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9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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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8년 4월 8일 | ||
독일 연방 슐레스비히 공국 고토르프 성 | |||
사망 | 1906년 1월 29일 (향년 87세) | ||
덴마크 코펜하겐 아말리엔보르 궁전 | |||
재위기간 | 덴마크 국왕 | ||
1863년 11월 15일 ~ 1906년 1월 29일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 |||
1863년 11월 15일 ~ 1864년 10월 30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ec0013><colcolor=#fff> 가문 | 글뤽스부르크 가문 | |
아버지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 ||
어머니 | 헤센카셀의 루이제 카롤리네 | ||
형제자매 | 루이제 마리, 프레데리케, 카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루이제, 율리우스, 요한, 니콜라우스 | ||
배우자 | 헤센카셀의 루이제 (1842년 결혼 /1898년 사망) | ||
자녀 | 장남 프레데리크 8세, 장녀 알렉산드라, 차남 요르요스 1세, 차녀 다우마, 삼녀 티라, 삼남 발데마르 | ||
종교 | 루터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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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조 최초의 국왕.역대 덴마크 국왕 가운데 마지막으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통치한 국왕이다.
2. 생애
2.1. 즉위 배경
1818년 덴마크 산하 슐레스비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평범한 왕족이었으나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3세의 9대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헤센카셀의 루이제 카롤리네 역시 별 볼일 없는 왕족이었으나 프레데리크 5세의 외손녀였다.[1] 또한 이모였던 헤센카셀의 마리가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6세의 아내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후견인으로 지명된 프레데리크 6세는 그를 아들처럼 돌봐주었고 사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후 덴마크 왕실 기마 근위대의 장교로 근무했다. 1842년 친척이자 역시 덴마크 왕실의 후손인 헤센카셀의 루이제와 결혼했다.당시 덴마크 국왕이었던 프레데리크 7세는 자녀가 없었고, 추정상속인 페르디난트 왕자 역시 자녀가 없었다. 페르디난트 다음의 왕위 계승 순위 3위 왕자는 헤센카셀의 프리브리히 빌헬름이지만, 누나 루이제와 매형 크리스티안을 위해 왕위 계승권을 양보하면서 크리스티안은 명실상부한 덴마크 왕실의 후계자가 되었다.
1848년 프레데리크 7세는 덴마크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2]을 덴마크 왕실의 여계후손이 계승해 통치할 수 있는 법안을 발표[3]했는데, 이는 홀슈타인의 반발[4]을 불렀고, 결국 내전을 거쳐 전쟁까지 부르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로 이어졌다.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지만,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은 덴마크와의 동군연합으로 남았고, 이 전쟁에서 홀슈타인 편에 선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가와 글뤽스부르크 공작은 계승 순위에서 제외되면서 크리스티안이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떠올랐다. 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 홀슈타인의 편에서 서지 않았고, 덴마크에서 교육받았으며 장모와 외할머니도 덴마크의 공주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내 루이세는 남편이 적합한 왕위 계승자로 선택될 수 있도록 유럽 왕족의 친척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쓰면서 지지를 구했다.
이러한 바탕을 등에 업고 크리스티안은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던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7세의 추정상속인 및 후계자가 되었고, 1863년 프레데리크 7세가 죽자 즉위하였다. 참고로 즉위 8개월 전 차남 빌헬름이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가 되면서 아들이 먼저 왕이 된다. 이러한 구도는 장남 프레데리크 8세와 차손 호콘 7세로 이어진다.
2.2. 즉위 기간
선왕 프레데리크 7세가 덴마크의 입헌군주제를 허락한다고 선언했으나 실효 기간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망하였으므로, 의회 통치의 시작은 단연 크리스티안 9세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9세는 노골적으로 우익 정당을 지지했고, 그로 인해 의회가 흔들렸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2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개패듯이 털리는 등 나라 안팎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그래도 재위 말년에는 자유주의 성향의 내각을 지지하는 등 덴마크의 '의회민주주의 정치'의 초석을 놓았고, 정도를 걷는 신중함으로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출처)
3. 가족관계
3.1. 자녀
왕비 헤센카셀의 루이제[5] (1817년 9월 7일 ~ 1898년 9월 29일)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프레데리크 8세 (Frederick VIII) | 1843년 6월 3일 | 1912년 5월 14일 | 스웨덴의 로비사 공주 슬하 4남 4녀[6] |
1녀 | 영국의 왕비 알렉산드라 (Alexandra, Queen of the United Kingdom) | 1844년 12월 1일 | 1925년 11월 20일 | 에드워드 7세 슬하 3남 3녀[7] |
2남 | 요르요스 1세 (George I) | 1845년 12월 24일 | 1913년 3월 18일 |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슬하 5남 3녀[8] |
2녀 | 러시아의 황후 마리야 표도로브나 (Maria Feodorovna, Empress of Russia) | 1847년 11월 26일 | 1928년 10월 13일 | 알렉산드르 3세 슬하 4남 2녀[9] |
3녀 | 하노버의 왕세자비 티라 (Thyra, Crown Princess of Hanover) | 1853년 9월 29일 | 1933년 2월 26일 | 하노버의 왕세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슬하 3남 3녀[10] |
3남 | 발데마르 왕자 (Prince Valdemar) | 1858년 10월 27일 | 1939년 1월 14일 | 오를레앙의 마리 공녀[11] 슬하 4남 1녀[12] |
유럽의 중소 왕국의 군주인데도 당대 유럽 최고의 강대국인 영국의 왕세자와 러시아의 황태자를 사위로 맞아들이게 되었고, 이 두 사위가 모두 자신의 생전에 영국의 군주와 러시아의 황제가 되는 것을 지켜보기까지 한 인물이기도 하다.
독일 제국의 빌헬름 1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스웨덴&노르웨이의 오스카르 2세처럼 87세까지 장수하면서 증손자까지 보았다. 위 사진은 4대가 함께 찍은 사진으로 가운데 어린 아이가 장증손인 프레데리크 9세이며, 왼쪽이 크리스티안 9세, 오른쪽이 장남 프레데리크 8세, 뒤에 서 있는 인물이 장손인 크리스티안 10세이다.
4. 여담
- 전임인 프레데리크 7세까지는 덴마크 국왕이 곧 올덴부르크 왕조의 수장이였지만, 올덴부르크 왕조 본가가 단절되고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한 크리스티안 9세 이후부터는 올덴부르크 왕조의 수장과 덴마크 국왕이 분리된다. 크리스티안 9세의 가문인 글뤽스부르크 왕조보다 계승 순위에서 더 앞섰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이 올덴부르크 왕조의 종가, 수장이였고, 1931년에 단절되면서 1931년부터 현재까지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수장이 올덴부르크 왕조의 종가, 수장이 된다. 현 수장인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차남 프리드리히의 후손이고, 덴마크 국왕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사남 크리스티안 9세의 후손이므로 덴마크 국왕은 여전히 계승 순위에서 밀려서 올덴부르크 왕조의 수장이 아니다.
- 덴마크 정부는 크리스티안 9세의 후손에 해당하는 인물이며, 당사자의 신청이 있다면, 자국 국적 보유 여부에 상관없이 자국의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준다.[13] 옛 그리스 왕국의 전(前)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가 그리스 공화국 정부로부터 무국적자 취급을 당해서 그리스 입국이 거부되자, 이 규정을 이용해 발급받은 덴마크 외교관 여권으로 그리스에 입국한 바 있다.
-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사돈들처럼[14] 키 180cm 이상인 장신이다. 장남, 장손, 장증손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201cm의 장손 크리스티안 10세보다는 작지만 장남 프레데리크 8세보다는 키가 크다.
- 1838년 프레데리크 6세를 대리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빅토리아 여왕에게 청혼해봤지만, 앨버트 공에게 마음이 있던 빅토리아는 청혼을 거절했다. 그래도 빅토리아는 크리스티안에게 좋은 인상을 가졌는지 이후에 빅토리아의 장남 에드워드 7세와 크리스티안의 장녀 알렉산드라가 결혼을 하면서 사돈을 맺었다.
[1] 여담으로 어머니 헤센카셀의 루이제 카롤리네의 부친 헤센카셀의 카를은 생 제르맹 백작과 관련 있는 인물이다.[2] 덴마크 국왕은 크리스티안 1세 이래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동군연합으로 통치하고 있었다.[3] 사실 부계혈통으로만 봐도 크리스티안은 프레데리크 7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다. 촌수는 무려 19촌으로 크리스티안이 숙부뻘 된다. 이토록 먼 친척이다보니 여계 계승이 가능토록 한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크리스티안이 프레데리크 7세의 7촌 조카가 된다.[4] 홀슈타인은 독일 연방의 구성원으로 독일인이 많이 거주하였고 19세기를 강타한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독일로 편입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5] 루이제 왕비의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폰 헤센카셀이 크리스티안 9세의 외할아버지 카를 폰 헤센카셀의 친동생이므로, 두 사람은 육촌 남매간이다.[6] 크리스티안 10세, 호콘 7세 등.[7] 클래런스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 조지 5세,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 노르웨이의 왕비 모드 등.[8] 콘스탄티노스 1세, 요르요스 왕자, 마리아 공주, 안드레아스 왕자 등.[9] 니콜라이 2세,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등[10]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비 알렉산드라 등.[11] 루이필리프 1세의 증손녀. 루이필리프의 장남이자 왕세자였던 페르디낭 필리프의 둘째 아들인 로베르의 장녀다.[12] 그 중 딸 마르그레테는 미하이 1세의 부인 안 드 부르봉파름의 어머니이다.[13] 글뤽스부르크 왕조 본가와,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 올덴부르크 대공가는 해당되지 않는다.[14] 영국의 국서 앨버트 공과 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 & 콘스탄틴 대공 & 미하일 대공 형제도 크리스티안 9세처럼 장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