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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뤼흐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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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네덜란드의 가톨릭 라디오 방송(KRO)이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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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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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colcolor=#ffffff> 스피노자
Spinoza
파일:external/i01.i.aliimg.com/Benedictus-Spinoza-Dutch-Philosopher-Classical-Portrait-Home-Decor-OIL-PAINTING-ON-CANVAS-Hand-Painted-FREE-SHIPPING.jpg
본명 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Spinoza)
라틴어: Benedictus de Spinoza
출생 1632년 11월 24일
네덜란드 공화국 암스테르담 요덴부르트 유대인 거주구역
사망 1677년 2월 21일 (향년 44세)
네덜란드 공화국 헤이그
직업 철학자, 렌즈 세공업자
서명 파일:바뤼흐 스피노자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실체와 신3.2. 역량과 코나투스3.3. 인식과 정서3.4. 적합한 인식과 공통 개념3.5. 사회와 행복
4. 영향과 평가5. 논쟁
5.1. 스피노자의 결정론은 인간의 자유를 배제하는가?
6. 저서7. 어록
7.1.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의 저자로 오도
8. 관련 강의 영상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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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학자들의 왕. 신학으로부터 철학을 구출해 낸 철학의 그리스도.
질 들뢰즈
그대는 스피노자주의자거나 아예 철학자가 아니다.
헤겔
네덜란드합리주의 철학자. 실체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르네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반대하고 일원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이라는 실체에서 산출되는 양태들은 모두 '하나'의 인과관계로 귀속되므로 세상은 '필연적'이며 그 세상 속에서 만물은 자신을 유지하려고 하는 '코나투스(conatus)’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코나투스는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일치'시키려는 일종의 관성을 의미하는데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도, '이성'을 통해 각자의 욕망 추구가 내적인 공통점에서 '일치'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서로가 협력할 수 있고, 그런 협력을 통해서만 행복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 견해를 펼치기도 했다.

2. 생애

그의 조상은 포르투갈 세파르드 유대인 혈통으로서 유럽의 종교개혁기에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떠나 그나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정착했다. 뒤늦은 정착에도 아버지의 사업은 성공하여 네덜란드 유대인 사회에서 꽤 자리를 잡았었다. 아버지는 일찍 사망했지만 젊은 그는 아버지 사업의 후계자로 인식되고 있었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나 랍비가 될 재목으로도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을 부정하고 유대교 교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24세에 파문당해 유대교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그는 낮에도 저주받고 밤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잠잘 때도 저주받고 일어날 때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인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항상 그의 죄에 노여워하실 것이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를 덮쳐 그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1656년 7월 27일, 스피노자가 유대교회의 종교의식에 따라 파문되었을 때, 파문 문서 내용 중에서...
율법서에 나오는 거의 모든 저주를 퍼부었던 그 유명한 파문은 유대인 사회를 통틀어 살펴봐도 가장 가혹한 파문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러한 파문과 함께 유대인 사회는 그와 교제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였다. 당시 유대인은 관리가 될 수 없었으므로 유대인 사회에서 파문당해 쫓겨난다는 것은 곧 생계 수단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도 파문당한 사람과 거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신앙심을 증명하려는 한 광신자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잠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렌즈 깎는 기술을 배운 뒤부터는 하숙집 다락방에서 은거하면서 렌즈갈이를 직업 삼아 극히 단순한 생활을 반복했다.[1] 가끔 피우는 담배가 유일한 취미였다. 렌즈 가공을 하고 남는 시간엔 책상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거나 철학을 연구했고 때때로 친구들이나 다른 질문자들과 서신을 주고 받는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다락방의 합리론자'라는 그의 별명은 여기에서 나왔다. 또한 하숙집 주인 가족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고 온화한 철학자로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유대인 사회와는 단절이 되었고 가족도 그와 연을 끊었지만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삶은 아니라서, 여러 친한 친구들이 있었고 스피노자 연구 모임이 있을 정도로 사상적인 팬들도 있었다. 생계도 렌즈 가공만으로 유지된 건 아니고 친구와 지지자들이 연금 형식으로 보낸 돈도 많은 보탬이 되었기에, 풍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난에 시달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딱히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다. 수중의 돈은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전부 서적을 구매하는데 사용했고, 옷차림 또한 검소해서 외출용 옷과 평상시 입는 옷 두벌만 가지고 있었다.[2]

그의 철학은 상대적으로 관용적이었던 네덜란드에서조차 위험했기 때문에 그의 책이 떳떳하게 출판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신학정치론』은 익명으로 출간되었으나 큰 논란을 일으켰고 그의 대표 저서인 『에티카』는 출간을 시도하다 포기하여 사후에 출판된다. 생전에 그의 이름으로 출간한 책은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가 유일하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데카르트 철학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 책을 저술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는 이 책을 통해 데카르트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독일 팔츠 선제후국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로 초빙을 받기도 하였으나, 한달 정도 고민하다가 거절한다. 이 때 쓴 사양하는 편지도 유명하다.[3]

그는 4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이를 두고 렌즈를 가공하면서 생기는 유리가루를 많이 마셨던 것이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형도 폐질환으로 사망한 것을 토대로 가족력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말년에 그는 자주 아팠기에 스스로의 죽음을 예상했는지, 재산을 정리해 놓았다.[4] '죽음 앞에서의 공포는 필연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다'는 그의 철학을 스스로 증명하기라도 하듯, 죽는 날 당일에도 평소처럼 닭고기 수프를 맛있게 먹고 친구인 의사와 하숙집 주인과 잡담을 나누기도 하다가, 저녁 때 보니 죽어 있었다고 한다.

3. 사상

3.1. 실체와 신

기존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세상 모든 것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제일 첫번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5] 그 첫번째 원인이란, '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스콜라 철학자들은 실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여기서 학자들을 괴롭히는 문제점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신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면서도, 신이 '첫번째 원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이 '신'을 스스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된다는 것이 스콜라 철학자들의 결론이었다. 즉, 스스로가 스스로의 원인이 된다면, '신의 원인'도 '신'이 되므로, 세상의 '제일 첫번째 원인'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 '신'의 원인이라는 것을 좀 더 생각해보면, '신'은 동일한데 단지 변화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분석해본다. 변화는 '변화의 대상'과 '그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 그리고 이로 인해 산출된 '그 변화의 결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변화의 작용'을 '변용(affectio)'이라고 하고, 그렇게 변용되어 산출된 결과를 '양태(modus)'라고 부른다.[6] 이를 실체에 적용해보면,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즉 자신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반면 양태는 실체의 변용(변화한 모습)으로,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 즉 자신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것의 개념이 필요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웃음은 얼굴을 필요로 하므로 양태이다. 얼굴의 변화한 모습이 바로 웃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얼굴이 실체인가? 그렇지 않다. 얼굴은 몸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얼굴 역시 양태이다. 그렇다면 몸이 실체인가? 그렇지 않다. 몸은 또다시 자신의 존재를 위해 다른 여러 것들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최초의 근본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7] 그것이 바로 '실체'이다. 이 실체는 '자기가 자기 존재의 원인' (Causa Sui)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8] 스피노자는 기존 스콜라철학자들이 논의한 바와 같이, 이 유일한 실체를 '신'이라고 부른다.[9]

따라서 유일한 실체는 신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 실체의 무한한 변용으로부터 무한한 양태들이 산출된 것, 곧 '세상 만물'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신이 '첫번째 원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은 "동일한데 단지 변화했을 뿐"이어야 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점을 발견한다. 신은 동일한데 단지 변화했을 뿐이고, 이러한 신의 변용이 결국 '세상'이 된다면, '신은 곧 세상'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 첫번째 원인(실체)은 나머지 결과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면, 애초에 인과관계를 거슬러 올라가 첫번째 원인을 찾아가는 논리 자체가 붕괴되지 않는가?

즉, 기원을 찾아가는 최초의 질문이 무의미해지므로, '실체가 독립되어 있다'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모순이다.[10] 이는 마치 '둥근 사각형'을 말하는 것과 같아서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과 세상 만물의 관계에 있어서의 '신'은, 세상과 독립된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세상과 합쳐지는 '내재적 immanent' 원인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세계관처럼, 독립된 존재로서 인간세상에 개입하는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신을 믿는 것은 단지 '미신'에 불과하다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11]

스피노자는 세상의 내재적 원인으로서 끊임없이 양태들을 낳는 이 '실체'를 '능산적 자연(생산하는 자연)'으로 이해한다. 이 실체가 무한히 변용되어 나타나는 수많은 양태들, 즉 세상의 모든 자연 만물들은 '소산적 자연(생산된 자연)'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본다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이라는 구분은 임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소산적 자연인 양태 또한 그 자신의 내재적인 힘에 의해서 끊임없이 또 다른 양태들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즉, 실체는 자연 만물이라는 수만가지의 다양한 양태들로 표현되면서도, 그들 양태 각각 모두는 다른 양태들을 산출할 수 있는 내재적 원인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체인 신과 (그 신의 양태인) 자연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신은 자연 만물을 산출하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그 산출된 결과이므로, "신은 곧 자연" (Deus sive Natura)이다.[12]

데카르트는 실체를 '신, 정신, 물질'이라고 정의했지만,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실체는 오직 '신' 하나뿐이며, '정신과 물질'은 그러한 신에서 산출된 양태의 '속성'일 뿐이다. 즉,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 '정신'과 '물질(신체)'이라는 속성들은, 사실 하나의 실체를 가리키는 것일 따름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밧줄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누군가 이에 대해 '이 밧줄의 길이는 10미터다'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이 밧줄의 무게는 10킬로그램이다'라고 말한다. 이때 우리는 두 사람이 동일한 밧줄에 대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3] 즉, 두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말하든, 그들은 동일한 밧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피노자가 인간의 '사유(정신)'와 '연장(물질)'을 말할 때, 그것은 동일한 존재(실체)에 대해, 각자 자신의 속성에 해당되는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속성은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결에 따라, 서로를 각각에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관념의 질서와 연결은 사물의 질서와 연결과 동일하다"고 말한다.[14] 이렇게 정신이 움직이면 똑같은 질서에 의해 물질인 신체도 움직인 것이라고 보는 스피노자의 실체 이해를 평행론이라고 일컫는다.[15] 정신에 기반한 '이성'과 신체(물질)에 기반한 '욕망' 역시, 같은 질서에 의해 똑같이 움직이므로, 스피노자 철학에 있어서 이성적인 것은 욕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3.2. 역량과 코나투스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모든 것의 최초 원인을 찾아가는 일이라면, 반대로 모든 것은 이 실체라는 최초 원인에서 나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모든 개체는 이러한 인과적 질서의 무한한 연쇄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로서 스피노자 사상을 특징짓는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모든 개체는 인과관계에 의해서 필연적이라는 것. 따라서 인간에게 '자연에서 독립된 그 자신만의 자유 의지'가 있다고 생각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주장은 틀린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생각한다. 만약 인과적 자연법칙이 인간에게만 예외적이라서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지닌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국가 속의 국가'(Imperium in Imperio)처럼 한 국가 안에서 상반된 두 개의 법이 동시에 적용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혼란만 가져오기에, 자연의 법칙은 인간과 인간 외의 것들에 대해 일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처럼 유한한 모든 개체들이 단지 신의 필연적 변용일 뿐이라면, 인간들이 느끼는 자유의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오로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만 존재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동이 결정되는 것'을 말한다. 신만이 이러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으므로, 오직 신만이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인간 존재가 어느 정도까지는 부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문을 열어놓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하는 것은, (우리의 필연적인 활동 역랑 내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 자신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16] 이것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관계가 비록 인과의 필연성에 의해 한계지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에서 '무엇을 지켜낼 것'인지의 자유[17]는 우리에게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개체 내부에 그러한 역량이 없다면 개체는 곧 분리되어 없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개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따라서 개체는 마주하는 수많은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본질에 고유한 "활동 역량"(Potentia)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활동 역량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conatur)'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력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Conatus)다.[18] 코나투스가 인간의 정신에만 관계될 때, 그것은 '의지'가 된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과 신체 모두에 관계될 때, 그것은 '욕구'가 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욕구는 인간의 본질이다.

스피노자는 물체에 있어서의 이 역량을 '운동과 정지'의 관계로 이해함으로써 개체의 발생 원리를 설명하고자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물체(연장)에는 운동과 정지 외에 다른 변용이 없다. 모든 물체는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비율'일 뿐이다." 즉 모든 개별 물체의 발생과 변화를 설명하는 내적 원리는 '운동'에 달려 있으며, 자연 만물은 그 자체 내에 제각기 특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유지하려는 역동적인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19]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도출된다. 나를 '지키고자' 하는 힘(코나투스)이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즉, 지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의 '운동 비율'을 유지하려고 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자기 보존의 노력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 된다.

여러 물체들이 합성되어 만들어지는 복합물체는 그 운동과 정지의 메커니즘이 좀더 복잡하다. 각 부분들이 서로에게 자신의 운동을 전달하는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운동하면서도 그들의 합인 전체는 그 개체가 가지는 고유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유지할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물체들이 서로 통일된 하나의 개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0] 각 부분은 전체 개체의 본성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고, 어떤 때는 느리게, 어떤 때는 빠르게 움직이며, 그리하여 자신의 운동을 다른 부분에 더 빠르게 또는 느리게 전달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생물)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특정 부분을 빠르게 움직이거나 느리게 움직이는 것과 같다. 즉, 복합물체가 물체로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그것의 부분들이 서로 상호작용함으로서 '운동과 정지의 비율'의 이러한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의 통일된 개체가 다른 통일된 개체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을 포함하는 더 큰 개체의 부분이 되어 계속해서 이렇게 무한히 확장해 나간다면, 우리는 자연 전체가 하나의 개체(유기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부분들은 무한한 방식으로 변화하지만 전체로서의 개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3.3. 인식과 정서

인간의 신체 역시 서로 인과관계를 가진 무수히 다른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체들의 이합집산에 따라 인간을 이루는 개체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거나 상실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무수히 많은 '개체'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앞선 '평행론'을 적용시키면,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질서와 연결은 고스란히 인간의 '정신'를 구성하는 질서와 연결에 적용된다. 정신과 신체는 한 실체의 두 가지 표현 방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은 서로 다른 여러 '관념'의 '집합'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이 서로 다른 관념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이러한 관념들의 인과관계 질서 전체를 다 알지는 못할 것이고,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우리가 '적합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적합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은, 우리 인식의 대부분이 원인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부분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라고 스피노자는 지적한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스피노자는 우리 신체에 가해진 외적 자극의 관념을 '이미지 image'라고 정의한다.[21] 외부 자극은 신체에 '흔적'을 새기는데, 이러한 흔적들에 대한 관념이 바로 이미지인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것과 함께 형성한 다른 이미지와 관념의 연쇄로 이어지면서 일종의 '기억'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 자극이 주어지는 우연적인 순서대로, 그리고 그 이미지와 동시에 발생한 다른 이미지도 함께 새겨지게 된다. 따라서 이미지가 신체에 새겨지는 양상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군인은 모래밭의 말 발자국을 보고 곧장 말, 기사, 전쟁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농부는 말 발자국을 보고 쟁기와 밭을 떠올릴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각자가 사물의 이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고 연결하도록 습관화된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각자가 외부 사물로부터 제각기 다른 부분을 받아들여 부분적으로 사유를 구성했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므로, 스피노자는 이러한 인식을 '부적합한 인식'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외부의 자극에 따른 이미지는 나의 활동 역량인 '코나투스'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킨다. 코나투스는 질병, 상해, 쇠약 내지 유사한 요인들에 의해 감소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운동, 영양공급, 교육 내지 수많은 긍정적 영향에 의해 증가될 수 있다. 물론, 감정적인 요인도 여기에 포함된다. 여기서 정신의 활동 역량이 감소될 때, 코나투스는 더 낮은 상태의 완전성으로 이행하며 스피노자는 이를 슬픔(tristitia)이라 부른다. 반대로 정신의 활동 역량이 증가할 때, 코나투스는 더 높은 상태의 완전성으로 이행하며 스피노자는 그것을 기쁨(laetitia)이라 부른다. 즉, 우리는 자신의 역량이 증가하면 기쁨을 느끼는 반면, 역량이 감소하면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며 슬픔은 멀리하게 된다.

이렇게 코나투스의 증감에 따라 나타나는 인간의 감정 상태를, 스피노자는 정서(affectus)라고 부른다.[22] 우리 신체는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을 들을 때면 매우 편안하고 충족된 느낌을 받는다. 반대로 우리는 강도를 만나면 잔뜩 겁을 먹고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신체가 외부와 마주하는 방식에 따라 기쁨, 슬픔, 욕망, 분노, 공포, 불안, 연민, 증오, 후회, 질투 등등의 수없이 많은 '정서'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에게 수없이 많은 정서들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코나투스의 증감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에 따라 '욕망', '기쁨' 및 '슬픔'의 세 가지 기본 정서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수많은 정서들을 '욕망', '기쁨', '슬픔'의 세 가지 기본 정서로 분석함으로써, 그가 윤리학에서 코나투스에 따른 정서 분석을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3.4. 적합한 인식과 공통 개념

그렇다면 인간은 수많은 마주침에서 자신의 코나투스를 증대시켜줄 수 있는 '기쁨'의 정서만 찾으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서는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간에,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외적인 마주침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수동적인 정념(passion[23])에 불과하다. 우연적이고 외적인 마주침에서 생겨나는 '정념'에 따를 경우, 서로가 대립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분쟁과 갈등을 피하기 어렵다. 정념에 의해서는 동일한 사람조차 변하기 쉽고, 심지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보더라도 해로운 것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판단을 결정짓는 것은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마주치게 된 다른 외적 원인들이다. 물론 우리는 스스로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으며, 외적으로 야기된 정서의 공세에 맞서 자신을 내세울 모종의 활동 역량(코나투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매우 빈번하게 정서를 야기하는 외부 영향은 종종 우리의 능동적인 역량보다 더 강하며,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느낌, 정서 혹은 행동들을 제어하지 못한다. 정념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기에 스피노자는 이러한 상태를 예속이라 정의한다.

예속을 극복하는 길은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태도로 우리 자신의 '활동 역량'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 확장시키려는 데에 있다.[24] 그리고 그 활동 역량의 확장은 자신의 능력으로 설명되는 관념을 갖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즐기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전거 타기를 배워야 된다. 즉, 자신이 실제로 그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실천적 관념을 직접 소유함으로써, 자신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여러 적합한 시도들의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경우에 그가 자전거와 부딪쳤던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자전거는 단지 기분상하게 하는 물건일 따름이어서 우리의 활동 역량을 증대시켜주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으로 설명되는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적합한 인식'이 필요하다. 우선, 정념에 대한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그 감정과 상황의 원인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그 사물의 존재 자체의 원인을 정확하게 그리고 적합하게 인식할 때, 사물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상당히 누그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감정적인 상황에 대해 명석 판명한 관념을 형성하는 순간,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는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모든 사건을 원인과 결과에 따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물들을 그 자체로 인식할 것이며 그것들에 대해 정서적으로 덜 동요하게 될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적합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의 접근이 필요한가? 그것은 외적 자극에 의해 우연하게 파악되는 이미지의 인식[25]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코나투스에 관한 것이므로, 사물의 '내적 원인'에 대한 인식이어야 한다. 게다가 우리의 코나투스가 증가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반대되는 힘이 아니라 우리와 공통의 힘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는 곧 많은 사물을 동시에 명료하고 뚜렷하게 관찰하여 사물의 '내적 원인'에 대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식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말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공통 개념이라 부른다.[26][27]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능동적인 역량인 '이성적인 인식'을 통해서 이러한 내적 원인의 공통 개념을 찾을 수 있다.[28]

3.5. 사회와 행복

스피노자는 윤리에 관하여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선이거나 악인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고 악일 수 있으며, 또 양자와 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좋고, 슬픈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또한 신은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며, 불의한 자나 의로운 자에게나 동일하게 비를 내려준다.[29] 그러므로 선악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어떤 것이 우리의 활동 역량(코나투스)을 증가시키면, 우리는 기쁨을 경험하고 그것을 '선'이라고 하면서 그것에 의해 더욱 변용되기를 원할 것이다. 반대로 어떤 것이 우리의 활동 역량을 감소시킨다면, 우리는 슬픔을 경험하고 그것을 '악'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원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은 이러한 선악의 윤리를 바탕으로 더 큰 역량, 활동성, 기쁨 및 자유을 위해 나아가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스피노자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들 사이에 분쟁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스피노자는 인간 본성상 '일치하는' 방식으로 관계맺는 것과,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는' 방식으로 관계맺는 것을 구분함으로써 사회를 정의한다. 우리가 공통적인 부분을 가지고 어떤 것의 본성을 우리와 일치한다면 그것은 본성상 우리와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과 일치하는 한,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선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관계에 있어서 그만큼의 역량이 증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사물이 본성상 우리와 공통적인 것이 많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정념의 지배를 받는 한, 인간 존재는 어떤 것을 본성상 일치시킬 수 없다. 정념은 우리 자신의 본성보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수많은 사물들의 자극을 더 많이 반영하므로, 우리는 그 사물들의 자극이 우리의 본성이라 착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념이라는 정서에 의해 갈라지는 한, 사람들은 각기 처한 정념의 상황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서로 대립하게 된다.

반대로 이성의 지도에 따라 유덕하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본성상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성의 지도를 따른다면, 그들은 실로 자신들의 인간 본성에 좋은 것을 추구할 것이고, 결국 그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 개념'과 일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일치하는 것이 많을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더욱더 유익해질 것이므로, '이성의 지도로 살아가는 다른 인간 존재'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한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타인과의 협동과 유대를 통해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획득한다.

즉, 그는 이성의 힘에 의해 능동성을 띠게 되는 코나투스(욕망)를 논의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개인의 활동 역량의 확장과 증대를 위한 사회의 구성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마음맞는 두 사람의 역량이 합치면 더 큰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협력하여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 매우 유익하다. 사람들은 사회를 조직함으로써 위험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하는 데 더 안정적인 조건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의 힘만으로 해낼 수 없었던 많은 새로운 일들이 가능해진다.

결국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정서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덕과 이성에 따라 살아가는 '욕망을 가진 인간들'의 사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자유와 활동 역량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자신들의 내적인 역량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스스로를 좀더 유능하고 풍요롭게 만들고자 노력한다. 동시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우애로 결합하고자 하며, 호의와 친절을 베풂으로써 서로의 기쁨을 증대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우리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서로 일치하고 협력함으로써 자신들을 좀더 유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덕'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일치의 역량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홀로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협력하여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더욱 자유롭다.[30]

4. 영향과 평가

스피노자의 저서들은 교황청에 의해 전부 금서로 지정되었다. 정치적으로도 체제 전복적이라고 간주되었고, 스피노자의 견해를 반박하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긍정적인 방향에서 그의 사상에 감히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하는 동시대의 저술가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의 사상을 존경했으며 그의 생전에도 그의 저서에 대해 함께 논의했던 친구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그의 『유고집』 출간을 준비했던 친구들이었다. 대개는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당국의 감시를 피해, 그들은 스피노자 사후 몇 년간 스피노자주의의 씨앗을 계속해서 확산시켜 나갔다. 대부분은 『신학정치론』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계시 종교와 기존 종교 제도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논의에 근거로 제시되었다. 『에티카』에서의 논증은, 내재적 신, 결정론적 세계 및 자연주의에 대한 근거로 제시되어 자유사상가 집단 사이에 수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물론 주류가 아니었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은 17세기 후반 근본적 사유의 은밀한 흐름에 자양분을 공급했다.

어쨌든 스피노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스피노자주의'는 체제 전복적 무신론을 가리키는 비난의 용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피노자의 사상은 유럽 전역에 퍼져서 '급진적 계몽 운동'을 고취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31] 은밀하지만 널리 확산된 이 운동은 계시 종교와 교회 권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정치권력, 시민 평등 및 심지어 성 역할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사유의 자유를 고취시켰다. 조나단 이스라엘(Jonathan Israel)은 이러한 '급진적 계몽운동'을 더 친숙하고 고귀한 프랑스 계몽 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그리고 근대성 자체의 지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기초 자료를 상세하게 독해할 경우, 적어도 내가 보기에,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스피노자와 스피노자주의가 사실은 모든 곳에서, 즉 네델란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및 스칸디나비아에서 뿐만 아니라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유럽 급진적 계몽 운동의 지적 중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그 시대에 대한 역사가들의 설명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더욱이 이 집단의 사람들의 저서에서 『에티카』나 『신학정치론』의 고유한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스피노자라는 이름과 관련있는 두 명의 다른 철학자들, 즉 라이프니츠와 베일에 관한 한, 상황은 전혀 다르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보다 어린 동시대 사람으로, 광학에 관해 스피노자와 서신을 교환했다. 그는 1672년에 파리에 살면서 스피노자의 친한 친구가 되었고, 스피노자의 신망을 얻었으며 아직 출간되지 않은 『에티카』 일부의 원고 사본을 가지고 있던 취른하우스[32]라는 이름의 동료로부터 스피노자의 사상을 더 상세히 배우고자 했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죽고 유고집이 풀간되자마자 그 복사본을 곧바로 읽었다. 그는 이 사상이 위험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상들의 혼합물이라고 한 친구에게 말하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결코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었지만, 형이상학적 숙고를 통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스피노자의 급진적 사상에 상당히 가깝게 다가섰다. 예를 들어, 베더코프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를 보면, 라이프니츠는 완벽한 필연론을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훗날 그는 그의 이러한 견해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창조에 대한 그의 설명은 위험하게도 그러한 결론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했다. 말년에, 기독교의 독단적 교의와 기독교의 미스테리를 철학적 비판의 공격으로부터 구하는 자신의 과업에 점차 헌신하게 되면서, 그는 오히려 스피노자와 그의 학설에 대한 초기의 열정적 관심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그럼에도,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이 악명 높은 급진적 사상과 지나치게 가깝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입장에서 종종 생각해 보았던 것 같다.

로테르담에서 살았던 피에르 베일은 17세기 후반 가장 독자층이 넓었던 저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저서는 여전히, 심지어 오늘날 까지도 논의되고 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지를 바로 이해하기 힘들게 하는 흥미롭지만 난해한 방식으로 그가 저술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대한 베일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첫째로, 1697년 『역사적 비평적 사전』을 출간하였으며, 거기에는 스피노자의 삶과 사상에 관한 매우 긴 항복이 수록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그 항목은 스피노자의 역설적 사상을 반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로 『에티카』를 읽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수많은 독자들에게 스피노자의 체계를 더 잘 알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스피노자의 영향에 관한 이야기에서 베일이 역할을 맡았던 두 번째 방식은 그가 사전에서 뿐만아니라 그의 초기 저작에서도 제시했던 전기적 설명에서 유래한다.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로, 확실히, 그러나 '유덕한 무신론자'로 묘사되었다. 무신론자가 공동체에서 관용될 수 있는지에 관해 그 당시에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했던 가정은, 무신론자는 벌을 두려워하거나 사후 보상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 서약을 위반하고 거짓 증언을 하면서 공공의 평화와 질서를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일은 도덕적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간 무신론자의 예로 스피노자를 들고 있다. 이로 인해 스피노자는 호의적인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무신론자이면서도 덕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예로서, 무신론을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의 삶이 근거로 제시되고 인용되었다.

18세기 초, 『신학정치론』은 에티카보다 훨씬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신학정치론』은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및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도처에서 수많은 반박이 제기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에티카』는 라틴어와 네델란드어로만 존재했으며, 비록 원어로 된 『유고집』을 유럽 전역의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지만, 『에티카』의 내용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지식을 2차 자료, 특히 베일의 『역사적 비평적 사전』에서 얻었다.

보통 이신론자로 확인되는 영국의 몇몇 자유사상가들은 『에티카』의 학설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인 존 톨랜드는, 『에티카』에서 옹호된 것과 같은, 신과 자연 전체를 동일시하는 학설을 지칭하기 위해 1705년에 '범신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 용어는, 비록 '스피노자주의'처럼 거부의 용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무신론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용어였지만, 이후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사상을 약칭하는 방식이 되었다.

『에티카』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스피노자 사상의 생명력 유지에 중요한 기여를 했던 또 다른 사상가에는 앙리 꽁트 드 부렝빌리에가 있다. 그는 『신학정치론』과 『에티카』를 연구함으로써 스피노자주의로 전향했다. 그는 비록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에티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까지 했다. 그는 프랑스 철학자 레기(Regis)의 비판에 맞서 스피노자의 체계를 옹호하는 글을 썼으며 훗날 「형이상학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 그 에세이에서 그는 『에티카』의 학설을 매우 간략하게 요약해서 제시하고 있다. 이 에세이는 원고 형태로 돌아다녔지만, 부렝빌리에 사후 9년 째 되던 해인 1731년에, 스피노자를 비판하는 글을 함께 덧붙여 『베네딕트 스피노자의 오류에 대한 반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저서는 프랑스어권 유럽 전역에 스피노자의 사상을 확산시키고 알리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볼테르는 훗날 『반박』에서 부렝빌리에가 '독을 주입하고는 해독제 주입하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은 프랑스 계몽운동의 자유사상을 신봉하는 철학자들에게 점차적으로, 그러나 끊임없이 침투되어 그들에게 영향력을 과시했다.

스피노자주의와 프랑스 유물론자 라 메트리의 사상 내지 백과전서파 디드로 사이의 중요한 개념적 유사점 외에도, 우리는 루소의 『에밀』에 있는 사부아르 신부의 고백 속에서 스피노자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스피노자 사상은 또한 유럽 전역에서 그리고 심지어 미국에서 발생하는 여러 정치적 논의 속에서 언급되었다. 비록 로크가 미국 독립혁명을 위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직접적인 주요 원천이긴 하지만, 토마스 제퍼슨의 개인 도서관에는 스피노자의 저작들 ㅡ 『신학정치론』과 『유고집』 ㅡ 이 소장되어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스피노자의 사상은 크리스찬 볼프의 철학을 둘러 싼 논란의 맥락에서 상당히 자주 논의되었다. 볼프는 할레 대학 교수로, 그의 적대자들에게는 의심을 살만한 정도로 스피노자주의와 유사한 것처럼 보였던 체계적인 형이상학적 견해를 발전시켰다. 그는 1723년 왕의 명령으로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되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옹호했다. 그의 사상은 사실 스피노자보다 라이프니츠에 더 가까웠지만, 논란에 의미가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 볼프에 대한 비난은 스피노자의 견해에 주목하게 했고 원문에 대한 더 진지한 연구를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볼프의 추방을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 성서의 텍스트로부터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것에 대한 모든 언급을 제거할 목적으로 세심하게 만들어진 『베르트하임 바이블』이 요한 로렌츠 슈미트에 의해서 저술되었다. 볼프는 사적으로 슈미트를 지지했으며, 따라서 『베르트하임 바이블』은 볼프 철학의 자연스런 결과라는 의혹이 만연해 있었다. 적대자들은 이러한 독해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과 그것의 자연주의적 성서 비판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에게서 기대될 수 있는 종류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예상은 맞았고, 슈미트는 1744년 『에티카』의 독일어 번역본을 출간했다. 이 슈미트 번역본의 출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66년 앞서 『유고집』 원본과 동시에 출간된 네덜란드어본 이래 유럽 언어로 처음으로 번역되어 유일하게 출간된 『에티카』 번역본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에티카』 독일어 번역본은 수 세대에 걸쳐 독일의 철학자들에게 스피노자 체계를 소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고트홀드 에프라임 레싱은 시인, 극작가 비평가 및 독일 계몽주의 시대에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종교적 관용과 사상의 자유 지지자였던 그는 이러한 주제들로 대중적이고 시대에 어울리는 고전적인 희곡을 썼다. 그 또한 볼프 철학을 포용하면서 전통적 신앙을 고수했던 모제스 멘델스존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레싱 사후, 철학자이며 서로 아는 친구인 야코비[33]는 멘델스존에게 레싱과 가졌던 대화에 대해 말해주었다.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그에게 선언했다는 것이었다. 멘델스존은 자신의 친구 레싱이 스피노자식 범신론이라는 오명으로 기억되는 것을 원치않았고 그 둘 사이에 논쟁이 펼쳐졌다. 멘델스존은 스피노자주의가 아니었고 전통적인 종교를 옹호했지만, 종교에서 이성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 한에서 스피노자를 지지했다. 하지만 야코비는 이성은 스피노자의 신 이외의 어떠한 신으로도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없으며, 이러한 철학자의 신은 전혀 진정한 의미의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의 필사의 도약'으로 이성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범신론 논쟁으로 불리는 것으로, 사상계는 도처에서 격렬한 찬반 논의가 벌어졌으며, 이를 통해 공개적인 장소에서 스피노자의 사상의 철저한 검토와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가장 열정적인 스피노자 지지자들 중에는 그 당시 가장 중요한 독일 작가인 괴테가 있다. 잘 알려진 몇몇 구절에서 그는 스피노자의 유고집을 읽었을 때의 갑자기 밀려들었던 숭고한 느낌을 표현하기도 했다. "스피노자의 고요함은 전방위적인 나의 노력에 대비되어 부각되었다. 이를테면 그의 수학적 방법은 관찰과 묘사의 나의 시적 방식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도덕적 주제에 적절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형식적 처리방식이 바로 나로 하여금 열정을 가지고 그에게서 배우게 했던 것이며 그를 더욱더 칭송하게 만든 것이다."

괴테에게 영향을 받았던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몇몇 구성원들은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가지 측면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초기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일 것이다. 그는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간주했던 기성 세대의 견해를 뒤집어 버렸다. 반대로 노발리스는 스피노자가 "신에 취한 사나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자들에게 스피노자는 큰 영향을 끼쳤다. 헤겔셸링은 모두 스피노자에 대해서 대단히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헤겔은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헤겔은 스피노자의 입장을 필연적 출발점으로서는 받아들였지만, 결국 수용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관점에서,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가 자기-의식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러한 재평가는 주목할만 하다. 한때는 그의 사상이 반박의 목적으로만 언급될 수 있었지만, 그는 이제 근대의 가장 중요하고 훌륭한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재평가는 주로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대륙을 가로질러 영국으로도 확산되었다. 영어권 나라들에 스피노자를 새롭게 소개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하나는 시인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였다. 콜리지 덕분에 스피노자 사상은 낭만파의 워즈워스와 그 밖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시기 스피노자에 첫 번째로 열광했던 사람들이 시인들이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예를 들면, 콜리지도 워즈워스도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각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과 자연의 동일시에 의해 영감을 받았고, 기하학적 설명에 강한 흥미를 느꼈으며 스피노자의 단순하고 유덕하고 지적으로 풍부한 삶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니체가 『에티카』를 처음 접했을 때, "그는 선구자, 진정한 선구자!"라고 선언한 것도 유명하다. 니체는 친구 오버베크에게 흥분된 상태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짧은 편지를 썼다. 프로이트도 스피노자 독해를 진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베르그송은 스피노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철학자에게 두 명의 철학자가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다." 비슷한 시기에 버트런드 러셀도 스피노자를 이렇게 평가했다. "지적인 면에서 그보다 뛰어난 철학자들은 있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그를 따라갈 철학자는 없다."[원문][35]

현대에 들어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60년대 후반 마르시알 게루를 필두로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스피노자의 새로운 면모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질 들뢰즈와 A. 마스롱, 그리고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스피노자 철학은 더 이상 데카르트 철학의 계승이거나 헤겔의 전 단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데카르트 이후 '코기토' 중심의 근대 철학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비근대적' 사유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알튀세르나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스피노자야말로 이제까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유물론자다. "그는 신에서 시작했지만, 실제로 그는 무신론자였다. 그는 마치 자기가 자신의 적인 양 거기(적의 사령부)에 자리잡았고, 따라서 그들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혐의를 받지 않으면서, 마치 점령군의 대포를 점령군 자신을 향해 돌려놓는 것처럼 적의 이론적 요새를 완전히 놀려놓는 방식으로 재배치하였다."[36] 이들에게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삶을 왜곡시키고 파괴하는 모든 초월적 가치와 도덕에 반대하는 '내재성의 철학'(들뢰즈)으로, 그리고 대중 자신의 지성과 능력으로부터 자유의 공간을 확장해나가는 '구성의 정치학'(네그리)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5. 논쟁

5.1. 스피노자의 결정론은 인간의 자유를 배제하는가?

절대적 필연을 인정하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어떻게 윤리를 말할 수 있는가는 오래된 논쟁거리 중 하나다. 결정론에서는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마땅히 따라야 할 윤리'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즉,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선택할 자유도 없다면 윤리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스피노자의 생각은 '인간이 선택은 할 수 있지만, 사건은 이미 상황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비행기 사고에서 우리는 살기위해 안전벨트를 매거나 산소호흡기를 착용하거나 몸을 굽혀 머리를 보호하거나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는 등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력을 거스르고 맨몸으로 하늘을 걸어다니거나 한손으로 비행기를 멈춰 세우는 등은 할 수 없다. 모든 사건은 원인에 따른 상황에 종속된다. 그 상황이라는 한계 속에서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선택의 결과마저도 자신의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선택 이후에도 인간 행위의 결과들 역시 상황들에, 즉 그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고 그 자신이 온전하게 인식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그러한 상황들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인간의 바람에 달려 있지 않다.[37]

이와 같은 논리로 인간이 그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가 윤리적 행동을 '굳이'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성을 통해 필연성의 원인을 이해하는 선택만이, 우리의 코나투스를 '능동적'으로 증대시켜주기 때문이다. 즉, 그 선택은 상황을 바꾸진 못하지만, 그 선택은 코나투스의 증대를 일으키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이성의 계명들'(dictamina rationis)이 필요하다.[38]

6. 저서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fff,#1f2023> 지성교정론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colbgcolor=#ffffff,#1f2023> 1662년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 cartesianae
1663년
신학정치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1670년
정치론
Tractatus Politicus
1675년
~1676년
에티카
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1677년[39]

스피노자의 주저인 『에티카(Ethica)』은 '기하학적 질서로 증명된, 그리고 5부로 구성된'이라는 부제가 드러내듯, 정의와 공리들로부터 철학적 정리를 연역해낸다는 기하학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 필연적으로 정해진 역량 내에서 최대한의 적극적인 활동, 그것은 바로 '이성'으로 자신과 사물의 관계 속에서의 '공통감각'을 찾는 것이고 이를 통해 지복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던 스피노자를 생각한다면, 이성적 방법론에 해당하는 기하학을 윤리에 도입하는 그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에티카』는 국내에도 번역본이 여럿 있다. 하지만 에티카부터 바로 읽으면 이해하기 어려우니 입문서를 먼저 읽고나서 시도하는 것을 추천한다. 기하학적 구조로 작성한 공리와 정의에 관한 기초와 실체와 변양에 대한 개념, 그리고 스콜라 철학에서 자주 보이던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개념에 대한 기초적인 철학 지식 등의 기본 개념을 충실히 이해한 다음에 에티카를 읽는다면 못 읽을 정도는 아니다. 쉽게 읽는 방법으로는 스피노자가 서술한 모든 정의와 공리들을 암기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각각의 증명들을 보면서 선행적으로 서술된 공리 및 정의들을 참조 및 이해하면서 읽으면 좋을 것이다.

7. 어록

나는 인간의 행동들에 관해 조롱하거나, 슬퍼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오직 이해하고자 하였다.[40]
희망 없는 두려움도 없고, 두려움 없는 희망도 없다.[41]
나는 기성 종교의 방해자가 되지 않고서 철학을 가르칠 방법을 알지 못한다.[42]
바울이 베드로에 대해 하는 말은, 베드로보다는 바울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43]
훌륭한 모든 것은 이루기 어렵고, 그만큼 귀하다.[44][45]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활동은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해함은 곧 자유로워짐이기 때문이다.[46]

7.1.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의 저자로 오도

Und wenn ich wüsste, dass morgen die Welt unterginge, so würde ich heute mein Apfelbäumchen pflanzen.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스피노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말은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다.

출처를 찾아봤을 때 제일 처음으로 확인되는 증거는 이 말을 '마르틴 루터가 했다'는 독일 개신교 목사 칼 로츠의 언급으로, 1944년 그 교회 회보의 기록에 적혀 있다. 이 말이 돌고돌아 와전된 것이 사건의 시작인 셈. 특히 2차 대전 이후 독일 사회는 엉망이었는데, 그런 상황 속 재건하는 데 있어서 '루터가 했다는 말', 즉 '현실은 처참하지만 그래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이 말은 독일 국민들에게 많은 희망을 주었고, 독일 정치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이 말을 언급함으로서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인용문을 추적해서 책까지 쓴 개신교 신학자 마르틴 슐로만에 의하면, 이조차 마르틴 루터가 했던 말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칼 로츠가 지어낸 말이거나 출처 불명의 말이라는 것이다. #

한국에서는 1960년대에 일간지에서 뜬금없이 '스피노자가 한 말'로 재와전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치 스피노자가 한 말로 굳어지게 되었다. 어쨌든 한국에서는 스피노자를 대표하는 너무도 유명한 명언으로 각인된 덕분에 사실이야 어쨌든 그냥 스피노자가 한 말로 치고 넘어가자는 분위기.

이 명언의 내용을 분석하자면, '할 수 없는 건 놔두고,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는 것으로, 매우 스토아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스피노자의 철학도 스토아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이런 오해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이기도 하다.

8. 관련 강의 영상

[navertv(1656184)]


9. 여담

  •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 의해 사후에 『에티카』가 출판되었지만, 이는 곧 '악마의 서적'으로 몰려 불태워졌다. 그는 당시의 거의 모든 사람한테서 비난 받았다. 철학 역사상 그만큼 수없이 경멸받고 온 세상이 적이었던 철학자는 드물 것이다. 사실 그의 생활에는 비난할 만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성실하고, 품위 있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무신론자[47]도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예로, 그의 삶은 끊임없이 근거로 제시되고 인용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편을 더욱 화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 같은 네덜란드인인 렘브란트와 같은 동네에 비슷한 시기에 살았는데 한번도 서로 만난 기록은 없다.
  • 젊었을 적 칼침을 맞은 적이 있다. 스피노자는 파면당한 이후에도 신학과 관련해서 발칙한(?) 이론들을 익명으로 발표하면서 교인들에게 어그로가 끌렸는데[48], 참지 못한 어떤 광신자가 스피노자를 찾아가서 칼을 휘둘렀다. 익명으로 발표하긴 했는데 당시 워낙 스피노자의 이론이 눈에 띄는지라 공공연하게 스피노자가 썼다는 걸 대부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스피노자는 방어를 잘 해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칼을 맞으면서 옷이 심하게 찢어졌는데 스피노자는 "모든 인간이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그 찢어진 옷을 보관했다고 한다.
  • 그의 이론에 흥미를 느낀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라이프니츠가 몰래 그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평생 은거하다시피 살면서 철학을 탐구했지만 여기저기서 오는 편지는 잘 받고 답장을 해주었던 모양. 그의 철학 세계를 알 수 있는 문헌 중에 논쟁을 주고받았던 편지도 상당수 있다.
  • 17세기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책자 《세명의 사기꾼》[49]의 지은이로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자는 이슬람교인 및 기독교인, 유대인 등 여러 사람이 쓰고 수정하고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어판은 성귀수가 번역하였고 지은이를 스피노자의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표기했다.
  • 모의고사와 수능에서 윤리와 사상에 꼭 등장하는 철학자이다. 윤리와 사상 교과에 등장하는 중세 서양 철학자들 중에선 범신론을 주장한 철학자는 스피노자가 거의 유일하기에 구분이 나름 쉬운 편. 게다가 혹여 시험지 문제에 그림[50]과 함께 나온다면 이 문서 맨 위에 있는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치게 큰 옷깃과 엄청나게 뽀글뽀글한 푸들양갈래 머리스타일 등 독특한 패션덕에 그림만 보고 스피노자인 걸 알아채는 경우도 있다. 2020년 12월에 치러진 2021년 대학수학능력검정시험 윤리와 사상의 모 문제가 그 예시.

[1] 당시 렌즈는 막 꽃피던 근대과학 초창기의 인기 품목이었던 현미경이나 망원경에 쓰이는 핵심 부품이었다.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렌즈 가공은 생계 유지 수단인 동시에 광학(光學)에 대한 그의 과학적 관심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스피노자는 하위헌스 원리로 유명한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등과도 교류를 나누기도 했다.[2] 평상시 입는 옷은 수선을 잘 하지 않아 주변인이 새 옷이 안 필요하냐고 물어볼 정도였다.[3] "혹시 언젠가 저에게 대학 교수로 종사할 희망이 생기게 된다면, 당신을 통해 팔츠 선제후 전하(카를 1세 루트비히)께서 저에게 권해 주신 대학의 교직만을 원할 것입니다. 특히 더없이 자비로우신 전하께서 승인해 주신 철학의 자유를 위해서 저는 그렇게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총명함을 찬탄하는 각하의 치하에서 생활하기를 이전부터 바라고 있었다고 지금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공적으로 교수할 생각은 결코 없었기에, 사정을 장시간 숙고하였으나 이 명예로운 기회를 삼가 받자올 결심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후략) 이후에 그가 거절한 이유가 나오는데 요약하자면, 첫째로 교수로 학생을 가르치다 보면 철학에 전념할 수 없다. 둘째로 교수의 신분으로 종교에 혼란을 가져오지 않는 연구를 진행하기 어려울것 같다. 셋째로 자신은 이미 고독한 생활속에서 수많은 반발을 겪었는데, 교수라는 명예로운 자리에서 더 많이 받을 반발과 탄압이 고민된다. 이후 편지에서 이 제안을 6주 동안 고민했으니 그만 고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하며 정중히 거절했다.[4] 이후 생전 보지도 않던 스피노자의 누나가 유산을 가지러 달려왔으나, 스피노자는 자신의 장례금빼고는 철저히 계산하여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5] 스콜라 철학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 먼저 말한 바 있으며, 그 지적 전통이 스콜라 철학까지 이어진 것.[6] 여기서 변용(affectio)이라 함은 '작용', '영향'을 가리키는 말로써,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을 의미한다. 양태(modus)는 실체가 변용되어서 산출된 결과를 말한다.[7] 다만 원인을 되짚어 실체를 찾아가는 이러한 방식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시간적 인과"가 아니라 "논리적 인과"를 되짚어가는 것이다. 즉, 실체는 최초의 생명체나 우주의 시작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만물이 "존재"하려면, 논리적으로 어떤 최초원인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8] 만약 자기를 구성하는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거기서 인과가 멈추고 최초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인과 관계는 앞서 말했듯이 "시간적 인과"가 아니라 "논리적 인과"라는 것에 주의. 원인과 결과가 여기서 시간적 인과라면 모순이 된다. 논리적 인과이기 때문에 이 말('자기가 자기 존재의 원인')이 성립될 수 있는 것.[9] "이 용어는 스콜라 철학에서 비롯되었는데, 스피노자의 철학에 의해 잘 알려진 용어이다. 대개 존재하는 것이 그 자체 이외의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스스로가 존재의 원인으로 되는 것, 다시 말하면 그 자체의 본질에 존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자기가 자기 존재의 원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스콜라 철학에 따르면, 그와 같은 것은 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기원인 自己原因, Causa Sui / 철학사전, 2009)[10] "우선, 실체 개념의 정의에 따르면 실체는 창조된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 만약 실체와 별개로 존재하는 창조된 세계를 상정하게 된다면, 실체는 더 이상 자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실체는 창조된 세계와 양립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적 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이는 실체가 다른 외적 원인에 의해 제한을 받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실체가 자신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실체 자신의 본성에 어긋나는 사태가 발생한다. 따라서 실체와 창조된 세계는 별개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라는 결론이 나온다. 실체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러한 설명은 서구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인격신으로서의 신 개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손기태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2016. 글항아리. p.60)[11] "창조주로서의 신 개념은 좀더 복잡하고도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우선 창조주 개념은 신이 피조물이 존재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이 자연 만물을 창조했다면, 신은 자신이 창조한 자연 만물과 동등한 차원에서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은 자연 만물과는 동일시될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세상에는 두 가지 상이한 질서, 즉 자연적인 질서와 초자연적인 질서가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창조주 신은 바로 이 두가지 질서 모두를 주관하는 전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서 그러한 신 개념은 결코 철학적으로 지지될 수 없는, 신에 대한 미신적인 인식으로 간주되었다." (손기태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2016. 글항아리. p.61)[12] 양태들은 실체 없이는 어떠한 실재성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실체는 양태들과 독립적으로 생각될 경우, 구체적인 실존방식이 삭제된 막연한 추상에 불과하다. 실체의 활동은 오직 자신의 속성의 양태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실체와 속성 양태의 관계를 마트롱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사물 안에 내재하는 순수 작용성, 활동성이 ‘실체’이며, 실체가 스스로를 펼치면서 얻는 구조들이 실체의 ‘양태들’이다. 그리고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즉 실체가 자기 자신의 구조들을 산출하는 방식이 곧 ‘속성’이다. 즉 실체가 자기 자신을 산출한다는 것(능산적 자연)은 속성들과 양태들을 통해 자기 자신의 구조를 얻는다는 것이며, 양태들은 실체 안에 결과로서 산출되고(소산적 자연) 실체는 자신의 결과인 양태 안에 있는 것이다. 마슈레 역시 신이 활동한다는 것은 역량으로서의 신이 개별적 사물들에 대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사물들 안에서 활동함을 강조한다. (논문: 『스피노자의 실체, 속성, 양태 개념의 관계에 대하여』 황은주.)[13] 손기태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2016. 글항아리. p.105~106[14] " '관념의 질서와 연결은 사물의 질서와 연결과 동일하다.'(2부 정리7) 신의 역량은 구조화된 역량이고, 사물들은 이 구조화된 역량에 의해 생겨나게 되며 이 역량으로부터 질서있게 따라 나온다. 만약 양태의 계열 전체가 연장 속성 아래에서 그 역량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연장된 사물의 무한 계열이 잘 구조화된 방식으로 서로에 의해 생기고 서로 관계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양태의 계열 전체가 사유 속성 아래에서 그 역량에 의해 생긴다고 한다면, 우리는 관념 혹은 사유의 무한 계열이 잘 구조화된 방식으로 서로에 의해 생기고 서로 관계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동일한 구조적 역량이 양태의 두 계열 ㅡ 연장과 사유 ㅡ 모두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질서 및 연결은 관념의 질서 및 연결과 동일하다는 것은 전혀 놀라울 것이 없다." (J. 토마스 쿡 지음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서광사 2016. p.88)[15] 르네 데카르트가 물질과 정신을 전혀 다른 별개의 독립된 실체라고 간주한 것과 달리 스피노자는 물질과 정신이 단지 동일한 실체(신)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신체와 무관한 정신의 자유의지를 주장한 반면에 스피노자는 신체가 갖는 관념이 곧 정신이라고 보았다. 이런 관점은 요즘 뇌과학의 발전과 맞물려 현대에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데, 뇌세포들 간의 전기 흐름과 우리의 사고나 감정은 동일한 실체의 두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서로 다른 실체인 신체와 정신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을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난점이었으나, 스피노자의 관점에선 애초부터 동일한 하나의 실체가 물질과 정신의 측면으로 표현이 되는 것이니 이 문제가 해소된다.[16] "스피노자에게 자유는 '오로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만 존재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동이 결정되는 것'을 말한다. 오직 신만이 이러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으므로, 오직 신만이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인간 존재가 어느 정도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 문을 열어놓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하는 것은 때때로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 자신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2016. 서광사. p.172)[17] 물론 이 자유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정의한 바대로 '자기 자신에 의해서 자신의 행동이 결정되었다'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부분적으로 우리가 신이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신 즉 자연(인간)) 자유는 오직 신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18] 따라서 양태들의 고유한 역량은,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코나투스를 보존하려는 노력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즉, 양태들은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실존하게 되며, 이러한 양태들 간의 무한한 인과관계로부터 자신의 존재 역량이 결정된다. 양태들은 자신의 고유한 역량의 정도에 상응하는 외연적 관계를 갖지 않고서는 결코 실존하지 못한다.[19] 코나투스가 관성이라는 뜻에서 나온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스피노자가 왜 '운동과 정지'로 이를 설명하려고 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20] 부분적으로 본다면 '운동과 정지의 비율'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개체 전체로 봤을 때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동일하게 유지되는 한, 그것은 동일한 개체로 유지되며, 그 개체는 "자기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용하고 또 변용될 것이다.[21] 스피노자는 이미지에 의한 인식을 '상상지' 또는 '1종 의식'이라고 부른다.[22] 정서는 이미지의 인식이나 물질적 충격같은 외부 자극이 우리 신체에 변용(affectio)을 가할 때 발생하는 '인간의 변화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변용(affectio)과 정서(affectus)를 가르키는 라틴어 단어가 유사함에 주목할 것. 둘 다 "작용, 영향"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23] passion는 열정, 정욕을 뜻하지만, 원래 '수동'이라는 뜻이었다. 비슷한 어원에서 유래한 passive 라는 단어도 '수동적인'이라는 뜻이다.[24] 물론 활동 역량이 증대되면 '기쁨'의 정서가 생긴다. 하지만 정념을 통한 기쁨의 정서와 다른 점은, 그것이 외부 자극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획득한 것이냐의 차이가 있다.[25] 이미지의 인식은, 앞서 말했듯이 외부의 충격으로 우리 신체에 새겨지는 기억을 의미한다. 이미지에 따른 인식은 외부 자극에 휘둘리기 때문에, 수동적인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26] 주의해야 할 점은, 공통 개념은 다른 신체들 간의 외적인 유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외적 유사성에 집착하는 것은 이미지에 의한 인식으로 이것은 정념으로 이어진다. 공통 개념은 사물들 간의 인과관계의 질서 속에서 작용하는 공통된 '내적 원인'을 이해해야 됨을 말한다.[27] 공통 개념은 우리가 가진 역량의 일부분이면서 우리 자신의 역량을 증진시키기도 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수동의 정서에 의존하지 않고 능동적 기쁨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물론, 인간은 본성상 정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며 정념 자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이나, 우리가 인간 자신이나 정념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만 한다면, 정념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은 할 수 있을 것이다.[28] 이는 이성적인 인식이 곧 '참된 욕망(코나투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성'과 '욕망'을 반대되는 개념으로 상정하고 이성이 그 욕망을 제어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욕망'은 이제 '이성적인 행위로 충족되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여기서 자신의 이성적 능력이 크거나 작다는 것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자신의 이성적 능력이 확장되고 있는가, 축소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비록 우리가 작은 이성적 능력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고 능력있는 존재로 만드는 첫 단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29]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연상시킨다. 몇몇 학자들은 당시 유럽에 전해진 중국 사상의 영향일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다만 예수회를 통한 간접적인 증거만 있을 뿐, 실제로 스피노자가 중국의 책을 읽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30] 『에티카』 4부 정리73.[31] Jonathan Israel, 『급진적 계몽 운동』,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p.ⅳ.[32] 취른하우스 정리를 제안한 그 사람[33]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 1743~1819) : 독일의 철학자. 이성의 힘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결국 무신론으로 귀결되어 허무주의에 빠지므로,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지각, 즉 직관을 통해서 믿어져야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독일 지성계에 '범신론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피노자 사상 부활의 시발점이 된다.[원문] Intellectually, some have surpassed him, but ethically he (Spinoza) is supreme[35] 러셀의 스피노자에 대한 평은 라이프니츠에 대한 평과 대비된다.[36] 알튀세르, 『철학과 마르크스주의』[37] 원인과 결과라는 '상황의 관점'에서는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관점'에서는, 인간이라는 개체는 그 자신의 역량 내에서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인간이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고 해서, 원인과 결과라는 상황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38]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스피노자 매뉴얼』 에디토리얼. 2019. p.199 참조.[39] 1674년에 완성되었지만 사후에 출판됨.[40] I have made a ceaseless effort not to ridicule, not to bewail, not to scorn human actions, but to understand them.[41] Fear cannot be without hope, nor hope without fear.[42] I do not know how to teach philosophy without becoming a disturber of established religion.[43] What Paul says about Peter tells us more about Paul than about Peter.[44] Everything excellent is as difficult as it is rare.[45] (라틴어 원문)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이 구절은 에티카의 5부 정리42 주석의 마지막 문장으로, 이 구절로 에티카는 끝을 맺는다.[46] The highest activity a human being can attain is learning for understanding, because to understand is to be free.[47] 물론 스피노자 본인은 스스로를 독실한 유신론자라고 믿었고,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을 범신론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무신론자라는 말은 '광의의 뜻'으로 쓰인 것으로, 스피노자가 무신론자로 분류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라고 여겼다는 것을 얘기한다.[48] 물론 스피노자는 어그로를 끌고자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소신 있게 말한 것.[49] 예수, 모세, 무함마드를 사기꾼이자 위조한 가짜로 비난하는 작가 미상의 책이다.[50] 출제자들이 직접 그린 그림.당연한 말이지만 실제 초상화나 사진은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