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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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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영국 윈저 왕조 제3대 국왕
조지 6세
George V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George_VI_of_England,_formal_photo_portrait,_circa_1940-1946.jpg
출생 1895년 12월 14일[1]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노퍽 주 샌드링엄 하우스 요크 코티지
(現 영국 잉글랜드 노퍽 주 샌드링엄 하우스 요크 코티지)
사망 1952년 2월 6일 (향년 56세)
영국 잉글랜드 노퍽 주 샌드링엄 하우스
묘소 영국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성
재위기간 영국영국 자치령 국왕
1936년 12월 11일 ~ 1952년 2월 6일
인도 황제
1936년 12월 11일 ~ 1947년 8월 15일
서명
파일:조지 6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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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가문 윈저 가문
이름 앨버트 프레드릭 아서 조지
Albert Frederick Arthur George
아버지 조지 5세
어머니 테크의 메리
형제자매 에드워드 8세, 여동생 메리, 남동생 헨리, 조지,
배우자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1923년 결혼)
자녀 장녀 엘리자베스 2세, 차녀 마거릿
종교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2]
장로회 (스코틀랜드 국민교회)[3]
신장 175cm
군사 경력
임관 영국해군사관학교
복무 영국 해군
1913년 ~ 1918년
영국 공군
1918년 ~ 1919년
최종 계급 중위 (영국 해군)
대위 (영국 공군)
명예 계급 원수 (영국 육군)
원수 (영국 해군)
원수 (영국 해병대)
원수 (영국 공군)
참전 제1차 세계대전 (유틀란트 해전) }}}}}}}}}
파일:f641cbef8d72a62e278945c1dba0a5f6.jpg
공식 초상화
1. 개요2. 전반적인 생애3. 작위4. 재위 국가5. 일생
5.1. 출생과 어린 시절5.2. 왕이 되기 전의 생애5.3. 세 왕의 해 : 원하지 않았던 왕좌5.4. 재위 초기5.5. 제2차 세계대전5.6. 대영제국에서 영연방으로5.7. 사망
6. 가족 관계
6.1. 조상6.2. 자녀
7. 관련 작품8. 기타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지 6세 시대의 영국 국가 God Save the King
1936년부터 1952년까지 재위한 영국영연방 왕국 윈저 왕조제3대 국왕. 동시에 인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아일랜드 자유국의 마지막 왕이었으며 영연방의 첫 번째 수장이기도 했다. 또한 앤 여왕 이후 처음으로 형제 간 상속으로 왕위를 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차증손, 에드워드 7세의 차손, 조지 5세의 차남, 에드워드 8세의 남동생이며 전 영국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마거릿 공주의 아버지이자 현 영국 국왕인 찰스 3세의 외할아버지이다.

2. 전반적인 생애

조지 5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해군 장교로 복무했고, 1923년 백작 영애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결혼해 장녀 엘리자베스[4]와 차녀 마거릿을 두었다.

이후 형인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면서 왕위를 포기함에 따라[5] 떠밀리다시피 왕위를 계승했다. 이후 국왕으로서는 치명적일 수 있는 간헐적 말더듬 증세를 노력을 통해 극복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등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명군이다.

하지만, 조지 6세 이후로 대영제국프랑스 제국은 식민지들이 독립해가면서 저물어간 반면, 미국, 소련새로운 세계 질서의 중심 국가로 확실히 부상했다. 재위 기간 동안 인도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의 황제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아일랜드가 수립되면서 아일랜드의 왕 자리도 내놓게 된다.[6]

선천적으로 건강하지 못했던데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국왕으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과로 및 과한 흡연 등으로 건강을 해쳤으며, 1952년 56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임은 장녀인 엘리자베스 2세.

3. 작위

파일:1280px-Coat_of_arms_of_the_United_Kingdom_(1837-1952).svg.png 파일:Coat_of_Arms_of_the_United_Kingdom_in_Scotland_(1837-1952).svg.png 파일:1200px-Royal_Monogram_of_King_George_VI_of_Great_Britain.svg.png
조지 6세의 문장 스코틀랜드에서의 문장 조지 6세의 모노그램
  • 요크의 앨버트 공자 저하 His Highness Prince Albert of York (1895년 12월 14일~1898년 5월 28일)
  • 요크의 앨버트 공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Albert of York (1898년 5월 28일~1901년 1월 22일)
  • 콘월과 요크의 앨버트 공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Albert of Cornwall and York (1901년 1월 22일~1901년 11월 9일)[7]
  • 웨일스의 앨버트 공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Albert of Wales (1901년 11월 9일~1910년 5월 6일)[8]
  • 앨버트 왕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Albert (1910년 5월 6일~1920년 6월 4일)[9]
  • 요크 공작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York (1920년 6월 4일~1936년 12월 11일)
  • 국왕 폐하 His Majesty The King (1936년 12월 11일~1952년 2월 6일)
    • 인도 제국 황제 폐하 His Imperial Majesty The King-Emperor(1936년 12월 11일 ~ 1947년 8월 15일)

방계 왕자에서 아버지가 왕세자국왕이 되고, 본인도 예정에 없던 왕위를 물려받게 되면서 칭호도 나름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인물이다.

조지 6세는 즉위하기 전 요크 공작[10] 시절인 1929년 스코틀랜드 국교회 평의회 고등판무관을 역임한 적이 있어서 당시의 칭호는 '스코틀랜드 국교회 평의회 고등판무관이신 요크 공작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York, His Grace The Lord High Commissioner to the General Assembly of the Church of Scotland)'였으며, 1936년에 즉위하면서 공식적인 칭호는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 가터 훈장의 주군, 씨슬 훈장의 주군, 성 패트릭 훈장의 주군, 바스 훈장의 주군,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의 주군, 대영 제국 훈장의 주군, 무공 훈장의 주군, 제국 공로 훈장의 주군, 인도성(星) 훈장의 주군, 인도 제국 훈장의 주군, 인도 제관 훈장의 주군, 영국령 인도 훈장의 주군, 인도 메리트 훈장의 주군, 버마 훈장의 주군, 로열 빅토리아·앨버트 훈장의 주군, 에드워드 7세 로열 패밀리 훈장의 주군, 조지 5세 로열 패밀리 훈장의 주군, 조지 6세 로열 패밀리 훈장의 주군, 오더 오브 메리트의 주군, 컴패니언 오브 아너의 주군, 로열 빅토리아 훈장의 주군, 성 요한 훈장의 주군이신 조지 6세 폐하[11]'

그러나 1947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 황제라는 직위를 포기해 군주로서의 공식적인 칭호는 1948년부터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이신 조지 6세 폐하(George the Sixth,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다만 인도 지역의 경우 인도 제국은 해체되었어도 공화국으로 완전 독립하기 전까지는 각각 영국의 자치령 지위였으므로(인도 자치령, 파키스탄 자치령 등) 그동안 인도 지역에서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칭호는 유효했다. 또한 아일랜드에서는 1949년 공화국 출범 및 영연방 탈퇴로 아일랜드 왕 칭호가 폐지되었으나, 영연방 내에서의 아일랜드 왕 칭호는 남은 재위 기간 동안 바뀌지 않아 후임 엘리자베스 2세가 잠시 이어받았다. 영연방의 수장(Head of the Commonwealth) 칭호 역시 공식 왕실 칭호로서는 조지 5세 재위 동안 추가가 보류되었다. 인도 자치령은 1950년에 해체되었지만 파키스탄 자치령은 1956년까지 존속하여 엘리자베스 2세도 잠시 파키스탄의 국왕이였다.

4. 재위 국가

파일:British_Empire_in_December_1936.png
1936년 즉위 당시 조지 6세의 통치 영역
영국   대영제국 자치령   대영제국 보호령[12]
파일:Commonwealth_Realms_GeorgeVI.png
▲조지 6세가 임기 중 국왕 및 황제로 재위하였던 국가들
조지 6세가 1952년 2월 6일까지 재위했던 국가   임기 중 헌법 개정 등으로 퇴위한 국가
국가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기간 비고
<colbgcolor=#c2e68b,#4f7419> 영국 1936.12.11. 1952.2.6. 15년 57일
캐나다 1936.12.11. 1952.2.6. 15년 57일
호주 1936.12.11. 1952.2.6. 15년 57일
뉴질랜드 1936.12.11. 1952.2.6. 15년 57일
남아프리카 연방 1936.12.11. 1952.2.6. 15년 57일
인도 제국 1936.12.11. 1947.8.15. 10년 248일 제국 해체
아일랜드 1936.12.11. 1948.4.18. 11년 130일 헌법 개정[13]
뉴펀들랜드 1936.12.11. 1949.3.31. 12년 112일 캐나다에 합병[14]
인도 1947.8.15. 1950.1.26. 2년 134일 헌법 개정
파키스탄 1947.8.15. 1952.2.6. 4년 176일
실론 1948.2.4. 1952.2.6. 4년 2일

5. 일생

5.1. 출생과 어린 시절

파일:Prince Albert with Queen Mary.jpg
파일:Prince Albert_1898.jpg
<rowcolor=#FFF> 어린 시절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시기에 1895년 12월 14일, 노포크의 샌드링엄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였던 요크 공작 조지 왕자요크 공작부인 메리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앨버트 왕자는 할아버지인 앨버트 왕세자와 아버지인 조지 왕세손 그리고 형인 에드워드 왕세증손에 이어서 계승 서열이 4위였다. 그런데 하필 태어난 날이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이자 앨버트의 증조할아버지였던 앨버트 공의 기일이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둘째 증손자에게 거의 무관심으로 대했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 앨버트의 할아버지였던 웨일스 공 앨버트가 손자의 이름을 아버지 앨버트 공에게서 따온 앨버트[15]라고 지어주고 나서야 빅토리아 여왕은 기뻐하면서 증손자를 챙겼다고 한다. 3개월 후 앨버트는 앨버트 프레더릭 아서 조지라는 이름으로 샌드링엄의 성 메리 막달레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가족 내에서는 버티라는 애칭으로 불렸다.[16]

어렸을 적의 앨버트 왕자는 병약한 체질과 심한 말더듬[17], 잘 울고, 겁도 많은 소심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18] 원래 왼손잡이였지만 오른손잡이로 교정을 받다보니[19] 이런 경향은 더 심해졌다.[20]

1901년 1월 22일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자 할아버지인 앨버트 왕세자가 에드워드 7세로 즉위했다. 앨버트 왕자는 아버지와 형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3위의 왕자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앨버트 왕자가 왕이 될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5.2. 왕이 되기 전의 생애

1909년 앨버트는 오즈본에 있는 왕립해군학교에 생도로서 입학했다.[21]

1910년 5월 6일, 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자 아버지 조지 왕세자가 조지 5세로 즉위했다. 앨버트는 형인 에드워드 왕세자에 이어서 계승 서열 2위의 왕자가 되었다.
파일:Prince Albert_1917.jpg
<rowcolor=#FFF> 해군 제복을 입은 앨버트 왕자
1913년 앨버트는 해군 사관후보생으로 임명되었고 1년 후 1차 세계대전 때 HMS 콜링우드(세인트 빈센트급 전함)에서 근무를 시작했다.[22] 1916년에 벌어진 유틀란트 해전에도 참전했지만 십이지장의 궤양 때문에 더 이상의 전투를 치르지는 못했다. 1918년 2월에는 크란웰의 왕립함대항공단에 조종 장교로 배치되었다가 종전을 맞이한다. 육해군 항공대가 전부 신생 공군으로 떨어져 나가며 공군으로 전군해 1919년 대위로 예편했고, 그가 즉위한 뒤 해군 항공대가 다시 공군에서 떨어져 나왔다. 이로 인해, 그는 해군 피복에 해군 조종사 휘장을 부착할 자격을 얻었다.

1919년 1월 18일, 막내동생 존 왕자가 사망했다. 어쨌든 앨버트는 같은 해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역사와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즈음에 형인 에드워드 8세의 소개로 호주 출신 유부녀 실라 러프버러와 사귀었다. 형이 사귀던 프리다의 친구였는데 이들 넷은 함께 더블 데이트를 즐겼다고. 이 때문에 왕실에서는 에드워드 8세가 동생을 나쁜 길로 물들인다고 못마땅 해 했고[23], 앨버트에게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형과는 달리 말을 잘듣는 앨버트는 실라와 헤어지고 나서 요크 공작작위를 받았다.[24] 이후 그는 아버지를 도와 왕실의 의무를 이행했다.[25] 이때 주로 탄광과 공장, 철도 등을 시찰하면서 산업 공작(Industrial Prince)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별명답게 앨버트는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에도 관심이 많아 산업복지협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1921년부터 1939년 사이에는 1년마다 여름캠프를 열어 다양한 계층에서 온 소년들이 함께 지내도록 하기도 했다.

결혼할 나이가 되자 왕실은 과거의 관례대로 그가 다른 나라의 왕족과 결혼하길 기대했다. 그러나 앨버트는 자기가 직접 자유롭게 신부감을 고르길 바랐다. 1920년에 앨버트는 제14대 스트래스모어 킹호른 백작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26]의 4녀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을 만났고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엘리자베스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가의 피가 흐르는 고위 귀족이었으나 당시 유럽 군주국들의 관례에 의하면 직계 왕자와 공주는 타국의 통치 가문과만 결혼해야 했다.[27] 엘리자베스 스스로도 왕실의 일원이 되어 치러야 할 희생 때문에 앨버트의 구혼을 두 번이나 거절할 만큼 주저했다.

하지만 앨버트의 한결같은 마음과 헌신적인 구애를 보고 결국 결혼을 결심하고, 부왕인 조지 5세 또한 그들의 결혼을 흔쾌히 허락하였다. 둘은 1923년 4월 26일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28]
파일:GeorgeVI_Wedding.jpg
<rowcolor=#FFF> 결혼 사진[29]
조지 6세의 말 더듬는 버릇은 그가 공공장소에서 연설하는 걸 꺼리게 만든 원인이었다. 일례로 1925년 10월 31일 웸블리에서 열린 대영제국 박람회의 폐회사를 조지 6세가 맡았는데 이는 청중과 조지 6세 양쪽에게 모두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한다.[30]

1925년 할머니 알렉산드라 왕대비가 사망했다. 조지 6세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31]

이를 그냥 방치할 수는 없어서 조지 6세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만나서 치료를 받았다. 이때 엘리자베스도 옆에서 꾸준히 치료를 도왔고 그 결과 호주 국회 개회 연설을 훌륭하게 치러냈다. 이후 조지 6세가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걸 꺼리는 횟수는 크게 줄어들었다고.

호주를 순방하면서 당시 영국령이었던 자메이카를 경유했는데 이때 자메이카에서 테니스 복식경기를 하면서 흑인과 함께 테니스를 쳤다.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당시 시대에 인종 간의 평등을 보여준 훌륭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32]
파일:George VI family_1931.jpg
<rowcolor=#FFF> 1931년 가족사진
그와 아내 둘 다 내성적인 편이었기에 이들 가족은 비교적 조용하게 살았다. 당시 집은 런던 피카딜리가 145번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평온하고 행복한 생활도 곧 깨지게 된다.

5.3. 세 왕의 해 : 원하지 않았던 왕좌

파일:세왕의해.jpg
세 왕의 해
1936년 1월 20일 조지 5세가 사망하면서 에드워드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당시 에드워드 8세는 결혼 적령기가 한참 지난 42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미혼이었고, 이 때문에 둘째였던 조지 6세가 왕위계승 1순위가 되었다. 게다가 그해 12월 11일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사교명사[33]였던 월리스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겠다고 하면서 파장이 일어난다. 당시 총리였던 스탠리 볼드윈[34]은 "2번이나 이혼한 이혼녀와 결혼하면서 왕위를 지킬 수는 없다. 왕위에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심프슨 부인과 연을 끊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35][36]

결국 에드워드 8세는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 왕위를 저버렸다. 졸지에 왕위에 오르게 된 조지 6세는 당황했다. 그는 왕위수락을 거부했고 형의 퇴위 전날에는 어머니를 찾아가서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37] 하지만 결국은 즉위했다. 워낙 갑작스레 진행된 일이라 그는 겨우 3주 만에 필요한 걸 배우고 왕위에 올라야 했다.

남편과 사이가 좋았던 엘리자베스 왕비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기에, 이 부부는 형인 에드워드 부부와의 사이가 안 좋아졌다. 이 때문에 1936년을 세 왕의 해라고도 부른다. [38]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조지 6세에게는 형의 퇴위로 인한 대영제국의 분열이라는 난관이 눈 앞에 있었다. 에드워드가 퇴위한 날, 아일랜드 자유국의 의회는 헌법에서 군주에 대한 모든 직접적인 언급을 삭제한다. 다음날 아일랜드는 군주에게 외교에 대한 권한만 부여하는 대외관계법을 통과시켰으며, 이는 아일랜드가 공화국으로 전환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또한 당시 영국 전역에는 앨버트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왕이 될 수 없는 상태라는 헛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5.4. 재위 초기

조지 6세는 아버지 조지 5세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군주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앨버트라는 이름 대신 '조지 6세'를 공식 칭호로 선택했다. 조지 6세가 첫번째로 내린 결정은 형 에드워드 8세에게 '윈저 공작' 작위를 주는 것이었는데, 형을 왕실 공작(Royal Dukes)으로 만들어 전임 국왕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왕실 거주지 중 하나인 밸모럴 성과 샌드링엄 하우스는 국왕의 사유 재산으로 간주되어서 조지 6세에게 자동으로 승계되지 않았다. 때문에 에드워드 8세에게 돈을 주고 다시 사들여야 했다. 3일 후인 41세 생일에는 새로운 왕비가 된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가터 기사단 훈장을 수훈했다.
1937년 5월 12일에 거행된 조지 6세의 대관식
파일:KingGeorge_120522_GettyImages-3294893.jpg
조지 6세는 원래 에드워드 8세의 대관식이 예정된 날짜였던 1937년 5월 12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당시 대관식은 기록 영화로 촬영되어 영국 전역의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는데, 영국 국왕의 대관식이 카메라에 담긴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조지 6세의 심각한 말더듬이 증상으로 인해 대관식을 공개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사전에 모든 장면을 왕실에서 검열하는 조건으로 촬영이 허용되었다. 결국 메리 왕비가 대관식 도중 눈물을 훔치는 장면만 편집되고, 거의 모든 장면이 상영되었다.
1938년 조지 6세의 연설 장면[39]
왕이 된 이후로는 말더듬이로 고생했다. 위 영상은 1938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대영제국 박람회 개막식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2분 30초 정도의 짧은 연설인데도 말더듬이로 제대로 연설을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왕이 되는 과정에서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의 도움을 받아서 이후 1939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연설 실력이 늘었다.

1939년 5월과 6월에는 엘리자베스 왕비와 함께 캐나다미국을 순방했다. 영국 국왕이 북미 지역을 순방한 것은 이때가 최초였다. 조지 6세는 오타와에서 캐나다 총리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과 동행하며 캐나다 국민들에게 자신을 영국 국왕이 아닌 캐나다 국왕이라고 소개했다. 당시 순방은 영국 자치령에 완전한 주권을 부여한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입증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미국을 방문해 뉴욕 세계 박람회를 관람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당시 루스벨트 부부와 깊은 유대를 형성했는데, 이후 전쟁 기간 동안 양국 간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5.5. 제2차 세계대전

파일:external/i.telegraph.co.uk/george-vi-posed_1791844b.jpg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 외의 자치령은 나치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는 루프트바페의 집요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런던에 계속 머물렀다.[40] 왕과 왕비는 전쟁 내내 버킹엄 궁전윈저 성을 오가면서 생활했다.[41] 국가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어 공습이 일상화된 시기에는 가족은 안전한 곳으로 보내놓고 왕은 국민과 함께 해야 된다며 버킹엄 궁전에 있다가 공습에 죽을 뻔하기도 했다.

1940년 9월 7일, 런던 대공습이 시작되었고 첫 날에 약 1,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9월 13일에는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가 버킹엄 궁전에 있던 시각에 궁전 밖으로 독일군의 폭탄이 떨어져 간신히 죽음을 면하기도 했다. 이때 엘리자베스 왕비는 오히려 "이제야 이스트엔드 지구[42]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면서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국민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또한 전쟁 도중에는 왕실도 예외없이 일반 국민들과 동일하게 정부로부터 배급을 받아 생활해야 했는데, 미국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는 버킹엄 궁전에 방문했을 때 음식과 난방에 제한이 있었고, 목욕물도 제한된 양만 허용되었다고 언급했다. 1942년 8월에는 동생 켄트 공작 조지 왕자가 군 복무 도중 사고로 사망했다.[43]

1940년, 네빌 체임벌린에 이어 윈스턴 처칠이 영국의 총리가 되었다. 조지 6세와 처칠은 근대 영국 역사상 가장 군주와 가까웠던 국왕과 총리였다고 한다. 1940년 9월부터 4년 반 동안 두 사람은 매주 화요일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면서 전쟁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는 전쟁 내내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폭격 피해 현장과 군수 공장, 군대를 방문했다. 조지 6세는 1939년 12월 프랑스를 시작으로 1943년 6월 북아프리카몰타, 1944년 6월 노르망디, 1944년 7월 이탈리아 남부, 1944년 10월 저지대 지역 국가들에 주둔한 해외 파병 군대들을 잇따라 방문해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전쟁 중에는 일상적으로 영국 해군 제독(원수)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1945년 5월 8일, 전쟁이 끝나자 승리의 날 기념 행사가 영국 전역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군중들은 버킹엄 궁전앞에 몰려들어 "우리는 왕을 뵙기를 원합니다!"고 외쳤고, 조지 6세는 엘리자베스 왕비, 엘리자베스 공주, 마거릿 공주와 함께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며 군중들을 맞았다. 전쟁 기간 동안 영국을 이끌었던 처칠 역시 초대되어 왕족들과 함께 발코니에 섰다.

1946년 1월, 조지 6세는 런던에서 열린 첫 번째 유엔 총회에 참석해 "남성과 여성, 크고 작은 국가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하는 연설을 했다.

5.6. 대영제국에서 영연방으로

한편, 조지 6세의 재위기간 동안 대영제국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 이후 각 자치령은 동일한 주권을 갖는 국가로 이미 인정되고 있었고, 제국이 독립적인 국가들의 자발적인 연합체로 변화하는 과정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더욱 가속화하게 되었다.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집권하는 동안 영국령 인도는 1947년 8월에 인도 자치령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독립했다. 따라서 조지 6세는 인도 제국 황제 칭호를 포기해야 했으며, 대신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왕이 되었다.[44]

1949년 9월, 영연방 국가의 지도자들은 현대 영연방의 토대를 마련하고 조지 6세를 영연방의 수장으로 인정하는 런던 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대영제국 체제가 아닌, 국가들의 자발적인 연합체인 영연방 체제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1948년 1월 버마, 1948년 5월 팔레스타인, 1949년 아일랜드 등의 국가가 영연방에서 탈퇴했다.

1947년 조지 6세와 가족들은 남아프리카 연방을 순방했다.

5.7.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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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자 찰스 3세와 함께. 1951년 9월 폐 수술을 한 이후 처음 찍힌 사진

하지만 과로와 전쟁 때 겪은 스트레스, 그리고 잦은 흡연으로 폐암에 걸렸다. 말년에는 왼쪽 폐를 절제하고 금연을 했다. 이후 건강이 좋아지는듯 했으나, 1951년 호콘 7세[45]와의 만남을 취소하는 등 정상적인 공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51년 10월에 예정되었던 북미 지역 순방은 엘리자베스 공주와 사위 필립 공에게 맡겨야 했다.[46]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1952년 2월 6일 오전 7시 30분,[47] 샌드링엄 하우스의 침실에서 자는 도중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했다. 형은 물론 모친보다도 먼저 죽었다.[48] 입헌군주제 국가의 훌륭한 임금이었으나, 왕이 된 탓에 불행한 삶을 살다가 숨을 거둔 인물. 엘리자베스 공주는 케냐를 순방하던 도중 이 소식을 접했는데, 마침 공주의 숙소가 트리탑 호텔(Treetop Hotel), 문자 그대로 나무 위에 있는 호텔이었다.

형 에드워드 8세는 나치를 좋게 평가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동생인 조지 6세의 속을 썩히기만 했을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내 엘리자베스 왕비는 남편이 본의 아니게 왕이 되어 지나치게 과로한 나머지 일찍 사망했다고 생각해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을 전보다 더 싫어하였다. 다만 윈저 공의 장례식장에서 심프슨 부인을 만났을 때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과거의 자신과 겹쳐 보였는지, 먼저 다가가 위로를 건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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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왼쪽 사진은 1952년 자신을 대신해 해외 순방을 나가는 딸 엘리자베스 공주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조지 6세를 찍은 것으로, 사망 6일 전 공식 석상에서 촬영된 마지막 사진이다.[49] 당시 의사들과 보좌관들은 만류했지만, 조지 6세는 공주 부부를 꼭 배웅하러 나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결국 이때 모습이 엘리자베스 공주가 아버지를 본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사망 전날 조지 6세는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평소 좋아하던 사냥을 했으며, 저녁에는 딸 마거릿 공주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2월 9일, 조지 6세의 관은 샌드링엄의 세인트 메리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2월 11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옮겨졌다. 장례식은 15일 윈저 성에 있는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거행되었다.[50] 이후 시신은 17년동안 지하 묘실에 안장되어 있다가 1969년 3월 26일 세인트 조지 예배당 내 조지 6세 기념 경당에 이장되었다. 이후 2002년 사망한 아내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차녀 마거릿 공주도 이곳에 안장되었으며, 2022년에 장녀 엘리자베스 2세와 사위 필립 공도 함께 안장되었다.

아내인 엘리자베스 왕비는 2002년까지 생존해[51]살아있는 동안 시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의 재임기간에 태어나 시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 시아버지 조지 5세, 시아주버니 에드워드 8세 그리고 본인의 왕위 계승과 모든 외손자들의 출생에 장녀인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그리고 첫 손주인 찰스 3세의 전처인 전 외손자며느리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의 결혼식과 장례식 그리고 진외증손자들인 윌리엄 왕세자해리 왕자의 출생까지 다 지켜보고 죽었다.

6. 가족 관계

6.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조지 6세
(George VI)
<colbgcolor=#fff3e4,#331c00> 조지 5세
(George V)
<colbgcolor=#ffffe4,#323300>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작센코부르크고타앨버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테크의 공녀 메리
(Princess Mary of Teck)
테크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Teck)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알렉산더
(Duke Alexander of Württemberg)
키스레데 여백작
레데이 클라우디아
(Countess Claudine Rhédey von Kis-Rhéde)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
(Princess Mary Adelaide of Cambridge)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52]
(Prince Adolphus, Duke of Cambridge)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Hesse-Kassel)

6.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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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엘리자베스 2세
(Elizabeth II)
1926년 4월 21일 2022년 9월 8일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슬하 3남 1녀[53]
2녀 스노든 백작부인 마거릿 공주
(Princess Margaret, Countess of Snowdon)
1930년 8월 21일 2002년 2월 9일 1대 스노든 백작 안토니 암스트롱존스[54]
슬하 1남 1녀

7. 관련 작품

  •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는 벤 멘델슨이 조지 6세 역할을 맡았는데, 열연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 겉모습은 닮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콜린 퍼스, 자레드 해리스와 달리 겉모습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조지 6세와 매우 비슷했다. 초반에는 처칠을 총리로 임명하면서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지만 후반부에서는 서서히 고립되어가던 처칠에게 직접 찾아와 직접 지지의사를 표명하는 것으로 조력한다.
  • Hearts of Iron IV》에서는 역사대로 에드워드 8세가 물러날 경우 조지 6세가 즉위. 1차 세계대전에서 협상국이 패배했다는 대체역사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캐나다 자치령으로 망명한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 등장하며, 역시 에드워드 8세가 물러나면서 선택지가 생기며, 이 선택지 중 하나[56]를 통해 즉위할 수 있다. 단 현실과 다르게 즉위명은 "앨버트 1세".
  • 대체역사소설 《동방의 라스푸틴》에서는 형인 에드워드 8세가 2차대전을 '추축국으로' 참전하는 바람에 제국은 초토화되었으나 본인은 멀쩡히 살아남는다. 이후 러시아와 미국의 압박에 대응한 와일드카드로써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프랑스와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영불제국이 성립하고, 영불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한다. 원 역사보다 한참 오래 살고 있는 건 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자 해외 도피를 거부하고 런던에 남기로 한다. 이후 독일군의 버킹엄 궁전 폭격으로 사망해 부인인 엘리자베스 왕비와 같이 시신으로 발견되나, 영국인들이 이를 알게 되면 결사항전으로 나올 것을 우려한 히틀러에 의해 은폐되었다가, 해리스의 런던 폭격 때 이 사실을 역이용한 히틀러에 의해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한 걸로 알려지게 된다.

8. 기타

  • 영국 해군의 차세대 핵미사일 탑재 전략 핵잠수함드레드노트급 잠수함의 4번함 함명이 '킹 조지 6세'로 결정되었다. 정확히는 킹 조지 5세급 전함의 건조 당시, 재위 중이던 에드워드 8세는 자신의 이름을 네임쉽으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리스 심프슨과의 결혼을 두고 분규 중이던 에드워드 8세가 자신이 아닌 부왕 조지 5세의 이름을 네임쉽으로 다시 지정했다.[57] 이후 조지 6세가 즉위하면서 2번함을 퇴위한 형을 기념하는 뜻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3번함을 자신의 즉위 전 작위이던 듀크 오브 요크로 지정했다. 그리고 3번함인 듀크 오브 요크가 노스케이프 해전의 수훈함이 되면서 후대에 킹 조지 6세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것.
  •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별도 지시를 내려 빌헬름 2세의 고명딸 빅토리아 루이제[58]가 소련군의 진주를 피해 독일 내 영국군 점령지로 탈출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 2차 대전 당시에 녹음된 조지 6세의 육성. 들어보면 알겠지만 연설 실력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영화 킹스 스피치는 조지 6세와 그의 언어치료사였던 라이오넬 로그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해당 연설이 킹스 스피치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연설. 영화를 보고 들어보면 발음이나 간격을 신경써서 최대한 같게 들려주려고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 아버지 조지 5세와 은근히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왕호도 조지고, 차남으로 태어나 해군 장교로 왕위 계승과 거리있는 삶을 살다가, 예상치 못하게 왕위를 계승했고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승전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아버지의 향년 나이보다 14살이나 일찍 세상을 떠난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1939년 미국 방문 당시 오찬으로 핫도그를 대접받았다. 조지 6세 부부는 살면서 핫도그를 처음 보았기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어떻게 먹는지를 물어보았고 대통령은 손으로 집어서 먹으면 된다고 먹는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조지 6세는 설명을 들은대로 손으로 집어서 먹었지만 엘리자베스 왕비는 그래도 왕족인데 품격을 잃을 순 없어 나이프와 포크로 먹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가 영국을 폄하하기 위해 국왕 부처에게 핫도그를 대접한 건 아니고 다분히 의도적인 프로파간다였다. 국왕이 손으로 핫도그를 먹는 모습은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주요 뉴스에 대서특필되었으며, 영부인 엘레나 여사는 오찬 직전 기자들에게 메뉴를 흘리기도 하였다. 조지 6세가 방문했을 때가 39년 6월이었는데, 알다시피 3개월 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미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면 영국을 돕고 싶어했으나 당시 여론은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럴 때 영국 국왕이 핫도그를 먹는 모습을 연출하면, 영국 국왕 역시 미국의 서민처럼 핫도그를 먹는 사람이며, 영국은 미국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 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는 형제의 나라라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심어줄 수 있고,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을 우호적이게 돌릴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즉, 핫도그를 통해 이미지메이킹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를 알았는지 조지 6세도 손으로 핫도그를 먹는 도전을 한 것이었다. #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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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재위 시기 조지 6세 시대 (제2차 세계 대전)
가족 관계 가족관계
아버지 조지 5세 · 어머니 테크의 메리 · 배우자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형 에드워드 8세 · 동생 프린세스 로열 메리,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켄트 공작 조지 왕자, 영국의 존 왕자 · 장녀 엘리자베스 2세 · 차녀 마거릿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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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증조할아버지 앨버트 공과 고모할머니 앨리스 공주의 기일(즉, 앨버트 공과 앨리스 공주 부녀는 17년간의 차이로 같은 날에 사망했다는 것.)에 출생했다. 특히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에게는 앨버트 공의 기일 34주년이여서 많은 축복을 받진 못했는데 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괜히 냉대받는 친손자가 안쓰럽고, 어머니인 여왕을 위로하기 위해서인지 이름을 아버지와 자신에게서 따온 앨버트라고 지어주고 나서야 여왕은 본체 만체하던 증손자를 예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2] 영국 국왕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최고통치자(Supreme Governor of the Church of England)직을 겸하며 신앙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Fidei Defensor)라는 호칭이 부여된다. 다만 성공회 전체의 지도자는 아니다.[3] 영국 국왕은 잉글랜드에서는 성공회 신자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며, 빅토리아 여왕 시대부터 왕족이 밸모럴 성에 거주할 때는 크래디 커크에서 예배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4] 가족들 사이에서의 애칭은 릴리벳이었다.[5] 심프슨 부인은 2번의 이혼경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국 국교회는 왕실 일원이 이혼한 인물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 게다가 영국 국왕은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다. 이러한 이유와 관련되어 당시 영국 국민들의 정서도 이혼한 인물과의 결혼에 관대하지 않았다. 이후 (조지 6세의 차녀인) 마가렛 공주와 조지 6세의 왕실 시종무관이었던 피터 타운센드 공군 대령과와의 결혼이 무산된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 피터 타운센드가 이혼남이었기 때문이다.[6] 1949년 이전의 아일랜드는 완전한 공화국이 아니라 영국의 자치령이었다. 그러나 이미 1937년 시점에서 아일랜드가 독립전쟁 당시 아일랜드를 영연방 내 자치령으로 규정한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파기함으로써 사실상 아일랜드는 완전 독립한 상태였다. 다만 영국이 이를 승인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고, 1949년에 와서는 영국이 아일랜드의 영연방 탈퇴와 완전 독립을 승인한 것.[7] 아버지가 콘월 공작이 되면서 작위가 바뀌었다.[8] 아버지가 왕세자에 해당하는 웨일스 공이 되면서 작위가 바뀌었다.[9] 아버지의 즉위로 작위가 바뀌었다.[10] 국왕의 차남에게 주어지는 작위였다. 킹 조지 5세급 전함 3번함 듀크 오브 요크가 바로 조지 6세의 이 작위에서 따온 것.[11] His Majesty George the Sixth,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 Sovereign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Sovereign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Sovereign of the Most Illustrious Order of Saint Patrick,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Sovereign of 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 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Sovereign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Sovereign of the Distinguished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Imperial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Most Exalted Order of the Star of India, Sovereign of the Most Eminent Order of the Indian Empire, Sovereign of the Imperial Order of the Crown of India, Sovereign of the Order of British India, Sovereign of the Indian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Burma, Sovereign of the Royal Order of Victoria and Albert,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Edward VII,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George V,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George VI, Sovereign of the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Sovereign of the Royal Victorian Order, Sovereign of the Most Venerable Order of the Hospital of St John of Jerusalem[12] 분홍색과 적갈색의 빗금은 당시 자치령 국가들의 보호령이며, 각각 남서아프리카 (남아프리카 연방의 보호령), 파푸아뉴기니 (호주의 보호령)의 두 국가이다.[13] 1937년 영연방을 탈퇴하고 공화국이 될 때부터 이미 영국 자치령이 아니었으나, 조지 6세는 형식상의 아일랜드의 국왕으로 10여년 간 더 재위하다가 아일랜드 공화국 법이 1948년 통과되며 이 때에 영국 국왕의 아일랜드 내 지위를 박탈하였고, 이에 따라 아일랜드 국왕에서 완전히 퇴위하였다.[14] 뉴펀들랜드는 1949년까지 형식상으로나마 자치령으로 남아 있었지만,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붕괴하여 1934년부터 영국에 직할 통치를 요청하여 실질적으로는 영국에서 파견된 뉴펀들랜드 정부위원회(Newfoundland Commission of Government)가 통치하는 속령에 가까웠다.[15] 에드워드 7세의 본명도 앨버트 에드워드였지만 즉위명으로 미들네임을 선택하면서 에드워드 7세가 됐다.[16] 할아버지도 마찬가지.[17] w 등의 특정 음소로 시작하는 단어 앞에서 말을 더듬었다. 말더듬 외에도 일부 혀 근육과 관련된 언어장애가 있었다. 그 중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는 R을 잘 발음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녹음을 들어보면 r을 여느 용인발음 화자처럼 치경 접근음으로 발음하지 못하고 마치 양순 유성 마찰음처럼 발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8] 그의 아버지인 조지 왕세손이 전 해군 출신으로, 아들들에게는 엄격한 아버지였던 탓에 앨버트의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겼다.[19] 다만 테니스는 계속 왼손으로 쳤다.[20] 영화 킹스 스피치에선 왼손잡이 교정 이외에도 안짱다리도 억지로 부목을 대서 교정을 받았고, 심지어 자신을 돌보던 유모에게 학대를 받았다고 라이오넬 로그에게 토로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21] 재학 중 다른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에는 소심함이나 말더듬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장남인 에드워드가 있었기에 차남인 앨버트가 국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22] 존슨 씨(Mr. Johnson, 1913년 해군장교로 복무할 당시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를 가명으로 썼다.[23] 실제로 에드워드 8세는 앨버트와 실라 그리고 실라 남편과 함께 골프를 치러가서, 앨버트와 실라 둘이서 있을 수 있게 실라의 남편을 꾀어내기도 했다.[24] 실라와 헤어지는 대신 일종의 조건으로 내걸어 생일날 요크 공작 작위를 주었다. 아버지인 조지 5세 역시 요크 공작 출신이라 의미있는 작위이긴 했다. 요크 공작 작위는 잉글랜드 왕의 차남에게 주어지는 작위라 어차피 받게 될 작위이기도 했다.[25] 비록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긴 했지만 심한 낯가림과 말더듬 때문에 대중 앞에 나서기를 많이 꺼렸고 이 때문에 자기 형 에드워드보다 주목받지 못했다.[26] 1855. 3. 14. ~ 1944. 11. 7. 향년 89세.[27] 이런 법칙을 귀천상혼이라고 하는데, 영국 왕실은 귀천상혼의 개념이 약했기 때문에 앨버트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수 있었다. 만약 다른 유럽 군주국이었다면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국가가 당시 스웨덴 왕실.(1970년대에 와서야 귀천상혼 폐지)[28] 민심을 읽는 법을 알았던 조지 5세는 외국인 공주와 아들을 결혼시키기보다 자국인과 결혼시킴으로써 국민의 인기를 얻고자 하였다. 거기다 어머니인 메리 왕비는 엘리자베스를 아주 마음에 들어해서 오히려 조지 6세에게 어서 청혼하라고 할 정도였다.[29] 장인 클로드, 장모 세실리아 캐번디시벤팅크[59], 아내 엘리자베스, 본인 조지 6세, 어머니 메리, 아버지 조지 5세[30] 킹스 스피치 처음에서 말을 더듬는 그 장면.[31] 증손녀인 엘리자베스 2세가 태어나기 6개월 전인 11월 20일에 사망했다.[32] 그 외에도 즉위한 후인 1947년 남아프리카 연방을 방문했을 때도 흑인과 악수하지 못하게 하는 현지 경호원들에게 게슈타포라 일갈한 바 있으며,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모두 죽여버려야 한다고 강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등 여러모로 올곧은 인품의 소유자였다.[33] 말이 사교명사지 지금의 셀럽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34] 스탠리 볼드윈 뿐만 아니라 소속당인 보수당과 심지어 당시 야당이었던 노동당같은 생각이었다.[35] 다만 정확하게는 여기서 이혼녀는 돌려 말한것이고 실제로는 윌리스 심프슨의 심각한 불륜 문제 때문이었다. 에드워드와 만날당시에도 심프슨은 2번째 남편과 결혼한 상태였는데 불륜으로 에드워드를 만난것이다[36] 당시 에드워드 8세는 귀천상혼의 형식으로 결혼해 월리스 심프슨에게 왕비 작위를 주지 않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내각에서 거부했다고 한다.[37] 당시 조지 6세는 자신의 일기에 "내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을 때 나는 무너지고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고 적었다.[38] 당연하겠지만 새로 즉위한 군주가 그 해도 채우지 못하고 군주가 바뀌는 일이 일어나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독일에서도 1888년을 세 황제의 해라고 부른다.[39] 조지 6세의 말더듬이 증세가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0] 당시 내각에서는 캐나다에 망명 정부를 세울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조지 6세가 거부했다고 한다.[41] 위 사진은 연출된 것으로,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나오듯 실제로는 스튜디오에서 연설한 후 옆에 있는 집무실처럼 꾸민 책상에서 위와 같은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 조지 5세의 크리스마스 연설은 스튜디오에서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연설 방송이 끝난 후 사진을 따로 찍은 것은 같다. 그 당시 사진은 플래시(스트로보)가 펑 하고 터지는 백금 합금이었기 때문에, 연설을 방해할 정도로 굉장히 큰 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다.[42] 런던 동부 지역. 서민과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다. 공장 또한 많았기에 당연하게도 주된 폭격 대상이기도 했다.[43] 불행한 죽음과 별개로 켄트 공작 조지 왕자는 선왕인 에드워드 8세보다 더한 망나니였다. 워낙 스케일이 커서 아예 영국 왕실에서는 조지 왕자의 생애만큼은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다.[44]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곧 공화국으로 전환되면서 해당 칭호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45] 조지 6세의 막내 고모부이기도 한다.[46] 순방 당시 엘리자베스 공주의 보좌관이었던 마틴 차트리스 대령은 조지 6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대비해, 공주가 상복으로 입을 검은 옷과 즉위 관련 문서를 미리 챙겨다녔을 정도로 왕실은 조지 6세의 건강을 상당히 심각하게 우려했다.[47] 시종이 사망한 조지 6세를 발견한 시각이다.[48]에드워드 8세는 58세에 사망한 동생과 다르게 팔순을 앞 둔 나이인 79세에 사망하며 지금은 평균수명에 미치지 못하지만 당시 남성 평균수명이 60대였으니 매우 장수한 편이다.[49] 키는 175 cm로 자신의 형인 에드워드 8세(168 cm)보다 더 크고 당시 영국인 평균키(170 cm)보다 컸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184 cm)과 나란히 섰을 때는 역시 작아보인다. 이를 본 미 국무부의 한 관리는 키가 큰 루스벨트 옆에 서니 꼭 피그미족 같았다고 일기장에 썼다. 다만 루스벨트가 유독 키가 컸을 뿐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키가 4번째 컸다. 피그미족은 남성 평균 키가 150cm이다. 참고로 미국 방문 당시 퍼킵시, 하이드 파크, 박람회가 개최된 마운트버넌 등을 방문하였다.[50] 런던에서 윈저 성까지는 특별 열차를 타고 이동했다. 70년 후 거행된 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 당시에는 교통이 이때보다 훨씬 좋아져서 고속도로를 이용해 윈저 성으로 이동했다.[51] 향년 101세에 죽었는데, 사망 당시 영국 왕족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즉, 조지 6세가 죽고 50년간 왕대비로 산 것. 이후 제수인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가 2004년에 102세로 사망하면서 최장수 기록이 갱신되었다.[52] 조지 3세의 7남이다.[53] 찰스 3세,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54] 1978년 이혼.[55] 동명의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56] 앨버트 1세, 헨리 9세, 조지 6세. 선택되지 못하면 호주 총독으로 보낼 수 있다.[57] 조지 5세의 이름을 딴 킹 조지 5세급 전함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존재했다.[58] 훗날 그리스 국왕이 되는 파블로스의 장모이자, 소피아 왕대비의 외조모이다. 빌헬름 2세가 부왕 조지 5세의 사촌형이므로, 조지 6세 본인에게는 육촌 누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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