과, 악행을 저지른 이들은 그에 상응하는 명예의 손상이 이뤄지는 정도면 된다는 일종의 선까지 제시하였다[26] 2013년 12월 5일 2014 브라질 월드컵 조 추첨식 하루전에 세상을 떠났다.[27] 물론, IT산업 진흥 덕분에 나중에 대한민국이 IT산업 상위권에 올라갈 수 있도록 초석을 마련해주었었다.[28] 99년은 남북관계의 전환점인 2000년 베를린선언과 남북정상회담 이전이었다.[29] 반(反)김대중 파벌 중 왜곡론자들이 색깔론으로 김대중을 자주 공격했지만 정작 김대중은 자신을 몇 번이나 구해준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했었다. 그래서 한총련과 같이 종북관을 가진 시민단체들에게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본인도 과거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에게 죽을 뻔한 경험이 있었고, 해군 조직에 협력해 한국전쟁을 지원한 사실이 있었으므로 평화주의를 선호하기는 했으나 공산주의는 절대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한국논단에서 주최한 대선후보 토론회를 빙자한 사상검증 대회에서 잘 드러났다. 진보 정치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북한에 우호적일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김대중은 한국전쟁기를 회상하며 "남한 사람들이 공산당의 실체를 알고 정말 반공의식을 갖게 된 것은 6 25 전쟁 때문"이라고 북한의 만행을 지적했으며, 박정희랑 대선싸움 당시에도 국민들 앞에서 말한 연설문을 보면 "남북관계 문제도 북한이 파괴공작원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끼리 스포츠 관람도 하고..."라고 밝힌 점을 보면 김대중도 김영삼과 같이 반공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30] 임기 말 레이건은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을 권고했다.[31] 그러나 이런 보수쪽의 불신과는 별개로 그의 임기말이던 2002년 12월, 청와대에서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근(2002년 당시) 붉어진 반미감정에 대해 공무원 190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문제로 비약돼 ‘미군 나가라’고 하는 것은 안된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필리핀이 수빅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미군을 나가라고 했을 때 일부에선 설마 나갈까 했지만 미군이 철수, 경제와 국방에 큰 문제가 생겼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안보를 위해 미군을 있도록 하는 것이고, 미국은 미국대로 동북아 안정을 위해 와 있다”면서 “미국은 우방으로서 국가 이익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미SOFA는 일본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라면서 “운영에 있어서 개선하기로 미국과 합의했으며 얼마든지 개선하면 된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 반미감정 반대 메세지[32] 클린턴, 김대중 당선자 만나고 싶다[33] 김대통령 핵,미사일 등에 대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전화[34] 김대중 후보 1997.7.31 대선토론회 연설[35] 미국.일본 방위협력지침 개정, 주변국들의 우려 높아져[36] 안기부의 야당후보 낙선공작 청와대 반응[37] 김대중 대통령 반미감정 반대 메세지[38] 예외적인 사람이 있다면 박지원 국정원장.[39] 재미있게도 김영삼에 대한 평가와는 정반대였다.# 썰전에서 일화를 분석한 바 있는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김영삼과는 달리 궁핍했던 삶 때문에 매사에 신중한 자세가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40] 이것은 김영삼에 의해 정치에 입문했다가 3당 합당 기준 동교동계로 간 노무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41] 그러나 질병치료로 인한 형집행정지 때문에 형량에 비하여 실질적으로 박지원이 감옥에 있던 기간은 짧았고, 최종적으로 박지원의 형집행정지 기간에 노무현이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박지원을 풀어주면서, 김대중과 노무현은 화해를 하게 된다. 기자들이 보도한 풍문의 후일담으로는 사면 후 김대중이 청와대에 사람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도 하고,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는 설도 있다. 참고로 박지원은 형집행정지 기간에도 김대중의 자택에 자주와서 살다시피하며, 당시 80대가 되어 건강이 많이 상한 김대중을 사실상 모셨다.[42] 여담으로 노무현의 영결식에서 하려던 추도사는 이명박 정부의 반대로 인해 현장이 아닌 한 책의 기념문으로만 남게 되었다.#[43] 전쟁, 교통사고, 납치, 사형선고.[44] 심지어 김대중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대북송금 사건으로 인해 감옥에 갔다왔다.[45] 그나마 김대중의 역량과 사람보는 안목을 높이 평가한 노태우가 집권한 88년(60대 중반)부터 상황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46] 김대중 대통령의 창씨개명한 이름은 '도요타 다이쥬'다.[47] 물론, 식민지시절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48] 김대중(金大中(김대중))전 대통령은 8일 오후 숙소인 영빈관에서 목포상고 재학시절 은사였던 무쿠모토 이사부로(椋本伊三郎(양본이삼랑)·80)와 20여분 동안 만났다., 김 대통령 일본인 은사 모쿠모토 해후(MBC), [김대통령] 일본서 60년전 은사와 해후(조선일보)[49] 무쿠모토는 8.15 광복 직후 귀국하여 외교관으로 변신, 에티오피아터키, 우루과이 대사를 역임하고 1983년 외교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2002년 허혈성 심부전으로 인해 11월 28일 0시 34분 도쿄도 메구로(目黒)구의 병원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50] 정동영이 일산의 총재 자택으로 출근하면, 전날까지 이런저런 사람들과 을 마셨던 박지원이 차 안에서 운전사와 졸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고.[51] 정가에서는 흔히 "기름칠한다"는 은어를 쓴다. 언론인들과 시간을 내어 소식을 주고받거나, 관계개선의 소통창고로 이용된다고. 동아일보를 제외한 기존 보수언론들과 관계가 껄끄러웠던 DJ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하단에도 나와있지만, 박지원은 원래 미국에서 사업을 하며 뉴욕 한인회장까지 맡을만큼 확실하게 기반을 다졌던 사람이라, 그 사업가 경험을 활용하고자 한 인사로 추정.[52] 읽은 책만 2만권에 달했다고 한다. DJ의 자택을 방문한 사람들이, 서재에 소장된 수많은 책 대부분이 하나하나 손때가 묻어있는 걸 보고 놀라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53] 박태준을 영입하는 대 공들인 주된 사유 중 하나가 "기업체를 운영해본 덕분에, 규모가 큰 실물 경제에 매우 밝은 인물이기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54] 국민의 정부 초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이 밝힌 말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넥타이를 매우 좋아했으며 기분이 좋으면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선물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조 바이든이 받은 녹색 넥타이는 본래 장성민이 2001년 1월에 생일선물로 준 것이었다고.[55] 사실 아예 원고도 없이 왕창 연설한 김대중이 특별한 케이스지, 일반적인 필리버스터의 형태는 이렇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원고뿐만이 아니라 연설자가 지금까지 머릿속에 담은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기 때문에 별의별 내용이 다 나오며, 어떻게든 관련 현안과 연계할 만한 내용을 고르는 것 또한 연설자의 역량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 2013년 미국 버락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에 맞서고자 21시간 동안 연설한 테드 크루즈 의원의 경우 쓸 만한 소재가 떨어지자, 동화책 내용부터 영화 스타워즈의 잡다한 대사까지(...) 끄집어내기도 했다. 사실 한국의 필리버스터와는 다르게, 미국에서는 현안과 별 관련이 없더라도 성경책을 읽든 전화번호부 번호를 읊어대든 상관이 없어서 가능했던 이야기다. 한국의 필리버스터에서는 관련없는 내용을 1분 동안 언급하거나 아예 연설을 멈추면 자동으로 다음 주자에게 넘겨야 하고, 화장실 같은 개인 용무 해결도 일일이 의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제약이 많다.[56] 김대중 平民黨 총재가 9일 상오 駐韓일본대사관저의 히로히토日王의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57] 전두환 정권 당시에도 천황은 사과 의지를 표명해왔다.[58]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59] 부시 대통령 '북한 믿을 수 없어'[60] 부시는 이 때 한 방 맞은 데 앙금이 남았는지 이후 공식 석상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this man', 노무현 전 대통령을 'easy man'으로 부르는 외교적으로 큰 결례를 저질러 구설수에 올랐다. 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보수 성향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61] 자료에 따라선 먼저 흑산도 산이 아닌 수입산을 내놓았고, 김대중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제서야 흑산도 산이 아님을 고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62] 대통령 임기 시절에는 가끔씩 고향의 해산물을 공수해 왔다.[63] 물론 김대중이 1924년생이니 원래 치킨을 접할 수 없었던 나이라고 치더라도, 보통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소화기관의 소화력 저하 등의 이유로 기름진 음식은 피하게 마련임을 생각하면 나름 놀랄 노릇이다. 참고로 김대중은 1995년 당시에도 상당한 고령인 71세였다.[64] 사실 그시절 재소자에게 주는 식사는 쌀과 콩 등 잡곡을 섞어 오늘날 봉구스밥버거 같이 생긴(...) 동그란 틀에 찍어 주었는데(그래서 재소자들은 이를 가다(形)밥이라 불렀다), 다섯가지 종류로 나뉘어 교도소 내 작업을 나가는 재소자에게는 가장 큰 사이즈를, 그렇지 못하는 정치범이나 흉악범은 가장 작은 사이즈를 주었다. 김대중은 예의주시 해야 하는 정치범인데다 전두환에게 찍혀 있었으니(...) 다른 재소자들과 달리 가장 작은 사이즈를 받을 수박에 없었고, 대식가였던 김대중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군것질을 할수밖에 없었다.[65] 극우 커뮤니티에서 자주 고인드립으로 써먹는 그 유명한 멘트인 "정치 안 해요. 내가 안 해요. 이건 내 문제니까 내가 안 하는 거요. 누가 날 강제로 시키는 거요." 그러나 이 발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복귀했다.[66] 여기서 말하는 '민간인'이란 장성급 장교출신이 아닌 사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군 복무 경험이 아예 없는 사람(모병제 국가) 또는 최소한의 군복무만 한 사람(징병제 국가)을 뜻한다.[67] 테드 카플이 진행하는 미국 ABC 나이트라인[68] 70년대의 대표적인 언론인으로 능변으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69] 젝스키스의 당시 매니저는 소녀팬들을 때리는 걸로 유명했다.[70] 전부 다 멤버 본인들이 증언한 내용들이다. 141218일자 해피투게더, 160423일자 무한도전, 160601일자 라디오스타 등 방송에 나온다.[71] 김대중의 퇴임시 나이는 만 79세 1개월[72] 김대중의 목표는 모든 사형수의 감형이었지만 사법당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73] 홍준표가 정계에 입문한 이유가 검사 시절 당시 본인과 가족들을 위협하던 자들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당시 김대중이 이끌던 야당의 세력이 여당에 비하면 많이 약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고.[74] 사실상 사표로 버려버리기로[75] 1세대 초기형 VS450 트림.[76]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지시로 방탄 기능을 탑재한 다이너스티 리무진 3대를 특수 제작해 각각 정주영 명예회장, 그리고 여야 대권 후보였던 김대중과 이회창에게 각각 제공했다고 한다. 대통령 당선 후 해당 차량은 김대중의 측근인 한화갑 전 의원이 타고 다니다가 아태평화재단에 기증됐다. 이후 한동안 근황이 알려지지 않다가 2013년 아태평화재단 측에서 해당 차량을 전시용으로 목포시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목포시에서 거절했고#, 폐차 위기에 놓였다가 2016년 간신히 영암군에 기증됐다.#[77] 2008년식 마지막 출고분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거 이후에는 박지원 전 의원이 물려받아 운행하였다가, 2021년 현재는 목포에 위치한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78] 호주 말 목장주를 취재한 기자가 이를 확인.[79]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대중은 어린 시절 서당을 다녔었다.[80] 공교롭게도 약현성당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이 순교한 순교터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81]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현하다 참수형을 당했다.[82] 다만, 장례미사에서 김대중의 시신은 국장을 위해 국회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 없이 미사를 진행했다.[83] 이 당시에는 원음방송 본사가 익산에 있었다.[84] 다만 감리회가 한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 중 가톨릭과의 관계가 가장 원만한 편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비주류 교단을 포함하면 대한성공회가 가톨릭과의 관계가 가장 원만하다고 볼 수 있다.[85] 모친 장수금 여사가 원래는 소실이었다는 요지[86] 2000년 6월에는 국정 공동운영자인 JP도 이 사자성어를 휘호로 발표해 언론에서 그 의미를 유추해보기도 하였다.[87] 역시 달변이었던 JP(김종필) 역시 비유법과 사자성어 활용을 깊이 연구하였다.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고자 진력'한 DJ와는 좀 다르게 VS 중요한 행보 결정 순간마다 '시의적절한 짧은 문구'를 올린 모습이 많이 비춰졌으며, 나중에는 중화권 국가 지도부 인사들이 JP의 이런 면모에 호감을 표할만큼 화제가 되었다고.[88] 4분 15초~~. 본인이 추진했던 일에 대한 기념행사였지만, 발언 서두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덕담으로 시작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였다. 위의 발언도 "양심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로운 사람들이 계속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89] 84년 12월 미국에서 귀국 하기 전에 열린 송별 자리에서도 행동하는 양심이란 표현을 썼다. 늘 새로운 표현을 강구하고자 한 노무현과 달리, DJ는 유권자가 기억하기 좋도록 사전에 심사숙고한 어구를 꾸준히 반복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연설문 비서관 강원국이 DJ가 사례로 제시한 일화 대신 다른 이야기로 바꿔오면, 다시 이전의 것으로 내용을 고쳐 활용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90]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줄곧 언급하고 재단 명칭(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으로까지 썼던 문구이다. 참고로 이때가 2009년 6월로 DJ가 세상을 떠나기 2달 전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기력을 짜내어 고인의 특징과 바라던 바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 1월,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노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김해)에서 묘역 참배를 하고 방명록에 이 문구를 언급했지만, 기억착오로 실수가 나와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하였다.[91] 자료의 영상은 일부분인 2분 54초로 편집된 것이다. 당초 장례식 현장에서 읽고자 했으나 여권에서 반대의사를 표명해 시일이 지나 공개되었다고.[92] 장 폴 샤르트르의 명언과 비슷하다. 2020년 시점, 한국은 "유사시 국무총리령에 의거, 50세 남성까지 현역으로 동원 가능"하다. 20대 대선 정국에서 신세계그룹 정용진 SNS 멸공 발언 게시 논란윤석열대북 선제 타격 발언 논란이 터지자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93]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6년 10월 11일 전남대에서 ‘한반도의 현실과 4대국’이라는 강연회에서 스스로 민주주의 일군 한국과 달리 일본은 민주주의 주체세력이 없어 군국주의가 부활할 것이라며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예언을 한 적이 있었다.[94] 행정(김영남)-국방(김정일) 2원화 체제로 통치되는 북한의 행정수반.[95] 80년대 YS의 비난에 대해(46번째 문단), 97년 DJT 연합(김대중 + 김종필 + 박태준)을 성사하고자 김대중 - 박태준 두 사람이 대담을(9번째 문단) 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동년 10월 관훈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모두 이런 요지로 답변하였다.[96] 위의 '거짓말장이' 프레임과 결합, DJ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공통관심사로 굳혀진 파괴력 강한 단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도를 고안하고 + 87년 대선 당시 DJ에게 직접 질문하며 몰아세운 사람의 이름도 김대중(기자).[97] 실제로 '논리'의 DJ가 가장 염두해 둔 것이 저 번복에 대한 대응 논리였다. 그런데 그 점에 대해 조언해준 교수그룹(임혁백, 강정인)의 반응이 걸작이다. “아니, 정치 안 한다고 하다가 다시 하면서 무슨 구차한 변명을 합니까. 언제 국민이 은퇴하라고 해서 했나, 본인이 알아서 한 거 아닌가요. 그럼 복귀도 마찬가지지. 무슨 변명은.” "자꾸 이상한 논리 앞세워 국민을 설득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국 정리된 기조는 ‘죄송하다. 할 말 없다. 앞으로 잘 하겠다’였다." # 장성민의 회고[98] 하지만 이듬해 5월 전국 1회 지방선거(6월)를 앞둔 시점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는, 지방선거 결과가 정계 복귀 여부를 가늠할 기준점이 될 거라는 암시를 남긴다.[99] 이건 정확히 말하자면 김대중도 사람인지라 한 발언에 가깝다. 1994년 기준으로 김대중은 정계복귀 여부와는 상관없이 지쳐서 이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100] 출처, 장성민-김종혁 공저 <김대중 다시 정권교체를 말하다>[101] 칸트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참고한것으로 보인다.[102] 역시 토인비를 접해본 다른 정치인의 수사와(맨 밑에서 2번째 문단) 비교해보도록 하자. 단, 원 발언이 경어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하여 볼 필요가 있다.[103] 성경 아모스 5,24("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104] 설령 이쪽의 세가 더 강할지라도 마음가짐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말. 1990년, 여권의 3당합당에 합류하지 않은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 6명(이기택,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이 DJ의 옛 평화민주당과 동등한 비중으로 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던 것도 이기택 의원의 완고한 "지분" 요구를 DJ가 양보하고 수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105] 외국어 공부를 하려면, 그 나라 문학작품을 읽는 게 가장 낫다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문법을 정확하게 준수하며 말할 경우, 상대방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문법 공부에도 공을 들였다고[106] 실제로 이 선거 이후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해버려 결론적으로는 맞는 말이 되었다. 한편 그 시기 박정희 당시 대통령도 거짓말은 아닌 말을 했는데, 그게 바로 유명한 "이번에 다시 저를 뽑아주신다면 다음 부터는 국민에게 표 달라고 안하겠습니다."였다.[107] 15분 23초 즈음부터 나온다.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음질은 다소 좋지 않지만, 들리기는 다 들린다.[108] 연설 전문은 여기에 있으며, "마지막으로~" 부분은 거의 연설 끝에 있다.[109] 클린턴 행정부가 유화적이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유럽 코소보 사태에는 무력 공습(코소보 전쟁)을 감행했으며,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한때 대북 선제 타격을 계획했으나 한국의 막대한 피해가 우려되어 그만뒀다고 자서전에서 언급한바 있다.[110] 2002년 일본과 북한간에 국교정상화 기조로 정상회담과 '북일평양선언'이 있었는데, 고이즈미와 김정일의 협력에 DJ가 상당한 영향을 준것으로 알려져있다. 북일평양선언에는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사과와 경제협력, 일본인 납북 문제 재발 방지 등이 담겨있다. 기사[111] 호남에서도 가장 서쪽인 신안군 출신이라 생긴 기록으로, 훗날 황해남도, 평안도 서부 지역이나 중국, 유럽 등지에서 태어난 대통령이 나오면 갱신될 기록이다.[112] 김대중 한 명뿐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사실 박근혜도 해당한다. 대구에서 출생했는데 왜 그런가 싶지만, 군인인 아버지 박정희 부임지에 따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사다녔고 결국 서울에 정착했다. 그래서 박근혜는 서울말을 구사했다. 그리고 윤석열은 애초에 서울 출신이다.[113] 물론 끝까지 같이 가지 못하고 임기 중 대북문제를 놓고 시각차를 보여 자민련과는 결별한다.[114]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김영삼과 동반 입문했는데 김영삼은 민의원으로 당선되고 김대중은 낙선했다. 그 이후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까지 43년이 걸렸다.[115] 7대 대선, 13대 대선, 14대 대선에서 세 번 낙선.[116] 다만 1904년 대한제국 부산에서 출생한 미국인 찰스 피더슨이 여덟살때까지 살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 호스트게스트화학 분야의 연구 실적을 인정받아 1987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위원회 홈페이지상 출생지가 한국으로 표기돼 있다.[117] 장남 김홍일이 3선 의원, 차남 김홍업과 삼남 김홍걸이 초선 의원 출신이다.[118] 광주 도시철도 1호선김대중컨벤션센터역.[119] 이승만과 박정희도 재혼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사별 이후 재혼이 아닌 이혼 이후 재혼이다.[120] 작가의 전작 야인시대에서 김형사 역을 맡았다.[121] 전작인 제4공화국에서는 김영삼 역으로 출연했다.[122] 당연히 김정일은 평양 옥류관에서 기다렸고 김대중은 남한에 있는 '평양 옥류관'이란 식당에서 기다렸다.[123] 다만 여기서는 김대중을 모티브로 한 인물인 김운범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124] 목포시[125] 인제군[126] 전임자 나상근 당선 무효.[127] 전임자 전형산 반민주행위자 공민법 제한법(자유당 독재 부역)으로 자격 상실.
5.16 군사정변으로 자격정지. 당선 통보 후 실제 임기는 약 12시간이었다.
[128] 목포시[129] 1965년 민중당으로 신설 합당.[130] 1972년 10월 17일 자격 박탈. (10월 유신)[131] 1992년 12월 19일 사퇴. (대선 패배 후 정계 은퇴 선언)[132] 딱 13번까지가 당선권이었다. 당시 라이벌격인 김영삼은 민주자유당 전국구 1번으로 당선되었다.[133] 자유민주연합과 선거연대. (DJP연합)[134] 1967년 이전의 선거 벽보는 확인되지 않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에서 김대중으로 검색해도 확인할 수 없다. 이는 김영삼, 김종필도 마찬가지.[135] 민정당과 신설 합당[136] 신한당과 신설 합당[137] 민주당과 신설 합당[138]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39]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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