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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 |
본명 | 질 루이 르네 들뢰즈 Gilles Louis René Deleuze |
출생 | 1925년 1월 18일 |
프랑스 파리 | |
사망 | 1995년 11월 4일 (향년 70세) |
프랑스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모교 | 카르노 고등학교 앙리4세 고등학교 파리 대학교 |
경력 |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교사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원 (1960-1964) 리옹 대학교 교수 (1964-1969) 파리 제8대학교 교수 (1969-1987) |
학파 | 대륙철학, 포스트모더니즘, 후기 구조주의, 유물론[1], 신스피노자주의, 프랑스 니체주의 |
직업 | 철학자, 미학자, 작가 |
배우자 | 드니즈 폴 그랑주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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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들뢰즈라는 번개가 일었다. 아마도 어느 날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로 불릴 것이다."
― 미셸 푸코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
차이와 생성의 철학자로 유명하며, 리좀과 수목, 탈영토화, 탈코드화 등 철학적으로 독창적인 사유의 어휘들을 창시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 바뤼흐 스피노자, 프리드리히 니체, 앙리 베르그송 등 소위 철학사의 비주류적 계보를 탐색하고 발굴하며 그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는 철학을 넘어 과학, 수학, 회화, 영화, 문학, 건축, 지리학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동시에 후대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영미권과 한국에서는 펠릭스 가타리와의 철학 협업으로 주로 알려져 있으며, 들뢰즈-가타리 콤비는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로 알려져있다.[2]
2. 생애
2.1. 초년기와 대학생활 (1925-1948)
질 들뢰즈는 1925년 1월 18일 프랑스 파리의 보수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형인 조르주는 군사학교에 입학해 장교가 되었으며, 이후 독일군 점령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 중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열차에서 사망한다. 들뢰즈가 열네 살이 될 무렵, 도빌(Deauville)의 해안가에서 피에르 알박스(Pierre Halwachs)[3]라는 교사와 만나고 그로부터 앙드레 지드, 샤를 보들레르와 같은 작가를 접하며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발발하고, 들뢰즈의 가족은 노르망디로 피신한다. 이 시기, 들뢰즈는 카르노 고등학교(Lycée Carnot)에 재학하며 후일 작가로 활약하는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와 만나게 된다.1943년, 들뢰즈는 파리로 돌아왔고, 명문 앙리4세 고등학교(Lycée Henri-IV)에 진학한다. 같은 해, 장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출간되었고, 들뢰즈는 지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트루니에는 들뢰즈가 매일 전화를 걸어 사르트르의 책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며, 나중 가서는 트루니에 자신이 사르트르의 구절들을 외울 지경에 이르렀다고 회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들뢰즈는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목표로 입시 준비를 했으나 실패한다. 대신 1944년 소르본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으며 진학한다. 들뢰즈는 학부 시절부터 독창적인 시각을 선보여 철학적인 두각을 드러냈으며 학생들과 몇몇 교수들에게 충격을 안긴다. 트루니에는 자서전을 통해 학생 시절의 들뢰즈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모든 지겨운 교과 과정의 철학도 그를 거쳐 가면, 신선하고, 생생하고, 싱싱하게 새로운 모습을 띠고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시 활기를 되찾아 출현하여, 우리의 연약함과 게으름을 완전히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만들었다".
소르본 시기, 들뢰즈는 페르디낭 알키에, 조르주 캉길렘, 장 이폴리트, 모리스 강디야크 등 당대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에게서 사사하는데, 특히 헤겔 철학의 권위자였던 장 이폴리트에 대해서는 스승으로서 존경심과 철학적인 야심을 동시에 표했다. 당시 프랑스 철학계의 중심에는 헤겔, 후설, 하이데거, 일명 3H가 성행했으며, 들뢰즈와 동시대의 학자들[4] 상당수가 그들에 대한 연구로 자신의 철학자 경력을 시작했다. 들뢰즈 역시 3H의 철학에 적잖은 인상을 받았으나, 그들에 대한 저술 대신 영국의 경험주의과 데이비드 흄으로 눈길을 돌린다.
1947년, 들뢰즈는 흄에 관한 연구를 끝으로 대학을 졸업한다. 이때 쓴 졸업 논문이 『경험론과 주체성: 흄에 따른 인간 본성에 관한 시론』이며, 이후 1953년 책으로 출판된다.[5]
2.2. 철학사가 시기 (1948-1968)
이듬해인 1948년, 철학 교사 자격시험을 통과한다. 이때 라 포르텔 성(Chateau de la Fortelle)에서 마리마들렌 다비(Marie-Madeleine Davy)가 주관하는 지식인 모임에 참석해 자크 라캉,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장 폴라크 등과 교류한다. 이후 아미앵에서의 교사 생활을 시작으로 오를레앙,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교사로 지내게 된다. 교사 시절의 들뢰즈는 상당히 열정적이었고 재능 있는 학생들을 돕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당시 클로드 르모인(Claude Lemoine)이라는 학생이 지방에서 파리로 왔으나 집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들뢰즈가 그를 초대해 자신의 어머니와 살도록 도와주었다는 일화가 있다.학부 시절부터 철학사가로 훈련받은 들뢰즈는 철학사 연구를 이어갔으며, 특히 주류 철학사에서 배제된 인물들을 탐색하고 발굴하는 작업을 주로 수행했다. 그의 탐구 대상이 된 학자로는 루크레티우스, 스토아 학파, 둔스 스코투스, 살로몬 마이몬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부터 20세기 프랑스 철학자들[6]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또한 철학사 뿐만 아니라 문학, 미적분학, 열역학, 지질학, 인류학, 민족학, 정신분석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저술들을 탐독하는데, 이러한 들뢰즈의 방대한 독서편력에 대해 리오타르는 '바벨의 도서관'[7]으로 비유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 들뢰즈는 자신의 탐구를 저술로 출판하지 않았으며, 교사직과 연구원 생활을 이어가며 침묵으로 일관한다. 후일 들뢰즈는 "내 인생의 구멍"이자 "8년의 공백"으로 회상한다. 그렇지만 들뢰즈 연구가들에 따르면 이미 1956-57년의 강의에서 『차이와 반복』에 나타날 내용들이 포함되었다.
1956년, 당시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발망 밑에서 일하던 드니즈 폴 그랑주앙과 결혼한다.[8] 이후 1960년에는 아들 쥘리앵을, 1964년에는 딸 에밀리를 얻는다. 1957년에는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사학 조교로 일했으며, 꽤나 독특했던 강의로 학생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린다. 1960년에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으로, 1964년에는 리옹 대학 강사로 재직한다.
1962년, 들뢰즈는 그간의 침묵을 깨고 『니체와 철학』을 출간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 『니체와 철학』은 독창적인 니체 해석으로 평가받으며, 들뢰즈는 단숨에 프랑스의 니체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때 미셸 푸코와 인연을 맺으며, 그와 함께 클레르몽페랑 대학의 학생 운동에 가담한다. 이후 『칸트의 비판 철학』, 『니체』, 『베르그송주의』, 『자허마조흐 소개』 등의 저작을 부지런히 출간했고, 1967년에는 푸코와 함께 니체 전집 불역본 총책임을 맡아 작업하게 된다. 후일 들뢰즈는 이 시기의 저서들을 '초상화'로 명명한다. 그는 반 고흐와 같은 화가들이 채색 화가가 되기 전에 초상화로 그림을 시작했음을 주목하며, 철학자 역시 같은 입장이라고 보았다.
2.3. 펠릭스 가타리와의 협력 (1968-1980)
1968년, 68 혁명이 일어난다. 당시 들뢰즈는 리옹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꺼림칙한 반응을 보인 동료 교수들과 달리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격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여겼다. 동시에 국가 박사 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과 부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을 제출한다.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의 주저이자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간의 철학사 연구를 종합해 들뢰즈 고유의 독창적인 형이상학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듬해 또 다른 주저인 『의미의 논리』를 출간한다. 『의미의 논리』는 루이스 캐럴과 스토아 학파를 중심으로 '사건'이라는 주제를 탐구한 저작으로, 들뢰즈 철학의 분수령으로 평가받는다.1969년, 들뢰즈는 푸코의 뒤를 이어 파리 제8대학교의 주임교수가 된다. 당시 프랑스 제8대학은 교육 개혁을 위한 지적 실험의 장이었으며, 들뢰즈는 프랑수아 샤틀레,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등과 교류하며 함께 실험에 앞장섰다.
이 시기, 자크 라캉의 제자이자 정신분석학자였던 펠릭스 가타리와 만나게 된다. 평소 들뢰즈와 친분이 있던 정신과 의사 장-피에르 뮈야르(Jean-Pierre Muyard)가 보르도 병원(La Borde)에서 일하는 가타리와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뮈야르는 가타리의 과격하고 급진적인 창조성에 지쳐있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일환으로 들뢰즈를 소개해주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고 1969년 6월, 들뢰즈가 머물던 리무쟁에서 만남을 가지게 된다. 당시 지성계는 구조주의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들뢰즈 개인으로서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폐 수술의 후유증을 겪는 등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였다.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만남으로 새로운 활력을 얻었으며, 몸 상태가 호전되면서 뮈야르와 함께 가타리가 지내던 보르드 근처의 성에 찾아가 여러 차례 토론을 이어갔다.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지속적인 논의를 거치며, 그의 아이디어를 이론적으로 정교화하고자 한다. 이때 둘 사이의 작업 방식이 상당히 특이했는데, 가타리가 아이디어가 담긴 메모를 들뢰즈에게 보내면 들뢰즈가 이를 정리하고 독창적으로 해석하며 원고를 작성했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펠릭스는 다이아몬드 광부이며, 자신은 광택제에 불과"하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1970년, 『스피노자: 실천철학』을 출간한다. 1971년에는 푸코, 다니엘 드페르가 창설한 '감옥정보모임(Groupe Information Prisons: GIP)'에 가담해 활동한다. 이 모임은 당시 프랑스 감옥의 열악한 상황을 폭로하고 감옥이라는 체제가 가진 권력의 유형을 연구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듬해인 1972년, 가타리와 함께한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를 출간한다. 이 책은 68혁명의 영향이 짙게 드리운 저서로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들뢰즈-가타리는 순식간에 스타 지식인으로 각광받게 된다. 1975년에는 두 번째 공저,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를 출간한다.
1978년, 오랜 동지였던 푸코와 결별하게 된다. 주된 이유는 테러리즘의 역할과 그에 대한 각 정부에 대처 방식에 대한 정치적 견해 차였으며, 당대의 반공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인 '신철학자'들에 대한 입장 차이도 한 몫을 했다.[9] 이후 에이즈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게 된 푸코는 들뢰즈와의 만남을 원했지만 이뤄지진 못했다. 1984년, 들뢰즈는 푸코의 장례식에 참석해 푸코의 저서인 『성의 역사2: 쾌락의 활용』의 한 구절을 읽는 것으로 추도사를 대신했다.
1980년에는 가타리와의 세 번째 공저인 『천 개의 고원』을 출간한다. 전작인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제 의식을 확장시킨 작품이었으나 전작만큼의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탈리어판 서문에서 들뢰즈도 이에 대해 『안티 오이디푸스』가 68혁명 영향 아래 있었으나, 『천 개의 고원』은 천박한 양상의 침체와 무관심의 시기에 출간되었다고 평가했다.
2.4. 후기 사상과 말년 (1980~1995)
『천 개의 고원』 출간 후 들뢰즈는 새로운 전환점의 필요성을 느낀다. 1984년, 들뢰즈는 자신과 가타리 모두 숨을 고르기 위해 홀로 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묘사한다. 이 시기 들뢰즈는 주로 미학을 탐구한다.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은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을 중심으로 칸트의 감성론과 예술론을 통합하고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감각론을 확장시키려는 시도이며, 『시네마 1 : 운동-이미지』, 『시네마 2 : 시간-이미지』에서는 베르그송의 이미지와 시간 개념을 축으로 삼아 독창적인 이미지 존재론을 선보인다.1986년에는 푸코에 대해 다룬 『푸코』를 출간한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푸코에 대한 철학적, 학문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푸코에 대한 존경 때문에 책을 저술했다고 밝힌다. 들뢰즈는 푸코 철학의 기획을 주체화에 대한 탐구로 정리한다.
1987년, 들뢰즈는 교수직을 은퇴하고 저술 활동에 매진하며 『주름 :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페리클레스와 베르디 : 프랑수아 샤틀레의 철학』, 그리고 가타리와의 마지막 공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연이어 출간한다. 1992년 가타리가 사망하고 이듬해에 들뢰즈 역시 건강이 악화된다. 들뢰즈는 젊은 시절 폐 수술을 받은 전적이 있었음에도 지독한 골초였고 이 때문에 말년에는 폐암으로 고통받게 된다.
1995년 죽기 전에 『마르크스의 위대함 (La Grandeur de Marx)』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마지막 글인 「내재성: 하나의 삶...」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고, 같은 해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호흡기를 뗀 후 투신 자살했다. 친구인 미셸 세르는 자살이 아니라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호흡기를 떼고 창문을 여는 도중 숨이 안 쉬어져서 의식을 잃고 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10]
3. 사상
들뢰즈는 순수철학과 응용철학을 가리지 않고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21세기 들어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플라톤 이래 칸트나 헤겔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간 이어져 온 서구철학의 선험적 이데아론을 뒤집고자 시도했다.들뢰즈는 자신이 바뤼흐 스피노자와 앙리 베르그송,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음을 반복하여 주장한다[11]. 이들의 공통점은 신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는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원리에 대한 부정과 끊임없는 순환과 생성에 대한 탐구에 있는데, 이는 서구철학의 전통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 '신', '이데아', '실체', '보편', '주체', 즉 '동일성'에 대한 거부로 이해될 수 있다. 들뢰즈는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존재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이거나 초월적인 개념, 원리도 없는 내재적인 사유를 추구하며 이를 위해 '초월론적 경험론'이라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축한다. 들뢰즈는 일관되게 초월론적 경험론을 자신의 사상의 원리로 삼았으며 이는 1953년에 출간된 첫 저작인 『경험주의와 주체성』, 국가박사학위 논문 『차이와 반복』을 거쳐 1991년에 출판한 『철학이란 무엇인가?』까지 아우른다.
3.1. 초월론적 경험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월성은 오로지 이 내재적인 평면에 고유한 내재적인 의식의 흐름 속에서만 구성된다. 즉 초월성이라는 것은 언제나 내재성으로부터 비롯된 생산물인 것이다.
― 「내재성: 생명...」 中
― 「내재성: 생명...」 中
들뢰즈는 임마누엘 칸트에 대한 살로몬 마이몬의 비판을 계승한다. 마이몬은 칸트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를 제시한 철학자였으며, 이후 독일 관념론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에 영향을 끼친 학자였다. 들뢰즈는 마이몬의 프로그램을 적용해 칸트의 비판철학을 급진적으로 밀어붙인다. 칸트는 주체의 인식 능력과 이성의 활동에 주안점을 두었다. 들뢰즈는 칸트의 초월론적 기획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칸트가 자신의 사유의 전제로 삼는 것, 곧 주체 그 자체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이를 위해 들뢰즈는 칸트가 간과한 지점인 주체의 발생의 문제를 탐구한다. 칸트의 경우, 형식들이 선험적으로 주어진다고 보았으며 그렇기에 자신의 철학을 '초월론적 관념론'이라고 불렀다. 반면 들뢰즈의 경우, 형식이 신체와 대상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산된다고 보았다. 형식들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체화되지 않은 세계의 경험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을 '초월론적 경험론'이라고 불렀다.[12]
초월론적 경험론은 사유와 인식의 가능 조건이자 발생의 원인으로 '강도'(intensité)를 지목한다. 들뢰즈에게 강도란 "이념적 함량 운동과 이어져 있는 감성이나 물질"을 의미한다. 초월론적 경험론에서 주체는 강도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고, 강도는 경험과 지각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주체는 전통적인 서구 철학이 바라보는 고정된 주체가 아니며 주체는 강도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3.2. 내재적 일의성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을 "존재의 일의성"으로 규정한다. 존재의 일의성은 존재는 유일하고 같은 단 하나의 의미로만 이야기된다는 의미이다. 존재의 일의성은 내재적 관점을 지향하며 존재와 존재자 간의 상호내재성을 담보한다. 만약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면 이들은 각 의미를 따라서 서로 다르게 이야기될 수 밖에 없다. 서구 철학의 전통은 이러한 다의성을 원리로 삼았고 이는 이데아-시뮬라크르, 신-피조물과 같은 구도로 이어졌다. 들뢰즈는 이러한 사유체계를 반대하며 스피노자의 철학을 가져온다. 신(존재)은 모든 피조물에 내재하고, 동시에 모든 피조물이 신에 내재한다는 내재성의 사유를 펼치며, 이 경우 존재는 신을 통해서나 피조물을 통해서나 같은 의미로 이야기된다.예를 들자면, 사과 두 개를 앞에 두고 들뢰즈가 문제시하는 것은 앞에 있는 사과 두 개의 존재에 앞서 존재하며 이 개체들에게 사과라는 정체성과 사과1, 사과2라는 동일성을 부여하는 '사과'라는 식물학적, 종분류학적인 개념과 범주 그 자체이다. 우리는 사과 한 개를 두고 식물의 일종으로, 사과나무의 한 열매로, 사과류의 한 품종으로, 먹을 수 있는 과일로 구분짓듯이 존재를 존재에 앞서 정의되어있는 범주나 개념을 통해 다의적으로 해석한다. 반면 들뢰즈에게는 존재의 의미를 존재의 외부에서 찾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사물에 대한 오해로, 존재의 의미는 존재의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외부적(초월적) 규정 없이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가 존재의 다의성을 거부하고 '일의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존재를 '무엇무엇 임'으로 개념화함으로써 정태적인 것으로 규정짓는 대신, '되어가고 있음(becoming)'의 시선에서 존재를 설명할 때 우리에게 열리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을 위해 쓰자면, 들뢰즈는 동일성의 논리를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의 연장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사물들의 동일성과 차이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해를 위해 빗대자면 들뢰즈는 세계를 오늘날 말하는 복잡계와 같이 바라본다. 물론 그 계의 구성요소를 비교적 자명한 실체로 상정하는 현대의 복잡계 이론과는 달리, 들뢰즈는 그 계를 구성하는(것 처럼 여겨지는) 개별적 요소 자체를 계의 "운동 과정"으로 바라본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사물, 동물, 사람은 이제 움직임과 정지, 빠름과 느림, 변용태, 강도에 의해서만 정의됩니다. 이제 형식들은 없고, 형식화되지 않은 요소들간에 이루어지는 운동학적 관계들이 있습니다. 이제 주체들은 없고, 집합적 배치들을 구성하는, 주체 없는 역학적 개체화들이 있습니다.
―『디알로그』 中
들뢰즈는 우리가 독립체로 인식하는 '개체'가 사실은 무한히 뻗어있는 복잡한 계에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재배치되는 과정의 일부들이라고 본다[13]. 즉, 어떤 존재가 개체로 이해될 때, 그 존재의 의미는 외부적 관념이 아니라 그 개체가 그 순간에 내재성의 평면에서 접속되어있는 '배치의 상태' 또는 배치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동일성(이라고 인식되는 것들)이 '계(내재성의 평면)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동일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동일성에 근거하는 차이 역시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차이는 오히려 '내재성의 평면'이 '운동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끊임없는 재배치의 효과이다.[14]―『디알로그』 中
다시 사과의 예를 들자면, 들뢰즈의 존재로는 사과를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하나의 독립체로 보는 것을 멈추고, 대신 사과와 사과를 둘러싸고 있는, 심지어는 사과 내부에 있는 대지, 대기, 물, 사람, 세포, 원소, 분자, 원자 등 모든 것으로 구성된 복잡한 관계망의 일시적 배치 형태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무에 달린 사과'와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외형적 형태, 내외부의 구분, 지식적 개념이 아니라 복잡한 관계망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는 관계망의 운동성이다. 들뢰즈의 시선에서 사과는(그리고 사실 모든 개체들은) 매 순간 끊임없이 생성-재생성되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들뢰즈는 모든 개체, 개념을 마치 창발적 과정과 같이 인간의 인식적 틀 하에서는 거꾸로 추적될수도, 규칙에 의해 연역될수도 없는 (즉 인과관계를 규명할 수 없는) 일시적 상태로 이해하자고 한다. 때문에 들뢰즈의 존재론은 니체가 말한 "영겁회귀"에 대한 철학적 개념화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어쨌든 들뢰즈의 사유는 운동하는 물질의 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고 본다는 점에서 이데아적 관념론, 칸트적 선험론, 헤겔적 유물론과 모두와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새로운 유물론에 기초하는 것은 분명하다.
3.3. 욕망 기계
욕망기계는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이 세 양태에 따라 절단하고 절단되는 자이다. 첫째 양태는 연결 종합에 관련되며, 리비도를 채취 에너지로 동원한다. 둘째 양태는 분리 종합에 관련되며, 누멘을 이탈 에너지로 동원한다. 셋째 양태는 결합 종합에 관련되며 볼룹타스를 잔여 에너지로 동원한다. 바로 이 양상 아래에서 욕망적 생산의 경과는 생산의 생산인 동시에 등록의 생산이고 소비의 생산이다. 채취하기, 이탈하기, <여분 남기기>-이것이 생산하기이며, 욕망의 현실적 작업들을 수행한다.
―『안티-오이디푸스』 中
만약 내재성의 평면이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면, 그 내재성의 평면을 운동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그 힘의 출처는 어디이며 외부적 힘이 아니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그 힘으로 지칭한다. 여기서 욕망은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의 욕망 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 개념을 비교적 쉽게 조망해 볼 수 있다.―『안티-오이디푸스』 中
프로이트나 라캉 등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는 욕망은 무의식으로 잠재화된 '결핍'이다. 이는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갖는 무의식적이고 원초적이면서 섹슈얼리티적인 결핍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정신분석학의 욕망 개념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욕망을 인간에게 내재되는 것으로, 즉 욕망을 인간에게 예속된 힘으로 보는 시선이다. 다른 하나는 욕망의 본질을 무언가의 결여나 결핍으로 지칭하는 구조주의적 결론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두 지점을 중심으로 욕망 개념을 새롭게 다진다. 이들은 먼저 욕망을 인간과 분리시키고 그 층위를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작동 양식으로 끌어내린다. 따라서 욕망이란 누군가에게 소유되거나, 개체의 존재 이후에 발생하는 힘이 아니게 된다. 욕망은 이미 개체의 개체화 이전에 내재성의 평면을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힘, 내재성의 평면의 운동성 그 자체인 것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같은 개념이 포괄하고자 했던 것과 유사한 물질계의 근본적 운동 원리에 가깝다. 즉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보다 더 작거나 더 근본적인 힘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욕망은 단순한 '재현된 결핍' 이상의 의미와 역량을 갖게 된다
그 다음으로, 욕망을 운동성으로 바라봄으로써 욕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적 힘으로 개념화된다. 욕망은 작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해낸다는 점에서 기계와 같다. 앞서 말했듯 이들에게 욕망보다 근본적인 것은 없다는 점에서 욕망은 세계를 형성하는 기초 단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세계는 운동성-기계의 이중성을 지닌 무수한 욕망이 배치-재배치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성해내고 있는 하나의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하는 기계가 아니라, 욕망이 곧 기계[15]인 동시에 자가작동의 운동성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원초적 힘이나 에너지, 역동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문한다.[16]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 개념을 재해석하며 당시 대륙철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정신분석학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들이 보기에 프로이트는 무의식 개념을 제시하여 이성과 합리성을 인간의 본질로 상정했던 근대의 이성주의적 시선을 때려 부순 위인이기도 했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변되는 무의식적 구조가 주체성을 결정한다고 정언해버림으로써 주체 해방의 가능성을 잠가버린 근대적 구조주의자에 불과하기도 했다. 정신분석학적 욕망 개념을 뒤집어 욕망을 유동적인 흐름이자 생산하는 힘으로 재개념화하려는 시도는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이들의 책 제목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또한 '욕망의 활용 방식' 이라는 근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분석지점을 노정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3.4. 잠재태와 현실태
3.5. (탈)영토화, 다양체, 리좀
나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천 개의 고원』 中
여기서 나무란 서구의 전통적 사유방식[17] 을 의미한다. 나무를 떠올려보자. 나무는 뿌리에서부터 줄기-가지로 뻗어나간다. 모든 것을 사물의 본질이나 근거,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사유로 서양의 형이상학적 전통, 근거지음(grunden)[18] 이다. 또, 위계적인 체계로 유목적인 체계인 리좀과 대비되는 사유방식이다.―『천 개의 고원』 中
들뢰즈/가타리는 통일성과 단일성을 버리거나 거기서 멀어지자고 말했다. 또 주체성도 털어내자고 했다. 그들은 기존의 나무 대신 리좀(rhizome, 뿌리줄기, 땅 밑 줄기, 헛뿌리)을 주장했는데 리좀은 내재적이고 유목적인 사유방식을 의미한다. 리좀은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는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관계의 질이 달라진다. 그것은 어떤 중심뿌리 없이 접속되고 분기되는 줄기 식물처럼 특정한 사고의 기반 없이 다양한 것들의 차이와 복수성을 다원화하고 새롭게 번식한다. 하나의 중심(뿌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무와 달리 뿌리도 없이 접속되고 분화되고 단절되고 연결되는 시작도 끝도 없는 가변적이고 역동적이며 유목적인 사유방식이다.
나무 중심의 사유 체계 혹은 지리서가 철저하게 이분법적 계통 혹은 분화를 따른다고 해서, 뿌리의 사고가 다만 이분법적으로만 존재했다는 것은 아니다. 수염뿌리 텍스트의 예로는 제임스 조이스와 프리드리히 니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염뿌리 체계 역시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3.6. 미시파시즘과 소수-되기
좌파는 소수-되기에 관련시키는 과정을 배치하는 것이라네. 그러니까 아무도 다수가 아니며, 모든 사람이 소수라는 것. 바로 그게 좌파에 있다는 것이지. 모두가 소수라는 것을 아는 걸 말일세. 거기가 되기(becoming)의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야. 때문에 모든 사상가들은 어쨌든간에 우리가 선거 등등으로 부르는 민주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이라네. 모두가 그것을 알지.
― <들뢰즈의 A to Z>, "G"의 "Gauche"(좌파) 中 #
들뢰즈는 가타리와 만나면서 소수자에 대한 정치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들뢰즈가 현실 정치에 비교적 관심을 적게 가졌기 때문에[19] 정치 철학은 흔히 주목되는 주제는 아니나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와 <천 개의 고원>과 같이 가타리와 공저한 저서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들뢰즈가 파악하는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파시즘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연작은 자본주의라는 탈을 쓴 미시 파시즘이 어떻게 68혁명을 좌절시켰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쓰여진 저서였고, 이를 통해 들뢰즈는 자본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측면에서 비판, 극복하려 했다.― <들뢰즈의 A to Z>, "G"의 "Gauche"(좌파) 中 #
들뢰즈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전체주의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전체주의는 탈주하는 욕망을 억압하려는 코드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자본주의는 그런 욕망들을 오히려 자유롭게 풀어버리는 탈코드화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는 그러한 탈주된 욕망을 다시 상품성과 소비로 재코드화하며, 이 과정에서 모든 욕망은 스스로 탈주했다고 믿지만 소비 사회에서 자본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다시 포섭됨으로써, 억압에 맞서 탈주를 하겠다는 목표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일원화된 욕망이 다른 형태로 코드화될 가능성을 잃은 체제가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그것의 대안으로 들뢰즈는 끊임 없이 코드화에 저항하는 소수되기를 내세운다. 여기서 소수라는 것은 '표준이라는 권력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의 소수이다. 그래서 소수는 일순간 다수가 될 수 있다.[20] 즉, 표준이라는 일정한 코드를 만들어 내는 주체를, 소수-되기의 연대를 통하여 끊임 없이 재코드화하며 극복해 나가야 된다고 본 것이 들뢰즈의 정치철학이다.
3.7. 시네마 이론
4. 영향
들뢰즈는 정치철학, 미학, 순수 철학, 수리학, 심리학 등 인문학의 광범위한 범위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21세기 이후 그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특히 21세기 대륙철학에서 들뢰즈의 영향력이 두드러지는데, 신유물론이라 불리는 일련의 학파가 들뢰즈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마누엘 데란다, 브뤼노 라투르[21], 레비 브라이언트, 도나 해러웨이, 제인 베넷 등으로 대표되는 신유물론 학파는 들뢰즈의 일원론적 철학과 "생성의 철학" 그리고 리좀 등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유물론과 연관이 있는 캉탱 메이야수, 그레이엄 하먼 등의 사변적 유물론 학자들도 들뢰즈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의 포스트 휴머니즘과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담론(특히 로지 브라이도티, 주디스 버틀러 등), 생태적 마르크스주의, 가속주의 등도 들뢰즈를 제외하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들뢰즈의 영향 아래에 놓여있다. 지리학자 나이절 스리프트[22], 과학자 존 프로테비 등이 들뢰즈의 연구를 계승한다.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클레어 콜브룩, 브라이언 마수미, 이안 뷰캐넌이 있다.
들뢰즈 생전에 들뢰즈와 상호 교류하고 영향을 받은 철학자로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있다. 네그리의 주요한 개념인 "다중"(multitude)은 들뢰즈의 개념인 "탈코드화의 욕망"에서 상당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있고, 그 외의 개념들도 창조적으로 변형되어 네그리의 철학에 계승되어있는데, 이런 점에서 착안해 들뢰즈와 마르크스를 통섭하려는 시도가 존재한다. 정치철학에 있어, 21세기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은 들뢰즈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아나키즘 내부에서 거의 십자포화를 맞고 죽어있던 막스 슈티르너식의 아나키즘이 들뢰즈의 영향을 받아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이란 이름을 달고 부활한 건 덤이다. 슈티르너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유아론이라는 특성상 관념론이라는 비판에 취약하기 마련인데, 들뢰즈의 이론이 일종의 대체제가 되어버렸기에...
반대로 슬라보예 지젝처럼 "신체 없는 기관 - 기관 없는 신체" 등의 개념을 통해 들뢰즈의 상대주의적 관점을 뒤집으려고 노력하는 철학자도 있는데, 바꿔 말하면 이는 들뢰즈가 여전히 철학에 있어 주요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알랭 바디우[23] 같이 모더니즘 성향이 강한 철학자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들뢰즈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 그리고 분석철학 쪽에서 들뢰즈는 라캉, 데리다, 푸코와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으로 존 설이 들뢰즈의 연구를 혹독하게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평가에는 들뢰즈의 연구 방식이 잘못되어서라기보다는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의 성향 차이가 크게 작용한다.[24] 애초에 들뢰즈도 생전에 분석철학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가 마르크스의 시대, 1990년대가 푸코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들뢰즈의 시대로 불릴만큼 들뢰즈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니체, 헤겔과 더불어 거의 모든 책이 완역된 몇 안되는 철학자이다. 일본에서도 들뢰즈는 상당한 히트를 쳤는데 이런 들뢰즈의 인기는 2008년 금융위기와 이로 인한 포스트모던의 쇠락과 모더니즘의 부활 시류로 인해 2010년대 이후로는 주춤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철학, 미학 등 여러 방면에 있어 들뢰즈는 여전히 끊임 없는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으며 2010년대와 2020년대에도 들뢰즈의 철학을 해설한 저서들은 많이 출간되고 있다.
5. 어록
우리의 게으른 삶이 바로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전 생애가 하나의 천직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 가는 어떤 폭력을 겪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 누가 진실을 찾는가? 바로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 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어떤 기호의 폭력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어리석다는 것은 동물 같다는 뜻이 아니다. 동물성은 멍청함을 나타내지 않는다.
─『차이와 반복』 中
─『차이와 반복』 中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고,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의 단일한 아우성이 있다.
─『차이와 반복』 中
─『차이와 반복』 中
타인이 가능 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이다.
─『의미의 논리』 中
─『의미의 논리』 中
개념은 벽돌이다. 그것은 이성의 재판소를 세우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아니면 창문으로 던져질 수도 있다.
Un concept est une brique. Il peut être utilisé pour construire un palais de justice de la raison. Ou il peut être jeté par la fenêtre.
─『천 개의 고원』 中
Un concept est une brique. Il peut être utilisé pour construire un palais de justice de la raison. Ou il peut être jeté par la fenêtre.
─『천 개의 고원』 中
영화는 세계를 찍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관계인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찍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영화적 환상의 본성에 대해 자문하고는 했다. 우리에게 다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영화의 힘이다(나쁜 영화가 되기를 그칠 때 말이다). 기독교인이건 무신론자건 우리는 우리의 보편적인 정신분열증 속에서 이 세계를 믿어야 할 이유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믿음 그 자체의 개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파스칼에서 니체로 이어지는 철학의 거대한 전환이 있었다. 즉 앎의 모델을 믿음으로 대체할 것. 그러나 믿음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의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이 될 때에만 비로소 앎을 대체한다.
─『시네마 2: 시간─이미지』 中
─『시네마 2: 시간─이미지』 中
타인의 꿈을 믿지 마십시오. 타인의 꿈에 붙잡히게 되면 당신은 끝장이니까요.
Méfiez-vous du rêve de l'autre, parce que si vous êtes pris dans le rêve de l'autre, vous êtes foutu.
─「창조행위란 무엇인가?」 中[25]
Méfiez-vous du rêve de l'autre, parce que si vous êtes pris dans le rêve de l'autre, vous êtes foutu.
─「창조행위란 무엇인가?」 中[25]
현대 세계에 완벽히 적합한 것으로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은 바다에 병을 던지는 아도르노의 모델, 혹은 한 사상가가 화살을 던지고 다른 이가 거두어들이는 니체의 모델입니다.
─『대담 1972-1990』 中
─『대담 1972-1990』 中
철학이란 개념을 만들고, 개념을 사유하고, 개념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中
─『철학이란 무엇인가?』 中
인간이라는 수치심, 글쓰는 데 이것보다 더 좋은 이유가 있을까요?
La honte d'être un homme, y a-t-il une meilleure raison d'écrire?
─『비평과 진단』 中
La honte d'être un homme, y a-t-il une meilleure raison d'écrire?
─『비평과 진단』 中
좌파가 된다는 것은 먼저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다음에는 그의 국가, 다음에는 그의 이웃, 다음에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파가 되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Être de gauche c'est d'abord penser le monde, puis son pays, puis ses proches, puis soi ; être de droite c'est l'inverse.
─『질 들뢰즈의 A to Z』 中
Être de gauche c'est d'abord penser le monde, puis son pays, puis ses proches, puis soi ; être de droite c'est l'inverse.
─『질 들뢰즈의 A to Z』 中
나는 사람들이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르크스가 죽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오늘날 시급한 과제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세계 시장이 무엇인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I don't understand it when people try to say that Marx was wrong. And even less when they claim that Marx is dead. There are so many urgent tasks today: we need to try to understand the global market, what it is and how it moves. To do that, one must turn to Marx.
─「나는 기억한다」 中[26]
I don't understand it when people try to say that Marx was wrong. And even less when they claim that Marx is dead. There are so many urgent tasks today: we need to try to understand the global market, what it is and how it moves. To do that, one must turn to Marx.
─「나는 기억한다」 中[26]
6. 주요 저서
원제 | 국역본 | 비고 |
Empirisme et subjectivité (1953) | 경험주의와 주체성 | |
Nietzsche et la philosophie (1962) | 니체와 철학 | |
La philosophie critique de Kant (1963) | 칸트의 비판철학 | |
Proust et les signes (1964) | 프루스트와 기호들 | |
Nietzsche (1965) | 들뢰즈의 니체 | |
Le Bergsonisme (1966) | 베르그손주의 | |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1967) | 매저키즘 | |
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8) | 차이와 반복 | |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8) |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 |
Logique du sens (1969) | 의미의 논리 | |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1970) | 스피노자의 철학 |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 L'Anti-Œdipe (1972) | 안티 오이디푸스 |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 |
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1975) |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 |
Dialogues (1977) | 디알로그 | 클레르 파르네와 공저 |
Sovrapposizioni (1978) | 중첩 | 카르멜로 베네와 공저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Mille Plateaux (1980) | 천 개의 고원 |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 |
Francis Bacon – Logique de la sensation (1981) | 감각의 논리 | |
Cinéma I: L'image-mouvement (1983) | 시네마 1 | |
Cinéma II: L'image-temps (1985) | 시네마 2 | |
Foucault (1986) | 들뢰즈의 푸코 | |
Le pli – Leibniz et le baroque (1988) |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 |
Périclès et Verdi: La philosophie de Francois Châtelet (1988) | ||
Pourparlers (1990) | 대담 1972-1990 | |
Qu'est-ce que la philosophie? (1991) | 철학이란 무엇인가? |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27] |
L'epuise (1992) | 소진된 인간 | |
Critique et clinique (1993) | 비평과 진단 | |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2002)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 발췌역 |
Deux régimes de fous et autres textes (2004)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 발췌역 |
Lettres et autres textes (2015) | 들뢰즈 다양체 |
7. 여담
- 포스트 모던의 세 거장인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들뢰즈 중에서는 들뢰즈가 가장 전통적인 의미의 철학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철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사회학자로 더 잘 알려져있고, 데리다가 문예비평과 비교문학 분야에서 더 주요하게 다루어진다면 들뢰즈는 자신만의 방대한 형이상학을 구축한 철학자이자 스피노자와 니체에 대한 주석 및 해설을 담당한 철학사가로 유명하다.
- 글을 어렵게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수목" "뿌리" "영토화" "코드화" "기계" 등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단어가, 들뢰즈의 책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평범한 책을 읽는 방식으로 독해하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 많다. 또 그 용어들의 의미를 이해하더라도, 그런 단어들이 왜 나왔는지에 대한 맥락, 즉 서양철학사에 대해 배경 지식이 없다면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때문에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은 그 명성에 비해 완독률이 정말 낮은 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들뢰즈의 책들을 해설한 한국의 철학 책에서도 어려운 부분은 "들뢰즈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인가 명확한 결론을 내려고 한 것 같지 않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다.
들뢰즈의 이런 어려운 글쓰기 방식은 어느 정도 의도된 측면이 있는데, 들뢰즈는 언어라는 것이 가진 특성을 구조주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용어들을 계속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은 근현대 철학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28] 따라서 자신의 생각과 철학적 사유를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스스로만의 용어와 글쓰기 방식을 정해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도는 좋았겠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죽을 맛(...). 이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고질병이기도 한데[29], 그중에서도 들뢰즈는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자크 데리다 등과 더불어 독해가 난해한 철학자 끝판왕 급으로 불린다. 사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프랑스어의 미묘한 언어적인 특성과 맥락을 자신의 사유에 지속적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비 프랑스어 화자들이 이들의 사유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확실하게 어렵다.
- 열정적인 시네필로서, 평론가 정성일의 책 제목이기도 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란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 의도와 의미는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많은 영화광들이 종종 인용하고 있다. 들뢰즈의 저서 '시네마' 때문에라도 영화 비평에서 자주 언급되는 철학자인데, '시네마'는 일반적인 영화 평론보다는 영화 미학서에 가깝다.
- 1993년 들뢰즈는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네그리와의 인터뷰에서 "가타리와 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우리가 자본주의와 그 발전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정치철학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30] 즉, 정치철학은 자본주의를 분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분석한 정치철학을 했다고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러야 되는가를 두고 많은 반박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들뢰즈가 마르크스주의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들뢰즈는 죽기 전 다른 인터뷰에서 자신은 '완전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31] 앞으로 『마르크스의 위대함』이라는 책을 쓰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그 책이 마르크스를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이용해 자신의 '소수-되기' 프로젝트를 강화시킬 목적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 것이다. 네그리는 들뢰즈가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했다고 생각하고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자신의 자율주의를 "들뢰즈-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알랭 바디우를 위시로 하는 대부분의 현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은 들뢰즈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 생전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싫어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리려고 하였으며 생전의 거의 유일한 인터뷰였던 "질 들뢰즈의 A to Z"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퇴행이자 철학의 암살자"이고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테러의 시스템'을 세웠다"고 비난했다.[32]
[1] 신유물론 학파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2] 이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철학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것은 들뢰즈이다. 푸코는 사회학과 역사학에도 발을 걸쳤으며 데리다는 독자적인 '해체주의'라는 이름 아래 텍스트 분석과 정치비평에서 주로 활약하였기 때문. 반면 들뢰즈는 주저인 『차이와 반복』 이전까지 15년 가량을 흄, 칸트, 니체, 베르그송 등을 탐구하는 철학사가로 커리어를 보내면서 독자적이고 방대한 형이상학을 구성했다.[3] 에밀 뒤르켐의 제자이자 실증주의 전통의 사회학자인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의 아들이다.[4] 에마뉘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 자크 데리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5] 들뢰즈는 이 책을 헤겔주의자였던 스승 장 이폴리트에게 헌정한다.[6] 대표적으로 현대 프랑스 철학의 거두인 앙리 베르그송, 개체화론을 탐구한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 수학철학자 알베르 로트망(Albert Lautmann)[7] 보르헤스의 소설의 제목에서 따왔다.[8] 후일 그녀는 D. H. 로런스의 불어 번역자이자 영미 문학 연구가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9] 푸코는 반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신철학파를 지지했는데, 들뢰즈는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들을 비난했다.[10] 1995년 1월 19일 미셸 세르는 그의 저서 『천사들의 전설 (La Légende des anges)』의 출간을 계기로 Wired 잡지의 Hari Kunzru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이 인터뷰 말미에서 들뢰즈의 죽음을 언급한다.#[11] 그 외에도 들뢰즈는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가브리엘 타르드, 솔로몬 마이몬, 질베르 시몽동 등을 중요한 철학자로 보고 적극적으로 재조명했다.[12] 이와 유사한 사상을 선보인 학자들로는 윌리엄 제임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있다. 두 학자 모두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 구도 이전의 경험 자체를 철학의 조건으로 사유했다.[13] 들뢰즈는 이를 '주름작용'이라고 표현할 때도 있다. 예시로 이리저리 접힌 종이와 그 종이의 주름 간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종이와 종이의 주름을 구분하여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종이와 주름을 분리하거나 나눌 수는 없다.[14] 흔히 보이는 "반복이 차이를 만든다"라는 표현은 이와 같은 들뢰즈의 사유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사용된다. 너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말자.[15] 들뢰즈는 욕망-기계라고 말하기도 한다[16] 욕망의 이러한 특성을 들뢰즈는 '분자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7] 들뢰즈는 플라톤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등 고전적인 서양 철학 뿐 아니라, 현대 철학인 실존주의,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촘스키의 언어 철학(분석 철학)도 모두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진단했다.[18] 많은 인터넷 게시글에서 '근거지움'이라고 잘못 쓰고 있다. 하지만 '지우다'의 활용인 '지움'은 물론이고 ‘(책임 등을) 지다’의 사동사인 '지움'을 사용했다고 설명하기엔 'grunden'은 '~의 기초를 세우다'라는 의미의 독일어이다. 그러므로 '짓다'에서 온 '지음'이 옳다.[19] 동료 펠릭스 가타리가 말년까지 녹색당, 공산당, 사회당 등 좌파 진영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것과는 반대로, 들뢰즈는 자신의 친구들 대부분이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본인 스스로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지 않았다. 다만 들뢰즈가 스스로를 좌파로 여겼음은 여러 인터뷰나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20] 물론 영원히 다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21] 라투르, 칼롱, 로에 의해 정립된 ANT 이론은 신유물론과 별개로 취급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신유물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22] 데이비드 하비와 들뢰즈의 관점을 엮은 도시 지리학으로 유명하다.[23] 같은 8대학교 교수 출신으로 생전에는 철학적인 입장에서 대립했을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사이가 안좋았다. 들뢰즈 사후 바디우는 '들뢰즈 - 존재의 함성'이라는 저작을 내놓으며 들뢰즈 철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해 애증을 내보였다.[24] 설은 들뢰즈 뿐만 아니라 당대의 데리다, 라캉과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자크 데리다와는 상호 간의 설전으로 번지기도 했다.[25] 들뢰즈가 1987년 프랑스국립영화/텔레비전학교에서 행한 강연 녹취록이다.[26] "Le ‘Je me souviens’ de Gilles Deleuze," Le Nouvel Observateur (Nov 16–22, 1995), 50-51. 생전 마지막 인터뷰이다#[27] 전기 작가인 프랑수아 도스에 의하면, 들뢰즈의 단독 저술이지만 가타리의 요청으로 공저로 발표했다고 한다.[28] 현대로 갈 수록 언어가 오염되어 철학이 제한된다고 생각한 철학자들이 많다. 이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파리잡는 꿀 유리병에 비유하며 언어를 규명하려 노력했고,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냥 손-안에-있음,현존재 같은 자기만의 단어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버렸다...[29] 들뢰즈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30] "Je crois que Félix Guattari et moi, nous somme restés marxistes, de deux manières différentes peut-être, mais tous les deux. C’est que nous ne croyons pas à une philosophie politique qui ne serait pas centrée sur l’analyse du capitalisme et de ses développements." 인터뷰 전문, 인터뷰 영역본[31] 이렇게 말하면서 들뢰즈는 "니체와 마르크스를 동시에 읽는 것이 마르크스를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나는 여전히 많은 개념에서 타당성을 찾았다" 등을 말했다. # 그런데 많은 개념에서 타당성을 찾았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모든 것에 동의한다는 말이 아니며, 니체와 마르크스를 동시에 읽었다는 것은 마르크스를 니체식으로 독해하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과연 '완전한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냐는 또다른 문제가 된다.[32]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속한 분석철학과 들뢰즈가 속한 대륙철학이 서로 사이가 안좋아서 그런 점도 있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유사점을 토대로 한 철학(가족 유사성)을 주장했다면 들뢰즈는 차이점을 토대로 한 철학(차이와 반복)을 전개하는 등 둘 사이에 매워질 수 없는 간격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