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가 공세 러시아어: Мгин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1] 독일어: Dritte Ladoga-Schlacht[2] 영어: Fifth Sinyavino Offensive[3]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일부 | ||
▲ 므가 공세 진행도 | ||
시기 | ||
1943년 7월 22일 ~ 8월 22일 1943년 9월 15일 ~ 9월 25일 | ||
장소 | ||
소련 러시아 SFSR 시냐비노 고지 일대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키릴 메레츠코프| ]]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 | ]][[틀:깃발| ]][[레오니트 고보로프| ]][[틀:깃발| (북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게오르크 린데만| ]] (제18군 사령관) | ]][[틀:깃발| ]][[게오르크 폰 퀴힐러| ]]
결과 | ||
독일군의 승리 소련군이 시냐비노 고지 일부 탈환 | ||
영향 | ||
시냐비노 회랑에서 독일군의 영향력이 매우 감소 사실상 레닌그라드 봉쇄 해제 | ||
전력 | 병사 253,300명 전차/자주포 400대 이상 | 병사 약 50,000명 전차/돌격포 약 40대 |
피해 규모[4] | 전사/실종 20,890명 부상 59,047명 | 전사 6,637명 실종/포로 1,059명 부상 24,517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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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므가 공세는 소련군이 시냐비노 근방에서 펼친 5번째 공세이며 공세가 2차례였으므로 각가 5차,6차 시냐비노 공세라고도 한다. 독일측에서는 제3차 라도가 호수 전투라고 부른다. 1차 공세는 므가 탈환과 함께 레닌그라드 봉쇄를 풀려는 목적으로 진행했으나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5] 완벽하게 실패했고 이 때문에 2차 공세는 전선 코 앞의 시냐비노 고지 탈환으로 목표를 축소해서 진행했다. 2차 공세에서는 기습의 이점 덕분에 감제고지 일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덕분에 고지대를 손실한 독일군의 관측과 시냐비노 회랑[6]을 향한 포병활동이 현저히 감소하면서 18군은 전력차 대비 매우 성공적인 방어전을 펼쳤음에도 레닌그라드 봉쇄는 이제 상징적인 의미만 남게 된다.[7] 레닌그라드 근방에서 소련군의 최후의 공세는 약 4달 뒤 44년 1월에 펼친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공세이며 이를 끝으로 레닌그라드 공방전도 종료된다.2. 1943년 여름의 북부 전선
3. 제1차 므가 공세[8]
3.1. 전투 서열
3.1.1. 소련군[9]
- 레닌그라드 전선군 ( 사령관 : 레오니트 고보로프 상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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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독일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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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개
3.3. 결과
4. 제2차 므가 공세[11]
4.1. 전투 서열
4.1.1. 소련군[12]
- 레닌그라드 전선군 ( 사령관 : 레오니트 고보로프 상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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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독일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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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전개
4.3. 결과
[1] 므가 공세 작전[2] 제3차 라도가 호수 전투[3] 제5차 시냐비노 공세[4] 소련군의 손실은 7월 22일 ~ 8월 22일까지의 제1차 므가 공세에서의 피해만 집계한 것이므로 실제 피해는 이 수치보다 높을 것이다. 반면에 독일군의 손실은 7월 21일 ~ 8월 20일과 9월 11일 ~ 9월 30일까지의 18군의 전체 인명피해로 이 기간동안 18군의 격전지는 므가 근처가 유일하긴 했어도 사실상 26군단만 전투에 참여했으므로 므가 공세로 인한 피해는 이 수치보다 낮을 것이다.[5] 한 달동안 공세를 펼쳤음에도 전선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6] 위 지도에서 67군이 배치된 곳이며 1943년 2월부터 1년간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유일한 육상통로였다.[7] 므가를 지나는 키로프 철도가 아직 독일군의 수중에 있었다. 물론 시냐비노 회랑을 지나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임시철도가 이미 개통된 상황이라 큰 의미는 없었다.[8] 제5차 시냐비노 공세[9] 7월 1일 기준[10] 7월 7일 기준[11] 제6차 시냐비노 공세[12] 9월 1일 기준[13] 9월 5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