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5:36:01

임마누엘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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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7위8위9위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베르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17위18위19위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22위23위24위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27위28위29위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32위33위34위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37위38위39위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42위43위44위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47위48위49위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하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52위53위54위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57위58위59위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67위68위69위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72위73위74위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77위78위79위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82위83위84위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87위88위89위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92위93위94위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97위98위99위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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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Time's Greatest Philosopher
※ 2005년 영국 BBC 방송이 BBC 라디오 4 청취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선정
1위2위3위4위5위
카를 마르크스 데이비드 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프리드리히 니체 플라톤
6위7위8위9위10위
이마누엘 칸트 토마스 아퀴나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칼 포퍼
출처 }}}}}}}}}

<colbgcolor=#000><colcolor=#fff>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파일:임마누엘 칸트의 모습.jpg
출생 1724년 4월 22일
프로이센 왕국 동프로이센주 쾨니히스베르크[1]
사망 1804년 2월 12일 (향년 79세)
프로이센 왕국 동프로이센주 쾨니히스베르크
국적 [[프로이센 왕국|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1803-1892).svg
]] 프로이센 왕국
서명 파일:Autograph-ImmanuelKan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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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성 조지 병원 근처 독일 학교 (1730~1732)
콜레기움 프리데리키아눔 (1732~1740)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2] (1740~46,[3] 1754~55)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1755 / 석사[4])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1755 / 박사[5])
경력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사강사[6] (1755~1770)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교수 (1770~1796)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총장 (1786, 1788)
신장 157cm
사상 독일 관념론, 고전적 자유주의
종교 개신교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가난한 대학 생활과 기나긴 강사 생활2.3. 원했던 교수직, 원하지 않았던 과목2.4. 10년의 연구 결과, 『순수이성비판』2.5. 수요 모임의 계몽주의자2.6. 순수한 도덕을 찾아서2.7. 검열에 맞서2.8. 말년
3. 사상
3.1. 인식론3.2. 윤리학3.3. 미학3.4. 정치철학, 사회철학
4. 업적5. 영향6. 논란
6.1. 인종차별주의
7. 명언8. 주요 저서
8.1. 한국어 번역 논쟁
9. 여담

[clearfix]

1. 개요

Zwei Dinge erfüllen das Gemüt mit immer neuer und zunehmender Bewunderung und Ehrfurcht, je öfter und anhaltender sich das Nachdenken damit beschäftigt: 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und das moralische Gesetz in mir.
더 자주 끊임없이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로워지고 점점 더 커지는 경탄과 경외감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 내 위의 별로 가득찬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
『실천이성비판』[7]
프로이센 왕국(현재 독일) 출신의 철학자. 서양 근대 철학사에서 대륙의 합리주의영국경험주의를 종합하여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받으며,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서양 철학의 전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칸트가 남긴 저작 중 3대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 유명하다.

사망한 지 200년이 흐른 지금도 근현대 철학의 중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칸트의 영향력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근대 철학에 국한되지 않으며, 현대 철학에서도 칸트의 영향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칸트의 윤리학은 의 윤리학과 더불어 현대 윤리학의 중요한 두 축 중 하나이다.

2. 생애

2.1. 초년기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토요일 아침 다섯 시에 태어났다. 태어난 날이 옛 프로이센력으로 성명축일[8]이었으므로, 칸트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원래 이 이름이 지닌 히브리어의 의미는 "신이 그와 함께 있다"인데, 이 뜻이 경건한 부모의 마음에 들었다. 칸트 역시 나이가 들어서도 이 세례명을 자랑스럽게 여긴 걸 보면, 그에게 아주 알맞은 이름이었던 듯하다.[9]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는 마구 제조업자들의 조합에 소속되어 있는 수공업자[10]였으며, 말이나 수레, 마차, 썰매 등에 쓰이는 가죽끈이나 가죽띠를 생산하고 판매함으로써 돈을 벌었다. 그는 1683년 메멜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 큰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했다. 거기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할 만큼 수입을 얻었던 그는 서른세 살이던 1715년 11월 13일, 뉘른베르크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해온 다른 마구 제조업자의 열여덟 살 딸 안나 레기나 로이터와 결혼했다.[11]

둘은 경건주의에 따라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칸트도 부모님의 이러한 모습에 큰 영향을 받았다. 칸트는 대여섯 살이 되어 프로이센의 교회법과 학교법의 규정대로 학교에 들어갈 시기가 되자, 시의 변두리에 인접한 병원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곳에는 오직 선생님 한 분만이 계셨다. 선생님은 그곳 교회의 합창단 지휘자이자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다. 학급도 오직 하나였다. 모든 학생들이 토지 개량 기술에 능숙하도록 배웠고, 읽기와 쓰기도 배웠으며, 계산하는 법 등도 조금은 배웠다. 무엇보다 그들은 기독교의 근거에 대해 공부했고, 개신교의 정신에 입각해 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교육을 받았다.[12]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왔던 칸트는 그 지역의 목사이자 교육자였던 프란츠 알베르트 슐츠를 만나게 된다. 어머니는 아들이 지닌 통찰력과 이해력에 대해 자랑하곤 했는데, 슐츠는 칸트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어머니에게 칸트를 학교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했다. 어머니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버지 또한 적은 수입일지라도 더 나은 학교 교육을 위해 기꺼이 돈을 내놓을 준비를 했다. 그렇게 해서 여덟 살의 칸트는 1732년 부활절 무렵 슐츠가 있는 콜레기움 프리데리키아눔으로 왔다. 일 년 뒤에 슐츠는 그곳 교장이 되었으며, 가까이에서 칸트의 성장을 지켜보며 영향을 줄 것이다. 이제 칸트는 이 엄격한 "경건주의 학교"에서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교육을 받는다. 칸트는 일주일의 6일을 아침 일곱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휴식 없이 보내는 노예 같은 생활을 견뎌야 했으나 그런 와중에도 라틴어 수업만큼은 좋아하고 열심히 들었다.[13] [14]

한편, 아버지의 사업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마구 제조업자와 가죽끈 제조업자 사이에 빚어진 갈등으로 인해, 말의 안장을 생산하는 것이 힘들어져서 더욱 가난해졌다. 더군다나 1737년 12월 18일 '독성을 지닌 급성류머티즘발열'로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 홀로 남은 아버지의 어깨 위에 부양과 교육이라는 모든 짐이 지워졌다.[15] [16]

2.2. 가난한 대학 생활과 기나긴 강사 생활

칸트는 1740년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17]에 합격했다. 이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개신교 국가에 필요한 교사와 설교자 혹은 목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1544년에 세워진 동프로이센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칸트는 이곳에 새로 등록하면서 어떠한 장학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적 독립을 원했고, 국가로부터 빚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자기 스스로 학비를 충당하려고 했다. 그보다 나은 처지의 친구들이 그에게 커피와 빵, 옷 등을 대주었다. 또한 칸트의 외숙 리히터는 제화업을 하는 궁한 형편임에도 조카를 많이 도와주었다. 칸트는 절친인 요한 하인리히 블뢰머와 오랫동안 조촐한 방에서 함께 살았다. 칸트는 그와 함께 가끔씩 당구를 치기도 했는데, 당구 실력이 수준급이라서 내기 당구를 해서 생활비를 벌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8]

칸트는 대학교에서 신학, 자연과학, 고등수학을 청강했다. 1년 뒤 칸트는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을 만나게 되었다. 크누첸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학문 일반의 유럽적인 개념을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성찰, 수학적인 증명과 박물학적인 탐구는 칸트라는 젊은 학생에게 커다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그는 쉬지 않고 크누첸의 강의와 토론 연습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열한 살 위인 교수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19] 크누첸은 칸트에게 1687년에 출간된 아이작 뉴턴『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빌려주었는데, 이 책은 칸트의 인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책은 "아마도 일직이 등장한, 개별적으로 저술된 물리학 저작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칸트 자신이 떠올렸던 계획과 일치하는 것이었다.[20] 또한 크누첸의 서재에서 칸트는 '사무엘 클라크와 라이프니츠 사이에 오간 서신'을 읽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자연 철학과 종교의 원리'를 주제로, 라이프니츠와 뉴턴을 등에 엎은 사무엘 클라크의 논쟁이 쓰여져 있었다. 주목할 점은, 나중에 칸트가 해결점을 찾았던 거의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 논의되었다는 사실이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와 뉴턴/클라크 사이에 논쟁이 되었던 '힘'의 정당한 측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21] 이 연구를 바탕으로, 아버지가 점점 더 허약해져가는 그 시기에 칸트는 자신의 첫번째 책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을 써 내려갔다. 1746년, 평가를 받기 위해 이 책을 철학부에 내놓았을 때 아버지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직후였다.[22]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칸트는 남은 유산을 정리했는데,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장남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을 넘겨받았다. 학생이던 칸트는 더 이상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강의 요목을 좇을 수 없었고 나중에는 강의 자체를 거의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가난한 칸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가정교사가 되는 길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23] 학업을 중단한 뒤, 1748년 칸트는 먼저 인스터부르크와 굼비넨 사이에 있는 유드첸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다니엘 안더슈 목사 댁의 일을 보았다. 3년 뒤에는 쾨니히스베르크의 남쪽에 있는 그로스-아른스도르프에서 휠젠 집안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1754년에 쾨니히스베르크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는 6년을 그곳에서 보냈다.[24]

가정교사 생활을 하던 6년 동안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묻혀 지내지는 않았다. 전원적인 고독 속에서 안정된 몇 년을 그는 집중적으로 자연 연구에 사용했다. 칸트는 물리학ㆍ지리학ㆍ천문학을 비롯해 여러 분야의 학문적 기록들을 남겨놓았다. 칸트의 자연철학적 연구들은 바로 이 근면함으로 인해 이루어졌는데, 시간이 날 때면 그는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자연과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25] 인쇄한 지 3년 뒤의 일이지만, 1749년 여름에 드디어 그의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이 서점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칸트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견본 한 부를 문화계 잡지사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보냈다. 자신의 첫 저술에 대한 서평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동봉한 편지에는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을 통해, 잠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의도에 최후의 결정을 일깨우려는" 독일 자연철학이라는 암시가 곁들여져 있다. 같은 날에 칸트는 저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도 이 책을 보냈다.[26] 동봉한 편지의 내용에는 불확실한 자기 평가가 결합된 젊은 철학자의 자부심이 엿보인다. 그러나 살아 있는 힘(vis viva)에 관한 그의 형이상학적 꿈이 적혀져 있는 칸트의 이 첫번째 글은 출판상으로는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27]

1754년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와 학문적인 언론인으로서 일했다. 1년 뒤, 『자연사와 천체 이론』[28]을 썼으며, 1755년 4월 17일에 자신의 석사논문인 「불에 관하여」를 제출하고 5월 13일에 시험을 치렀다. 9월 27일에는 교수 자격 취득 논문인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명제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내놓았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강사 자격을 얻고, 동양학 교수인 게오르크 다비드 키프케 교수 저택에서 첫 강의를 했다.

1756년 4월 8일, 서른두번째 생일을 두 주 남겨놓고 칸트는 "가장 위대하고 막강한 왕"인 프리드리히 2세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벌써 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공석으로 있는 자리에 교수직 신청을 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느 누구보다도 자연철학에 대한 칸트의 관심을 일깨우고 지도했던 스승 마르틴 크누츠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1751년 노환으로 죽자 공석으로 남은 것이었다. 이제 그의 제자는 그 자리로 들어가기에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정교수 자리는 아니었고, 보수도 신통치 않으면서 강의를 많이 해야 하는 특별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 이 직위는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쾨니히스베르크의 사강사라는 가시밭길에서 벗어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베를린에 있는 대학 당국은 경비 절약을 이유로 교수직을 채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칸트는 교수가 되기 전까지, 강사의 신분으로 강단이라는 모루 뒤에 앉아 매일같이 "같은 강의의 무거운 망치를 균일한 박자로" 내려치며 1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29] [30] [31]

2.3. 원했던 교수직, 원하지 않았던 과목

1770년 3월 16일, 마흔여섯 살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강사 생활을 하고 있던 칸트는 비밀 국가예산 장관이자 육군 장관인 폰 퓌어스트 운트 쿠퍼베르크 남작에게 긴박한 편지 한 통을 쓴다. 그는 이 편지를 통해 막 공석이 된 교수직에 응모한다. 그러니까 하루 전날, 최고재판소의 사제이자 수학 교수인 랑한젠이 지루한 병환 끝에 죽은 것이다. 이미 칸트는 1756년에도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으나 허사였고, 또 2년 뒤의 교수 지원에서도 외면당했다. 칸트가 처한 상황에는 극적인 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대학 강사로서의 보수는 한푼도 받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데다 수강생들이 대개 강의료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궁핍한 삶에 익숙해 있었며, 어쨌든 사강사로서 칸트는 빚을 지지 않고도 서적상인 칸터의 집에 있는 두 방의 방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 50년대 말부터는 전직 군인 출신인 마르틴 람페[32]를 하인으로 고용하고 식당에서 매일같이 좋은 식사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었고, 1766년 2월부터는 왕립 궁정도서관의 부사서로서 약간의 돈도 벌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 연구를 위해 책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기쁨까지 덤으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칸트는 교수단의 정회원으로서가 아니라 무보수의 사강사로서 벌써 15년 동안 활동한 셈이었다. 그동안 칸트는 기진맥진할 때까지 주당 평균 20시간씩 가르쳤고, 또 부지런히 저술 활동을 해왔다. 그는 이제 젊은 학창시절 눈앞에 그렸던 학자 생활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졌다.[33] [34]

그런데 칸트의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가 단 하나 있었다. 칸트는 세계에 대한 이론적 지식 체계에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에 윤리 교수직을 맡기를 바라고 있었는데,[35] 공석이 된 자리가 수학 교수 자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겸손하게 장관에게 일종의 교환 제안을 했다. 사람들이 그 공석의 교수직을 고인의 사위인 크리스티아니에게 맡기면 어떨까? 카를 안드레아스 크리스티아니는 윤리 교수이기는 하지만, 훌륭한 수학 전문가이기도 하다. 칸트 자신에게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해결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칸트)는 윤리 교수직을 지원하면서, 귀하(폰 튀어스트 장관)께서 내려주실 존귀한 서언을 겸손히 희망하며 내 본래의 숙명을 따를 생각"이기 때문이다.[36]

하지만 윤리 교수직 임명에서 칸트는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는 "우리는 임마누엘 칸트 선생을 ...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정교수로 그지없이 자비롭게 임명하고 받아들였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칸트는 마침내 교수가 되었지만 이는 절반의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칸트가 자신의 삶에서 바랐던 행복, 즉 윤리와 도덕이라는 실천적 분야에서 자신의 숙명을 따를 수 있는 행복은 왕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봉쇄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이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칸트는 10년을 더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 책, 즉 『순수이성비판』의 탄생은 의무감에서 비롯된 곤경의 해결책인 셈이다.[37]

원하지 않았던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강의와 반복 수업을 수행하며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교수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특히 청중들에게 형이상학ㆍ자연지리학ㆍ인간학에 대한 그의 강의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의 강의는 "유머와 분위기로 흥을 더했다." 1762년부터 1764년까지 칸트 밑에서 공부한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가 이러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의 "열려 있으면서 사색으로 다듬어진 이마는 깨뜨릴 수 없는 명랑함과 즐거움의 자리였고, 가장 풍부한 사유를 지닌 대화는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으며, 유머와 즐거운 분위기는 그의 뜻대로 되었다." 그의 강의는 더욱 유명해져서, 학생들이 필사한 칸트의 강의록은 학계에 널리 퍼졌다. 그렇지만 칸트는 이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1778년 8월 28일에 헤르츠에게 전했듯이, 특히 자신의 형이상학 강의와 관련하여 "강의록을 통해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38] [39]

칸트는 자신의 임명을 처음부터 미심쩍게 평했던 교수 동료들과는 거의 사교적인 접촉을 갖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사소한 경쟁과 술책에 관계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또한 그들의 고지식한 "학자적 자만과 현학"에 대해서도 기꺼이 비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괴팍한 외톨이인 것은 아니었다. 칸트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잡담하고 농담하며 논쟁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칸트가 "식탁 모임"이라고 부르는 그 모임에는 학자와 지성인 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가정주부들도 있었다. 이들 모두는 칸트와 함께한 모임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칸트는 장난꾸러기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생동감 넘치는 큰 웃음을 재치있게 이끌어내곤 했다. 식사를 한 뒤 칸트는 대개 네덜란드 나무숲이나 나중에 "철학자의 길"로 알려진 강변길을 걸었다. 신선한 공기와 자유로운 운동 속에서 좋은 생각이 생긴다는 것이 칸트의 지론이었다.[40] [41] [42]

2.4. 10년의 연구 결과, 『순수이성비판』

10년 간의 연구 결과인 그 원고는 1780년 가을에야 완성되었다. 칸트는 최근 칸터[43]의 책방을 넘겨받았던 고트리프 렙레히트 하르퉁에게 그것을 출판해달라며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출판을 거절했다. 이러한 추상적인 형이상학 논문으로는 돈이 벌리기는커녕 잃기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칸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때 하만[44]이 칸트를 도우러 왔다. 그는 리가의 출판업자이자 서적상인 하르트크노흐와의 접촉을 중재했는데, 이 사람은 원고에 흥미를 보이면서 심지어 논문의 대가로 칸트에게 약간의 사례까지 지불하겠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오랫동안 미루어진 그 일은 이렇게 해서 마침내 세상에 나올 준비를 마쳤다. 1781년 5월, 라이프치히의 부활절 장에서 리가의 출판인 요한 프리드리히 하르트크노흐에 의해 쾨니히스베르크 교수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45]

그러나 판매 부수는 매우 미미했다. 아무도 칸트의 생각을 좇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친한 친구들마저도 머리를 흔들 정도였다. 친구들이 보기에는 『순수이성비판』은 신비스럽고 암호 같은 것이었다. 히펠은 너무 어려워서 이 책에서 무언가를 찾아낸다고 어떤 도움이 되겠냐고 반문했고, 멘델스존은 견본만 보았는데도 가슴을 쥐며 매우 답답해서 기운이 빠질 지경이라고 말했다. 블뢰머는 이 책을 읽으면 전제되어야 할 단어가 너무 많아서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모르는 단어를 헤아리는 손가락을 모두 접게 된다고 불평했다. 그나마 칸트의 생각을 제대로 검토한 하만조차도 세번째 읽는데 막혔다면서 네번째 읽기에서는 이해되기를 소망할 정도였다. 결국 하만이 나서서 칸트에게 철학의 문외한도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요약본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1783년 초, 칸트는 리가에 있는 하르트크노흐의 집에서 『학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서문』, 즉 『프롤레고메나』를 출판한다. 이 책에서 그는 더 광범위한 독자들을 위해 『순수이성비판』의 핵심 생각들과 그 철학적 배경을 되도록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46] [47] [48]

뉴턴은 어떤 일이나 사건에 관계없이 스스로 한결같이 흐르는 절대적ㆍ현실적 시간을 가정했고, 또 움직이지 않고 항상 똑같이 머물며 마찬가지로 "자신 밖의 어떤 것과도 관계 없이 존재하는" 절대적ㆍ현실적 공간을 가정한다. 칸트는 이와 반대로 뉴턴의 절대주의를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공간과 시간을 감성의 순수 형식 조건으로 선언했다. 그는 시공을 주관화하고 그것들의 객관적 성격을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의 대상을 감성적으로 직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형식 조건들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이제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형식 조건을 재구성하는 일을 순수 수학의 과제로 선언했다.[49]

즉,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현상에 우리 스스로가 질서와 규칙성을 부여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것들을 발견할 수조차 없다면, 우리 심성의 본성이 그것들을 처음부터 거기에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오성 자체가 자연법칙의 원천이다." "오성은 자신의 법칙을 자연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그것을 규정한다." 그것이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을 들어 말했던 칸트의 대담한 혁명이다.[50]

하지만 그를 도덕적으로 자극했던 실천철학의 세 가지 큰 문제들은 이 길 위에서 답변될 수 없었다. 인간 본래의 것을 형성하는 불멸의 영혼이 있는가? 자연법칙으로 결정된 세계 속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는 어떠한가? 그리고 신의 현존은 시령자의 상상 속에서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환상 이상인가?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이 이 문제를 자연철학적 지식의 영역 밖으로 경계지웠다고 해서 그것의 매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은 또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자기 자신의 경계 설정을 명시한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 실천적인 것만이 관계해야 할"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순수이성비판』의 말미에서 이야기하는 "우리 이성의 순수한 사용의 최후 목적"을 칸트는 도덕형이상학과 실천이성의 비판에서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음에 주어질 그의 큰 과제일 것이다.[51]

2.5. 수요 모임의 계몽주의자

1783년 베를린에서 계몽을 위한 투쟁 단체인, 은밀한 "수요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생각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 그리고 독자적 사유와 시민정치적 자유를 향한 적극적인 참여, 더불어 이것들에 결합된 공공성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어두운 감정 철학, 비이성의 감옥, 종교적 독단, 교회의 강요, 광신과 미신 등에 대항했다. "그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규칙적으로 개인 주택에서 모임을 가졌고, 우정 어린 생각들을 교류하면서 서로서로 정신을 계몽했으며, 이를 통해 여러 종류의 개념 자체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이 모임의 결과는 『베를린 월간지』에 실렸는데, 칸트는 1796년까지 총 15편의 글을 기고했다.[52] [53]

이러한 계획의 수립과 더불어 계몽의 동지들은 동시에 그들의 반대자에 대한 전선을 구축했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전선은 자신들의 감정에 지배받고 자신의 갈채를 신적인 계시로 간주하는 모든 종류의 광신자들을 향해 구축되었다. 이 광신자들은 모든 사유의 자유를 반대하는 자, 특히 문화ㆍ정치적인 반대자로 간주되어 논쟁적으로 반박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직상 그들의 고유한 방식 때문에도 위협을 받고 있던 예수회와 비밀 구교를 향해서도 계몽 단체의 반박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토론과 강연 그리고 제한적으로 돌려보던 문서 등은 엄격하게 비밀로 유지되었다.[54]

『베를린 월간지』에서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토론이 시작된 직접적인 계기는 전통적인 교회결혼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었다. 교회에서 치르는 혼례성사는 번잡한 허례허식이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결혼은 신성하므로 교회의 축복을 받아야 하고, 이를 통해 풍기문란과 도덕적 타락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똑같이 '계몽'의 이름으로 제기된 것이다. 이에 쵤너는 '계몽'의 이름으로 야기되는 혼란을 비판하면서 무엇보다 계몽에 대한 분명한 개념 규정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계몽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이 문제에 답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쵤너의 물음에 대해 칸트는 몇 개월 뒤 이렇게 응수했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이 지도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이러한 미성숙이 지성의 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는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가 없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Sapere aude!)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좌우명이다."[55]

즉,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고 "언제나 스스로 생각한다는 원칙이 계몽이다."[56]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이란, 사람들에게 공론장에서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독서계의 모든 공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학자의 입장으로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장교가 직무수행 중에 상관의 명령의 합당함이나 유익함에 관해 공공연히 따지려 든다면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지만 학자의 입장에서 병역 의무의 결함에 대해 논평하고 독자층에게 판단을 호소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금지되어선 안 될 것이라는 얘기다.[57] 여기서 칸트는 심지어 종교나 군주라도 공론장에서의 사상의 자유만큼은 억제해선 안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2.6. 순수한 도덕을 찾아서

칸트는 1762년에 루소의 저술을 읽기 시작했다. 『에밀 또는 교육에 관하여』를 읽기 시작했을 때, 그는 몸이 얼어붙어 며칠 동안 규칙적인 산책을 하지 못했다. 그는 루소의 자연적인 인간상, 즉 가면을 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교육된 인간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청년 시절의 칸트는 뉴턴으로부터 자연과학적인 세계 관찰의 원칙들을 진지하게 수용했다. 그는 『자연사와 천체 이론』에서 그 첫번째 정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제 루소로부터 그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루소의 역설은 인간 영혼 속에 감추어진 어떤 흔적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1765년에 칸트는 전해에 출판된 『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의 여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 "오직 이것(물리적 세계 인식)만이 인간의 명예를 세울 수 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지의 천민들을 멸시했다."[58]

1770년 무렵이 되자, 칸트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즉, 자신의 "도덕형이상학"이 "시초의 근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태도나 감정에 대한 가능한 고찰 영역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자신의 도덕형이상학이 즐겁고 교훈적인 발견에만 제한되어서는 안 되며, 개별적인 주관의 의욕 혹은 행위의 주관적 원리에 불과한 준칙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도덕형이상학자로서 칸트는 대단히 명확하고 순수하게 "도덕법칙", 즉 도덕성 일반의 최고 원리를 생각했다. 이 원리 안에서 경험적인 현상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59]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완성하기까지는 10년 이상이 연기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1770년 3월 31일에 칸트는 내각의 명에 따라 논리학 및 형이상학 교수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도덕적 전문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를 기다린 것은 다른 과제들이었다. 10년 동안 그는 『순수이성비판』에 몰두했으며, 실천철학은 여기에서 단지 암시로만 드러났을 뿐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경험의 형이상학과 변증법적인 가상의 논리학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순수 이론이성과의 대결이 종결된 뒤에야 칸트는 비로소 실천이성, 즉 자신의 본래 사명에 전진할 수 있었다.[60]

1785년 4월 8일, 드디어 그의 『도덕형이상학정초』가 세상에 나타났다. 도덕적 견지에서 실제 "선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칸트는 문제시되는 것이 세계의 사태가 아니라 주체의 능력임을 전제한다. 윤리적 견지에서 볼 때, 도덕적 의식 일반에 대해 능력 있는 주체만이 선하거나 악할 수 있다. 그런데 선의 근원이 되는 주체적 혹은 주관적 능력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의 정신적 능력인가? 칸트는 아니라고 답한다. 지능, 오성, 재치, 또는 학문적 지식은 해롭거나 악하게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질인가? 칸트는 이것 역시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는 용기와 인내 그리고 감탄의 기질을 가지고 선하게 행동할 수 있지만, 악하게도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운인가? 이것 또한 아니다. 권력이나 재산이나 인정 또는 건강 같은 행운을 통해 어떠한 일이 좋게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는 어떠한 도덕적 혹은 인륜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격인가?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존재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인격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격이 그 자체 스스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아 있는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정초』는 단순한 규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 밖에서도, 어떤 제한 없이 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 뿐이다." 규정된 또는 보편적으로 수행된 법칙, 행복감, 공리적인 유용성, 외적인 자산들과 내적인 재질들, 이 모든 것은 결코 도덕성의 최상의 원리에 구성적인 것들이 아니다. 오로지 "의지"만이 윤리적 가치를 지닌다. 칸트는 도덕성의 합리적 근거를 "신적인 전능한 의지"에서 끌어내는 대신 전적으로 인간 의지의 자유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칸트는 1788년에 쓴 『실천이성비판』의 종결부에서도 "내 안의 도덕법칙"을 그 어떤 다른 근거에서 칭송하지 않는다.[61] [62]

그러나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정초』는 경험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을 더 이상 결합할 수 없는 세계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도덕의 영역은 이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칸트의 도덕성의 이념에 대해 가장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이의이다. 물론, 칸트도 윤리학 역시 경험적 부분을 지닌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한다. 이것은 나중에 "실천적 인간학"으로 특징지어지며, 여기서는 감성, 쾌와 불쾌의 감정, 본능과 욕망, 그리고 한 인물의 성격도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칸트는 경험에서 추론된 것이 아닌 이성에서 추론되는 순수한 도덕 철학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했다. 그것이 단지 도덕형이상학일 뿐이라해도, 도덕적 법칙을 순수하고 참된 본질 속에서 추구하려는 시도는 도덕성이 퇴색한 시대에 특히 가치 있는 일로 여겨졌다.[63] [64]

2.7. 검열에 맞서

프로이센의 새로운 군주가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1788년 7월 3일, 계몽군주국의 장관인 프라이헤어 폰 제드리츠를 파면하고, 그 자리에 신학자인 요한 크리스토프 뵐너를 임명했다. 그리고는 그를 "성직부의 수장"이라고 명명했다. 이에 따라 1788년 12월 19일에 프로이센 국가의 새 검열 선포가 시행되었다. 국가 검열을 통해 왕과 성직자단에 의해 선포된 종교와 국가의 원칙들에 위배되는 일은 제한을 받았다. 출판의 자유가 철저하게 제한되었다.[65]

1789년 6월 17일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검열은 더욱 엄격해졌다. 내각의 규정에 따라 1791년 10월 19일부터 월간지와 계간지 그리고 여타의 시대지들도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베를린 월간지』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이 무렵 칸트는 『베를린 월간지』에 종교철학에 관한 논문을 연속적으로 투고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칸트는 선한 삶의 활동적인 심성은 종교적 확신에 대해 우위를 지닌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검열관들의 심기에 거슬렸던 것이다.[66] 『인간의 지배에 대한 선한 원리와 악한 원리의 대립에 대하여』는 출판 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러한 긴장된 상황에서 칸트는 『베를린 월간지』에 기고하고자 계획했던, 네 편의 원고를 독자적인 책으로 출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신학부가 그러한 종류의 철학부 논문을 검열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피해 그는 우회로로 그 논문을 예나 대학의 철학부에 제출했다. 예나 대학의 철학부는 프로이센 밖에서 그 논문을 출판하도록 승인했고, 이렇게 해서 1793년 부활절에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가 출간되었다.[67]

칸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적 자유를 달성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자유를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토지 소유자의 농노는 아직 자유를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또한 일반 사람들은 아직 종교의 자유를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정 뒤에서는, 자유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먼저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성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의 시도는 조야하며,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명령과 배려 아래에 있는 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한 상황을 수반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시도가 아닌 다른 이성을 통해서 성숙할 방법은 없다."[68] 국가의 검열 조처가 칸트의 어조를 더욱 날카롭게 한 것이 분명했다. 법적이고 종교적인 권위자의 절대명령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자유에 대한 신조는 더욱 급진화되었다. 국가에서나 집에서나 혹은 교회에서나 항상 되풀이되는 지배적인 관료적 선언에 반기를 들며 칸트는 이의를 제기했다. 자유는 칸트에게 일생 동안의 소망이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 열광했으며 이 소망과 정치적인 시대사를 결합시켰다. 칸트는 자유와 평등 및 자주에 대한 자신의 이념을 자유ㆍ평등ㆍ박애라는 혁명의 외침 속에서 다시금 인식했다. 그는 이제 세계사적인 전망으로 이행가능하도록 자신의 비판철학을 정치화했다. 많은 친지와 친구들은 그의 이러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69] [70]

그러나 그 책이 1년 동안 대중들의 관심을 받게 되자 칸트는 더 이상 검열관들을 피할 수 없었다. 1794년 10월 1일 내각은 "왕의 칙령"을 칸트에게 선포했고, 이것은 칸트에게 10월 12일에 전달되었다. "자비로운 왕의 특별 명령에 따라" 뵐너는 칸트가 앞으로는 더 이상 종교적인 사태에서 책임질 일을 하지 말 것을 통보했다. 왕과 뵐너는 이미 오래전부터 불만을 가지고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성서와 기독교의 주된 교리를 왜곡하고 폄하하는 데 잘못 사용"하는가를 관찰했다. 그들이 보기에 칸트의 저작은 무책임한 짓이고, "우리와 당신에게 잘 알려진 조국의 의도"에 반하는 행동이다. 이러한 경고 뒤에 노골적인 위협이 뒤따랐다. "우리는 존경스러운 당신의 가장 확신에 찬 책임을 요구하고, 우리의 커다란 불쾌감을 모면하기를 당신에게 기대합니다. 당신은 앞으로 그와 같은 일에 책임질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당신의 의무에 합당하게 당신의 능력과 재질을 우리 조국의 계획이 갈수록 더 많이 실현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당신은 계속된 반항으로 확실히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71]

왕의 칙령이 떨어진 이후로 칸트는 종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간행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억눌렀던 자신의 자유를 정치적 논평을 함으로써 풀어냈다. 그는 이제 국가의 질서와 존귀한 법에 직접 손대기 시작했다. 1795년 4월 5일, 바젤에서 맺어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단독 강화에 영감을 얻어, 그는 영구평화를 향한 그의 철학적인 기획을 써 내려갔다. 『영구평화론』은 그해 말엽에 모습을 드러냈고, 출판상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72]

그리고 마침내 1797년 11월 10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죽고, 새롭게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1798년 3월 뵐너 장관을 면직했다. 새로운 왕은 계몽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았다. 이로써 칸트는 다시금 교회와 국가 그리고 종교와 법에 대해 자신의 비판적인 태도를 자유롭고 공공연하게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빌헬름 3세의 새롭게 계몽된 정부에 감사를 표했다.[73]

2.8. 말년

일생을 두고 보면, 칸트는 심한 병에는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단 하루도 병으로 인해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 점에 대해 칸트는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처방한 섭생의 근본 원칙을 따른 자신의 의지의 효과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병을 낫기 위한 치료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천적이고 철학적인 기술이었으며, 생명력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뿐 아니라 건강상의 관점에서 가능한 한 좋게 그리고 길게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74]

칸트는 물론 허약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삶의 나머지 생애 동안 그를 생산적이도록 만드는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졌다. 오랜 시간 동안 확고한 습관이 된 바 같이, 하인 람페가 매일 아침 5시 15분전에 깨우고 주인이 일어날 때까지 침실에서 기다린다. 그는 옷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비단 띠를 한 노란색의 침실가운을 걸쳤고 머리에는 나이트캡을 썼는데, 삼각형의 작은 모자를 그 위에 고정시켰다. 그런 후에 연구하는 방으로 가서 두 잔의 온화한 꽃잎 차를 마시고, 점토로 된 파이프에 담배 한 대를 핀다. 다섯 시 정각에 그는 책상에 앉는다. 이제 그는 오전 내내 연구할 시간을 갖는다.[75]

칸트는 분명 약하게 태어났다. 그런데도 이토록 장수한 자신의 건강을 그는 자랑스러워 했다.[76] 그러나 40년을 교육에 종사하며 통틀어 268개의 연속강의를 했었고 1796년 7월 23일 마지막으로 강단아래에 서 있는 그의 몸은 더 이상 강의할 상황에 놓여 있지 않다. 노령의 그는 약해진 몸 때문에 넘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었으며, 몸이 가볍기 때문에 심하게 넘어지지 않았다고 익살을 떨기도 했다. 또한 피로감 때문에 의자에서 잠드는 횟수가 늘어났다. 의자 밑으로 굴러 떨어져 가끔식 그런 채로 누워 있기도 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누군가가 도와주러 올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아침에 책을 읽을 때나 글을 쓸 때면 머리를 가누지 못해 촛불 아래로 머리가 내려가 때때로 "무명으로 된 나이트캡에 불이 붙어 머리위에 환한 불꽃이 타올랐던"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 않고 맨손으로 나이트캡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불을 껐다.[77]

1803년 10월 8일에 칸트는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예사롭지 않게 아팠다. 그의 아버지처럼 뇌졸중이 일어났던 것이다. 물론 그는 다시 회복되었으나, 그러한 타격은 그를 점점 쇠약하게 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고 거의 무엇인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을 더 이상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하고 침착했으며 평온해 보였다. 그러던 1804년 2월 12일 밤에 그는 의식은 있었지만 거의 마비된 듯 보였기 때문에, 말년에 그를 따르며 수발을 도와주던 제자 바지안스키[78]가 그의 곁을 지켰다. 새벽 1시경에 칸트가 목마르다는 표정을 짓자, 바지안스키는 그에게 포도주와 물을 섞어 조금 달게 만든 음료를 마시도록 갖다 주었다. 조금 기운을 돋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맛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에겐 충분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삶과 노고를 돌이켜보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물론 불명료하게 들리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게끔, "그것으로 좋다 (Es ist gut)" 라고 속삭였다. 밤이 지나가고 해가 떠올랐을 때 칸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11시였다.[79]

장례식 날 쾨니히스베르크 시 전체가 휴무에 들어가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수천 명이 운구 행렬의 뒤를 따르고 시내의 모든 교회가 같은 시간에 조종을 울리는 등 위대한 철학자의 사망을 애도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이 마련한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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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뒷편의 칸트의 무덤. (우) 기둥 사이로 보이는 칸트의 무덤.

3. 사상

칸트의 사상 체계는 흔히 크게 세 갈래로 나눠진다:
  • 인식론: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윤리학: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종교철학: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이 중 첫째 질문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첫째 질문은 자신이 문제삼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는 어디까지 알 수 있으며, 또한 어떤 것은 알 수 없는지를 논의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순수 이성 비판』은 첫째 질문을 본격적으로 논의하면서, 인간 이성의 능력이 지닌 범위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적극적으로 검토한다. 이 점에서 『순수 이성 비판』은 인간의 인식과 앎에 대한 논의를 첫째 질문을 통해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이성주의(합리주의) 철학의 전통에서 이성은 그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채, 신, 영혼불멸, 자유와 같은 무제약자들을 함부로 추구했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과 같은 무제약자들은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는 초감성적인 대상들로, 유한한 인간 이성은 자신의 한계로 인해 결코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는 오직 자연 인과성의 지배를 받는 감성적인 경험적 대상들밖에 없으며, 이러한 범위를 넘어서서 초감성적인 대상들을 인식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독단적인dogmatisch 것일 수밖에 없다.

둘째 질문인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는 도덕적 물음으로, 『도덕형이상학 정초』와 『실천 이성 비판』에서 다루어진다. 둘째 물음에 대한 답변, 즉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결국 도덕적 행동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도덕적 행동은 무엇인가? 바로 도덕법칙에 따르고자 하는 행위 원리를 받아들여 행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칸트는 『도덕형이상학 정초』와 『실천 이성 비판』 전반부 「순수 실천이성의 분석론」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물음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는 칸트의 여러 저서에서 복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칸트의 저서에서 이 셋째 물음이 최초로 등장한 저서는 『순수 이성 비판』으로,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의 후반부인 「방법론」 중에서도 「순수 실천이성의 규준」 장에서 이 물음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80] 『순수 이성 비판』에 따르면, 우리가 둘째 물음에 따라 도덕성을 확보하는 일은 우리가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충분히 도덕적 행위 원리를 받아들여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가지게 된다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도덕성에 상응하는 정도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이 행복이 우리에게 실제로 주어진다고 보지 않고, 희망의 대상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칸트는 전통적인 행복주의 윤리학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전통적인 행복주의 윤리학은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될 경우 현세의 삶에서 도덕적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행복주의와는 달리 칸트는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감성계에서는 결코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 도출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산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지 행복해도 좋을 자격, 그리고 그 자격에 행복이 따라오리라는 희망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칸트에 따르면,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은 결코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지만, 행복의 분배에 개입하는 전능한 신을 가정한다면 각자의 도덕성에 상응하는 정도만큼 그 행복을 희망할 수 있게 되므로, 이러한 도덕에 상응하는 행복이 보장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신의 현존을 요청해야만 한다. 이 점에서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은 신의 현존을 요청하는 요청이론Postulatslehre으로 이행하게 되며, 이는 칸트의 고유한 종교철학 이론인 도덕신학Moralstheologie을 구성하는 주요한 체계가 된다. 그러므로 셋째 물음은 종교적 물음과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제시된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은 결국 행복할 자격과 행복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최고선이라는 도덕적 이상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물음은 최고선의 문제를 다룬 여러 저서들에서 간접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실천 이성 비판』의 후반부인 「변증론」에서는 영혼불멸과 신의 현존의 요청을 통해 최고선의 실현에 대한 희망으로 나타나며,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는 근본악의 문제와 그 원인인 악의 원리에 대항하는 윤리적 공동체구현 내지는 최고선에 대한 희망으로, 또 『판단력비판』에서는 자연과 자유의 통일을 통해 이 지상에서 실현될 수 있을 자연의 궁극목적이자 목적들의 나라인 최고선에 대한 희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3.1. 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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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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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미학[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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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정치철학, 사회철학

칸트 말년의 대표작인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와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 이 두 책을 묶어 <윤리형이상학> 이라 부르는데 [82] 이 책에 수록된 제1편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에서 칸트는 정치철학(또는 법철학)과 사회철학을 다룬다.

4. 업적

근대부터 현재까지에 이르는 철학 연구가 칸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철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공리주의에서 후기 칸트학파의 사상에 이르는 혁신과 밀접하게 연관된 채로 철학과 사회과학, 인문학 분야 모두에서 유지되었다.

경험론[83]합리론[84]이 치고받고 싸우던 18세기 유럽 철학계를 평정한 거인. 실제로 칸트 이전 세대에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구분이 없었다. 같은 경험주의론자인 여러 영국 철학자조차 자신들이 같은 학파에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을 플라톤 학파 혹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라고 지칭하였다.

이러한 학파의 구분은 칸트 이후, 정확히 말해서는 칸트에 대한 연구가 극에 달하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에 와서야 정립되었다. 바꿔 말하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 하나로 17-18세기 존재하던 모든 영국, 대륙철학자들을 단 2개의 학파로 양립시키고 그들이 대립하던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한 후 이를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풀어낸 대단한 인물. 근대철학은 칸트 전과 후로 나뉜다는 얘기나 칸트를 모든 강들이 흘러 들었다가 다시 갈라져 나가는 호수로 비유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의미의 윤리도덕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도 칸트에서부터 시작됐다.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론적 윤리란 무엇이며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체계적인 인식론과 실천 이성 구분을 통해 그 구조를 펼쳐보였다. 칸트가 인식론뿐만 아니라 근대 윤리학의 시작을 알렸다고 봐도 될 듯. 게다가 판단력 비판을 통해 인간의 미학 인식까지 구분과 과정을 설명 시도했다. 칸트가 인류 지식 세계에 공헌한 바는 이렇듯 어마어마하다. 저명한 철학자 R.샤하트는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을 불완전하게 이해해도 현대 철학 이해에 큰 지장은 없지만, 칸트를 불완전하게 이해하면 현대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 라고 말했을 정도.

그 스스로 "데이비드 흄의 책을 읽고 미망에서 깨어났다"고 말하기도 했다.[85] 자칫 어렵게 들리는 이 말은 그냥 흄과 칸트 모두 오직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범위 내로 철학의 탐구 범위를 좁히자는 데에 동의한다는 말이고, 이 점에서 그는 경험론자와 닮았다. 그래서 칸트의 이 고백은 "경험적인 것, 혹은 수학적인 것이 아닌 모든 책은 불태워 버리라"는 흄의 말과 상통한다. (기존의 형이상학이 완전히 쓸모없다는 데에서 칸트는 흄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래서 현대 영미형이상학에서 흄은 형이상학에 대한 회의주의자로 자주 다루어지지만 칸트는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이와 같은 경험적인 범위 내로 철학의 탐구 범위를 좁히면서도 흄의 탐구 방식을 반드시 따라가지는 않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칸트는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바로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할 원칙이 무엇일지를 탐구했다. 흄의 경험론은 모든 경험이 공유하는 어떤 일반적인 성질, 이를테면 어떤 대상이든지 그것에 대한 나의 관념(idea)은 나의 인상(impression)에서 기인한다는 것에 주목하는 반면, 칸트는 모든 경험이 가져야만 할 어떤 형식에 주목한다. 이처럼 그는 경험론적인 틀 내에서 합리론적인 정신을 가지고 세계를 탐구하였다고 볼 수 있기에 굳이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경험론과 합리론자의 종합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흄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칸트의 대응에 동의했을지는 알 길이 없다. 칸트는 흄을 알았지만 흄은 칸트를 몰랐는데 흄이 세상을 떠났을 때가 1776년으로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려면 5년이 더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5. 영향

이성이 무엇인지 보이려고 자연은 칸트를 낳았다.
프리드리히 카울바흐 (Friedrich Kaulbach, 1912~1992)
독일의 칸트 연구자인 오트프리트 회페는 『임마누엘 칸트』에서 칸트의 영향을 다음 네 가지로 나누었다.
  1. 독일 관념론: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로 대표된다. 피히테는 칸트의 철학을 칭송하며, 자신의 철학을 칸트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를 더욱 보완시키는 철학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말년의 칸트 본인은 이에 대하여 자신의 철학은 그 자체로 완성된 체계라고 반박하였다. 이후 셸링과 횔덜린(휘페리온 저자)이 칸트의 '주관적' 관념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다소 낭만주의적인 관념론을 전개[86]하였고, 이후 셸링과 횔덜린의 친구였던 헤겔이 이들을 다시 비판하며 이른바 '객관적' 관념론을 주장하게 된다.
  2. 신칸트주의: 1870년부터 1920년까지 약 반세기 동안 유럽의 강단철학을 지배한 사조이다. 에른스트 카시러, 헤르만 코헨, 하인리히 리케르트 등이 대표적이다. 주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주목해 과학주의적 철학을 전개하였다.
  3. 현상학과 실존주의: 에드문트 후설, 막스 셸러, 칼 야스퍼스, 마르틴 하이데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주로 칸트가 주장한 '초월성(transzendetal)' 개념을 요리조리 재해석해서 자신들 고유의 사상에 도입하는 방식으로 칸트를 계승하였다.
  4. 20세기 중반 이후: 영미권에서는 스트로슨, 셀라스 등의 분석철학 계열과 또 다시 이들을 비판한 로티가 칸트를 계승하거나 비판한 학자들이다. 또한 존 롤스와 같은 영미권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은 칸트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 또한 롤스와 함께 칸트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가장 저명한 철학자로 뽑힌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계몽주의의 정점인 칸트에 우호적일 리가 없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 같은 텍스트에서 이질성, 다원성 등의 키워드를 뽑아내기도 했다. 가령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칸트 미학의 숭고를 자신의 이질성의 철학을 옹호하는 데 활용한다.

한국에서는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철학과 = 칸트학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시절 철학과 교수들은 20%의 고대 그리스 철학과 50%의 칸트철학, 30%의 기타를 공부했고 학생들은 99%의 마르크스주의[87]와 1%의 기타를 공부했다는 농담도 있다. 영미 철학, 프랑스 철학의 균형잡기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21세기 이후에도 한국 철학계에서 가장 깊게 연구되는 인물은 여전히 칸트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보통 철학과 학생들이 넘어야 하는 가장 큰 벽으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칸트.

대학교뿐만 아니라 중고교 교육 과정에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현행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도 칸트는 매우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아무래도 고교 과정에서는 의무론적 윤리와 목적론적 윤리를 대립항으로 간주하여 교육 및 학습하고 있는데, 칸트는 전자의 대표 주자를 넘어서 거의 유일한 주자로 여겨질 정도이다.[88] 2007 개정 교육 과정 이후에는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 칸트 윤리학의 현대적 재해석 및 보완까지 교과서에 공식으로 다루고 있다. 로스라는 20세기 윤리학자가 내세운 조건부적 의무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칸트 윤리의 절대주의적 도덕 원리를 다소 유연한 형태로 변형한 것이다. 물론 중등 교육 수준에선 그 심오한 깊이를 모두 담을 수 없다. 실제 수능 기출문제에서도 도덕적 딜레마가 나올 때 결과 등에 상관하지 말고 실천 이성적 명령에 따르라는 선택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태도가 자신의 대원칙이 어떻게 구체적인 맥락에 적용될 수 있을지를 지속적으로 고민했던 칸트의 입장을 얼마나 대변하는지는 미지수이다. 생활과 윤리 교과서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등장하신다. 칸트의 의무론이 단독으로 맨 처음 등장하며, 환경윤리에서는 독특한 인간중심주의의 대표자로 나오고, 평화와 윤리에서는 국제연합에 기초한 영원한 평화 구상이 나온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응보주의 형벌론에 기초한 사형제 찬성론 및 예술에 있어서의 칸트식 도덕주의까지 다뤄진다. 결국 윤리와 사상이든 생활과 윤리든 윤리 계열 교과를 수능에서 택하는 사람들한테 칸트는 넘어야 할 산 중 하나인 셈. 칸트는 정언명법을 토대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도덕 법칙과 의무를 찾아내는 방법을 제시했다.

현대 철학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논쟁에서도 칸트는 곧잘 나온다. 비록 형이상학에서는 흄이 주로 다루어지지만 실천철학에서 그의 입장은 계속되는 떡밥이다. 당장 큼직한 주제만 들어 보더라도 결과주의 vs 비결과주의, 양립 불가능론 vs 양립 가능론, 공리주의 vs 자유주의, 경향성 vs 실천적 추론과정(혹은 이성)과 같은 모든 주제에서 우측의 입장들은 칸트의 영향을 받은 입장들이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데, 칸트가 『영원한 평화』라는 말년 저작에서 제시한 '세계 시민'이라는 정치적, 윤리적 주제의 선구자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미디어가 발달하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면서 한 나라의 윤리적 문제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 시민이라는 주제가 생겨났는데, 이게 나쁘게 말하면 쓸데없는 오지랖이다. 자기 나라의 문제도 다 해결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 하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 이미 윤리적인 문제를 한 나라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이랑 전혀 상관없는 위안부 문제를 미국 의회에서 다루는 데 왜 그리 큰 관심을 가지는지 생각해 보자.[89]

결국 이러한 윤리적 목소리가 독재 국가들이 맨날 하는 말처럼 내정 간섭이 아니라 정당한 윤리적 비판이 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현대 윤리학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칸트는 인터넷은커녕 유선 전신이 갓 발명되던 시기인 18세기에 이런 문제를 주목하고 현대적인 세계 시민의 개념을 처음으로 꺼낸다.[90] 그러면서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을 주장하면서 세계 시민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결국 현대에 세계 시민이라는 주제를 윤리학적으로 다룰 때 첫머리에 나오는 것이 칸트가 되었다.

또한 막스 베버의 사회학, 장 피아제의 심리학, 놈 촘스키의 언어학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사회, 행동 및 신체 과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칸트의 수학 및 인공적 사전 지식에 대한 연구는 또한 이론 물리학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지적 발달에 일찌감치 영향을 준 것으로 인용되었다. 칸트적 패러다임 전환의 철저함 때문에 그의 영향은 구체적으로 자신의 저작을 언급하거나 자신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상가들에게까지 미치게 됐다.

6. 논란

6.1. 인종차별주의

『물리적 지리학』(ed. by F. T. Rink)을 비롯한 여러 강의록에서 칸트는 뿌리 깊은 인종적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
아프리카의 흑인은 본래 유치함을 넘어설 만한 감정이라고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91]
흑백 두 인종 간의 정신적 능력(Gemüthsfähigkeiten)의 차이는 피부색의 차이보다도 더 큰 것처럼 보인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대단히 일찍 분별 있게 되었지만, 그들의 오성은 그 후에 같은 비율로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인간성은 백인 종족에서 가장 큰 완성 상태에 있다. 황색의 인도인들은 보다 떨어지는 재능을 가졌으며, 흑인(니그로)들은 더 낮고, 가장 낮은 종족은 아메리카 인종 중의 일부이다.
백인은 언제나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종족.
이 녀석이 머리부터 발까지 꽤 검다. 그가 말한 것이 멍청했다는 명백한 방증이다. [92]
이처럼 칸트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많이 남겼다. 시대 상황에 따른 편견이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칸트의 인종주의 사상은 단순한 편견을 넘어서서 인종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정교한 이론을 세우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93] 그의 이론을 요약하자면, 기후 조건에 따라 피부색이 다르기 때문에 백인, 황인, 흑인, 아메리칸의 네 가지 “인종”으로 구분할 수 있고, 이 중 오직 백인만이 진정으로 인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94] 유색인종은 선천적으로 이성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육을 받아도 백인만큼의 도덕적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95] 로버트 월드 서스먼은 그의 저서 『인종이라는 신화 (The Myth of Race)』에서 "현대 윤리학과 현대 인종학은 그 아버지가 같다"고 말한 바 있다.[96]

다만 이러한 칸트의 인종주의적 생각들은 『영구평화론』을 펴낸 1795년도 전후로 사라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이 책에서 모든 인종이 동등하게 계약에 서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책의 주석에서는 "끔직한 노예무역"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97] 칸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칸트가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인종 이론에 대해 점진적으로 문제의식을 느꼈고, 그래서 인종에 대한 이야기를 삼가게 되었던 것이라고 추론한다.[98]

7. 명언

내가 그것들을 더욱 자주,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항상 새롭고 더욱 높아지는 감탄과 경외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99]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100]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101]
너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대해서도, 너는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동하라.[102]
스스로를 벌레로 만드는 사람은 나중에 짓밟혀도 불평할 수 없다.[103]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104]
인류라는 구부러진 목재에서 아직 한번도 곧은 것이 만들어진 적은 없었다.[105]
영원한 평화는 공허한 이념이 아니라, 점차 해결되어 그 목표에 끊임없이 더 가까이 다가서는 하나의 과제이다.[106]
어떻게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107]
외래어는 가난이나 태만을 드러낸다.[108]
해야 하므로, 할 수 있다.[109]

8. 주요 저서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110]
Beobachtungen über das Gefühl des Schönen und Erhabenen
<colbgcolor=#fff,#1f2023> 1764년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년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111]
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1783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1784년
도덕(윤리)형이상학 정초[112]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13]
1785년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114]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1786년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년
판단력비판[115]
Kritik der Urteilskraft
1790년
단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16]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1793년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117]
Zum ewigen Frieden
1795년
도덕(윤리)형이상학[118]
Metaphysik der Sitten
1797년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119]
Anthropologie in pragmatischer Hinsicht
1798년
학부들의 다툼[120]
Der Streit der Fakultäten
1798년
교육학
Über Pädagogik
1803년

이 밖의 책들은 비판기 이전 저작[121], 비판기 저작[122], 서한집, 유작, 강의 등으로 분류되며, 모두 칸트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 칸트의 저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칸트전집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아카넷에서 나오고 있는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역본이며, 다른 전집은 한길사에서 출판중인 한국칸트학회의 역본이다. 백종현도 한국칸트학회의 회원[123]이기는 하나, 후술할 번역논쟁에 의하여 백종현 및 서울대 계열을 제외한 나머지 '칸트학회' 연구자들은 백종현의 번역어 표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체적인 칸트 번역전집을 출간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은 칸트전집 번역이 동시에 2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백종현의 아카넷 판본의 경우 직역에 가까운 일관성있는 한글번역을 추구하고, 칸트학회의 한길사 판본의 경우 축적된 연구를 토대로 가독성을 높히는 번역을 추구한다.[124]

2023년 기준, 백종현의 아카넷 판본과 칸트학회의 한길사 판본 모두 완간되지 않았다.[125] 한편, 이와는 별개로 칸트의 책 일부만 단권으로 번역하는 학자들도 많다. 특히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영원한 평화(영구평화론)'와 '계몽이란 무엇인가'는 자주 번역되어서 번역판본도 여러 개이다.

8.1. 한국어 번역 논쟁

칸트 철학서의 한국어 번역에 관한 논란은 20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쟁점으로는 다음과 같은 개념어들을 들 수 있다:
  • a priori: "a priori한 판단(Urteile)", "a priori한 인식(Erkenntnisse)" 같은 용법으로 쓰인다. "경험 이전 또는 그 참이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a priori)"이라는 의미. 즉 경험과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판단, 인식 등을 뜻하며, 칸트에 따르면 이는 오직 순수 지성(Verstand) 혹은 이성(Vernunft)에서 유래한 것이다 (IV 266). 수학이 대표적으로 a priori한 학제다.
  • transzendental: 칸트 철학의 핵심적인 떡밥이며, 칸트가 스스로의 철학을 "transzendental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 transzendent와는 명시적으로 구분된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칸트가 다음과 같이 비교적 명료한 정의를 제시한 바 있다.
[내 정의에 따르면] 용어 transzendental은 [...] 모든 경험을 넘어서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에 앞서되 (a priori) 오직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규정된 것일 뿐이다. 이들 개념이 경험을 넘어설 경우, 그런 쓰임은 transzendent한 것이라고 불리며, 이는 내재적인 것, 즉 경험으로 제한된 쓰임과 구분된다.[126][127]
『형이상학 서설』, IV 373, 저자 주 (역자 강조)

이처럼 위 개념들은 칸트 자신이 비교적 그 의미를 명료하게 제시한 것이며, 칸트 학계에서도 그 의미에 대한 이해 자체는 그리 이견이 없다. 다만 한국의 칸트 철학사 연구자들 간에는 이들 개념어를 어떻게 한국어로 번역할 것이냐에 관한 첨예한 의견 대립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이 논쟁의 배경과 맥락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128]토마스 아퀴나스 등으로 대표되는 중세 기독교 철학(스콜라 철학)으로부터 내려온 transzendent(al) 개념을 여타 독일 근대 철학자들과 칸트가 지들 멋대로(...) 재정의한 개념변천사[129]부터 훑고 오는 것이 이롭다. 아래는 이를 위해 참고할 만한 몇몇 논문들이다.
  • 김승욱, <칸트 선험철학의 스콜라적 수용의 맥락에서 인간의 초월 문제>(2021)
  • 김율, <중세 스콜라철학의 초월주(超越疇) 이론과 미>(2005)
  • 김창원[130], <볼프[131]의 '트란스첸덴탈' 개념>(2006)
  • 박진, <독일 관념론에 전해진 중세 스콜라철학의 유산>(2000)
  • (추가 바람, 저자 기준 가나다순)

좌우간 표현들에 대한 한국어 번역은 세 가지 정도의 판본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a priori transzendental transzendent[132]
최재희 역[133] 선천(적) 선험(적) 초험(적)
백종현 역 선험(적) 초월(적) 초험(적)
칸트학회 역 아프리오리(한) 선험(적) 초험(적)
※참고: 현대 일본 칸트학계 역[134][135][136] 아프리오리(한) 초월론(적) 초월(적)

참고로 이외 주요 경쟁역어를 포함하면 다음과 같다.

파일:국내칸트철학용어주요경쟁역어비교대조표최종.png

이러한 번역어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칸트의 의미 구분과 한국어 표현의 가짓수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칸트는 세 가지 다른 표현을 중요하게 사용한다. 위에 설명했듯이, 일단 칸트는 transzendental / transzendent라는 독일어 형태상 비슷해 보이는 용어를, transzendental은 경험 일반이 가능하게끔 해 주는 틀, 조건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기술 용어로 사용하는 한편, transzendent는 초월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구분한다. 여기에 더하여 또 이 둘과는 다시 구분되는, 칸트의 시대에는 경험 독립적으로 그 참이 보증된다는 의미로 쓰이는 a priori라는 라틴어 용어 역시 다른 의미를 가지고 곳곳에서 사용된다. 따라서 칸트가 의미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표현은 세 가지가 된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위의 세 표현들을 번역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선험/선천/초험/초월인데, 앞의 두 단어와 뒤의 두 단어가 형태상 유사하므로, 의미가 완전히 다른 세 표현을 위해서 우리가 딱 잘라서 쓸 수 있는 표현이 두 개인 상황이 된다. 따라서 의미상 필요한 표현은 세 가지이나 형태상 가능한 차이가 두 개가 되며, 이에 역자가 transzendental / transzendent 간의 차이에 주목하여 둘을 다른 형태를 가진 한글 용어를 사용하고자 할 때와 a priori와 transzendental 간의 차이에 방점을 두어 번역하고자 할 때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백종현의 번역은 a priori와 나머지 용어 간의 차이를 강조하여 번역한 것으로, 최재희 역은 transzendental과 transzendent 간의 차이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칸트학회의 경우는 a priori를 아예 원문 그대로 '아프리오리'로 표현함으로서, 한국어에는 사용하지 않는 음차 표현을 동원하여 고육지책으로나마 세 의미를 전부 나누어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각기 다른 번역 전통이 섞이는데, 일반적으로 'a priori'라는 용어는 칸트 이전의 근대철학에서는(데카르트/라이프니츠/흄 등) '선험'이라는 한국어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37] 반면 후설 하이데거 등의 독일 후기 철학에서는 transzendental을 선험 혹은 그 유사어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다. 즉 위에 나온 의미상의 논쟁을 제외하더라도 한국어 선험이라는 표현을 어디에 줄지에 대해서도 한국에 있는 학회들 간의 번역 전통이 이미 다르다는 것(...) 게다가 칸트는 근대의 완성자이자 독일 철학, 특히 독일어로 이루어지는 철학 전통의 (라이프니츠는 불어와 라틴어로 글을 썼으므로)시발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각자는 각자에게 편한 용어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다만 현재 가장 최근에 출간되었고 거의 모든 책이 번역되어 있는 판본은 백종현 본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영향이 강한 상태이다.

각 번역의 단점을 보자면, 백종현 역을 따를 경우, 초월적인 것이 우리의 안에 있는 인식의 틀을 연구하는 것이 된다는 점에서 다소 기이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는 점이 큰 단점으로 지적된다. 또한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선험'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후기 독일철학에서 사용되는 번역어와 일관적이지 못하게 된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최재희 역과 칸트학회 역은 '선험'의 사용에 있어 근대철학자들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번역어와 어긋난다는 단점이 있다. 특히 최재희 역은 '선천'이라는 표현을 a priori에 대응하였는데, 이는 원어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번역으로 여겨질 수 있다. 칸트학회의 역은 a priori를 음차로 아프리오리라고 남겨 두는 길을 선택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아프리오리한 종합 판단'이라는 한국어에서는 잘 보지 못하는 기이한 조어를 받아들여야 하게 된다.[138] (해당 표현은 다른 판본에서는 음차가 드러나지 않는, '선험적 종합 판단'(백종현), 혹은 '선천적 종합 판단'(최재희)로 번역된다.) 또한 최재희 역에는 또 다른 단점이 있는데[139], 그것은 대부분의 도서관에 있는 판본의 단어들이 (제목부터!)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최재희 역본이 출간된 박영사판은 2017년도에는 <<판단력비판>>을, 2018년도에는 <<실천이성비판>>의 보정판을 출간하였는데, 이 '보정판'들은 국한문혼용을 한글 전용으로 변경하였다는 크나큰 변경점이 있지만, 문체 자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지는 않았다. 요새의 젊은 인문학도가 이 책을 읽으면 현대 한국어 글쓰기 어법에 없다시피 한, '강조 목적으로 글자 위에 방점 찍기' 등의 생소한 표기에 맞닥뜨리게 된다.[140] 게다가 '보정판'은 역으로 문제가 늘어난 측면이 있는데, 역자가 사망한 상태에서 검수 없는'보정'을 하다 보니 자구를 함부로 건드려 역자의 원뜻을 정반대로 바꿔 훼손한 부분 등이 있기도 하고, 오만가지 추가적 오타가 난무한다. 때문에 '보정판'은 학술적 가치가 많이 떨어진다.

백종현 역과 칸트학회 역의 장점을 보자면, 일단 백종현 역은 대부분 완성되어 있으면서도, 세세한 단어에 있어서까지 일관적인 단어를 선택하여 동일한 문체로 번역하였다는 점이 확실한 장점이다. 이를테면 'Hang'이라는 마이너한 단어는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 단 한번 등장하는 반면 후기 저서인 칸트의 인간학이나 종교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백종현 역에서는 해당 단어는 일관적으로 '성벽'으로 번역되었다.[141] 역자가 다른 영어판 칸트 전집에서도 자주 쓰이지 않는 단어에서는 번역이 갈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히 큰 장점이다. 또한 칸트의 더러운 문체가 상당히 일관적으로 번역되어, 하나의 번역본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다른 저서 또한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더러운 문체를 일관적으로 살렸다는 점은 그 책이 사실 한국어 문장이라기 보다는 독일어 원문 문장에 가깝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칸트학회의 번역은 칸트의 더러운 원문을 보다 읽기 쉽게 윤문을 많이 가하였다. 원문에 얼마나 가깝고 먼지는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볼 때, 백종현 역과 칸트학회 역은 각자가 가지는 개성이 확실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단어 선택에 있어서도 동일한 정신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종현 역은 독일어를 같이 펴놓고 읽기에 좋으며, 이는 역자가 곳곳에서 밝히고 있는 자신의 번역의 의의이다. 반면 칸트학회의 번역은 근대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 없는 사람이 보다 일반적으로 읽기에는 보다 나은 번역이다. 이제 다시 번역 논쟁으로 돌아가서, a priori / transzendental / transzendent 의 형태를 보면, 의미가 아니라 독일어 단어의 형태에 집중해서 볼 경우, transzendental / transzendent를 유사한 한국어 단어로 번역하고 a priori를 다른 단어들과 구분되는 표현을 적용해야 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142] 이 경우 독자는 transzendental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독서를 해야 할 것이다. 반면 칸트 철학의 핵심 용어인 transzendental의 고유한 의미를 강조하고 싶다면, 해당 용어를 형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transzendent 와 구분하는 부분을 강조해서 번역어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독일어 형태를 보다 잘 반영하여 (형태상으로) 원어에 가깝게 만든 번역은 백종현 번역으로, 그리고 transzendental의 차이를 강조한, 읽기에 보다 편하고 오해를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번역이 칸트학회 번역이 된다는 것은 번역에 대한 각각의 정신이 나름의 일관되게 작용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해당 논쟁에 있어서 아래의[143] 논쟁을 참조하되 어떤 번역도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배경 지식과 필요에 따라서 자신에게 맞는 번역을 선택하면 될 것이다.

그 외의 점을 부연 설명 식으로 나열하자면, 백종현 칸트 번역서의 경우 일반적인 책 구조인 '짧은 서문->본문' 이 아니라, 그 책에 대한 '해제'라는 명목으로 본문에 대한 해설, 책의 역사, 관련 논저 등을 매우 길게 나열한다. 가령 백종현 역 <<순수이성비판>>의 경우, 이 '해제'를 한 130페이지 이상 넘겨야 겨우 본문으로 넘어간다. 학술서 번역의 경우 번역자가 해설을 다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백종현의 경우 그게 과잉 친절로 여겨져 칸트를 교양으로 보거나 전문 연구자들에게 불필요한 부분이 과다 삽입되어[144] 불편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차라리 해제를 책의 맨 뒤로 옮기거나, 해제를 뺀 간편한 판본을 따로 출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길사 칸트전집의 경우 단순히 '백종현 번역에 불만을 가져 대항 번역'을 출간하는 것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비판기 이전 저작의 번역도 천명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가령 한길사 칸트전집 2권(비판기 이전 저작 2)의 경우, 이 저술들은 칸트의 모국어인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저술된 것을 번역한 것이며, 이는 김상봉의 한겨레 투고문에 따르면 영역본과 일역본에 이은 세계 3번째로 나온 번역이다.

특히 2018년에 한국 칸트학회에서 칸트 전집 출판을 선언한 이후로 한겨레신문에서 이해 당사자들 간의 지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참고로 한겨레신문에 칼럼기고의 형식으로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백종현이다. 또한 기사 내용에 따르면 백종현의 번역에 대한 입장은 학회에서 전혀 논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한 것으로 보이므로, 신문 기고 이전부터 다양한 물밑 암투(...)가 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 한국적 혹은 동아시아적 번역 조류에 대한 전체적인 정리와 중립적(칸트학계 외부적) 평가는 부산대학교 이영철 교수[145]의 논문 <'선험', '선천', '초월'>(2020)을 참고할 만하다.

2022년 경북대 문성학 교수가 낸 <<칸트 윤리학의 균열>>이라는 책의 부록에 백종현 번역에 대한 보다 자세한 비판이 실렸다.

9. 여담

  •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판단력비판』이 출간된 1790년에 익명의 화가가 그린 칸트 초상화이다. 대각선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런 구도는 초상화에서 드문 구도라서 흥미롭다.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구인지 확인된 바는 없지만, 아마도 같은 지역의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폰 슈테게만(Elisabeth von Stägemann)이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파일:Immanuel_Kant_(painted_portrait).jpg

    익명의 화가가 그린 66세의 칸트
  • 고등 과정 생활과 윤리윤리와 사상을 배운 학생에게는 애증의 대상이다. 칸트의 이성 중심 도덕철학이 서양 근현대 사상사에서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은 분야가 없다. 단원으로 치면 이론 윤리, 낙태 찬반, 자살, 안락사, 생명 과학, 성, 환경 윤리, 법적 정의, 예술과 윤리, 전쟁과 평화, 해외 원조에서 등장한다. 즉 생윤의 세부 파트의 과반수에 출현... 그 덕분에 입시생들에게 '생윤 공무원', '생윤 철밥통' 등으로 불린다. 칸트가 선정된 문제는 오답률도 높은 편. 더불어 교육 과정에서는 앞뒤를 대단히 간소화하고 정언명령만 가져와서 이상하게 꼰대 같은 이미지까지 생겼다. 하지만 워낙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다른 철학자와 구분이 쉬운지라 생윤/윤사를 공부를 잘해놓은 학생들은 시험문제로 나오면 좋아한다. 이는 대학교 철학과 학부생 및 전공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독일 관념론자들의 온갖 해괴한 문장들을 보다보면 칸트가 반갑다(...).
  • 평생 자기가 태어난 쾨니히스베르크[146]에서 살았다. 반경 150km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으며, 생전에 현재의 독일 영토인 베를린브레멘,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바이에른, 바덴뷔르템베르크나 쾨니히스베르크와 동프로이센처럼 과거 독일에 속해있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영유권을 상실했던 힌터포메른과 슐레지엔, 알자스-로렌 같은 도시와 지역들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칸트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가 있는 동프로이센 지역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폴란드에 편입되면서 현재 칸트의 생가, 대학, 무덤 등 칸트와 관련된 유적지들은 전부 러시아 영토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철학자의 흔적이 현재의 독일이 아닌 러시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다.[147] 다만 칸트 생전의 강사 시절에도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에 4년간 점령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영토분쟁이 있던 곳이고 칸트는 그 시기에 많은 러시아 장교들을 4년간 가르치면서, 러시아의 여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에게 교수직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으니[148] 칸트와 러시아가 아예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통에 러시아 측에서 2024년 칸트 탄생 30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을 때, 독일의 올라프 숄츠총리가 타국을 상대로 침략전쟁 중인 국가가 감히 칸트 선생의 영구평화론을 들먹이며 이런 기념행사를 여나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 보통 사람들은 칸트를 지루한 철학자로 알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생각보다 다정다감하고 농담도 잘하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밥을 혼자 먹는 건 불행한 일'이라고 말하며 사람들과 식사하기를 즐겨해서 매일 겨자 소스를 만들었는데 자기는 절대로 그 소스를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술을 너무 마시는 사람이나 술을 아예 안 먹는 사람 둘 다 경멸했다[149]고 한다. 칸트는 독일 사람이었지만 맥주를 싫어하고 와인을 좋아했다. 오죽하면 칸트에게 식사를 초대받은 사람 한 명이 선물로 맥주를 꺼냈는데 칸트가 식탁에 놓인 맥주를 보자 정중하게 맥주를 마실 거면 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고. 한번은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 한국에서는 칸트가 결혼할 이유를 '고민'하다가 상대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려서 결혼을 하지 못했다는 출처불명의 틀린 얘기가 나도는데, 사실 칸트가 그 정도로 괴짜이거나 또는 숙맥이었던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가족을 부양하느라고 늦게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일 뿐이었다. 칸트는 젊었을 때 사교적인 사람이었고, 관심을 가지던 여자도 몇 명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결혼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어느 정도 경제적 여건이 풀려서 제대로 된 집을 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57세로, 이때는 결혼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였다.[150]
  • 젊었을 때와는 대조적으로, 중년 이후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마도 자신의 책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하면서 가치관이 많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연한 차 한 잔과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강의를 준비했고, 7시부터 11시까지 강의를 했다. 강의가 끝나면 책을 집필했으며, 점심을 먹고 난 후 3시 30분이 되면 산책을 해서 사람들이 그런 칸트를 보면서 시계를 맞추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151] [152] 하지만 그런 그도 딱 두 번, 산책을 빼먹은 적이 있다. 한 번은 프랑스 혁명을 보도한 신문을 읽다가, 또 한 번은 루소가 저술한 책 《에밀》을 읽다가 였다.
  • 장 자크 루소의 저서를 접하기 이전까진 철저한 엘리트주의를 자처했다. 칸트는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고는 번개를 맞은 듯 깨달았다면서, "나는 천성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지식만이 인류의 영광을 이룬다고 믿어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대중을 경멸했다. 루소를 읽고는 이런 맹목스러운 편견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성을 존경하는 심정으로 도덕에 기초한 평등주의자가 됐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도덕 철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지만 다년간에 걸친 학문 활동의 결과 대학에서 수많은 과목을 맡아서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며 마음먹고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어디 가 보지도 못한 지역이나 본 적도 없는 동식물들을 주제로 얘기하는데도 학문상으로 하자가 없고 너무도 흥미로운 나머지 학생들은 눈과 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강좌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었던 강좌는 '세계지리'. 지리학에서 칸트는 이전까지 식민 지배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지리학을 넘어서 현상학적 관점에서의 선험적 공간에 대한 담론을 지리학계에서 시작함으로, 지리학에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더했다고 평가받는다. 쉽게 말해 당대의 지리학, 인류학 같은 학문들은 열강들이 다른 나라 쳐들어갈 때 필요한 적성국 연구, 동물 생태 연구(...) 비슷한 취급을 받았는데, 칸트는 학문적으로 지리를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접근했다. 실제로 그가 말년에 쓴 영구평화론(영원한 평화), 윤리형이상학 법이론 등에는 세계 각지의 문화 이야기가 토지의 점유와 획득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조금씩 나오며, 또한 세계 만방의 다른 민족들을 빚에 종속시키거나 총칼을 앞세워 쳐들어가는 나라는 영 좋지 못하다고 돌려까기도 한다.
  • 엄청나게 박학다식했다. 칸트는 실제로 지식에 관계된 호기심이 왕성해서 온갖 다양한 분야에 관심하고 공부했다. 실제로 시간강사 시절에도 철학뿐만 아니라 별별 학문을 다 가르쳤다. 천문학, 물리학, 역사,수학, 화학, 지리,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강의했다. 화학 물질들로 불꽃을 만드는 기술도 가르쳤다. 재치 있게 잘 말하고 쏙쏙 귀에 들어오게 잘 요약해서 칸트의 강의실에는 수강생들로 늘 꽉 차 있었다. 다른 도시나 국가에서 학생들이 칸트의 강의를 들으러 온 적도 있었다.
  • 당구 실력도 출중했다. 칸트는 학창시절에 가난해서 개인 교습만으로 학비를 낼 수 없게 되자, 내기 당구로 돈을 벌어서 학비를 충당했다. 너무 많이 이겨서 내기 당구할 상대가 없어지자, 종목을 바꿔서 카드 게임으로 돈을 벌어서 학비를 냈다고.[153]
  • 한국에서는 칸트가 가터벨트를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칸트는 가터벨트를 발명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어레이스를 "Kant"#라고 하는데, 가터벨트에 레이스가 많이 들어가서 상품 제목에 kant라는 단어가 많이 쓰였고,[154] 이를 두고 한국에서는 칸트가 가터벨트를 발명했다는 식의 오해가 퍼졌던 것.
  • 젊은 시절의 칸트는 과학자에 가까웠다. 3대 비판서와 같이 유명한 철학 저서는 50대 후반부터 출간되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철학자로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다. 그 이전 시기는 '전-비판기'라고도 부르며, 유명한 학자이며 연구자였지만 세계적인 스타는 아니었다. 리스본 대지진 때 사람들이 지진 피해자들을 두고 '하나님께 큰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은 것' 이라고 손가락질하자, 그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면서 지진의 원인에 대해 자연과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내기도 했다. 칸트가 흄을 읽고 비판서를 쓰기 시작한 동기를 연구할 때, 이 리스본 대지진 및 자연과학 연구하던 시절을 전사(pre-history)로 꼽는 논문이나 책들도 있다. 후술할 신학자 스베덴보리와의 혜성에 대한 대담 이야기도 나온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칸트는 오늘날의 주류 천문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은하계의 형성 과정의 모델인 성운설을 처음 제시한 세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성운은 하나의 태양이 아니라 수많은 태양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155]
  • 《순수이성비판》은 세계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이지만, 막상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워낙 책이 장황하고 어려웠기에 제대로 이해했던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이에 관한 일화로 칸트가 이번에 내가 발표한 책을 봤느냐고 친구[156]에게 편지를 보내자 친구가 손가락이 모자라다는 식으로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말하자면 "친구야, 나는 네 책을 읽으려고 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야. 네 책을 읽어 나아가면서 이해가 안 될 때마다 내 손가락을 하나씩 꼽고 있거든." 과 같은 식으로 편지가 돌아왔다고 한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19살 때 백작 발트시타인의 주선으로 본대학에서 철학을 비롯한 인문과학 과목들을 청강할 때 칸트로 대표되는 계몽주의를 접했다. 그래서 그런지 칸트 철학에 심취해 "하늘엔 빛나는 별. 가슴엔 실천이성"이라는 칸트의 명언을 어디엔가 써 놓았다.
  • 칸트 철학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인물은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1~1910)으로, 1868년 청나라로 파견되는 사신단을 수행하여 북경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지은 저술인 『연석산방미정문고(燕石山房未定文藁)』에 베이컨과 칸트의 사상을 논한 글이 부록으로 수록되었는데, 이 글이 수록된 별책의 원본이 현재 행방불명이다. 이 별책은 석정 이정직의 문중에서 보관하다가 서울대학교 최재희 철학과 교수의 요청으로 대출되었는데, 최재희 교수가 그만 이를 분실해버렸고, 미처 찾아내지 못한 채 작고하는 바람에 원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다. 다만 영인본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013년 러시아에서 칸트와 관련해 철학적인 논쟁을 하다가 총격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로이터 통신, 문화일보, #) 칼리닌그라드가 현재 러시아 영토이기도 하고, 러시아에도 일정 수준의 칸트 덕후들이 꾸준히 있다.
  • 인터넷에 다음 초상화가 칸트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이 있으나, 실제로는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157]라는 철학자의 초상화이다.[158]

    파일:Friedrich_Heinrich_Jacobi_portrait.jpg
    야코비
  • 교육학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칸트를 떼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데, 세계 최초로 교육학에 대한 주제로 대학 강좌를 개설한 주인공이기 때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1776년 겨울학기에 총 4번에 걸쳐서 개설했다. 인지주의적 교육심리학자들의 계보를 이야기할 때에도 칸트의 영향이 크다고 자주 얘기한다. 특히 콜버그 및 유관 학파들. 도덕적 딜레마 문제를 출제하며 아이들의 판단력을 길러주자는 주장은 윤리형이상학, 실천이성비판에도 나온다.
  • 말년에 칸트는 저녁 식사를 마치면 즉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습관에 빠졌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하인이 끓이는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견딜 수 없어 했다. 식사를 같이 하는 친구들이 커피가 곧 나올 것이라고 얘기를 해줘도, 칸트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커피! 커피!" 라고 작게 외치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익사하는 것마냥 힘들다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커피를 가지고 올라오는 하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육지다! 육지! 여러분, 육지가 보입니다!"[159]
  • 한국에서는 칸트의 묘비명에 다음과 같은 구절,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일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 법칙."이 새겨져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틀린 이야기다. 이런 오해는 외국 사이트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묘비명(?)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해당 청동 판넬은 칸트 묘비석에 걸려 있는 판넬이 아니라, 칸트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여 해당 지역에서 쾨니히스베르크 서쪽 성벽에 부착한 '기념물'이다. 이 '기념물'의 원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소실되었고, 현재는 복사품 두 개를 만들어 한 개는 박물관에, 다른 하나는 원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걸어 두었다고 한다.[160]


[1]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칼리닌그라드주 칼리닌그라드[2] 알베르투스 대학교 (Albertus-Universität)라고 부르기도 한다.[3]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를 떠나 1748~54의 6년 동안 가정교사를 전전함.[4] 「불에 관한 성찰의 간략한 서술 (Meditationum quarundam de igne succincta delineatio)」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 취득.[5] 석사 학위를 받은 해에 교수자격 취득 논문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명제에 대한 새로운 조명 (Principi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으로 박사학위 취득.[6] 키프케 교수 저택에서 방을 빌려 강의했으며, 1762년 이후에는 출판업자인 칸터(칸트가 아니다)의 집 2층 다락방을 세내어 거기서 강의도 했다.[7] 빛나는 밤하늘의 별은 순수이성비판의 인과율로 돌아가는 객관적 세계, 내 안의 도덕 법칙은 실천이성비판의 자율에 의한 목적을 뜻한다. 그리고 이 원리에 대한 경탄과 경외감이 바로 판단력비판의 숭고를 의미한다.[8] 기독교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9] 1724년 4월 22일 아침, 칸트가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는 다섯 살 먹은 누이가 살고 있었다. 4월 22일이 옛 프로이센력으로 성명축일이었으므로, 칸트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원래 이 이름이 지닌 히브리어의 의미는 "신이 그와 함께 있다"인데, 이 뜻이 경건한 부모의 마음에 들었다. 칸트 역시 나이가 들어서도 이 세례명을 자랑스럽게 여긴 걸 보면, 그에게 아주 알맞은 이름이었던 듯하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1)[10] 칸트의 할아버지도 마구 제조업자였다.[11] 칸트의 아버지인 요한 게오르크 칸트도 자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칸트의 조부 한스와 마찬가지로 수공업자였다. 그는 마구 제조업자들의 조합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말이나 수레, 마차, 썰매 등에 쓰이는 가죽끈이나 가죽띠를 생산하고 판매함으로써 돈을 벌었다. 그는 1683년 메멜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 큰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했다. 거기서 그는 자수성가한 마구 제조업자로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할 만큼 수입을 얻었다. 서른세 살이던 1715년 11월 13일, 그는 안나 레기나 로이터와 결혼했다. 당시 그녀는 열여덟 살이었는데, 뉘른베르크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해온 다른 마구 제조업자의 딸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0)[12] 아이다운 순진무구함으로 가족의 일과에 맞추어 살아가던 자유로움과 함께 시간이 흘러갔고, 임마누엘은 대여섯 살이 되어 프로이센의 교회법과 학교법의 규정대로 학교에 들어갈 시기가 되었다. 아침마다 그는 시의 변두리에 인접한 병원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곳에는 오직 선생님 한 분만이 계셨다. 선생님은 그곳 교회의 합창단 지휘자이자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다. 학급도 오직 하나였다. 모든 학생들이 토지 개량 기술에 능숙하도록 배웠고, 읽기와 쓰기도 배웠으며, 계산하는 법 등도 조금은 배웠다. 무엇보다 그들은 기독교의 근거에 대해 공부했고, 개신교의 정신에 입각해 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교육을 받았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8~49)[13]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마 잊혀졌을지 모른다. 만약 프란츠 알베르트 슐츠가 1731년에 어린 임마누엘의 커다란 재능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정해진 시각에 신앙 시간을 맞이하고 성경 시간을 보냈던 그 아이의 재능을 인식했던 첫번째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안나 레기나 칸트는 슐츠의 강의를 "꾸준히 청강했으며, 또한 그를 마음으로부터 따르는" 사람이었다. (중략) 어머니는 아들이 지닌 통찰력과 이해력에 대해 자랑했는데, 적어도 슐츠는 그녀의 자랑이 정당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약한 체질의 어린이이기는 했지만, 난장이 학교에 다니기에 칸트는 너무나 재능이 있음이 분명했다. 슐츠는 명망 있는 인물이었으나, 소박한 수공업자 가족이 사는 사틀러 거리의 조그마한 집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아들이 대학 공부를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잘 말해주었으며, 더 좋은 학교도 추천했다. 영리하면서도 믿음이 깊은 아들을 가지고자 했던 오랜 소망 때문에 어머니는 이를 받아들였다. 아버지 또한 적은 수입일지라도 더 나은 학교 교육을 위해 기꺼이 돈을 내놓을 준비를 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52~53)[14] 그는 교육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라틴어 수업을 좋아했다. 학교는 특히 근면한 학생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의 고전문학가를 신뢰하도록 이끌어주었으며, "이러한 것에 대한 애정은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60)[15] 칸트는 학교 생활의 노예 같은 상태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알베르투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그리고 부모의 집에서 나오기 위해 열여섯 살 때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돈이 조금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업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마구 제조업자와 가죽끈 제조업자 사이에 빚어진 경제적 갈등이 부지런한 수공업자인 요한 게오르크 칸트를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다른 마구 제조업자들은 가죽끈을 만들어도 괜찮았지만, 그에게는 말의 안장을 생산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일한 고객을 얻기 위한 경쟁에서 누가 패배할지는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1737년 12월 18일 어머니의 죽음 이우, 호로 남은 아버지의 어깨 위에 부양과 교육이라는 모든 짐이 지워졌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61)[16] 칸트의 어머니는 1737년에 "독성을 지닌 급성류머티즘발열"로 갑자기 세상을 뜰 때까지 다섯 아이를 더 낳았다. 그때 그녀의 "꼬마"는 겨우 열세살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1)[17] 알베르투스 대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칸트의 이름을 따 임마누엘 칸트 발틱 연방대학교가 되었다.[18] 임마누엘 칸트는 1740년 9월 24일에 알베르티나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이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개신교 국가에 필요한 교사와 설교자 혹은 목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1544년에 세워진 동프로이센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칸트는 이곳에 새로 등록하면서 어떠한 장학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적 독립을 원했고, 국가로부터 빚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기 스스로 학비를 충당하려고 했다. 그보다 나은 처지의 친구들이 그에게 커피와 빵, 옷 등을 대주었다. 또한 칸트의 외숙 리히터는 제화업을 하는 궁한 형편임에도 조카를 많이 도와주었다. 칸트는 가장 좋은 친구인 요한 하인리히 블뢰머와 함께 오랫동안 조촐한 방에서 살았다. 칸트는 그와 함께 가끔씩 당구를 치기도 했는데, 이는 좋은 휴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데 쓸모가 있기도 했다. 이 나이 어린 학생은 유별나게 숙달된 놀이꾼이어서, 이기지 않고 집에 가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전해진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62)[19] 1731년에 슐츠를 알게 되었듯, 자유롭게 떠돌던 이 학생은 10년 뒤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을 만나게 되었다. 크누첸은 슐츠의 주선으로 알베르티나에 논리학 및 형이상학 원외 교수로 초빙된 인물이다. (중략) 쾨니히스베르크의 대학 선생들 가운데 크누첸은 "학문 일반의 유럽적인 개념을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성찰, 수학적인 증명과 박물학적인 탐구는 칸트라는 젊은 학생에게 커다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그는 쉬지 않고 크누첸의 강의와 토론 연습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열한 살 위인 교수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66~68)[20] 크누첸은 우선 칸트에게 1687년에 출간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빌려주었다. (중략) 이 책은 "아마도 일직이 등장한, 개별적으로 저술된 물리학 저작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칸트 자신이 떠올렸던 계획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수학적 계산의 필요성과 인과적 설명에 따른 기대의 결합은 학문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71~72)[21] 1715~16년에 사무엘 클라크와 라이프니츠 사이에 오간 서신의 심화된 논쟁을 통해 칸트는 교훈을 얻었다. 이는 아마도 유럽의 정신사에서 주목할 만한 재기 넘치는 서신 왕래였던 것 같다. (중략) 이에 "자연 철학과 종교의 원리"에 대한 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실험적 자연철학이라는 뉴턴의 실재론이 자리 잡게 되었다. 주목할 점은, 나중에 칸트가 해결점을 찾았던 거의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 논의되었다는 사실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73~74)[22] 1744년, 이 젊은 철학자는 라이프니츠와 뉴턴/클라크 사이에 논쟁이 되었던 '힘'의 정당한 측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점점 더 허약해져가는 시기에 칸트는 자신의 첫번째 책(『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을 썼다. 1746년, 평가를 받기 위해 이 책을 철학부에 내놓았을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75)[23] 규정된 규칙 없이 그 스스로 자유롭게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자신의 특별한 길을 걸어가는 천재에게는 자신의 생계를 위한 수단이 필요한 법이다. 174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칸트는 남은 유산을 정리했는데, 많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누이를 돌보아야 했다. 아직 정규 학업 과정을 끝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가난한 칸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가정교사가 되는 길 외에 달리 무엇이 있었겠는가?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8)[24] 1748년, 칸트는 먼저 인스터부르크와 굼비넨 사이에 있는 유드첸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다니엘 안더슈 목사 댁의 일을 보았다. 그 뒤에 쾨니히스베르크의 남쪽에 있는 그로스-아른스도르프에서 휠젠 집안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1754년에 쾨니히스베르크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는 6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8)[25] 가정교사 생활을 하던 6년 동안 그는 교육적 임무에만 묻혀 지내지는 않았다. 전원적인 고독 속에서 안정된 몇 년을 그는 집중적으로 자연 연구에 사용했다. 칸트는 물리학ㆍ지리학ㆍ천문학을 비롯해 여러 분야의 학문적 기록들을 남겨놓았다. 칸트의 자연철학적 연구들은 바로 이 근면함으로 인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30대에 이 연구물들을 들고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와 출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람과 불 그리고 지구의 연령과 지축 회전에 관한 연구, 물체의 역학에 관한 연구, 1755년 지구의 대부분을 흔들었떤 지진의 특수성에 관한 연구 등이 그것이라 하겠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106~107)[26] 1749년 여름에 드디어 그의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이 서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쇄한 지 3년 뒤의 일로, 칸트는 물론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8월 23일에 견본 한 부를 문화계 잡지사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보냈다. 자신의 첫 저술에 대한 서평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동봉한 편지에는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을 통해, 잠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의도에 최후의 결정을 일깨우려는" 독일 자연철학이라는 암시가 곁들여져 있다. 같은 날에 칸트는 저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도 이 책을 보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일러를 베를린의 학사원에 초빙했다. 오일러는 그곳에서 1744년부터 수학 수업을 이끌었다. 동봉한 편지의 내용에는 젊은 철학자의 자부심이 불확실한 자기 평가와 결합되어 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2)[27] 칸트의 첫번째 글은 출판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살아 있는 힘(vis viva)에 관한 그의 형이상학적 꿈은 고유한 정신적 힘에서 비롯된 넘쳐나는 자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83)[28] 『자연사와 천체 이론』의 첫 문장에서 칸트는 벌써 자신을 몰아댄 우주론적 시도의 엄청난 난관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칸트는 태양계에서 항성 전체로 시야를 확대시켰다. 이제 1750년 더행의 라이트가 세운 새로운 가설이 정당화되기에 이른다. 지구가 자신의 축을 회전하면서 불러일으키는 하늘의 순환을 제외하고 항성들의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반대해, 칸트는 이 별들이 "아마도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보다 높은 질서의 행성들일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칸트는 하위헌스와 헬리 및 모페르튀가 확신했던 "일종의 안개 같은 별들" 역시 다시금 보다 높은 질서의 현상이라고 추측했다. 특히 그 타원형의 모습은 칸트로 하여금 이 안개 같은 조직이 "파악할 수 없이 수많은, 더구나 하나의 공통된 중심을 둘러싼 별들의 모임과 다를 바 없다"고 가정하게 했다. 즉, 갈락시스도 태양계나 은하계와 마찬가지로 같은 체계에 따라 정돈 되어 있다는 것이다.[29] 1756년 4월 8일, 서른두번째 생일을 두 주 남겨놓고 칸트는 "가장 위대하고 막강한 왕"인 프리드리히 2세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벌써 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공석으로 있는 교수직 신청을 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느 누구보다도 자연철학에 대한 칸트의 관심을 일깨우고 지도했던 스승 마르틴 크누츠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1751년 1월 25일 노환으로 죽자 공석으로 남은 것이다. 이제 그의 제자는 그 자리로 들어가기에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정교수 자리는 아니었고, 보수도 신통치 않으면서 강의를 많이 해야 하는 특별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 이 직위는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칸트로서는 수년 전부터 애쓰고 있던 목표가 드디어 눈 앞에 다가온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략) 칸트는 『살아 있는 힘의 올바른 측정에 관한 사유들』로 그의 특이한 대학 과정을 끝마쳤다. 1748년에서 1751년까지 그는 프로이센의 외딴 지역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 이어 알베르티나의 사강사라는 가시밭길로 접어들면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92~93)[30] 칸트가 1756년 4월 6일에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치는 특수 교수직을 지원했을 때, 그의 느낌은 매우 좋았다. 그의 업적은 필요한 것 이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희망을 만족시키기에는 시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자신의 지원이 성과 없이 끝난 것에 그는 실망했을까? 아무튼 대학 당국은 멀리 떨어진 베를린에서, 경비 절약을 이유로 교수직을 채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98)[31] 가난한 석사 칸트는 그의 위대한 노력이 충족될 때까지 강단이라는 모루 뒤에 앉아, 매일같이 "같은 강의의 무거운 망치를 균일한 박자로" 내려치며 1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98)[32] 마르틴 람페(Martin Lampe)는 원래 프로이센 군대에 복무하던 군인이었다. 그는 군인을 그만두고 칸트의 하인으로 40년간을 살았다. 람페는 매일 새벽 5시 15분 전이 되면, 불침번하는 군인처럼 칸트의 방으로 들어와서 "교수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Mr. Professor, the time is come.)"라고 군대식의 큰소리로 칸트를 깨웠다. 그러나 칸트도 늙고 람페도 늙자, 람페는 칸트의 돈을 맘대로 쓰기 시작했고, 이를 본 바지안스키가 칸트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래서 칸트는 죽기 2년 전인 1802년에 람페를 해고한다. 그럼에도 칸트는 람페를 극진히 생각했고, 유언장에 람페에게 연금을 준다고 썼다. 람페는 칸트가 죽은 해부터 연금을 받았다. #[33] 1770년 3월 16일, 마흔여섯 살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강사 생활을 하고 있던 칸트는 비밀 국가예산 장관이자 육군 장관인 폰 퓌어스트 운트 쿠퍼베르크 남작에게 긴박한 편지 한 통을 쓴다. 그는 이 편지를 통해 막 공석이 된 교수직에 응모한다. 그러니까 하루 전날, 최고재판소의 사제이자 수학 교수인 랑한젠이 지루한 병환 끝에 죽은 것이다. 이미 칸트는 1756년에도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으나 허사였고, 또 2년 뒤의 교수 지원에서도 외면당했다. 그는 교수단의 정회원으로서가 아니라 무보수의 사강사로서 벌써 15년 동안 활동한 셈이다. 칸트는 기진맥진할 때까지 주당 평균 20시간씩 가르쳤고, 또 부지런히 저술 활동을 해왔다. 그는 이제 젊은 학창시절 눈앞에 그렸던 학자 생활에 진전이 없을까 두려워졌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198)[34] 칸트가 처한 상황에는 극적인 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대학 강사로서의 보수는 한푼도 받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데다 수강생들이 대개 강의료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궁핍한 삶에 익숙해 있었다. 어쨌든 사강사로서 칸트는 빚을 지지 않고도 서적상인 칸터의 집에 있는 두 방의 방값을 지불할 수 있었으며, 50년대 말부터는 전직 군인 출신인 마르틴 람페를 하인으로 고용하고 식당에서 매일같이 좋은 식사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1766년 2월부터는 왕립 궁정도서관의 부사서로서 약간의 돈도 벌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 연구를 위해 책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기쁨까지 덤으로 누릴 수 있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199)[35] 세계 전체, 즉 우주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도덕철학적 반성들에도 자리가 마련되었다. 지상의 인간이 천체의 체계보다 더 중요하다. 칸트는 1768년 5월 9일에 자신의 옛 학생인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점을 밝히고 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이 이론적 지식 체계들에 대한 "깊은 무관심"에 빠져 있음을 알리고 있다. 자신에게는 실제로 "본래의 숙명과 인간의 인식 능력과 성벽의 한계만"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도덕이 중심에 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도덕형이상학"을 작업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면서, 칸트는 이 도덕형이상학의 원칙을 규정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 이 사강사는 자신의 철학적 숙명과 직업 목표가 다행스럽게 일치하는 윤리 교수직을 바라게 된 것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01)[36] 그런데 칸트의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가 단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랑한젠이 수학자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칸트는 감히 자신의 기대를 "나의 기량과 성벽에 적합한 그러한 자리들에만 한정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가장 겸손하게 일종의 교환 제안을 했다. 사람들이 그 공석의 교수직을 고인의 사위인 크리스티아니에게 맡기면 어떨까? 카를 안드레아스 크리스티아니는 윤리 교수이기는 하지만, 훌륭한 수학 전문가이기도 하다. 칸트 자신에게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해결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칸트)는 윤리 교수직을 지원하면서, 귀하(폰 튀어스트 장관)께서 내려주실 존귀한 서언을 겸손히 희망하며 내 본래의 숙명을 따를 생각"이기 때문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00)[37] 드디어 쾨니히스베르크 철학자의 계속되는 운명뿐만 아니라 근대의 서양 문화사 일반을 결정하는 일이 일어났다. 윤리 교수직 임명에서 칸트는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국왕이자 주인인 프리드리히 2세는 "우리는 임마누엘 칸트 선생을 ...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정교수로 그지없이 자비롭게 임명하고 받아들였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칸트는 마침내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불확실한 성공이었다. 왜냐하면 칸트가 자신의 삶에서 바랐던 행복, 즉 윤리와 도덕이라는 실천적 분야에서 자신의 숙명을 따를 수 있는 행복은 왕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이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칸트는 10년을 더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중략) 그 책, 즉『순수이성비판』은 의무감에서 비롯된 곤경의 해결책인 셈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03~204)[38] 그의 강의는 "유머와 분위기로 흥을 더했다." 1762년부터 1764년까지 칸트 밑에서 공부한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가 이러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의 "열려 있으면서 사색으로 다듬어진 이마는 깨뜨릴 수 없는 명랑함과 즐거움의 자리였고, 가장 풍부한 사유를 지닌 대화는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으며, 유모와 즐거운 분위기는 그의 뜻대로 되었다." 그가 식탁 모임에서 즐겨 이끌어냈던 생동감 넘치는 큰 웃음에 대해서도 익살스러운 근거가 떠오른다. 친구들의 모임에서 한 재치 있는 장난꾸러기가 순수한 마음으로 기대했던 긴장을 갑자기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을 때, "그 웃음은 항상 근육의 흔들림으로 소화에 도움을 준다. 이것은 의사의 지혜로운 처방전보다 오히려 소화를 더 잘 촉진시킨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30~331)[39] 칸트는 강의와 반복 수업을 수행하며 교수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특히 청중들에게 형이상학ㆍ자연지리학ㆍ인간학에 대한 그의 강의는 매우 흥미로웠고, 학생들의 강의록은 학게에 널리 퍼졌다. 그렇지만 칸트는 이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1778년 8월 28일에 헤르츠에게 전했듯이, 특히 자신의 형이상학 강의와 관련하여 "강의록을 통해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18)[40] 칸트는 자신의 임명을 처음부터 미심쩍게 평했던 동료들과 거의 사교적인 접촉을 갖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사소한 경쟁과 술책에 관계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또한 그들의 고지식한 "학자적 자만과 현학"에 대해서도 기꺼이 비웃었다. 칸트는 매일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르는 공공 식당의 다양한 사람들을 더 좋아 했다. 그는 지적인 호언장담과 인위적인 허식을 증오했다. 칸트의 사회적 교제에 관한 다음의 글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 철학의 사회적 교제에 관한 다음의 글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 철학자는 비틀린 정신이나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보다는 마을의 주막에서 더 편안할 수 있다." 칸트는 함께 잡담하고 농담하며 논쟁하는 세속적인 친구들과의 교제를 가장 좋아했다. 그가 매일 만나는 가장 친한 친구인 영국 상인 조지프 그린이 거기에 속하고, 또한 그린의 사업 상대인 로버트 머더비, 법률가이자 문필가인 요한 게오르크 세프너가 거기에 속한다. 그리고 특히 프레겔 섬 위에 있는 , 당구장이 딸린 식당 "게르라흐"에서 자주 식사를 함께하던 시청 형사계 행정관 테오도르 고트리프 히펠도 거기에 속한다. 식사를 한 뒤 칸트는 대개 네덜란드 나무숲이나 나중에 "철학자의 길"로 알려진 강변길로 산책을 가곤 했다. 좋은 생각은 신선한 공기와 자유로운 운동 속에서 생길 것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18~219)[41]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괴팍한 외톨이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임에도 즐겨 참여했다. "이 단체는 학자와 지성인의 모임이기도 했고, 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가정주부들의 모임이기도 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의 갖아 신뢰할 만한 친구인 영국 상인 조지프 그린과 그의 대화 상대였던 로버트 머더비, 그리고 젊은 동료 크리스티안 야콤 크라우스, 논쟁을 즐기는 요한 게오르크 하만, 군비위원인 요한 게오르크 셰프너와 은행 관료인 빌헬름 루트비히 루프만, 매우 애매한 법학자이자 작가인 테오도르 고트리프 히펠, 게다가 수많은 학문적 친구들과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의 교양 있는 많은 부인들, 이들 모두는 칸트와 함께한 모임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칸트는 "식탁 모임"을 좋아했다. 이 모임에서 그는 "우울한 비판적 세계의 현인"이 아니라, "빛이 충만한 대중적인 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훌륭한 근거를 올바르게 제시했다. 끊임없이 자신의 무거운 생각을 끌고가야만 하는 철학자에게 공동의 식사는 부담을 줄여주는 향유이기 때문이다. "철학하는 학자에게 혼자 식사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그에 비해 공동으로 식사하고 마시는 것은 건강한 일이라 하겠는데, 그런 자리에서 사람들은 고독한 사유로 인한 압박감 없이 사교적으로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농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29~330)[42] 그가 식탁 모임에서 즐겨 이끌어냈던 생동감 넘치는 큰 웃음에 대해서도 익살스러운 근거가 떠오른다. 친구들의 모임에서 한 재치 있는 장난꾸러기가 순수한 마음으로 기대했던 긴장을 갑자기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을 때, "그 웃음은 항상 근육의 흔들림으로 소화에 도움을 준다. 이것은 의사의 지혜로운 처방전보다 오히려 소화를 더 잘 촉진시킨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30~331)[43] 요한 야콥 칸터(Johann Jacob Kanter): 쾨니히스베르크의 서적상이자 출판업자. 칸트는 사강사 생활 동안 칸터의 집에 세들어 살았으며, 몇 편의 논문을 칸터를 통해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44] 요한 게오르크 하만(johann Georg Hamann): 칸트의 친구이자 제자. 의 『인간본성론』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칸트는 이 책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했다. 하만은 훗날 항구의 세관창고 관리가 된다.[45] 원고는 1780년 가을에 완성되었다. 칸트는 최근 칸터의 책방을 넘겨받았던 고트리프 렙레히트 하르퉁에게 그것을 출판해달라며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출판을 거절했다. 이러한 추상적인 형이상학 논문으로는 돈이 벌리기는커녕 잃기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칸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때 하만이 칸트를 도우러 왔다. 그는 리가의 출판업자이자 서적상인 하르트크노흐와의 접촉을 중재했는데, 이 사람은 원고에 흥미를 보이면서 심지어 논문의 대가로 칸트에게 약간의 사례까지 지불하겠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미루어진 뒤에야 마침내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1781년 5월, 라이프치히의 부활절 장에서 리가의 출판인 요한 프리드리히 하르트크노흐에 의해 쾨니히스베르크 교수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25~226)[46] 2년여가 지난 뒤 칸트는 저명한 대중 철학자 크리스티안 가르베에게 "처음부터 내 저서에 대한 신속한 환대는" 그 자신도 기대하지 않았다고 편지를 썼다. 가르베는 칸트에게 이 세상의 어떤 책도 "읽는 데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인" 것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이 어렵고 심원한 작품은 그를 위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넘어설 수 없는 난해함에 거의 언짢아졌다고 했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판매 부수는 매우 미미했다. 아무도 칸트의 생각을 좇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친한 친구들마저도 머리를 흔들 정도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읽도록 요구하기에는 신비스럽고 암호 같은 것이었다. (중략) 하만은 칸트가 대중적인, 철학의 문외한도 읽을 수 있는 요약본을 작성하도록 설득했다. 칸트는 그에게 설득되었다. 1783년 초, 리가에 있는 하르트크노흐의 집에서 『학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서문』, 즉 『프롤레고메나』가 출판되었는데, 이를 통해 칸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생각들과 그것의 철학적 배경을 더 광범위 한 독자를 위해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27~229)[47] 히펠은 1781년 7월 17일 셰프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그들은 벌써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찾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내게 너무나 높습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찾아낸다고 해서 어떤 도움이 될까요?" 멘델스존은 전율을 일으키는 그 책의 견본을 보자마자 완전히 옆으로 치워버렸다. 가슴을 쥐고 하소연하듯, 그는 칸트에게 "매우 불편하다. 다시금 바라건대, 나는 견본과 같이 만들어져 나오는 일이 영원히 없길 바란다"고 했다. 2년 뒤인 1783년 4월 10일, 멘델스존은 비로소 연락을 취해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반어적으로 드러냈다. "자네의 『순수이성비판』은 건강의 시금석이네. 기력이 늘었다고 생각될 때마다 나는 기운을 빼버리는 이 작품에 대들어본다네. 그런데 죽기 전에 그것을 완전히 숙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완전히 없지는 않다네." 다시금 가슴을 짓누르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가장 집중적으로 칸트의 비판을 검토한 하만 ㅡ 그는 1784년에 언어철학적으로도 방향을 지시하는 『이성의 순수주의에 대한 메타비판』을 썼다ㅡ은 1781년 10월 10일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헤르더에게 보냈다. "나는 칸트 저술의 세번째 강독에서도 막혔다네. 네번째는 아마도 통과해야만 할 것이네. 그러나 나는 그가 말을 끝맺도록 해볼 것이고, 발췌본이나 독본이 되어야 할 다음 저술을 기다릴 것이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28~229)[48] 칸트는 자신의 『순수이성비판』이 직면했던 사소한 반향을 고통스럽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이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부장관 프라이헤르 폰 제드리츠와 그의 개인비서인 비스터는 그들이 받은 헌정본에 대해 침묵했다. 고귀하게 평가를 받는 모제스 멘델스존은 칸트의 작품을 신경을 자극하는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그의 옛 학문적 동료인 블뢰머는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면서 손가락이 부족했다는 냉소조의 생각을 내뱉었다.(그래, 여보게 친구, 자네의 서술 방식은 괄호에 넣고 전제되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한 단어에 한 손가락을 대고, 두번째 단어에 다음 손가락을 대고, 이렇게 계속하다보니, 한 쪽을 넘기기도 전에 내 모든 손가락이 단어들을 지적하고 있네") 이러한 반응들을 접할 때마다 칸트는 자신의 정신적인 성과를 어떤 고결한 사회가 소유하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쓴 것에 아무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88~289)[49] 칸트는 이와 관련해 뉴턴을 화제의 실마리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를 반박했다. 왜냐하면 뉴턴은 어떤 일이나 사건에 관계없이 스스로 한결같이 흐르는 절대적ㆍ현실적 시간을 가정했고, 또 움직이지 않고 항상 똑같이 머물며 마찬가지로 "자신 밖의 어떤 것과도 관계 없이 존재하는" 절대적ㆍ현실적 공간을 가정했기 때문이다. 거꾸로 상대적 시간과 상대적 공간은 물체의 운동과 위치에서 직접적ㆍ감성적으로 지각될 수 있다. 칸트는 이와 반대로 뉴턴의 절대주의를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공간과 시간을 감성의 순수 형식 조건으로 선언했다. 그는 시공을 주관화하고 그것들의 객관적 성격을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의 대상을 감성적으로 직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형식 조건들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이제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형식 조건을 재구성하는 일을 순수 수학의 과제로 선언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59~260)[50]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현상에 우리 스스로가 질서와 규칙성을 부여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것들을 발견할 수조차 없다면, 우리 심성의 본성이 그것들을 처음부터 거기에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오성 자체가 자연법칙의 원천이다." "오성은 자신의 법칙을 자연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그것을 규정한다." 그것이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을 들어 말했던 칸트의 대담한 혁명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63)[51] 하지만 그를 도덕적으로 자극했던 실천철학의 세 가지 큰 문제들은 이 길 위에서 답변될 수 없었다. 인간 본래의 것을 형성하는 불멸의 영혼이 있는가? 자연법칙으로 결정된 세계 속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는 어떠한가? 그리고 신의 현존은 시령자의 상상 속에서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환상 이상인가?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이 이 문제를 자연철학적 지식의 영역 밖으로 경계지웠다고 해서 그것의 매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은 또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자기 자신의 경계 설정을 명시한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 실천적인 것만이 관계해야 할"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순수이성비판』의 말미에서 이야기하는 "우리 이성의 순수한 사용의 최후 목적"을 칸트는 도덕형이상학과 실천이성의 비판에서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음에 주어질 그의 큰 과제일 것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65~266)[52] 같은 이름들이 1783년 결성된 "수요 모임", 즉 "계몽 친구들의 비밀 모임"의 회원 명부에서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규칙적으로 개인 주택에서 모임을 가졌고, 우정 어린 생각들을 교류하면서 서로서로 정신을 계몽했으며, 이를 통해 여러 종류의 개념 자체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84)[53] 『베를린 월간지』는 전통적인 학자의 간행물이거나 대학의 간행지가 아니었다. 닫힌 문 뒤에서 개별적으로 토론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베를린 월간지』가 시민사회의 교양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잡지는 1783년 초에 요한 에리히 비스터와 프리드리히 게디케에 의해 창간되었고, 거의 모든 수요 모임의 회원이 집필진이 되었다. 이 잡지는 최고이자 최후의 단계에서 독일 계몽주의를 점유하고 있떤 가장 중요한 대중의 모임을 보여준다. (중략) 생각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 그리고 독자적 사유와 시민정치적 자유를 향한 적극적인 참여, 더불어 이것들에 결합된 공공성은 이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들은 어두운 감정 철학, 비이성의 감옥, 종교적 독단, 교회의 강요, 광신과 미신 등에 대항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90)[54] 이러한 계획의 수립과 더불어 계몽의 동지들은 동시에 그들의 반대자에 대한 전선을 구축했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전선은 자신들의 감정에 지배받고 자신의 갈채를 신적인 계시로 간주하는 모든 종류의 광신자들을 향해 구축되었다. 이 광신자들은 모든 사유의 자유를 반대하는 자, 특히 문화ㆍ정치적인 반대자로 간주되어 논쟁적으로 반박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직상 그들의 고유한 방식 때문에도 위협을 받고 있던 예수회와 비밀 구교를 향해서도 계몽 단체의 반박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토론과 강연 그리고 제한적으로 돌려보던 문서 등은 엄격하게 비밀로 유지되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85)[55] Aufklä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 verschuldeten Unmündigkeit. Unmündigkeit ist das Unvermögen, sich seines Verstandes ohne Leitung eines anderen zu bedienen. Selbstverschuldet ist diese Unmündigkeit, wenn die Ursache derselben nicht am Mangel des Verstandes, sondern der Entschließung und des Mutes liegt, sich seiner ohne Leitung eines andern zu bedienen. Sapere aude! Habe Mut, dich deines eigenen Verstandes zu bedienen! ist also der Wahlspruch der Aufklärung. (Immanuel Kant,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56] und die Maxime, jederzeit selbst zu denken, ist die Aufklärung. (Immanuel Kant: Was heißt sich im Denken orientieren? In: Kant Werke.)[57] 그러므로 상관의 명령을 받는 장교가 직무수행 중에 그 명령의 합당함이나 유익함에 관해 공공연히 따지려 든다면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지만 학자의 입장에서 병역 의무의 결함에 대해 논평하고 독자층에게 판단을 호소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금지되어선 안 될 것이다. (이마누엘 칸트 외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옮김, 길, 2020, p.32)[58] 칸트는 1762년에 루소의 저술을 읽기 시작했다. 청년 시절의 칸트는 뉴턴으로부터 자연과학적인 세계 관찰의 원칙들을 진지하게 수용했다. 그는 『자연사와 천체 이론』에서 그 첫번째 정점에 도달했다. 루소로부터 그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루소의 역설은 인간 영혼 속에 감추어진 어떤 흔적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중략) 그러나 루소로부터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어떤 관점을 취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칸트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재미있는 측면도 얻어낼 줄 알았다. 인간의 실천적 인식에 대한 칸트의 관심은 루소를 통해 각성된 것이었다. 1765년에 칸트는 전해에 출판된 『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의 여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 "오직 이것(물리적 세계 인식)만이 인간의 명예를 세울 수 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지의 천민들을 멸시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44~345)[59] 1770년 무렵이 되자, 칸트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즉, 자신의 "도덕형이상학"이 "시초의 근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태도나 감정에 대한 가능한 고찰 영역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자신의 도덕형이상학이 즐겁고 교훈적인 발견에만 제한되어서는 안 되며, 개별적인 주관의 의욕 혹은 행위의 주관적 원리에 불과한 준칙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도덕형이상학자로서 칸트는 대단히 명확하고 순수하게 "도덕법칙", 즉 도덕성 일반의 최고 원리를 생각했다. 이 원리 안에서 경험적인 현상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48)[60]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완성하기까지는 10년 이상이 연기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1770년 3월 31일에 칸트는 내각에 명에 따라 논리학 및 형이상학 교수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도덕적 전문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를 기다린 것은 다른 과제들이었다. 10년 동안 그는 『순수이성비판』에 몰두했으며, 실천철학은 여기에서 단지 암시로만 드러났을 뿐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경험의 형이상학과 변증법적인 가상의 논리학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순수 이론이성과의 대결이 종결된 뒤에야 칸트는 비로소 실천이성, 즉 자신의 본래 사명에 전진할 수 있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48)[61] 도덕적 견지에서 실제 "선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칸트는 문제시되는 것이 세계의 사태가 아니라 주체의 능력임을 전제한다. 윤리적 견지에서 볼 때, 도덕적 의식 일반에 대해 능력 있는 주체만이 선하거나 악할 수 있다. 그런데 선의 근원이 되는 주체적 혹은 주관적 능력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의 정신적 능력인가? 칸트는 아니라고 답한다. 지능, 오성, 재치, 또는 학문적 지식은 해롭거나 악하게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질인가? 칸트는 이것 역시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는 용기와 인내 그리고 감탄의 기질을 가지고 선하게 행동할 수 있지만, 악하게도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운인가? 이것 또한 아니다. 권력이나 재산이나 인정 또는 건강 같은 행운을 통해 어떠한 일이 좋게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는 어떠한 도덕적 혹은 인륜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격인가?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존재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인격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격이 그 자체 스스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아 있는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정초』는 단순한 규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 밖에서도, 어떤 제한 없이 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 뿐이다." 규정된 또는 보편적으로 수행된 법칙, 행복감, 공리적인 유용성, 외적인 자산들과 내적인 재질들, 이 모든 것은 결코 도덕성의 최상의 원리에 구성적인 것들이 아니다. 오로지 의지만이 윤리적 가치를 지닌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54~355)[62] 1785년에 칸트는 도덕성의 합리적 근거를 "신적인 전능한 의지"에서 끌어내는 대신 전적으로 인간 의지의 자유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칸트는 1788년에 쓴 『실천이성비판』의 종결부에서 "내 안의 도덕법칙"을 그 어떤 다른 근거에서 칭송하지 않는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84)[63]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정초』는 세계를 잘게 쪼개어 더 이상 결합할 수 없는 세계로 보이게 만들었다. "도덕의 영역은 이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칸트의 도덕성의 이념에 대해 가장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이의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50)[64] 칸트도 윤리학 역시 경험적 부분을 지닌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한다. 이것은 "실천적 인간학"으로 특징지어진다. 여기서는 감성, 쾌와 불쾌의 감정, 본능과 욕망, 그리고 한 인물의 성격도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칸트는 순수한 도덕 철학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했다. 특히 도덕성이 퇴색한 시대에 도덕적 법칙을 순수하고 참된 본질 속에서 추구하려는 시도는 가치 있는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는 단지 도덕형이상학일 뿐이다. 이 내부에는 "가능한 순수의지"의 이념이 놓여 있다. 여기서는 도덕이 문제시되기 때문에, 이 의지는 동시에 순수한 "선의지"라야만 한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52)[65] 만프레드 가이어의 『칸트 평전』에 따르면, 앞선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새군주인 빌헬름 2세가, 계몽이 끼치는 종교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자 강경파 신학자 뵐너를 요직에 임명한 것이었고, 이러한 해석은 1900년대 독일의 학자인 딜타이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해석으로, (영문판) 캠브리지 칸트 전집에서도 이와 같은 설명을 제시한다. 반면 보다 현대의 연구자인 이안 헌터의 경우에는 뵐너의 칙령이 원칙적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부터 내려오는 프로이센의 전통적인 또 다른 계몽적 종교관, 곧 사적인 영역에서의 신앙의 자유와 공적 발언의 통제라는 이념에 의해서 제정되었다고 보고, 나아가 당대 프로이센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그로 빚어질 수 있을 법한 혼란을 막기 위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재임 기간 내내 이러한 전통에 기인하는 칙령이 강화 및 유지되었다고 본다.[66] 그는 『베를린 월간지』를 위한 연속적인 투고에서 종교철학자로서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이 강조하는 바를 명확하게 세웠다. 선한 삶의 활동적인 심성은 종교적 확신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지닌다. 그러나 칸트가 확신했던 것처럼, 종교가 도덕에서 비롯된다면 도덕철학만이 그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이 토대 위에서 믿음의 이론은 비판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95)[67] 『인간의 지배에 대한 선한 원리와 악한 원리의 대립에 대하여』는 출판 허가를 받지 못했다. (중략) 이러한 긴장된 상황에서 칸트는 『베를린 월간지』에 기고하고자 계획했던, 그의 근원적인 네 편의 원고를 독자적인 책으로 출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해 그는 우회로를 찾아야 했다. 우선적으로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신학부가 그러한 종류의 철학부 논문을 검열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냈고, 그런 연후 그 논문을 예나 대학의 철학부에 제출했다. 예나 대학의 철학부는 프로이센 밖에서 그 논문을 출판하도록 승인했다. 이렇게 해서 1793년 부활절에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가 출간되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397)[68] ein gewisses Volk (was in der Bearbeitung einer gesetzlichen Freiheit begriffen ist) ist zur Freiheit nicht reif; die Leibeigenen eines Gutseigentümers sind zur Freiheit noch nicht reif; und so auch: die Menschen überhaupt sind zur Glaubensfreiheit noch nicht reif. Nach einer solchen Voraussetzung aber wird die Freiheit nie eintreten; denn man kann zu dieser nicht reifen, wenn man nicht zuvor in Freiheit gesetzt worden ist (man muss frei sein, um sich seiner Kräfte in der Freiheit zweckmäßig bedienen zu können). Die ersten Versuche werden freilich roh, gemeiniglich auch mit einem beschwerlicheren und gefährlicheren Zustande verbunden sein, als da man noch unter den Befehlen, aber auch der Vorsorge anderer stand; allein man reift für die Vernunft nie anders als durch eigene Versuche (welche machen zu dürfen, man frei sein muss)." (Immanuel Kant,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69] 이러한 검열 조처는 칸트의 어조를 날카롭게 했다. 법적이고 종교적인 권위자의 절대명령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자유에 대한 신조는 더욱 급진화되었다. 국가에서나 집에서나 혹은 교회에서나 항상 되풀이되는 지배적인 관료적 선언에 반기를 들며 칸트는 이의를 제기했다. 왜냐하면 국가의 시민이란 것은 노예이거나 아니면 자유를 향한 성숙이 아직 덜 된 인간 일반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제에 따르면, 자유는 결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유에 미리 들어서지 못한다면, 자유를 향해 성숙할 수 없을 것이다. 자유로운 가운데 자신의 힘을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사람은 자유로워야 한다. 처음의 시도는 물론 조야하며, 일반적으로 어렵고 위험한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령 아래에 있고, 다른 사람의 배려 가운데 있다.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시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달리 이성을 위해 성숙할 방법이 없다."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조망하면서, 칸트는 자유 운동의 조야함과 위험성을 불가피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20)[70] 1789년 6월 17일에 시민계급은 국민의회를 선포했다. (중략) 프랑스 혁명에 대해 칸트는 열광적인 공화주의자이자 주석가였다. 자유는 칸트에게 일생 동안의 소망이었다. 그는 이 소망과 정치적인 시대사를 결합시켰다. 칸트는 자유와 평등 및 자주에 대한 자신의 이념을 자유ㆍ평등ㆍ박애라는 혁명의 외침 속에서 다시금 인식했다. 그는 이제 세계사적인 전망으로 이행가능하도록 자신의 비판철학을 정치화했다. 나이가 들수록 칸트는 더욱더 급진적으로 되어갔다. 90년대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칸트는 열정적으로 모든 것을 고찰하고 논의했으며, 많은 친지와 친구들이 그의 이러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언제나 정치적인 소식에 관심을 보였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11)[71] 검열관은 무엇보다도 1794년 부활절에 이미 2판 이상이 출간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대한 커다란 대중적인 관심을 고려해서 행동해야 했다. "궁중의 먹구름에서 나온 파문"은 피할 수 없었고, 이것을 칸트는 이미 1793년 5월 4일 괴팅겐의 카를 프리드리히 스토이들린 교수에게 보낸 서한에서 예고하고 있었다. 1794년 10월 1일 내각은 "왕의 칙령"을 칸트에게 선포했고, 이것은 칸트에게 10월 12일에 전달되었다. "자비로운 왕의 특별 명령에 따라" 뵐너는 칸트가 앞으로는 더 이상 종교적인 사태에서 책임질 일을 하지 말 것을 통보했다. 왕과 뵐너는 이미 오래전부터 불만을 가지고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성서와 기독교의 주된 교리를 왜곡하고 폄하하는 데 잘못 사용"하는가를 관찰했다. 그것은 무책임한 짓이고, "우리와 당신에게 잘 알려진 조국의 의도"에 반하는 행동이다. 이러한 경고 뒤에 노골적인 위협이 뒤따랐다. "우리는 존경스러운 당시느이 가장 확신에 찬 책임을 요구하고, 우리의 커다란 불쾌감을 모면하기를 당신에게 기대합니다. 당신은 앞으로 그와 같은 일에 책임질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당신의 의무에 합당하게 당신의 능력과 재질을 우리 조국의 계획이 갈수록 더 많이 실현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당신은 계속된 반항으로 확실히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01)[72] 파리에서는 루이 16세가 처형되었고, 혁명 법정이 열렸으며, 체계적인 테러가 합법화되었다. (중략) 1794년 10월 1일, 칸트에게 무엇보다도 종교 문제에서 어떠한 죄도 범하지 말라는 왕의 칙령이 떨어졌다. 이에 따라 종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간행해서는 안 되었다. 칸트는 스스로 자제하며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개략적으로나마 정치적 논평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국가의 질서와 존귀한 법을 직접 손대기 시작한 것이다. 1795년 4월 5일, 바젤에서 맺어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단독 강화에 인상을 받아, 그는 영구평화를 향한 그의 철학적인 기획을 써나갔다. 『영구평화론』은 그해 말엽에 모습을 드러냈고, 출판상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20~421)[73] 1797년 11월 10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죽음과 1798년 3월의 뵐너 장관의 면직은 칸트로 하여금 다시 한번 교회와 국가 그리고 종교와 법에 대해 자신의 비판적인 태도를 자유롭고 공공연하게 표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새롭게 계몽된 정부에 감사하게 여겼다. "반계몽주의자들의 모든 새로운 공격에 반하여 학문 분야에서 문화의 진보를 안전하게 해주는" 이 정부를 칸트는 믿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25~426)[74] 일생을 두고 보면, 칸트는 심한 병에는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단 하루도 병으로 인해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 점에 대해 그는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처방한 섭생의 근본 원칙을 따른 자신의 의지의 효과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병을 낫기 위한 치료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천적이고 철학적인 기술이었으며, 생명력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뿐 아니라 건강상의 관점에서 가능한 한 좋게 그리고 길게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41)[75] 칸트는 물론 허약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의 삶의 다음 몇 해 동안 생산적이도록 하는 정신적인 도전에 관계할 많은 시간을 갖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확고한 습관이 된 바 같이, 하인 람페가 매일 아침 5시 15분전에 깨우고 주인이 일어날 때까지 침실에서 기다렸다. 그는 옷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비단 띠를 한 노란색의 침실가운을 걸쳤고 머리에는 나이트캡을 썼는데, 삼각형의 작은 모자를 그 위에 고정시켰다. 그런 후에 연구하는 방으로 가서 두 잔의 온화한 꽃잎 차를 마시고, 점토로 된 파이프에 담배 한 대를 핀다. 다섯 시에 그는 책상에 앉는다. 이제 그는 오전 내내 연구할 시간을 갖는다. 40년을 교육에 종사하며 통틀어 268개의 연속강의를 하고 그는 1796년 7월 23일 마지막으로 강단아래에 서 있다. 물론 그는 다가오는 학기를 위해 아직도 강의를 알리고 있지만, 더 이상 강의할 상황에 있지 않음을 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46~447)[76] 야흐만은 자세하게 주의를 기울여 묘사했다. 즉, 칸트가 자신의 신체적 행위들과 반응들을 고찰하고 높은 나이에 드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신체는 자연으로부터 확실하게 80년이라는 수명을 살도록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연에게서 삶을 강탈한 셈이었다. 그의 신체의 전체 구조는 그렇게 많은 해를 버티고 유지하기에는 아주 허약했다. 그리고 또한 그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신뢰했던 바지안스키는 칸트가 어떻게 흔들리며 느슨한 신체라는 밧줄을 타는 체조기예가가 자신의 균형을 잃지 않는가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음을 확실히 한다. "그리하여 또한 그는 자신의 건강과 많은 나이를 자신의 고유한 업적으로 보았다. 그 스스로 지칭하는 바와 같은 예술품으로서 말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39~440)[77] 그는 약해진 몸 때문에 넘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었으나, 몸이 가볍기 때문에 심하게 넘어질 수 없음을 알고 익살을 떨기도 했다. 또한 피로감 때문에 의자에서 잠드는 횟수가 늘어났다. 의자 밑으로 굴러 가끔식 그런 채로 누워 있기도 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누군가가 도와주러 올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때로는 칸트를 아주 태연스럽게 괴롭히던 자그마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아침에 책을 읽을 때나 글을 쓸 때면 촛불 아래로 머리를 낮추는데, "무명으로 된 나이트캡에 불이 붙어 머리위에 환한 불꽃이 타올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 않고 맨손으로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불을 껐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59)[78] 바지안스키(Wasianski)는 칸트의 마지막 생애를 돌보았던 칸트의 학생이자 친구였다. 1801년 건강 때문에 더 이상 집을 떠날 수 없게 되자, 칸트는 바지안스키를 자신의 재산 관리인으로 지정했다. 바지안스키는 칸트가 죽은 뒤, 칸트의 생애 마지막 나날들에 대한 전기를 썼다.[79] 1803년 10월 8일에 칸트는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예사롭지 않게 아팠다. 그의 아버지처럼, 뇌졸중의 발작이 그를 갑자기 땅위로 밀어 넘어뜨렸다. 물론 그는 다시 회복되었으나, 그러한 타격은 그를 쇠약하게 했으며, 살려는 칸트의 의지가 꺾이게 되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고 거의 무엇인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주변에 잇는 사람을 더 이상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태연하고 침착했으며 평온했다. 그의 몸은 거의 해골처럼 수척해졌다. 1804년 2월 그는 죽음의 형상처럼 보였고, 그의 침대에서 종종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었다. 2월 12일 밤에 그는 마비된 듯이 시간을 헛되이 보냈으나 의식이 깨어 있기는 했다. 방에는 바지안스키가 머물고 있었다. 1시경에 칸트가 목마르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지안스키가 그에게 포도주와 물을 섞어 조금 달게 만든 음료를 마시도록 갖다 주었다. 조금 기운을 돋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맛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에겐 충분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삶과 노고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불명료하게 들리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게끔 그는 "그것으로 좋다" 하고 속삭였다. 새벽 4시 무렵, 칸트는 더 이상 바꾸지 않을, 반듯하고 한결같은 상태에 올바르게 누어 있다. 바지안스키는 죽음의 침상 곁에 서 있다. 오전에는 표정이 바뀌었다. 그의 눈은 뜬 채로 딱딱하게 응고되었다. 얼굴을 창백했다. 발과 손은 온기가 없었다.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맥박은 몇 초 동안 뛰다가, 이윽고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11시였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68)[80] 정확히 말하면, 이 세 질문은 해당 부분에서 같이 나타난다. 이는 「순수 실천이성의 규준」이라는 장이 칸트가 자신의 철학의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는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81] 다만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미학'이라는(특히 현대적 의미에서의) 카테고리로 일대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미학의 주요 텍스트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칸트가 해당 저서에서 다루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 일반이며, 그중 1부는(미감적 판단력) 미학과, 2부는(목적론적 판단력) 윤리학 내지는 종교철학과 연결된다.[82] <윤리형이상학 정초>와는 다른 책이다.[83] 인간의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무언가 경험을 쌓기 전까지는 인식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영국에서 주창되었고 주요 학자로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있다.[84]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본유관념(本有觀念)은 신에게 선물받은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경험 없이도 인간은 사색을 통해 진리를 도출할 수 있다. 수학 공식 같은 거라든지. 주창자로 데카르트가 대표적.[85] 여기서 칸트가 읽은 흄의 책은 『인간오성론』으로 추정되는데 이 책은 흄의 첫 번째 저서이자 대표작인 『인성론』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문체도 좀 더 다듬은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흄은 『인간오성론』에서는 나오지 않는 "인격동일성"에 관한 문제를 『인성론』에서만 논의했다. 만약 칸트가 『인성론』을 읽었다면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칸트는 흄의 인격동일성 문제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후대 연구자들은 칸트가 『인성론』은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86] 칸트의 유고를 보면, 피히테 때와는 달리, 청년 셸링의 칸트철학 개혁에 대해서는 칸트 자신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87] 1980년대 군부 독재에 대한 반감으로 대학생들이 좌익으로 폭주하였고, 그 잔향이 1990년대까지도 이어졌다.[88] 오죽 자주 나오면 대충 서양 사상가 같고 모르겠으면 칸트로 찍고 푸는 것이 윤리와 사상 선택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수법이다.[89]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자유진영의 대장이자 세계 1위 국력, 세계경찰 역할을 하는 나라이며 위안부는 미국의 심복들인 한국과 일본이 가장 주된 당사자에 이들의 화합을 해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며 네덜란드 등을 비롯 자유진영의 여러 나라들이 얽혀 있으며 미국이 일본을 쓰러트렸던 2차대전의 사건이므로 미국과 관련이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90] 그 전에도 이와 유사한 단어는 있었지만 지금의 세계 시민과는 다른 개념이었다.[91] 이 말까지는 칸트가 한 말이지만, 이 뒤의 말은 의 말을 인용한 말로써 칸트가 직접적으로 한 말은 아니다. 원문은 이렇다.
 아프리카의 흑인은 본래 유치함을 넘어설 만한 감정이라고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어떤 흑인이 재능을 보여주었다는 한 가지 예를 인용한 모든 이들에게 흄Hume은 이의를 제기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자신의 조국에서 다른 나라로 끌려온 수십만 명의 흑인들 중에서, 물론 많은 수가 자유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에서나 학문에서, 아니면 다른 훌륭한 특성에서 어떤 위대함을 보여주었던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백인들 중 몇몇은 밑바닥 삶에서 끈질기게 일어서서 빼어난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세상의 존경을 얻는다. 이처럼 두 인종간의 차이는 본질적이며, 그것은 피부색에서와 마찬가지로 심성의 역량에서도 크게 나타난다. "그들에게 만연된 물신 숭배의 종교는 인간 본성에서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기괴함으로 깊이 빠져들고 마는 어쩌면 일종의 우상 숭배일 것이다. 깃털이나 소뿔, 조개, 혹은 몇 마디 말로도 신성해지는 여러 가지 흔한 일들이 신성에 대한 맹세에서 숭배와 기원의 대상이 된다. 흑인들은 너무도 허황되지만 흑인의 방식에서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요상한 말로 지껄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분명 매질만이 그들을 서로 흩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1764)
[92] Kant’s position on the importance of skin color not only as encoding but as proof of this codification of rational superiority or inferiority is evident in a comment he made on the subject of the reasoning capacity of a “black” person. When he evaluated a statement made by an African, Kant dismissed the statement with the comment: “this fellow was quite black from head to foot, a clear proof that what he said was stupid.” It cannot, therefore, be argued that skin color for Kant was merely a physical characteristic. It is, rather, evidence of an unchanging and unchangeable moral quality. ㅡ Emmanuel Chukwudi Eze, "The Color of Reason: The Idea of ‘Race’ in Kant’s Anthropology", Postcolonial African Philosophy: A Critical Reader (1997)[93] Kant made an active contribution to racial ideology. To call Kant a racist is particularly legitimate because he was not simply “a child of his time” who would have parroted passively spread prejudices without being able to get out of this skin. On the contrary, he made an active, independent and elaborate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racial ideology, which he also regarded as a relevant part of his work. He explicitly represented his race theories in intellectual disputes against authors like Johann Gottfried Herder, who rejected this theory. (Racism allegations against Kant criticism of white reason)[94] 정확히 말하면, 인종에 대한 구분은, 피부색이라는, 경계가 모호한 기준을 통해서 인간을 구분하는 것이고, 이는 과학적으로 엄밀하고 보편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런데 칸트는 인종에 대해 발표한 소논문들에서, 다소의 임의적인, 혹은 사람들끼리 합의된 기준을 통해서 도입된 기준에 따르는 인종 개념을 인간이 잘 사용할 수 있다고 논한다. 또한 그는 이러한 인종들 간에 도덕적인 차이까지 있다고 주장하였다.[95] 칸트는 자신의 도덕 철학 체계를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던 1785~1793년 무렵에도 강의에서 인종차별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도덕 철학이 인종차별과 양립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즉, 그의 도덕 철학이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르면 유색인종은 선천적으로 그런 인간 이성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도덕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96] 원래는 철학자 찰스 W. 밀스의 말을 로버트 월드 서스먼이 인용한 것이다. (로버트 월드 서스먼 『인종이라는 신화』 김승진 옮김, 지와사랑, 2022, p.42 참조)[97] There is no evidence of any change in Kant's views at the beginning of the 1790s. In the 1792 version of his Physical Geography course, he still mentions, with apparent approval, Hume's claim that Blacks are naturally inferior. Kleingeld, who stresses this last point, does see a sharp change in Kant's views by the time he writes “Toward Perpetual Peace” in 1795, however, and the Metaphysics of Morals in 1797. In these texts, he condemns European colonialism, saying that Europeans had no right to appropriate other people's lands without their consent. That itself, as she notes, “grants a full juridical right” to the nonwhite peoples in these lands, which would seem to be incompatible with enslaving them. “The very fact that Kant regards Native Americans, Africans and Asians as (equally) capable of signing contracts,” she says, “indicates a shift in perspective.” Kant here explicitly rejects subjugating these peoples, moreover, even in the name of “civilizing” them. In notes for the “Perpetual Peace” essay, he also sharply condemns the slave trade (Ak 23:173–74), and in the essay itself he speaks of the “most gruesome and most calculated slavery” on the Sugar Islands (Ak 8:359). Finally, in the Metaphysics of Morals he argues against slavery altogether, except as punishment for a crime (Ak 6:283). Kleingeld takes all this to be evidence of a full change of heart, on Kant's part, as regards treating anyone with less than the full set of rights that white people grant to other whites. #[98] Kleingeld picks 1794–95 for the change in Kant's views that she describes, suggesting that Kant may have moved toward greater egalitarianism under the impact of the French Revolution.#[99]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 첫 문단에 있는 말이다. 워낙 유명해서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칸트의 기념물에도 새겨져 있다.[100] 원문은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거칠게 의미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무언가 나에게 나타나는 것 없이는 우리는 어떤 사물도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러나 우리 자신이 가지는 어떤 형식도 없다면 여전히 그 사물은 지각될 수 없을 것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순수이성비판 참조.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칸트의 이 말과 비슷한 형식의 말을 했다.(A 없는 B는 공허하며, B 없는 A는 맹목적이다는 식의 말) 아인슈타인은 1941년에 출판된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에서 "신앙 없는 과학은 공허하며, 과학 없는 신앙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했고,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1986년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를 향하여』“사회적 합리성이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했다.# 다만 양자가 비슷한 모양이라고 내용이 함축하는 바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매우 곤란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논리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잡담이며, 경험의 검증을 거치지 않는 논리는 공론이다라는 어록 또한 칸트의 이 말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101] Handle nur nach derjenigen Maxime, durch die du zugleich wollen kannst, dass sie ein allgemeines Gesetz werde.[102] 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e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est.[103] Wer sich zum Wurm macht, kann nachher nicht klagen, wenn er mit Füßen getreten wird. "윤리 형이상학"의 덕 이론에서, 비굴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설명하는 대목이다(6: 437). 재미있게도 그 앞 부분에는 독일인들은 카스트제가 있는 인도 다음으로 허례허식이 담긴 존칭을 남발하고 있을 것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나온다.[104] Aufklä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verschuldeten Unmündigkeit.[105] Aus dem krummen Holz der Menschheit noch niemals ein gerades Ding gemacht wurde.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1784)』에 나오는 유명한 명언이다(7: 23).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면서 이기적인 동물적 성향도 지니고 있어서, 자신을 지배하는 법이 필요하지만 그 법에서 제외되고 싶어하므로, 법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vollkommene Auflösung)'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어렵기는 하지만 인류가 반드시 해결해야만 되는 문제이기도 하기에, 1) 헌법의 본질에 대한 가능한 한 올바른 개념, 2) 수많은 세계사적 사건들을 통해 실천된 훌륭한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3)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선의지가 갖춰진다면,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아주 늦게나마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칸트는 얘기한다.[106] Der ewige Friede ist keine leere Idee, sondern eine Aufgabe, die, nach und nach aufgelöst, ihrem Ziele beständig näher kommt. 영원한 평화(영구평화론)에서.[107] 원문은 "denn wie kann ein böser Baum gute Früchte bringen?" (6: 44-5) 이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나오는 말로서, '선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가 열리고 악한 나무에서 악한 열매가 열린다'는 마태복음 7장 17-8절을 변형한 구절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이 선천적인 악함을 극복하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이해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긴 하지만, 선천적인 선함을 극복하고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이해하기란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에, 가능성만으로 따진다면 악한 사람이 선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순 없다. 우리가 그 타락에도 불구하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즉, 악한 나무에도 '선의 싹(Keim des Guten)'이 순결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108] 원문은 "Fremdwörter verraten entweder Armut oder Nachlässigkeit." 후술할 번역논쟁을 상기시키는 듯한 칸트의 명언. 독일 내에서 자주 언급되는 명언이다.[109] "du kannst denn du sollst. (영문: Ought implies can.)" 이 말은 칸트가 한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프리드리히 실러가 '철학자들(Die Philosophen, 1796)'이란 시에서, 칸트의 사상을 요약하면서 한 말이다. 칸트가 실제로 한 말은 이렇다. "daß solche geschehen sollen, so müssen sie auch geschehen können, (그런 일이 마땅히 일어나야만 한다면, 그것 또한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순수이성비판(1781)』)" "Denn, wenn das moralische Gesetz gebietet, wir sollen jetzt bessere Menschen sein: so folgt unumgänglich, wir müssen es auch können. (왜냐하면 도덕 법칙이 우리에게 이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불가피하게 따른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793)』)" 이후 피히테, 헤겔, 쇼펜하우어가 실러의 말(du kannst denn du sollst)을 마치 칸트가 한 말인양 말함으로써 이 말이 칸트가 한 말인 것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110] 『판단력 비판』이 쓰여지기 26년 전에 나온, 칸트 미학의 초기저술.[111] 보통 『형이상학 서설』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이 독일어 원제의 가장 마지막 단어만을 따서 원음 그대로 『프롤레고메나』라고도 번역되기도 한다. 『순수이성비판』의 방대함을 덜기 위해 칸트 자신이 좀 더 짧고 쉽게 쓴 이론 철학 교본이다.[112] 주제 면에서는 『실천이성비판』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서술이 평범한 인간 인식과 대중적 윤리 지혜로부터 분석적으로 진전해가고 있어 일반 독자의 접근이 비교적 용이하다. 단, 어떤 연구자들은 이 책의 3장 부분이 실천이성비판에서 개정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책의 3장에서 칸트는 자유에서부터 도덕 법칙이 맞다는 서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도덕 법칙이 먼저 인식되고 그 다음 그 근거인 자유가 참임을 알게 된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113] Sitte(Sitten은 Sitte의 속격)이라는 단어는 한국어로 1:1 대응하기가 쉽지 않아, '윤리'로도 번역 가능하고 '도덕'으로도 번역 가능하다. 다만, 칸트에게서 헤겔 이후의 철학자들에게는 친숙하다고 할 수 있는, Moralitat과 Sitte간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각에 상응하는 도덕과 윤리라는 번역어 또한 의미상으로는 큰 문제 없이 교차적으로 사용가능하다.[114] 칸트전집에서는 보통 『형이상학 서설』과 같이 포함되어 수록된다. 19세기 독일어권 과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책이다. 외르스테드가 강한 영향을 받았고, 쿠르트 괴델 역시도 비엔나 서클에서 이 책을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한다.[115] 참고로 판단력 비판 서문은 1790년에 나온 제1판의 서문과 1799년에 나온 제2판의 서문이 다른데, 제2판 서문은 칸트가 출판사로부터 서문이 너무 길다는 항의를 받아 제1판의 서문을 삭제하고 새로 쓴 것이다. 다만 삭제된 제1판 서문에는 3대 비판서에 대한 칸트 본인의 개괄적인 설명이 들어 있어 칸트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길잡이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국내에 나온 판단력 비판 번역본들에는 모두 이 제1판 서문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116] 종교는 인간의 "모든 의무들을 신의 계명들로 인식함"에 그 참뜻이 있고, 진정한 성스러움은 인간이 선한 원리에 따라 '윤리적 공동체' 내지 '덕의 나라'를 지상에서 이룩하는 데 있음을 역설하는 저서. 백종현 및 김덕영은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에 이어 성스러움(聖)을 다룬 제4비판서라고 칭하기도 했다. 내용상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 2부와 겹치는 부분이 많으며, 칸트 스스로는 해당 저작이 자신의 3질문, 즉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에 대한 답을 다룬다고 한 바 있다.[117] 보통 『영구평화론』로 불린다. 칸트는 인권이란 "인간들 사이에만 있을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것"이자 "신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신성한 것"이라고 보았다. 신성성은 "우리가 인간들을 결코 한낱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런 인권 보장이 법치 국가에서만, 나아가 국제적으로는 '보편적 국가 연합'을 이룸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 책. 이후 국제정치학의 이상주의(후에는 자유주의)적 '세계정부' 구상이나, "민주 국가들끼리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도일의 민주평화론의 기초가 되었다.[118] 1부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와 2부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윤리형이상학이란 ‘자유의 형이상학’으로서 자유의 법칙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말한다. 1부는 법철학(정치철학)을 다루며, 2부는 『실천이성비판』에 뒤이어 도덕철학을 다룬다. 법은 외면적인 자유의 법칙을, 도덕은 내면적인 자유의 법칙을 그 내용으로 갖기에, 양자는 하나로 묶이면서도 서로 구별된다.[119] 칸트가 오래 수행해 온 인간학 강의의 강의노트를 편집한 책이며, 그가 마지막으로 출판한 책 중 하나이다.[120] 이 작품은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과 함께 칸트의 생전에 그 스스로 출간한 마지막 저술이다.

본래 이 작품은 칸트가 순수한 종교론과 경험적 계시 종교론의 충돌로서의 철학부와 신학부와의 논쟁만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글의 서두에는, 종교를 검열했던 당시 황제가 죽었으니 이제 그의 신민인 한 해당 내용을 출판하지 않겠다는 맘에 안드는 맹세는 깨도 되는 거 아니냐는 내용이 있다(...)

추가로 ‘영혼의 장소’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부학적-심리학적 분과인 의학부와 심리학적-형이상학적 분과인 철학부 사이의 논쟁, 순수한 법론과 경험적 정치의 충돌에 대한 철학부와 법학부의 논쟁으로까지 확대 구성하게 된 것이다.
[121]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포함.[122] 『계몽이란 무엇인가』, 『영원한 평화』, 『학부들의 다툼』 포함.[123] 한국칸트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124] 칸트학회의 한길사 번역판본은 칸트의 저서가 방대하여 그 안에서도 세부적으로 연구가 갈리는 이유 때문에, 해당 저서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한국 학자 위주로 배정되어 번역되었다.[125] 칸트학회의 경우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칸트전집 소개 페이지에서 책의 역제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홈페이지에 안내된 대로 출판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칸트학회의 경우 한 권에 칸트의 여러 저서를 묶어서 출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한국 칸트학회가 임의로 묶은 것이 아니라 칸트 후대의 '베를린 학술원판' 칸트 묶음집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126] das Wort transscendental (...) bedeutet nicht etwas, das über alle Erfahrung hinausgeht, sondern was vor ihr (a priori) zwar vorhergeht, aber doch zu nichts mehrerem bestimmt ist, als lediglich Erfahrungserkenntniß möglich zu machen. Wenn diese Begriffe die Erfahrung überschreiten, dann heißt ihr Gebrauch transscendent, welcher von dem immanenten, d.i. auf Erfahrung eingeschränkten Gebrauch unterschieden wird.[127] 다만 이러한 깔끔한 구분이 무색하도록 칸트 본인도 생각보다 여러 부분에서 transzendental과 transzendent를 착각한다(...) 이러한 착각은 대부분의 경우 transzendental을 transzendent의 의미로 잘못 사용되는 경우이다.[128] 보통 플라톤과 칸트가 자주 비교되나, <<순수이성비판>>의 논리학적 체제를 보아도 그렇거니와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과 문제의식이 칸트에게 플라톤 이상의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이 칸트철학 이해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다.[129] 매우 거칠게 요약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것(존재자)들의 존재방식 및 그 분석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최고 유(類) 개념들로 양, 질, 관계, ... 등을 제시하고 이를 범주라 불렀는데, 중세 기독교 철학에서는 그런 범주들은 존재하는 것들 내부를 분별ㅡ양, 질, 관계 등은 어떤 것을 부분적으로 논하므로ㅡ할 뿐이고, 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들 자체를 규정하는 초월범주(초월주, 초월자)들이 있으며, 존재(임/함), 완전함, 참됨, 선함, ... 등이 그것ㅡ존재 등은 어떤 것을 전체적으로 규정하므로ㅡ이고, 이것들은 결국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게 한) 기독교적 창조신의 성격과 결부된다고 보았다. 나중에 독일 근대 철학계가 이 개념들을 오해했든 정밀화했든 재규정했든 간에 어쨌든 수용하였는데, 특히 칸트가 이 개념들을 건드린 이후ㅡ특히 칸트는 transzendent(<-> immanent)와 transzendental을 분리하였다ㅡ개념들의 독특성과 파급력이 너무 대단해졌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칸트화한 이 개념들이 선대 철학들과의 연속성에서 파악되어야 더욱 적절한가, 아니면 칸트적 고유성에서 파악되어야 더욱 적절한가이다. 전자를 지지한다면 초월 계열이 보다 적절한 번역일 것이고, 후자를 지지한다면 칸트적 고유성을 드러내는 다른 번역어가 보다 적절한 번역어일 것이다. 이것이 한국어 번역 논쟁의 '외면적인' 주요 쟁점이다.[130] 칸트 철학 및 문헌학의 대가로 알려진 노르베르트 힌스케 교수의 제자이다. 뒤 논문은 그 영향하의 것. 한길사 칸트전집 가운데 <<논리학/교육론>>의 공동 역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참고로 기출간된 <<논리학/교육론>>에는 역자 스스로 인정한 오역과 난역이 다수 있다. 역자 블로그에서 '논리학' 파트의 수정표를 확인할 수 있다.[131] 크리스티안 볼프는 합리론(이성주의)의 거두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의 제자로 독일철학사상 라이프니츠-볼프학파의 학맥을 만들었으며, 칸트의 학문적 할아버지(즉 칸트의 스승의 스승)이다.[132] transzendent의 대립어는 immanent인데 주로 '내재(적)'이라고 번역된다. 이 번역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133] 경성제국대학 출신인 최재희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번역은 근대 일본의 번역 전통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예컨대 a priori를 선천, a posteriori를 후천으로 번역한 것은 니시 아마네(1829-1897)로부터 비롯된 전통이다. 참고로 constitution 헌법(憲法), science 과학(科學), technology 기술(技術), art 예술(藝術), psychology 심리학(心理學), instinct 본능(本能), faculty 능력(能力), impulse 충동(衝動), sentiment 정서(情緖), impression 인상(印象), consciousness 의식(意識), space 공간(空間), time 시간(時間), reason 이성(理性), moral 도덕(道德), principle 원리(原理), notion 개념(槪念), idea 관념(觀念), ideal 이상(理想), phenomenon 현상(現象), abstract 추상(抽象), concrete 구체(具體), definition 정의(定義), extension 외연(外延), comprehension 내포(內包), deduction 연역(演繹), induction 귀납(歸納), affirmative 긍정(肯定), negative 부정(否定), universal 전칭(全稱), particular 특칭(特稱), proposition 명제(命題), reduction 환원(還元), generalization 개괄(槪括), subsumption 포섭(包攝) 등을 비롯한 무진장 다수의 서양어-한자어 번역이 니시 아마네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결과를 오늘날 한자 문화권이 공유하고 있다. 특히 칸트 철학의 또다른 핵심어들 중 subjekt를 주관, objekt를 객관으로 번역한 이도 니시 아마네인데, 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그 스스로 중간에 바꿔서 정착한 번역으로, 당초에는 전자를 차관(此觀), 후자를 피관(彼觀)이라 번역했다. 此는 '이(것) 차' 자이며, 彼는 '저(것) 피' 자이다. (김성근, 2014.03 참조)[134] 교토제국대학 철학 교수였던 구키 슈조(1888-1941)의 영향하에서 확장되고 오늘날 일본 및 적지 않은 한국 학계에서 통용되는 번역이다. 구키 슈조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transzendental이 a priori한 측면으로도 경험적인 측면으로도 언급된다 보았고, 하이데거를 직접 만나 하이데거 특유의 transzendental 개념도 접하였다. 이에 '선험'은 transzendental의 전체 철학사적 맥락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판단, 지금과 같은 번역 조류를 제안한 것이다.(仲原 孝, 2007 참조) 백종현이 최재희 번역을 일부 일신하게 된 것도 (하이데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현대 일본 학계의 동향에 영향 받은 탓이 크다. 그래서인지 반백종현파에서는 종종 백종현의 번역은 하이데거의 냄새ㅡ하이데거는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라는 문제작에서 그 특유의 문제적 칸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백종현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는데, 하이데거의 모교인 동시에 그가 교수와 총장을 지낸 곳이다.ㅡ가 난다는 투의 지적을 하곤 한다. 덧붙여 한국 내에서 transzendental은 사실 칸트학계의 틀을 벗어나면 일본 학계를 본받아 '초월론'으로 번역하는 축이 비교적 강세인데, 특히 헤겔학계, 현상학계, 하이데거학계 등에서 자주 보인다. 이외에도 Verstand를 '지성'이라 하지 않고 '오성'이라 하고, Einbildungskraft를 '상상력'이라 하지 않고 '구상력'이라 하는 등등의 경우가 있다면 역시 근현대 일본적 번역을 따른 것이다. 다만 이들 학계에서도 백종현 번역을 의식하여 a priori는 '선험', transzendent는 '초험'이라고 해주곤 한다.[135] 현대 일본 칸트학계식 번역어를 파악하려면, 사카베 메구미 등 저, 이신철 역, <<칸트사전>>을 보라. 이 책은 1997년 일본 칸트학계가 낸 칸트사전의 국역판이다. 참고로 백종현식 번역어는 2019년 그 스스로가 낸 <<한국 칸트사전>>으로 집약되었다.[136] 참고로 현대 일본 학계의 경우도 현재 번역 원칙에 불만의 목소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transzendental을 초월로 하고 transzendent는 초절(超絶)이라고 하자는 등의 의견도 있다. 앞서 언급된 나카하라 다카시(仲原 孝)부터가 그러하다.[137] '선천'이라는 표현은 때로는 생득적을 뜻하고 또 때로는 경험 독립적임을 뜻할 수도 있는 a priori의 원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전자만을 지칭하는 좁은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에 이제 근대철학 일반적에서는 번역어로 사용하지 않는다.[138] 아래의 기사를 잘 뜯어보면, 이는 칸트학회 내에서 해당 번역여에 합의를 보지 못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139] 순수이성비판이란 단어는 순수한 한글이 아니라, 본래 한자로 되어 있는 단어를 한국어로 음차한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純粹理性批判이란 단어는 원래 일본의 번역본에서 먼저 사용된 단어이다. 따라서 이것이 잘못이라면 이렇게 번역된 단어자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140] 그리고 이 번역자들이 21세기적 문체로 재번역하지 않은 것을 탓할 수도 없는데, 박영사판 <<판단력비판>>의 번역자 이석윤 교수는 2018년에 사망하였고, 최재희 교수도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그들의 번역을 더 이상 수정할 수도 없다.[141] 칸트학회 번역본 역시 대부분의 단어를 통일하여 번역[161]하고 있으나, 해당 단어는 칸트학회 번역어 사전에서 제외되었으며, 아직 해당 단어가 들어가는 저서들이 번역되지 않아 어떻게 번역될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142] transzendental의 의미를 비슷한 형태인 transzendent(초월)과 유사한 것으로, 그러니까 뭔가 초능력 비슷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 이 번역의 대표적 단점인데, 이러한 오해는 칸트 생전부터 원어민인 독일인에게도 종종 있었다. 오죽 오해가 많았으면 순수이성비판을 쓴 다음에 쓴 형이상학 서설에서 그렇게 읽지 좀 말라고 친절하게 (위에 나타나는) 해설을 써줬겠는가.[143] 감정 싸움이 상당히 개입된...[144] 단순 교양으로 볼 사람이면 당연하지만, 전문 연구자의 경우에는 칸트 저술과 연관된 역사와 연구 사항을 직접 국내외의 여러 논문을 읽어가면서 확인하므로, 백종현의 해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145] 비트겐슈타인 연구자이다.[146]러시아칼리닌그라드[147] 러시아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의 시설을 활용해 1967년에 칼리닌그라드 대학교를 설립했고, 이 학교는 2005년에 임마누엘 칸트 발틱 연방대학교로 교명을 바꿨다.[148] 물론 교수직을 얻지 못했다.[149] 윤리형이상학 덕론에서 '술과 아편 등은 우리를 자연의 경향성에 종속시킨다'고 비판하면서도, 진정한 악덕은 그런 술을 절제하지 못하게 하는 준칙(일상적으로 말하면 즐거움을 위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을 마시기 위해 술을 마시는 행동방식)에 있다고 한 적 있다. 덤으로 술은 금지하면서 오히려 아편은 기호식품으로 권하는 이슬람교의 율법이 이상하다고 깐다(...).[150] According to Kühn, whose acclaimed biography of the philosopher has just been published in Germany, Kant also had "amorous interests" in two women - though there is no evidence these were consummated. It was only at the age of 57, after Kant had published his most famous work, his Critique of Pure Reason, that he was in a position to support a wife. "By this time it was too late," Kühn said. #[151]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연한 차 한 잔과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연구를 하는 등의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에 나온다.(p.446) 다만 이 시기에 '유고'가 작성되었다고 나오지, 3시 30분의 산책과 시계 이야기는 평전에 나오지 않는다. 3시 30분의 산책으로 사람들이 시간을 맞췄다는 이야기는 하인리히 하이네가 한 이야기로, 하이네의 이야기는 그 자신의 편견이 많이 들어가 있는 이야기라서 신뢰성이 부족하긴 하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칸트는 사교적인 사람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것이 병적으로 '강박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이네가 칸트의 엄격한 도덕 법칙을 보고선 그의 규칙적인 생활을 마치 강박적인 방식(시계 이야기)으로 표현했던 것. (비슷하게 하이네는 헤겔이 "나도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비꼬아 말한 적이 있는데, 헤겔 학계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이네가 만들어낸 것으로 취급한다.)[152] 이마누엘 칸트의 생애를 기술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삶도 사건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의 북동쪽 경계에 있는 옛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의 조용하고 외진 조그만 골목길에서 기계적인 질서의 엄격한 독신의 삶을 살았다. 나는 그곳의 성당에 걸려 있는 커다란 시계가 지역 주민인 이마누엘 칸트만큼 건조하고 기계적으로 자신의 일과를 수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강의 원고를 읽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모든 일과가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의 이웃들은 이마누엘 칸트가 회색 연미복을 입고 손에 스페인산 작은 지팡이를 든 채 문 밖으로 나와 작은 보리수 가로수 길을 걸어가면, 수도원의 시계가 3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중략) 칸트의 외적인 삶과 그의 파괴적이고 세계를 으스러뜨리는 사유는 놀라운 대조를 보인다! 실로, 쾨니히스베르크의 시민들은 이러한 사유의 완전한 의미를 예감할 수도 있었고, 단지 인간만을 처형하는 사형집행인에게서보다 칸트에게서 더 무서운 공포심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칸트에게서 철학 교수의 모습만을 보았고, 정해진 시간에 칸트가 지나가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면서 그들의 손목시계를 맞추었을 뿐이다. (하인리히 하이네, 저서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제3장 중(中). / 회화나무판 국내 번역본 166p ~ 167p.)[153] Das Billiard Spiel war seine eintzige Erholung; Wlömer und ich, waren dabey stets seine Begleiter. Wir hatten die Geschicklichkeit in diesem Spiel beynahe aufs höchste gebracht, giengen selten ohne Gewinn nach Hause; ich habe den frantzösischen Sprachmeister gantz von dieser Einnahme bezalt; Weil aber in der Folge Niemand mehr mit uns spielen wolte; so gaben wir diesen Erwerbs Artickel gantz auf, und wählten das l'ombre Spiel welches Kant gut spielte. (Reicke 1860, 49; rpt. Malter 1990, 19) #[154] 실제로 프랑스 란제리 브랜드 Louisa Bracq의 '칸트 여성 란제리 컬렉션(Kant women's lingerie collection)'으로 가터벨터가 판매되고 있는 등 구글링하면 많이 찾아볼 수 있다.[155] 나머지 둘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162]피에르시몽 라플라스다.[156] 요한 하인리히 블뢰머[157] 야코비는 칸트와 같은 시대 사람이지만 칸트 철학의 비판자였다. 특히 그가 제시한 일명 '야코비의 딜레마'는 칸트 철학의 근간을 흔들 만한 결정적 치명타로서 칸트적 이원론의 한계를 대두시켰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독일관념론이 피히테-셸링-헤겔의 일원론적 경향으로 이행하게 되는 데에 주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야코비는 또한 당대 독일 사상계 내에서 스피노자의 재조명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칸트적 이원론의 대안으로서 셸링과 헤겔 등의 스피노자적 일원론 경향이 자연스레 나타났다. 참조 오늘날의 칸트주의자 중에서는 야코비에 대한 재반박으로 칸트를 옹호하려고 시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158] 해당 초상화는 원래 요한 크리스티안 폰 만리히(1742~1822)가 그린 야코비의 초상화를 칼 윙엔더(1812~1894)가 따라 그린 사본이다. #[159] 동시대의 저널리스트, 토마스 드 퀸시의 『임마누엘 칸트의 마지막 날』에 나오는 일화다.# 외국에서는 "커피! 커피!", "육지다! 육지!"가 밈으로 자주 쓰이기도 한다.[160]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730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