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9-25 21:44:41

프랑스 침공

프랑스 침공
제2차 세계 대전서부전선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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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에투알 개선문에 입성하는 독일 국방군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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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당에서 프랑스군 육군 포로들과 함께
마스 강을 도하하고 있는 독일 육군 제1기갑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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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 강(Aisne River) 근처를 지나가는 독일 육군 3호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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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6월 23일 에펠탑을 배경으로 찍은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1][2]
날짜
1940년 5월 10일 ~ 1940년 6월 25일
장소
프랑스 제3공화국,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교전국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png 이탈리아 왕국(6.10~)
파일:프랑스 국기.png 프랑스 제3공화국
파일:영국 국기.png 영국
파일:벨기에 국기.png 벨기에
파일:네덜란드 국기.png 네덜란드
파일:영국령 캐나다 국기.png 캐나다
파일:폴란드(1928~80년) 국기.png 폴란드 망명 정부
파일:체코 국기.png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파일:룩셈부르크 국기.png 룩셈부르크
지휘관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발터 폰 브라우히치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하인츠 구데리안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페도르 폰 보크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빌헬름 리터 폰 레프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에리히 폰 만슈타인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알베르트 케셀링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게오르크 폰 퀴힐러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에르빈 폰 비츨레벤
파일:프랑스 국기.png 모리스 가믈랭(~5.17)
파일:프랑스 국기.png 막심 베이강(5.17~)
파일:프랑스 국기.png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
파일:프랑스 국기.png 알퐁스 조르주(~5.17)
파일:프랑스 국기.png 앙리 지로
파일:프랑스 국기.png 조르주 카르투
파일:프랑스 국기.png 프랑수아 다를랑
파일:프랑스 국기.png 조세프 비유맹
파일:영국 국기.png 존 베레커[3]
결과
추축국의 승리
영향
프랑스 제3공화국 몰락
비시 프랑스 수립
자유 프랑스 수립
독일의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 점령
다이나모 작전 발동
영국 본토 항공전 발발
일본의 남방작전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 발발
병력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독일군 335만 명
- 141개 사단
- 대포 7,378문
- 전차 2,445대
- 항공기 5,638기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png 이탈리아군 30만 명
총 330만 명
- 144개 사단
- 대포 1만 3천여 문
- 전차 3,383대
- 항공기 2,935기
피해규모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독일군
- 사상자 12만 7,621명
- 항공기 1,236 ~ 1,345기 파괴
- 항공기 323 ~ 488기 파손
- 전차 795대 파괴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png 이탈리아군
- 사상자 6,029명
사상자 36만 명
- 포로 190만 명
- 파손된 항공기 2,233기
우리의 가장 위험한 적은 영국이다. 그러나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프랑스를 먼저 꺾어야만 한다.
- 아돌프 히틀러
"내 결정은 번복되지 않는다. 때가 되면 프랑스를 공격한다. 나는 승리할 것이며 죽을 각오로 도전하겠다."
- 아돌프 히틀러
"전쟁은 어두운 방의 문을 여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아무도 모른다."
- 아돌프 히틀러
"저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운명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처럼 대영 제국과 프랑스 공화국의 승리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 윈스턴 처칠
"우리는 패배했다, 전투에서 졌고, 전쟁에서 패배했다."[4]
- 폴 레노
NGC 다큐멘터리 2차 세계 대전 - 2부 프랑스의 참패
Rare WW2 film footage of the Wehrmacht Part 4 - The Battle of France 2

프랑스어: Bataille de France, Campagne de France
영어: Battle of France, Fall of France
독일어: Westfeldzug, Frankreichfeldzug

1. 개요2. 배경3. 독일의 전략
3.1. 우리 어쩌면 좋지?3.2. 만슈타인의 "낫질(Sichelschnitt)" 계획3.3. 불완전한 만슈타인 계획의 채택
4. 연합국의 전략
4.1. 우리는 공격하기 싫어요!4.2. 딜(Dyle) 계획4.3. 영국의 입장
5. 양측의 전력과 그 배치6. 진행 과정7. 결과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cond_world_war_europe_1940_map_de.png

프랑스 침공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연합국의 프랑스 침공, 보불전쟁 당시의 프로이센에 의한 침공,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면 침공(슐리펜 계획)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침공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나(더 거슬러 올라가면 백년전쟁카를 5세의 침공 등도 있다) 흔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것을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1939년 9월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진영 간 최초 전면전.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 선전포고 이후 가짜 전쟁에 이어 벌어진 사건이며, 1940년 5월 10일부터 프랑스가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은 동년 6월 21일까지의 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였다. 서유럽 최강의 육군을 가진 프랑스가 독일에게 단 6주 만에 패배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독일의 과감한 전술과 새로운 전투의 양상, 프랑스 지휘부의 무능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독일의 전격전과 프랑스의 마지노선으로 대표되나 실제 양상은 다소 복잡했다.

폴란드 침공이 전초전 또는 개막식이었다고 한다면, 프랑스 침공은 유럽과 대서양 전선에서의 본 게임이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서술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중일전쟁을 2차대전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이 마지노선을 지키는 동안 독일이 이를 우회하는 바람에 프랑스가 망했다는 인식이 많이 퍼져있는데, 반만 맞는 사실이다.

2. 배경

1939년 9월 1일, 아돌프 히틀러가 다스리는 제3제국은 지난 6개월 동안 단치히의 영유권을 두고 외교적 분쟁을 빚은 끝에 결국 폴란드를 군사적으로 침공하였다. 당시 히틀러는 이 전쟁을 일종의 무력시위, 단순한 퍼레이드 정도로 여겼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서술되는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병력의 규모 및 훈련도, 장비의 양과 질, 군수보급체계 등 뭐 하나 우위를 점한게 없었다. 영국/프랑스와의 본격적인 전쟁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히틀러와 독일 수뇌부는 해군의 Z계획 등 군사력 증강과 군수공업 시설 건설이 완료되는 1945년경을 본격적인 프랑스 침공 시점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실제 독일의 무기생산은 제공권 상실로 연합군의 엄청난 폭격에 시달리면서도 1944년 가을에 최고점을 찍는다. 1930년대 후반부터 건설하기 시작한 군수공업시설이 그때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1939년 폴란드 침공은 본격적인 세계 대전 개전이 아니라 체코 병합과 같은 무력시위 성격의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폴란드와는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르겠지만 1939년 3월 체코의 완전 합병 이후 군비증강 및 대독 적대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영국 및 프랑스가 이 무력시위에 깜짝 놀라 그 동안의 적대정책을 버리고 독일의 패권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이런 논리로 군부 및 정치, 경제계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회의적인 입장의 사람들이라도 제발 그렇게 되길 간절하게 빌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안 됐다간 독일이 망할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특히 반히틀러 입장의 군인들이 더 그랬는데, 당시 독일군은 '양면전쟁은 절대 하지 마라. 했다간 반드시 패전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1939년 9월 3일부로 독일은 양면전쟁을 시작했다(…). 사실 히틀러도 양면전쟁의 말로를 잘 알고 있어서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이때는 반 히틀러 진영조차 정말 두손두발 다 모아 히틀러의 말이 현실이 되거나, 아니면 그가 한시라도 빨리 제정신을 차리기를 기도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초에는 오스트리아 문제로 한 방 먹었고, 그해 가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로 또 한 방 먹었으며, 덤으로 1939년 초에는 슬로바키아의 분리독립과 체코의 완전 합병으로 최후의 일격을 먹은 상태였다. 따라서 이미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리 늦어도 1939년 초, 빠르게 보면 1938년 가을 시점에서 머지않아 독일과 일전을 치르지 않을 수 없다고 믿었고, 이에 가능하면 자기들이 직접 군대를 보내지 않고도 독일과 싸워 이길 수 있을 만한 강력한 동맹국을 찾고 있었다. 그 동맹국으로 뽑힌 것이 폴란드였다. 당시 폴란드는 독립 직후의 혼란기에 소련을 침공해서 승리를 거둔 역사도 있었기 때문에 중부 유럽의 군사강국처럼 보였다. 이 때문에 폴란드와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당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수상은 폴란드를 가리켜 "그 강력한 나라"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하지만 폴란드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프랑스 국방무관들은 폴란드의 한심한 군사적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폴란드군은 모래로 만든 성 또는 외화내빈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특히 공군이나 기갑부대의 전력은 절망적이었고, 육군의 기계화는 미진하기 그지없는데다 공군은 고작 200여대[5]의 전투기를 보유했으며 그나마 복엽기가 대부분이었다. 통신이나 수송 또한 매우 전근대적이었다. 그러나 영-프 정치가들은 친서방적인 폴란드 체제[6][7]에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반소적인 폴란드 정부의 눈치를 보아 소련과의 동맹에 매우 소극적으로 나왔다.

소련의 막심 리트비노프 외교부 장관은 영-프-폴-소로 이뤄진 독일 포위망을 구성하려 했으나, 소련과의 역사적으로 악연이 있던 폴란드는 소련과의 협력을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그러자 영-프는 폴란드의 눈치를 봐서 소련과의 동맹을 주저했고,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체제에 건성으로 반응했다.[8] 스탈린은 애써 회담장을 마련했는데, 영-프 협상단이 무성의로 일관하자 굉장히 격노했다. 소련 입장에서 이는 충분히 이유가 있는 분노였는데, 일단 당시 소련의 협상단 대표는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개인적으로도 절친한 친구였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였다. 게다가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어떠한 문서에도 보고 없이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위임장도 영-프 협상단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심지어 보로실로프 말고도 당시 소련의 최고지휘관 거의 전부를 회담장에 대동했을 정도로 소련은 이 협상에 정말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프 협상단은 자기들과 비교했을때 확연히 무성의한 자세로 임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성질이 안 뻗칠 수가 없었던 것. 그나마 프랑스는 협상단 대표인 조제프 두망크 장군이 협정에 서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전쟁 발발 시 110개 사단을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했으니까 양측 대표의 격이 너무 차이났다는 점[9]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양호한 편이었는데, 문제는 영국이었다. 영국 대표는 전권 위임은 커녕 어떠한 사항에도 동의할 권한이 없었으며, 거기에 더해 소련측이 '독일이 주변국을 침략할 경우[10] 소련은 120개 사단을 동원하여 막겠다, 영국은 몇개 사단을 내놓을 수 있는가?'에 대해 묻자 파견할 수 있는 지상군이 불과 16개 사단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 대답을 듣고 나서 보로실로프가 통역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진지하게 반문했을 정도로 당황한 소련 측이 세부사항에 대해 캐물었더니, 영국 협상단 측에서는 사실 그 중에서 전투가 가능한 것은 단 4개 사단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스탈린이 회담 종료 후 영국 대사에게 직접 구체적으로 더 물어봤더니 영국 대사의 대답은 "사실 즉각 파견이 가능한 사단은 2개 사단에 불과하며 나머지 2개 사단은 아직 완편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11] 때문에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과 독일을 싸움 붙인 후에 어부지리를 기대하는거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12][13] 결국 그는 영-프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반독일적인 리트비노프를 해임하여 독일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고, 이를 감지한 독일은 외상 리벤트로프를 보내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이러한 외교는 나중에 서방측에게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어찌되었든 폴란드를 동맹국으로 만든 영국과 프랑스는 역시 당시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큰 소리로 어흥하고 고함치면 폴란드가 기가 팍 살아서 독일의 뺨을 제대로 한 방 갈길 것이고, 그럼 독일은 깨갱하고 꼬리를 내릴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정오 독일에 앞으로 5시간 내에 폴란드 침공을 중지하거나 침공을 중지하겠다는 확실한 보장을 하지 않으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히틀러 및 제3제국 수뇌부의 반응은 이랬다.
내가 통역을 마치자 그곳은 침묵으로 휩싸였고...(중략)...히틀러는 돌처럼 굳은 채 가만히 전방을 바라보았다. 알려진 것처럼 흥분하거나 미쳐 날뛰지 않았다.[14]그는 자신의 의자에 미동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영원처럼 느껴진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갑자기 히틀러는 창백한 모습으로 창가에 서 있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를 울분에 찬 눈빛으로 노려보며 이렇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마치 리벤트로프가 영국의 외교적 반응을 잘못 알렸다고 지적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리벤트로프는 목멘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프랑스도 머지않아 우리에게 동일한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낼 것 같습니다."(…)

괴링은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또다시 패배한다면 과연 신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

- 히틀러의 통역실장 파울 슈미트의 회고 -

(출처: 칼 하인츠 프리저 저 "전격전의 전설(Blitzkrieg-Legende)" 2-1장)
사실 이런 상황은 이미 독일 국내에서도 매우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침공을 전후해서 군부에서의 반 히틀러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런 군부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히틀러는 반복적으로 폴란드 침공과 관련해서 서방세계, 특히 영국을 자극하지 않을 것임을 군부에게 반복적으로 다짐해 왔었다. 심지어 히틀러의 정책을 성실히 따르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대영/대프랑스 방어전을 계획하던 참모본부 참모장교들에게 히틀러가 "님들 그러다가 영국이나 프랑스가 그거 알면 걔네들이 그거 핑계로 쳐들어올지도 몰라요! 그거 님들이 책임질거요?"이라면서 펄펄 뛰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저런 상황이 마침내 현실로 다가오자 전 독일이 데꿀멍 모드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히틀러로서는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담을 길이 없었다. 히틀러는 현대 역사가의 눈으로 보면 말 그대로 벼랑끝 전술, 배째라 전술을 구사해서 극적으로 주변국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도박사적 행위로 자신의 인기를 유지해 왔으나, 당시 독일 국민들은 그런 히틀러의 배째라 정신을 강력한 지도력과 탁월한 정치적-군사적 식견에 힘입은, 적어도 서너 수는 미래를 내다보는 철저한 전략의 결과물이라고 믿었다. 이것을 조장한 것이 히틀러와 나치당, 정확하게는 괴벨스로 대표되는 당시 나치 독일의 선전부서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동안 한껏 부풀려놓은 히틀러의 위대한 식견을 함부로 깔아뭉갤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벌어질 일은 히틀러의 실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미 양면전쟁이 확실시되고 프랑스가 9월 7일부터 16일까지 1차로 11개 사단, 최종적으로는 총 41개 사단을 휘몰아 자를란트로 30km나 밀고 들어온 상황이었다. 사실 프랑스군도 상황은 엉망이어서 자르로 진격하는 임무에 동원된 41개 사단 중에서 제대로 완편된 사단은 고작 3개에 불과했지만, 프랑스군에 맞선 독일 제1군 예하 사단들은 아직 편성이 제대로 되지도 않아서 중장비는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총만 든(경우에 따라선 소총도 없는) 군중에 불과했다. 군복조차 조달되지 않아 소총도 없이 집에서 들고 온 삽을 하나 메고 독일 국방군이라고 스탬프를 찍은 완장(...)만 찬 병사들마저 만 명 단위로 있었을 정도. 당연히 이들은 프랑스군 침공에 대해 직접적인 저항은 거의 하지 않고, 단지 도시와 마을을 소개하고 주요 길목에 막대한 양의 지뢰를 매설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프랑스의 군사적 압력에 무력하게 굴복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9월 16일을 기해 프랑스가 전면 동원령을 발령함에 따라 이제 절대로 전쟁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그나마 히틀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자르를 침공한 프랑스군은 9월 17일을 기해 철수를 시작, 마지노 선 서쪽의 원래 주둔지로 돌아가 버렸으므로 히틀러에게는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 폴란드와의 전쟁을 서둘러 끝낸 다음 프랑스를 격파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폴란드 점령이 완료된 직후인 1939년 10월 9일을 기해 히틀러는 총통지령 6호(Führer-Anweisung N°6)를 발령, 프랑스 침공 계획을 공식화했다.

파일:plus forts.png
▲"Nous vaincrons parce que nous sommes les plus forts(우리가 이긴다, 우리가 최강이니까.)"

이렇듯 상황이 독일에게 더이상 좋기 어려울 정도로 잘 풀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독일이 영국-프랑스 동맹과 정면으로 싸워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아무리 독일이 발빠른 경제성장을 일궈내 막강한 공업능력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들, 상대는 인류 역사상 최대제국인 대영제국과, 그 대영제국을 상대로 수백년을 나란히 경쟁한 프랑스 식민제국이었다.

3. 독일의 전략

3.1. 우리 어쩌면 좋지?

1939년 10월 폴란드 전토가 독일과 소련에게 분할 점령되고, 개전 직전에 있었던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로 독일은 일단 양면전쟁 상황은 간신히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현재 총병력 450만 중 실제 전투력을 가진 병력이 200만을 넘지 않는 상태에서, 해외 주둔군을 포함해서 정규군만 200만이고 단기간에 3~400만 이상을 추가 동원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프랑스를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히틀러는 어차피 빠른 시간 내에 병력을 충분히 늘릴 수도 없는 지금, 아직 프랑스가 동원을 마치기 전에 서둘러서 먼저 치고 보는 게 낫다며 10월 중, 늦어도 11월 말 침공을 군부에 명령함으로서 독일 국방군 참모본부를 대 패닉에 빠트렸다. 히틀러의 생각도 일리는 있었다. 이는 프랑스의 동원체계는 상당히 굼뜬 편이어서, 소집된 예비군이 전투부대로서 편성되는 데는 수 개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1939년 11월 시점에서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전장에 투입 가능한 정규군 및 소집완료 예비군 병력합계 자체는 200만 대 200만으로 서로 거의 같았다. 다만 프랑스에게는 군복무를 마친 예비군 400만 명과 해외주둔군 150만 명이 더 있었고, 독일에게는 훈련되지 않고 총도 없는 소집대상 민간인 500만 명만 있었다.(...) 즉, 제1차 세계 대전 식으로 생각하면 첫 한 방에 프랑스를 집어먹지 못하면 다음에 먹히는 건 독일이었다. 하지만 독일군도 제대로 편제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서 서로 준비없이 양군이 충돌하면 독일군이 발릴 가능성도 높았다는 것이 문제였다.[15]

그래서 독일 군부는 필사적으로 히틀러를 설득, 그나마 그해 겨울 동안은 침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가짜 전쟁의 소강 상태는 바로 이런 독일 수뇌부의 판단에 따라 독일이 설설 기었으며, 아울러 프랑스 및 영국 역시 아직 병력 동원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가능한 한 독일의 선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어 소모전을 유도, 독일이 지친 다음에야 공세로 나가는 1차 세계 대전 식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독일은 아직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던 군수산업 가동율을 높여 부족한 장비와 탄약을 보충했다. 당장 폴란드 전역이 종결된 시점에서 독일 국방군이 보유한 탄약은 전군에 필요한 기본 예비탄약의 30~50% 미만이었다. 당시 기본 예비탄약은 전투 2~3회를 치르는 탄약이었으므로, 사실상 전군이 딱 한 번 싸우면 끝나는 탄약 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폴란드 침공 당시 소모한 각종 기갑, 기계화장비를 보충하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다.

이 기간 동안 독일 국방군 참모본부는 히틀러가 총통지령으로 하달한 프랑스 침공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로 쳐들어가면 우리는 망한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던 참모본부는 가능하면 프랑스 침공 없이 전쟁이 끝나기를 원했고, 이 때문에 1939년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제출된 대 프랑스 작전계획은 허술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어린애가 봐도 실패할 게 뻔해 보이는 작전계획 이상의 작전안을 만들지 못한다면, 히틀러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인 일종의 태업이라는 견해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히틀러는 정 안 되면 이대로라도 치고 나가겠다는 주장을 걸핏하면 밝혔고, 이 때문에 참모본부, 특히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은 히틀러를 내가 직접 쏴 죽여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까지 몰렸다. 원래 할더는 1938년부터 히틀러에 대해 저항했으며, 1939년 11월에는 실제로 쿠데타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할더 본인의 소심함과 더불어 순간적인 판단착오로 쿠데타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때의 쿠데타 멤버 중에 훗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당시 프랑스에서의 사태를 주도한 슈퇼프나겔 장군이 있었고, 할더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 이 1939년의 반란 기도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당연하게도 할더는 말로 끝내지 않고 나름대로 준비도 진행했는데, 한스 그로스쿠르트 대령도 이런 암살음모모의에 가담한 사람 중 하나였다. 이 무렵 할더에게 히틀러를 폭탄으로 암살할 전문가를 알선하라는 비공식 명령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의 폭탄테러 계획은 훗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서 현실화되었다. 그로스쿠르트 대령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1943년에 수용소에서 죽었지만, 그가 남긴 일기장에는 이런 대목이 적혔을 정도다.
"눈물을 흘리며 할더가 말했다. '여차하면 그를 죽여버리려고 요 몇 주 동안 히틀러에게 갈 때 주머니에 권총을 넣어갔다네.'" [16]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희망은 이미 1939년 10월 이후 끝장이 나 있었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고, 반 히틀러 진영마저 결국 이렇게 된 바에는 어떻게든 이겨 볼 수 밖에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히틀러를 제거한다면 그 뒤에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일단은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독일군은, 적어도 참모본부 차원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당장 프랑스 침공에 투입할 부대[17]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까에 대해서는 계속 우왕좌왕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할더가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을 동안, 1939년 10월에 작성된 프랑스 침공작전 초기안에서 조공부대로 결정된 A집단군(Heersgruppe A)의 참모장이었던 어떤 인물이 누구든지 보기만 해도 "이놈 미쳤군!"이라고 외칠 만한 기상천외하고 위험한 작전계획을 수립, 제출했다.

그의 이름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3.2. 만슈타인의 "낫질(Sichelschnitt)" 계획

파일:external/historywarsweapons.com/Manstein_Plan.jpg

1939년 10월에 최초 작성된 프랑스 침공 계획, 이른바 "황색 작전(Fall Gelb)[18]"의 초안은 슐리펜 계획과 기본적으로 같은 구성으로, 바다에 인접한 우익에 주공을 두어 좌익에서 우익으로 크게 선회, 벨기에 및 북프랑스에서 방어에 나설 프랑스군을 포위섬멸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프랑스군이 한 번 당했던 일을 또 당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당시 슐리펜 계획의 기본 전제는 프랑스가 현재의 마지노 선 일대에서 독일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다는 전제 하에 발생하는 회전문 효과를 이용해서 프랑스군 주력을 포위한다는 것이었는데, 1940년의 프랑스군이 그때의 프랑스군처럼 적극적으로 공격해 올 가능성 또한 낮다는 것도 문제였다. 한마디로 회전문 효과는 기대 못하고, 오히려 강력한 적 주력 부대와 정면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아직 취약한 독일군은 참패를 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군사적 문외한의 눈에도 자명해 보일 정도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군사적으로는 순간적 재치조차 없다고 독일군 내부에서 비웃음을 사고 있던 히틀러조차 "이래서야 이길 리가 없잖아! 다른 데에서 주공을 더 늘리지 않으면 안돼!"라고 대번에 계획안을 반려시킬 정도였다.

이에 11월에 원래의 주공 남쪽에 새로운 주공을 두었지만, 이는 그저 단순한 전력의 분산만을 부를 뿐 기존의 계획과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여기에 히틀러는 히틀러대로 더 남쪽으로 세 번째 주공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의견을 제시,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이 셋으로 쪼개지는 대참사가 벌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세 번째 주공을 만들었을 때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결국 병력의 집중이 없어져서 '주'공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따라서 돌파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하마터면 이 계획이 진짜로 채택될 뻔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세 번째 주공이 자리잡게 된 기존의 조공부대인 A집단군에 바로 그 만본좌가 있었다. 만슈타인은 이렇게 세 번째 주공이 설정되는 시점에서, 그가 A집단군 참모장으로서 현장에 도착했던 1939년 10월 이후 가능성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한 가지 계획을 입안하게 되었다. 임무형 지휘체계에 근거, 일선 지휘관 및 그 참모부가 그 상급사령부, 경우에 따라서 최고사령부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작전 행동을 입안,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던 독일군이었기에 가능했던 계획 입안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름이 붙지 않았던 이 계획은 다음의 4단계 발상을 거쳐 기획되었다.
  • 1) 현재의 작전 계획은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에 적도 이런 상황에는 당연히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쉽게 실행 가능하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운다면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리고 그 승산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적이 차마 생각도 못할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적의 허를 찔러야 한다.[19]
  • 2) 따라서 적이 주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에 실은 조공을 두고, 적이 조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에 주공을 둔다. 적이 주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은 원래 계획의 주공인 벨기에 북부 방면이고, 적이 조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은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 일대, 즉 아르덴 고원 일대이다.
  • 3) 이렇게 병력을 운용할 경우, 적절한 기만의 결과로 적이 아군의 조공을 주공으로 착각하여 벨기에로 기동하게 할 수 있다면 아르덴으로 기동한 진짜 주공은 적의 주력이 벨기에로 진입하는 틈을 타서 회전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텅 빈 진공으로 빨려들어가듯 프랑스군의 배후로 진입, 벨기에로 들어간 프랑스군을 완전 포위섬멸할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 4) 단 이 경우 시작부터 적의 주력과 접촉하게 될 벨기에 방면에 비해서 적의 후방으로 기동해야 하는 주공 부대는 그 기동 거리가 과격하게 늘어나고, 또한 현대전은 제1차 세계 대전 때와는 달리 피아 신속한 부대 전개 및 역습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높은 기동력과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적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돌파 가능한, 연속적인 전투 기획 및 실행이 가능한 작전술 제대로서의 기갑부대가 주공이 되어야 한다. 이들은 신속하게 아르덴을 돌파, 북프랑스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진격해서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 프랑스와 벨기에 및 영국 유럽 원정군 주력을 단기간에 포위-섬멸해야 한다. 시간이 너무 걸리면 적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고, 역습에 대응할 만한 예비 전력을 확보해서 이를 기동시키기엔 현재 독일군의 역량 부족이 적나라하게 노출될 것이다. [20]
만슈타인은 이와 같은 작전을 기획, 자신의 사령관이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에게 제출했다. 견실하고 신중한 지휘관이었던 룬트슈테트는 만슈타인의 기획안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이었으나,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여 이를 국방군 총참모부에 보고했다. 원래 만슈타인은 원래 그의 능력 및 독일 국방군 내부의 연공서열로 볼 때, 사실은 차기 육군참모총장이 돼야 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1938년의 인사 파동으로 그 기회를 놓쳐 일선 집단군 참모장이 되었고, 이 때문에 당시 룬트슈테트를 포함한 주요 지휘관들은 만슈타인이 능력에 비해 보잘것없는 한직에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이것이 당시 만슈타인이 세운 개념안 수준의 계획을 참모본부에 보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든 사람은... 바로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

하지만 할더는 매사 모두 합리적이고 안전빵이며 정교한 계획을 선호하는 인물. 작전이 안 풀리거나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수학 문제집을 푸는게 취미인 할더의 눈에 도박성 짙고 적이 보기에도 그렇고 아군이 보기에도 일견 비합리적인 작전 계획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특히 만슈타인의 당시 계획에는 심각한 결점이 두 개 있었다. 이는 기동전이 가지는 본질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 1. A집단군의 원래 임무는 마지노 선 방향에서 독일군의 측면을 찔러 들어오는 프랑스군의 역습을 저지하는 데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공이 출발할 경우, 자칫하면 주공의 출발점에서부터 주공부대가 측면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기동부대의 기동이 빠르면 빠를수록 보호해야 할 측면이 점점 넓어지는데, 과연 이 넓어지는 측면을 제때 보호 가능하도록 병력을 전개할 기동력이 있는가? 아니, 아예 병력이 있기나 한가?
  • 2. 더구나 작전술적 차원, 즉 연속적인 군단급 전투를 기획할 수 있는 야전군 사령부급의 기갑부대 운용은 아직까지 경험이 없거니와 심지어 이론적 토대조차 다져져 있지 않은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이다. 그와 같은 완전 미지수의 작전술 제대를 별안간 편성하고, 더구나 그들에게 국가의 명운이 달린 주공을 맡긴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도박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만슈타인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고, 특히 2번 문제에 있어서는 독일 기갑 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인츠 구데리안 등과의 의견 교환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이론적 기반을 다져 나가는 중이었다. 또한 1번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만슈타인답게 정말 깨는 방법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얼마 안 되는 병력을 또 쪼개서 남쪽에서 적이 반격을 하기 전에 그쪽을 주공이라고 착각하도록 제대로 한 방 치고, 적이 혼란스러워하다가 다시 반격으로 집중하려는 시점에 적의 북쪽 주력을 섬멸한 기동부대가 서둘러 남하해서 그놈들을 또 측면에서 포위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첫 번째 작전을 그대로 한 번 더 재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단계까지의 계획안이 나오기 전에, 만슈타인은 모가지당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참모본부의 계획에 반기를 든 것으로도 모자라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도박성 짙은 작전을 일개 집단군 사령부의 사령관도 아니고 참모장이 제출했으며, 덤으로 원래 조공부대였던 집단군이 주공 부대로 둔갑하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화려한 전공을 탐내는 기회주의적 작태로 보일 수도 있었다. 여기에 만슈타인과 참모총장 할더는 군부 내의 파벌에서 서로 반대 파벌에 속했으므로, 파벌 단위의 경쟁심리 역시 동시에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슈타인은 지난 폴란드 침공 당시의 공훈을 인정받았다는 식으로 38군단 군단장으로 전출[21]되었고, 그의 후임으로는 이런 도박성 짙은 기동전은 꿈도 꾸지 않을 견실하고 신중한 사람이 배치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직전 만슈타인의 어느 참모장교가 38군단 예하의 사단참모로 전출되는 것을 보고 만슈타인은 "앞으로 큰 싸움이 있을 텐데 후방으로 가면 공훈은 언제 세우나?" 하고 농 섞인 위로를 했는데, 겨우 며칠 뒤에 자신이 바로 그 군단 군단장으로 부임하는 바람에 그 참모장교랑 마주보고 데꿀멍했다(...).

3.3. 불완전한 만슈타인 계획의 채택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40년 1월 이후가 되면 반 히틀러파 역시 작전을 최대한 성의 있게 짜서 어떻게든 전쟁부터 이기고 봐야 한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 1940년 1월 10일 루프트바페 소속 참모장교였던 헬무트 라인베르거 소령이 기존의 황색 작전 계획서를 휴대한 채 실수로 벨기에에 불시착해 버리는 불상사가 생겼다. 물론 소령은 계획서를 파기하려 했지만 파기되기 전에 벨기에군에게 체포되었다. 덕분에 기존 작전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함으로서 새로운 작전안의 기획이 불가피해졌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참모총장 할더의 눈에 다시 띈 것이 바로 만슈타인의 작전 초안이었다.

할더 역시 견실하고 신중한 용병을 선호하는 타입이라고는 하나, 이와 같은 기상천외한 작전 자체는 일단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고려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특히 할더와 같은 고급 참모장교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대안이라 해도 일단은 검토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였고, 또한 그 개인적으로도 선호하는 바였다. 바로 그런 이유로 최초 작전안 건의 당시에는 이를 반려했었고, 상황이 단단히 꼬이고 보자 새삼 그 가능성이 높아진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에 만슈타인 역시 히틀러의 보좌관인 슈문트와 친했던 부하 헤닝 폰 트레스코프 대령을 포함한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히틀러에게 직소, 히틀러는 그 본래의 도박사 기질에 딱 맞는 모험적인 작전안을 듣자 혁신적인 작전안에 목말라 하던터라 채택을 기정사실화했다. 마침 할더 역시 이 시점에서 만슈타인 계획으로 프랑스 침공에 임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탓에, 결국 만슈타인 계획은 프랑스 침공 계획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그러나 기획자인 만슈타인은 자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 기획에 더 이상 참가하지 못했고, 작전의 세부 기획과 실행은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 그리고 새로운 주공부대로 부상한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상급대장과 그 휘하에 새로 창설될 작전술 제대로서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 1. 주공을 맡아야 할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은 알아주는 신중파다. 그런 경우 과감한 참모장을 달아주면 적극성을 보강할 수 있었을 텐데, 일단 A집단군이 조공이라는 기존 계획에 따라 인사 이동을 하는 바람에 하필이면 신임 참모장으로 임명된 조텐슈테른은 신중한 사람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즉 집단군 전체가 위에서 내린 임무를 이행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 2. 또 여전히 기갑부대의 작전술 제대 편성은 이론상으로도 제대로 정립된 게 없고, 할더가 아무리 이 계획의 가치를 인지했다 해도 다른 모든 지휘관들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상태에서 웬 기갑이라는 듣보잡 병과가 전쟁을 혼자 다 치르도록 내버려 두기엔 작전술 제대 지휘관으로서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임무형 지휘체계에 따라 자율사고 및 행동에 익숙해진 독일군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 3. 게다가 기갑 부대의 작전적 가치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으나, 야전군 사령부 입장에서는 적어도 군단급 기갑부대는 야전군 작전 행동의 한 국면에서 강력한 전술 예비대로서 운용 가능한 세력임이 이미 입증돼 있었다. 원래대로라며 자기에게 주어져야 할 강력한 기갑 부대가 웬 듣보잡 작전술 제대를 만드느라 어디론가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된다면, 그 지휘관은 날개를 잘린 꼴이 된다. 안 그래도 병력이 부족해 죽겠는데 전장에서 그나마 강력한 부대까지 뺏긴 지휘관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이런저런 문제점들 때문에 결국 할더는 만슈타인이 세운 최초의 계획에서 그다지 큰 진보를 이루지 못한 채, 오히려 부분적으로는 퇴보한 기획안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중에서 가장 큰 퇴보는 바로 기갑 부대의 작전술 제대, 즉 기갑군(Panzerarmee)를 창설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기갑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때까지도 결국 현실화되지 못했고, 1941년 10월에야 처음으로 창설되었다. 일단 기갑 부대를 작전술 차원에서 운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지휘부를 창설하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었으나, 다른 야전군 사령관들의 눈치를 보느라 정식 야전군이 아닌 일종의 편법, 즉 다수의 군단을 예하에 가지고 있으나 야전군은 아닌 특수 목적 집단인 기갑집단(Panzergruppen)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사령관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기갑 부대 관련 경험이 거의 없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기병대장을 앉힐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말 그대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는데, 여기에다가 할더 자신도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 높다고 여겼기 때문에 클라이스트 대장의 제1기갑집단(Panzergruppe 1, 일명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이 처음 계획된 주공에서 필요한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그냥 기갑집단을 해체, 원래 계획대로 각 기갑군단을 야전군에 분산 배치해서 각 야전군의 핵심 기동 예비로 전환 운용한다는 배수진을 치고 말았다. 한 마디로 클라이스트에게 "작전 제대 사령관 타이틀을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제대로 성공시켜라!"라는 강력한 엄포를 놓음과 동시에, 만슈타인 계획의 중요 전제 중 하나인 기갑 부대 단독의 종심 깊은 돌파 및 기동이 실패할 경우에도 일단 전통적인 프로이센식 기동전을 시도할 여지를 남겨두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퇴보는 현실적으로 만슈타인 계획의 가장 큰 위협인 돌파 기갑군 측면에 대한 마지노 선 일대에서의 역습 위협에 대한 대책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는 해결하기 위해선 적극적인 공세밖에는 답이 없었는데, 기갑 부대는 전력을 다해 벨기에의 프랑스군을 포위섬멸해야 했으므로 여기에 돌릴 충분한 기갑 부대가 없었다. 이 때문에 할더의 기갑 부대 종심기동은 취약한 소부대에 의한 특정 거점의 수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불안한 구조가 되고 말았고, 이 문제의 타개는 결국 작전 진행 기간 동안 있었던 몇몇 지휘관의 임기응변과 더불어 어느 용감한 부대의 맹활약을 통해 제한적인 수준으로 이루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부족한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 계획은 1940년 3월 이후가 되면 독일 국방군의 프랑스 침공 계획으로서 확실하게 다져졌고, 이런저런 크고 작은 작전상 마찰 때문에 적지 않은 장애를 겪긴 했지만 결국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군이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하도 프랑스에서 제대로 대박을 친 나머지, 독일의 국가 전략 자체가 꼬여 버리는 결정적인 원인이 돼 버렸다.

4. 연합국의 전략

4.1. 우리는 공격하기 싫어요!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유럽의 인구대국이자 군사강국, 그중에서도 육군 강국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사실상 유럽에 존재하는 열강 중에서 제대로 된 징병제를 유지하는 단 둘뿐인 강대국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하나는 이탈리아였다. 독일도 허울뿐인 징병제는 유지했지만, 보유 가능한 군사력 규모 제한이 너무 커서 실질적으로는 모병제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프랑스의 상비군 규모 역시 방대하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소집 가능한 예비역 병력은 말 그대로 가공할 수준으로,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서 프랑스보다 규모가 큰 육군을 가진 군대는 오로지 인구빨로 밀어붙이는 중국[22]과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드넓은 국토에서 나오는 인력, 그리고 화력, 생산력으로 밀어붙이는 소련뿐이었다.

실제로 프랑스는 1939년 9월 개전 직후 제1차 동원령을 통해 1940년 5월 시점에서 프랑스 본토 및 전 식민지를 통틀어 총 600만에 달하는 대군을, 그것도 최소한 병사의 기본 훈련까지는 다 끝난 상태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시기 독일은 프랑스보다 인구가 훨씬 많았음에도 1차대전 막바지에 참전했던 50대 초반~중반 아저씨까지 100만 단위로 소집했다. 문제는 조만간 손자가 태어날 배나온 아저씨가 1917~1918년에 군복무를 1년 정도 했다는 이유로 이병이나 일병, 잘해야 상병으로 소집된다고 생각해 보라. 장교도 아니고 병사, 그것도 일선에서 헉헉대며 뛰어야 할 소총수로 말이다. 당연하게도 숫자에 비해 전력이 되기 힘들었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무리수를 동원하고도 겨우 500만을 확보했고, 그나마 최소한의 훈련이라도 거친 병력은 300만도 채 되지 않는 병력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대독 전선의 주력을 맡을 군대는 누가 뭐래도 프랑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인에게는 잊고 싶은 악몽이 있었다. 바로 제1차 세계 대전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프랑스는 서부전선의 실질적인 주력이었고, 그만큼 많은 희생을 치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는 징집적령기에 있는 18~27세 남성의 27%가 전사했고 부상자를 합치면 이보다 더 높은 수치가 희생되었다. 이로 인한 인구 손실은 사실상 복구 불가능한 규모였다. 더구나 프랑스는 산업혁명 이후 타국에비해 인구증가율이 낮은 나라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에서 프랑스는 오히려 제1차 세계 대전 때보다 소집 가능한 인구가 더 줄어든 상황이었다. 이런 추세는 사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고, 그에 비해 전통적인 프랑스의 가상적국 독일의 인구는 점점 늘어만 갔다. 비록 경제적 혼란과 베르사유 조약의 제약으로 독일의 군사력은 여전히 무시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독일의 잠재력은 이미 192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프랑스를 거의 압도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프랑스는 그렇게 생각했다.[23][24]

그리고 이 문제 때문에 프랑스는 대독 포위망의 구성에 전력을 다했다. 프랑스 혼자서 독일과 장기전을 벌여 이기기는 어렵고, 단기전으로 결판을 내려면 공격이 불가피한데 이는 막대한 희생을 각오해야 하므로 이 역시 감수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독일이 딴맘을 못 먹도록 주변국 모두와 힘을 합쳐 독일을 포위하면 어떨까? 그것이 프랑스의 초기 대독 전략이었고, 이런 전략에 따라 프랑스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독일과 접경하고 있는 중부 및 동부 유럽의 약소국들과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목표는 독일이었고, 독일이 어느 한 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면 나머지 나라들은 다들 힘을 합쳐 독일을 박살낸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런 공수동맹 관계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독일이 어느 한 나라를 공격할 경우, 나머지 나라들은 독일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자기들이 공격을 하기 싫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 동맹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가 바란 것은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면 체코와 폴란드가 독일의 뒤통수를 쳐주는 것이었지, 독일이 폴란드나 체코를 공격하면 프랑스가 독일의 뒤통수를 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 다른 동맹국이 프랑스를 위해 희생하기만을 바란 것보다는 그런 위협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독일이 알아서 쫄기를 기대했던 것이지만, 만약 독일이 똘끼를 충만시키면 그때부터는 답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벌어진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 합병이었고, 이 두 번 모두 프랑스는 결국 중립국과 동맹국을 배신하고 말았다. 이 두 번의 배신은 결국 더 이상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없고, 아무런 친구도 남지 않은 채 프랑스 혼자 대독 전선을 떠맡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위협으로 돌아왔고, 결국 프랑스는 폴란드만은 저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 벌어진 것이 1939년 9월의 자르 침공과 이후 계속된 가짜 전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프랑스는 제대로된 공격을 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독일이 군사력을 재건해야 하는 약체 상태이고 경제공황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과 프랑스 역시 경제적으로 혼란스럽다는 문제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군사력의 현대화를 등한시한 상태였다. 여기에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훈을 거쳐 화력만 충분하다면 방어가 공격을 쉽게 압도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결국 프랑스는 1939년 자르 침공을 중간에 그만뒀던 것이다. 특히 1935년 군비재건 선언 이후 독일군의 신속한 재건을 본 프랑스는 독일의 잠재력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고 여겼고, 실은 내실이 없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독일이 실은 자기들과 대등 이상의 군사력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그런 적을 상대로 섣부른 공격에 나섰다가는 자칫 프랑스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안 그래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는 섣부른 공격 때문에 벨기에 방면을 텅 비웠고, 이 때문에 하마터면 개전 후 단 6주만에 전쟁에서 질 뻔했었다. 그래서 프랑스는 독일의 주공 방향이 확실해지면 그쪽을 먼저 틀어막고, 적의 공격력을 최대한 받아낸 다음 약체화된 독일군을 상대로 조심스런 공격을 가한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이런 전략에 맞는 아주 중요한 장점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마지노 선이었다. 마지노 선의 존재는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주력군을 프랑스-독일 접경이 아니라 북쪽, 독일군의 우회돌파 코스로 예상되던 벨기에 방면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만약 독일군이 마지노 선으로 정면 공격을 한다면 그거야말로 기대할 일이고, 우회로를 잡아 공격해 온다 해도 적을 확실히 틀어막을 수 있는 충분한 예비 병력이 존재했던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선 전체를 마지노 선으로 차단한 데 그치지 않고, 1차 마지노 선 공사가 끝난 뒤 추가적인 확장 공사를 거쳐 1940년 현재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선 일대에서도 비교적 낮은 밀도나마 요새선의 구축이 진행 중인 상태였다. 이는 벨기에와 프랑스 사이 국경선은 본래 방어 대상이 아니었다. 이 선에 요새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벨기에가 독일의 침공을 받는다 해도 보호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감안하고서도 이루어진 조치다. 한마디로 독일군이 설사 아르덴을 포함한 중부전선의 돌파를 시도한다 해도, 최강의 수준은 아니긴 해도 비교적 잘 구축된 요새선을 한 번 뚫긴 해야 하는, 그것도 독-프 국경의 마지노 선과 달리 적의 포화를 무릅쓰고 마스(Maas) 강을 도하한 다음 바로 강변에 줄줄이 늘어선 콘크리트 벙커로 육박하는 말도 안 되는 강행돌파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4.2. 딜(Dyle) 계획

"지휘부에서는 적을 찾아내 쳐부수라는 명령이 내려왔단다. 아무리 바보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순 없었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었어. 하지만 군대란 원래 그런 곳이지"

"근데 아빠는 왜 명령에 따랐죠? 영웅이 되고 싶었나요, 아니면 친구들에게 자랑하려고?"

"그냥 입다물어, 너도 해보면 알거야."

"해보다뇨?"

"군복무 말야!"

(르네 타르디, 프랑스 육군 중사, 호치키스 H39 전차장[25])
프랑스는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할 경우 어디에서 공격을 감행할 것인가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일단 독-프 국경선은 이미 마지노 선의 1차 구축이 끝나 있으므로, 아직 충분히 많은 병력을 절약하는 효과는 기대할 수 없지만 일정한 병력만 배치해 두어도 독일의 공격을 확실히 저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게다가 실제로는 당시 프랑스군이 프랑스 본토에 두고 있던 병력의 1/3에 해당하는 36개 사단을 배치했으니 마지노 선에 한해서 병력과 장비 부족 문제는 없었다. 따라서 독일은 이런 강력한 방어선에 정면 공격을 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오히려 해 오면 고맙겠다는 것이 프랑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지노 선 바로 북쪽의 룩셈부르크 및 벨기에 남부 방면 역시 프랑스군은 방어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우리라 여겼다. 바로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 일대에 흐르는 마스 강 중류를 방어선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고,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는 지형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기동부대의 신속한 전개가 어려운 아르덴 삼림지대를 돌파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르덴 삼림지대의 존재는 공격부대가 충분한 밀도로 전개하는 것을 방해하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아르덴 삼림지대를 주공으로 삼으면 그만큼 방어하기도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마스 강변에도 마지노 선의 연장선이랄 수 있는 장갑벙커가 다수 설치되고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도 감안되었다. 그리고 이런 점을 독일군 상층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슈타인의 최초 계획이 나왔을때 할더가 '이색히 돌았구나'라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만슈타인이 계획과 함께 바로 묻힌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군상층부는 보불전쟁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지리적 유불리와 유사시 침공루트에 대해 몇십년동안 준비해왔기 때문에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벨기에 중북부 및 네덜란드에 이르는 넓은 구간이었다. 이 지역에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 사이에 충분히 넓은 자연장애물로서의 하천이 없었고, 아울러 지형 역시 매우 평탄해서 대군을 일시에 투입할 만한 조건이 확보되는 곳이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 구간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주공으로 삼았던 바로 그 방향이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벨기에 북부를 거쳐 주공을 가해 오리라고 여겼다. 이 양상에 대응하여 프랑스가 설정한 방어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그 첫번째는 벨기에/네덜란드 일대에 진입하지 않고, 됭케르크 일대에서 마지노 선에 이르는 프랑스 국경선 전체를 감싸는 양상이었지만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벨기에군 단독으로 독일 주공의 저지를 맡겼다가 벨기에군 전체가 사실상 연합군 전열에서 탈락하다시피하는 사태를 불렀던 전훈을 무시하는 행동이었기에 사실상 실행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2차대전 개전 이후 프랑스의 최종 목적은 영불해협에서 알프스까지 끊기지 않는, 전체적으로 독일의 강력한 공격을 격퇴할 수 있는 튼튼한 방어선의 구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모리스 가믈랭은 초기안, 즉 프랑스-벨기에 사이의 국경선을 방어한다는 방어지침 대신 프랑스군 주력을 벨기에로 진입시켜 벨기에 안, 정확하게는 마스 강과 연결된 다른 하천을 방어선으로 삼아 대략 22개 사단으로 추산되는 벨기에군과 힘을 합쳐 독일의 주공을 격퇴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벨기에 영내에 방어선을 설정하고 독일군의 침공을 저지한다는 목표 하에 제시된 방어선은 크게 두 개였다. 그 첫번째는 투르네-에스코(Escaut) 강-앤트워프로 이어지는 것이었고, 이것을 에스코 계획 혹은 플랜 E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두번째 안은 나뮈르-딜(Dyle) 강-앤트워프를 잇는 것이었고, 이것은 딜 계획 혹은 플랜 D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개전 초기 프랑스군 총사령관 겸 연합군 총사령관이던 가믈랭은 본래 에스코 강에 연한 방어진지를 점령하는 에스코 계획을 실행할 예정이었고, 딜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의도는 없었다.[26] 하지만 폴란드 전역 이후 독일군과의 군사적 긴장 상태가 길어지고 벨기에군이 성공적으로 방어진지를 점령하면서 가믈랭은 딜 계획을 통한 방어선의 연장이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판단을 내렸고, 최종적으로 연합군은 11월 9일 열린 회의를 통해 딜 계획을 확정지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벨기에 중부에서 발원해서 앤트워프로 이어지는 하천인 딜 강을 따라 프랑스 북부에 전개된 주력부대를 신속 전개, 이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브뤼셀 전면, 벨기에 영토의 거의 중앙을 가르는 방어선을 형성하여 독일군을 막아서기로 결심했다. 또한 벨기에는 원래 중립국이었음에도 1914년에 독일군에게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기에, 프랑스의 이런 작전계획을 인정했으며, 여전히 중립을 고수하고 있어 독일의 침공이 없이는 준 동맹국인 프랑스와 영국군의 자국 영토 진입을 거부하는 입장이던 벨기에군 역시 프랑스군의 방어 효율을 높이기 위한 각종 방어시설의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실 벨기에로서는 이런 프랑스의 작전계획에 협력하지 않으면 1차 세계 대전 때처럼 최후의 항전거점으로 요새방어선이 구축된 앤트워프로 전군을 철수시켜 독일군의 우회기동로를 열어주면서 자국 영토의 70% 이상을 독일군의 점령지로 내줄 수밖에 없었으므로 사실상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당장 독일군은 1차 세계 대전 때 벨기에 도시에 들어와서 사소한 저항이 있었거나 있었다는 핑계를 대고 도시에 불을 지르고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발포하는 일을 숱하게 저질렀다. 이 문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날렸으며, 사실상 2차 세계 대전에서 있었던 독일군의 점령지 만행의 서곡이랄 만했다. 희생자는 2차 세계 대전의 그것에 비해 적었지만, 강도 자체는 인종차별 문제(즉, 유대인 문제)를 제외하면 절대 낮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벨기에군으로서는 죽기살기로 싸워서 독일군을 격퇴한다는 옵션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군은 벨기에 한가운데의 딜 방어선에서 독일군을 맞서 싸운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그리고 이 방어선을 점령함으로서 프랑스군은 중요한 이점을 세 가지 얻었다.
  • 1. 딜 강을 따라 전개하는 방어선은 에스코 계획에 따른 방어선/프랑스-벨기에 국경보다 훨씬 짧으므로[27], 그만큼 많은 병력을 좁은 전면에 집중해서 방어력을 높일 수 있다.
  • 2. 벨기에가 완충지대가 되기 때문에 독일군에 의한 북프랑스의 주요 공업지대 공격 가능성이 극히 낮아졌다. 현대전은 물량전이므로 북프랑스의 보호는 프랑스군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물량을 확실히 지켜낼 수 있다.
  • 3. 만약 벨기에에서 독일의 공격을 받아내고 역습을 실시할 수 있게 된다면, 벨기에에서 네덜란드를 거쳐 전진하면 바로 독일의 주요 공업지대인 루르를 공격할 수 있게 된다. 현대전은 물량전이므로 루르 공격은 독일의 물량을 결정적으로 빼앗을 수 있다.

이어서 이런 딜 계획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바로 1940년 1월 10일에 발생한 라인베르거 소령 사건으로, 이때 벨기에군은 독일군이 벨기에 영내로 2개의 주공을 투입하는 작전계획서 전문을 입수했다. 그리고 이 주공 중에서도 특히 무게가 실린 것이 바로 딜 방어선으로 가해지는 두 개의 강력한 기갑부대 제파였다. 이 두 개의 제파는 당시 독일군이 가지고 있었던 10개 기갑사단 중 9개가 투입되며,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므로, 사실상 이 사단도 네덜란드 제압이 끝나면 딜 방어선에 투입된다고 봐야 했으므로, 딜 방어선의 사전 구축 계획은 매우 시의적절한 조치가 되었다. 또한 강력한 독일군 기갑부대의 신속한 돌파에 맞서기 위해서는 프랑스군 역시 강력한 기갑부대를 최대한 빨리 벨기에 영내로 진입시켜 그들의 딜 방어선 선착을 저지하고, 서둘러 후속 부대를 딜 방어선에 투입해서 확실한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군은 딜 방어선보다 더 동쪽으로 프랑스군이 보유한 유일한 군단급 기계화부대인 르네 프리우(Rene Prioux)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군단(Corps de Cavalerie)을 돌입시켜 강력한 독일군 기갑부대에 맞선 지연전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이때 노출된 독일군 작전에서 네덜란드 역시 독일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점, 독일이 주력을 벨기에 침공에 투입하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예상보다 오래 버틸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는 점에 착안한 프랑스군은 딜 방어선의 북쪽 끝에서 네덜란드까지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른바 브레다(Breda) 계획이었고, 이를 위해 프랑스군은 북동부전선 전체의 전략예비대로서 보유하고 있던 야전군인 제 7군을 벨기에 북부로 투입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프랑스는 체코와 폴란드의 포기 때문에 벨기에로부터 확실한 믿음을 사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벨기에의 신뢰를 확보하자면 한층 더욱 적극적으로 대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이것이 브레다 계획의 수립 배경이었다.

원래 딜 방어선은 그다지 길지 않은 방어선이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원래 벨기에가 가진 22개 사단에 프랑스군 10개 사단과 영국군 5개 사단을 투입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딜 방어선에서 연결되는 새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20개 사단이나 되는 병력의 추가 투입을 결정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프랑스군이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예비병력이었다. 물론 만약에 대비해서 이런 기동은 독일군의 주공이 확실히 벨기에로 향할 때에만 실시하도록 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와 벨기에군, 네덜란드군이 딜-브레다 선에 전개된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벨기에 중앙에서 가해지고 있는 독일군의 주공을 뿌리째 잘라버리는 결정적인 수단으로 써먹거나, 심지어 상당한 전력을 북쪽으로 돌려서 독일의 루르를 공격함으로서 독일의 산업생산을 완전히 박살내기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독일이 전혀 다른 작전으로 프랑스를 공격한다면, 그때 프랑스군 최고사령관은 말 그대로 대사건의 방관자로 전락하기 십상이라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때 프랑스군은, 사전에 잘 계획된 공격 계획에 따라 공격을 감행했다가 완전 쫄딱 망할 뻔했던 1914년의 재앙 이후 사전 계획 수립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하나로만 생각하고, 진짜 핵심적인 작전은 전쟁이 시작되고 적의 의도가 확실해지면 그때 가서 실시하는 것으로 교리를 정립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교리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정반대로 돌아갔던 것이다.[28]

더군다나 프랑스군이 지닌 약점은 사령부 체계에도 있었다. 전군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과 북동부군 사령관이자 전군 부사령관인 알퐁스 조르주 간에 임무분담을 비롯한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은 것이다. 당장 가믈랭이 자신의 의견을 조르주와 조율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약 75km를 차로 달려서 위치한 조르주의 전용지휘소로 가야만 했다. 조르주가 주재하는 북동부전선 사령부가 가믈랭의 사령부에서 약 56km가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가믈랭과 조르주 간의 의견조율을 담당하여야 할 북동부전선 참모들이 소재한 곳이 총사령부와 북동부전선 사령부의 중간 지점이었다. 게다가 가믈랭의 사령부는 무선통신이나 텔레타이프 설비도 없어서 전선에서의 상황 전파는 오토바이를 이용한 전령을 이용하여 통상 48시간이 소요되는 상태였다. 심지어 고대로부터 사용된 연락수단인 문서 전달용 비둘기 한 마리도 없었다. 참다 못해 최소한 전신기 한 대 정도는 설치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으나, 이에 대한 답은 "군사 명령을 하달하는 것을 경마경기 결과를 전달하는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답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나중에 가믈랭이 해임되고 새로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막심 베강이 선택한 지휘소에는 전화기딱 한 대 있었는데 12시부터 2시까지 사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접 도시간 전화를 연결하는 교환수들이 점심시간을 지켜줄 것을 강력하기 요구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답이 없다(...).[29] 총사령부에 직속하는 참모 조직도 보유하지 못한 가믈랭 입장에서는,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더 줄어든 셈이다.

4.3. 영국의 입장

영국은 본래 1920년대에는 독일에 매우 동정적인 입장이어서, 프랑스의 대독 경계심을 지나친 것이라고 비난하곤 했다. 이 문제는 결국 프랑스가 대독 전략에서 수세적 입장, 즉 앞에서 언급된 다른 나라들과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맹렬한 동맹관계 추구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 역시 프랑스의 이 전략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대독 문제에서 비교적 유화적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여기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이 동맹관계의 보증인이 됐다. 한 마디로 친구 빚에 대해 보증을 선 셈이었는데, 이렇게 진 빚을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고스란히 부도를 낸 이상, 영국은 이제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소심한 연대보증인이라면 이 단계에서 어떻게든 연대보증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되기 십상이었고, 영국인들 역시 실제로 연대보증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긴 했다. 하물며 빚쟁이인 프랑스가 1939년 2월 체코의 독일 완전 합병 상황을 가리켜 만약 뮌헨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피만 흘리고 독일에게 작살날 뻔했다~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으므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영국은 세계 최강국 중 하나이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그런 영국에게 있어서 그 동안 불쌍하다고 몇 번인가 편도 들어준 적 있는 독일이 난데없이 영국을 자칫 연대보증으로 한방 먹일 분위기를 만드니 열을 받을 수 밖에... 그런 와중에 1938년의 합의와는 달리 체코의 완전 합병이 이뤄지자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이놈들이 약속을 어겼어!"라면서 일단 국민적으로 격분했다. 이 시점에선 아무리 정부가 유화정책을 추구하고 싶어도 다음 총선에서 지기 싫으면 일단 반독 정책 자체는 추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영국은 폴란드에서 전쟁이 터지자 프랑스를 강력하게 압박해서 진짜로 독일하고 한판 붙는 거다라고 선언하게 만들었다. 기왕 빚을 갚을 거라면 연대보증인 혼자 덤터기를 쓰는 것보단 둘이 힘을 합쳐서 어떻게든 갚아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의 상황은 영국이 프랑스에 질질 끌려간 경향도 없지 않았으므로, 일을 여기까지 커지게 만든 빚은 톡톡이 받아내야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덤으로 독일은 영국이 보기에 프랑스 없이 혼자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문제는 영국이 해군은 강력하고 돈은 많지만 육군은 약하다는 데 있었다. 영국군은 전통적으로 모병제에 기반하는 작은 군대였다. 따라서 프랑스처럼 강력하고 거대한 육군을 단기간에 확보하기 어려웠고, 그에 반해 독일은 이미 강력한 육군과 공군을 확보하고 있다고 예상했다. 따라서 현재 상태에서 전쟁의 결정적 향배는 영국이 얼마나 더 많은 육군과 공군을 유럽에 보낼 수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나리라고 생각했다. 이에 영국은 서둘러 본토에서만 200만에 달하는 대군을 소집, 이를 준비시키기 시작했다. 영연방 국가들까지 하면 최종적으로 소집될 병력은 약 500만 이상이었으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언젠가는 프랑스군과 대등한 규모에 더 강력한 육군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발상을 한 이유는 아직까지는 대영제국의 위상이 살아있긴 해서 영국은 돈과 자원이 많았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후방에서 군을 육성할 수 있었으므로, 프랑스군이 당면한 전쟁에서 돈과 병력을 소모하는 동안 충분히 현대적이고 거대한 군대를 구축, 유럽에 파견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전쟁은 시작됐고,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확실한 수적 우위에 서 있지 못하다고 보였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때도 마찬가지였고, 이 때문에 영국은 1차 세계대전 당시 3개 군단으로 구성된 영국 원정군(BEF)을 개전 직후 프랑스로 보내 프랑스군의 지휘 하에 부족한 프랑스군의 병력을 보충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당연히 영국군은 이번에도 최소한 개전 초기에는 같은 일을 해서 프랑스가 자국을 지켜낼 수 있도록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을 두어 대군을 건설, 프랑스와 함께 독일의 침략자 정권을 파멸시킨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는 프랑스군의 수비 지향 전략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보낼 수 있는 병력은 한정돼 있었다. 결국 영국군은 1차 세계대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규모인 10개 사단으로 구성된 BEF를 유럽으로 보내 프랑스군의 좌익에 배치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이 10개 사단은 사실상 당시 영국군이 가지고 있었던 정규군의 절반 이상이자, 제대로 무장돼 있고 훈련도 마친 병력의 전부였다. 그나마 2개 사단은 아직 완편이 아닌 상태였다. 만약 이들이 사라지고 나면 영국은 사실상 육군을 다시 무에서부터 건설해야 했다. 같은 문제는 1차 세계대전 때도 있었고, 이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의 BEF는 군을 보전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행동하다가 동맹군에게 불신을 사는 경험을 했다. 당장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작전계획상으로 일관되게 프랑스 제5군의 측면을 엄호해야 했지만, 영국군은 결국 1914년 9월 마른 전투 때까지 프랑스군에 대해 충분한 엄호를 제공하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했다. 사실 그때 영국군이 프랑스군처럼 적극적으로 싸웠다면 더 일찍 프랑스가 망했겠지만, 그래도 영국이 자기 군의 안전을 도모하다가 동맹의 신의를 저버릴 뻔했다는 사실까지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의 BEF는 1차 세계대전 때에 비해 적극적으로 주어진 임무를 이행하기로 결정했고, 프랑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2차 세계대전 때의 영국군은 1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 선진적이고 잘 구성된 지휘체계 및 잘 무장된 육군을 유럽에 투입해서 적극적으로 독일군에 맞섰다. 그러나 아직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프랑스군의 일원으로서 프랑스가 구축한 전선의 수비에 기여하는 1개 야전군으로서만 활동할 수 있었다.

한편, 영국 공군은 당시 독일을 제외하면 유럽에서도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공군이었고, 또한 유럽에서 전략폭격을 주요 교리로 하는 제대로 된 전략공군을 가진 유일한 공군이었다. 이에 영국은 독일에 대한 전략폭격을 수시로 실시, 독일의 전력 강화를 지연한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이에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몇 차례 산발적인 공습은 있었으나 전단지 살포 이상의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활동은 거의 없었다.

연합국은 이런 전략적 상황판단과 결정 하에서 1940년 5월 10일을 맞이했다.

5. 양측의 전력과 그 배치

5.1. 독일군 편제

프랑스 침공/독일군 편제 문서 참조.

5.2. 연합군 편제

프랑스 침공/연합군 편제 문서 참조.

6. 진행 과정

프랑스 침공/진행 과정 문서 참조.

7.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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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도시의 함락[30]
The fall of the city of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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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걸려 있는 나치 독일의 깃발들.
"저는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적에게 요청했습니다. 군인으로써 이런 가슴 아픈 결정을 내린 것은 군의 상황이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필리프 페탱, 항복할 당시 연설에서
독일 방송은 항복 연설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라디오로 내보냈고 이 항복 연설을 들은 전 독일인들과 독일 병사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모스크바로부터 스탈린이 보낸 축하 전보를 받았다.
파리에서 행진을 벌이는 독일군과 항복 조약 체결 장면.[31]
독일 주간뉴스 1940년 6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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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 신임 프랑스 수상 필리프 페탱은 독일에게 휴전을 제의했고, 6월 22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 협정 체결 직전인 21일 뒤늦게 이탈리아군이 참전하긴 했지만[32], 역시나 신나게 얻어맞고 르네 앙리 올리 대장이 이끄는 프랑스 알프스군에게 패하며 극히 작은 영토 확장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6월 24일 로마에서 이탈리아-프랑스 사이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6월 25일 새벽 1시 35분을 기해 최종적으로 정전이 이루어지며, 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0년 6월 22일에 히틀러는 파리 근교에 도착했고 프랑스에 역사적인 수치를 안겨줄 장면이 연출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게 독일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당시 항복문서가 체결된 열차를 가지고 왔다. 그의 복수는 완벽했다. 프랑스에서는 제4 집단군 대장인 샤를 욍치체르 장군이 대표로 왔고, 독일 통역관이 프랑스가 이유없이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는 내용의 비판 내용을 이야기했고, 이 비판이 끝난 직후 히틀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열차에서 내렸다. 프랑스 대표단에게는 휴전 조건이 제시되었는데 그 중 한 가지 조건은 프랑스로 도피해온 반나치 독일인들을 모두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욍치제르가 협상을 해보려 시도했지만 독일은 거절했고 그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협상은 끝나버렸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의 항복 사절단이 타고 온 열차의 객차를 프랑스에서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프랑스의 항복 조인식을 이 객차 안에서 진행했다. 조인식이 끝난 후 히틀러는 이 열차를 베를린으로 가져갔는데, 이 열차는 독일이 점점 패망해가기 시작하자 히틀러가 게슈타포에게 명령하여 이 열차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버렸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의 승리를 상징했던 기념물들은 모두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 히틀러와 병사들 또한 막 점령한 마지노 선을 보며 프랑스를 비웃었다. 프랑스 침공에서 전리품으로 탱크 2천대, 대포 5천문, 소총 30만 정과 4백만 발에 달하는 총알을 얻게 되었고 또한 프랑스군에게 제공되려고 했던 속옷들은 독일이 나중에 벌이게 될 전투를 위해서 전부 독일군이 가져가 버렸다. 프랑스군의 총기들은 압류당하여 모두 독일군의 손에 쥐어졌으며 얼마전까지 조국 프랑스를 지키던 르노 FT-17, 소뮤아 S-35등의 기갑차량들과 기갑열차, 대포들은 하켄크로이츠가 흉하게 칠해진 채 나치의 침략을 위한 무기로 쓰여졌다.[33] 프랑스의 모든 공장과 항구, 그리고 모든 프랑스의 재산 역시 독일이 당연히 얻어야 할 전리품이 되었고, 전쟁을 선포한 것 또한 프랑스였으니 하루에 무려 1억 달러에 해당하는 독일의 점령비용을 프랑스가 부담할 몫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수도를 비시로 하는 비시 프랑스가 태어났는데 수도가 비시로 정해진 이유에는 비시에 호텔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7월 초에 필리프 페탱 총리는 남은 정부인사들을 싹싹 끌어모아서 그들을 이끌고 함께 비시의 호텔로 들어갔고 그 비시 호텔의 분위기는 매우 절망적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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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점령하고 돌아온 히틀러

이 침공으로 인해 독일 전체가 히틀러에 엄청나게 열광했다.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해 버리자 독일의 장군들은 히틀러에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독일 국민들에게 히틀러는 마치 황제 같은 존재가 되어서, 또는 그 이상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누구도 히틀러 말에 함부로 반박 하지 못 했을 정도였고, 히틀러는 나폴레옹에 비교할 만한 위대한 전쟁 지도자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1940년 7월 9일 히틀러와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돌아왔을 때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에게 꽃을 뿌리면서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졌다.

동시에 이 결과로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서유럽에서 독일에 맞설만한 유일한 육군 강국이라는 프랑스의 허무한 패배는 승자인 독일과 동맹국인 영국은 물론 다른 강대국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독일군은 무적의 군대처럼 보였고 그 누구도 독일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프랑스는 공군과 육군의 불협화음과 구태의연한 전술로 독일군에게 각개격파당했고, 일부만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통해 영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가 무너지면서 사실상 유럽에서 고립되어 홀로 독일과 싸우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후 프랑스는 둘로 나뉘어 북부는 독일의 군정부인 프랑스 군정청이 수립되었고, 남부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했던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프랑스라는 독일의 괴뢰 정부의 지배를 받았고 프랑스 식민지 대부분이 이들 비시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영국은 자국 수호를 위해 프랑스의 식민지들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군함들을 기습해 모두 철저하게 침몰시켰다. 이렇게 그나마 남아있던 해군을 모두 잃어버린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할 능력과 여기서 얻어낼 수 있는 이득도 잃어버려 전후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게 된다. 거기에 독일이 전쟁을 벌이면서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점령지인 프랑스에도 많은 부담을 줬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의 형편도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체면도 구기고 국가 자체도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에게 있어서 제2차 세계 대전레지스탕스자유 프랑스가 없었다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흑역사가 되었다. 특히 프랑스군은 보불전쟁의 패배로 위태위태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승리로 그나마 회복한 '강군'의 이미지가 이 결과로 '헤드샷'을 맞아버렸다. 이로 인해 생겨버린 '당나라 군대 프랑스군'이란 편견은 아직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겁먹어 바로 항복해버린 불명예스러운 국가라는 딱지도 붙어버렸다. 그러나 프랑스 침공 직후 독일의 낫질작전으로 프랑스의 정규군의 대부분이 사실상 전멸해버렸기 때문에, 제아무리 프랑스가 끝까지 저항했다고 한 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수 개월 늦출 뿐 독일의 승리는 기정사실이었다. 오히려 폴란드 침공 당시 끝까지 폴란드인들이 끝까지 바르샤바에서 저항하자 온갖 폭격을 퍼부어 도시의 80%를 파괴해버린 독일의 전례를 생각해 보면, 같은 일이 파리에서 일어났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아이러니하지만 프랑스의 빠른 항복이 오히려 파리가 오늘날까지 프랑스 문화의 중심지로서 '빛의 도시'라는 명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 셈이다.

이로서 1년도 안 돼서 끝날 것이라 여겨졌던 서유럽 내의 분쟁은 참혹한 세계 대전이 된다. 영국과 프랑스가 방어 대신 공세를 펼쳤다면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그 정도로 전간기부터 영국과 프랑스도 엄청난 삽질을 해댄 것이다. 또한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일본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손쉽게 점령해버리고[34] 프랑스가 점령당해 영국이 유럽에서 홀로 고립되자 대다수가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35] 나머지 동남아시아 지역을 꿀꺽 삼키려 하고 이는 태평양 전쟁의 원인이 된다.

한편 독소전쟁의 시작인 바르바로사 작전은 낫질 작전과 매우 닮아서 규모와 몇몇 세세한 차이점만 빼면 본질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소련은 프랑스보다 훨씬 큰 영토를 지니고 있었고, 국력도 프랑스보다 체급이 컸으며 무엇보다 초전에의 숱한 패배에 후퇴를 계속 거듭하면서도 끝까지 맞서 싸웠다. 사실 프랑스도 소련보다는 작지만 항복할 당시에도 독일에게 점령당한 영토는 고작 5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던데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전을 펼만한 충분히 큰 공간이 있었고[36] 물자도 풍부했으나 초전에의 타격으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

프랑스가 전의를 상실한 큰 이유중 하나는 수도가 조기에 적의 수중에 넘어가 버린 탓이 컸다.[37] 파리 및 근교에 살다가 순식간에 독일의 수중에 넘어간 시민들은 매우 많았으며, 이를 지킬 자국군대의 붕괴는 프랑스 정부와 국민으로 하여금 쉽게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프랑스롤 도와줄 영국은 자국 방어에 급급한 상황으로 변해버린 데다가, 그 짧은 시간 안에 그 외 나라의 지원을 받기가 요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프랑스와는 달랐다. 수도는 독일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때문에 정부가 쉽게 피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그 숱한 희생에도 빈 자리를 메꿀 자원자들과 버틸 시간은 많았다. 결국 프랑스때와 달리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은 실패했으니, 이는 결국 두 나라의 여러 요건이 싸울 의지를 가른 결과라고 할수 있다.


[1] 좌측의 인물은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 우측의 인물은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이다.[2] 히틀러가 에펠탑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려 했을 때 프랑스측에서 몰래 전기를 끊어놓는 바람에 아돌프 히틀러는 죽을 때까지 에펠탑의 꼭대기에 올라가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계단타고 올라갈 생각은 못했던걸까 저때 히틀러 나이가 51세였다[3] 영국 원정군 사령관[4] 반면 샤를 드 골은 "전투에서 졌을 뿐, 전쟁에서는 아직 지지 않았다"고 말하며 영국으로 탈출해 자유 프랑스 항전을 지도했고, 4년 후 파리 탈환을 맞이했다.[5] 당시 나치 독일의 작전기는 2천대가 넘었다.[6] 하지만 당시 폴란드 정치도 독일이나 소련까지는 안되겠지만 마찬가지의 군국주의-전체주의 국가였다. 특히 1938년의 체코 분할에 나치 독일과 협력하기도 하는 등의 짓거리를 하기도 했고, 외교는 더 막장이라 1918년 건국 이후 분쟁을 벌이지 않은 주변 국가가 없을 정도였다.[7] 당시 폴란드의 국가수반인 유제프 피우스트스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한 독재자로 죽을 때까지 권력을 휘둘렀으며, 몐주모제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중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당시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연하게도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는 최악이었지만, 폴란드 국민들은 그런 그를 지지했다.[8] 소련이 마련한 회담에서 영국-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나 열차가 아닌 배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와서 관광으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고 한다.[9] 두망크 장군은 프랑스군 서열 40위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최측근이다.[10] 당시 소련과 독일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다.[11] 물론 전통적으로 영국은 섬나라기 때문에 항상 대륙의 전쟁에 참여하면 원정을 떠나는 셈이 되므로 보급 등 다양한 이유로 육군 병력은 비슷한 국력의 유럽 본토국들보다 더 적긴 했었다. 하지만 세계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영국군이 완전히 박살나면서 이때는 진짜 그나마 나치때문에 키운 것 마저 이게 다였다. 물론 이마저도 밑에서 나오겠지만 군인들 몸뚱이만 빼고 덩케르크에서 다 박살난 관계로 영국 육군은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었다.[12] 영국은 실제로는 10개 사단을 파견했지만, 그래도 프랑스/독일에 비하면 매우 적은 규모다. 하여튼 스탈린의 영국에 대한 의심은 전후까지 계속된다. 당장 위의 보로실로프도 영국 스파이 드립을 들은 적이 있다.[13] 뭐 딱히 틀린 의심은 아니었던게, 종전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대독전의 못해도 3분의 2를 수행하고 독일 영내에서 놀고있던 소련 육군을 추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이 되는 중부 유럽 국가들의 영토 밖으로까지 쫓아낼 계획으로 언싱커블 작전을 준비했다. 물론 그렇다고 대전기 말에 나치 독일에서 '우리 싸우지 말고 같이 손잡고 소련놈들 물리치자!' 이러는 걸 영국이 받아주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 후 그가 수상직에서 나오고 영국은 그 당시 최첨단 군사기술이던 제트엔진을 거의 꽁으로 넘겨주는 또라이짓을 하기는 하지만...[14] 실제로 히틀러는 매체의 이미지처럼 고함치고 날뛰는 성격이 아니라 남들도 못할 만큼 차분했고 신중했다고 한다.[15] 이 당시의 상황은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의 확장팩 중 하나인 Darkest Hour의 1933년 시나리오에서 독일군 플레이를 해 보면 실감할 수 있는데, 국방군 재건 이벤트로 막대한 수의 사단이 생기기는 하나 제대로 완편/현대화된 사단이 없다. 이를 재건하는 데만도 긴 시간이 걸린다.[16] 출처: Plotting Hitler's Death: the Story of German Resistance[17] 이때 독일은 있는 군대를 모조리 올인해서 2~3개 집단군을 만들어야 한다.[18] Fall이란 말은 독일어로 Case라는 뜻. 따라서 원래는 황색 상황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직역이지만 대개 황색 작전, 청색 작전(스탈린그라드 전투), 백색 작전(폴란드 침공), 녹색 작전(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 등으로 번역되곤 한다. 영어권에서는 Case와 Operation을 구분해서 쓰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잘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작전이라고 부르는 데서 생기는 해프닝. 독일에서는 Fall과 Unternehmen으로 분류한다. 일반적으로 Fall이 좀더 큰 단위로 쓰인다.[19] 사실 마지노 선의 건설이 바로 이런 상황의 유도를 위한 것이었다. 마지노 선은 단순한 바보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지노 선이 없는 상태에서라면 독일군은 이런 뻔한 정면결전이 아닌 다른 방향의 기동전을 시도할 여지가 비교적 많았다.[20] 이와 같이 종심이 깊고 크게 호를 그리는 우회 기동의 형태가 낫 같고, 덤으로 낫으로 단숨에 모든 풀을 베어 버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노렸다는 점 때문에 이 작전계획을 낫질에 비유한 것이 유명해졌다. 그런데 앞에서 멋지게 독일어로 쓰긴 했지만, 사실 원래 낫질 비유를 처음 쓴 건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고, 당연히 원래는 영어 표현(Sickle Cut)이었다.[21] 형식상 진급이긴 하나 38군단은 서부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후방 중의 후방인 동프로이센에 위치하고 있었고 한창 편성 중인 신설 부대인 지라 만슈타인은 사실상 보직에서 해임된 것이었다.[22] 중국군은 이미 일본군과 박터지게 싸우는 중이었다.[23] 실제로도 당시 독일의 경제력은 프랑스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24] 여기에 더해 인구 비를 보면 프랑스가 이렇게 생각한 것에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밖에 할 수 없다. 1차대전 개전 즈음인 1910년에 이미 독일과 프랑스의 징집 가능 인구 비는 1.6:1에 이르렀고, 1939년이 되면 그 비는 3:1 이상으로 벌어진 상태였다.[25] 프랑스 침공전에서 독일 전차 1대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혔다. 다만 이때 전과는 R39로 올렸다.[26] 10월 24일 가믈랭이 내린 작전명령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방어 중점은 에스코 계획에 따르는 것이었고, 딜 계획은 어디까지나 독일군 공격 이전에 방어진지를 점령할 여유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 실행할 예정이었다.[27] 딜 계획에 따른 방어선은 에스코 계획에 따른 방어선이나 프랑스 국경선보다 약 7~80km 가량이 짧았다.[28] 독일군은 이와 정반대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몰트케의 금언 중 하나가 그런 시각을 대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적 본대와 마주한 다음 상황까지 정확하게 예측한 계획은 존재하지 않는다."[29] 당시 프랑스군의 통신체계에 대한 무시는 그야말로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것은 사령부의 지휘체계뿐 아니라 무기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프랑스 전차들은 개별적인 성능에선 독일 전차를 확실히 앞섰지만, 무전기의 부재로 실전에선 협동전투를 하지 못한채 모조리 각개격파당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독일군보다 훨씬 많은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도 지휘통신체계의 혼란으로 하위 부대의 현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해서 패전에 이르고 말았다.[30] 빛의 도시는 파리의 이명이다.[31] 이 동영상의 배경 음악은 파리 입성 행진곡으로 1814년 프로이센군이 나폴레옹군을 무찌르고 파리에 입성한 걸 기념하는 곡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보불전쟁, 프랑스 침공에서도 파리를 털 때마다 연주했다. 당연히 수도 파리가 먹힌 것을 축하하는 곡에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프랑스는 이 곡을 금지곡으로 만들어 버렸다.[32] 선전포고 자체는 6월 10일에 이루어졌지만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이탈리아군 수뇌부가 잘 알고 있었기에 병력 투입이 늦어졌다.[33] 이 때문에 스탈린은 만약 프랑스가 그렇게 무력하게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독소전쟁 때 소련을 유린했던 독일군 소유의 프랑스 무기들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제대로 싸우지 않고 나치에 무기만 조공한 프랑스도 전범국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영국과 미국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저런식으로 따지면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까지 독일과 붙어서 침략전쟁을 벌이고 독일에게 물자를 퍼준 소련도 똑같이 전범국으로 봐야한다.[34] 정확히 말하면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 총독부를 위협해서 주둔권 등을 얻은거지만 실질적으로는 점령한거나 다름없다.[35] 동남아시아 자체가 1940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위협에 처하게 됐다. 인도네시아와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삼았던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본토가 독일에게 점령당했고 영국은 본토가 점령당하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삽질로 인한 손실과 본토방어에 바빠 동남아시아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미국이 유일하게 건재했는데 일본이 워낙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필리핀을 방어할 수 없었다.[36] 프랑스의 유럽본토 면적은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내에서 우크라이나에 이어 2등으로 서유럽 최대이다.[37] 당시 공업화와 도시화를 이룩한 프랑스에게 있어서 파리는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이 느끼는 서울과는 그 중요도에서 차원이 달랐다. 물론 해방 직후 한국 입장에서도 서울은 중요했지만 이미 수탈을 당해 아무것도 없는 입장에서 수도를 잃는것과, 강대국으로써 모든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한 상태에서 순식간에 수도와 시민들을 잃는 것은 충격이 비교가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