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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메를로퐁티 Merleau-Ponty | |
본명 | 모리스 장 자크 메를로퐁티 Maurice Jean Jacques Merleau-Ponty |
출생 | 1908년 3월 14일 |
프랑스 로슈포르 | |
사망 | 1961년 5월 4일 (향년 53세) |
프랑스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모교 | 파리 고등사범학교 파리 대학교 |
경력 | 프랑스 대학교 파리 대학교 리옹 대학교 |
직업 | 철학자 |
학파 | 실존주의, 현상학, 서구 마르크스주의, 프랑스 신칸트주의 |
배우자 | 수잔 메를로 퐁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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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지식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대륙 관념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영국 경험론)'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의식과 감각은 항상 몸이라는 한계 속에 있으며, '몸'의 '체험'(신체화된 의식)을 통해서만 진정한 의미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모든 존재 의미는 자신의 '지각적 토대'인 몸이 실존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메를로퐁티는 '몸의 철학자'라고 불리며, 이후 프랑스 미술과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2. 생애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1908년 유복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그의 어머니가 외도를 해서 낳은 아들이었고, 메를로퐁티라는 이름도 외도 당사자인 실제 아버지를 따른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남편의 성을 따른 것이다.1930년 프랑스의 인문학적 천재들을 배출하는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여기서 장폴 사르트르를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된다.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여러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면서, 이 시기에 구조주의 인류학의 대가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사르트르의 부인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 교류했다. 이후 고등연구원에서 헤겔강의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강의를 들으면서 드골에 협력한 우파 사회학자 아롱, 에로티즘의 기묘한 철학자 바타이유, 프랑스 최고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 등과 사귄다.
이즈음 메를로퐁티는 아직 정확하게 현상학적이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첫 주저 『행동의 구조』( La Structure du Comportment, 1942)를 1938년에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는 이미 잠정적으로 현상학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실증주의적인 과학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그것과 짝지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작업을 혹심하게 비판하면서 기존의 전통 철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보병 근무를 하면서 메를로퐁티는 레지스탕스의 비밀 단체인 ‘사회주의와 자유’를 통해 사르트르와 접촉하고, 그런 가운데 사르트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이데거와 후설의 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44년 리옹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벨기에 루뱅에서 파리로 전송된 후설의 유고들을 점검하였으며, 1년 뒤 1945년 500여 쪽에 달하는 『지각의 현상학』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을 완성 출간하였다. 이 책을 통해 그는 프랑스 철학계에서 가장 천재적이고 독특한 현상학자로서 자리 잡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메를로퐁티의 사상은 주로 정치사상적인 방향으로 바뀐다. 그의 입장은 현상학과 당시의 주된 분위기였던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한 것이었다. 이런 입장의 정치사상은 1947년 당시 소련의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휴머니즘과 테러』( Humanisme et terreur, essai sur le probleme communiste )를 출간함으로써 한 단계 정리된다. 그러면서 그는 사르트르와 함께 정치부 주임 기자로서 사회 평론지인 '《현대》지'( les temps modernes )를 이끌어가면서 정치 평론과 예술 평론에 관한 글들을 싣게 되고, 이를 모아 1948년에 『의미와 무의미』( Sens et non-sens )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50년 북한의 침공으로 6.25 전쟁이 발발한다. 메를로퐁티는 사회주의 국가가 침략전쟁을 벌인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며, 이는 양 극단의 대립을 만들어냄으로써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여겼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북한과 스탈린을 반대했다. 이는 그가 평소에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 여겨 탐탁지 않게 여기던 스탈린주의를 더욱 확실하게 비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계속해서 스탈린을 옹호하였으며, 더군다나 메를로퐁티가 스탈린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현대》지에 게재하고자 했지만, 이를 사르트르가 싣지 못하게 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결국 결별하게 된다. 메를로퐁티는 그 이후 소련의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전에 그가 썼던 『휴머니즘과 테러』의 입장을 후회하게 되고, 1955년 『변증법의 모험』( Les aventures de la dialectique )을 쓰기까지 7년 동안 일체의 정치적인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변증법의 모험』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이긴 하나 종전과는 달리 사르트르의 입장을 거세게 비판하면서 새롭게 정립된 메를로퐁티의 정치사상을 담고 있다 하겠다.
이후 현상적 방법에 한계를 느끼고 자신의 몸의 철학을 존재론적인 설명으로 바꾸는 작업을 틈틈히 하였다. 그러는 중 1961년 3월 3일, 르네 데카르트의 『광학』을 펼쳐놓고 책상에 엎드린 채 심장마비로 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나이 53세 였다. 50년대에 들어서서 사실 메를로퐁티는 『행동의 구조』와 『지각의 현상학』의 작업, 즉 인간과 세계가 탄생하는 원초적인 지각의 장을 드러낸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 원초적인 지각의 장에서 어떻게 인간적인 질서의 상징과 언어의 세계가 열리는가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이에 비록 완성되지 못하고 포기되긴 했지만 『세계의 산문(散文)』[1]에서 ‘승화’(昇華, sublimation) 개념을 통해 상징과 언어에로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고, 생전에는 발간되지 못했지만 그의 연구 비망록과 초고들을 모아 유고집으로 발간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2]에서 미완성의 개념이긴 하지만 ‘살’(la chair)의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 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버린 새로운 존재론을 말하기도 했다.
3. 사상
3.1. 지각의 현상학
《지각의 현상학》으로 대표되는 그의 초기 사상은, 당시까지의 피히테, 셸링,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과 경험주의로 대표되는 영국의 실재론을 모두 배격하고, 게슈탈트 이론과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받아들여, 대상(세상)과 인식(생각)을 매개하는 곳이자 지각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몸(신체)을 강조하는 사상을 펼침으로써, 프랑스 철학계에 새로운 철학적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된다.우선 게슈탈트 이론을 알아야 메를로퐁티 전기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게슈탈트 이론이란, 지각은 부분과 부분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각 그 자체에서 이미 보완되어 '구조(형태)'로써 지각하게 된다는 이론이다.[3] 예를 들면, '3개의 점'을 보게될 때 우리는 그것을 3개의 점으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 그 자체에서 이미 보완하여 '삼각형'의 구조로 지각하게 된다는 것. 이는, 인식을 감각의 단순 총합으로 보는 '경험주의'가 틀렸음을 뜻하며, 또한 인식을 단지 의식의 논리적 재현으로 보는 '주지주의적 관념론' 역시 틀렸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지각 이론(게슈탈트 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적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의 개념을 이용해 '몸'을 분석함으로써 이 개념을 설명하였고, 이로인해 명성을 얻는다.
일단, 현상학을 쉽게 설명하자면, 의식과 대상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은 항상 대상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의식을 하는 주체와 대상은 연결된 하나의 개념이며, 또한 연결된 하나의 '주체-대상'의 의식은, 항상 대상을 향하고 있는 특징을 가진다. 이를 '지향성'이라고 한다. 즉, "모든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의식'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받아들여, '몸'을 설명하고자 한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몸'은 지각하는 주체이자, 지각당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만질 때, 지각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지각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 현상학적으로 보면, '의미'가 드러나는 장소인 동시에 '의미'가 발생하는 장소가 되는 곳이 바로 '몸'인 셈. 따라서 '몸'은 '주체와 대상이 순환적으로 엮이어 있는 곳'이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라면서, 생각이 순환되는 자신의 '의식'을 진리로 삼았듯이, 메를로퐁티는 주체와 대상이 순환적으로 지시하며 스스로를 현상하고 있는 '몸'을 진리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현상학에서 의미는 '대상'에서 드러나지만, 메를로퐁티에서 의미는 '지각'에서 드러난다. 즉, '몸'이 지시하는 의미는 '몸'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메를로퐁티는 의식의 기본체계를 그 의식의 '대상'이 아니라 '몸의 지각'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게슈탈트 이론도 이를 통해 설명된다. '의식'에서 '지각의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은 이미 지각이 이루어지는 '몸' 자체에서 그 '지각의 변형(보완)'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메를로퐁티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육화된 의식'[4]이라는 개념이다.
메를로퐁티는 '몸의 현상학'을, 실존주의, 생리학, 미술, 언어, 사회에 적용시키면서, 그의 철학 세계를 넓혀나갔다. 지각세계야말로 모든 '의미'의 발생기반이고, 그 장소는 의식(정신)이 아니라 몸(신체)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우리는 항상 '실존'하는 '몸'을 최우선으로 염두에 두고 철학을 전개해 나가야 된다고 《지각의 현상학》은 말하고 있다.
3.2. 살의 존재론
메를로퐁티는 후기로 갈수록 전기철학에서 현상학적 시각이 이분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는데에 문제의식을 느낀다. 현상학은 '주체(의식)-대상'[5]이 '대상'을 지시하고 그것에서 의미를 찾는데 있기 때문에, '지시하는 것'과 '지시당하는 것'의 이분법적 사유틀을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문제였다. 즉,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몸' 개념을 주관과 객관, 감각과 이성의 구분이 없어지는, 이분법이 사라지는 곳이라고 말했지만, 철학적 사유를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물질적 몸'과 '현상학적 몸' 사이에는 '지시하고 지시당하는' 현상학적 이분법의 틀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파악했던 것이다. 따라서 후기철학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상학' 대신 '존재론'을 가져오게 된다.하이데거 존재론의 특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존재는 세계라는 한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매번 자신의 선택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며 세계를 확장시킨다. 즉 존재는 '세계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이다.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면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는 다시 그 속의 존재를 변화시킨다. 여기서 개별과 전체는 구분되지 않으며 개념은 순환을 이루기 때문에, 지시하고 지시당하는 지향적 개념이 사라진다.
후기 철학으로 대표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메를로퐁티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존재론에 영향을 받은 '살(chair)의 개념'을 강조한다. '살'은 감각하는 피부 표면과 그 표면 밑에 숨겨진 '살'에서 파생된 개념으로, 메를로퐁티가 철학용어로 쓰는 '살'은 지각으로 느껴지는 물질적인 육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지각 이면에 숨겨져서 보이지 않던 존재 의미가 마치 지각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피부 위로 느껴지는 '지각'보다 둔하고 애매하여 파악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몸'의 체험은 살의 존재론으로 바라볼 때, 단순히 지각된 경험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세상은 단순히 몸이 지각하는 대상이 아니라, 몸과 세상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점차 넓혀지는 '몸의 이해'가 된다. 몸은 그가 속한 세상의 상황과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달라지는 자신만의 지각 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컴퓨터 이미지로 산을 본 것과 실제로 등산하면서 산을 체험한 것에는 분명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 즉,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 '체험'인 것이다.
여기서 '몸의 체험'을 통해 '나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체험하지 않은 장소에서 의미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렇게 한계지어진 존재론적 장소를 말하는 것이 '살(chair)'이며, '살'은 지각함과 동시에 그 지각의 내면에 있는 존재 의미의 다양한 가능성을 체험해주게 하는 요소(엘레멘탈)가 된다. 이 '살'의 세계에서 '주관과 객관', '감각과 이성'의 구분은 사라진다. 이를 피부(지각) 밑,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로 존재한다고 하여 '두께'라고 말하기도 하고, 여러 의미들이 겹쳐져서 느껴진다고 하여 '주름'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3.3. 색의 존재론
'살의 존재론'과 같은 맥락에서 메를로퐁티는 '색의 존재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미술 작품에 있어서, 형태나 윤곽은 매번 그 모양 그 꼴 이지만, 색은 하나로 고정된 색을 찾을 수 없으며 색은 다른 색과의 관계를 통해서 매번 다른 다양한 의미들을 드러낸다. 즉, '선, 윤곽, 형태'보다 '색채'가 존재의 역동성을 보다 더 잘 보여준다는 것이며, '색'이 '형태'보다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전기철학에서 말했던, 형태나 구조 중심의 게슈탈트 이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색은 무엇보다도 작품과 내가 체험으로 얽혀있는 매듭이자, 존재의미가 서로 만나게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작품을 이러한 '색의 존재론'으로 분석함으로써 이후 프랑스 미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특히, 메를로퐁티가 주목한 세잔의 작품은 18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생트빅투아르 산의 수채화 그림들이다. 세잔의 수채화는 하늘하늘 흔들리는 면들이 서로 겹쳐져 깊이가 다른 층위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비슷한 주제로 그린 유화보다 수채화에서 훨씬 두드러진 특징이다. 각각의 투명한 색채에서 우러나오는 구성의 조화가 어떤 환상적인 일렁임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푸른색, 녹색, 분홍색의 색조는 화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나풀거린다. 더구나 색채로 둘러싸여 있는 흰 종이의 빈 공간은 채워지지 않으면서도 색채만큼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시각적인 것과 비시각적인 것이 함께 어우러져, 볼 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하나의 체험이 된다.
『생트빅투아르 산의 수채화』 수채, 48×31, 1903 |
4. 영향
그의 사상은 현재까지도 현상학과 실존주의의 새로운 관점으로서 연구되고 있으며, 가스통 바슐라르, 질베르 뒤랑의 과학 철학과 함께 프랑스-유럽 철학의 주류를 양분하고 있는 조류 중 하나이다.5. 주요 저서
- 《행동의 구조》
- 《지각의 현상학》: 한국어 번역은 1종이 유일한데, 프랑스어 원전 번역본이 아니다. 이 책의 역자는 프랑스어 원전 외에도 영어번역본, 독일어번역본, 일본어번역본 등을 두루 참고해 번역했다. 이 때문에 번역의 질이 매우 떨어지며, 차라리 영어판을 끼고 참고용으로 읽어야 할 정도로 형편 없다는 혹평을 받는다. 특히, 철학 정전의 번역서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원전의 쪽수 표기는 물론이고, '찾아보기'조차 없어서 번역자의 불친절함과 무성의함이 드러나는 불쏘시개로 취급하는 경우[6]가 많다. 실제 현상학 전공자들은, 정말 영어판의 참고용으로 읽는 수준이며, 철학, 특히, 현상학 관련 학술지 논문에서는 원전이나 유명 영역본을 인용하지, 이 번역서 인용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다[7]. 굳이 한국어판을 봐야 한다면 이 번역판을 보기 전 여러 해설서를 보고 읽을 것을 권한다
- 《의미와 무의미》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후에 발간된 유작이며, 미완성이다. 메를로퐁티의 후기철학을 대표한다. 그는 이 책에서 '살과 색의 존재론'을 주장하였다.
6. 여담
-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북한의 침략을 규탄하는 편에 섰는데, 이때 북한을 두둔하는[8] 장폴 사르트르와 대판 싸웠던 적이 있다. 이로 인해 평생의 친구였던 사르트르와 헤어지게 된다.
- 장자의 호접지몽과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비슷한 면이 많다. 객체와 주체의 구분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철학의 근본에 '몸'을 놔두었고, 장자의 호접지몽은 그 근본을 '자연'에 놔두었다는 점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메를로퐁티와 사르트르의 죽음 이후로 프랑스에서 실존주의의 붐은 사라졌다.
- 국내에선 인명 표기가 잘못되는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유럽에서 "Merleau-Ponty"는 하이픈까지 포함하여 그것 자체로 하나의 성씨이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의 외국어 인명 표기에선 하이픈을 생략하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일단 '메를로퐁티'가 규범 표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Merleau-Ponty를 메를로퐁티로 옮기는 과정에서 하이픈 앞의 '메를로'를 빼먹고 '퐁티'로만 기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흔하게는 언론 기사에서도 "퐁티는..." 과 같은 표현을 쉽지 않게 찾아 볼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학술 문헌에서도 '퐁티'만 기술하는 황당한 경우가 꽤나 있다. 그리고 일부 학자의 경우에는 국립국어원의 인명 표기 규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하이픈을 넣어 '메를로-퐁티'로 기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1] Eloge de la Philosophie, Lecon inaugurale faite au College de France, Le jeudi 15 janvier 1953[2] Le Visible et l’invisible, suivi de notes de travail Edited by Claude Lefort[3] 이 이론이 과학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 이론을 통해서 메를로퐁티의 사유가 전개되었으므로, 이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메를로퐁티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4] '신체'화된 '의식'이라는 뜻.[5] 현상학에서 주체의 의식과 대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는 하나의 의식은 대상과 하나로 묶여, 대상을 지시한다.[6] 원전 쪽수 표기는 해당 분야 입문자가 관련 문헌을 읽는 과정에서 원전을 참고할 때 반드시 필요하다. 만일 원전 쪽수 표기가 없다면 원문을 독해해야 하기 때문에 학문 입문 난이도와 이해도에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커진다. 또, 찾아보기(색인)는 어떤 서적 내에서 중점적으로 파악해야 할 내용이 있을 경우 활용되는데, 이것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라는 심사라고 볼 수밖엔 없다. 이미 2차, 3차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분야에선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찾아보기를 두는 것은 '제2의 창작(번역)'이라고 할만큼 많은 품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각의 현상학은 메를로-퐁티가 직접 만들어둔 색인도 있고, 영미권에서 통용되는 권위있는 색인이 여러 종 있을 정도라 이것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번역자나 출판사가 매우 불친절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원전 쪽수 표기는 말 그대로 번역을 하면서 기록해 뒀다가 표기만 하면 되는데 이것을 하지 않았다는 건 번역자의 태도가 얼마나 무성의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7] 영역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Colin Smith 역으로, 1962년 첫 출간된 이후로 1981년까지 수 차례 개정이 이뤄졌다. 하지만 영미에서도 이 번역본에 대한 평은 그리 좋지 않으며, 결국 원전을 봐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2012년 Donald A. Landes의 새로운 영역본이 출간되었는데, 번역 수준이 준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처럼, 지각의 현상학은 애초에 영미의 메를로-퐁티를 전공한 철학자들도 번역을 꺼릴 정도로 난해한 도서인데, 원전도 아닌 여러 번역본을 참고한 한국어 번역본이 학계에서 좋은 평을 받을 리가 없다.[8] 당시만 해도 서구 사상계는 북한이 어떤 집단이고 김일성이 어떤 지도자인지 간파할 수 없었다. 그 전에 한국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완전 무지 아니면 일본인들을 통해 주워 들은 극히 제한적인, 그마저도 왜곡된 정보들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