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7 19:36:31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colbgcolor=#D5E1BC><colcolor=#000000> 러시아의 대공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마노프
Великий князь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ссии
파일:Konstantin Konstantinovich.jpg
이름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마노프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манов)
출생 1858년 8월 22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트렐나 콘스탄틴 궁전
사망 1915년 6월 15일 (향년 56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블롭스크 궁전
배우자 작센알텐부르크의 엘리자베트 공녀 (1884년 결혼)
자녀 이오안, 가브리일, 타티야나, 콘스탄틴, 올레크, 이고리, 게오르기, 나탈리야, 베라
아버지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어머니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형제 니콜라이, 올가, 베라, 드미트리, 뱌체슬라프
종교 러시아 정교회
1. 개요2. 생애
2.1. 모범적인 황족2.2. 예술가2.3. 성적 취향2.4. 사후 비극적인 가정사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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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족.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차남. 니콜라이 1세의 친손자로, 알렉산드르 3세의 사촌이다.

그리스의 올가 왕비의 남동생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안드레아스 왕자의 외숙이며, 필립 마운트배튼의 진외종조부이다.

할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4명의 아들들은 모두 장남에게 니콜라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차남에게는 자신의 이름[1]을 붙였는데 이에 따라 콘스탄틴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2. 생애

2.1. 모범적인 황족

파일:콘스탄티노비치 가족들.jpg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자녀들.

파일: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젊은시절.jpg
젊은 시절.

콘스탄틴은 어린시절부터 황족들에게 필수인 군대 교육보다 예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은 러시아 제국 해군에 복무하도록 파견되었고, 이후 해군을 떠나 제국 근위대의 엘리트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에 합류를 해서 군복무를 했다.

콘스탄티노비치 집안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문제가 많았다. 아버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바람둥이였고 말년에 발레리나 출신의 정부랑 새살림을 차리기 위해 집을 나가 아내와의 관계를 파탄냈다. 그리고 형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은 할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보석을 훔쳤으며[2], 작은누나 베라는 성격이 난폭한 걸로 당대에도 유명했다.[3]

바로 밑 남동생인 드미트리(1860 ~ 1919)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당했고, 막내 남동생 뱌체슬라프 콘스탄티노비치 대공(1862 ~ 1879)은 10대에 요절했다.

콘스탄틴은 큰 누나인 올가와 함께 부모 말도 잘 듣고 가족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등 이 집안에서 유이한 정상인이었다.

파일:Constantine with Elisabeth.jpg
콘스탄틴은 외가쪽으로 본인과 육촌이자 어렸을 때부터 결혼하고 싶어했던 작센알텐부르크의 엘리자베트 공녀(애칭은 마브라)[4]와 결혼하는데 성공했다.

파일: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의 가족사진.jpg
엘리자베트와의 사이에서 슬하 6남 3녀라는 많은 자녀를 낳았는데, 이는 형제자매들[5]은 물론이고 당시 러시아 황족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적자녀를 낳았다. 참고로 같은 세대의 황족들 중에서는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부부[6]와 함께 유이하게 아들을 6명 이상 낳았다.

당대 러시아의 대공들은 대부분 장신의 미남들이고 상당한 바람둥이였던지라, 여러 정부를 거느리고 다니는 게 일상일 정도로 문란한 사생활을 지냈다. 하지만 콘스탄틴은 그와 반대로 정부를 두지 않고 본부인에게만 충실했던 몇 안 되는 러시아 황족이었다. 그래서 러시아 황실로 시집온 여자들이 부러워했고 니콜라이 2세의 황후 헤센의 알릭스가 좋아한 친척 중 한 명이다.

옐리자베타 대공비와도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으며, 옐리자베타가 결혼하기 위해 처음 러시아에 왔을 때 존경심을 표현하는 시를 썼다. 테러리스트의 폭탄으로 사망한 사촌형이자, 옐리자베타의 남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2.2. 예술가

파일:Grand_Duke_Konstantin_Konstantinovich_as_Mozart,_1880.jpg
파일:연극 유대의 차르에서의 콘스탄틴 대공.jpg
1880년 연극에서 모차르트 역을 맡은 사진 1914년 연극 '유대의 차르'에서 아리마대 요셉 역을 맡은 사진
콘스탄틴은 러시아 예술의 후원자이자 예술가였다.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콘스탄틴은 러시아 음악 협회의 회장이었으며 차이코프스키와도 친분이 깊었다. 또한 콘스탄틴은 문필가이기도 했다. 콘스탄틴은 여러 러시아 문학 협회를 설립했다. 그는 외국 작품(쉴러 와 괴테 등)을 러시아어로 번역했으며, 특히 햄릿의 러시아어 번역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뛰어난 시인이자 극작가인 콘스탄틴은 자신의 연극 연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콘스탄틴은 자신의 마지막 연극인 '유대의 차르'에서 아리마대 요셉역으로 등장했다.

콘스탄틴의 예술적 기질과 의무에 대한 헌신은 알렉산드르 3세니콜라이 2세를 비롯하여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 이후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회장이 되었고, 후에는 모든 군사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또한 스웨덴-러시아 측량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02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의 명예회원이 되었다.

외적으로 장신미남에, 뛰어난 예술가에, 모범적이고, 아내에게 충실하고, 자녀들에게도 가정적인 아버지였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은 러시아 제국 황실의 일원들중에서 평판이 가장 좋았다.

2.3. 성적 취향

평생 바람도 피지않고 아내인 엘리자베트만 바라보며 해로하는 애처가였지만 사실 콘스탄틴 대공은 남자도 좋아하는 양성애자였다. 스스로 동성애의 감정을 점점 숨길 수 없다고 회고했으며, 이 사실이 들통날까봐 자신의 일기를 사후에 공개되도록 조치했다. 지금도 러시아는 동성애자를 혐오하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동성애적 성향이 강했지만 동시에 아내와 금슬이 좋아서 자녀를 매우 많이 낳은 게 육촌빌헬름 2세와 비슷하다.(이쪽은 6남 1녀) 심지어 둘 다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친척들 중에서도 자녀를 가장 많이 낳은 것 역시 똑같다.[7]

2.4. 사후 비극적인 가정사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콘스탄틴의 가족들은 로마노프 왕조 직계이자 사이가 좋았던 니콜라이 2세 가족들과 더불어 러시아 혁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콘스탄틴 대공 본인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에 사망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콘스탄틴의 아들들 6명 중 4명이 전사하거나 볼셰비키들에게 처형당했다. 특히 장남 이오안, 삼남 콘스탄틴, 오남 이고리는 같은 날에 처형당했다. 장남인 이오안은 1남 1녀를 두었지만 이오안의 장남은 자녀 없이 사망했고, 그 외 아들들은 적자녀가 없어서[8] 결국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더 나아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계열의 남계가 통째로 단절되게 되었다.[9]

다만, 아예 후손이 없지는 않고 현재 약 10명 여계 후손들이 남아있다. 콘스탄틴의 장남 이오안 왕자의 딸인 에카테리나 공주의 3명의 자녀들과 그녀의 7명의 손주들이 미국 등 다른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이 미국의 배우인 세바스찬 아르셀루스다.

반면 누나인 올가 쪽도 아들 5명 중 3명이 대가 끊기고 친손자 6명중에서 4명이 대가 끊기는 등 하마터면 단절될 뻔했지만 나머지 손자 2명이 아들을 낳아서 계속 대가 이어지는 중.

똑같이 아들을 6명을 낳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과 6명의 아들들은 무사히 다들 러시아를 떠나서 자녀를 낳았고, 현재까지도 후손이 많이 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Grand Duke Konstantin Konstantinovich of Russia)
<colbgcolor=#fff3e4,#331c00> 러시아 제국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Constantine Nikolaevich of Russia)
<colbgcolor=#ffffe4,#323300>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파벨 1세
(Paul I)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여공작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여공작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of Saxe-Altenburg)
작센알텐부르크 공작 요제프
(Joseph, Duke of Saxe-Altenburg)
작센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Frederick, Duke of Saxe-Altenburg)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게오르기네 여공작
(Duchess Charlotte Georgine of Mecklenburg-Strelitz)
뷔르템베르크의 아말리 여공작
(Duchess Amelia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 루트비히 공작
(Duke Louis of Württemberg)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테 공녀
(Princess Henriette of Nassau-Weilburg)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이오안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John Constantinovich)
1886년 7월 5일 1918년 7월 18일 세르비아의 옐레나 공주[10]
슬하 1남 1녀
2남 가브리일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Gabriel Constantinovich)
1887년 7월 15일 1955년 2월 28일 안토니나 라파일로브나 네스테롭스카야
이리나 이바노브나 쿠라카나
1녀 타티야나 콘스탄티노브나 공녀
(Princess Tatiana Constantinovich)
1890년 1월 23일 1979년 8월 28일 무크라니의 콘스탄티네 바그라티온 공자
슬하 1남 1녀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코로첸조프
3남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Constanine Constantinovich)
1891년 1월 1일 1918년 7월 18일
4남 올레크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Oleg Konstantinovich)
1892년 11월 27일 1914년 10월 12일
5남 이고리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Igor Constantinovich)
1894년 6월 10일 1918년 7월 18일
6남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공자
(Prince George Konstantinovich)
1903년 5월 6일 1938년 11월 7일
2녀 나탈리야 콘스탄티노브나 공녀
(Princess Natalia Constantinovna)
1905년 1905년
3녀 베라 콘스탄티노브나 공녀
(Princess Vera Constantinovna)
1906년 4월 24일 2001년 1월 11일


[1] 삼남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제외.[2] 그러나 걸리는 바람에 타슈켄트로의 유배형에 처했다. 이후 여생을 유배지에서 살다가 10월 혁명 직후인 1918년 1월에 만 67세로 병사했다.[3] 1854 ~ 1912. 그나마 베라는 둘째 고모 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에게 맡겨져 올가와 카를 1세 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난폭한 성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뷔르템베르크의 오이겐 공작과 1874년에 결혼하고 1남 2녀를 낳으며 잘 살았지만 겨우 3년만인 1877년에 오이겐이 만 30세로 요절하면서 23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 큰아들 카를은 태어난지 7달만에 죽었고 둘째인 엘자(1876 ~ 1936), 막내인 올가(1876 ~ 1932)를 두었다.[4] 작센알텐부르크 공작 에른스트 2세의 누나다.[5] 두번째로 자녀를 많이 낳은 사람은 첫째 누나인 올가로 5남 3녀를 두었다.[6] 알렉산드르는 니콜라이 1세의 친손자(니콜라이 1세의 4남 미하일의 아들)이며 크세니야는 니콜라이 1세의 증손녀(알렉산드르 3세의 딸)다. 즉, 알렉산드르-크세니야 부부는 5촌 숙부와 조카 사이로 둘은 슬하에 6남 1녀를 낳았다.[7]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의 손주들중에서 자녀 수로는 공동 1등, 아들 수로도 공동 1등이며, 콘스탄틴은 자녀 수로 1등, 아들 수로는 공동 2등이다.[8] 차남인 가브릴은 하급 귀족인 발레리나와 결혼(가족들이 결사 반대했으나 2월 혁명 직후 어찌저찌 강행함) 했으나 자녀가 없었고(아이러니하게도 그 부인의 연줄(당대의 대문호이자 볼셰비키를 지원했던 막심 고리키의 부인을 통한 구명) 덕분에 형제들, 친족들과 달리 겨우 살아남아 망명할 수 있었다.), 6남인 게오르기는 혁명 후 망명했으나 미혼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9]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의 남계 단절은 공식적으로는 이오안의 장남 브세볼로도가 죽은 1973년, 비공식적으로는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의 형 니콜라이의 차남 알렉산데르의 아들 키릴(1914~1992)이 죽은 1992년이다. 참고로 키릴과 여동생 나탈랴(1917~1999)는 친부의 망명 후 계부에게 입양되어 살았는데, 이 둘은 소련에서 유이하게 거주한 로마노프 황족 출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작가로도 활동중인 미하엘 (전) 그리스 왕자(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의 누나인 올가 왕비의 5남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외아들, 1939~)의 전기 소설 "The White Night of St Petersburg(2004)"가 촌수로 6촌이 되는 나탈랴를 그녀의 사망 1년전에 만나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10] 페타르 1세의 장녀이자 니콜라 1세의 외손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