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15 16:14:23

니콜라이 2세

파일:러시아 제국 황제기.jpg
러시아 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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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2f84416a4c627fdc37a981d51e66bf3.jpg
이름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출생1868년 5월 18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차르스코예 셀로 알렉산드르 궁전
사망 1918년 7월 17일 (50세)
소비에트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에프 하우스
장례식1998년 7월 17일[1]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재위 러시아 제국의 황제
1894년 11월 1일 ~ 1917년 3월 15일
대관식1896년 5월 26일[2]
배우자 헤센의 공녀 알릭스 (1894년 결혼)
자녀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샤, 알렉세이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
형제 알렉산드르, 유리, 크세니야, 미하일, 올가
서명파일:1280px-Nicholas_II_Signature.svg.png
컬러로 복원된 생전 니콜리아 2세 및 기타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 영상

1. 개요2. 생애
2.1. 즉위2.2. 통치2.3. 최후2.4. 사후
3. 평가4. 음모론5. 가족관계
5.1. 형제자매5.2.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5.3. OTMAA로 불렸던 자녀들
6. 기타
6.1. 도플갱어?

1. 개요

파일:external/www.newphysics.ru/image003.jpg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자 러시아 역사상 마지막 군주.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의 실제 사례. 무능한 황제로 일관하다 11월 혁명 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 생애

1868년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1881년 부친의 즉위와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황태자 시절인 1891년, 일본 제국을 방문했다가 일본 경관에게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오쓰 사건) 이 사건은 의외의 결과를 낳았는데, 먼 훗날 니콜라이 2세의 유해를 확인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니콜라이 2세가 당시 입고 있던 셔츠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셔츠에는 당시 흘렸던 혈흔이 남아 있다. 사건 당시 여기서 유전자를 검출해서 발굴된 Y염색체로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로마노프 왕조의 방계 황족들 등 친척들도 남아 있었지만 이 셔츠에서 나온 니콜라이 본인의 유전자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2.1. 즉위

1894년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황제에 즉위했다. 알렉산드르 3세는 49세였고 평소 강건한 신체를 자랑했으나, 1888년 기차 사고를 당한 이후에 생긴 허리 통증을 황제 본인이 계속 무시해서 스스로 병을 키워버렸던 것이 급사의 원인이었다. 문제는, 알렉산드르 3세가 자신의 건강을 과신한 나머지 '아들이 30세가 되면 후계 교육을 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 전에 사망해버렸다는 것.[3]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차기 황제로서의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교양있고 차분한 사람[4]이었으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다. 제위에 올라있던 도중 새로 제정된 러시아 육군사병군복을 며칠간 입고 다니며 불편한 구석은 없는지를 손수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일국의 군주로서는 심각하게 무능했다. 성격 또한 유약해서 제대로 된 리더십까지 부재한 빵점짜리 황제였다. 자신도 그걸 알았는지, 즉위할 때 "나는 준비가 안 됐다."라고 말했다.[5] 웬만하면 자기가 황제가 되면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냅다 받아먹을 텐데, 이 정도면 자신이 황제로서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뼈저리게 느끼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한 개인으로서는 만점, 그러나 군주로서는 빵점이었다. 이 점에서 똑같이 혁명으로 인해 강제로 퇴위된 뒤 비참한 최후를 맞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루이 16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니콜라이 2세는 즉위하던 날부터 무능함과 유약함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니콜라이 2세의 즉위를 축하하면서 수도의 인민들에게 기념품과 선물을 나눠주는 행사를 계획했다. 선물은 소시지, 케이크, 사탕땅콩, 머그잔이 든 자루 40만 개였고, 그 외에도 맥주 3만 통과 벌꿀술 1만 통을 준비했다. 그런데 선물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1백만 명이 넘었던 것. 아침에 행사를 시작하자마자 행사장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압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2천 명의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백만 인파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황제는 10시 30분에 사태를 보고받았는데, 사람들은 황제가 곧바로 현장에 나가서 사태를 진정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는 현장에 가지 않았다. 러시아 인민의 자애로운 아버지라고 자임하는 황제는 현장에 나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데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황제는 그렇게 3시간 30분 동안 기도를 하다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현장에 나갔는데, 현장에서는 이미 1,389명이 죽고 1,300여 명이 다친 뒤였다. 이 정도에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상황은 니콜라이 2세에게 더 나쁜 쪽으로 흘러갔다. 하필이면 그날 저녁에 프랑스 대사관에서 즉위 축하 무도회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 황제는 무도회에 나가기보다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어했지만, 황족들이 '황제가 참석하지 않는다면 프랑스와의 동맹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고 조언했기 때문에 무도회에 참석했다.

황제는 10분 남짓 머물렀다가 대사관을 떠났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황제가 파티에 나갔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황제의 행보를 전해들은 대중들은 분노했고, '황제가 신민들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이 사건은 황제의 치세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알리는 징조'라고 말했는데, 이들의 말은 예언이 되었다.

2.2. 통치

자신이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정도였으므로, 능력 있는 신하들의 말을 잘 듣거나 그들한테 국정을 맡겼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굉장히 독선적인 성격이었다. 유약하고 무능한 주제에 독선적이기만 하니, 정치를 잘해낼 리가 없었다. 독선적인 전제적 정치를 그대로 유지했다.[6] 표트르 스톨리핀처럼 나름 명석한 재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딱히 이런 인재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게 군주로서 제대로 힘을 실어준 것도 아니다.

러일전쟁 패전 이후 벌어진 경제난에 뒤이은 피의 일요일 사건 등에서 병크를 터뜨리고,[7] 나라 꼴을 생각하지 않고 섣불리 참전한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진퇴양난에 처한다. 니콜라이 2세가 직접 러시아군 사령관으로 나가 있는 동안, 러시아 국내 정치는 독일인이며 빌헬름 2세의 이종사촌 누이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에 의해 더욱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라스푸틴은 황후의 신임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각종 괴상한 정책들을 제안하여 국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모두 라스푸틴을 싫어했고, 황제의 여동생 올가 여대공, 황후의 둘째 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 같은 황족들까지 오빠와 여동생에게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했지만,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주위의 이런 조언들을 듣지 않았다. 당연히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져 갔다.

2.3. 최후

1917년 2월[8]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퇴위하여, 우랄 산맥 근처의 토볼스크에 연금되었다. 사실 처음에 그는 제위를 막내동생인 미하일 대공에게 넘기려 하였으나, 이미 차르 일가에 대해 악화될 대로 악화된 여론은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는 것 정도로 돌아올 리가 없었고, 결국 미하일 대공이 제위 계승을 거부하고 제정 폐지 요구를 수락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끌던 임시 정부는 니콜라이 2세를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외가인 영국으로 망명시키려고 했다. 물론 사촌형이자 니콜라이 2세와 친밀한 사이였던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사촌동생 일가를 모두 구하고 싶었고, 당시 수상이었던 로이드 조지에게 망명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영국 정부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왕실 비서실장이었던 스탬포덤 경(Lord Stamfordam)이 이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감정이 굉장히 나빠지면서 왕실에 대한 반감도 함께 커졌기 때문이었다. 하노버 왕조 이래 영국 왕실은 독일계였으며, 특히 왕실의 배우자들은 대체로 독일 또는 북유럽 출신이었다.[9] 당시 왕가의 성도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이었던 앨버트 공(독일인)의 성을 따서 작센코부르크고타 또는 영어식으로 색스코버그고타(Saxe-Coburg and Gotha)를 썼고[10], 왕가 인사들은 영어뿐만 아니라 독일어에도 익숙했다. 조지 5세의 왕비였던 테크의 메리도 영국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는 독일인이었고, 자신도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던[11]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폐위된 러시아 황제를 입국시키는 것은, 군주정 폐지 여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12]

스탬포덤은 광범위한 정보수집 끝에 "전쟁의 시발점이[13] 된 차르를 데려오는 것은 영국에서도 군주제 폐지 운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강력히 경고했고, 결국 조지 5세는 망명 허가를 취소했다.[14]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 당이 10월 혁명으로 정권을 잡자,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된다.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반혁명군이 여기저기서 일어나자(적백내전), 볼셰비키는 차르 일가가 반혁명군에 구출될 것을 우려해 여기저기로 옮긴다. 1918년 5월 최후로 도착한 곳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였다. 이때 반혁명 세력이 예카테린부르크를 위협하자, 볼셰비키는 일가를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15] 본래 볼셰비키는 차르를 처형하더라도 제대로 재판을 한 뒤 처형시키려 했지만,[16]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기에 결국 즉결 처형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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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직후 찍은 처형 장소

1918년 7월 16일 새벽 2시, 볼셰비키의 보안 조직인 체카 요원들은 취침 중인 이들을 깨우며 "곧 이동할 테니 모두 행장을 갖추고 지하실로 내려오라"고 통보했다. 가족과 시종들이 지하실로 모두 내려오고, 체카 요원들은 니콜라이 2세가 몸이 불편한 부인과 아들을 위해 요청한 의자를 가져다 주었으며 알렉산드라와 알렉세이는 의자에 앉았다. 그 직후 체카 책임자인 유로프스키와 그의 부하들은 "니콜라이 로마노프 씨. 반혁명 세력이 당신들을 구출하려다가 실패했소. 그리고 우랄 노동자 소비에트는 당신 일가에게 사형을 선고했소."라고 통보하고 바로 난사했다. 니콜라이 2세가 마지막에 남긴 유언은 "뭐라고 했나? 잘 들리지 않는데…"였다.[17][18] 이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고 한다. 황후, 공주들, 황태자, 주치의 보트킨, 하인들도 같이 처형되었다. 이렇게 다급하게 죽인 것은, 당시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이 이들을 구하러 온다는 첩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별별 이야기들이 많았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공주들은 총에 맞아도 한동안 안 죽었다거나, 보석과 장신구들을 몸에 숨겨서 총알이 튕겨졌기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어 한동안 살아 있어서 개머리판삽자루로 머리들을 때려 확실히 죽였다[19]는 등의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졌다. 당시 처형한 당사자들은 "황제 일가는 전재산을 압류당한 상황이라 몸에 걸친 비싼 보석은 전혀 없었기에, 헛소문이다."라고 일축했으나, "황후와 공주들의 옷에서 많은 다이아몬드가 나왔다."는 증언도 있다.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에 가담했다가 1935년에 사망한 에루마코프는 죽기 직전에 "시체를 묻기 위해 군홧발로 걷어차 시체를 굴리자,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던 공주 1명이 비명을 질렀고, 그러자 병사들이 개머리판으로 때려 죽였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 다음에 시체들의 옷을 모두 벗긴 후 기름을 붓고 불태워 대충 파묻었다고 한다. 이때 시간을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별다른 근거는 없는 편. 그리고 1달 후에는 니콜라이 2세로부터 양위받았던 동생 미하일 대공마저 처형당했다.

처형 후 볼셰비키 측은 차르의 처형 사실은 공표했지만 차르 가족들까지 함께 처형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다. 처형 직후에는 차르 가족들은 안전한 곳에 보내졌다고 발표를 했고, 이후에도 멘셰비키가 황제 일가를 죽였다는 되도 않은 거짓말을 하거나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에 그냥 모르쇠로 일관할 정도였다. 이처럼 볼셰비키 측이 차르 일가를 죽여놓고 오리발을 내민 건 무엇보다 재판도 없이 차르를 처형하고 일가까지 모조리 죽인 건 볼셰비키 기준으로 봐도 비합법적이고 야만적인 학살 행위였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측이 황제 일가를 처형한 즉시 시신을 불에 태워 유기한 걸 보면 차르 일가 처형에 대한 진상이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히길 바란 모양이나, 차르 처형 일주일 뒤 백군이 예카테린부르크를 점령하면서 차르 일가의 처형 사실은 빠르게 알려지게 되었다. 백군 점령 당시 황제 일가의 유해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나 처형 장소가 발견되고 관련 증언까지 나오면서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게 된 것.

이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을 담당했던 자들은 모두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했다. 역시 붉은 차르 다만 책임자인 유로프스키는 숙청당하지 않았고[20], 1938년에 60세를 일기로 죽었다. 유로프스키는 자신이 로마노프 일가를 처형한 것을 평생 후회했고, 죄책감에 시달리다 죽었다고 한다. 유로프스키는 황제 일가를 처형하기 2주 전부터 황제 일가와 같이 지냈는데, 니콜라이 2세를 "평범한 신사 같은 모습이었다."고 회고하는 등,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를 제외한 황제 일가를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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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당한 후 암매장되었다가 나중에 발견된 황제 일가의 유해는, DNA 검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됨에 따라 사후 80년만인 1998년 7월 17일 선대 차르들이 안장된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성당에 안장되었다. 옐친의 추모사 장면 2015년 9월 23일, 러시아 정교회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가 2007년에 발견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유전자 감식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4. 사후



1981년 해외러시아정교회에서 황제와 그의 가족들을 순교자로써 시성하였고, 러시아 본토 내에서는 한동안 러시아 제국을 몰락시킨 암군으로 여겨졌지만 소련 붕괴 이후 동정 여론이 일었고 2000년에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수난자로 인정받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나라 말아먹은 인물인데 뭐하러 시성하느냐?", "무능한 게 성스러운 거냐?"면서 냉소적인 입장을 보인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 정교회 성인으로 시성되었는데 성인으로서의 축일은 7월 17일이다.

2008년 10월 1일 러시아 대법원은 "황제와 그 가족이 부당한 정치 탄압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판결을 내려 정치적으로도 복권되었다. 성인 시성과는 별개로 러시아 내에서도 그가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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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으로 그려진 황제 일가

3. 평가

영국의 역사학자로 러시아 역사 전문가인 올란도 파이지스 교수는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동시대 영국의 국왕이었다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모범적인 군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선량한 인품과 교양, 사교술 등 입헌군주제 국가의 이상적인 군주의 자질을 모두 갖추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통치할 러시아 제국은 군주가 국가의 주권을 휘두르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다.

소련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니콜라이 2세 재위 기간의 말기 러시아 제국을 좋게 보지는 않는다. 제정 러시아를 좋게 보는 권위주의적 반공 전통주의자들도 니콜라이 2세에 대해서는 "선량한 암군" 혹은 "그냥 퇴위한 뒤 조용히 살게 했으면 좋았을 사람을 잔혹하게 죽인 게 잘못이었다"는 정도로 본다.

4. 음모론

황실 일부 인사들이 생존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21] 그중 유명한 케이스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사진 맨 오른쪽). 아나스타시야 공주는 꽤 오랫동안(자그마치 70년 동안!) 음모론[22]의 주인공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영화도 있고, 심지어 애니메이션도 있다!)

게다가 혈우병으로 항상 오늘내일 하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사진 중간,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 또한 적군의 총격을 피해 1977년까지 생존해 있다는 음모론이 있는 등, 아무래도 마지막 황가라는 매력(?)이 원인인 듯하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세기말의 마술사에서도 3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생존하여 일본으로 도망쳤다는 설정이 깔려 있다. 이 극장판이 개봉된 1999년만 해도 마리야 공주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아 작내에서 '아나스타샤 공주보다 마리야 공주 생존설이 더 말이 된다'는 발언이 있었다.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는 아들 일가가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평생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리아 황태후는 아들, 며느리, 손녀들, 손자가 생존하여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이후 아나스타샤인 척 하는 사기꾼 안나 앤더슨이 접근했으나, 표도로브나는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앤더슨을 만나지 않고 손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1989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가 발견되었으나, 마리야 공주알렉세이 황태자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아 음모론을 뒷받침했는데, 결국 2007년 마리야와 알렉세이의 것으로 보이는 유해가 발견되고 DNA 검사까지 끝나면서 이 음모론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23]

이때 DNA 검사를 위해 샘플로 제출된 DNA는, 다름아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에든버러 공 필립 마운트배튼의 것이었다. 꽤 화제를 모았는데, 이는 그가 당시 생존해 있는 사람 중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 알렉산드라 황후의 첫째 언니인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이 필립 공의 외할머니인데, 자매지간인 두 사람이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므로, 모계 유전으로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의 특성상 알렉산드라 황후 본인 및 자녀인 올가&타티아나&마리야&아나스타샤&알렉세이와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의 외손자인 필립 공의 미토콘드리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촌수로 따지면 필립은 알렉산드라의 이종조카손자에 해당한다.

5.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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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2세 일가 컬러 복원 사진.

황태자 시절, 헤센 대공국 루트비히 4세의 4녀인 알릭스와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했다. 알릭스의 어머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의 장남이 독일 제국 빌헬름 2세이니, 알릭스와 빌헬름 2세는 서로 이종사촌이 된다.

알릭스의 둘째 언니 엘리자베타가 먼저 러시아 제국으로 시집왔다. 상대는 알렉산드르 3세의 남동생, 즉 니콜라이 2세(당시 황태자)의 작은아버지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었다. 16살의 니콜라이 황태자와 12살의 알릭스는 이 결혼식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10년 후 결혼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연애결혼이었다. 이 결혼을 위해 알릭스는 이름도 러시아식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로 바꾸었고, 러시아어를 공부했으며, 종교도 루터회에서 정교회로 개종했을 정도로 많은 노력을 했다.

당시 황실의 풍속과 달리,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한눈팔지 않고 서로에게만 충실했다. 6년간 딸을 4명이나 낳을 정도로 부부 금슬이 좋았다.

5.1. 형제자매

5.2.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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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4세영국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의 2남 5녀 중 4녀. 6살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이것을 안타까워한 외할머니 영국빅토리아 여왕과 편지를 자주 주고받는 등 가깝게 지내 외가인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연애결혼이었고, 남편 니콜라이 2세의 성품 덕에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그러나 출중한 외모와 좋은 성격에도 불구하고도 대중에 노출되기를 꺼렸으며, 평생을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살았다. 시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와 고부갈등도 있었고, 딸만 4명을 낳으며 후계자 생산에 대해 압박을 받는 등 마음고생이 많았다.[26] 또한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병인 혈우병 때문에 어렵게 얻은 막내이자 외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로 태어났는데, 이는 후일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득세하여 러시아 제국을 망치는 배경이 된다.

5.3. OTMAA로 불렸던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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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황가의 남매들 OTMAA. 왼쪽부터 마리야, 타티야나, 아나스타샤, 올가, 알렉세이.

당대로서는 특이하게 4명의 황녀 모두 성인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았는데, 이는 본인들이 결혼에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제1차 세계대전 탓에 모든 혼담이 중단되고 웬만한 남성 귀족들이 죄다 전쟁에 나가 죽어버린 탓이 크다. 게다가 3녀 마리야 공주와 4녀 아나스타시야 공주의 경우는, 막 성인이 되었을 때 러시아 혁명이 터져버렸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또한 자녀들이 자신들처럼 연애결혼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정략결혼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동아시아 및 영미권에서는 뛰어난 미모와 비극적인 인생 덕에 팬픽이나 팬아트까지 있을 정도로 나름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데 반해, 정작 모국인 러시아에서의 인지도는 거의 없다. 일례로 영, 한 위키백과에서는 OTMA 항목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러시아어 위키백과에서는 니콜라이 2세의 하위 항목으로 리다이렉트되며, OTMA 관련 정보나 이미지를 러시아어로 검색해서 찾으면 나오는 게 얼마 없고, 영어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한국어로 된 정보가 러시아어로 된 정보보다 훨씬 많을 정도.

6. 기타

젊은 시절 외모가 제프리 다머와 닮았다는 의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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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다머와 니콜라이 2세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에 나오는 알렉산더 로마노프는 설정상 니콜라이 2세의 후손으로 나온다.

베르사유의 장미로 유명한 이케다 리요코의 다른 작품인 올훼스의 창에서 니콜라이 2세와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같은 망국의 군주라는 점에 있어서 일가와 함께 대한제국고종, 순종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이들의 삶에는 망국의 군주라는 점 외에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 고종은 일제에 의한 독살 의혹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무난한 삶을 살다 갔으며, 순종의 경우 일본 제국덴노보다는 낮지만 다른 화족들보다는 높은 이왕으로 예우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심지어는 메이지 덴노의 배려로 군함을 타고 유럽 여행을 간 적도 있다.

사실 니콜라이 2세는 당시 열강의 군주치고는 꽤나 대한제국에 우호적인 군주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공사였던 베베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아관파천 때 고종을 받아줬던 점이나 의화단 운동 때 대한제국에 출병을 권유하는 등 정치적 도움뿐만 아니라 총과 같은 물자적 지원을 제법 해줬다고 한다.

이는 니콜라이 2세가 한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짐은 우리가 한국을 차지하는 걸 원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차지하도록 놔둘 생각도 없소. 그건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오."

1901년 니콜라이 2세프로이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27]에게 한 말(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p.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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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 일가의 가족 사진 프린세스 메이커 5의 오프닝에 나온 가족 사진
프린세스 메이커 5오프닝 영상에 나오는 가족 사진은 니콜라이 2세의 가족 사진을 패러디했으며, 혁명이 일어나 왕가가 몰살당하고 프린세스 후보인 딸이 게임상의 인간계로 피신했다는 설정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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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이 있는 은화와 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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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초상화가 들어가 있는 IWC 회중시계

6.1. 도플갱어?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종사촌 형인[28] 영국조지 5세쌍둥이라 착각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았다. 사실 당대에도 서로를 착각하는 일이 꽤나 잦았다고 한다. 예로 조지 5세의 결혼식에 참석한 니콜라이 2세는 피로연에서 자신을 신랑 조지 5세로 착각한 사람들에게 축하받느라 고생했다고 하며, 심지어는 러시아 혁명 이후 친정인 덴마크로 망명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조카인 조지 5세를 보고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착각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한다. 아뇨 조진데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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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 니콜라이 2세고 조지 5세인지 찾아보자.[정답]

이렇게 서로 닮은 이유는 일단 조지 5세의 어머니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덴마크의 다그마르(마리아 표도로브나)가 자매지간인데, 이 자매부터 서로 쌍둥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닮았고, 둘의 자식인 니콜라이와 조지도 둘 다 어머니를 빼닮은 덕에 이리 비슷한 외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다만 알렉산드라는 이목구비가 부리부리하고 큼직해서 인상이 강했고, 다그마르는 이목구비와 체구가 아담하고 작아서 청순가련한 인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자식들인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를 비교해 봐도 알렉산드라의 아들 조지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다그마르의 아들 니콜라이는 조지에 비해 유순한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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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영국의 왕비가 되는 알렉산드라, 왼쪽이 러시아 제국의 황후가 되는 다그마르


[1] 소련에서는 총살시켜 죄수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장례식조차 치루지 못했는데, 유해의 행방을 찾지 못한 것도 그 이유이기도 했다. 결국 1990년에 소련이 무너지고 그가 죽은 지 80년이 지난 1998년에야 유해를 수습하고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 의해 정식으로 장례를 치루게 된다.[2] 하필 4일 뒤인 30일 있었던 축제에서 1,389명이 죽는 압사사고가 일어났다.[3] 출처 :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1차 세계대전>[4] 1896년 조선을 대표하여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민영익이 직접 니콜라이 2세를 예방하고 남긴 기록에도, 니콜라이 2세는 '매우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5] "산드로(니콜라이 2세의 매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네. 신하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네." 이 정도면 강화도령급이네[6] 즉위하는 날부터 전제 정치를 계속 이어갈 것임을 선언하고, 자유주의자들을 비난했다.[7] 이때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양위받기를 거부했다.[8] 당시 러시아의 구력(율리우스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3월.[9] 이는 다른 유럽 왕가들은 대체로 가톨릭계라서 개신교인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도 필립 마운트배튼도 원래 성은 글뤽스부르크라는 독일계이며, 이 왕가는 독일에서 발원해서 덴마크북유럽 여러 곳을 다스렸다.[10] 이후 영국 왕실은 독일계 성을 버리고 윈저를 공식 가문명으로 삼는다.[11]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을 보면 묘사된다.[12]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밖에서도 피의 일요일 등으로 무능하고 잔혹한 군주라는 악평을 받던 것도 한 몫했다.[13] 독일 제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오스트리아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러시아 제국이 후견국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발동하자, 이를 자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한 독일 제국이 러시아 및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프랑스에 모두 선전포고를 하면서 1차대전이 발발했다.[14] 이전에는 내각에서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공개된 왕실 문서로 조지 5세 본인의 결정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잘못하면 자신의 왕위까지 위협받을 수 있던 상황이니... 영국 왕실은 절대군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여론에 상당히 민감하다. 조지 5세도 설마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처형당할거라곤 생각 못했지만, 러시아의 상황은 악화되어 결국 차르 일가는 총살당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조지 5세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고, 겨우 자신의 이모이자 니콜라이의 어머니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와 사촌 여동생들만 망명시켰다. 훗날 그리스 왕국의 콘스탄티노스 1세가 폐위되자, 조지 5세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던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 일가를 영국 군함에 승선시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훗날 엘리스의 아들 필립은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이 되는데, 필립 공도 소련이 싫냐는 질문에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그 개새끼들이 내 가족의 절반을 죽였으니 당연하다’고 답했다.[15] 레프 트로츠키 등 당시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차르 가족을 언젠가 사형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고 이런 의도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이는 혁명과 내전 당시 러시아 민심 다수의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전쟁 중 급박한 상황에서 누가 처형 명령을 내렸는지는 어느 혁명가도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다.[16] 일설에 따르면 트로츠키가 차르 재판에서 검사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한다.[17] 유로프스키가 타고 온 자동차 엔진 소리가 커서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꺼낸 질문이었다.[18] 다른 의견: 빅토르 세르주가 "그럼,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라는 기록을 남겼다.[19] 또는 머리를 쏴서 확인 사살.[20] 대신 딸이 수용소로 끌려갔다.[21] 역사소설가 로버트 매쉬에 의하면, 황제 자신이 백발 노인으로 런던 거리를 지나가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근데 그거 조지 5세랑 착각한 거 아닌가[22] 사살 직전 도망가서 유럽 어딘가에 살아남았다는 음모론.[23] 한 때 말이 많았지만 관련이 전혀 없었던 마리야 공주와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와 달리,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와 가장 유력했던 사람으로 바실리 필라토프가 있다. 이 사람은 확실히 알렉세이는 아니었지만, 현재 상황에서도 최소한 니콜라이 2세의 친족, 즉 황가의 일족인 것까지는 유전자적으로도 확실하다.[24] 요절[25] 당숙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30]와 결혼해 자녀 7명을 두었다. 이들 중에 큰딸 이리나(1895년 ~ 1970년)는 펠릭스 유스포프(1887년 ~ 1967년) 대공의 아내가 되었다.[26] 알렉산드라 황후러시아 제국의 차르 계승을 외가인 영국의 계승 방식과 혼동했는지, 첫째 올가 공주가 계승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주변으로부터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독촉을 받고서야 비로소 차르 계승 방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27] 빌헬름 2세의 동생으로 해군 원수. 1899년 방한하기도 했었다.[28] 니콜라이가 3살 아래였다.[정답] 세 사진 모두 왼쪽이 니콜라이 2세다. 엄청 닮았지만 그나마 눈이 좀 차이가 있는데, 조지 5세의 눈이 좀 더 부리부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