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침공 Invasion of Yugoslavia |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 ||
기간 | ||
1941년 4월 6일 ~ 4월 18일 | ||
장소 | ||
유고슬라비아 왕국 전역 | ||
교전국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헝가리 왕국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크로아티아 독립국| ]][[틀:국기| ]][[틀:국기| ]] |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지원국 | [[틀:깃발|[1] [[틀:깃발| ]][[틀:깃발| ]][[루마니아 왕국| ]] | ]][[틀:깃발| ]][[불가리아 왕국|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빌헬름 리스트| ]](제12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제1기갑군 사령관)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제46차량화군단장) [[틀:깃발| ]][[틀:깃발|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제2군 사령관)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루트비히 퀴블러(제49산악군단장)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게오르크 슈툼메(제40차량화군단장) [[틀:깃발| ]][[틀:깃발|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제41차량화군단장)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알렉산더 뢰어(제4항공대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제8항공군단장)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비토리오 암브로시오(제2군 사령관)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알레산드로 피르치오 비롤리(제9군 사령관) 헨리크 베르트(육군참모총장) 엘레미르 고론디-노바크(제3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안테 파벨리치| ]](우스타샤 지도자) [[크로아티아 독립국| ]][[틀:국기| ]][[틀:국기| ]]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우스타샤 지도자) | ]][[틀:깃발| ]][[발터 폰 브라우히치| ]](육군총사령관)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두샨 시모비치(18대 총리)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다닐로 칼라파토비치(총참모장)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보골류브 일리치(육해군 장관)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밀로라드 페트로비치(제1군집단 사령관)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밀루틴 네디치(제2군집단 사령관)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밀란 네디치(제3군집단 사령관)[2]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페타르 드라프신(제1슬라보니아 사단장)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블라디미르 추카바치(제5군 사령관)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디미트리예 지브코비치(제6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코차 포포비치| ]](제1프롤레타리아 여단장) [[유고슬라비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보리보예 미르코비치(왕립 유고슬라비아 공군 사령관) |
결과 | ||
추축국의 승리 | ||
병력 | [[틀:깃발| - 19개 사단 33만 7,096명 - 전차 875대 - 항공기 990대 [[틀:깃발| ]][[틀:깃발| ]][[이탈리아 왕국군| ]] - 22개 사단 30만 명 - 항공기 666대 헝가리군 - 9개 여단 8만 명 - 6개 항공대대 | ]][[틀:깃발| ]][[독일 국방군| ]] 병력 70만 명 전차 200여 대 항공기 1,800대 |
피해규모 | [[틀:깃발| - 전사 151명 - 부상 392명 - 실종 15명 - 항공기 40대 격추 [[틀:깃발| ]][[틀:깃발| ]][[이탈리아 왕국군| ]] - 전사/부상 3,324명 - 항공기 30대 이상 손실 헝가리군 - 전사 120명 - 부상 223명 - 실종 13명 - 항공기 7대 격추 | ]][[틀:깃발| ]][[독일 국방군| ]] 전사자 불명[3] 포로 37만 5천 명[4] 항공기 49대 격추 항공기 300대 노획 조종사 103명 사망 구축함 3척, 잠수함 3척 노획 |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인 1941년 4월 6일 ~ 4월 17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삼국 동맹 조약을 탈퇴한 데에 대한 보복으로 침공군의 주력을 맡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의 추축국 3개국 군대와 우스타샤 세력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전면 침공[5]한 사건이다.2. 배경
프랑스 침공과 노르웨이 침공에서의 승리로 독일 국방군이 한창 승승장구하던 1941년, 발칸반도 서부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추축국의 위협적인 기세를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당시 유고슬라비아는 1934년 국왕 알렉산다르 1세가 프랑스에서 암살당한 후, 어린 왕 페타르 2세의 당숙인 파블레 왕자가 섭정을 하고 있었다.[6]
파블레 왕자는 나치 독일의 위협적인 기세에 기가 눌렸고, 그리스를 제외한 모든 주변국이 모두 추축국에 가입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 진영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파블레 왕자는 유고슬라비아의 안전은 추축국과의 제휴에서 나올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1941년 3월 25일 빈에서 추축국에 가입하는 삼국 동맹 조약 문서에 서명을 하게 된다. 파블레가 내건 조건은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주권 보장, 독일군의 이동로로 유고슬라비아 사용 금지, 그리스 침공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해 군사적 지원 요청 금지, 테살로니키의 유고슬라비아 귀속이었다. 그리고 유고에게 매우 우호적인 이 요구사항을 히틀러는 승인하였다. 즉 유고슬라비아는 독일의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고 그들의 안전을 독일로부터 보장받는 셈이었던 것이었다.
이 때문에 파블레 왕자가 친나치 인사라는 관점도 있으나, 오히려 파블레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조지 6세와 그의 동생인 켄트 공작 조지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등 친영파에 가까웠다. 하지만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달마티아를 탐내던 이탈리아 왕국과 트리아농 조약으로 빼앗긴 영토(바나트, 바라냐, 메지무례, 프레크무례)를 노리던 헝가리 왕국에게 외교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고, 당장 영국의 현실적인 지원을 받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독일은 소련 침공을 앞두고 있는지라 동맹국들의 의중이 어떻든 간에 쓸데없이 발칸에서 전선을 늘리고 싶지 않았고 이 때문에 히틀러는 유난히 유고슬라비아에 호의적이었다.[7] 따라서 파블레는 이를 이용해 독일에 접근하여 삼국 동맹 조약에 조인 하는 것을 통해 압박을 줄이고자 하였다.
3. 발단
그런데 문제는 유고슬라비아 본국 내에서 터져 나왔다. 당시 독일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던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들이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격렬한 반대 시위를 전개하였고, 삼국 동맹 조약 가입 후 사흘도 지나지 않은 3월 27일, 페타르 2세는 연합국의 지원을 받은 친미, 친영파 장교단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파블레 왕자는 남아프리카로 망명하려 했지만 도중에 케냐에서 억류되었다.[8]그러나 이러한 페타르 2세의 쿠데타는 튼튼한 뒷배경이나 반파시즘 이념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그냥 국정 경험도 없는 18살짜리 젊은 왕이 왕좌를 둘러싼 각종 세력의 농단에 홀라당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페타르 2세는 단지 파블레 왕자의 독단에 질려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느니만큼 추축국에 계속 남아 있으려 했고, 파블레 왕자의 정책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독일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독일이 원치 않았던 친연합 쿠데타에 더해서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이유로 베오그라드에서 독일의 외교관과 국기가 모욕당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유고슬라비아는 본의 아니게 독일의 역린을 건든 셈이 되었고, 당연히 아돌프 히틀러는 친연합 성향의 페타르 2세와 그의 신 내각이 자신을 바보 취급한다고 분노하였고 '이런식으로 바보 취급 받을 수 없다며' 군사적, 국가적으로 유고슬라비아를 파괴하겠다(Jugoslawien militärisch und als Staatsgebilde zu zerschlagen)고 선언하고, 이 참에 루마니아 왕국에 위치한 추축국의 주요 연료 보급원인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확실하게 보호할 토대를 다질 겸[9]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스파치오 비탈레를 위해 달마티아 지역을 탐내고 있기도 했고 체급에 안 맞게 섣불리 저질러 버린 그리스 침공 수습에 독일의 도움이 절실하던 이탈리아가 이에 동조한다.
이탈리아와 똑같이 유고슬라비아의 영토를 노리고 있던 헝가리는 하필 1940년 12월 12일부터 유고슬라비아와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고, 헝가리의 유고슬라비아 개입은 곧 연합국의 적대를 불러올 수 있는 터라 중립을 중시하던 텔레키 팔 당시 총리[10]가 어떻게든 헝가리가 전쟁의 수렁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막고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독일의 침공 요구를 거절하고자 했다. 하지만 내심 고토 회복을 바라던 호르티 미클로시가 막판에 생각을 바꿨고, 호르티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독일계 출신 육군참모총장이던 베르트 헨리크가 정부 승인 없이 단독으로 독일군 최고사령부와 비공개 협약을 맺어 헝가리 역시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여하게 된다.[11] 텔레키는 독일군이 헝가리 진주를 시작했다는 전화를 받고 절망하여 권총으로 석연찮은 자살을 하게 된다. 이후 총리가 된 바르도시 라슬로는 친독파에 반유대주의자로, 침공을 최종 승인하고 유고슬라비아 강내에 헝가리군을 진주시킨다.[12]
독일의 침공이 코앞에 다다른 상황에서 당장 자신들을 도와야 할 영국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병력을 파견할 여건이 전혀 안되었고, 자국 내의 군사력으로는 추축국에 포위된 상태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정부 인사들의 조언에 따라 페타르 2세는 해외로 도주하여 망명정부를 세우고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한다는 무책임한 결정을 내린다.
4. 개전, 그리고 항복
짙은 녹색으로 칠해진 곳이 추축국 및 추축국 점령지이다. |
유고슬라비아의 지도를 보면 북쪽으로는 독일에게 합병당한 오스트리아와 추축국에 가입한 헝가리 왕국과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서쪽으로는 아드리아 해를 경계로 해서 이탈리아 왕국과 마주보고 있고, 남서쪽에는 이탈리아의 보호령 알바니아가 있으며, 심지어 달마티아 지역에 1920년 라팔로 조약으로 이탈리아의 영토가 된 자다르가 있다. 그리고 남쪽 끝 일부만 그리스 왕국과 국경선을 마주댄다. 문제는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과 그 점령지에 포위당해 있었고, 그나마 추축국이 아니었던 그리스와 우호국이 된 영국도 제 코가 석자라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면초가.
설상가상으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는 얼마 안가서 시작될 예정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독일 제12군이 배치된 상태며,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발진한 독일군 항공기가 한 시간이면 넉넉잡고 올 정도로 가깝다. 즉 만일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기로 결심한다면 유고슬라비아는 순식간에 사방에서 집중공격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1941년 4월 6일,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우선 루프트바페가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기습적으로 폭격해서 잿더미로 만듬과 동시에 4,000명 이상의 시민을 사망하게 만들었다.[13] 이와 동시에 독일 제12군은 유고슬라비아 동부와 그리스 북부를 향해 침공을 개시했고, 헝가리군도 그 뒤를 따랐다.[14] 여기에 이탈리아도 이탈리아 본토와 알바니아에서 군대를 보내서 유고슬라비아를 협격했다.
이에 대응하는 유고슬라비아의 전략과 전술은 사실상 없었다. 애초에 유고슬라비아의 국가방위계획 자체가 형식상으로만 존재하고 실현성도 거의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은 일단 숫자는 70만명이었지만, 이 중 50만명은 방금 징집돼서 훈련도 못 마친 병력이며, 제대로 된 중장비도 없어서 병력의 대부분은 오로지 보병, 그것도 소총 숫자도 부족한 알보병에 불과했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기갑부대, 해군, 공군이 있었으나, 기갑부대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개발된 전차로 해당 시점에서는 그냥 구식이며, 수량도 몇 대 안되는 르노 FT 전차가 전력의 전부였고, 해군은 1925년 독일에서 수입한 방호순양함 1척, 구축함 3척, 잠수함 4척, 어뢰정 10척, 기뢰부설함 7척, 강상 순찰정 4척이 사실상의 전력 전부였다. 공군의 경우에는 영국제 호커 허리케인 50대와 영국제 브리스톨 블렌헤임 I 폭격기 60대, 이탈리아제 사보이아-마르케티 SM. 79 K 폭격기 40대에 앞서 언급한 파블레 왕자와의 친선을 위해 히틀러가 공급한 Bf109 전투기 70여대와 Do 17 폭격기를 70대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제 기체들의 경우에는 인도받은 지 얼마 안 된데다가 부품 및 소모품도 부족하고[15] 조종사의 실력도 형편없어서 별 도움이 안되었다.
덤으로 유고슬라비아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 문화가 혼합된 국가였는데, 다수민족인 세르비아인들이 권력을 독점하며 자민족 우선주의와 선민의식[16]을 보이다 보니 크로아티아인 등의 타 민족들은 "유고슬라비아는 그냥 대세르비아일 뿐이었다", "우리는 너네 동포 따위가 아니다"[17]며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흔들리기만 하면 분리독립할 생각이었으므로 안 그래도 다민족성을 가진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은 통일성조차 가질 수 없었다.
덕분에 개전하자마자 1주일도 되기 전에 유고슬라비아의 대도시 2개가 함락되고,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는 이에 호응하여 분리독립을 선언한 다음 안테 파벨리치와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를 중심으로 무장폭동을 일으켜 독일군 편에 가담하였고 슬로베니아 등 타 지역의 자생적 파시스트, 강성 민족주의 세력들이 그 뒤를 따랐다. 따라서 안 그래도 방어전 준비가 안 되어 있던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총붕괴했고, 독일군은 하루에 150km 이상의 맹진격을 거듭했다. 이는 비단 독일군 뿐 아니라 이제 2차 대전에 막 참전한 헝가리군, 그동안 제대로 된 활약을 못했던 이탈리아 왕국군, 일개 테러 조직 수준에 불과했던 우스타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니 이 시점에서 유고슬라비아는 그냥 무방비였다고 보면 된다.
■ : 나치 독일 ■ : 헝가리 왕국 ■ : 이탈리아 왕국 ■ : 크로아티아 독립국 ■■ : 세르비아 군정청 ■ : 이탈리아령 몬테네그로 ■ : 이탈리아령 알바니아 ■ : 불가리아 왕국 |
패전 후 해체당한 유고슬라비아 왕국. |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개전 11일째인 1941년 4월 17일에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이때까지 독일군은 전사자가 151명에 불과하여 거의 무혈입성에 가까울 정도로 성공적으로 침공을 마쳤다. 유고의 항복을 보고 받은 히틀러가 "그것 봐. 주먹을 쳐들기만 하면 단 한방에 끝난단 말이야."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유고슬라비아 국왕인 페타르는 그리스로 파천했으며, 점령당한 유고슬라비아 영토는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에 의해 삼분할되었고,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비롯한 여러 괴뢰국들이 세워졌다. 이탈리아와 헝가리는 각각 달마티아의 주요 요지 및 몬테네그로와 트리아농 조약으로 빼앗긴 고토를 가져감으로써 목적을 달성했고, 추축국의 진로를 열어준 불가리아 왕국도 자국 국수주의자들이 그렇게 염원해 마다않던 마케도니아(지금의 북마케도니아) 영토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할양받았다.[18][19] 그러나 항복을 거부한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들어가서 게릴라가 되어 항전을 이어갔다. 이들은 아직 세력이 미미하다보니 추축국의 통치는 당장은 평안했다.
추축국은 유고슬라비아를 석권한 이후 전쟁은 동시에 진행된 그리스 침공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게릴라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파르티잔이 된 유고군 잔당들은 독일군을 집요하게 괴롭힌다.
5. 평가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유고슬라비아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점은 독일에 맞서 싸울 의기를 보였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추축국에 대항해서 싸우겠다는 의지는 좋았지만, 이에 대한 준비가 미비했다는 한계가 명확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국내의 사정도 조율하지 않고, 전쟁에 대한 대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도 무모한 투지를 보인 것이다. 특히 막상 개전하니까 한번이라도 용감하게 싸워보지도 않은 채 사실상 전투를 포기하고, 2주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점령당한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불리한 조건을 감안해도 문제가 많다.설상가상으로 유고슬라비아가 국가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빠르게 붕괴되는 바람에 이웃 우방국인 그리스의 방어전 준비에도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그리스 역시 자국의 모든 영토를 사수하기 위해 자신들의 역량을 넘어선 너무 넓은 방어선을 구축한 실수를 범했지만, 유고슬라비아가 조금만 더 오래 버텼더라도 자신들의 실수를 교정할 여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든다.
다만 이 전쟁이 독소전쟁의 발발을 늦췄다는 견해도 있다.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도 병력을 투입하여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 점령하는 동안 군사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4월이나 5월에 일찍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동되어 공세가 시작되었다면 독일이 승리할 수도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20]
[1] 흔히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불가리아가 참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불가리아는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전하지 않은 대신 독일의 압력과 당시 총리 보그단 필로프 등 친독파와 부역자들의 지지로 삼국 동맹 조약에 가맹하고 독일군이 불가리아 영토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는 것을 허용해주었다. 불가리아는 이를 통해 마케도니아와 남부 세르비아를 영토로 편입할 수 있었다. 이후 독일이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그 외 체트니크 등 저항 세력의 관리 및 진압을 할 여유가 없어지자 대신 진압을 해주기 위해 불가리아군이 베오그라드 인근과 그 북부를 제외한 세르비아 구국정부 관할 지역까지 점령, 통제할 수 있었다.[2] 제2군집단 사령관인 밀루틴 네디치와는 형제관계이며, 독일의 포로로 끌려간 밀루틴과 달리 훗날 괴뢰국 꼭두각시 신세가 되어 세르비아 구국정부의 지도자가 된다.[3] 민간인 학살 다수 포함. 전쟁 전체에서는 약 100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4] 34만 명은 독일군, 3만 명은 이탈리아군에게 잡혔다.[5] 루마니아 왕국과 불가리아 왕국은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할 수 있도록 자국의 영토를 빌려줘 경로를 제공했다.[6] 페타르 2세의 큰아버지인 조르제 왕자가 있었으나 이쪽은 원래 왕태자였는데 정신병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바람에 폐태자당하여 섭정을 할 수 없었다.[7] 당시 독일의 주력 전투기였던 Bf 109를 유고슬라비아 측에 제공하기도 했다.[8] 전후 파블레는 프랑스에서 살았다.[9] 독일과 소련은 1940년 여름부터 이미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의 우위를 두고 무언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독일군이 루마니아에 진주하자 소련은 불쾌함을 표현하였고 남부 국경 일대로 부대들을 전진 배치시켰다. 이후 11월 개최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회담에서 리벤트로프는 소련에게 영국의 중동 영토를 주는 조건으로 반영 동맹에 참가 시키고자 했지만 몰로토프는 핀란드에서 독일군 철수, 불가리아에서의 소련 우위 인정, 튀르키예에 소련군 주둔 허용을 요구하며 결렬되었고 12월 히틀러는 소련과 전쟁을 결심한 상태였다.[10] 폴란드 침공 당시에도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의 지원 하에 폴란드와 헝가리의 오랜 우호 관계를 앞세워 독일의 침공 협조 요구 및 철도 사용 요청을 완강히 거절하고 폴란드 적십자 및 카톨릭 인사들이 헝가리에서 활동 및 전직 폴란드군 인사들이 연합국으로 도피하는 것을 도왔고 독일의 소련 침공 준비 요청도 꾸준히 거절했다.[11] 이 과정에서 베르트가 호르티의 승인 없이도 독일이 헝가리 전군을 동원할 수 있도록 협약을 맺는 바람에 베르트는 호르티의 분노를 사 사임당한다. 하지만 이윽고 호르티가 다시 동원을 허용하여 베르트는 사임을 철회한다.[12] 이후 바르도시는 커셔 폭격이 일어나자 호르티가 소련과의 전쟁을 원한다고 판단, 주동자를 소련으로 단정지은 헝가리군의 소견에 따라 각료회의만 재빠르게 소집한 후 의회의 허락도 없이 소련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진주만 공습 때에는 일단은 확전을 막아 보려고 참전 대신 독일, 이탈리아와 연대만 표시하려 했으나, 독일과 이탈리아가 계속 압박을 넣자 궁지에 몰려 의회나 호르티 미클로시의 승인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누구의 허락도 없이 의회 외무 위원회에서 독단적으로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전쟁 후기엔 호르티와의 갈등으로 총리직을 강제 사임당하고 화살십자당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국민단결정부가 소련에게 밀리자 독일을 거쳐 스위스로 도주를 시도했는데, 스위스가 바르도시를 강제 추방하는 바람에 독일로 다시 쫓겨나고, 거기서 미군에게 붙잡혀 헝가리로 다시 송환되었다. 바르도시는 결국 헝가리에서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총살당했다.[13] 이 때문에 종전 후 폭격을 명령했던 4항공대 사령관 알렉산더 뢰어가 그 책임으로 유고슬라비아에 인도되어 총살당했다. 참고로 뢰어는 에르하르트 라우스, 프란츠 뵈메, 로타르 렌둘릭, 카를 에글제어 등과 같은 오스트리아계 국방군 장군이었다. 명예직까지 더하면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원수까지 포함.[14] 이 당시 헝가리는 이미 유고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하지만 베르트 육군참모총장이 이를 무시하고 독일에 협력한다는 비공개 협약을 맺어 불가침조약은 휴지조각이 된다. 앤서니 이든은 이를 두고 불가침조약을 맺은 지 몇 달 후에 유고슬라비아를 친 일은 헝가리 역사에 가장 큰 수치로 남을 것이라고 디스했다.[15] 기총은 물론이고 심지어 무전기나 예비 타이어도 없이 딱 비행 가능한 기체만 보냈다.[16]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보슈냐크인들에 대해 '외세에 맞설 줄도 모르는 민족들을 우리가 계도한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17]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슈냐크인들을 '갈라선 동포'라 여기고 있었다.[18]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이전 국왕인 알렉산다르 1세가 바로 이 마케도니아 합병을 원하는 불가리아 민족주의 단체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소속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당했다.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는 우스타샤와도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었다.[19] 해당 영토는 원래도 좋지 못했던 불가리아와 독일의 사이가 갈라진 뒤, 불가리아가 1944년 소련에 항복하자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숨어 있던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세력이 독일의 묵인 하에 점령하여 바르다르 마케도니아가 세워진다.[20] 그러나 4월은 라스푸티차가 아직 끝나지 않은 기간으로 이때 독일의 대규모 기갑부대가 기동했다면 오히려 진격을 제대로 못하고 소련에게 대비할 시간을 벌어 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소련이 초기에 밀린 이유도 독일이 침공을 하면 4-5월에 하지 6월에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스탈린의 계산도 있었기에 대비를 못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즉 더 이르게 침공했으면 소련군의 준비로 인해 초기에 원역사만큼의 전과를 달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