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2E0C2><colcolor=#000000> 러시아의 대공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Великий князь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России | ||||
이름 |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 |||
출생 | 1832년 10월 25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테르고프 궁전 | ||||
사망 | 1909년 12월 18일 (향년 77세) | |||
프랑스 제3공화국 알프마리팀 칸 | ||||
배우자 | 바덴의 체칠리에 (1857년 결혼 / 1891년 사망) | |||
자녀 | 니콜라이, 아나스타샤, 미하일, 게오르기, 알렉산드르, 세르게이, 알렉세이 | |||
아버지 | 니콜라이 1세 | |||
어머니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 |||
형제 | 알렉산드르 2세, 마리야, 올가,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이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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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대공. 니콜라이 1세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맏형인 알렉산드르 2세와 14살이나 차이가 난다.
아버지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의 네 아들들에게 자신과 형제들의 이름을 물려줬다. 이에 장남인 알렉산드르 2세는 첫째 큰아버지인 알렉산드르 1세, 차남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둘째 큰아버지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삼남인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 막내인 미하일 본인은 작은아버지인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제2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바덴 대공비 루이제[1],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 루이제의 사촌이며,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과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아버지다.
그리고 덴마크의 알렉산드리네 왕비와 독일 제국의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외할아버지고 프레데리크 9세와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의 외증조할아버지다.
현 러시아 황실 당주 후보로 거론되는 로스티슬라브 등 러시아 황족의 직계 조상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32년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미하일 본인도 장신의 미남이였다.젊은 시절 |
2.2. 결혼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 |
1857년 바덴 대공 레오폴트와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의 막내딸인 바덴의 체칠리에와 결혼했다.[2] 결혼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체칠리에는 러시아식 이름인 올가 표도로브나로 불리게 되었다.
아내 체칠리에, 장남 니콜라이, 장녀 아나스타샤와 함께 |
체칠리에 사이에서 슬하 6남 1녀를 두었으며 부부는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미하일 대공은 니콜라이 1세의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부부관계가 좋았으며, 사생아도 낳지 않았다.
조카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한 이후 20년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서 살았는데 체칠리에를 싫어한 알렉산드르 3세가 등 뒤에서 그녀를 하버 아줌마라며 뒷담화하고[3] 다른 황족들도 체칠리에의 출생스캔들에 대해 수근거릴 때 아내를 보호했다.
1891년 체칠리에가 사망하면서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다.
2.3. 캅카스 총독
큰 형 알렉산드르 2세가 황제가 되고 캅카스 총독이 되어 20년 동안 캅카스에서 살았고, 형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면서 캅카스 총독직에서 물러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2.4. 말년
니콜라이 2세와 황족들.[4] | 친종손[5] 니콜라이 2세와 함께. |
니콜라이 1세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의 4남 4녀 중 가장 장수해서 20세기까지 살았고 증손주도 봤다.[6] 형제자매들 중 유일하게 친종손 니콜라이 2세의 즉위까지 지켜봤으며 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재위 기간 때 태어나 큰형 알렉산드르 2세, 조카 알렉산드르 3세, 종손 니콜라이 2세까지 총 4명의 러시아 황제들을 만났다.
미하일 대공과 외손녀들.[7] | 1903년에 찍은 사진 |
고명딸, 외손녀, 외외증손자와 함께.[8] | 외외증손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9]과 함께.[10] |
2.5. 사망
미하일 대공의 시신. |
프랑스 알프마리팀 칸에서 향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시신은 크림반도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송되었다. 1910년 1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 대성당에 묻혔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러시아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Nikolayevich of Russia) | <colbgcolor=#fff3e4,#331c00>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 <colbgcolor=#ffffe4,#323300> 파벨 1세 (Paul I) | |
표트르 3세 (Peter III) | |||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 |||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 |||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11] (Margravine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eußen) |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ederick William II) | |||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자 (Landgravine Frederika Louisa of Hesse-Darmstadt)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 (Charles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trelitz) | |||
헤센다름슈다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ederica of Hesse-Darmstadt)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Nicholas Mikhailovich) | 1859년 4월 26일 | 1919년 1월 28일[A] | |
1녀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비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Anastasia Michailowna, Grand Duchess of Mecklenburg-Schwerin) | 1860년 7월 28일 | 1922년 3월 11일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슬하 1남 2녀[13] |
2남 |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Mikhailovich) | 1861년 10월 16일 | 1929년 4월 26일 | 메렌베르크의 조피 여백작[14] 슬하 1남 2녀 |
3남 |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George Mikhailovich) | 1863년 8월 23일 | 1919년 1월 28일[A] |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아 공주[16] 슬하 2녀 |
4남 |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Alexander Mikhailovich) | 1866년 4월 13일 | 1933년 2월 26일 | 러시아의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17] 슬하 6남 1녀[18] |
5남 |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Sergei Mikhailovich) | 1869년 10월 7일 | 1918년 7월 18일[A] | |
6남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Alexei Mikhailovich) | 1875년 12월 28일 | 1895년 3월 2일 |
4. 여담
- 미하일과 가족들은 친프랑스 성향이 강했다. 미하일 본인도 프랑스를 방문하다가 사망했고, 첫째 딸 아나스타샤도 친프랑스 성향이여서 독일에서는 아나스타샤를 좋게 보지 않았고, 이후 프랑스에 밀입국해서 살다가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넷째 아들 알렉산드르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자 프랑스로 이주했으며[20] 역시 프랑스에서 생을 마쳤다.
- 큰 형 알렉산드르 2세와 둘째 형 콘스탄틴 대공처럼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 미하일의 큰외손녀인 알렉산드리네가 크리스티안 9세의 장손 크리스티안 10세의 왕비였고,[21]알렉산드르 2세의 큰며느리인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가 크리스티안 9세의 차녀였고, 콘스탄틴의 큰사위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가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이었다.
[1] 모계상으로 사촌이면서 부계상으로는 5촌이다. 미하일의 사촌누나 아우구스타가 둘째 외삼촌 빌헬름 1세의 아내이자, 셋째 고모 마리야의 차녀였다.[2] 참고로 미하일 대공의 외조카인 마리야 막시밀리아노브나 공녀(큰누나 마리야 여대공의 장녀)는 체칠리에의 오빠 빌헬름 공자와 결혼했다. 즉, 외삼촌-외조카가 나란히 남매와 결혼한 셈.[3] 체칠리에는 어머니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가 하버라는 이름의 유대인 은행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는 소문이 평생을 따라다녔다.[4] 가운데의 노인이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이다.[5] 큰 형 알렉산드르 2세의 손자.[6] 둘째 형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도 외증손자 요르요스 2세가 태어나는것을 보기는 했다.[7] 왼쪽이 알렉산드리네, 오른쪽이 체칠리에[8] 미하일 본인의 외증손자임과 동시에 이종사촌 누나의 외증손자이기도 하다. 즉 크리스티안 10세와 알렉산드리네 왕비는 8촌끼리 결혼한 것.[9] 1906 ~ 1940. 둘째 외손녀 체칠리에 황태자비와 빌헬름 황태자의 장남.[10] 미하일 본인의 외증손자임과 동시에 외사촌형의 친증손자이기도 하다. 체칠리에도 언니와 마찬가지로 8촌끼리 결혼했다.[11]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외손녀이다.[A]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당함.[13] 덴마크의 왕비 알렉산드리네,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 독일제국의 황태자비 체칠리에[14]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외손녀다.[A] [16] 요르요스 1세와 올가 왕비의 차녀이다. 올가 왕비가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친사촌이므로, 게오르기 대공과 마리아 공주는 5촌 숙부와 조카끼리 결혼한 것이다. 게오르기는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당했다.[17] 알렉산드르 3세의 장녀. 알렉산드르 3세는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의 친사촌이니 이쪽도 5촌 숙부와 조카끼리 결혼한 것이다.[18] 펠릭스 유스포프 공비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등.[A] [20] 반면 아내인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영국으로 이주했다.[21] 또한 외손자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는 매형 크리스티안 10세의 고종사촌 알렉산드라 공주(덴마크의 티라 공주의 차녀)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