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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 표트르 1세 | 예카테리나 1세 | 표트르 2세 | 안나 이바노브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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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르 2세 | 알렉산드르 3세 | 니콜라이 2세 | }}} }}}}}} | |
| <colbgcolor=#ffcd30,#ffcd30><colcolor=#000,#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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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68년 5월 18일 |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차르스코예 셀로 알렉산드르 궁전 | |||
| 사망 | 1918년 7월 17일 (향년 50세) | ||
| 러시아 SR[1] 페름현 예카테린부르크구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예프 하우스[2] (現 러시아 우랄 연방관구 스베르들롭스크주 예카테린부르크 피의 교회) | |||
| 재위기간 | 전러시아의 황제[3] | ||
| 1894년 11월 1일 ~ 1917년 3월 15일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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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 ||
| 아버지 | 알렉산드르 3세 | ||
| 어머니 |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 ||
| 형제자매 | 동생 알렉산드르[4], 게오르기[5], 크세니야, 미하일[6], 올가 | ||
| 배우자 | 헤센의 알릭스 공녀 (1894년 결혼) | ||
| 자녀 | 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알렉세이 |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 |
1. 개요
러시아 제국 제14대 황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 제8대 황제. 러시아 역사상 마지막 황제이자 마지막 군주이다.황후 헤센의 알릭스 공녀의 남편으로 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일명 OTMAA 남매)의 아버지. 제13대 황제 알렉산드르 3세와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의 4남 2녀 중 맏이이자 장남이다. 알렉산드르 2세와 헤센의 마리의 장손이자 첫 손주이며,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의 맏조카이다. 알렉산드르와 게오르기, 추정상속인으로 지명한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맏형이자 크세니야와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맏오빠.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러시아 제국 초대 황제 표트르 대제와 그의 계후이자 제2대 황제 예카테리나 1세의 직계 7대손으로 두 부부의 장녀 안나 페트로브나 여대공[7]과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의 직계 6대손이다.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대제의 내손자[8]이자 파벨 1세와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의 고손자이며 니콜라이 1세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의 증손자. 그리고 알렉산드르 1세의 종증손자이다.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수난자 성 니콜라이(святой страстотерпец Николай)로 시성된 인물이며, 축일은 7월 17일이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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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콜라이 2세 일가 컬러 복원 사진. |
황태자 시절, 헤센 대공국 루트비히 4세(헤센)의 4녀인 알릭스와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했다. 알릭스의 어머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공주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장남이 독일 제국 빌헬름 2세이니 알릭스와 빌헬름 2세는 서로 이종사촌이다.[9] 또한 빌헬름 2세의 여동생이자 알릭스의 이종사촌인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는 니콜라이 2세의 외사촌 콘스탄티노스 1세의 왕비이기도 하다.[10]
알릭스의 둘째 언니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가 먼저 러시아 제국으로 시집왔다. 상대는 알렉산드르 3세의 남동생, 즉 니콜라이 2세(당시 황태자)의 작은아버지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었다. 16살의 니콜라이 황태자와 12살의 알릭스는 이 결혼식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10년 후 결혼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연애결혼이었다. 이 결혼을 위해 알릭스는 이름도 러시아식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로 바꾸고 러시아어 공부에 매진했으며, 종교도 루터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을 정도로 많은 노력을 했다.
당시 문란하기로 유명했던 로마노프 가문의 풍속과 달리,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는 한눈 팔지 않고 서로에게만 충실하여 1남 4녀를 낳을 정도로 부부 사이가 좋았다.
다만 총각 시절에 연애를 했던 적은 있다. 상대는 폴란드인 발레리나 마틸다 크셰신스카(Matylda Maria Krzesińska / Матильда Феликсовна Кшесинская / Mathilde-Marie Feliksovna Kschessinska, 1872–1971)인데, 황립 극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로서 대단히 야심찬 여자이기도 했다. 니콜라이는 숫기 없는 성격에 종교적이라 이성에 별 관심이 없어서, 이를 걱정한 가족들이 모의해 소개해 준 여자가 크셰신스카였다. 물론 결혼 전제가 아니라서 진심으로 발전하지 않게 관리 감독까지 받았다. 극장의 스타 발레리나들과 황실 남자들의 스폰서 관계는 꽤 흔한 일이라, 궁정에서도 그 정도 관리는 전문 영역(?)에 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콜라이가 알릭스에게 반하게 되면서 관계를 정리했지만, 마틸다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황제의 사촌들과 여러 다리 걸치는 염문설을 뿌렸고 이들을 호구삼아 실컷 부리고 사치하다가[11] 그 중 한 명인 안드레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Андр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1879–1956)과의 사이에서 아들 블라디미르 크라신스키(Владимир Красинский, 1902–1974)를 낳았다. 마틸다는 결국 러시아 혁명 이후인 1921년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안드레이 대공과 결혼하여, 비록 이름뿐이나마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12] 당연히 부를 누리진 못했으나 대공과 금슬도 좋았으며, 1925년 가톨릭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1936년까지 무용수로 활동했다. 1971년 12월에 99살로 세상을 떠나 천수를 누렸으며 2년 반 뒤에 죽은 아들, 남편과 같이 프랑스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의 묘지에 묻혔다.
5.1. 조상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 <colbgcolor=#FFE4E1,#330500>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 <colbgcolor=#fff3e4,#331c00> 알렉산드르 3세 (Император Александр III) | <colbgcolor=#ffffe4,#323300> 알렉산드르 2세 (Император Александр II) | |
| 니콜라이 1세 (Император Николай I) | |||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Prinzessin Charlotte von Preußen) | |||
| 헤센의 마리 (Prinzessin Marie von Hessen und bei Rhein) | |||
|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 (Ludwig II., Großherzog von Hessen) | |||
| 바덴의 빌헬미네 (Prinzessin Wilhelmine von Baden) | |||
| 덴마크의 다우마 (Prinsesse Dagmar af Danmark) | |||
|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 Herzog von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 |||
| 헤센카셀의 루이제 카롤리네 (Prinzessin Luise Karoline von Hessen-Kassel) | |||
|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Louise von Hessen-Kassel) | |||
| 헤센카셀의 빌헬름 (Wilhelm of Hessen-Kassel) | |||
| 덴마크의 샤를로테 (Prinsesse Charlotte af Danmark) |
5.2. 자녀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 1녀 |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Ольга Николаевна | 1895년 11월 15일 | 1918년 7월 17일 |
| 2녀 |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жна Татьяна Николаевна | 1897년 6월 10일 | 1918년 7월 17일 |
| 3녀 |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 1899년 6월 26일 | 1918년 7월 17일 |
| 4녀 |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ой княжны Анастасии Николаевны | 1901년 6월 18일 | 1918년 7월 17일 |
| 1남 |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Цесаревич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 1904년 8월 12일 | 1918년 7월 17일 |
6. 여담
- 역대 러시아 제국 황제들 중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덴마크 혈통이 섞인 러시아 황제였다. 외할아버지가 덴마크 국왕이었고 어머니는 본래 덴마크의 공주였기 때문. 즉, 외가가 덴마크계 혈통이고 그렇다. 친가는 독일계 혈통이다.
- 같은 망국의 군주라는 점에 있었고 일가와 함께 대한제국의 고종, 순종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이들의 삶에는 망국의 군주라는 점 외에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 고종은 합병 전부터 의병장들을 지원하고 김구의 사형을 막으며 제국익문사를 창설해 친일파에게 밀정을 붙이고 각종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대한의군과 독립의군부를 창설하는 등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이는 고종이 승하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1919년 고종은 이회영과 접촉해 7번째 망명 시도를 하였다. 순조롭게 진행되어 황제가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지만 중간에 사망해 실패한다. 이후 이를 독살로 추정해 분노한 백성들이 3.1운동을 일으키는 등 끝까지 일제에 저항한 면도 있었다. 순종의 경우 일본 제국의 천황보다는 낮지만 다른 화족들보다는 높은 이왕으로 예우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승하 직전에는 합병의 무효와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유조를 남긴다. 심지어는 메이지 덴노의 배려로 군함을 타고 유럽 여행을 간 적도 있다. 대신 순종은 어린 나이에 독약으로 살인미수를 당해서 치아를 모두 잃고 20대부터 틀니로 살았기에[13], 니콜라이처럼 살해당하지는 않았지만, 21세기처럼 임플란트 수술이나 고도의 영양학에 의해 체계적으로 설계된 유동식이 있던 시대도 아니니 생존 기간 내내 식이에 문제가 있어 건강이 전반적으로 항상 좋지 않은 편이어서 일본 정부의 관리를 받았지만 삶의 질은 나빴다.[14] 그렇다고 일제가 제대로 관리해준 것도 아니었다. 병져누워있던 순종을 강제로 서북순행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 니콜라이 2세는 대한제국의 고종을 황제로 인정한 군주였다.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나서 니콜라이 2세의 황제 인정 통보를 기다렸고 거절 당할까 봐 노심초사했으며 니콜라이 2세에게 (황제) 인정을 하지 않더라도 곧바로 거부하지 말고 현재의 호칭(대군주)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고종의 노력이 먹혔는지 니콜라이 2세는 1897년 12월 20일에 서양 열강 중 제일 먼저 고종에게 전문을 보내 칭제건원을 인정하고 축하했다. 이에 고종은 기뻐했으며 아관파천 때도 러시아 공사관에 자신의 목숨을 의탁할 정도로 친러정책을 펼쳤다.[15]
그리고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제국의 공사였던 베베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의화단 운동 때 대한제국에 출병을 권유하는 등 정치적 도움뿐만 아니라 총과 같은 물자적 지원을 제법 해줬으며, 이런 말도 했었다고 한다."짐은 우리가 조선을 차지하는 걸 원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차지하도록 놔둘 생각도 없소. 그건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오."1901년 니콜라이 2세가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16]에게 한 말(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p. 176)
- 한편,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불안해하고 있던 고종도 러시아의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때 민영환을 필두로 윤치호 등을 포함한 사절단을 보내 여러 선물을 주었다. 개중에는 화려한 장농이나 백동향로, 오원 장승업의 그림이 있다.#[17] 민영환은 이 경험을 <해천추범>이란 여행기로 저술하였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세계일주 기록이다. 단 민영환은 갓을 벗지 않을 것을 고집하는 바람에 대관식이 열리는 성당에 들어가진 못하고 밖에서 참관하였다고 한다.
- 혁명으로 인해서 목숨까지 잃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점에서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와도 비교된다. 실제로 두 사람은 인간적인 면모는 굉장히 좋았지만 군주로서는 완전히 낙제점에 가까웠다는 점, 권좌에 끌어내려지기 전까진 국가가 어려운 형편임에도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혁명 도중 진행된 양민학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배신자 소리를 듣고 끝내 최후를 맞이한 점, 아내와 자식들까지 혁명에 휘말려 그 끝이 좋지 못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또 왕비가 독일어권 출신 외국인이었고 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실패했다는 점도 똑같다.[18]
니콜라이 2세 일가의 가족 사진 프린세스 메이커 5의 오프닝에 나온 가족 사진
프린세스 메이커 5의 오프닝 영상에 나오는 가족 사진은 니콜라이 2세의 가족 사진을 패러디했으며, 혁명이 일어나 왕가가 몰살당하고 프린세스 후보인 딸이 게임상의 인간계로 피신했다는 설정이 있다.
▲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이 있는 은화와 우표
▲ 그의 초상화가 들어가 있는 IWC 회중시계
- 증조할아버지이자 같은 이름을 쓰는 니콜라이 1세와는 달리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팬이었으며, 딸들의 이름도 예브게니 오네긴의 등장인물에서 따왔다. 니콜라이 1세는 문학에는 관심이 없었음에도 반골적인 푸시킨을 매우 싫어하여 푸시킨의 글만큼은 꼬투리를 잡기 위해 정독했다고 한다.
6.1. 닮은꼴
3살 연상의 이종사촌 형 영국의 조지 5세와 쌍둥이 수준으로 닮았다. 실제로 당대에도 니콜라이 2세와 조지 5세를 혼동하는 일이 꽤나 잦았는데, 니콜라이 2세가 조지 5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결혼식 전날 누군가에게 '내일 아침 본인 결혼식에 지각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을 뿐 아니라 피로연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축하받느라 고생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친정 덴마크로 망명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이질(姨姪)인 조지 5세를 보고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착각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한다.| |
| 어느 쪽이 니콜라이 2세고 조지 5세인지 찾아보자.[정답] |
사촌이라도 이렇게까지 닮았던 이유는 일단 조지 5세의 어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와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가 친자매였고, 이 자매부터 서로 쌍둥이처럼 닮았으며 각자의 아들 니콜라이와 조지도 어머니를 빼닮은 덕에 서로 비슷한 외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다만 알렉산드라는 이목구비가 부리부리하고 큼직해서 전체적으로 강한 인상이고 다우마는 이목구비와 체구가 아담하고 작아서 청순가련한 인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자식들인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를 비교해 봐도 알렉산드라의 아들 조지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다우마의 아들 니콜라이는 조지에 비해 유순한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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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이 영국의 왕비가 되는 알렉산드라 왼쪽이 러시아 제국의 황후가 되는 다우마 |
다만 외모만 비슷하고 실제 성격은 매우 달랐다. 조지 5세는 군인처럼 엄격하고 괄괄한 성품인 데 반해 니콜라이는 온순하고 비교적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다. 가정 분위기도 마찬가지였고 조지 5세는 자녀들, 특히 장남 에드워드 8세와의 관계가 개판이었지만 니콜라이는 아내에게는 좋은 남편이자 자식들에겐 매우 인자한 아버지였다.
군주로서의 능력 또한 서로 정반대였다. 니콜라이 2세는 우유부단한 자세로 러시아 제국을 몰락시키고 가족들과 함께 총살당하는 최후를 맞은 반면 조지 5세는 내외적으로 위태로운 영국을 단호한 결단력으로 꽉 붙잡고 천수를 전부 누렸다. 그의 증손자는 현재도 영국의 국왕으로 재위 중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조지 5세가 둘째인 것과 달리 니콜라이는 장남이자 맏이이다.
그 외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20], 노르웨이의 호콘 7세[21],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1세와도 외사촌간이다.[22] 크리스티안 10세와는 많이 닮은 편이지만 호콘 7세나 콘스탄티노스 1세와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1세와는 둘 다 1868년생으로 서로 동갑이다.
6.2. 음모론
황실 일부 인사들이 생존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23], 그 중 유명한 케이스가 아나스타시야 공주(사진 맨 오른쪽). 아나스타시야 공주는 꽤 오랫동안 사살 직전 도망가서 유럽 어딘가에 살아남았다는 음모론의 주인공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영화도 있고, 심지어 애니메이션도 있다.)게다가 혈우병으로 항상 오늘내일 하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사진 중간,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 또한 적군의 총격을 피해 1977년까지 생존해 있다는 음모론이 있는 등, 아무래도 마지막 황가라는 비극적인 운명 때문인 듯하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세기말의 마술사에서도 3녀 마리야 공주가 생존하여 일본으로 도망쳤다는 설정이 깔려 있다. 이 극장판이 개봉된 1999년만 해도 마리야 공주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아 작내에서 '아나스타시야 공주보다 마리야 공주 생존설이 더 말이 된다'는 발언이 있었다.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는 아들 일가가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평생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리야 황태후는 아들, 며느리, 손녀들, 손자가 생존하여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이후 아나스타시야인 척 하는 사기꾼 안나 앤더슨이 접근했으나, 표도로브나는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앤더슨을 만나지 않고 손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1989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가 발견되었으나 마리야 공주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아 음모론을 뒷받침했는데, 결국 2007년 마리야와 알렉세이의 것으로 보이는 유해가 발견되고 DNA 검사까지 끝나면서 이 음모론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24]
이때 DNA 검사를 위해 샘플로 제출된 DNA는 다름아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에든버러 공 필립 마운트배튼의 것이었다. 꽤 화제를 모았는데, 이는 그가 당시 생존해 있는 사람 중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 알렉산드라 황후의 첫째 언니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이 필립 공의 외할머니인데, 자매지간인 두 사람이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므로 모계 유전으로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의 특성상 알렉산드라 황후 본인 및 자녀인 올가·타티아나·마리야·아나스타시야·알렉세이와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의 외손자인 필립 공의 미토콘드리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촌수로 따지면 필립은 알렉산드라의 이종조카손자에 해당한다.[25]
니콜라이 2세의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에는 이종사촌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의 외손자 제3대 파이프 공작 제임스 카네기와 조카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의 외손녀 크세니야 니콜라예브나 스피리 여백작의 DNA 샘플이 사용됐다.
7. 대중매체에서
원 역사의 행보가 워낙 무능했던 탓인지 대체역사물에서도 그다지 좋은 결말로 끝나지는 않는다. 제위는 잃더라도 목숨만 건진 시나리오면 그나마 다행일 정도. 한국 입장에서는 그다지 악감정을 가질만한 인물이 아님에도 취급이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원 역사의 니콜라이를 너무 심하게 악의적으로 왜곡시킨 대통령 각하 만세[26]를 제외하면 아예 대놓고 민중 학살에 박차를 가한 폭군으로 나오지는 않으며 제위를 유지한 작품도 은근 많다. 일단 왠만한 대체역사물에서는 최소한 원 역사보다는 그나마 나은 엔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27] 아무리 못해도 왠만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본인은 원 역사 그대로 총살당하더라도 최소한 자식들은 살아남는 편. 거기다 일가족이 몰살된 원 역사의 시나리오 그대로 가지만 않는다면 제위를 잃더라도 제정 복고까지 다시 노릴 수 있는 상황으로 연출되는 경우가 더 많다. 원 역사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작품이든 대체역사물이든 대체로는 중요한 순간에 판단을 잘못해서 상황이 나빠지는 인물이지만 그래도 인품 자체는 선량하고 좀 나쁘게 쳐도 평범한 정도로 나온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에 나오는 알렉산더 로마노프는 설정상 니콜라이 2세의 후손으로 나온다.
-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에서는 자녀들을 의왕 이강에게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 자신은 망명을 포기하고 상트페테로그라드에 남는 선택을 한다. 니콜라이 2세를 진심으로 사랑한 황후도 마지막 순간에 러시아에 남았고, 결국 부부는 원 역사대로 적백내전 중에 소비에트에 의해 총살당한다. 이강은 후견인으로서 다섯 남매의 대부가 되어 첫째 올가부터 차례로 시집보내며, 특히 둘째 타티아나는 영국의 에드워드 황태자(원 역사의 에드워드 8세)에게 시집간다. 막내 알렉세이는 이강을 아버지처럼 따르지만, 이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성년(만 14세)인 채 신생 아무르 공화국의 수반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향한 복수심을 불태운다.[28]
- 동방의 라스푸틴에서는 명실공히 작중 최대 수혜자. 주인공에게 요구하는 게 워낙 많아서 별명이 니진구가 되기는 했지만, 그걸 또 주인공이 꾸역꾸역 해주는 바람에 승승장구하게 된다. 스페인 독감에 걸려서 생사의 기로를 오가는 바람에 요양하러 갔다가 아예 섭정인 장녀 올가에게 양위해버린다. 이후 유유자적하게 취미농사나 지으며 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과 손자손녀들까지 보고 사망한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이선의 친구이자 20세기의 만력제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조언으로 원래 역사보다 러시아 제국을 비교적 더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조종당하지도 않았지만, 주인공에게 품은 질투심과 본인의 태생적 무능함은 차마 극복하기 어려웠는지 원 역사만큼 처참하지는 않지만 어쨋든 결국엔 제국을 말아먹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다. 본인과 부인은 원 역사와 비슷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나마 자녀들을 주인공에게 보내서 일가족 몰살은 피했다. 거기다 피의 일요일이나 라스푸틴 등용 같은 치명적인 실책은 일어나지 않아서 제위를 잃고 목숨을 잃더라도 망명에 성공한 OTMA와 알렉세이를 중심으로 소련에 대한 복수와 제정복고 시도의 여지를 남겼다.
- 마지막 차르에서는 니콜라이의 즉위부터 혁명까지의 시간 동안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가 저질렀던 실책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 아이언 하베스트 1920+에서는 역사의 변화 탓인지 꽤나 이성적인 사람으로 등장. 세계 대전 때문에 제국의 운영에 무리가 간다는 걸 알고 사촌 카이저 프리드리히와 평화협상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라스푸틴의 음모로 공산주의 혁명이 터지고 자신이 만든 제국의 현실에 절망한다. 혁명군과 황제 지지자들 사이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라디오 연설을 통해 평화를 호소하고 라스푸틴을 막기 위한 동맹에 동참하려고 하지만 라디오 방송국에 매복하고 있던 라스푸틴에게 결국 살해당한다. 그래도 원 역사보다는 제법 많이 수혜를 받은 편이다.
- 더 크라운에서는 소련 붕괴 이후 영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하는 과정에서, 엘리자베스 2세[29]와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30] 모두에게 친척인 니콜라이 2세의 처형에 얽힌 전후 사정과 유골 발굴이 한 에피소드를 통째로 할애해서 깊이 있게 다뤄진다. 엘리자베스 2세는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친척들의 처형 및 망명에 따른 외로움에 시달리는 필립에게 일종의 뿌리 찾기를 겸해서 외교 관계를 회복하는 선물로 비명에 간 친척들에 대한 현장 조사와 유골 발굴을 러시아 정부에 요구하고, 니콜라이 2세가 처형당한 바로 그 현장인 '이파티예프 하우스'가 위치한 스베르들롭스크 지역구의 관료였던 보리스 옐친을 당혹케 한다. 술꾼인 옐친은 러시아어로 시종일관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결국 발굴 조사에 협력하고, 엘리자베스 2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할아버지 조지 5세가 이들을 구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외교적 문제가 염려되자 죽도록 방치했다는 영국의 흑역사를 알게 되어 충격을 받는다. 특히 이 상황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니콜라이 2세 일가가 볼셰비키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장면이 잘 고증되어 묘사된다.
- 대체역사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원 역사보다도 훨씬 더 막장암군으로서 러일전쟁이 일찍 종전되어서 온존한 발트함대 함포사격으로 원 역사보다 잔인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일으켜 쫒겨난다. 그러나 독일의 도움으로 왕위에 복귀하려다가 대전쟁이 터지고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독일군이 서부전선에 더욱 집중하면서 협상국이 파리를 상실, 발악으로 협상국이 독가스를 먼저 사용하나 그 결과 미국이 협상국에 대한 지지를 거두면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이 승리하는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신용이 소멸하다시피 해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차르로 즉위하지만 그 대가로 우크라이나와 핀란드 등의 상당한 영토를 독일에 할양하여 러시아 국민들이 분노하고, 이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일가족이 앓아눕고 알렉세이는 혈우병으로 인해 썩은 피를 토하다 죽으면서 뒤를 이을 황족이 없어진 탓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소련이 탄생한다. 애초에 이 작품에서는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공화국이 되고 군주들 절대다수가 인품과 상관없이 전부 끔살당하여 대체역사물 중에서도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설정이 많기에 입헌군주제 지지 독자들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서 모든 군주들의 인품이나 행적 등이 실제 역사와 굉장히 다르게 부정적으로 왜곡하여 묘사된 작품이므로 니콜라이에게만 유독 도드라진 특징은 아니다.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에서는 그나마 니콜라이 본인이 원할 만한 시나리오로 나름 흘러간다.
- Hulu 드라마 세계사 Part 2에 등장하며 대니 드비토가 연기했다.
- 1967년에 집필된 로버트 K. 마시의 동명소설을 기반으로 한 1971년 작품의 역사영화인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에서는 마이클 제이스톤이 니콜라이 2세 역을 맡았다. 미국에서 제작된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의 이 영화는 무려 3시간 3분의 런닝타임을 가지고 있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황태자 시절 연해주에 들렀다 조선인들 집단이 연해주 인구와 경제의 중심임을 깨닫고 충격 받아 조선인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그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이 니콜라이를 찾아가 격쟁을 해서 자신들의 무고함을 호소하고 젬스트보(지방 의회)를 비롯한 연해주 정치 협력을 간청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생각을 바꿔서 들어주었다. 이후 역사의 나비효과로 빌헬름 2세가 의회와 정당을 이용해서 권력을 휘두르는 걸 보고 영감을 얻어 피의 일요일을 벌이지 않고 의회와 정당정치를 허락하였으며, 조선에서 유입된 근왕 공산주의 학파인 일린(레닌)의 세력을 밀어주어 러시아 개혁 정책을 지원했다. 그로 인한 반동 쿠데타가 일어나 황제 일가와 함께 납치당하고 적백내전이 터졌으며, 이게 트리거로 1차대전까지 개전하고 마는 대형 참사가 일어나지만 다행히 백군과 적군 모두 황제를 해칠 생각이 없었고[31] 적백내전이 적군의 승리로 종결되고 1차대전도 서부전선의 양쪽 파업으로 터지면서 종결되어 황제 자리에 복귀하였다. 이후 러시아 제국은 소련으로 전환되었지만 입헌군주로서 황위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으며, 1920년대 성인이 되어 혼인을 시키려고 했던 알렉세이 황태자가 급사하자 충격을 받아 장녀 올가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칩거하였다. 김귀남이 의도하지 않은 역사의 나비효과 끝에 큰 수혜를 받았다.[32]
- 화약고 제국의 천재 대공에선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겠다고 친정했다가 전선을 돌파하고 쾌속진격한 오헝 기갑군에 의해 생포되었고 카를에게 항복 선언을 하였다. 이후 강경하게 복구 작업에 몰두하며, 이를 거역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라고 직접 명령하여 총격과 포격까지 가해지는 참사를 일으킨다. 결국 혁명이 일어나자 가족을 오헝으로 대피시키고 자신은 우크라이나 근처 러시아 제국 영토에 남아 백군을 이끌고 적군에 맞선다. 이후 백군이 전쟁에서 패배하자 빈으로 넘어와 가족과 행복한 생활을 보내다가 소련이 망할 때 왕위에 오를 조카와 함께 모스크바로 와서 빨갱이 멸망과 로마노프 왕조의 재건을 지켜본다. 이 작품에선 본인의 손으로 제국을 멸망시켰지만, 원 역사와 달리 본인 포함 가족들도 죽지 않아 말년은 행복하게 보냈고 추후 왕조복구까지 본 수혜를 받았다.
- 카이저를 구했다에서는 러일전쟁이 원 역사보다 훨씬 러시아에 유리하게 흘러갔음에도 흑해함대 파견과 포템킨 반란, 피의 화요일 등의 실책으로 러시아 제국을 말아먹는다. 하지만 혁명 발발과 퇴위 후 주인공에 의해 황실 일가가 독일로 망명하는 데 성공했으며[33] 이후 덴마크로 망명해서 목축과 농사에 취미가 들렸는데, 사업에 제법 재능이 있었는지 쌍두수리 로고를 달고 '로마노프 유업'이라는 우유 회사를 창설, 철저한 품질관리로[34] 광란의 20년대에는 미국까지 진출할 정도가 되었다.[35] 헌데 시카고 아웃핏의 알 카포네와 우유 사업을 두고 유스포프 공작[36]을 필두로 한 유업 직원들이 우유 전쟁(Milk Wars)을 1년 넘게 벌이는데[37] 이것에 대해 주인공이 이걸 그냥 둬도 되냐고 하자 도적(마피아)으로부터 우유를 지키는 게 뭐가 이상하냐고 답할 정도.
황제로서는 퇴위당했을지언정 유럽 왕실의 어르신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북유럽 국가들을 움직여 연합군에 합류시키고 러시아 우유배달부들로 구성된 저항군을 통해 미국 내 소식을 접하는 등 열심히 활동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핀란드령이 된 상트페테크부르크의 겨울궁전에 돌아왔으며[38] 왕정복고는 못 했으나 자신도 황위에는 미련이 없고 로마노프 유업은 추후 아나스타샤에게 물려줄 예정이라고 한다. 그래도 원 역사와 달리 가족이 모두 생존했으며[39] 러시아 제국 대신 로마노프 우유 제국을 만들었으니 나름 좋은 결말.
-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도 등장하였으며, 톰 홀랜더가 연기한다.[40]
- 성군 순종대왕 일대기의 니콜라이 2세는 니콜라이 2세(성군 순종대왕 일대기)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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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는 소련 성립 이전이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꾸기도 전이었다.[2] 우랄 혁명 분관과 반종교 혁명 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46년 교육센터로 용도가 변경, 후에 니콜라이 2세 탄생 110주년, 처형 60주년이던 1978년에 다가올 외신의 관심을 우려한 유리 안드로포프의 의견으로 1977년 9월 철거됐다.[3] 핀란드 대공 겸임.[4] 태어난 지 11개월 만에 요절했다.[5] 결핵으로 28세의 나이에 요절했다.[6] 니콜라이의 남동생들 중 유일하게 러시아 혁명 당시까지 살아있었기에 황위를 넘기려 했다.[7]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러시아 제국 제7대 황제의 언니이자 프로이센 왕국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결혼하여 공작부인이 되었고 표트르 3세를 낳았다. 예카테리나 2세의 시어머니이자 파벨 1세의 친할머니이다.[8] 고손자의 아들이자 증손자의 손자.[9] 참고로 알릭스의 할아버지 카를 공자는 니콜라이 2세의 할머니 헤센의 마리 공녀의 오빠라서 알릭스와 니콜라이 2세는 6촌간이데, 재미있게도 알릭스의 사촌오빠인 빌헬름 2세의 황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역시 빌헬름 2세와 6촌간이다.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의 외할머니 페오도라가 빅토리아 여왕의 이부언니다. 물론 알릭스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역시 6촌간.) 한편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는 프로이센 왕실 기준으로 7촌, 러시아 황실 기준으로 8촌간이다.[10] 니콜라이 2세의 또 다른 외사촌인 호콘 7세 역시 알릭스의 사촌인(외삼촌 에드워드 7세의 딸) 웨일스의 모드 공녀와 결혼했다.[11] 심지어 부정축재도 저질렀다. 대표적인 예로 마틸다는 푸틸로프 공장의 지분을 가지고 포탄 생산에 자신의 허가를 구하게 해 거기서 나오는 리베이트를 챙겼다. 당연히 생산되는 포탄의 품질은 매우 나빠질 수밖에 없었고, 그 심약한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그녀와 그녀에게 호구잡힌 황족들 때문에 제국의 포병대가 쓰레기가 되었다며 크게 화를 냈을 정도였다.[12] 마틸다는 '착하게 살았던 자신을 혁명가라는 악당들이 몰아냈다'고 푸념했다. 하지만 그간 그녀가 저지른 부정축재를 생각하면 착하게 살았다는 말은 개소리일 뿐이다.[13] 산성 물질을 커피로 위장하여 먹였기에 치아 뿐만 아니라 잇몸과 치조골까지 녹아 치아가 다 빠진 것이다.[14] 니콜라이 2세가 사형만 안 당했어도 순종보다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순종은 대놓고 불임이었으며 젊었을 때부터 오랫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50대 초반에 병들어 죽었다.[15] 출처: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 159~160p. A.말로제모프, 석화정 번역, 지식산업사 출판.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 당장 조선을 둘러싼 외국 열강들 중에서 일본을 적극적으로 견제하려던 나라는 러시아밖에 없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동맹국이었고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유럽 대륙 열강은 조선에 관심이 없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이후 조선에서 손을 뗐다. 만약 고종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펴지 않았다면 조선은 1910년이 아니라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에 이미 일본한테 망했을 것이다.[16] 빌헬름 2세의 동생으로 해군 원수. 1899년 방한하기도 했었다.[17] 단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조선이 보낼 수 있는 선물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18] 그나마 본질적인 차이는 프랑스의 경우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여러 차례 왕정복고가 성공한 반면 로마노프 왕조는 한 번도 복권되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친척 중 작센마이닝겐의 카를 에미히가 마이크로네이션 형태로 로마노프 왕조를 복원하였다고 주장하고 "니콜라이 3세"를 칭하고는 있다.[정답] 세 사진 모두 왼쪽이 니콜라이 2세다. 엄청 닮았지만 그나마 눈매에서 좀 차이가 있는데, 조지 5세의 눈이 좀 더 부리부리하다. 한편 키는 니콜라이 2세가 더 큰데 니콜라이 2세가 170cm, 조지 5세가 168cm.[20] 외삼촌 프레데리크 8세의 장남.[21] 외삼촌 프레데리크 8세의 차남이자 크리스티안 10세의 동생이기도 하다.[22] 콘스탄티노스 1세의 경우는 사촌인 동시에 육촌인데 모후 마리야 표도로브나 쪽으로 하면 사촌, 부황 알렉산드르 3세 쪽으로 하면 육촌이 된다. 콘스탄티노스 1세의 부왕인 요르요스 1세가 마리야와 남매지간이고, 콘스탄티노스의 모후 올가 왕비가 알렉산드르 3세와 친사촌간이기 때문이다.[23] 역사소설가 로버트 매시에 의하면, 황제 자신이 백발 노인으로 런던 거리를 지나가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24] 한 때 말이 많았지만 관련이 전혀 없었던 마리야 공주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달리,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와 가장 유력했던 사람으로 바실리 필라토프가 있다. 이 사람은 확실히 알렉세이는 아니었지만, 현재 상황에서도 최소한 니콜라이 2세의 친족, 즉 황가의 일족인 것까지는 유전자적으로도 확실하다. 그래서 "미하일 대공 혹은 니콜라이의 혼외자녀다, 대충 바깥에서 사는 사촌 정도로 지냈다, 러시아 혁명과 소련의 광풍 속에서 평범한 사람인 척 지내다가 소련이 무너질 때가 되어 사실을 밝혔으나 늙어서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동안 자신을 알렉세이라 주장했다"는 설이 난무했으나, 바실리는 얼마 못 가 고인이 되었다.[25] 또한 필립은 니콜라이 2세와도 친척이다. 할아버지 요르요스 1세 쪽으로 하면 5촌, 할머니 올가 왕비 쪽으로 하면 7촌. 니콜라이 2세의 모후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가 요르요스 1세와 남매이고 부황 알렉산드르 3세가 올가 왕비와 친사촌이기 때문. 덧붙여, 부계로만 따질 경우에는 공통조상인 프레데리크 1세 기준으로, 니콜라이 2세가 12대손, 필립이 13대손이 되어 25촌 조카뻘이다.[26] 이 작품은 아예 입헌군주파 독자들은 물론 입헌군주제 지지자 전체를 적으로 돌릴 만한 작품이라고 볼 정도로 모든 군주국들의 군주들이 심하게 악의적으로 왜곡되었고 전부 다 왕위/제위를 잃고 끔살당한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며 오히려 작가가 밝힌 본래 의도를 생각하면 모든 군주들을 학살한 주인공 조지원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조지원을 잘못된 영웅상이라며 강하게 비판하는 쪽에 가깝고 작품 자체의 분위기도 조지원의 타락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어서 입헌군주파 독자들도 기획의도를 알고 보면 나쁘지 않게 볼 수는 있는 작품이다.[27] 사실 원 역사에서의 엔딩이 상상할 수 있는 선에서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보니 그런 것도 크다. 원 역사보다도 나빠지는 것 자체가 힘드니까.[28] 잘 알려져있다시피 알렉세이 황태자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강은 만에 하나 로마노프의 대가 끊길 것을 우려하였다. 이강이 세운 힐 제약이 혈우병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작중에서 애쓴다.[29] 엘리자베스 2세에게 니콜라이 2세는 할아버지의 이종사촌이다.[30] 필립에게 니콜라이 2세는 이모부할아버지인데다 고모할머니의 아들이다.[31] 이때 일린은 "정통 사회주의자로서 황제를 해치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본작의 일린은 마르크스의 제자이자 사위인 본작의 전봉준이 고안한 근왕 공산주의를 직접 배운 마르크스의 사손(師孫)이다.[32] 근왕 공산주의 학파 창설은 주인공 귀남이 일체 관여하지 않은, 어쩌다 돌고 돌아 벌어진 사건이다.[33] 제1차 세계대전 중 블라디미르 레닌을 러시아로 보내주는 조건 중 하나로 차르 일가를 독일로 인계하라는 폭탄 목걸이를 걸었다. 이 조건은 빌헬름 2세가 한스에게 요구한 것으로 동부전선 조기 종료를 위해 러시아에 혁명을 터트리는 대신 니콜라이 일가를 독일로 무사히 데려오는 것으로 사죄하기로 했으며, 레닌도 볼셰비키가 임시정부에 밀리는 상황에서 차르 일가가 독일로 망명했다는 사건을 터트리면 임시정부를 흔들 수 있어 완전히 손해는 아니라서 스탈린, 트로츠키와 함께 로마노프 일가를 밀반출했다.[34] 원 역사의 알 카포네처럼 품질관리와 배달에 신경을 쓰는 등 제대로 된 우유로 평이 좋았다. 참고로 다른 미국 우유 회사들은 의회에 로비해서 '상한 우유가 더 몸에 좋다'고 개소리나 하던 시대다.[35] 오죽하면 이종사촌 형인 조지 5세나 로마노프 유업 미국 지사 배달부가 '황제 때도 이랬으면 좋았을걸'이라며 아쉬워할 정도. 때문에 직원들은 여전히 '차르'라 부르며 황제로서는 머저리 같았지만 사장으로서는 감사하고 있다.[36] 로마노프 유업 미국 지사장. 미국 망명 후 사업에 실패해서 경제고를 겪다가 니콜라이 2세가 지사장 자리에 앉혀줬다.[37] 당시 미국이 택시 회사들끼리 총질하고 경찰은 돈 받던 시대라는 건 그렇다 쳐도, 러시아와 이탈리아 모두 벤데타 풍습 때문에 알 카포네는 다른 마피아들과 우유 회사들을, 로마노프 유업은 노스사이드 갱단 등 이탈리아 마피아의 적들을 용병으로 끌어들이는 바람에 스노우볼이 엄청나게 굴러간다. 이후 언급을 보면 최소 5년 이상 갔다.[38] 로마노프 왕조의 충신이었던 만네르하임의 배려.[39] 장녀 올가는 요아힘 폰 프로이센과 결혼해서 우크라이나 왕비, 차녀 타티야나는 알버트 왕자와 결혼해서 영국 왕비가 되었으며 3녀 마리야는 루이 바텐베르크(영독협상으로 성을 안 바꿨다)와 결혼했다.[40] 조지 5세와 빌헬름 2세까지 맡아 1인 3역으로 출연하였다.
분류
- 전러시아의 황제
- 핀란드 대공
- 영국 육군 원수
- 처형된 군주
- 망국의 군주
- 총살형된 인물
- 시성된 정교도 군주
-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안장자
- 독일계 러시아인
- 스코틀랜드계 러시아인
- 영국계 러시아인
-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인물
- 1868년 출생
- 1918년 사망
-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
- 러시아의 테러 피해자
- 사도 성 안드레이 훈장
-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 제국 흰독수리 훈장
-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 성 블라디미르 훈장 4등급
- 성녀 안 훈장 1등급
-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1등급
- 레지옹 도뇌르 훈장/그랑크루아
- 가터 훈장
- 코끼리 기사단 훈장
- 로열 빅토리아 훈장
- 황금양모 기사단
- 세라핌 기사단 훈장
- 대훈위국화장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