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03:46:47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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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헤겔
Hegel
파일:Hegel_portrait_by_Schlesinger_1831.jpg
[1]
<colbgcolor=#2b1009> 본명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출생 1770년 8월 27일
신성 로마 제국 뷔르템베르크 공국 슈투트가르트[2]
사망 1831년 11월 14일[3] (향년 61세)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4]
국적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1803-1892).svg 프로이센 왕국
직업 철학자, 언론인, 교수
서명 파일: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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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b1009><colcolor=#fff> 학력 일루스트레 김나지움
튀빙겐 대학교 (철학 / 1790년 석사)
예나 대학교 (철학 / 1801년 박사)[5]
경력 뉘른베르크 에기디엔 김나지움 교장 (1808~16)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 (1816~18)
베를린 대학교 교수 (1818~30)
베를린 대학교 총장 (1830~31)
가족 아버지 게오르크 루트비히 헤겔[6] (1733~1799)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 루이자 프롬 (1741~1783)
여동생 크리스티아네 루이제 헤겔[7] (1773~1832)
배우자 마리 헬레나 주자나 폰 투허[8] (1811년, 결혼)
자녀 루트비히 피셔[9] (1807~1831)
종교 개신교[10]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튀빙겐 시기2.3. 예나 시기2.4. 뉘른베르크 시기2.5.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시기2.6. 말년
3. 사상4. 영향5. 논란
5.1. 헤겔의 국가 개념은 파시즘인가?
6. 저서7. 어록8. 관련 강의 영상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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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겔 철학은 아주 어렵다.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해야 한다.[11]
버트런드 러셀
프로이센 왕국(현재 독일)의 철학자. 칸트, 피히테, 셸링 등의 독일 관념론 철학을 계승하여 완성시켰다. 존재와 사유, 주관과 객관의 모순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일치시키려고 했으며, 논리학ㆍ법철학ㆍ역사철학ㆍ미학ㆍ종교학을 아우르는 거대한 체계를 구상해, 후대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헤겔은 전통철학의 완성자이자 현대철학의 비판적 출발점이기 때문에, 전통철학을 공부하든지 현대철학을 공부하든지 간에 헤겔을 모르고서는 철학을 깊이있게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현대철학자들은 헤겔 철학의 비판적 해석을 통해서 자기 철학의 정당성을 마련하고 있으므로, 헤겔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이야기 자체를 이해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현대철학에 깊이 다가가기 힘든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동시에 그의 철학은 극도로 난해한 철학으로 정평이 나 있어서 대부분은 입문 단계에서 포기하는 철학으로도 유명하다. 100명의 철학자가 있으면 100명 전부가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정도로 어렵고 복잡하며, 서로 자기가 내린 해석이 맞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오해와 그러한 오해를 반박하는 글도 엄청나게 많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도 역시 헤겔 철학이다. 그래서 미셸 푸코는 일찍이 헤겔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헤겔에 대항하여 사고할 때조차 그것이 여전히 헤겔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생애

2.1. 초년기

헤겔은 1770년 8월 27일 독일 남부의 작은 공국 뷔르템베르크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공무원[12]인 게오르크 루드비히 헤겔과 그의 아내 마리아 막달레나 루이자 헤겔의 맏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교육과 문화를 중요시 여겨, 헤겔을 3살 때 독일어 학교에 보냈고, 5살 때는 라틴어 학교에 보냈다. 또한 헤겔은 동시에 여러 과목의 개인 교습을 받았는데, 10살 때는 아버지가 지역의 유명한 수학자를 데려와 헤겔에게 기하학 개인 교습을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11살이 되던 1781년, 당시 유행하던 말라리아 열병으로 헤겔은 어머니를 잃게 된다. 헤겔과 아버지도 말라리아 열병에 걸렸으나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고, 어머니를 잃은 충격으로 헤겔은 아버지와 멀어졌다. 이때부터 말을 더듬는 습관도 생겨났다.

헤겔은 집이 점차 불편해졌고, 집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집에도 읽을 거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이면 공립 도서관에 가서 하루를 지내곤 했다. 때문에 아버지 말은 잘 안 들었지만 학교에선 다행히 모범생이었고, 대학 입학을 위해 고향을 떠난 18살 때까지 줄곧 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2.2. 튀빙겐 시기

1788년, 18살의 헤겔은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나 튀빙겐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부의 엄격한 규율과 낮은 수준의 강의는 헤겔로 하여금 수업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위로가 되는 건, 그와 마찬가지로 높은 성적으로 입학했으며 훗날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되는 횔덜린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2년 뒤엔 5살 어린 천재 셸링이 입학했고, 셋은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면서 금세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신학보다는 철학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자유와 자발성을 강조하는 칸트류의 철학에 마음을 뺏겼다. 이윽고 이들은 목사를 포기하고, 서로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1792년에는 마침내 프랑스에서 왕정이 폐지되자, 소식을 들은 셋은 놀람과 기쁨에 가득차서, 근처 들판에 혁명을 기념하는 "자유의 나무"를 세우고는, 그 주위를 돌면서 프랑스 혁명의 춤인 카르모뉼을 추고 〈마르세예즈〉를 불렀다고 전해진다.[13] 혁명에 고무된 신학생들은 혁명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정치 모임을 만들었고 신학교는 곧 왕정에 반대하는 혁명가들의 양성소가 되었다. 헤겔도 그 정치 모임의 회원이었다. 하지만 당국이 탄압하자 정치 모임은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사라졌고, 헤겔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단지 "계몽되는 것" 이상의 사회적 실천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목사를 포기한 헤겔은 1793년 신학부를 졸업하고, 이후 베른프랑크푸르트를 떠돌면서 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가정교사는 귀족으로부터 하인이나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헤겔은 곧잘 우울증에 빠지곤 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헤겔은 헤르더, 루소, 스피노자 등을 읽으면서 앞으로 펼쳐질 자신만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한다. 그는 계몽주의자들이 합리적인 이성을 통해 '개인의 자유'라는 추상적인 권리를 도출해냈지만, 그걸 바탕으로 독자적 자유를 얻게 된 개인은 도리어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하게 되면서, 공동체는 오히려 개인의 직업과 이익에 따라 분열하기 시작했고, 이는 역설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적 사고와 감정적 행동의 불일치는, 이성으로 추론한 객관적인 권리가 '내가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주관적인 내면화로 변환되지 않아서이다. 그렇기에 헤겔은 개인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이렇게 파편화된 사회를 하나로 뭉치는 '정신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헤겔은 그 답이 "교양 Bildung"에 있다고 생각했다.

교양은 '수동적인 교육'과 구별되는 것으로, 교양은 '자기 비판'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14] 그리고 '스스로를 비판(부정)하는 것'으로서의 교양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들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기를 요구한다. 즉, 교양은 합리적 이성으로 추론한 객관적 이념이, 개인 각각이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따르는 주관적인 내면화로 일치되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판(부정)할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헤겔은 당시 새로운 학문을 신설하고 가르치는 "대학"만이 이러한 교양을 퍼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학문을 '비판적(부정적)'으로 가르침으로써, 주관과 객관, 특수와 보편, 실천과 이념 사이의 모순을 매개하고 일치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될 것이다.

2.3. 예나 시기

그러므로 이제 헤겔은 강단 철학자로서 대학의 교수가 되는 길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1800년에는 용기를 내어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 셸링에게 교수 임용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사이 셸링은 철학계의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는데, 셸링은 무명의 가정교사에 불과했던 옛 친구 헤겔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헤겔은 곧장 셸링이 있는 예나로 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셸링의 추천을 받아 예나 대학의 교수 임용 시험에 도전한 헤겔은 「행성들의 궤도에 관하여」라는 교수 자격 논문을 제출하여 합격했다. 그리고 겨울 학기부터 임시 강사 자격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헤겔은 첫 해에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를 출간하면서 학문적으로 셸링의 추종자가 되었으며, 1년 뒤인 1802년에는 셸링과 함께 《철학 비판 저널》이라는 학술지 편집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렵 셸링은 동료 아우구스트 슐레겔[15]의 아내 카롤리네와 연애 끝에 결혼하면서, 이를 역겹게 지켜보았던 주위 동료들에게 배척당했다. 셸링은 도망치듯이 뷔르츠부르크 대학으로 떠났고, 이렇게 됨으로써 헤겔과도 멀어졌다.

이제 홀로 서게 된 헤겔은 자신의 미래 전체를 걸고 자기 자신의 책을 써서 지식인들의 사회에 우뚝 서야 했다. 그리고 헤겔은 철학사에 길이 남을 책, 『정신현상학』을 1807년에 발표한다. 『정신현상학』은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만들어 준 출세작이자 이후 그를 대표하는 책이 된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쓰면 쓸수록 원고가 걷잡을 수 없이 길어지는 바람에, 출판사에 원고를 전달하기로 한 날짜를 번번히 어길 수밖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가장 중요한 장을 저술하고 있을 때,[16] 예나 중심가는 프랑스 군이 일으킨 전쟁으로 포격을 당하고 있었다. 헤겔은 자신의 집 창문 밖으로 나폴레옹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17] "나는 황제가 ㅡ 그 세계 영혼이 ㅡ 도시 외곽에서 말을 타고 정찰하는 모습을 보았네."[18]

전쟁은 예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대학의 신입생은 줄어들었고 그만큼 헤겔의 급여도 줄어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가정부 요한나 부르크하르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루드비히 피셔가 태어났다. 돈이 부족해진 헤겔은 어떤 형태의 일자리든 얻어야 했다. 헤겔은 다른 대학의 교수자리를 절실하게 찾아다녔으나 구하지 못했고,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밤베르크에 있는 신문 편집자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신문 편집자로서의 생활은 수입도 괜찮고 사회적 지위도 보장해 주었지만, 그래도 헤겔이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대학을 자신의 천성적인 고향으로 여겼다. 헤겔은 바이에른의 교육부 장관이었던 친구 니트하머에게 대학 임용에 관해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고, 1808년에 니트하머는 헤겔에게 뉘른베르크에 있는 김나지움[19]의 교장직을 맡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헤겔은 비록 원하던 대학 교수 자리가 아니지만, 신문 편집자로 있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 제안을 기쁘게 수락했다.

2.4. 뉘른베르크 시기

헤겔은 김나지움의 교장직을 맡으면서, 학생들에게 예비적인 철학 수업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도 담당했다. 그는 학교가 특정 직업을 수행하기 위한 실용적인 훈련 기관이 되어선 안되며, 학교는 학생들이 스스로 방향을 잡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어, 그들이 보편적 교양인이 될 수 있게끔 유도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가난한 학생들의 학업을 정부가 도와줘야 된다고 주장했고 이를 위해 노력했다.[20] 하지만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21]은 학교의 기능을 거의 상실할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고 재정 상태는 엉망이었으며, 정부는 학교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데 인색했다. 심지어 학교 건물에는 화장실이 없었는데, 헤겔은 니트하머에게 학교 상황을 보고하면서 화장실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것은 공공 교육의 새로운 차원이며, 나는 그 중요성을 이제야 깨달았네. 이를테면 교육에 있어서 엉덩이의 중요성을 말일세."[22]

그러나 이 모든 현실적인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김나지움을 성공적으로 궤도에 올려놓아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교장으로서의 성공은 헤겔에게 고위층 사회로 접근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는 고위층 사람들만 가입할 수 있는 "박물관Museum"이라는 이름의 사교 모임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모임에서 헤겔은 명망높은 귀족가문인 폰 투허 가문의 사람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만난 마리 엘레나 수잔나 폰 투허와 1811년 9월 15일에 결혼했다.

이 시기의 헤겔은 자신이 맡은 철학 수업에서 김나지움 학생들에게 논리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수업 내용과 그 동안의 생각들을 바탕으로 『논리의 학』 제1권을 1812년에, 제2권을 1813년에, 제3권을 1816년에 차례대로 출간했다. 헤겔에 따르면, 논리학은 모든 철학을 작동시키는 기초이면서 자기 자신을 자율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기획이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 체계의 핵심은 더 이상 『정신현상학』이 아니라 『논리의 학』이 차지하게 된다.

『논리의 학』에서 헤겔은, 사유와 존재를 "판단(또는 규정)"하기 이전의, 통일되고 근원적인 '의식'을 전제한다. 이른바 "순수한 앎"이다. 하지만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판단(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사유 속에서 다양한 역설과 긴장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만들어 낸다. 한편 역설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각각의 판단들은 오직 더 큰 추론 속에서 유의미해지기 때문에, 보다 더 큰 추론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가장 큰 추론을 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겔은 이를 "이성들의 공간" 또는 "이념(객관성)"이라 부른다. 이 "이성들의 공간"은 개별 판단에 의한 논리적 역설과 긴장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큰 전체로서 다시 사유와 존재의 통일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것은 "주관적인 개념인 동시에 객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이성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가장 큰 추론이므로, 이 이성 외부에 기준으로 존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이성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개별적 판단이 비록 한계를 가지더라도 결국 우리 모두의 판단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정립할 수밖에 없다는 말과 같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모든 규정(판단)은 부정"이기에, 통일된 "이성들의 공간"에서 각기 부분으로 위치할 개인들이 그 자신의 "부정성"을 끊임없이 산출해야 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부정성"은 "스스로 생각하기", 즉 자율을 요구한다.

2.5.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시기

헤겔의 높아진 평판과 지속적인 그의 노력 덕분에 1816년 마침내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헤겔에게 교수 자리를 제안했다. 보수에 관해 잠시 협상을 한 후 헤겔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느덧 46살의 중년이 된 헤겔은, 하이델베르크에서 화목한 가정과 직장에서의 교수 생활을 즐기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헤겔을 둘러싼 세계는 변했고, 그에 상응하여 헤겔의 생각과 체계도 변했다. 이제 헤겔은 자신이 혁명을 말하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이미 일어난 혁명을 어떻게 지속하고 유지하는 데 관심을 가지는 철학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1817년에 발표한 『철학대계 (엔치클로페디)』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정립된 근대적 이념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이 시절에 헤겔은 헌법에 관한 논쟁에 뛰어들게 되면서, 스스로 "객관 정신"이라고 말했던 사회 제도와 법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러는 와중에 프로이센 문화부 장관으로 막 임명된 알텐슈타인이 베를린으로 헤겔을 부르자, 헤겔은 1818년 베를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헤겔은 베를린 대학에 있으면서, 독일 국가들이 어떤 헌법을 가져야 되는지를 철학적으로 해석한 『법철학 요강』을 1820년 발표한다. 이 책에서 헤겔은 "자유" 자체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 어떻게 국가와 법에 의해 조건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자 했다. 헤겔에 따르면, 자기 비판적인 각각의 개인들은 자신의 이성적 생각과 자유에 따라, 스스로가 다른 개인들과 유기적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만한 "전체" 구조 속의 한 지점을 찾아들어간다. 그러기 위해서 개인은 미리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거꾸로 "전체"는 "민중"이 집단적으로 합리적(이성적)이라고 설정하는 것에 대한 이해에,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할 수밖에 없다. 즉, "전체"는 오직 합리적인(이성적인) 개인들이 자유롭고 집단적으로 창출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법"에 의해서만 기획될 수 있고, 이를 통해 획득한 다양한 법률적, 규제적, 조합적 구조들이 "전체"에 윤리적 권위를 부여할 때, 개인은 그 권위를 기준삼아 "전체"를 조망하고 스스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헤겔은 이 "전체"를 국가라고 보았다.[23] 이것은 정치철학을 역사철학으로 몰고 간다. 왜냐하면 이성에 대한 이러한 설명[24]은, 역사적으로만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겔은 세계사의 철학에 관한 짧은 몇 단락으로 『법철학 요강』을 종결지었다. 그리고 헤겔은 후에 일련의 강의를 통해 이것(역사철학)을 확대했다.

2.6. 말년

역사철학, 예술철학 등의 강의는 성공적이었고, 헤겔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갔다. 헤겔이 강의실에 들어서면 웅성거리던 소리는 갑자기 멈추었고, 심지어 너무나 조용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헤겔 고유의 이해하기 힘든 용어와 농담들은 도시 전역에 빠르게 퍼져서, 실제로 거의 모든 곳에서 그의 사변적인 표현들이 쓰여졌다. 대학의 건물 벽이나 담장에는 분필이나 연필로 헤겔의 말들이 적혀 있곤 했다. "당신, 헤겔이 한 말 들어 보았소?"는 베를린 사회의 일상적인 말이 되었다. 헤겔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쇄도했고, 자신의 작품을 읽고 대학에서 좋은 말을 해 달라거나 한번 만나 달라고 하는 등의 편지를 헤겔은 정기적으로 받았다. 이 무렵 헤겔은 책을 펴내지 않고 오직 강의를 통해서만 자신의 체계를 세워 나가고 있었는데, 그래서 헤겔의 강의를 받아 적은 노트의 사본은 사람들이 늘 찾는 품목이었다. 1826년에는 제자들이 마련한 헤겔의 깜짝 생일파티가 지역 신문에 실렸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헤겔의 생일을 보도한 신문 기사를 읽고 화를 냈다. 자신의 생일파티에 대한 보도와 비교할 때 헤겔의 생일파티가 너무 많은 지면을 차지했다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왕은 내각령을 공표해서 이 시점 이후 "개인의" 생일에 대한 신문 보도를 금지했다.

1830년에는 드디어 베를린 대학의 최고 행정직인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더군다나 대학을 감독하는 정부의 전권대사로도 임명되었다. 그러나 1829년 들어 나빠진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상부 위장관 질병으로 인해 가슴 통증은 심해졌고 빈혈로 인해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럼에도 강의는 꾸준히 진행했다. 그러던 어느날 심각한 통증이 몰려와 하루종일 가슴 경련과 복통을 호소하다가, 그 다음날인 1831년 11월 14일 오후 다섯 시경에 세상을 떠났다.[25]

당시 베를린은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었고, 의사들은 헤겔이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진단했다. 그렇지만 죽음의 원인은 사실상 콜레라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헤겔은 설사나 발열, 혹은 그 밖에 어떤 콜레라 증상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26]

이틀 뒤 치러진(11월 16일) 장례식은 거대한 행렬을 이루었다. 헤겔의 시신을 실은 마차 뒤를 학생들과 도시 전역에서 모인 수많은 애도자들이 뒤따랐다. 심지어 헤겔의 반대자들도 그의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헤겔 자신의 소망에 따라 도로테아 공동묘지에 있는 피히테 옆에 묻혔다. 헤겔이 죽은지 12년 후에, 미쳐버렸던 그의 절친한 친구 횔덜린도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헤겔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방문객의 질문을 받고는, 중얼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해댔다. 분명한 것은 이 말이었다. "절대자요 The Absolute."

3. 사상


헤겔은 특히 철학자 중에서도, 철학 체계가 방대한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독일 현지를 제외하면 그의 철학적 면모들 중 일면만이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때 영국에서 유행하던 헤겔은 그의 논리학적 일면이었고,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헤겔이었다.

헤겔은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 있는 철학자로서 헤겔 이전 철학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칸트는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과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을 종합해 선험적으로 주어진 오성(Verstand)의 12가지 범주를 통한 인식과 사물이 일치되는 것을 진리로 긍정했으며, 경험되지 않는 명제는 증명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인간 인식의 조건과 한계를 분명히 지은 것이다. 이를 통해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에서 말한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은 말 그대로 형이상학으로 남게 되었다. 모든 명제는 경험을 통하여 코기토 안에 포섭되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는 오성에 의해 경험이 될 수 있는 자아(코기토)와 달리 자아를 인식하는 자아인 초월적 자아의 구분을 짓고, 초월적 자아에 인간의 존재론적인 존엄성을 부여한다. 초월적 자아에 의해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대우되어야 하며, 그리고 외부적인 것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닌 자신의 자유를 통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도덕 법칙을 따르는 존재론적인 근거를 갖게 된다.

피히테는 이러한 자아의 구분을 자아-비아-절대자아로 포섭한다. 칸트가 인간의 인식 조건과 한계를 구분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 세상에서 도덕 법칙을 따르며 살아가야 할 존재론적 근거로서 초월철학을 마련했던 것과는 달리 피히테는 절대자아가 자아(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자유를 실현한다고 말하였다. 자아는 비아(사물)와 구별되는 존재라서 절대자아를 포섭하는 존재인 것이다. 셸링은 절대자(das Absolute)의 개념을 더 확장하여, 절대자는 단순히 인간 자아에 의해 그 이념(Idee)을 실현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외화되어 사물(자연)을 산출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절대자로부터 사물이 산출되고, 그 사물은 잠재태로서 존재하며 종국에는 사물로부터 다시 절대자로 복귀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이 세상에서 절대자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다. 셸링의 절대자는 인간에 의해 포섭되면서도 동시에 자연을 산출하는 절대자인 것이다.

이러한 절대자의 개념은 헤겔에게 비판을 받는다. 헤겔은 슐라이어 마허나 셸링과 같이 신에 대한 직관에 머물거나 단순히 이 세계를 유한자와 무한자로 양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에서 시작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와 역사를 절대자의 전체적인 움직임으로 바라본 것이다. 의식(감각-지각-오성)-자기의식-이성-정신-종교-절대지(Das absolute Wissen)의 과정을 거치며 유기체와 같이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 진리요 절대자의 현현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사회와 역사는 주관정신(의식-자기의식-이성)의 부정성을 지양하여 절대정신의 단계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이때 절대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이 세계와 철저히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에 실현된 잠재태로서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 유명한 헤겔법철학의 문장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독일 관념론에서 이성(Vernunft)는 합리적 사고의 이성만이 아니라 신이 창조하고 주재하는 이 세상의 신적인 질서까지 포섭하는 인식론을 말한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에서 실현되고, 현실적인 것은 그렇기에 곧 이성적이다는 말이다. 인간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절대지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운동의 과정에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타자, 즉 부정성은 그 존재 자체가 말소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양(Aufheben)을 통해 변증법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것이다. 헤겔을 단순히 '정반합' 수준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 여기에 있다. 단순히 A+B=C와 같은 변용이 일어난다는 게 아니라, 인식론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사회의 관계, 사회의 역사적 발전 과정은 모두 다 그와 같은 불완전한 부정성을 포섭하여 발전해나가는 진취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발전을 위한 '포섭'을 전체주의적이라고 비판하여 왔지만, 최근에는 '부정성'의 개념에 포착하여 다시 헤겔이 부각되고 있다. 헤겔이 스스로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말했듯 철학 연구는 결과를 완성해내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과 운동인 것이다. 넓게 보면 결국 헤겔의 비판자들은 헤겔에 이미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4. 영향

"우리 시대는 논리학을 통해서건 인식론을 통해서건, 마르크스를 통해서건 또는 니체를 통해서건 간에, 모두 헤겔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헤겔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그와 유리됨으로써 치르게 될 대가를 정확히 평가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비록 공공연하게는 아니더라도 암묵적으로나마 헤겔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알아야 하며, 우리가 헤겔에 대항하여 사고할 때조차 그것이 여전히 헤겔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를 상대로 한 제소, 그 소송이 실은 그 헤겔이 우리에게 마련한 계략이며, 그 끝에서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미셸 푸코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 강연문에서
헤겔 이후의 철학은 그게 비판이 되었든 동의가 되었든 간에 헤겔이 뿌려놓은 씨 위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스스로를 "거꾸로 선 헤겔학도"로 표현했을 만큼 변증법적 방법론을 그의 체계에 도입하고 있지만, 청년 헤겔 학파 등에 대한 그의 무지막지한 비판과 루이 알튀세르에 의해 퍼뜨려진 오독으로 인해 종종 헤겔 안티로 오해받기도 한다. 블라디미르 레닌, 게오르크 루카치, 테오도르 아도르노 등의 철학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변증법적 방법론을 보다 더 강조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슬라보예 지젝자크 라캉과 헤겔 철학 사이의 연결점을 파악하려 시도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라캉과 헤겔 사이에도 연결고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라캉이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그 유명한 헤겔 강의를 듣고 영향을 받았으니.

반대로 헤겔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남긴 철학자들 역시 많다. 가령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전집을 읽는것보다 데이비드 흄의 저서 한 페이지를 읽는것이 더 가치있다"는 말로 헤겔에 대해 악평을 날렸다. 그외에도 헤겔을 비판한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꼽자면 쇠렌 키르케고르, 윌리엄 제임스, 에드문트 후설, 빌헬름 딜타이, 테오도어 아도르노, 칼 포퍼, 질 들뢰즈 등이 있다.

또한 20세기 중반 이후 영미 철학계의 주류였던 분석철학도 헤겔에 대해 비판적인 어조를 취한다. 그 이유는 첫째, 이 시기 분석철학은 과거 철학자들의 작업을 진지하게 고찰하거나 철학사적 맥락 하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 소극적이었고, 둘째, 명료한 글쓰기와 철저한 논증을 중시하는 분석철학이 가진 철학적 논증의 특성상 헤겔의 철학적 논증 방식과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미철학권, 즉 분석철학의 조류 내에서 헤겔 철학의 지위는 대륙의 그것만큼 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분석철학'의 조류 내에서 때때로 그들이 공격하거나 비판하는 철학적 입장의 대표자로서 종종 등장하곤 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 분석철학이 헤겔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분석철학의 출발점은 고틀로프 프레게가 현대논리학을 개발하고 함수 개념을 언어 분석에 사용한 것인데, 수학자였던 프레게의 작업이, 임마누엘 칸트라면 몰라도[27], 어떤 식으로든 헤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힘들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공학도 출신으로, 말년에 가서야 플라톤의 저작들을 읽어봤을 정도로 기존의 철학적 전통에 철저히 무관심했다.[28] 논리실증주의의 형이상학 비판도 경험적 내용을 갖지 않는 기존 형이상학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이었지, 헤겔을 딱 집어서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헤겔주의가 분석철학에 미친 영향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러셀과 무어가 영국의 헤겔주의[29]를 혹독하게 비판한 일도 있었고[30], 러셀, 무어, 화이트헤드 등이 따랐던 다원주의적인 관점은 독일 관념론과 헤겔 철학을 비판하면서 탄생했다. 또한 현대 분석철학과 기호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찰스 샌더스 퍼스는 헤겔의 변증법과 범논리주의를 높이 평가했고, 이를 전유하여 자신의 삼원 구도를 구축했다. 이후 20세기 중후반, 윌프리드 셀라스 이후로 분석철학의 경험주의적 명제인 감각소여가 비판받으면서 헤겔 철학이 분석철학계에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헤겔 철학을 통해 분석철학을 재구성 내지는 발전시키려고 하는 피츠버그 학파가 대표적.

오늘날 분석철학에서도 헤겔을 분석적 방법으로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는 사람도 나타났는데, 이런 경향은 과거의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딱히 헤겔에 대해서만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31]나, 영미권 내에서 20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진지하고 활발하게 연구되는 학자 중 한명이 바로 헤겔이다. 이런 연구자들은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의미의 재구성에 대한 부분을 주로 건드리고 있다. 가끔씩은 헤겔의 대논리학을 분석철학적 방법론으로 연구하는 경우도 있고. 칸트에 대한 적절한 비판으로서 분석철학 내에서 '비형이상학적 헤겔'이 헤겔에 대한 새로운 독해로서 등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비형이상학적 헤겔' 독해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실용주의 진영 내에서 '실용주의적 헤겔'의 독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동아시아 철학과 헤겔을 연결시켜 보려는 시도도 있다. "의식의 절대적 도야"를 목표로 삼은 헤겔과 동아시아 철학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임석진의 "정신현상학" 번역본을 보면 헤겔 철학과 동아시아 사상의 접점으로 이끌 만한 논의들에 대해 제법 다양한 주석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확고한 목적론을 지닌 헤겔 사상을 무정형의 변화를 기본으로 하는 동아시아 사상에 대입하는 것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어려운 것이라 하겠다.

한편 헤겔 철학은 한국과 일본의 운동권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양국의 운동권 대학생들은 마르크스주의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헤겔주의에 대한 지식 역시 함께 습득했는데, 이때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의 단계, 즉 주인-노예의 변증법이라는 구조가 마르크스주의적 운동의 대안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한국에서 헤겔 사상이 독재 정권에 의해 어용 철학으로 악용당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저항의 과정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활용되기도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점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헤겔주의자로는 알랭 바디우, 악셀 호네트, 찰스 테일러, 피츠버그 학파의 로버트 브랜덤과 존 맥도웰 등이 있으며, 최근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슬라보예 지젝이 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헤겔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5. 논란

5.1. 헤겔의 국가 개념은 파시즘인가?

나폴레옹 프랑스 시기에 출간된 그의 초기 저서 『정신현상학』이 부정적 사고를 전제로 하는 변증법 개념을 전면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그는 일면 진보적 철학자로 여겨졌으나, 말년에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국가를 옹호한 『법철학』을 출간해 헤겔이 프로이센 국가를 옹호하는 관제 철학자가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어왔다. 이 논쟁은 그의 사후, 헤겔학파가 좌우파로 나뉘어지는 계기가 되며, 이후 매우 중요한 쟁점이 된다.

또한 '열린사회론'으로 유명한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 역시도 헤겔주의를 극렬히 비판하였다. 헤겔은 플라톤과 함께 전체주의를 정초한 권위주의적인 학자의 대표라는 것이다. '부정변증법'을 주장한 아도르노도 헤겔 철학은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본다면서, 모든 개인을 국가에 동일시시켜 그 나라를 파시즘에 빠지게 만든다고 비판했다.[32] 즉, 이들 주장의 핵심은 '헤겔의 사상이 전체성(전체주의)을 목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33]

이는 단순히 변증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예로부터 헤겔 좌파들은 역사의 종언을 이성으로 설정하는 헤겔을 이러한 이유로 비판하였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박치우는 헤겔 변증법이 기본적으로 파시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마르크스는 헤겔 법 철학과 국가 개념을 비판하며 유물변증법을 전개해 나갔다. 즉, 헤겔에 대한 비판은 변증법을 부정하는 입장 뿐만이 아니라 변증법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헤겔주의자들은 이를 부정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계몽주의의 이성 전통과 변증법의 비판적ㆍ부정적 정신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헤겔 철학은,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탈리아와 소련 등의 전체주의가 헤겔 철학을 정치적으로 악용했기 때문에 헤겔 철학이 전체주의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 역시 잘못이다. 헤겔은 사회 형태가 '가족 - 시민사회 - 국가'로 발전한다고 보았는데, 이때의 국가는 전체주의적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헤겔의 국가 개념은 가족과 시민 사회를 지양한 형태로서 개별성과 공동체성이 통합되어 있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이 보장된다. 헤겔은 계몽주의의 이성주의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시민 혁명의 성과물인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전체주의 국가는 시민들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억압한다.[34]

이처럼 헤겔의 국가 개념과 파시즘의 국가 개념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이론가들이 헤겔을 비판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헤겔 철학에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주의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헤겔 철학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일 제3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체계화하였던 카를 슈미트는 헤겔의 국가 개념을 거부하면서, 그것이 국가사회주의와 상충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카를 슈미트는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독일에서는 헤겔의 전통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반면에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헤겔 철학을 왜곡하여 파시즘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헤겔 철학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여러 봉건 세력으로 나뉘어져있던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단일한' 민족 국가를 만들려고 했으므로, 그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헤겔의 국가 개념을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왜곡하여 악용했었던 것이다.[35]

즉, 국가사회주의 철학자 슈미트[36]가 헤겔 철학을 거부한 데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이성과 자유 그리고 비판과 부정을 강조하는 헤겔 철학은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와는 연관성이 없다. 오히려 헤겔 철학은, 사회적 통제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체제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비합리적 파시즘과는 대립적 관계에 있다.[37]

6. 저서

제목 발간 연도
정신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년
논리의 학 (대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
1812년
~ 1816년
철학적 학문들의 엔치클로페디 강요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n Grundrissen
1817년
법철학 강요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0년
종교 철학 강의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Religion
1832년
철학사 강의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1833년
~ 1836년
미학 강의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
1835년
~ 1838년
역사 철학 강의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1837년

헤겔의 3대 저서는 『정신현상학』, 『논리의 학』, 『법철학 강요』이다. 여기에 『엔치클로페디』까지 합쳐서 총 4권이 헤겔이 정식으로 출간한 책들이다.

나머지 책들은 전부 강의를 필사한 것이다. 헤겔이 유명할 때 강의가 필사되었고, 심지어 시중에 헤겔 강의 필사본이 돌아다닐 정도로 그 당시에도 수요가 높았기 때문에, 필사된 내용은 대부분 정확하다. 다만 강의본은 헤겔이 직접 "책"으로 편집한 본이 아니기 때문에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생각이 보이기도 한다. 그 중 『역사 철학 강의』는 헤겔 책치고는 그나마(!) 읽기 쉬워서, 입문용으로 먼저 읽히는 편이다.

하지만 헤겔이 정식으로 출간한 4권은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어려워서, 『역사 철학 강의』의 내용만으로 헤겔의 사상을 단정짓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데, 사실 헤겔의 주요 저서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앞선 3대 저서 『정신현상학』, 『논리의 학』, 『법철학 강요』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비판자들이 이 책들을 오독해서 그릇된 비판을 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중 『정신현상학』은, 책을 읽는 학자마다 해석이 달라질 정도의 난해함으로 유명하다. 그래도 최근에는 관련 연구 논문들이 많이 쌓인 상태라 예전보다는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 위안거리다.

7. 어록

진리는 전체다.
Das Wahre ist das Ganze.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
Was vernünftig ist, das ist wirklich; und was wirklich ist, das ist vernünftig.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
세계사는 자유 의식의 진보다.
Die Weltgeschichte ist der Fortschritt im Bewusstsein der Freiheit.
순수 존재와 순수 무(無)는 같다.
Das reine Sein und das reine Nichts ist also dasselbe.
국가는 구체적인 자유의 현실이다.
Der Staat ist die Wirklichkeit der konkreten Freiheit.
정말 중요한 것들은 열정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Nichts wirklich Wichtiges ist ohne Leidenschaft erreicht worden.
오류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오류 그 자체이다.
Die Furcht zu irren ist schon der Irrtum selbst.
호기심도 허영심도 효용성도 의무감도 양심도 아닌,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생겨나는 잊혀지지 않는 서툰 갈증이 우리를 진리로 이끈다.
Nicht die Neugierde, nicht die Eitelkeit, nicht die Betrachtung der Nützlichkeit, nicht die Pflicht und Gewissenhaftigkeit, sondern ein unauslöschlicher, unglücklicher Durst, der sich auf keinen Vergleich einläßt, führt uns zur Wahrheit.

8. 관련 강의 영상

[navertv(22711473)]
김상환 교수의 정신현상학 강연
[navertv(26740024)]
나종석 교수의 법철학 강연

9. 여담

  • 그는 책을 대부분 독일어로 썼는데, 그의 문체는 매우 난해하고 어려워서 독일인들은 그가 책을 '헤겔어'로 썼다고 말한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말솜씨가 좋지 않았는데, 강의를 할 때 움츠러든 자세로 시선은 노트를 향하고 위아래로 훑으며 노트를 넘겨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서 읽었고, 말 사이사이에 끊임없이 헛기침 소리를 냈다고 한다.
  • 일반적으로 근대 철학과 현대 철학을 구분하는 마지막 경계가 바로 헤겔이다. 근대 철학의 계보는 헤겔이 이어받았으며 그와 동시기의 다른 학자들은 헤겔 철학을 비판하면서 현대 철학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헤겔의 하숙방 밑을 지나갈 때 헤겔이 "저기 절대정신이 걸어간다"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어서, 헤겔은 제 나라를 침략한 적국의 수장을 왜 저렇게 찬양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저 말을 했을 당시 헤겔은 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에서 교수 생활 중이었고 헤겔의 조국은 예나 시가 속한 작센 선제후령이 아니라 뷔르템베르크 공국이었다. 그리고 뷔르템베르크 공국은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다. 작센 선제후령 역시 프로이센의 동맹으로 예나 전투에 참전했지만,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탈탈 털린 후 프랑스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라인 동맹에 가입하게 된다. 그래서 헤겔은 프랑스를 지지하던 수많은 뷔르템베르크 지식인들 중 한명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저런 말을 한 것. 또한 그 당시 독일 연방 전체가 목불인견의 시궁창이었다. 영주들은 일신의 환락을 위해 무거운 세금을 강요하고 지식인들을 체포하고 구금하길 즐겼다.[38] 독일 연방에 대한 이러한 실상을 놓고 헤겔은 "독일은 이제 국가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39]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은 그 당시 독일 진보적 사상가들의 희망이었고, 그런 맥락에서 헤겔은 나폴레옹을 '(자유와 평등 같은 근대적) 시대정신을 체화한 존재'로서 절대정신이라 부른 것이다.
  • 동시대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그를 매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저서 곳곳에서 헤겔을 '사기꾼', '협잡꾼' 등의 원색적인 표현으로 비난하였다. 헤겔 개인을 인간적으로 싫어했다기보다는, 서양 철학 전체를 다 까는 그의 입장에서는 헤겔이 당시 서양 철학의 적통이기 때문에 주요 비판 대상이 된 것. 쇼펜하우어는 베를린대에서 헤겔과 같은 시간에 강의를 하여[40] 정면 대결을 했으나, 헤겔의 교실에는 수강생이 가득 차고 쇼펜하우어의 교실에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베를린대의 대표 철학과 교수로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던 헤겔을 갓 데뷔한 쇼펜하우어가 이길 수는 없었다. 헤겔이 사망하고 나서야 쇼펜하우어는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 쇠렌 키르케고르도 헤겔 비판에 한몫했다. 아니 그의 책 상당수가 헤겔을 중심으로 근대 철학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비판의 요지는 보통 이렇다. 헤겔을 필두로 한 근대 철학은 윤리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는데, 이게 사람들에게 퍼지면서 모두 자신의 양심보다는 어떤 행동이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옳은지만 찾게 되었다. 그래서 개개인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하지 않은 채 역사 탐구에만 몰두하고, 심지어는 역사의 일부분을 축소하거나 과장하여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41]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이것들에 대한 반대급부로, 현실에 존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세계관을 들고 나오는데, 그것이 나중에 실존주의로 이어진다.
  • 헤겔은 당시 기준으로 중국에 대해 '자유가 없는 나라'라고 주장했다. 서양은 계속해서 자유가 확대되는 쪽으로 진보해왔지만 중국은 아직까지도 황제 한명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주장이다. 이는 헤겔이 자유의 확장이 역사를 발전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시각에 입각하면 중국의 전제군주 시스템은, 국가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유교적인 명분에 의해 지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공자를 평가절하한다.[42] 그러나 동아시아권에서는 헤겔의 사상을 받아들일 때부터 유교와 결합시켜서 이해해왔었다. 이는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는데, 유럽에서 도덕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자리에 동아시아의 도덕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를 집어넣어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럴려면 우선은 '공동체'를 말하기 이전에 '자유로운 개인'을 먼저 정의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유교 자체가 이미 공동체에 대한 도덕을 말하는 것이어서 유교만 가지고는 '자유로운 개인'을 먼저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근현대에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자국(동아시아)의 민주주의 역사 과정을 끌고 들어와서, 이를 유교와 변증법적으로 융합시키는 기괴한 장면이 학계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굳이 유교를 공동체의 도덕으로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 한때 헤겔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의 동아시아권 나라에서 대단히 많이 연구된 서양 철학자로, 동아시아권에서 국가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우파 지식인들과 마르크시즘 성향의 좌파 지식인들 모두에게 중요하게 여겨진 학자이다. 그의 변증법적 역사 발전론은 동아시아의 근대 지식인들에게 국가 발전, 근대화 추진의 사상적 기반으로 여겨졌고, 가족-시민사회-국가로 발전되는 변증법적 집단 윤리 의식을 강조한 도덕철학과 대륙법계 법철학은 유교적 보수적인 동아시아권 근대 지식인들에게 많이 수용되어 정치 철학과 윤리학, 동아시아권에 계수된 대륙법계 법철학의 주요 이념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서구권에서는 2차 대전 이후, 특히 영미권 학계에서 헤겔은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시초로 여겨져서 많은 비판을 받았었고 그만큼 연구가 부진했었다. 그랬던 것이 최근 수십년간 영미권에서도 헤겔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척이 되면서 헤겔 수용 영역도 점점 넓어지고 있고(특히 도덕철학과 정치철학 영역에서) 찰스 테일러, 로버트 브랜덤, 존 맥도웰 등 헤겔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저명한 학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 2022년 11월 29일, 가디언지에 따르면, 뮌헨 지역의 가톨릭 도서관에서 헤겔의 초기 사상이 담긴 4천여장 분량의 강연 원고가 새롭게 발견됐다. 이 원고는 하이델베르크 시기에 헤겔의 강의를 들은 제자가 받아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원고가 중요한 이유는 헤겔은 하이델베르크에서 처음 미학 강의를 했고 이후 베를린에서 강의할 때는 견해가 크게 달라져 있었는데, 이번 발견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베를린에서의 미학강의가 아니라 바로 그 전 시기인 하이델베르크에서의 미학강의여서, 헤겔미학의 초기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원고를 연구한 교수의 소견에 따르면, 헤겔이 그의 미학 개념을 어떻게 형성했고,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떻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분석했는지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
  • 급사하기 반 년 전에 영국 선거법 개혁법안에 관한 평론을 기고했고(Über die englische Reformbill), 이것이 사실상 마지막 저작이 되었다. 원래 영국과 프랑스 신문을 즐겨 읽는 등 정치 평론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1] 독일의 화가 야콥 슐레진저(Jakob Schlesinger)가 그린 『철학자 헤겔 (1831)』. 이 초상화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겔이 죽었다. 즉, 이 그림은 말년의 병든 모습을 그린 것이다. 병색을 더 도드라지게 표현하기 위해서 이 그림에서 채도를 낮춰 얼굴을 하얗게 편집한 그림파일도 돌아다니지만, 해당 그림이 원작. 그림은 현재 베를린 구국립미술관(Alte Nationalgalerie) 3층에 전시되어 있다.[2]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슈투트가르트[3] 헤겔 전문가 테리 핀가드는 죽음의 원인은 사실상 콜레라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한다. 당시 헤겔은 설사나 발열, 혹은 그 밖에 어떤 콜레라 증상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헤겔을 진단했던 의사들이 죽음의 원인을 콜레라라고 주장했던 것은 당시 베를린에 콜레라가 유행했었기 때문에 내린 오진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죽음의 원인은 1827년 이래로 심각하게 앓아 왔던 만성적인 위장병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847~848 참조)[4]독일 베를린[5] 「행성의 궤도에 관하여」라는 짧은 교수 자격 취득 논문(habilitation)을 통해 교수 자격을 취득한다.[6] 고향 튀빙겐에서 법학 공부를 하고 슈투트가르트 재무국 서기관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재무국의 파견고문관이 되었다.[7] 몇번의 연애에 실패한 뒤 미혼으로 가난하게 살다가, 헤겔이 콜레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8] 헤겔보다 스무 살 연하인 그녀는 뉘른베르크의 가장 유서 깊은 귀족 가문(폰 투허)의 딸이다. 두 사람은 메르켈이라는 상인 집에서 만났다. 장모는 헤겔과 동갑이었는데, 장모의 누이가 중매를 섰다.[9] 본명은 게오르크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피셔. 보통 루트비히 피셔로 불린다. 헤겔과 가정부 크리스티아네 샤를로테 요하나 부르크하르트(그녀는 본디 유부녀였으나 남편에게 버림받은 집주인이자 가정부였다. 루트비히는 그녀의 세 번째 사생아였다.)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헤겔은 결혼 이후에도 책임감을 느끼고 루트비히를 돌봐주려고 했으나, 루트비히는 헤겔에게서 사랑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루트비히는 결국 헤겔에게서 벗어나, 네델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근무하다가 그곳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10] '개신교의 아퀴나스'라고도 불린다.[11] 러셀 서양철학사[12] 세관 사무원[13] 이 일화는 수없이 반복되면서 헤겔-횔덜린-셸링 신화의 일부가 되었으나, 헤겔의 전기작가 테리 핀카드는 이 일화는 아쉽게도 셸링이 〈마르세예즈〉를 번역했다는 것만 제외하고 모두 거짓임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44 참조)[14] 교양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충격적인 특징은 무엇보다도, 교양인이 되는 것은 출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끌고 만들어 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귀족, 심지어 부르주아까지도 부정하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상ㅡ 즉, '교양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15]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형이다.[16] 1806년 10월 13일.[17] 친구 니트하머에게 보낸 편지에서.[18]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301[19] 한국으로치면 중ㆍ고등학교에 해당한다.[20] 헤겔은 매우 자세한 계획을 세우고 지속적으로 관련 인사들을 만나서 필요한 자금을 얻어, 빈민들을 위한 사범학교를 세웠다. 연말 보고서에서 헤겔은 "빈민 학교"를 설립하고 훈련받은 교사들을 그곳에 배치하여 아이들이 가장 좋고 새로운 방법으로 배울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415)[21] 학교 명칭은 '에기디엔 김나지움'이었다.[22]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365[23] 「다만 헤겔은 민주주의와 지역구 투표제를 거부하고, 대의제적 정부 형태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는 다수 정당이 소수의 이해를 단순히 무시해 버리기 때문이며, 지역에 기반하여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것은 그들이 "전체" 사회를 대표하는지, 혹은 심지어 그들이 대표해야 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해를 대표하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선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계층과 소속 단체에 소속감을 가지는 한에서, 계층과 단체를 기반으로 하는 대의제는 모든 합법적인 목소리가 "국가" 수준에서 나오는 것을 좀더 확실하게 보장할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사회의 기본적인 이해를 확실하게 대변하고 사회의 안정성이 유지될 수 있는 방법으로 "귀족" 의회와 "평민" 의회가 있는 양원제를 주장했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623)[24] 이성의 "전체"(『논리의 학』에서 말했던 '이성들의 공간' 또는 '이념'을 뜻한다)는 "민중"이 집단적으로 합리적(이성적)이라고 설정하는 것에 대한 이해에 달려있다는 설명. 즉, 이성의 개념(이념)은 (개인의 논리적 추론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민중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매우 쉽게 말하자면, 이념은 '그 시대의 집단 지성'에 의해 결정되고, 그것이 국가의 법이라고 말했던 것.[25] 하인리히 하이네에 따르면, 임종 직전 유언으로 헤겔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를 이해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분하다는 듯이 다시 말을 덧붙이면서, "(사실은)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일화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26] "충격적인 것은 의사들이 죽음의 원인을 콜레라로 발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헤겔이 콜레라 증상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들은 죽음의 원인을 몸의 내부에서 발생하여, 일반적인 콜레라의 외적인 증상을 전혀 보이지 않는 "독성 콜레라"로 판정했다. 그렇지만 죽음의 원인은 사실상 콜레라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헤겔은 설사나 발열, 혹은 그 밖에 어떤 콜레라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헤겔은 언젠가부터, 아마도 1827년 이래로 앓아 왔던 만성적인 병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콜레라가 베를린의 여러 저명한 지식인들을 앗아갔고 의사들의 진단이 있었기 때문에 헤겔은 콜레라에 의해 희생된 유명 인사의 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생각되어 왔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847~848)[27] 프레게의 주된 학문적 목표 중 하나가 수학적 명제는 선험적 종합 명제라는 칸트의 핵심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28] 전혀 잘못된 사실이라는 주장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려서부터 쇼펜하우어 등의 철학자들의 철학을 그의 누나와 논했을 만큼 높은 수준의 철학적 교육을 받았고, 또한 이후에도 칸트와 버클리에 대한 생각을 남기는 등 철학사적 전통에 충분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주저 논리철학논고만 보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언급과 함께 시작한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여 쇼펜하우어 철학을 운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칸트와 버클리에 대한 생각을 낸다는 것 자체가 플라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29] 정확하게 말하자면 칸트로부터 시작된 독일 관념론 전부[30] 정확히 러셀의 경우 헤겔의 저서를 읽고 비판한 것은 아니다. 당대 학계를 주름잡던 영국의 헤겔주의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대표적인 인물이 프랜시스 허버트 브래들리.[31] 과거 철학에 분석적 연구 방법을 도입하는 건 심지어 동아시아 철학 연구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32] 이에 대해 지젝은 아도르노가 헤겔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지적한다. 헤겔은 '진리는 전체다'는 말에서, '과정' 자체가 진리가 되어야 된다고 분명히 언급했으며, 이러한 '과정'은 변증법을 통한 '부정(反)의 역사' 였다는 것이다. 즉, 헤겔의 '절대지'는 '반증의 역사 과정 전체'이다. 무한대의 반증(반대)을 끌어 안아야 절대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헤겔의 사상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반증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전체성'과 연관시키는 것은, 자신의 사상에서 '자유'를 강조했던 헤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존 '개념'과 '권위'를 해체하자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해체'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파편화되어 도리어 어떤 '의견'도 성립되지 않는 문제점을 노출시킨다. '대안'을 말해도 그 대안 마저 '해체'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어떤 주장도 성립될 수 없으며, 모든 것에 대한 '비판'만이 인정된다. 결국 '종합'을 해야되는 시점도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해서 '주류 담론'을 만들지 못하고, 시대를 이끄는 담론이 형성되지 않음으로해서, 사회를 바꾸지도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33] 또한 절대지식의 추구 과정에서 그 '도중의 비합리적인 정치적 행동들이, 반증(反證)이라는 명목아래, 목적을 위해 합리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34] 사회 비판과 대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제들』 도서출판 옹기장이(2010) p.152[35] 사회 비판과 대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제들』 도서출판 옹기장이(2010) p.153[36] 물론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를 구분하는 학자도 있다.[37] 사회 비판과 대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제들』 도서출판 옹기장이(2010) p.153[38] 애첩에게 성을 지어줄 돈을 마련하려고 국민들을 잡아다가 통 크게 인신매매한 영주도 있었고 헤센 공국의 경우는 국가 주도로 용병업을 하기위해 여행과 주거이전의 자유를 박탈했다. 특히 헤겔의 고향인 뷔르템베르크(프로이센 왕국이 아니다!)에 대해서는 "역사상 뷔르템베르크 이상으로 노예 상태가 이루어졌던 곳은 독일의 어느 연방에도 없었다"는 말도 있었다.[39] 국내에 번역된 일본의 철학자 나까야 쪼우(中埜 肇, 오역이다. 올바른 이름은 '나카노 하지무'이다.)의 책 '헤겔' 참조.[40] 재미있게도 이 자리는 헤겔이 직접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41] 키르케고르 『주체적으로 되는 것』 임규정 역, 지만지고전천줄, 2008, p32-37[42] 반면 노자의 사상은 변증법스러운 암시가 많이 엿보이기 때문에, 헤겔은 노자를 스스럼 없이 한명의 철학자로 대접해준다.[43] 평가원 철학지문 중 가장 어려운 것들 중에 하나라 평가받는다.[44] 1컷 84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