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6:42:11

미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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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파일:미셸 푸코.jpg
본명 폴미셸 푸코 [1]
Paul-Michel Foucault
출생 1926년 10월 15일
프랑스 제3공화국 푸아티에
사망 1984년 6월 25일 (향년 57세)
프랑스 파리 피티에살페트리에르 병원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서명 파일:Michel_Foucault_signature.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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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모교 앙리 4세 학교
파리 고등사범학교
파리 대학교
경력 파리 고등사범학교 심리학 조교
릴 대학 심리학 조교
웁살라 대학 프랑스문화원장
바르샤바 대학 프랑스문화원장
함부르크 대학 프랑스문화원장
클레르몽페랑 대학 심리학 교수
튀니스 대학 철학 교수
뱅센 실험대학 철학 교수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학파 대륙철학,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프랑스 니체주의[2], 프랑스 과학철학
정당

( ? - 1953)[3]
종교 무종교[4]
직업 철학자, 사회운동가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대학 생활2.3. 문화원장2.4. 철학자로서의 성공2.5. 튀니스2.6. 투쟁의 시기2.7. 미국 활동과 말년
3. 사상
3.1. 근대화에 대한 비판3.2. 고고학과 계보학3.3. 사상의 의의와 철학사에서의 위치
4. 푸코 사상에 대한 철학적 비판5. 주요 저서6. 관련 영상7. 사건 사고 및 논란
7.1. 푸코가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기 소르망의 주장
8.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michel_foucault_conferencia.jpg

20세기 프랑스철학자.

흔히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와 더불어 가장 저명한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로 불리는데, 그중에서도 푸코는 20세기 구조주의 기반 인문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5][6]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학자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권력과 힘이 작용하는 구조로 파악하는 구조주의적 관점, 선험적이며 고정적인 것으로 여겨온 개념들이 실제로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결과물임을 폭로하는 계보학적인 관점, 합리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 않은 주제.. 즉, 무의식적 담론인 광기, 폭력, 섹스 등의 주제를 가지고 철학적 사유를 하는 비이성적 주제 선정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계보학적 분석, 혹은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과 방법론은 오늘날에도 문학, 사회학, 정치철학 등 폭넓은 분야에서 연구되고 활용되고 있다.[7] 인문학사회과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 중 하나로, 2위인 피에르 부르디외와 비교해봐도 독보적인 1위이다.[8][9]

2. 생애

2.1. 초년기

미셸 푸코는 1926년 10월 15일 프랑스의 중서부 소도시 푸아티에의 유력 부르주아지 가문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10] 할아버지는 퐁텐블로의 외과의사였고, 아버지 역시 푸아티에에서 개업한 외과의사이자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였다. 아버지는 같은 대학의 외과의사의 딸인 안느 말페르와 결혼했다. 푸코 가문에는 한가지 전통이 있었는데 맏아들의 이름을 '폴 푸코'로 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이름도 폴 푸코였고, 아버지 이름도 폴 푸코였다. 따라서 이 가문의 맏아들 이름 역시도 '폴 푸코'가 될 예정이었다. 안느 말페르는 이 전통이 싫었다. 그래서 그녀는 거기에 짧은 줄을 하나 긋고 두 번째 이름인 미셸을 집어넣었다. 물론 호적이나 학적부에는 폴이라고 적힐 것이지만, 그녀는 아들을 항상 '폴-미셸'이라고 부르는 데 만족했다.

누나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누나와 떨어지기 싫었던 푸코는 같이 학교 수업을 들었다. 어머니 안느 말페르가 앙리 4세 학교 여교장에게 양해를 구한 덕택이었다. 당시 푸코는 4살에 불과했다. 푸코는 거기서 글자를 곧 깨우쳤다고 한다. 그렇게 2년간의 유아수업을 마치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계속 그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1940년 무렵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푸아티에에 피난민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시골 도시의 학업 분위기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항상 우등상을 휩쓸었던 푸코의 성적이 갑자기 떨어지자, 어머니는 아들 푸코를 좀 더 안정된 생스타니슬라스 학교로 전학시켰다. 다행히 그 학교에서 푸코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렇게 중등교육 과정이 마칠 시점이 다가오자, 아버지는 푸코가 외과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과는 반대로 푸코는 철학이 하고 싶었다. 푸코가 고집을 꺾지 않자, 집안에는 한동안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자며 남편을 설득했다. 결국 아버지의 바람은 차남 드니가 외과 의사가 됨으로서 이룬다.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푸코는 자기가 선택한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파리 윌름 가에 있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전쟁 직후에 치러진 첫 번째 시험에서 푸코는 아쉽게 떨어졌다. 구술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필기 시험 100등까지 였는데, 푸코는 101등을 해버린 것이다. 실망은 엄청났지만 푸코는 낙담하지는 않았고 재수를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해 그는 전체 4등으로 고등사범학교에 합격했다. 그해 합격한 인원은 38명이었다.

2.2. 대학 생활

합격했을 때의 기쁨과는 반대로, 고등사범학교에서의 기숙사 생활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푸코는 고독했고 날카로웠다. 그는 아주 격렬하게 남들을 조롱하곤 했는데, 이는 학교 내에서 곧 유명해졌다. 누구하고나 논쟁을 벌였고, 불같이 화를 냈으며, 온 사방에 공격성을 들이댔는데, 이 때문에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마음이 불안정했던 푸코는 이시기에 몇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하루는 교실 바닥에 누워 면도칼로 가슴을 그으려는 순간 어떤 선생이 이를 보고 제지한 적도 있었다. 아마 이 시기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확인하고는 심한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버지와 함께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가는 날도 있었다. 당시는 정말로 동성애자가 살기에 쉽지 않은 시기였다.

푸코는 이러한 상처를 보상받기 위해 한편으로는 악착같이 공부했다. 고전주의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칸트, 헤겔 등등 모든 것을 읽었다. 1949년, 23살에는 헤겔을 가지고 석사논문을 썼다. 논문 제목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의 역사적 초월성 구성』이었다. 마르크스도 읽었음이 분명하다. 당시에는 누구나 읽었으니까. 후설하이데거도 공부했다. 특히 하이데거 원전을 읽기 위해서 독일어 공부도 병행했다. 물론 고등사범학교에서 진행하는 메를로퐁티알튀세르의 강의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들었다. 알튀세르는 수업을 자주 빠뜨리긴 했지만 학생들과 개인적인 상담으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푸코도 알튀세르를 믿고 따랐으며 그의 조교수로도 활동했다. 푸코가 공산당에 입당한 것도 상당 부분 알튀세르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런 탓인지 푸코는 공산당 내부에서 열렬한 투사는 아니었고 대략 1년 뒤엔 탈당한다.[11][12]

1951년 교수자격시험을 합격한 후, 고등사범학교의 심리학 조교로 강의를 시작했다. 생트 안 병원에서 연수생 자격으로 임상실습을 실제로 보여주면서, 학생들을 꽤나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1년 뒤엔 파리 심리학연구원에서 정신병리학 석사학위 자격증을 취득했고, 릴 대학 심리학 조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이때 프리드리히 니체와 조르주 바타유에 빠져들었다. 심리학적 연구는 더욱 진행되어 이를 바탕으로 푸코는 1954년에 첫번째 저서 『정신병과 인격』을 출간했다. 이렇게 심리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푸코의 공부는 깊어지고 있었지만, 푸코는 항상 프랑스의 억압된 사회ㆍ문화적 삶의 어떤 부분을 견디기 어려워했고, 그래서 프랑스를 탈출하고자 했다.

2.3. 문화원장

그 계기는 마침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서 프랑스어 강의를 맡아줄 사람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어 강사는 동시에 이 작은 대학 도시에 오래전부터 있는 소규모의 문화원을 운영하는 책임도 맡고 있었다. 이 문화원의 기능은 다른 모든 문화원과 마찬가지로 강연, 토론, 오락 활동 등을 통해 프랑스의 문화와 언어를 현지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푸코는 인도-유럽 신화학의 대가인 조르주 뒤메질을 통해서 이 자리를 추천받았다. 답답했던 프랑스를 벗어나고 싶었던 푸코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1955년 스웨덴 프랑스 문화원장 자리에 부임한다. 이때 푸코는 28세밖에 되지 않았다.

푸코의 기대와는 다르게 스웨덴에서 보내게 될 3년간은 그에게 매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는 스칸디나비아의 살을 에는 듯한 겨울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푸코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20세기의 데카르트다. 나도 여기서 죽을 것 같다. 다행히도 크리스티나 여왕이 없을 뿐이다." [13] 심지어 겨울에는 오후 2~3시만 되면 해가 졌다. 푸코가 보기에 그 도시는 우울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차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갔고 그럭저럭 생활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다. 하루는 차를 한 대 구입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나서서, 베이지색의 멋진 재규어 차를 한 대 사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은 검약에 익숙해 있는 웁살라 사회를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이었다. 엄격한 대학사회에서 가장 말단에 위치한 강사가 이처럼 부를 과시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집은 제법 잘 살았고 집에서 계속 푸코를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돈이 없는게 아니었다. 그리고 푸코는 결코 금욕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스피드를 즐겼으며 미친듯한 운전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재규어는 그를 아는 모든 웁살라 사람들에게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14]

그렇다고 자신의 일에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푸코는 문화원장의 일에 온 정력을 다 바칠 정도로 일했다. 그는 문화원에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하였으며, 강연과 영화상연, 심지어 연극을 하기도 했다. 연극에서는 해설뿐만이 아니라 직접 공연에 참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카뮈가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러 스웨덴에 왔을 때, 푸코는 문화원장으로서 그를 맞이하는 역할을 맡았다. 문화담당 참사관은 상부에 올리는 보고서에서 "푸코는 일반 문화강좌에서 훌륭한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나, 그 모든 일을 혼자서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라 일에 짓눌려 그의 건강이 글자 그대로 죽어 가고 있지 않는가 걱정이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동시에 푸코는 웁살라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했다. 그 유명한 『광기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쓰고 또 썼으며 밤에도 계속 썼다. 항상 바흐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였다. 논문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박사논문 제출을 위해 푸코는 웁살라 대학의 영향력 있는 교수인 린드로트 교수에게 자신의 원고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교수는 견실한 실증주의자였으므로 난해한 사변과 문학적 문체에 별로 너그럽지 못했고 그 논문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푸코는 결국 웁살라에서 박사논문을 제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마도 이것이 푸코가 스웨덴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였을 것이다. 나중에 스웨덴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린드로트 교수는 천재의 징후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 논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푸코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몇 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마침 프랑스 정부는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 내에 프랑스 문화원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고 프랑스어 강사가 한명 필요했다. 푸코는 여기에 신청했고, 그 전 업무평가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푸코는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폴란드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문화행사에 일일이 참석하는 등 헌신적으로 일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일이 터져서 푸코는 급히 폴란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얘기는 복잡하지만 어찌 보면 동구권 국가에서는 매우 흔해 빠진 일이었다. 푸코는 한 소년을 만나 이 숨 막히고 우울한 나라에서 잠시 행복한 나날을 살았다. 그러나 이 소년은 서방국가의 외교가에 침투한 경찰의 끄나풀로 밝혀졌다. 어느 날 아침 푸코는 프랑스 대사로부터 폴란드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언제요?"라고 푸코가 물었고 "지금 당장"이라고 대사가 말했다. 그렇게 떠났음에도 그를 격찬하는 보고서가 뒤에 남았다. "명석하고 빈틈없고 날카로운 두뇌와 깊은 학식을 가진 푸코는 행정 감각마저 가지고 있다." 이후 함부르크 대학의 프랑스 문화원을 잠시 운영했고, 그곳에서 마침내 박사학위논문 『광기의 역사』를 완성한 푸코는 1960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2.4. 철학자로서의 성공

당시 국가박사학위를 취득하려면 두 편의 논문을 체출해야 했고, 그 중 한 편은 반드시 책으로 출판되어야 했다. 출판할 주논문은 『광기와 비이성』[15]이었고, 보조논문은 칸트의 『인간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푸코는 당시 고등사범 학장이었고 헤겔전문가로 유명한 장 이폴리트에게 논문지도교수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원고를 받아 든 이폴리트는 주논문인 『광기와 비이성』을 경탄의 눈으로 읽었고 이 논문은 『정상과 병리』를 썼던 캉길렘이 지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자신은 보조논문에 대해서만 지도교수가 되겠다고 수락했다. 캉길렘도 푸코의 논문을 읽고선 "진짜 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보자마자 이 논문이 일류 논문이라고 확신했고 주저없이 보고자가 되기를 수락했다.

1961년, 푸코는 심사위원들과 청중들 앞에서 논문발표를 시작했다. 자그마한 강당은 100명의 사람들로 꽉 채워졌다. 거기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광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자질을 가져야 합니다." 발표가 끝난 후, 심사위원들은 푸코 논문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푸코에게도 발언권이 주어졌고, 토론은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심사위원들은 날카롭게 공격했다. 논문에 대한 수많은 지적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평가는 '매우 우수'였다. 심사위원장은 논문심사의 결과를 알리는 공식 보고서에 "푸코 씨가 제출한 두 논문은 성격이 판이하지만 찬사와 비평을 동시에 받을 만하다. 깊은 교양, 강한 개성, 지적 풍요, 이것이 푸코 씨의 명백한 장점이다. 그러나 우수한 논문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작업에 대한 부주의가 눈에 띄었다. 칸트의 텍스트에 대한 정확하지만 세련되지 못한 번역, 매혹적이지만 그러나 좀 부족한 사실들을 토대로 성급하게 쌓아 올린 관념 등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푸코는 박사학위를 얻었다. 그리고 곧 클레르몽페랑 대학교수가 되어 심리학 강의를 맡았다.[16] 이 시절, 푸코는 '댄디(멋쟁이)'였다. 검은색 벨벳 양복에 흰색 스웨터, 그리고 녹색의 두터운 모직 망토를 입고 다녔다. 번민에 휩싸여 남들과 잘 사귀지 못했던 고등사범학교 시절의 그 병적인 청년을 더 이상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푸코의 모습은 쾌활하고, 부드럽고, 경쾌했다. 냉소와 도발의 취미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자신의 인격 속에 잘 통합시켰다. 교육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웁살라 대학 때와는 다르게, 클레르몽페랑에서는 철저히 교육적인 강의를 했다. 그의 강의는 좋은 의미에서 교과서적이었다. 학생들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푸코를 사랑하고 존경했는데, 강의가 끝나면 함께 이야기를 했고, 역까지 그를 배웅했다. 그 대학에서의 마지막 해에는 매시간 끝마다 학생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그러면서 1963년에는 『임상의학의 탄생』을 썼다. 그러나 심리학을 가르치는 일이 지겨워서였을까? 지방 도시의 비좁음이 갑갑해서였을까? 푸코는 1965~66년 학년 말에 마침내 클레르몽페랑 대학을 떠났다. 그리고 제자의 초청으로 잠시 브라질에서 2개월간 머물면서 상파울루 대학에서 몇 번의 강의를 했다. 그러는 동안 그 유명한 책이 완성되고 있었다.

그 책은 1966년 『말과 사물』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초판 3500부가 단숨에 매진되었다. 다음 달에 5000부를 더 찍었다. 다다음달에도 그 다음달에도 계속해서 찍어댔다. 1989년 이 책의 총 발행부수는 100만 부가 넘었다. 철학책이 그런 부수에 달한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이 책이 한참 잘 팔릴 1966년 여름에는, 신문 기사에서 '푸코의 책이 모닝빵처럼 팔려나간다'고 말할 정도였다.[17] 사람들은 그 책을 바캉스를 떠날 때도 가지고 갔고, 심지어 해변에서도 읽었다. 자신도 그 유명한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카페의 테이블 한옆에 그저 무심하게 그 책을 슬쩍 놓아두는 것이 유행이었다.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던지 TV는 물론이거니와 소설과 영화에서도 언급됐다. 거의 모든 방면에서 해설, 소개, 비평, 논쟁 등이 일어나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었다. 『르 몽드』에서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고 말했으며, 『르 피가로』에서는 "인상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모든 시대는 그 문화를 형성하는 '앎의 격자'를 통해 담론(épistémè)을 형성하고 그 시대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그 담론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요하는 것은 각 시대적 담론은 역사적으로 '불연속적'이라는 점이다. 마치 서로 다른 지층이 구분이 되듯이, 시대마다 다른 담론(에피스테메)이 각각의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각각 다르게 규정한다. 고전주의 시대의 담론은 자연사ㆍ부(富)의 분석ㆍ일반 문법이었고, 19세기 시대 이후의 담론은 생물학ㆍ정치경제학ㆍ문헌학 등의 인간학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담론을 대체할 새로운 담론이 나올 것인데, 그것이 정신분석학[18]ㆍ민족학[19]ㆍ언어학[20] 등의 구조주의적 담론이 될 것이라는 게 푸코의 주장이었다.

'주체 없는 익명의 체계', 즉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생각은 그 시대의 담론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푸코의 주장은 즉각 수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공산주의자들은 푸코의 구조주의가 "그가 의식했든 안했든 미래의 이상을 은폐하려는 부르주아의 이해에 봉사"한다며 비판했고, 가톨릭계에서도 "모든 것이 체계에 의해 정해져 있다면 진보주의적 정치가 개입할 수 있는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사르트르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푸코는 어떻게 하나의 담론에서 다른 담론으로 넘어가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실천, 즉 역사를 개입시켜야 하는데 그는 이것을 거부했다." 이후 푸코는 『말과 사물』의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1969년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자신의 저서들을 회고적으로 뒤돌아볼 때, 그의 '형식주의' 시기 두 작품인 『말과 사물』 그리고 『지식의 고고학』은, 그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작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이것들이 자신의 '진정한 책'이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그가 진정 자신의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광기, 범죄, 섹슈얼리티 등등에 대한 저작들이었다.[21]

2.5. 튀니스

클레르몽페랑 대학교수 자리에서 나온 푸코는 새로운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튀니스였을까? 그것은 이상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튀니스 대학 철학과에 때마침 빈자리가 났고, 푸코는 친구의 친구를 통해 그 자리를 소개받았다. 그래서 푸코는 행정절차를 걸쳐 1966년 9월 말, 튀니스에 도착했다. 그는 제법 잘 적응했으며 학생들을 정말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또한 매주 금요일마다 공개강좌를 열었는데, 한번 강의할 때마다 청중이 2백 명 이상씩 몰려들었다. 다만 학생들은 푸코의 강의에 열광했지만, 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는 지지를 유보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푸코를 기꺼이 '우익'으로 분류했는데,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학생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푸코는 좌익도 우익도 싫어했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동안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다시 정치 쪽으로 데리고 간다.

1966년 한 학생이 버스 요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두들겨 맞는 일이 발생하자, 이 사건이 화약고에 불을 지른 꼴이 되어 온 대학으로 소요가 번졌다. 게다가 1967년 6월에 벌어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아랍군이 이스라엘군에 패주한 후로부터, 반유대주의를 외치는 폭력의 불길이 튀니지 수도 전체로 거세게 퍼져 나갔다. 이들 중 마르크스주의자 학생들은 패배의 대한 책임을 현정부에게 묻고 반정부 투쟁으로 선회했다. 그러자 정부는 강력한 조치로 학생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 중에는 푸코의 학생도 있었다. 푸코는 프랑스인 교수들과 함께 학생들의 구금과 고문에 항의하는 집회를 가졌다. 푸코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프랑스 대사관의 개입도 요청했지만, 대사관은 튀니지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해왔다. 그럼에도 푸코는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도왔다. 푸코는 일제소탕령에서 몸을 피신한 학생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줬으며, 자신의 정원에 학생들의 등사기를 감춰 놓고 유인물을 찍도록 도와줬다. 법정에까지 출석해서 학생들을 위해 증언을 했고 이들을 옹호했다. 이와 같은 완강한 활동으로 푸코는 몇 번이나 사복경찰의 위협을 받았으며, 시디 부 사이드로 가는 길에서는 누군가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했다. 그것은 튀니지 정부가 보낸 일종의 경고 메세지였다.

푸코는 훗날 그때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한다. "남녀 학생들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면서 유인물을 인쇄하고 그것을 배포하거나 파업을 호소하는 일… 그들은 정말 잡혀갈 각오로 그런 일을 했다! 그 모습은 나를 깊이 감동시켰다. 젊은 시절에 공산당에 가입했던 것이나 독일에서 체험한 것, 그리고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서 정신의학 분야와 어떤 관계를 맺으려 했던 것…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나는 약간 씁쓸한 정치적 경험과 매우 사변적인 약간의 회의주의를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거기 튀니지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아주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 논쟁 속에 들어가야만 했다." [22] 푸코는 비로소 마르크스주의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신화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원칙이라기보다는 토론을 통해 사람들을 행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미끼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쓸데없는 궤변이나 총체성 같은 거대 이론이 아니라, 그 열정과 행동 ㅡ 즉 구체적이고 분명하고 정확한 투쟁인 것이다.

그럼에도 푸코는 튀니스에서 목격한 반유대주의 폭동을 참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이제 더 이상 심리학 강의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튀니스를 떠나기로 결심했다.[23]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튀니스의 태양과 바다도 이제는 멀어질 시간이 되었다.

2.6. 투쟁의 시기

푸코는 1968년 말쯤, 튀니지를 뒤로하고 파리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뱅센 실험대학 설립에 참여했다. 뱅센 실험대학은 68운동에 크게 놀란 정부가 기존 교육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서둘러 착수한 고등지침법안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대학이었다. 푸코는 이 대학에서 강의하게 될 교수, 부교수, 조교수 전체를 뽑는 열두어 명의 선출위원 중 한명이 되었다. 그러나 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우익 신문과 대중지들로부터 위원회가 좌익 집합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좌익 활동가들은 반대로, 푸코가 1968년 5월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비난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 당시에 푸코는 튀니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푸코는 철학분과의 사람들을 하나둘씩 모았는데,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등 유명철학자들이 합세했다. 다 모으고 난 후 푸코 자신도 위원회에서 내려와 뱅센 대학의 철학교수로 임명되었다.

푸코는 뱅센에서 좌익 활동에 입문하게 된다. 68운동의 여파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고 수시로 집회가 벌어졌으며 학생들은 벵센 대학을 점거하면서 농성했다. 푸코도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한밤중에 2천명의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푸코는 거기서 최초의 전투를 경험했다. 한쪽에는 최루탄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돌과 잡다한 물건들이 하늘을 날았다. 경찰 병력은 조금씩 건물을 포위해 들어가 학생과 교수들을 큰 원형강의실 안에 몰아넣었다. 그러고는 120명 전부가 경찰본부에 연행됐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푸코도 다음 날 아침 일찍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34명의 학생들이 퇴학 조치되었고, 181명의 다른 학생들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푸코는 이 억압조치에 항의하는 집회에서 연사로 나섰다. 그는 초만원의 그 집회에서 '공권력의 계산된 도발과 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이후 벵센 대학에서는 학생집회, 시위, 경찰과의 충돌, 공산당과 좌파와의 전투, 또는 좌익 분파들 사이에서의 전투가 일상적으로 이어졌는데,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강의는 꾸준히 행해졌다. 푸코의 강의가 개설된 첫해에 6백 명 이상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다음 해부터는 수강생의 수를 제한하기 위해 훨씬 작은 강의실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여 명의 청강생이 몰려드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푸코는 뱅센에서 2년을 보냈다. 그의 인생에서, 그의 경력에서, 그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파란만장했던 2년간이었다. 그는 이 순간부터 행동과 성찰의 모든 전선에서 작전을 벌이는 강건한 투사가 될 것이다. 1969년부터 푸코는 투쟁하는 지식인의 화신이 되었다. 즉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푸코의 모습, ㅡ 시위 현장에 나타나고, 선언문을 작성하고, '투쟁'하고 '비판'하는 그의 모습이 여기서부터 만들어졌다.

1969년에는 사망한 장 이폴리트의 후임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평생을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떠돌아다니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방황을 하던 푸코는 이제 드디어 파리의 심장부에, 그것도 가장 영광스러운 지식의 사원에 진입하여 붙박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1년 뒤 개강연설에서는 이 철학자의 강연을 듣기 위해 수백 명의 청중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경찰은 이 유명한 지식인으로 인한 혹시 모를 시위에 대비해 경찰차로 도로를 막고는 곤봉을 든 데모 진압대를 대기시켰다. 팽팽한 긴장감이 강연실 안팎에서 느껴졌다. 푸코는 여기서 나중에 『담론의 질서』라는 책으로 편집될, 그 유명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사회는 사람들이 말을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담론이 무한히 증식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며, 그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택하고 조직하며 재분배하려든다. 구체적으로 우선 사회는 '진실'을 설정해서 '금기'를 정하고, 그것을 어긴 자와 지킨 자를 '분할'하며, 어긴 자를 '배척'한다. 그래서 우리의 담론 내부에는, 글이나 말의 우연한 성격을 제거하기 위해 그것들에 말을 덧붙이는 '주석', 글이나 말의 하나하나 흩어진 단독성을 자아와 개체성의 인지 가능한 동일성으로 귀결시키는 '저자'의 개념, 앎을 배열하고 분류하며 거기에 동화되지 않는 모든 것을 변두리로 몰아내버리는 '규율' 등의 원칙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담론의 이러한 원칙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조심하게 만든다. 그들은 그러한 원칙 하에 과학적 기술적 의학적으로 말해야 하고 경제적 정치적 담론을 장악한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모든 교육제도는 기득권을 가진 일부 사람들을 위해, 앎과 힘의 담론을 재생산하고 유지, 수정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담론 속에 있는 금기, 배제, 제한의 사항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비판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주장은 당장 행동으로 옮겨졌다. 당시 경찰들이 시위를 가혹하게 진압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으로 연행하던 시절이었다. 푸코는 '사람을 개처럼 다루는' 현재 감옥의 한심하고도 억압적인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감옥정보그룹(GIP)을 결성했고, 시위에 참여하여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는 우편물을 보내고 사람들과 접촉하고 전화를 수천 통씩 했으며 계획을 세우고 할 일을 정리했고 수감자에 대한 인권침해를 조사하여 소책자도 간행했다. 푸코는 몇 번의 기자회견에 참석했고 범죄기록의 철폐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나눠 주던 중 거칠게 연행되기도 했다. 이주노동자가 경찰서에서 살해됐을 때, 그 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게 곤봉으로 폭행을 당하고 독방에 갇히기도 했다. 그 외에도 감옥과 사법제도에 관한 서문, 기고문, 인터뷰, 논쟁, 심포지엄 발표문들을 출간하고, 사형제도 반대 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런 실천적 행동으로 얻어진 사유를 통해, 1975년 푸코가 스스로 가장 만족했던 책인 『감시와 처벌』이 탄생한다. 『감시와 처벌』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을 통해 파놉티콘의 개념은 '권력의 시선'을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다. 『르 몽드』는 그 책에 대한 소개를 신문 중간의 양면 전체에 특집호로 실었다.

2.7. 미국 활동과 말년

푸코는 어느새 유명 인사가 되어서, "저기 푸코가 있다"라고 누군가가 외치면 모든 사람들이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몸을 돌릴 정도였다. 그는 알려지고 또 알려져 논문, 신문기사, 현대사의 책들에서 무수하게 그 이름이 언급됐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투쟁은 계속되어,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정부가 11명의 남녀를 사형시키려고 하자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규합해 직접 스페인으로 가서 기자회견을 하다가 스페인에서 쫓겨나기도 했고[24] , 잠시 신문기자로 변신하여 호메이니에 관한 기사를 쓰기도 했다. 폴란드에서 쿠테타가 벌어졌을 때는 부르디외와 함께 성명서를 발표했다.

1970년 이후로는 미국 대학에서도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버팔로 대학 프랑스어학과가 그를 몇 번에 걸쳐 초청했고, 버클리와 스탠퍼드 대학에서도 강의를 했다. 한 잡지사가 뉴욕에서 주최한 '반-문화' 심포지엄에서는 수천 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1980년 10월에 다시 찾은 버클리 대학에서 푸코는 '진실과 주체성'에 관한 강의를 했는데, 이 강의는 캠퍼스에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문을 닫기 위해 경찰이 와서 정리를 해야만 할 정도였다. 그해 11월에는 뉴욕 대학의 초청으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을 두고 『타임지』는 두 페이지나 할애하여 이 프랑스 철학자 주변에서 벌어진 '숭배'의 현상을 전하면서 그의 '불투명한' 이론을 빈정거렸다. 그가 유명해짐에 따라,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급진적인 입장을 비난했고,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의 체계비판적 허무주의를 비난했다. 사람들은 심지어 푸코가 뉴욕 거리의 여성거지들의 존재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푸코는 자기 글에 대한 오독을 교정하기 위해, 또는 신랄한 비난과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국에 올 때마다 최소한 한 번 이상 자기 작품의 해명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푸코의 이름이 강의계획표에 올라가면 수많은 학생들을 불러 모아 원형강의실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1983년 버클리 대학을 찾았을 때가 그 절정이었다. '자기 숭배'라는 제목의 공개강좌에는 청중이 강당을 가득 메웠는데, 그는 강의실이 아니라 '극장(!)'에서 강연을 해야 했고, 그곳에는 2천 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푸코에게 있어서 미국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그는 동성애 잡지, 신문, 동성애자들의 바와 나이트클럽 등이 번창하고 있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마약도 즐겼다. 미국에서 일하는 것도 즐거웠고 육체적 쾌락에서도 행복했다. 그래서인지 80년대 초부터 그는 숨 막히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에 정착하려는 계획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총 4권으로 구상한 『성의 역사』가 마무리 교정단계에 있었지만, 1984년 초부터 푸코는 심한 피로감과 미열에 시달렸고, 아마도 어느 순간 그는 자기가 에이즈에 걸렸음을 알았다.[25] 그해 6월 2일 푸코는 자기 아파트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푸코는 곧 병원에 입원해서 다량의 항생제를 맞으며 버텼다. 잠시 건강이 호전되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친구들을 맞이해선 웃고 농담도 했다. 여행 계획도 얘기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그들에게 통보해 달라고 그는 부탁했다. 질 들뢰즈, 조르주 캉길렘 등등.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며칠 만에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6월 25일 오후 1시, 티비와 라디오에서 "미셸 푸코 사망"이라는 AFP의 속보가 나오자 온 언론사 편집국과 문화계는 경악했다. 다음 날 모든 신문들의 머리기사에서는 이 철학자의 죽음을 언급했다.

6월의 이른 아침, 병원 뒤뜰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질 들뢰즈는 『성의 역사: 쾌락의 활용』의 서문에 나오는 푸코의 말을 나지막하게 읊었다.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사유에 대한 비판작업,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푸코의 관은 6월 29일 오후에 방되브르의 작은 묘지에 안장되었다. 푸코의 어머니가 종교예식을 원했으므로 신부가 간단한 장례미사를 집전했다.

죽기 3개월 전인 1984년 3월 28일,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다. 이 마지막 학기에서 그는 자기가 준비한 것을 모두 말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학기는 끝이 났다. 그래서 그는 청강생들에게 짤막한 몇 마디만 말했는데, 이것이 그의 최후의 작별 인사였다. "자, 이 분석 작업에서 여러분들에게 아직도 할 말이 많은데, 하지만, 너무 늦었군요. 고맙습니다." [26]

3. 사상

푸코의 사상은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 구조주의 시기, 생명정치-통치성 시기, 자기배려-윤리 시기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전기 구조주의 시기에 푸코는 스스로를 구조주의자가 아니며 단지 자신은 지금의 시기가 구조주의 시기라는 것을 파악하고 알린 "관찰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알린'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은 '계몽주의자'라는 게 푸코의 주장이었다.[27] 그럼에도 『말과 사물』과 『지식의 고고학』에서는 구조주의적 시각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 시기를 구조주의 시기라고 부른다.

이후 '외부 담론으로부터 생각이 강제되는 것이라면, 개인의 실천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감시와 처벌』에서 미시권력을 분석함으로써 그런 비판은 더욱 강해진다. 푸코는 사회가 서로를 '통치'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구조임을 주장하였는데, 특히 철학적 의미로서의 파놉티콘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는 현대 사회가 감시자가 있든 없든 감시 효과가 나타나는 파놉티콘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푸코는 우리 사회가 진짜로 파놉티콘처럼 어느 감시자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푸코가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감시당하는 것 같은 효과 때문에 자유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푸코는 특정한 감시자는 없으며 현대 사회는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형태라고 말한 바 있다.[28]

이후 중기 사상에 접어들면 푸코는 자유주의 체제가 단순히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생산에 관여하게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근대국가가 '지상적 신'으로 군림하던 고전주의 시대를 지나, 자유주의 체계가 그 자체로 인간 바깥에 있는 구조가 되는 시대에 접어들며 통치 합리성은 '자연스러운 순환'을 중시하게 변모한다. 이런 체제 아래에서는 시장이라고 하는 자유로운 체계를 순환시키기 위한 '자유의 생산'이 핵심이 된다. 푸코는 이에 대해 '통치성'이라는 용어로 접근하는데, 통치성은 명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하려 하는 합리성의 뭉치 정도를 뜻한다. 자유주의 통치성은 시장을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로 파악하고[29], 사회를 시장의 자유라는 개념 아래에서 재조직했다.[30] 이것은 권력에 대한 접근방식을 전환하는 관점으로, 권력을 억압적 개념이 아니라 생산적인 개념으로 본 것이다. 요컨대 푸코에게 권력은 단순히 사법적 처벌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상정되는 체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나가는데 필요한 장치들의 총체였다. 그리고 푸코의 계보학이 주목하는 지점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자유의 개념이 실제로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출현했다는 진실이다. 이후 20세기의 소위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유 대신에 경쟁을 중심으로 해서 사회를 조직하게 된다는 것이 아주 러프하게 요약한 푸코의 신자유주의 비판이다. 다시 말해 경쟁 그 자체를 자연적인 질서의 일부로 보고, 인간을 다윈주의적 경쟁 상황에 놓인 생물학적 존재로 파악하는 인식틀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31]

후기에 들어서면 푸코는 이러한 '규율 권력'이라는 담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는 파레시아라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즉 담론의 변화는 개인이 '참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솔직한 자기 의사 표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시대의 담론은 조금식 변하고 새로운 담론과 그 담론에 따른 새로운 권력이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 후기의 주장이다.

3.1. 근대화에 대한 비판

실제로 《감시와 처벌》에서는 근대적 훈육방법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며 권력에 저항하는 문제는 푸코와 더불어 다른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많이 다루는 주제다.

여하튼 푸코의 작업은 쉽게 말해서 데카르트 이후로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근대성'이라는 것이 사실은 역사적인 것임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푸코는 인간이 사회적 지배의 산물임을 고발한다. 즉, 푸코는 인간은 그 자체로 보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지만 그것이 사회 속에서는 어떤 사회적 권력을 통해서 어떤 특정한 개인이 산출된다고 본다. 푸코는 그러한 사회적 권력에 의해 개인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사회적 권력이란 국가가 행사하는 권력이 아니라 개별적인 일상생활과 인간관계에서 관철되는 권력이다.

푸코가 분석하는 오늘날의 사회적 권력이 바로 근대성, 합리성이다.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근대 이후 이성적, 합리적 사고력이 표준적인 인간상으로 굳어지면서 광인은 치료의 대상으로 분류되었고, 그로부터 정상/비정상의 구분, 정신병원, 정신병리학 등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은 그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이어진다. 푸코는 우리의 담론에서 올바른 말과 잘못된 말을 구분하는 것에 주목하여 올바른 말, 즉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말에 진리의 권위를 부여하고 잘못된 말은 표준어를 규정함으로써 금지하거나 허위로 단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학문적 체계를 정비함으로써 중요한 학문과 덜 중요한 학문을 구분하고, 이론과 응용을 나누게 되었다고 하며 담론과 지식에서의 과정에서의 이러한 과정이 이성의 권위로 사람들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냈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푸코는 근대적 지식, 담론 체계가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그것이 원하는 특정한 방향의 인간상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범죄자에 대한 대응 방식에 있어서도 푸코는 과거에는 복수, 형벌로 범죄인을 단죄했는데 근대 이후로는 범죄인을 감금하고 관찰하며 교화와 치료의 대상으로 보는 것으로 단지 그 방식이 바뀐 것일 뿐이지 이들에 대한 근본적인 지배는 변하지 않았음을 폭로한다.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질환자를 사회에서 배제, 관리하는 방법을 이야기했다면 《감시와 처벌》에서는 계몽주의가 모범적인 시민상을 어떻게 육성하였는지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이러한 훈육방법에 담론이 개입되는 과정도 볼 만한 부분이다.

푸코는 이처럼 미시적인 주제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현재의 제도와 생활 체계가 근대의 산물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근대성을 특정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탄생한 우연적 결과임을 드러내면서 푸코는 근대성에 대해 냉철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푸코의 역사철학적 작업을 학자들은 '계보학', '고고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3.2. 고고학과 계보학

푸코의 작업은 70년대를 기점으로 고고학에서 계보학으로 넘어간다.[32] 고고학 시기에는 각종 개념들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인식되었는지를 탐구하는 작업이었다면 계보학적 작업은 지식(담론)과 권력쌍의 관계를 파헤치는 것으로써 권력에 의해 담론의 영역이 나타나고, 그 와 동시에 담론이 권력을 생산하고 그것의 작용을 정당화하는, 즉 서로를 조건화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푸코를 후기구조주의자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위에 서술했듯이 푸코는 강력 부인.

그러나 담론이나 권력을 일반적인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면 푸코를 이해하는데 있어 상당히 곤란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권력은 어떤 주체가 다른사람에게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가시적인 개념도 아니다. <성의 역사>의 역자 이규현의 경우에는 권력이란 '가정이나 일터 등 모든 위상의 사회에서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부여되는 이름'이며, 이에 따라 권력은 부모자녀, 의사환자, 교사학생, 군주신하 등의 세력관계의 총체에 등장하는 개념을 일컫는다'고 한다. 물론 권력 및 담론에 관한 정의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도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애초에 푸코는 용어의 정의를 그렇게 명확하게 밝히며 서술하지는 않는 타입이다. 당연히 앞서 서술되었듯 에피스테메, 권력, 통치성 등 그의 개념이 하나로 환원되는 무언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도 그 혐의를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3. 사상의 의의와 철학사에서의 위치

푸코는 《광기의 역사》나 《임상의학의 탄생》과 같은 초기의 저작에서는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언표체계의 집합으로의 담론을 인식론적 배경을 조건짓는 핵심적 틀로 바라보았다. 에피스테메로 통칭되는 무의식적인 인식의 배경이 시대를, 정확히 말하면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규정한다고 본 이 시기의 푸코의 사유는 다분히 구조주의적이었으며 본인도 이러한 평가를 그다지 거부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그의 작업은 역사의 '불연속적인' 지층을 구분하기 위해 증거들을 발굴하는 고고학적 접근으로 이해되었다. 의학이나 과학에 대한 구성적 접근은 비록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푸코 특유의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분석은 프랑스 외부의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형벌체계의 역사를 조망한 《감시와 처벌》에 이르러, 푸코는 근대의 본질적 속성이 언표구조나 담론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를 규율하도록 인도하는 복잡한 시스템에 있음을 논하며 분석의 지점을 담론에서 권력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즉 지층을 규정짓는 증거를 발견하려는 고고학적 시도를 넘어, 지층의 이면에 놓인 '지층화되지 않은 것'에 주목함으로써 지층이 지층화 될 수 있도록 인도했던 힘관계의 양상에 주목하는 계보학적 시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러한 시선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등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진행한 강의를 거치며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권력 자체를 특정 주체의 소유물이 아니라 개인의 신체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이고 복잡하게 펼쳐져 있는 사회의 관계망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효과'로 바라보게 되었다. 푸코 중기 사상의 핵심을 관통하는 '통치성', '생명정치'와 같은 개념은 '합리적 개인'이라는 매개를 통해 개별적 신체와 집합적 사회를 동시에 구성하고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근대성의 '생산적 능력'[33]에 주목할 수 있게 하는 시선으로서 21세기 들어 재조명되며 폭발적인 반향을 얻었다.

권력과 근대성에 대한 포괄적 설명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푸코는 합리적으로 판단, 사고, 행동하는 주체가 비단 근대에 갑자기 등장한 계보학적 구성물이 아니라 서구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된다.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를 거치며 푸코는 '목자-양'의 관계로 표상되는 중세의 신학적 주체성과 근대의 자유주의적 주체가 실제로는 유사한 사유체계를 지니고 있음을 어렴풋이 파악했다. 이를 보다 상세히 분석하기 위해 푸코가 선택한 사례가 바로 섹슈얼리티 즉 성의 계보학적 역사이다(《성의 역사》). 여기서 푸코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방대한 사료를 통찰하며 신체가 배태하고 있는 성욕을 관리하는 방법의 계보학에 주목했다. 이를 통해 성욕이란 금지되거나 억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과 권력의 상호구성적 형성에 따라 특정한 방향(예를 들어 가족형성을 위한 수단)으로 배출되도록 촉진되어 왔음을 드러냈다. 특히 성욕을 통제하고 특정 방향으로의 배출을 인도하는 핵심 전략으로서 '이성에 의한 육체의 통치', 즉 '자기통치'의 실천적 기예가 서구의 역사를 관통하며 이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체화에 대한 독창적인 시선은 신좌파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생에 걸쳐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바깥에서의 사유'를 끊임없이 추구했다는 점, 그 사유의 광범위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대, 근대성, 근대적 주체 자체에 대한 해석을 급진적으로 뒤집었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를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은 좋든 싫든, 긍정적이든 비판적이든 푸코의 영향 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푸코는 무엇보다도 의학이나 과학 지식의 분석에 국한되어오던 프랑스의 과학철학적 사유를 사회 전체를 해명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20세기 대륙철학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푸코의 기여는 근대를 역사발전의 산물이나 변증법적 진보의 결과물로 바라보던 종래의 시선에서 벗어나 지식-담론-권력-주체가 복잡한 관계망에서 서로를 생산하며 발생하는 '일시적' 효과이자 구성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 있다.

푸코는 프랑스 과학철학을 과학에서 탈출시켜 세계에 대한 보편적 이론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이성과 합리성의 선험성을 강조했던 칸트의 철학을 전면에서 전복시켰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브뤼노 라투르가 '푸코에게서 배운 것이 별로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근래 주목받는 타르드-화이트헤드-들뢰즈-라투르 등의 사유를 이어받는 일원론적 철학자들에게[34] 푸코는 근대와 비근대의 이분법, 그리고 인간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20세기 철학자에 그친다. 그럼에도 "19세기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에서 푸코는 가장 완전한, 아마도 유일한 20세기의 철학자"라는 질 들뢰즈의 평은 푸코 철학의 사상사적 위치를 잘 함축하고 있다.

4. 푸코 사상에 대한 철학적 비판

푸코는 "정신이상자", "동성애자" 혹은 "감옥에 갇힌 자"들처럼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에 대해 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인 서양의 합리주의를 비판함으로써 푸코는 해체주의자들과 노선을 같이했다. 데리다처럼 푸코도 "타자"로 정의된 사람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푸코의 정치적 헌신은 너무도 강렬했고 철학적 정당화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너무도 일관된 것이어서 그의 철학적 회의주의와 그의 실천적 헌신 간에는 명백한 긴장이 존재했다. 어떻게 회의주의자가 투쟁할 가치가 있는 좋은 대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결단의 문제라는 답변이 일관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단은 강자의 편을 들거나 약자의 편을 들거나 다 똑같은 결단일 수 있고, 스탈린주의나 히틀러 나치즘을 선택하는 결단일 수도 있다. 물론 푸코의 선택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군나르 시르베크ㆍ닐스 길리에 『서양철학사 2』 [35]

5. 주요 저서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정신병과 심리학 [36]
Maladie mentale et psychologie
<colbgcolor=#fff,#1f2023> 1954년
광기의 역사
Histoire de la folie [37]
1961년
임상의학의 탄생
Naissance de la clinique
1963년
말과 사물
Les Mots et les choses
1966년
지식의 고고학
L'Archéologie du savoir
1969년
담론의 질서
L'Ordre du discours
1971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
1973년
감시와 처벌
Surveiller et punir
1975년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Histoire de la sexualité, vol. 1 : La volonté de savoir
1976년
성의 역사 2 : 쾌락의 활용
Histoire de la sexualité, vol. 2 : L'usage des plaisirs
1984년
성의 역사 3 : 자기 배려
Histoire de la sexualité, vol. 3 : Le souci de soi
성의 역사 4 : 육체의 고백 [38]
Histoire de la sexualité, vol. 4 : Les aveux de la chair
2018년
전기 대표작은 『말과 사물』이고, 중기 대표작은 『감시와 처벌』, 후기 대표작은 『성의 역사』이다. 이밖에 중기와 후기 사이에 여러 강의 필사본이 책으로 나왔는데, 『비정상인들 』[39],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40]는 『감시와 처벌』을 좀더 심화해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안전 영토 인구』[41], 『생명정치의 탄생』[42], 『자기해석학의 기원』[43], 『주체의 해석학』[44],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 수양』[45] 등은 중후기 사상의 핵심인 '생명정치'와 '통치성'의 개념을 명확하게 해주는 중요한 책이다.

푸코의 생애와 저작들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푸코의 전기인 《미셸 푸코, 1926 ~ 1984》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푸코와 교류했던 철학자이자 기자인 디디에 에리봉이 집필한 책으로, 푸코의 저서들에 대한 명료한 요약들이 실려 있다.

6. 관련 영상

[navertv(20203714)]

언어학자 놈 촘스키 MIT 교수와의 토론 영상.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정의에 관한 엇갈리는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7. 사건 사고 및 논란

7.1. 푸코가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기 소르망의 주장[46]

2021년 3월 28일, 프랑스의 보수 우파 비평가 기 소르망(Guy Sorman, 1944~)[47]은, 푸코가 1960년대에 튀니지에 체류할 당시 8~10세 사이의 아동들을 주기적으로 성착취했다고 주장했다. 소르망은 보수주간지 더선데이타임즈[48]와의 인터뷰에서 1969년 부활절 휴가에 맞춰 친구들과 함께 푸코가 당시 지내고 있던 튀니지 북부의 시디부사이드를 방문했을 때, 어린 아이들이 푸코 주변을 맴돌며 “나는 어때요? 나를 데려가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소르망은 푸코가 아이들에게 돈을 던져주었고, 항상 보던 곳에서 밤 10시에 보자고 했다고 밝혔다. # 기 소르망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푸코는 "프랑스 철학의 왕"이었고, 때문에 프랑스 언론은 이 사실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고 한다. 소르망 자신도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폭로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 소르망의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프랑스 언론인이 단 한명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그런 언론인이 없다는 사실에서 기 소르망의 주장은 의심된다. 또한 기 소르망이 언급한 시기는 푸코의 《말과 사물》이 출판되고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이후였지만, 아직 주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가 출판되기도 전이었다. 당시 주목받는 철학자였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프랑스 철학의 왕'처럼 군림하면서 언론이 그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는 아니었던 시기다. 게다가 푸코는 구조주의를 주장하면서 공산주의나 종교계와의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공산주의 계열 잡지나 종교 관련 신문사에서 충분히 푸코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고, 심지어 푸코가 사회운동가로서 정말로 '유명'해졌을 때도 우파 계열 신문사들은 푸코를 시도때도 없이 공격했었었다. 그러므로 당시에 '프랑스 철학의 왕'이라는 지위의 반열에 올라서 언론들이 침묵했다는 것은 애초부터 틀린 이야기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기 소르망이 푸코가 튀니지에 체류해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한 1969년 당시 푸코는 튀니지에 딱 한 번 사회운동을 하다 수감된 학생들을 찾아 방문했을 뿐이고, 튀니지 체류 당시 푸코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튀니지 학생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는데, 소아성애 행각이 만약 일어났더라면 아직까지 비밀로 숨겨져 있었다는 가정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푸코를 변호하는 측은 기 소르망의 주장에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 기사에 따르면, 심지어 푸코가 비밀스럽게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그 묘지는 상시 감시되고 있던 곳이었다. 이에 몇몇 프랑스 현지 언론에서 기 소르망에게 추가적인 세부 진술을 요구했지만 그가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

결정적으로, 당시 푸코를 기억하는 튀니지 현지인들이 기 소르망의 주장에 반대되는 증언을 했다. # 따라서 서로의 증언이 부딪치므로, 혐의를 먼저 주장한 기 소르망이 증거를 제시해야 하지만, 기 소르망은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기 소르망은 죽은 사람을 상대로 비방한 전력이 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외교관 스테판 에셀에 대해서도 이미 비슷한 방식으로 비방했던 것. #

결국, 독일의 대표적인 신문 디차이트(Die Zeit)와의 인터뷰에서, 기 소르망은 자신이 말한 것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으며 소문에 근거한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1 #2[49] 기 소르망은 처음에 자신이 25살 나이에 대학생 신분으로 튀니지에 가서 당시 유명했던 푸코를 만나 그런 얘기를 옆에서 직접 들었다고 했으나, 이제와서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고 단지 소문을 들은 것이라고 말을 바꾼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5대 뉴스매거진인 렉스프레스(L'Express)는 기 소르망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말을 계속해서 바꾸고 있으며 주장이 오류투성이(inaccuracies)[50]라고 지적했다. #[51]

8. 여담

  • 일반적으로 푸코는 구조주의 열풍의 얼굴마담인 동시에,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한다고 평가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푸코는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양측에 속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푸코는 소위 '고고학 시기'의 저작들에서 구조주의 방법론을 사용하였지만, 자신의 철학을 구조주의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후 푸코 자신이 《담론의 질서》에서 선언하였듯 1970년대부터는 구조주의적 함축이 담긴 고고학을 버리고 니체적인 계보학을 자신의 철학적 기획으로 삼았다. 엄밀히 따지면 구조주의자 푸코는 60년대의 저술들에 한정해야 한다는 것.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 미국의 프랑스 이론 수용 과정에서 비평가들로부터 일방적으로 붙은 명칭으로 푸코를 비롯해 들뢰즈와 데리다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았다.[52] 말년에 이르러 푸코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칸트적인 의미의 계몽주의와 친밀성을 지녔다고 토로하였다.
  • 게이이며 사회학자 다니엘 드페르(Daniel Defert)와 연인 관계였다. 푸코 사후 그의 유고 정리도 드페르가 하였다.
  • 프랑스에서는 에이즈로 인해 사망한 최초의 유명인사였다. 당시 에이즈는 "게이 암"과 같은 경멸적인 어조로 불렸었는데, 푸코가 "게이 암"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에서는 명망있는 좌파 지식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음모로 간주하며 애써 푸코가 에이즈로 죽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도 했다.
  • 그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인 《성의 역사》에서 고대 그리스미소년 동성애 이야기가 매우 상세하게 나온다. 물론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매우 인문학적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학술적인 책이므로 상당히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 한국에서는 형벌, 감옥 제도에 대한 연구를 통해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해 탐구한 <감시와 처벌>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그가 제러미 벤담판옵티콘 개념을 빌려와 논지를 전개한 부분은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감시와 처벌》을 통해 널리 알려진 "규율 권력", 즉 개개인의 생각에 미시적인 방식으로 개입하는 권력은 중기 푸코의 생각이고, 이후 후기 푸코가 시작하는 《성의 역사 1권 : 앎에의 의지》에서는 인구관리를 위해 권력이 개입하는 '생명권력(bio-pouvoir)과 통치성'이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
  • 《감시와 처벌》의 서문에서 묘사된 루이 15세 시해 미수범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의 잔혹한 공개처형 장면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다미앵은 신체를 산 채로 불로 태우고 뼈를 뒤트는 등의 고문 끝에 거열형으로 처형되었는데, 푸코는 이러한 잔혹한 스펙터클로서의 처형과 다음 세기의 처벌 및 훈육 방식 사이에 명백한 단절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책의 논의를 시작한다.
  • 철학자 자크 데리다와는 고등사범학교 동문이자 사제지간이었다. 고등사범학교에서 푸코의 강의를 들었던 데리다는 이후 《광기의 역사》의 해석을 두고 푸코와 갈등을 빚었고, 푸코도 데리다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두 철학자 간의 교류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다. 이 소원해진 관계는 데리다가 체코에서 체포되었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해 푸코가 많은 노력을 하면서 다소 회복된다.
  • 1977년에 잠시 신문기자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이란 혁명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는데, 푸코는 이란까지 현장취재를 가서 야당지도자들과 거리의 사람들을 취재했다. 프랑스에 머물던 호메이니를 찾아가기도 했다.[53] 당시 이란의 군주였던 팔라비 2세는 시위대를 그야말로 피로 물들였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탄압을 행사했기 때문에, 이란 민중들은 이슬람 정부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광범위한 공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걸 직접 목격한 푸코는 호메이니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기사를 썼는데, 그 기사를 보고 격분한 이란 여자의 반박이 프랑스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익명의 이란 여자는 호메이니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푸코를 비난하면서 "비밀경찰과 이슬람 광신도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이슬람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는 현재의 상태보다 더 숨 막히는 덮개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푸코의 반응은 "이슬람에 대한 미래가능성을 광신이라고 한꺼번에 싸잡아 거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 고등사범학교 시절 스승인 루이 알튀세르의 권유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탈당했다.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말과 사물》을 출간했을 때는 아예 공산주의 계열 언론들의 비판을 받았었다. 그래서 푸코의 저작을 살펴보면 마르크스주의와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54] 그런데 조던 피터슨은 그런 마르크스주의와 푸코의 적대적인 입장 차이를 모르고[55] 슬라보예 지젝과의 토론에서 '푸코는 공산주의자이자 급진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잘못된 정보를 말해서 망신을 당한 바 있다.[56]
  • 푸코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은 그가 당시 '신철학' 사상가들을 지지한 것으로도 확인된다. 1977년, 좌파 내부에서 등장한 '신철학' 사상가들은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가 그 계획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를 탄생시킬 수밖에 없다며,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그래서 기존 공산주의 정당에서 갈라져 나와 반마르크스주의 좌파를 구성해야 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는데, 이를 푸코가 지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질 들뢰즈가 비판하자 푸코는 자신의 생각을 재고하기보다는 그와의 결별을 선택했다.[57] 하지만 푸코는 들뢰즈에 대해 애증을 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푸코가 죽기 직전 병실에서 들뢰즈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고백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이들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고, 푸코의 장례식 때 들뢰즈가 참석하여 추도사를 읊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들뢰즈는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철학을 다룬 책 『푸코』를 썼다.

[1] 본명은 폴-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이지만, 이후 자신이 지은 책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 '폴'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떼어 버리고 '미셸 푸코'라고 썼다.[2] 한국에서는 종종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잘못 분류되기도 하는데, 푸코는 후기 구조주의자중에서도 반마르크스주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또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는 범주 역시, 무페나 라클라우 등 스스로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천명한 인물을 벗어나면 엄밀한 분류 체계는 아니다.[3] 루이 알튀세르의 권유로 입당했으나 정확한 입당시기는 알 수 없다. 푸코는 인터뷰 때마다 자신이 당에 소속했던 시기를 바꾸었다. 어떤 인터뷰에서는 3개월이라고 말했지만 다른 인터뷰에서는 6개월이라거나 18개월이라고도 말했다. 그래도 종합하자면 대략 1년 정도 소속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중 대부분의 시간을 열정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열심히 활동한 것은 3개월 남짓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반면, 1953년에 탈당한 것은 여러 증언들을 통해 확인된다.[4] 어린 시절 가톨릭 신자였다. 어릴 적 첫 영성체 기념과 복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들이 있다. 그의 철학에는 종교와 반하는 개인의 성적 지향에 따른 많은 고뇌와 극복을 위한 성찰들이 담겨 있다. 그가 말하는 체화된 권력에는 고백성사를 통해 자기를 끊임없이 자책하게 하는 어릴 적 경험이 담겨 있다.[5] 영향범위가 철학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 등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서들이 모두 철학 논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여러 인문학 범위를 두루 섭렵하는 방식이므로 영향범위가 크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 스스로는 자신을 구조주의자로 부르는 것을 거부했지만, 푸코의 사상에 있어서 구조주의의 영향이 크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지식의 고고학 시기의 푸코 저작들은 분명 구조주의적 함축을 지니는 저작들이다.[6] 다만 푸코의 모든 저술과 기획을 구조주의로 포착할 수는 없는데, 1970년 강연 ‘담론의 질서’에서 푸코는 명시적으로 언어학적·기호학적·구조주의적 이해를 거부한다. 그 대신 니체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담론 분석을 제시하며 소위 계보학적 작업을 이어간다. 마찬가지로 푸코와 자주 묶이는 들뢰즈와 데리다 역시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음에 동시에 구조주의를 비판하고, 니체적인 사유를 통해 재구성함으로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들뢰즈의 경우 '구조주의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와 '의미의 논리' 등의 저작을 통해 구조주의를 탐구했고, 데리다는 소쉬르의 구조주의 기호학의 영향을 받았다.[7] 당장 일반 대중들도 심심찮게 폼잡으려 사용하는 '담론'이라는 개념도 미셸 푸코에 의해서 확립된 개념이다.[8] 구글 스칼라에서 확실하게 확인되지는 않지만 대충 앨버트 반두라가 3위로 추정된다.[9] 다만 구글 스칼라에서 프로필이 전체 관리가 되지 않는 학자들이 많기 때문에 이를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 당장 프로필이 관리되지 상아 전체 인용 수를 알 수 없는 위르겐 하버마스니클라스 루만, 질 들뢰즈와 같은 학자들을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푸코의 인용 횟수가 적다는 건 아니지만.[10] 첫째는 장녀 프랑신, 둘째는 장남 폴-푸코 미셸, 셋째는 차남 드니.[11] 적어도 1953년에는 탈당한 것이 확실하다. 탈당의 이유는 복합적인데, 아무래도 푸코는 동성애를 부르주아의 악덕, 퇴폐의 징후로 보는 당에서 마음의 불편을 느꼈을 것이다. 알튀세르도 푸코가 왜 공산당을 떠났냐는 질문에 "동성애 때문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출판사, 2012, p.101 참조)[12] 알튀세르는 푸코를 좋게 봐주었는지 푸코와 결별한 이후에도 여러 저작에서 푸코를 비교적 후하게 평가했다. 반면 랑시에르나 바디우 등 자신과 결별한 다른 제자와는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혹평하기도 했다.[13]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출판사, 2012, p.135[14]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출판사, 2012, p.140~141.[15] 원래 『광기와 비이성』으로 출판했으나, 나중에는 『광기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출판함.[16] 클레르몽페랑 대학 철학과장인 쥘 뷔유맹이 1960년 클레르몽페랑 대학에서 심리학 강의를 맡아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푸코는 박사자격을 갖자마자 그 자리를 얻었던 것.[17] "comme des petits pains. (모닝빵처럼 팔린다)"는 1966년 '누벨옵세르바퇴르'라는 신문 기사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여기서 "모닝빵처럼 팔린다(partir comme des petits pains)"는 것은 프랑스에서 자주 쓰는 관용어로써 '불티나게 팔리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18] 여기서 푸코는 프로이트를 언급한다.[19] 원어는 ethnologie로 '민족학'이라는 단어이다. 하지만 여기서 푸코는 이 단어를 보통 레비스트로스의 '문화인류학'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20] 여기서 언어학은 정신분석학과 민족학(문화인류학)을 근거 지을 수 있는 '무의식적이고 구조주의적인 언어학'을 의미한다.[21]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출판사, 2012, p.307[22]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출판사, 2012, p.324[23] 푸코는 튀니스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둘 다 가르쳤다. 물론 그의 직책은 철학교수였지만 말이다.[24]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 ETA와 맑스-레닌주의 성향의 FRAP의 소속 청년들이 테러혐의로 붙잡혀 사형을 선고를 받은 스페인의 마지막 사형집행 사건이자 당시 국내외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스페인어로 '27 de septiembre de 1975'으로 알려져있다.[25] 푸코는 1984년 초에 조르주 뒤메질에게 전화를 걸어 "에이즈에 걸린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26]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출판사, 2012, 3부 9장 예술작품으로서의 인생[27] 푸코의 계몽주의에 관심있는 사람은 그가 쓴 '계몽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es Lumières?, What is Enlightenment?)'를 참고하기를 바란다.[28] Foucault, 1976:122-123[29] 예컨대 전염병 상황에서 확산을 통제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기, 아무리 치안이 좋아도 반드시 발생하는 범죄를 지속가능한 선으로 유지하기 등. 이런 것들이 순환을 정상적인 상태와 비정상적인 상태로 구분하고, 통계와 확률을 바탕으로 비정상을 정상으로 유도하는 권력의 예시다. 자유주의는 시장 역시 이러한 양(+)적 순환의 체제로 보았다는 의미다.[30] 자유주의 통치성에 대한 분석은 <안전, 영토, 인구>의 중심을 이룬다. 여기에서 푸코는 크게 세 형태의 권력을 분석하는데, 하나는 고전적인 사법적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등에서 다루었던 규율 권력(혹은 규제적 권력)이다.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것이 안전 권력으로 이것은 인구에 관여하며 사회전체를 지속적으로 순환가능한 체제로 조직하려는 권력이다.[31]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이것은 말 그대로 아주 러프한 요약으로, 푸코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이보다 훨씬 다양한 문제를 종합한다. 즉 단지 자유에서 경쟁으로 원리가 변했다거나 인간을 자연적인 상태 아래에 둔다거나 하는 식 이상의 변화를 푸코는 분석한다.[32] 푸코는 자신의 작업을 '니체로부터 빌려온 계보학'이라고 명명하였다.[33] 권력을 억압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통념에 대비되는[34] 21세기 들어 '신유물론'이라는 중요한 철학적 조류로 자리잡았다.[35] 군나르 시르베크ㆍ닐스 길리에 『서양철학사 2』 이학사. 2016. p.1015[36] 1954년에 발간된 원래의 책 제목은 『정신병과 인격 (Maladie mentale et personnalité)』이었으나, 1962년에 이 책을 새로 수정출간하면서 『정신병과 심리학』이라는 제목으로 바꾼다. 푸코는 이 수정판이 너무나 조잡하다고 생각하고 2쇄 출간을 금했고, 영어로 번역되는 것도 막으려고 애썼으나 실패했다. 왜냐하면 푸코가 죽고나서 얼마되지 않아 출판사가 이 책을 포켓판으로 다시 출간했기 때문이다. 생전에 푸코는 '최초의 책이 무엇이냐'고 얘기가 나오면 이 책이 아니라 『광기의 역사』를 말하곤 했다.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출판사, 2012, p.128)[37] 푸코의 박사 논문. 논문 제목은 원래 『광기와 비이성』이었다. 논문을 책으로 출간할 때 제목이 『광기와 비이성: 고전주의 시대 광기의 역사』였고, 이후 '광기의 역사'로 불리게 된다. 그래서 결국 나중에는 책 제목도 아예 '광기의 역사'로 바뀐다.[38] 푸코는 유언으로 유고들의 출판을 금했지만, 생전 연인인 다니엘 드페르가 2013년 원고와 교정본의 소유권을 국가에 매각했고, 이후 유족들의 동의하에 출간되었다.[39] Les Anormaux (1975)[40]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1976)[41]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1978)[42]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1979)[43] L'Origine de l'herméneutique de soi (1980)[44] L'Herméneutique du sujet (1982)[45] Qu'est-ce que la critique ? Suivie de La culture de soi (1978~83)[46] 폴 벤느의 <푸코: 그의 사유, 그의 인격> 번역 개정판(2023)의 옮긴이 후기에서 역자인 이상길 교수가 이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47] 엄밀히 말하면 2018년 미국 시민권을 딴 프랑스계 미국인. 사실 소르망은 프랑스인이기는 하지만 프랑스보다는 미국측의 보수주의자의 입장에 더 가까운 사람으로, 미국 우파의 이데올로그로 보는 시각도 있다. 독특한 점은 '진보와 그의 적들'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지구 온난화 허구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도 자주 방한했으며, 고 정주영 회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한국 재계와도 연줄이 있고, 한국의 친재벌 연구소인 한경연, 세경연, 전경련 등의 세미나에 많이 참여하였다.[48] 더 타임즈가 일요일마다 발간하는 주간지.[49] The debunking was effectively, if unintentionally, completed by the German daily Die Zeit. In an article that is as a whole dedicated to repeating calumnies about Foucault in the service of an illegitimate conclusion that there is a conspiracy of silence in France around Foucault’s nefarious sex life, the Zeit journalist interviewed both Sorman and his sometime partner Chantal Charpentier. Sorman now admitted his knowledge of the matter was entirely indirect, based in remarks he had overheard—that is, that he was repeating gossip.[50] Faced with some inaccuracies in his claim, Sorman later adapted his statement, saying there was a "convergence of troubling evidence." #[51] Philippe Chevallier souligne ensuite dans L'Express le peu de consistance de ces accusations et le fait que Sorman a tenu des propos variables au fil du temps.[52]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는 모호함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포스트모더니즘=해체주의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해체'는 데리다와 예일 학파에만 국한되어야 할 단어이다. 들뢰즈는 니체와 관한 콜로키엄에서 해체에 대한 질문을 받자, 자신은 텍스트 주석가 아니라 텍스트 외적 실천이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며 완곡하게 비판하였고, 푸코는 보다 직접적으로 나는 해체와 같은 고상하고 수준 높은 사유 작용을 할 능력이 없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데리다 역시 지인과의 편지에서 들뢰즈-푸코를 위시한 동질적이고 지속적인 전선을 우려한다고 규정했을 정도.[53] 하지만 그가 호메이니와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한 것은 아니다. 단지 호메이니가 다른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을 관찰했었을 뿐이었다.[54]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한명이자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에티엔 발리바르가 쓴 미셸 푸코의 반 마르크스라는 칼럼도 있으니 현대 철학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찬찬히 읽어보자. 다만 현재에는 푸코와 마르크스를 엮어서 사유하려는 노력도 간간히 있는데, 한국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푸코, 발리바르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의 후학인 자크 비데가 꾸준히 이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다.[55] 이런 맥락이 나오게 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마르크스주의의 연합이라는 자신의 평소 주장을 언급하며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학자인 푸코를 소환한 것. 정작 슬라보예 지젝 뿐만 아니라, 알랭 바디우, 앨런 소칼 등 대다수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 학자들에 상당히 비판적이다.[56] 동시에 피터슨이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매도한 또 다른 철학자는 해체주의의 대명사인 자크 데리다. 이 토론 이후 피터슨은 대륙철학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뢰도를 상실했다.[57] 베르나르 앙리 레비, 앙드레 글뤽스만 등 신철학파에 속한 철학자들은 미셸 푸코처럼 루이 알튀세르에게서 사사했지만 성향 차이로 반마르크스주의로 선회한 인물이었고, 따라서 푸코는 이들을 지지한다. 그러나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와 교류하며 말년으로 갈수록 마르크스주의적인 신념[58]이 강해졌기 때문에 이들이 계급투쟁을 방해하는 부르주아 철학을 전개한다고 생각해서 신철학파를 비판했다. 이런 관점 때문에 둘은 갈라서게 되었다.#


[58]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들뢰즈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다. 마르크스 진영과 들뢰지언 진영 모두 동의하는 것은 들뢰즈-마르크스는 전통적인 의미의 마르크스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 당장 들뢰즈는 <자본주의와 분열증> 연작에서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헤겔-마르크스적인 진보적 역사관를 부정하고, 자본주의를 모든 사회 체제의 종말로 규정짓는다. 또한 말년에 진행한 안토니오 네그리와의 대담에서는 마르크스적인 보편성과 횡단을 논하는 네그리에 반대하며, 비교적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견해를 던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