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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국서 & 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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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그리스어 |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Φίλιππος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 |||
영어 | 필립 마운트배튼 (Philip Mountbatten)[1] | ||||
출생 | 1921년 6월 10일 | ||||
그리스 왕국 코르푸 섬 몬 레포스 궁전 (現 그리스 공화국 이오니아 코르푸 섬 몬 레포스 궁전) | |||||
사망 | 2021년 4월 9일 (향년 99세)[2] | ||||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윈저 성 | |||||
장례식 | 2021년 4월 17일 | ||||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 |||||
신체 | 183cm | ||||
학력 | 맥자넷 아메리칸 스쿨 침 스쿨 고든스턴 스쿨 (졸업) 영국해군사관학교 (졸업) | ||||
배우자 | 엘리자베스 2세 (1947년 결혼) | ||||
자녀 | 장남 찰스 3세, 장녀 앤, 차남 앤드루, 삼남 에드워드 | ||||
아버지 |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 ||||
어머니 |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 ||||
형제 |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케킬리아, 소피아 | ||||
종교 | 정교회 (그리스 교회) →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군사 경력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353B4><colcolor=#fff> 임관 | 영국해군사관학교 (1940년) | |||
복무 | 영국 해군 | ||||
1939년 ~ 1952년 | |||||
최종 계급 | 중령 | ||||
명예 계급 | 원수 (영국 육군) 원수 (영국 해군) 원수 (영국 해병대) 원수 (영국 공군) | ||||
상훈 | 전승 공로 훈장[3] 전쟁의 십자가 훈장[4] 그리스 전쟁의 십자가 훈장 대한민국 체육훈장 청룡장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5] | }}}}}}}}} |
공식 초상화[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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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이자 국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외아들이며 찰스 3세,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일반적으로 필립 공 또는 에든버러 공작이라고 불리며, 1952년 장인 조지 6세[7]의 사망으로 인해 아내 엘리자베스 공주가 여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국서로서 오랫동안 왕실의 주요 업무를 담당해왔다.[8]
100번째 생일을 약 2개월 앞둔 2021년 4월 9일 향년 99세로 사망했다.
2. 작위
문장[9][10] |
-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Philip of Greece and Denmark (1921년 6월 10일 ~ 1947년 3월 18일)
- 필립 마운트배튼 대위 Lieutenant Philip Mountbatten (1947년 3월 18일 ~ 1947년 11월 19일)[12]
- 필립 마운트배튼 경 전하 His Royal Highness Sir Philip Mountbatten (1947년 11월 19일 ~ 1947년 11월 20일)[13]
- 에든버러 공작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Edinburgh (1947년 11월 20일 ~ 1957년 2월 22일)
- 메리오너스 백작 Earl of Merioneth (1947년 11월 20일 ~ 2021년 4월 9일)
- 그리니치 남작 Baron Greenwich (1947년 11월 20일 ~ 2021년 4월 9일)
-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1957년 2월 22일 ~ 2021년 4월 9일)
3. 생애
1926년 | 1947년 |
3.1. 유년기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와 함께 |
위로는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체칠리아, 소피아 4명의 누나가 있었으며 모두 필리포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국서가 되기 전에는 그리스의 왕자였기 때문에 본명은 그리스어인 ‘필리포스’[14]로, 통치 가문의 왕손답게 친가와 외가를 포함한 친척들 대부분이 유럽의 왕족, 공족들이다.
친가인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가계를 보면 증조할아버지는 덴마크 국왕이며 유럽의 할아버지라 불렸던 크리스티안 9세고 친할아버지는 그리스 왕국 초대 국왕 요르요스 1세였으며, 친할머니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녀이자 니콜라이 1세의 친손녀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이었다.[15] 친할아버지의 누이들, 즉 필리포스의 고모할머니들도 각각 영국의 왕비, 러시아의 황후, 하노버의 왕세자비라는 어마무시한 가족 관계를 자랑했다.
외가인 바텐베르크 공가로 가면 외할머니가 헤센 대공국의 공녀였고 이모할머니들은 각각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대공비, 프로이센의 이레네 왕자비,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였으며, 이모가 스웨덴의 왕비였고 외삼촌들은 각각 후작과 백작이었다. 또한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였던 앨리스 공주를 외외증조할머니(어머니의 외할머니)로 두었기 때문에 필리포스는 빅토리아 여왕의 현손자이기도 했다.[16][17]
생후 8개월의 필리포스 |
필립은 하루 종일 딱딱한 마룻바닥을 맨다리로 기어다니면서 웃어. 이렇게 명랑한 아기는 살면서 처음 보는 거 같아.[19]
1922년, 필립이 11개월 때 그리스를 방문한 외할머니와 이모가 보낸 편지.
그러나 당시 그리스 왕실의 안위는 좋지 못했다. 필리포스의 큰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는 1917년 강제 퇴위했던 전적이 있었고 왕위를 물려받은 차남 알렉산드로스[20]가 1920년 패혈증으로 사망한 후 다시 즉위했으나 그리스는 이미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패배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922년, 필립이 11개월 때 그리스를 방문한 외할머니와 이모가 보낸 편지.
3.1.1. 가문의 몰락과 망명
1922년 9월 27일,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에서 그리스가 참패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콘스탄티노스 1세는 2번째 퇴위를 했으며, 대중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희생양이었던 고위층과 장군들은 짧은 재판 후 사형당했다. 전쟁에서 고위 사령관이었던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 역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21]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안드레아스 일가와 친척들은 여러 곳에 닥치는 대로 도움을 청했으며, 필리포스의 외가였던 바텐베르크 공가는 영국 총리에게 로비했고 조지 5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영국 외무부 장관 조지 커즌은 영국 정보부 요원 제럴드 타블롯을 보내 안드레아스 왕자의 처벌에 대해 신(新) 정권의 지도자들과 협상하게 했는데, 그 결과 다행히도 안드레아스 왕자의 사형은 면했지만 그들 일가에게 추방령이 내려졌다.
첫 돌이 지난 필리포스[22] |
필리포스의 넷째 누나 소피아 공주는 "당시 일은 끔찍했고 혼란 그 자체"라고 회고했으며, 떠나기 전 언니들인 마르가리타 공주와 테오도라 공주가 자신들의 모든 문서와 편지를 태워서 "수십 년이 지났어도 몬 레포스에서의 연기 냄새를 기억한다"고 했다. 짐을 챙긴 후 차로 이동하고 작은 배에 올라 군함까지 가서야 승선할 수 있었으며, 당시 생후 15개월이던 필리포스는 항해 내내 과일 상자로 만든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처음에 영국으로 가고 싶어했으나, 이는 영국 외무부와 조지 5세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 왕국 남부 브린디시[26]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수도인 로마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필리포스는 기차 여기저기를 기어다니고 창문을 핥으며 놀았다고 한다.[27]
로마에 도착한 안드레아스 일가는 말 그대로 돈 한 푼 없었기 때문에 영국 대사관에서 돈을 빌려주었고, 파리행 기차표까지 구매해줬다. 나중에 은행가들과 연락이 닿아 재산을 찾은 뒤엔 배고프고 가난한 처지는 아니었으나 재정 상황이 이전에 비해 나빠졌기 때문에 주변 친척과 지인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로마에서 필리포스의 백모인 마리 보나파르트 왕자비[28]가 살고 있는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3.1.2. 프랑스 생활
1923년, 안드레아스 왕자 일가는 마리 보나파르트 왕자비의 도움으로 프랑스 파리 근교 생클루드에 정착해 그녀가 소유한 별장에서 생활한다. 이 때 필리포스는 생후 18개월이었으며, 생클루드에는 마찬가지로 그리스를 떠나 망명 온 사촌누나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의 가족들도 살았다.1927년, 6세 |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는 학교의 창립자이자 교장이던 도널드 맥자넷에게 아들의 활달한 성격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도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미래에는 영어로 말하는 곳에서 지낼 것이기 때문에 미국/영국식으로 교육되고 영어를 잘하길 바란다고 전했다.[30]
맥자넷 아메리칸 스쿨 급우들과 함께 (가운데 금발머리) | 1929년 맥자넷 아메리칸 스쿨에서 개최된 화살 쏘기 대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 |
맥자넷 스쿨에서 필리포스는 ‘성이 없는 남자아이’라고 불렸다.[32] 이 시기 동안 가장 친한 친구는 프리맨 쿠(Freeman Koo, 顧裕昌 구유창)와 웰링턴 쿠 2세(Wellington Koo, Jr., 顧福昌 구푸창)라는 중국인 형제였다.[33] 필리포스는 평생동안 맥자넷 부부를 기억했고 그들에 대해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애정을 담아 말했다. 1970년대까지도 도널드 맥자넷과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맥자넷 부부는 필리포스가 1947년에 엘리자베스 공주와 혼인했을 때 학교 앨범을 선물했고, 첫 아들 찰스 3세가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아버지가 어린 아이였을 때’라는 필리포스의 학교 생활에 관한 책을 보냈다.
1925년 베르크 해변에서 필리포스와 친구 엘렌 코르데[34] |
1928년 10월 촬영된 마지막 가족사진 |
3.1.3. 미쳐버린 어머니, 그리고 영국행
1930년, 9세[36] |
곧이어 앨리스 왕자비에게 조현병 진단이 내려졌고, 누나들은 독일 제국 출신의 왕공족들에게 8달 만에 모두 시집을 갔다. 어머니가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혼삿길이 막힐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37]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몬테 카를로에서 따로 생활하게 됨에 따라, 8살의 필리포스는 혼자가 되었다. 기숙학교는 가족의 갑작스러운 해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안드레아스 왕자는 자신이 경험한 가혹한 그리스 군대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기를 바라며, 아들을 영국에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어했다.
1933년, 침 스쿨에서 찍은 학교 증명사진 | 침 스쿨 급우들과 함께, 뒷줄 맨 오른쪽. |
3.1.4. 떠돌이 왕자
필리포스는 7년 동안 어머니와 한번도 만나지 못했고, 편지 한 통 받지 못한 채 홀로 생일을 맞이해야 했다. 필리포스는 사실상 고아였고 방학이나 크리스마스같은 연휴때는 외할머니 빅토리아가 있는 켄싱턴 궁전, 버크셔의 밀포드 헤이븐 후작저, 코핀스, 독일에 있는 누나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지냈다. 그중에서도 셋째 누나 케킬리아가 시집간 헤센 대공가[38]가 있는 다름슈타트와 볼프스가르텐[39]에 자주 갔기 때문에 누나들 중 셋째 누나 케킬리아를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필리포스는 이 휴일들을 항상 즐겼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필리포스의 일정을 계획했기 때문에 휴일마다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혼란스러웠다고.미래의 아내 엘리자베스 공주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란 것과는 달리 확연히 대조되는 성장 배경이었던 것. 그럼에도 그는 항상 밝은 모습이었으며 부모에 대한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이었는데, 가끔씩 다른 가족들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했지만 그들에 대해서 만큼은 항상 애정, 심지어 동경을 담아 말했다고 한다. 부모의 초상화는 모두 버킹엄 궁의 서재에 걸려있었고, 거의 평생동안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인장 반지를 끼고 살았다.
필리포스의 친구이자 친척인 지나 베르너[40]는 필리포스가 기숙사에서 행복했지만 어릴 때 아래처럼 자신한테 말했다고 한다.
"모두들 돌아갈 집이 있어. 하지만 나는 아니야."
"Everybody has a family to go back to. I don't."
"Everybody has a family to go back to. I don't."
3.1.5. 계속되는 시련
1934년, 13세 |
오른쪽에서 6번째, 잘렘 시절의 필리포스. 뒤 쪽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걸려있다. |
필리포스는 잘렘에 다닌 지 2학기 만에 영국으로 돌아와 스코틀랜드의 고든스턴 스쿨(Gordonstoun School)에 입학했다. 고든스턴 스쿨 역시 슐레 슐로스 잘렘의 설립자인 쿠르트 한(Kurt Hahn)이 스코틀랜드로 건너와[42] 세운 기숙학교였으니 자매학교로 전학한 셈이다. 고든스턴 스쿨은 전교생 모두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기숙사제로 운영되었으며, 특유의 체력장 문화와 엄한 학풍으로 유명했는데, 단순히 학문이나 교육적인 측면에서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육체적으로 단련시키는, 마치 사관학교를 방불케 하는 학교였다. 필리포스는 이런 스파르타식 학풍이 본인의 성정과 잘 맞았는지 학교생활에 금방 적응한다.
1935년, 고든스턴에서 열린 연극을 위해 분장한 모습 |
1937년에는 큰 비극이 벌어졌다. 셋째 누나 체칠리아가 런던에서 열리는 시동생 루트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가던 도중 벨기에 오스텐더 상공에서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난 것. 이 사고로 넷째를 임신 중이던 만삭의 누나와 매형, 조카 2명까지 전원 사망했다.[45] 가족들은 필리포스가 충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이 끔찍한 비보를 숨기기로 결정했지만 문제는 그날 저녁에 있었다. 학교에서 흘러나오던 BBC 라디오 방송으로 누나의 죽음을 접하고 말았던 것. 사촌 누나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는 남편 켄트 공작 조지 왕자와 자택에서 이 방송을 듣자 필리포스가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에 곧바로 고든스턴으로 연락했으며 크게 동요하는 사촌동생을 가라앉혔다. 필리포스는 사고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비행기의 작은 잔해를 간직했다고 한다.
1937년, 헤센 대공가의 장례식 (선두 오른쪽에서 2번째, 제복군인들 사이)[46] |
1938년, 고든스턴의 지붕 위에 앉아있는 모습 |
훗날 그는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댁에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50] 무슨 말을 쓰셨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집에서’라는 게 무슨 뜻이죠?
What do you mean ‘at home’?
What do you mean ‘at home’?
3.1.6. 엘리자베스 2세와의 만남
당시 18세의 어린 생도였던 필리포스는 학생 대표로 나가 국왕 일가를 안내하였고[51], 공주들의 에스코트 역할을 맡았다. 이때 13세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필리포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사실 말이 에스코트지 놀이 상대로 왔던 필리포스는 공주들의 기차놀이에 질려버린 나머지 “테니스 네트를 뛰어넘는 놀이를 하자”고 제안한 후 네트를 넘어가며 달렸는데 그 모습에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반해버렸고, 그날 밤 가정교사인 크로포드 부인에게 “필리포스의 모습은 마치 그리스 신처럼 멋있었다”며 그와 함께한 이야기를 밤새 늘어놓았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풋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리포스의 친척들은 달랐다. 그들은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를 닮아 잘생기고 훤칠한 필리포스에게 창창한 앞날을 만들어 주려 하고 있었다. 바로 영국 여왕의 남편 자리였다.[52] 특히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은 이 원대한 계획의 중심 인물로, 그는 누나의 아들인 필리포스를 장래 영국 왕의 아버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53] 이 계획에는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뿐만 아니라 그리스 왕실 사람들 대부분이 참여했고, 엘리자베스 공주의 작은어머니이자 필리포스의 사촌누나였던 마리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작 필리포스는 13세였던 엘리자베스를 그저 어린애로 생각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이미 세계 1차 대전 이후로 외국 왕족과의 혼담이 줄어든 영국에선 공주 또래의 귀족이나 젠트리 가문의 영식을 부마로 뽑길 선호했었다. 가장 유력했던 후보는 이집트의 투탕카멘 발굴을 후원한 카나본 백작가(Earl of Carnarvon)[54]의 후계자 헨리 허버트(1924~2001)였다.[55] 왕실과 왕래가 잦았던 가문 덕에 엘리자베스의 소꿉친구였다고.
3.2. 청년기 ~ 노년기
3.2.1. 해군 복무
1939년 12월 13일 라밀리즈(HMS Ramillies)에서 사관 후보생 필리포스 |
1940년 6월에 이탈리아 왕국이 그리스 왕국을 침공하면서 그리스도 전쟁에 참여하자 필리포스는 전선에 나갈 수 있게 됐다. 따라서 1940년 말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지중해함대 소속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밸리언트(HMS Valiant)에 배치되어 리비아 포격, 크레타 섬 전투와 마타판곶 해전에 참여했다. 마타판곶 해전에서는 탐조등을 이용해 은밀히 접근하던 이탈리아 왕립 해군 함정들을 발견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마타판곶 해전에서 이탈리아 측 전투기가 없어 비교적 쉽게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크레타 섬 전투에서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57]
1942년 7월에는 대위로 진급하여 셰익스피어급 구축함 월리스(HMS Wallace)의 부장(副長)에 임명되었다. 윌리스의 부장이 다른 곳으로 배치되자, 필리포스는 그의 자리를 맡아 대위로 진급했다. 필리포스는 21세로 가장 어린 나이에 대위로 진급했다. 월리스는 주로 북해, 북대서양의 호송 임무를 수행하며 독일 공군과도 여러 차례 교전했고, 이후 1943년에는 지중해로 이동하여 시칠리아 상륙작전에 참여하였다. 시칠리아 상륙작전 무렵에는 추축국 공군의 야간 폭격을 받아 거의 격침 직전의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이때 필리포스는 선내의 나무들을 엮어 간이 뗏목을 만들고 여기에 연막탄을 피워 바다에 던지는 기지를 발휘 했다고 한다. 야간이라 정확한 식별이 어려운 상황에서 적 폭격기들은 이 뗏목을 적함으로 오인하여 무사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44년에는 신조된 W급 구축함 웰프(HMS Whelp)의 부장에 임명되었다. 이 HMS 웰프는 북대서양 호송 임무를 수행하다가 독일 해군의 수상함 세력이 거의 소멸하자 동양함대(이후 태평양함대)로 전속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는 인도양과 남태평양에서 항공모함/전함 호위 등 다양한 전투임무를 수행하다가 종전을 맞이하였다. 종전 후인 1945년 9월에는 일본의 항복 뒷처리를 위해 도쿄만에 파견되기도 했다. 이후 HMS 웰프는 홍콩, 호주 등을 거쳐 영국으로 귀환, 1946년 2월 포츠머스에 입항한다. 이로써 필리포스는 해군 장교로 6년여에 걸친 전시 임무를 완수했다. 5월에는 마타판곶 해전의 영웅 중 한명으로 인정됐다. 귀국해서는 육상 임무로 전환되어 윌트셔 주 코섐에 위치한 해군 부사관 통신학교 교관직을 수행했다.
1944년 12월 3일,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사망했다. 아테네에서 살던 앨리스 왕자비는 동생 루이 마운트배튼을 통해 HMS 웰프에 있던 필리포스에게 소식을 전했다.
3.2.2. 공주의 연인
한편 엘리자베스 공주는 해군사관학교에서 필리포스와 만난 이후 짝사랑에 빠져 계속 편지를 쓰고 사관학교에 면회를 가기도 했으나, 필리포스는 자신보다 5살이나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엘리자베스에게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당시 잘생긴 외모와 호탕한 성격으로 많은 상류층 영애들의 흠모 대상으로써 사교계를 휩쓸고 다니던 시절이었다.처음 만났을 때에도 필리포스에게 첫눈에 반해 호의적이였던 엘리자베스와는 달리, 필리포스는 그저 친척 아가씨이자 어린 동생 수준으로 그녀를 대했다. 나이로나 외모로나 취향 밖이었지만[58] 공주, 그것도 장래 모든 군인의 상관이 될 공주의 편지를 무시할 수 없던 노릇이라 가끔씩 답장을 써주었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오는 답장을 혼자 방에 들어가 몰래 읽으며 설레어 했다. 필리포스가 엘리자베스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알던 동기들은 "요즘도 공주님께 편지 보내냐"며 그를 놀렸다고 한다.
1941년 10월 휴가 중에 필리포스는 윈저 성에 초대되어 조지 6세 및 엘리자베스와 환담을 나누기도 했고, 그해 11월에는 필리포스의 사촌매형[59]이자 엘리자베스의 작은아버지인 켄트 공작 조지 왕자의 결혼기념일 파티[60]에서 둘이 같이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럴수록 엘리자베스는 점점 더 사랑에 빠져들어 작전에 나간 필리포스에게 계속 편지와 음식을 담은 소포를 보냈는데, 여전히 필리포스는 마지못해 가끔 회답하는 수준이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주변인들에게 필립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공주는 사촌인 마거릿 로데스에게 "지금 너무 신나! 엄마가 필립이 여기에 와서 지내도 된다고 허락했어!(It's so exciting. Mummy says that Philip can come and stay.)"라고 편지했으며 사촌 다이애나 보우스라이언에게 "난 지금도 필립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는 정말 재밌어. 진지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진지해지면 꽤나 논리적으로 말한다고 생각해. 지난 일요일 밤에 우린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어. 축음기 음악 소리에 맞춰서 춤을 췄는데 굉장히 즐거웠어.(I still think he is charming and he is great fun. Hardly ever serious. But when he is, I think he talks good sense. We had a terrific time on Sunday night. We danced to the gramophone, which was great fun.)"라고 편지했다. 이외에도 엘리자베스는 "필립이 다시 나한테 편지했어!", "필립이 곧 방문한대! 너무 즐겁지 않니?" 라고 편지하는 등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던 1943년 12월 말, 당시 필리포스는 부장을 맡고 있던 HMS 월리스가 계속된 기계 고장으로 수리 도크에 들어가는 바람에 육상에서 비교적 여유로운 연말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바람에 크리스마스 휴가도 윈저 성에서 왕실 가족들과 함께 보내게 되었다. 17살을 맞이한 엘리자베스는 그 사이 어엿한 숙녀로 성장하고, 필리포스는 지중해 전선에서 실전을 치르면서 바이킹 전사 같은 남성적 매력이 넘쳐나던 때였다. 바로 이 때 엘리자베스는 성내에서 열린 왕실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주인공을 맡아 연기를 펼친다.[61]
"나는 이제 엄청 큰 필립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소유자야. 사진은 벽난로에 있고 나를 보고 있어. 이 사진이 도착했을 때 나는 꽤 많은 질책을 들었었지만 엄마가 "그는 잘생긴 아이야."라고 한 말은 동의해! 나는 샌드링엄의 고용인들은 모두 이 사진을 보고 "어머, 이게 누굴까나."라는 말을 했다고 장담해."
1945년 2월, 엘리자베스 공주가 다이애나 보우스라이언에게 보낸 편지
1945년 2월, 엘리자베스 공주가 다이애나 보우스라이언에게 보낸 편지
1944년, 필리포스는 새로운 구축함 HMS 웰프에 배치되어 다시 전선에 나가면서 선실에 엘리자베스의 사진을 걸어놨고, 엘리자베스도 복무 중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필리포스의 사진을 가장 아끼며[62] 왕궁의 자기 방에 걸어놨다고 한다.[63]
엘리자베스 공주는 이 때부터 아버지 조지 6세에게 둘의 관계를 알리고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조지 6세는 큰딸에게 "아직 결혼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이니,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엘리자베스의 할머니 메리 왕비도 1944년 1월에 "엘리자베스와 필리포스가 지난 18개월 동안 사랑에 빠져있었지만, 왕과 왕비는 엘리자베스가 아직 너무 약혼하기엔 어리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엘리자베스가 결혼 전 더 많은 것을 겪고, 또 더 많은 남자를 만났으면 한다"고 편지에 적었다. 언론에는 "둘이 사귀는 것을 왕실에서 반대했다"는 기사도 많이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지 6세는 매사에 소심했던 자신과 다르게 남자답고 건실하고 활달했던[64] 필리포스를 좋아했지만, 큰딸이 너무 어려 걱정했을 뿐이었다. 조지 6세는 필리포스가 전쟁 중에도 휴가를 나오면 윈저 성이나 왕가의 여름 휴가지인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에 초대해 왕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배려했다.
1946년, 전시 임무를 모두 마치고 돌아온 필리포스는 밸모럴 성에 초대되어 1달의 긴 여름 휴가를 엘리자베스와 함께 보냈다. 이때 필리포스는 20세의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하고 엘리자베스도 완전히 결혼할 뜻을 굳히며 아버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청혼을 받아들인다. 이 무렵에는 왕실에서도 둘의 관계를 눈치채 주변 중신과 귀족들이 엘리자베스에게 직간접적으로 우려를 전달하기도 했으나, 이미 사랑에 눈이 먼 엘리자베스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필리포스는 조지 6세에게 둘의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다.
혈통으로만 따지면 빅토리아 여왕의 현손자이자 전하(HRH) 칭호를 가진 엄연한 고위 왕족이었기 때문에 부마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그러나 몰락한 가문 출신에 부모도 온전치 않은 점,[65] 무엇보다도 그의 누나들이 전부 독일 왕공족들과 결혼한 점이 문제였다. 또한 일부 매형들은 나치당에 가입하거나 독일군 장교로도 복무했었다.
첫째 매형 호엔로에랑엔부르크 후작 고트프리트, 둘째 매형 바덴 변경백 베르톨트[66] 모두 독일 국방군에 복무했었고, 넷째 매형 헤센카셀 공자 크리스토프는 나치 친위대 장교였다.[67] 셋째 매형인 헤센 대공 게오르크 도나투스는 앞서 상술했듯 전쟁 발발 전인 1937년에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일가족과 함께 사망했다. 다만 셋째 누나 부부도 사망 6개월 전에 이미 나치당에 가입한 상황이었다.
2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른 직후라 반독 정서가 극에 달한 상태여서 일반 국민은 물론 상류층들 사이에서도 필리포스의 집안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대표적으로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나 윈스턴 처칠도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특히 왕비는 엄연히 백작의 딸이지만 그리스 공주 출신의 동서이자 필립의 사촌인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에게 은근히 무시당해서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필리포스가 영국 해군 항해장교로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최일선에서 복무한[68] 참전 용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독일에 대한 영국의 여론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3.2.3. 영국으로 귀화하다
필리포스와 엘리자베스가 친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필리포스의 가족들은 매우 큰 관심을 가졌다. 가족들은 필리포스가 영국 해군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영국으로 귀화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촌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는 필리포스의 영국으로의 귀화는 매우 좋은 생각이며, 해군 커리어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결혼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69]필리포스의 귀화를 위해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이 매우 많은 노력을 했다.[70] 먼저 영국의 조지 6세의 허락과 그리스의 요르요스 2세의 허락이 필요했지만, 두 군주 모두 기꺼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요르요스 2세의 입장에서 귀화는 다른 나라에게 자국의 왕자를 빼앗기는 굴욕적인 상황처럼 보여질 수도 있었으며[71], 조지 6세의 경우에는 마운트배튼의 의도가 해군 커리어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과의 결혼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지 6세는 일기에 "필리포스의 귀화는 결혼과 관련 있을 것 같다."고 적었다.
두 군주들이 허락을 꺼렸고 영국 정부에서도 필리포스의 귀화로 발칸 반도의 정치 상황에 끼어들까 봐 조심스러워했다. 결국 필리포스의 귀화는 3년이 걸렸다. 그동안 루이 마운트배튼은 여러 곳에 로비를 하는 등 이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조지 6세가 필리포스의 귀화를 허락하자, 루이 마운트배튼과 요르요스 2세는 앨리스 왕자비에게 필리포스가 영국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라고 했다. 앨리스 왕자비는 조지 6세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고 조지 6세는 요르요스 2세가 자신에게 기다리라고 해 허락이 늦어졌을 뿐이라고 했다. 앨리스 왕자비는 조지 6세와 요르요스 2세 모두에게 온전히 승인을 받았음을 확인했다. 이후에도 앨리스 왕자비와 외할머니 빅토리아, 이모 루이즈 왕세자비가 함께 버킹엄 궁전에 방문해 왕과 왕비와 상의하는 등 사실상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오갔다.
필립은 귀화로 새로운 성이 필요했다.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가문 이름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로 올덴부르크 가문의 분가였기 때문에 올드캐슬(Oldcastle)이라는 성을 추천 받았다. 하지만 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필리포스는 어머니 가문의 성 마운트배튼(Mountbatten)[72]을 사용하기로 했다.
1947년 5월 18월,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필리포스는 필립 마운트배튼 대위로 영국에 귀화했다. 아울러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신분과 계승권[73]을 포기함과 동시에 종교도 동방정교회에서 성공회로 개종[74]했다.
3.2.4. 약혼과 결혼
조지 6세는 이에 엘리자베스가 21세 생일을 맞는 이듬해 1947년 4월까지는 둘의 교제를 발표하지 않고, 12주의 남아프리카 순방 동안 약혼에 대해서 더 생각할 시간을 가지겠다는 조건 하에 허락했다. 중간중간에 둘의 교제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는 했으나, 왕실에서는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반복했다.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마운트배튼의 공식 약혼사진 |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마운트배튼의 결혼식 |
전쟁의 상흔이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열린 로열 웨딩은 큰 화제가 되었으며, 비록 결혼식에 참석한 영국 왕족과 귀족들은 필립을 향해 안 좋은 말을 수군거렸지만[75] 이미 필립도 논란거리를 정리한 상황이었고,[76] 현역 해군 대위에 훤칠한 미남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았다. 이 결혼식의 공식 하객만도 2천여 명에 이르렀고, 결혼식을 보기 위해 50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런던 거리에 운집했다. BBC 라디오를 통해 결혼식 중계 방송을 들은 전 세계 청취자도 약 2억 명에 달했다고 한다.풀영상
결혼식에는 필립의 사촌인 엘레니, 이리니, 에카테리니, 5촌 조카인 알렉산드라와 그 남편 페타르 2세, 6촌형 프레데리크 9세와 당숙인 호콘 7세, 5촌 조카인 미하이 1세, 6촌인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안,[77] 사촌형 파블로스의 왕비이자 누나 소피아의 시누이이며 동시에 필립의 6촌이기도 한 프레데리키, 룩셈부르크 대공세자 장 등 유럽 전역의 친척과 왕족들이 참석했다.
1952년 밸모럴 성에서 찍은 가족사진 |
이후에도 필립은 영국 해군에 계속 복무했다. 1948년에는 그리니치의 왕립해군대학의 교관직을 맡았으며, 1949년에는 영국령이었던 몰타의 지중해 함대로 나가 구축함 체커스(HMS Chequers)의 부장직을 맡았다. 이어 1950년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역시 몰타 지중해 함대 소속 호위함 맥파이(HMS Magpie)의 함장에 임명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이 해외 근무 시기에 필립과 함께 몰타에서 거주했는데, 훗날 여왕이 되고 나서 몰타에서 보냈던 이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3.2.5. 여왕의 부군
대관식 직후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79][80][81] |
조지 6세의 사망으로 인한 갑작스런 귀국 |
1960년 차남 앤드루의 출생을 앞두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전하의 호칭을 가진 왕족들은 성이 없는데 왕족 직함을 쓰지 않을 새로운 아이의 손자부터는 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85] 여러가지 논의 후, 필립과 여왕의 일부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라는 성(surname)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왕가의 이름(family name)은 계속 House of Windsor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surname=family name이지만, 영국 왕가의 경우 앞으로 surname은 마운트배튼윈저(Mountbatten-Windsor), family name은 윈저 가(House of Windsor)라고 하여 구분하겠다는 것이다.[86] 즉 성씨는 달라지더라도 왕가의 이름은 계속 Windsor로 고정된다는 뜻이다.[87]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당시 영상[88] |
또한 여왕의 남편임에도 여전히 무일푼 외국인 왕자라는 귀족들의 비아냥과 모욕을 듣거나 왕가의 성을 윈저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귀족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나서서 남편 필립 공의 지위를 확실하게 정리했는데, 특히 딸을 비롯한 여계 후손들과 왕족 호칭이 안 붙는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란 성을 쓰게 조치했다. 심지어 자신도 아주 사적인 경우에는 마운트배튼윈저 부인이라는 이름을 쓴 적도 있다.[90]
더불어 1953년부터 시작된 당시 에든버러 공작의 왕실 작위에 대한 논쟁 끝에 여왕은 그에게 1957년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공(Prince of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작위를 내리는 한편[91], 그를 칭할 때에는 에든버러 공작 필립공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로 할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더불어 필립 공의 공식 지위가 '현저하고 우선하게 여왕 폐하 다음(Place, Pre-eminence, and Precedence next to Her Majesty)'이라고 법적으로 못을 박았다. 이로써 필립 공의 위치는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92]
아내 엘리자베스 2세와는 평생 금슬이 좋은 편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데에는 남편 필립 공과의 모범적인 결혼 생활도 한몫 했다. 외국에 알려진 것처럼 수십 년간 두 사람 사이에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여왕이 남편의 바람기를 어느 정도 눈감아주었고, 필립 공 역시 바람은 피워도 아내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본분을 잊지는 않았기 때문에 간간히 나오는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을 평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고전적인 유형의 부부라 할 수 있다.
1947년 신혼여행 중 (위) 2007년 결혼 60주년을 맞이해 위를 재현 (아래) |
1956년 남극 제도를 방문한 이후 자연 보호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또한 세계 자연보호 기금의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의전 서열상 영국군 최고 계급 보유자로, 영국 육군, 영국 해군, 영국 공군의 원수 계급을 보유하고 있고, 2011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해군 최고사령관(Lord High Admiral) 직위를 넘겨받았다. 옛날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은 마운트배튼 경처럼 외국인이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반대로 인해 해군 제독 계급을 수여받지 못했다. 반면 필립 공은 영국 해사 출신이고 해군 현역시절 2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중령까지 진급한데다 이미 본국 왕정도 없어진 상태라 큰 논란이 없었던 듯하다.
3.2.6. 장수와 건강 문제
결혼 70주년 기념 사진 |
2010년대 들어 워낙 고령이다 보니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뉴스가 간간이 나오곤 했었다. 2011년 12월 23일에는 가슴 통증을 호소해 병원에 입원해서 관상동맥경화 수술을 받고 27일 퇴원했다. 2012년 6월 4일에는 전날 있었던 수상 퍼레이드에서 비가 오는 날씨에 2시간 동안 선 채로 참석한 후유증으로 급성 방광염 증세를 보여 런던 킹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가 9일 퇴원했다. 2013년 6월 6일, 복부 수술을 위해 런던클리닉에 입원했다.
2017년 8월 2일 버킹엄 궁에서 열리는 왕립 해병대 퍼레이드 행사 참석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왕실 업무를 끝내고 은퇴하였다. 필립 공이 맡았던 업무들은 막내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에게 인계되었고, 이 95세 전후가 왕실의 은퇴 연령으로서 장차 여왕 역시 은퇴하고 아들이 섭정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제기되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2019년 1월 17일, 노퍽 주 샌드링엄 하우스 인근에서 본인이 운전하던 랜드로버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큰 부상 없이 멀쩡하다는 병원 진단이 나왔다.[96] 그러나 사고 이틀 뒤 안전벨트 없이 또 운전을 하는 모습이 목격되어 고령자의 운전 금지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2월 9일 운전면허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99세 기념 사진[97] |
2020년 6월 10일 99세 생일을 맞이해 영국 역사상 현직 군주의 배우자로서 최고령이자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98]
2021년 2월 16일, 필립 공이 몸이 좋지 않아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고 밝혔다. 코로나 19는 아니라고 한다.# 3월 1일 구급차로 세인트 바르톨로메오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심장 수술을 잘 받았다고 한다.# 한 달 만에 퇴원하였다.#
3.3. 사망
생전에 공식적으로 찍힌 마지막 모습[99] 심장 수술을 받기 위해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모습이다.[100] |
BBC의 특별 추모 방송[101] |
버킹엄 궁은 현지 시간 2021년 4월 9일 성명을 발표하고 필립 공이 윈저 성에서 이날 아침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사망 당시 여왕이 곁을 지켰다고 한다. 향년 만 99세.[102]##
얼마 전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꽤나 수척해진 모습(이 문단의 윗 사진)이라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었는데, 우려대로 곧 사망했다. 코로나19가 아닌 감염증 치료를 하던 중 심장 관련 지병이 발견되어 추가 치료를 받게 되었으나 노환으로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고 밝혔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의 배우자의 직무[103]를 수행한 왕족으로, 장례식은 생전 그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질 것이라고 한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펐다"면서 "필립 공은 영국과 영연방, 전 세계의 여러 세대로부터 애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필립공은 비범한 삶을 살았다"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의 삶에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 그는 "필립 공은 왕실이 영국인들에게 중요한 기관이 되도록 도왔다"고 덧붙였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영국은 비범한 공복[104]을 잃었다"며"그는 2차 대전 때는 영국 해군으로서, 이후엔 에든버러 공작으로서 나라에 인생을 헌신했다"라고 말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필립 공이 여왕을 오랜 세월 놀랍고 꾸준하게 지지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지만 선견지명과 의지와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서도 기억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필립 공의 모국이자 지금은 없어진 그리스 왕국의 콘스탄티노스 2세[105] 전 국왕은 필립 공에 대해 "그의 나라와 영연방을 위한 의무와 봉사에 전 생애를 바친 놀라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 가족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슬픔이 더욱 깊어진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그리움이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필립 공이 "결혼과 가족에 대한 헌신, 공익사업에 대한 경이적인 기록, 미래 세대의 교육과 발전을 위한 헌신을 했다"면서 진심 어린 애도를 표했다. 교황은 또 "필립 공이 떠난 데 대해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주님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부탄의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국왕과 제선 페마 왕비가 심토카 종(Simtokha Dzong)에서 1000개의 등불을 밝혀 필립 공의 명복을 빌었다.#
문재인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역시 다음 날 트위터에 성명을 내 명복을 빌었다.#
영국 정부와 각 국의 영국 대사관 및 영사관을 비롯해서 같은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와 뉴질랜드, 호주에서는 조기를 게양했다.
버킹엄 궁전에 게시된 부고문 |
사망 이후 버킹엄 궁전 대문에는 공식 발표문이 붙었으며, 이후 추모객들이 줄을 이었다. 버킹엄 궁 측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고려해 조화를 놓는 등의 행동을 자제하고, 기부 등의 방법으로 추모를 할 것을 권장한다"고 밝혔지만, 애도를 표현하려는 인파가 버킹엄 궁 앞으로 몰리는 것을 우려해 공식 발표문도 1시간 만에 뗐다.
장례식은 4월 17일 토요일에 왕실 관례와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윈저 성 내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국장이 아닌 왕실장으로 치러지며, 안장도 그 곳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다.대략적인 예상도 다만, 이는 가안장에 해당하며 여왕의 영면 후에는 여왕과 같이 조지 6세 경당에 안장될 예정이다.[106] 코로나 19로 인해 일반인 추모를 위한 시신 공개 행사도 없다고 한다.# 최근 잇따라 왕실에 대한 폭로를 내놓았던 해리 왕자도 평소 할아버지 필립 공과 사이가 가까웠던 만큼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한다.[107] 다만, 부인 메건 마클은 현재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인 만삭이어서 장례식 참석이 불투명하다고 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장례식 참여 인원이 30명 이하로 제한되어, 장례식에는 그의 가족과 개인 비서만 참여한다. 보리스 존슨 총리 또한 그의 가족이 최대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장례식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장례식에는 필립 공의 생전 요청에 따라, 나치에 시집을 갔다는 이유로 자신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던 누나들의 후손들이 올 수 있게 되었다.[108]
ITV는 필립의 영면이 발표된 당일 앤 공주와 에드워드 왕자와 인터뷰를 가졌고 찰스 3세는 이튿날 간략한 성명을 남겼다. 앤드루 왕자는 11일 추모성찬례를 마치고 BBC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영국 여론은 저런 성범죄자가 부친상을 핑계로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냐는 반응이 대다수.
4월 12일 BBC 두 채널에서 계속 추모 방송을 하여 필립 공 특집 방송을 그만하라는 항의 청원이 110,000건으로 기존 최고 기록이었던 제리 스프링거쇼 방송 항의 횟수 63,000건을 훌쩍 넘어 기록을 갱신했다.# 어느 정도 보수성이 있는 공영 방송이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평도 있다. 결국 BBC는 필립 공의 장례식을 BBC One에서 생중계한 뒤 당일 저녁 BBC Two에서 재방송하였다.#
바누아투의 타나섬 카스톰 족은 필립을 자신들과 같은 부족이라고 믿고 있어서 큰 슬픔에 빠졌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여담으로 필립 공이 세상을 떠난 2021년에는 그의 증손주가 무려 4명이나 태어났다.[109]
유언장이 최소 90년 동안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채 봉인된다.#
2022년 3월 2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필립 공의 추도식이 열렸다. 여왕을 비롯하여 자녀, 손주, 증손주 및 각국의 국왕과 왕비들도 참석하였다.
이후 2022년 9월 8일에 엘리자베스 2세가 향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부부가 나란히 1년 5개월의 차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여왕의 장례식 후 가안장 되어있던 필립의 관을 조지 6세 경당으로 옮겨 여왕과 함께 안장되었다.
4. 가족 관계
앤드루 왕자 (셋째) | 앤 공주 (둘째) | 에드워드 왕자 (넷째) |
찰스 3세 (첫째) | 엘리자베스 2세 (아내) | 필립 공 (본인) |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 <colbgcolor=#fff3e4,#331c00>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Prince Andrew of Greece and Denmark) | <colbgcolor=#ffffe4,#323300> 요르요스 1세 (George I) | |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 |||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 |||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a of Russia) | |||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Konstantin Nikolayevich of Russia)[110] | |||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of Saxe-Altenburg) | |||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Princess Alice of Battenberg) | |||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Prince Louis of Battenberg) | |||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Prince Alexander of Hesse and by Rhine) | |||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 (Countess Julia von Hauke) | |||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Hesse and by Rhine) | |||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 |||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111]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배우자 / 자녀 |
엘리자베스 2세 (Elizabeth II) | |||
1남 | 찰스 3세 (Charles III) | 1948년 11월 14일 | 슬하 2남[112] |
카밀라 파커 보울스 | |||
1녀 | 프린세스 로열 앤 (Anne, Princess Royal) | 1950년 8월 15일 | 슬하 1남 1녀[113] |
티머시 로런스 | |||
2남 |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Prince Andrew, Duke of York) | 1960년 2월 19일 | 슬하 2녀[114] |
3남 |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Edinburgh) | 1964년 3월 10일 | 소피 리스존스 슬하 1남 1녀[115] |
필립 본인도 그렇거니와 아내 엘리자베스 2세 역시 장수하고 있어서 2007년에는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었고, 2011년에는 필립의 9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거행되었다. 생일 전날 BBC와 인터뷰한 필립은 "(여왕의 부군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도 아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며 "스스로 여왕의 남편의 교본을 만들어가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5. 평가
워낙 복잡한 시대를 살아왔는지라 보는 시각과 기준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지는 복합적인 인물이다.5.1. 부정적 평가
5.1.1. 실언으로 인한 구설수
연이은 실언과 기행들에서 보듯 인격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오죽하면 영국 국민들이 필립에게 붙인 별명이 '웃기는 사람(funny man)'이다. 이런 면에서 필립은 인종주의나 신분의식 등 1920년대에 태어난 상류층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일면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5.1.1.1. 실언 목록
여러 차례 짓궂은 농담과 실언으로 구설수에 올라 아내인 엘리자베스 2세를 당혹케 만들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릴 적부터 블랙 유머를 즐겼고, 나름 자신이 유머 감각이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116] 하지만 여기에 20세기 초 여전히 대영제국의 영광이 남아 있고 계급 간 신분차별과 인종차별, 성차별이 만연하던 시기에 형성된 의식이 고스란히 깔려 있던 게 문제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가, 지역, 신분, 인종, 성별간 차별이 점점 금기시되는 시대가 되면서 이런 농담은 블랙 유머가 아니라 실언과 망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사석에서는 이런 발언이 아슬아슬하지만 웃기는 드립 정도로 여겨졌겠지만, 왕가의 일거수일투족이 TV로 노출되고 대중의 가십거리가 되면서부터 더욱 물의로 번지는 일이 많아졌다. 그로 인해 20세기 후반부터 국내외에서 거의 실언 제조기, 공포의 주둥아리 취급을 받았으며, 엘리자베스 2세도 필립 공이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불안해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이기도 했다.잘 알려진 실언 사례들은 아래 목록 및 인디펜던트가 모은 90가지 발언들에 정리되어 있다. 단, 아래 목록의 실언 중에는 아예 가짜뉴스로 추정되는 내용들도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 1965년에는 수단을 방문해서 베풀어진 리셉션 자리에서 박사학위 소유자들을 소개받고 "이 나라의 유일한 박사들이 틀림없군요."라고 발언했다.
- 1966년에는 자선기금 모금 차 미국을 방문했다가 마이애미의 한 사업가가 "내 풀장에 뛰어들면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자 진짜로 옷을 벗고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일반인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으나, 그의 사회적인 위치가 영국의 국서라는 것이 문제였다.
필립의 외할머니인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가 러시아 제국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첫째 언니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립 공은 니콜라이 2세 차르 부부에게는 조카손자, 그들의 자녀인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시야, 알렉세이에게는 5촌 조카이다.[118]
필립의 과격한 발언은 논란이 되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인지라 물어본 기자도 눈치가 없다고 비판받았다.
사실 한국인 기준에서 보자면 조선노동당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서 몰살당하고 탈출한 북한이탈주민이나 폭정으로 인해 고향과 가족을 잃은 실향민, 이산가족,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고향에 가고 싶나요'라는 질문과 같다.[119]
그 후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소련 해체 후인 1994년에 비로소 러시아를 공식 방문했다. 단, 필립 공은 1973년 국제승마연맹 회장 자격으로 소련을 비공식 방문한 적이 있다.
필립의 과격한 발언은 논란이 되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인지라 물어본 기자도 눈치가 없다고 비판받았다.
사실 한국인 기준에서 보자면 조선노동당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서 몰살당하고 탈출한 북한이탈주민이나 폭정으로 인해 고향과 가족을 잃은 실향민, 이산가족,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고향에 가고 싶나요'라는 질문과 같다.[119]
그 후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소련 해체 후인 1994년에 비로소 러시아를 공식 방문했다. 단, 필립 공은 1973년 국제승마연맹 회장 자격으로 소련을 비공식 방문한 적이 있다.
- 1980년에는 "국민들은 항상 정부에 불평만 한다."라고 말했는데, 당시 영국 경기는 보통 불황이 아니여서 불평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 시기 영국의 경제난은 보통 안 좋은 수준이 아니라서 1976년에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였다.[120]
- 1984년에는 케냐를 방문해선 현지 여성을 보고 "당신 여자 맞소?"라고 물어 구설수에 올랐다.
- 1986년에는 [122] 학생들이 1년 동안 중국에 머문다는 것을 알아내자, "1년은 사람이 현지화되고, 찢어진 눈이 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다.(long enough to go native and come home slit-eyed.)"라고 말했다.[123]
한 학생이 필립 공이 사석에서 한 이 말을 더 선, 데일리 미러의 기자에게 말해주자, 그들은 필립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보도했다. 필립은 "내가 왜 악의를 가지고 찢어진 눈이라는 말을 사용했겠어?(If I did use the phrase 'slit-eye', I certainly didn't use it offensively. Why would I?)"라고 사석에서 해명했다.[124] 거기다 보도에 의하면 많은 중국 유학생들도 이 농담을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서양인들을 "동그란 눈(Round eye)"라고 불렀다고 한다.
- 1987년에는 자서전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바이러스가 되어 인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
- 같은 해 3월에는 하원 의원과의 사적 모임에서 콘돔 관련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 1994년에는 케이맨 제도를 방문해서 현지 주민들에게 "당신들은 모두 해적의 후손이야."라고 말했다. 과거 케이맨 제도가 해적질이 만연했던 것은 사실이다.[125] 그러나 호주인은 범죄자의 후손이라는 편견 같이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일반화해서 문제다.
- 1995년에는 스코틀랜드인 운전학원 강사에게 "자네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음주단속에서 안 걸리게 하려면[126] 얼만큼 술을 마시라 알려주나?" 라고 질문했다. 스코틀랜드는 스카치 위스키와 맥주 생산량이 높아, 영국에서도 유달리 1인당 주류 섭취량과 알코올 중독 환자 발생률이 높다.[127] 스코틀랜드 왕국 작위인 에든버러 공작임에도 이런 발언을 남겨서 더 문제였다.
- 1997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주차요원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필립 공은 1976년부터 2011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으로 재임중이었다고는 하지만 영국에서 대학총장이란 저명한 왕족이나 귀족, 정치인이 부임하는 명예직에 불과하다.
- 1997년 10월 인도를 방문했을 당시 암리차르 학살에 대한 위령비에 2000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을 보고, "2000 명은 틀렸어. 나는 다이어[128]의 아들과 해군에 있었어. 좀 과장된 표현이야... 부상자도 포함되었을 거야."란 말을 해 심각한 외교분쟁을 일으켰다.
- 1997년, 하노버 박람회 방문에서 당시 독일 총리 헬무트 콜과 만났을 때 유창한 독일어[129]로 "Guten Tag, Herr Reichskanzler! (안녕하시오, 제국 총리!)"[130]라고 인사했다. 'Reichskanzler'는 독일 제국과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의 직위명인데, 아돌프 히틀러도 이 자리[131]에 있었기 때문에 민감한 명칭이다.
오늘날 독일의 총리는 '연방총리(Bundeskanzler)'이다. 물론 Reichskanzler가 통용되던 시절에 독일어를 배운 사람이고 이때 이미 70대라 별 생각 없이 내뱉은 것이었겠으나, 독일인들 입장에서는 순간적으로 당황할 법한 발언이었다. 약간 다르지만 한국 국무총리를 총리 대신 내각수상이나 내각총리대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132]
- 1998년에는 파푸아뉴기니에 다녀왔다는 영국 학생에게 "용케도 안 잡아먹혔구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푸아뉴기니의 일부 부족들은 아직도 식인 풍습이 있고,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타 부족원에게 극단적인 복수를 행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 1999년에 와이어 연결이 끊어진 퓨즈 박스를 보고 "이건 인도인이 만든 거야."라고 단정지었다. 사석에서 이 말을 한 이유에 대해 묻자 필립은 "자네가 정말 인도에 방문해 퓨즈 박스를 한 번 봤어야 해!"라고 말했다.
- 1999년 5월 웨일스에서 열린 락 콘서트에 참석해서 같이 공연을 보던 청각장애 어린이에게 "(이런 걸 듣고 있으니) 귀가 안 들릴 만도 하지."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필립은 가일스 브랜드레스에게 개인적으로 "어머니가 청각장애인이었고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국립 기관의 후원자였던 내가 그런 말을 하겠냐.", "나는 그 공연에서 청각장애 아이들을 만난 적 조차도 없다", "스피커 소리가 너무 커서 가까이 앉으면 귀를 먹을 것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라는 등 언론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해명했다. [133]
- 2001년, 영국 왕실의 연례 문화행사인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가 그해 11월 26일 런던 도미니언 극장에서 열렸을 때, 공연을 한 엘튼 존을 보고 "마이크 좀 껐으면 좋겠다"라고 조롱했다.[134] 두 사람은 이전에 한 차례 악연이 있었다. 엘튼 존이 1975년부터 윈저 성과 가까이 위치한 윈저 우드사이드에 거주하기 시작했을 때, 1976년에 왓포드 FC 회장 역임 당시 보유하고 있던 애스턴 마틴을 왓포드 유니폼(노란, 빨간, 검정) 색깔로 도색하며 몰고 다닌 것으로 필립한테 악담을 들었다고 2019년 자서전 〈Me〉에서 밝혔다.[135]
- 2002년에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12세 소년에게 "넌 살부터 빼야 한다."라고 조롱했다.
그 당시의 모습으로, 엘리자베스 2세 호주 국왕이 크게 당황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와 같은 부군의 발언에 크게 곤욕을 치르곤 했다. 더불어 호주 정부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호주 정부가 한때 원주민에 대한 탄압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 질문을 받은 원주민 대표는 "아니요, 요즘은 그러진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같은 해 <인디펜던트>[136] 편집장이 엘리자베스 2세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며 왕실의 초청을 받고 방문하자 "당신 부른 적 없어, 왜 온 거야?"라고 퉁명스럽게 맞이해 또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 같은 해 방글라데시에 방문하여 유소년 클럽 회원들을 보고 "대체 무슨 마약을 했길래 몰골이 그러니?"라는 질문을 던졌다.
- 2003년 전통 옷을 입은 올루세군 오바산조 나이지리아 대통령을 만났을 당시 천을 둘둘 만 듯한 나이지리아 전통옷을 보고 “당신은 이제 바로 잠자리에 들 준비가 되었네요”라는 말을 했다.
- 2009년 IRA의 공격으로 눈을 크게 다친 상이군인이 왕실을 방문한 자리에서 여왕이 "지금은 시력이 좀 나아졌나요?"라고 묻자, 옆에서 "매일 입는 옷 색깔이 비슷한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라고 거들었다가 대차게 까였다. 당사자가 대신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농담을 한 것이며, 부정적인 감정은 없었다"고 해명해야 했다.
- 2013년 영국에 체류 중인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버킹엄 궁전을 방문하자 "영국에서는 부모가 애들이 집에만 있는 꼴이 보기 싫어 학교에 보낸단다."라는 농담을 해 구설수에 올랐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학교를 못 가게 하는(여성의 교육을 억압하는) 탈레반 때문에 영국에 온 것이다.
- 같은 해에는 병원을 방문해 간호사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필리핀계 이민자 출신 간호사들에게 "당신들이 우리 의료보험을 지탱해 주는 건 좋은데, 당신네 나라는 텅 비어버릴거요"라고 이야기해 물의를 빚었다.
- 2015년 7월 10일, 장손 윌리엄 왕세손과 막내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참석한 참전용사 모임에서 기념사진 촬영이 지연되자 심기가 불편한 모습을 보이다가Just take the fucking picture!(그냥 그 X같은 사진 좀 찍어!)
라고 화를 냈다.
순간 에드워드 왕자는 아무 표정 없이 가만히 있었고, 윌리엄 왕세손은 웃음으로 넘기려 했다. 다만 이건 고령의 노인이 피곤하고 기다리는게 지쳐져서 화를 냈다는 분석도 있고, 단체사진이라는게 제대로 찍으려면 생각보다 노력을 해야한다는 점때문에 공감간다는 반응도 꽤 있다.
이런 일들이 너무 잦아서 영국의 역사가이자 언론인 데이비드 스타키(David Starkey)는 필립의 기행을 "드라마의 빅터 멜드루(Victor Meldrew)같다"고 꼬집었다. 빅터 멜드루는 영국 BBC 시트콤 'One Foot in the Grave'에 등장하는 괴팍한 노인 캐릭터인데, 우리나라의 드라마 등장인물로 치면 "무슨 노인네가 인성이 노구나 야동순재급이시네요."라고 깐 셈이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이런 모습을 반영하여 필립 공이 종종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던지는 장면이 묘사된다. 예를 들면 시즌 1 2화에서는 케냐의 다양한 부족장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부족장들의 개오지 목걸이를 툭툭 쳐내며 가슴에 달린 훈장을 가리키며 "이건 나도 못 받은건데 어디서 훔쳐온 것이냐"고 묻거나, 전통 왕관을 가리키며 "모자 멋지다"고 말하는 등의 언동을 보여 엘리자베스 2세가 주의를 주는 모습이 나온다. 다만 흑인을 진심으로 멸시한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별 생각 없이 옛 사고방식에 젖은 실언을 던지는 것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일례로 2화에서는 나이로비 현지 어린이들과 다정하게 놀아주는 필립의 모습 역시 묘사되어 있다.
거기다 항상 이렇게 실언만 하는 건 아니었고, 나름 재치있는 모습도 보여준 적이 있다. 한 리포터가 필립 공에 대한 뉴스를 보도하고 있을때 우연히 그 리포터 뒤를 지나가게 됐는데, 기자가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눈치채고는 보도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서서 카메라의 뒷배경 역할을 했다고... 리포터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뒤를 돌곤 필립 공을 보고 놀랐는데, 이에 필립 공은 웃으며 "다 했소?(Finished?)"라고 묻고는 갔다.https://www.youtube.com/watch?v=UnaW1Rc-Jxw&t=75s&ab_channel=Sunrise
5.1.1.2. 고려해야 할 점
필립은 유럽 왕실들 중에서도 제일 으뜸[138]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왕실의 공주(The Princess),[139] 그것도 차기 여왕인 왕세녀에 준하는 공주였던 아내 엘리자베스와의 혼인으로 과소평가된 감이 있으나, 원래 최상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왕족으로 엄연한 상류층 출신이다.[140] 누나들이 전부 다 독일 왕공족들에게 시집가서 그렇지 신분으로만 따지면 여왕의 남편이 되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오히려 일등 신랑감 수준으로, 이런 위치에서 평생을 살아온지라 동년배 기준으로도 더 경직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태어날 때부터 궁에서 귀한 공주로 자라면서 온실 속 화초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영국 특유의 레이디 퍼스트 성정을 지닌 영식들만 봐왔던 엘리자베스에게 필립은 신선한 충격과 설렘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5.1.2. 찰스 3세의 아버지로서
다른 자녀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누구보다 사랑하고 올바르게 가르쳐야 할 왕위 계승자인 장남 찰스 3세에게는 불필요할 정도로 엄했다. 그래서 당시 찰스 왕자는 엄격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든스턴(Gordonstoun)이란 스코틀랜드 시골 한가운데 있는 기숙학교[141]에 들어간 자신을 필립이 걱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아버지가 그럴 리 없다"며 딱 잘라 무시했다는 일화도 있다. 찰스 3세는 왕자로서 귀하게 자라 세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든스턴 스쿨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급우들에게 따돌림도 심하게 당했다. 나중에 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지옥이자 수용소 생활"이라 회고했을 정도로 싫어한 찰스 3세는 자신의 아들들을 전부 이튼 칼리지로 진학시켰다. 필립과 찰스 모두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사이가 좋아졌다. 찰스는 자신이 애정을 덜 받았다고 회고했고, 필립 공이 아버지로서는 별로, 할아버지로서는 최고라고 은근하지만 직접적으로 깠다.5.2. 긍정적 평가
5.2.1. 가족으로서의 필립 공
찰스 3세의 경우를 제외하면 가정적으로는 매우 자상한 아버지이긴 했다. 가장 사랑했던 자식은 자녀들 중 하나뿐인 딸 프린세스 로열 앤 공주로, 성격도 외모도 자신을 닮아서 유독 아꼈다고 한다.막내아들인 에드워드 왕자가 장래 군 복무를 조건으로 영국 해병대로부터 대학 시절 등록금을 지원받았지만, 입대 후 계약 기간인 12개월 중 의무복무기간 3분의 1만 하고는 전역을 신청했을 때 집안에서 에드워드의 편을 들어준 것도 아버지 필립이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와 누나 앤 공주는 "네가 선택한 길인데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엄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필립 역시 해군 장교 출신인 데다 장남 찰스 왕세자도 대학 졸업 후 영국 해군에 입대해 복무를 마쳤고, 차남 앤드루 왕자도 포클랜드 전쟁에 헬기 조종사로 참전한 군인이었다.
맏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에게도 다정한 시아버지였다고 한다. 다이애나가 찰스의 불륜으로 고통을 호소해도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는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라는 원론적인 대답만 반복하고 방관하였던 반면, 시아버지 필립은 자신과 다이애나의 입장이 같다고 느껴서[142] 당시 왕실 인사 중에선 거의 유일한 다이애나의 우군으로 하소연을 들어주고 슬픔을 달래주었다. 다이애나와는 특히 편지도 자주 주고 받았고 "너를 버리고 카밀라 파커 보울스에게 가려 하다니 찰스 저 자식이 도대체가 제정신이 아니다"고 다이애나의 편을 들기도 했다. 찰스에게도 "멍청한 놈, 바람은 바람이고 가정은 가정이지!"[143]라고 혼내기도 했다. 다이애나 역시 왕실에서 고립된 자신을 신경써주는 필립 공에게 매우 고마워하여 편지에서도 그를 Dearest Pa[144]라고 부르는 등, 사이가 좋았다.[145]
다이애나의 아들들인 손자 윌리엄과 해리와도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 당시에도 손자들이 가엾다며 뒤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장례식 행렬에서도 내내 손자들을 신경썼으며 이후에도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애썼다고 한다.[146] 또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준비할 때 다들 어린 왕자들보다는 국장 순서와 진행 사항에만 더 신경쓰자 "이 애들은 방금 어머니를 잃었다"며 일갈했으며[147],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장례식에 빠지려는 윌리엄에게 "지금 (장례식 행렬을 따라)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크게 후회하게 될 거다. 할아버지랑 같이 가 보자꾸나(If you don't walk, I think you'll regret it later. If I walk, will you walk with me?)"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또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BBC가 사상 최초로 TV 생중계를 하도록 한 점이나, 당시 왕실 어른들 중 드물게 처제 마거릿 공주가 이혼 경력이 있는 피터 타운샌드 영국 공군 대령과 결혼하는 것에도 찬성[148], 손자 해리 왕자가 이혼 경력이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 메건 마클과 교제하는 것을 허용하고 둘을 지지하는 등 왕실과 관련된 파격적 변화를 주도한 인물이라는 면도 있다.
드라마 더 크라운 등 필립 공에 대해 다룬 매체들에 따르면, 어린 시절 그리스에서 쫓겨난 경험을 통해 "왕실이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더 이상 국민들이 왕실을 지지해주지 않을 것이고, 국민의 지지가 없는 왕실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때문에 왕실의 풍습과 법도에 대해 이런 개혁적인 면모를 가지게 됐다고. 이러한 시선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필립 공은 조국에서 쫓겨난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영국 왕실을 개혁시킨 인물로 평가받게 된 셈이다. 어찌보면 정말 보수적인 인물이었다면 외부 접촉도 거의 하지 않고 살았을 텐데, 사고의 대부분이 구시대적 가치관에 기반한 것이라 물의를 일으켰다고 볼 수도 있을 듯.
이런 면과 아래의 왕실 현대화 부분 등을 보면, 개인적인 인품은 좋았으나 옛날 상류층 특유의 사상을 완전히 버리진 못한 것이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필립 공에 대해 조승연의 탐구 생활에 나왔던 영국인은 필립 공을 그냥 "옛날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5.2.2. 왕실 현대화
영국 왕실의 현대화에 앞장섰다는 점 만큼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때 필립 공이 영국 왕실에 도입한 것들은 다른 왕실에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 현대 왕실의 표준처럼 자리잡기도 했다.필립 공은 '주식회사 왕실의 총무부장(general manager of The Firm)’으로 불릴 정도로 여왕을 대신해 왕실 내의 대소사를 직접 다 챙겼다. 우선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던 왕실 재산 관리와 지출을 틀어 잡았다. 왕실의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챙겼는데, 왕궁 내의 정원에 무엇을 심는지까지 필립 공의 결재를 받아야 할 정도로 철저하게 장악하고 관리했다고 한다.
자녀들의 교육 방식도 완전히 바꿨는데, 전통적으로 영국 왕의 직계 가족은 외부 학교를 가지 않고 궁내에서 교육을 받았다. 왕족이 어떻게 일반인들과 같이 어울려서 교육을 받느냐는 이유 때문이었다. 왕실이 현대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왕과 왕족이 일반 국민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던 필립 공은 자녀들을 일반 학교에 보냈고[149][150] 그 결과 영국 왕실의 자녀들도 일반인들과 동일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불필요한 관습을 없앴는데, 필립 공이 영국 왕실에 입성한 1950년대에는 아직까지도 궁전 안에서 직원들이 분가루를 묻힌 가발을 착용하고 다녔다. 필립이 이를 폐지해 드레스 코드가 대폭 완화되었다고 한다. 또 당시 왕족들은 아직까지도 전화가 아닌 쪽지를 사용했다고 한다.(...) 전화가 보급된 지 70년이 넘었는데도[151] 아직까지 쪽지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기겁한 필립은 궁내 전화 설치를 직접 주도했다고 한다. 테크의 메리 왕비와 왕실 중신들은 이에 반대했으며, 필립 공의 왕실 개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 버킹엄 궁전 내에는 왕족들이 사용하는 부엌과 왕실 직원들이 사용하는 부엌이 따로 존재했는데, 필립 공이 이를 하나로 합쳤다고 한다. 두 개의 부엌이 존재하면서 생기는 낭비와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였다. 여왕이 매년 궁전 직원들을 위해 열어주던 성탄절 파티도 필립 공이 제안해 시작된 것이었다.
한편, 필립 공은 미디어 노출에도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대표적으로 1953년 대관식 생중계도 필립 공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152] 그러나 필립공은 왕실의 존재는 왕족이 국민들의 가시권에 있어야지 괴리되어 존재하면 안 된다고 했다. 또 왕실이 왕실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타성에 젖어있는 왕실 측근들을 설득했다. 1961년에는 직접 텔레비전 인터뷰에 출연하면서 처음으로 방송에 단독 출연한 왕족이 되었다.
1969년에 방영된 왕실 다큐멘터리 'Royal Family' 역시 필립 공의 주도로 제작된 것이었다. 카메라가 왕궁 안까지 들어와 왕실 가족의 내밀한 실내까지 보여주고 여왕과 필립공은 어떤 식탁에서 식사하고 왕족들이 같이 TV를 보는 거실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어 공전의 인기를 끌었다. 당시 필립 공은 다큐멘터리의 모든 장면에 세세히 개입했는데, 자신이 바비큐에서 소시지를 굽는 장면도 넣고 왕실 가족이 거실에 모여 앉아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담소하고 심지어는 논쟁하는 자연스러운 장면까지 넣게 했다. 이렇게 해서 필립공은 어느 별의 이야기 같았던 왕실이라는 실체를 국민들 근처로 불러들이고 왕실이 왕실만을 위한 박물관의 박제로 남는 것이 아닌 영국을 위한 박제로 남는 선택을 했다. #
6. 매체에서
- 영화 《더 퀸》: 제임스 크롬웰
전통을 중시하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며 여론의 질타에 꼬장꼬장하게 분통을 터트리곤 한다.
- 영화 《스펜서》: 리차드 새뮤얼
- 영국 드라마 《더 크라운》: 맷 스미스(시즌 1~2), 토비아스 멘지스(시즌 3~4), 조너선 프라이스(시즌 5~), 핀 엘리엇(아역)
상술한 복합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인물로 나온다. 결혼 이후 해군 커리어를 이어나가며 몰타에서 행복한 결혼 초기를 보내고 있었으나, 엘리자베스가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자 개인적인 커리어를 포기하고 한 가정의 남편이 아닌 여왕의 국서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로 인한 부부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는 모습이 1~2시즌에 그려진다. 엘리자베스가 젊은 나이에 준비가 부족한 상태로 여왕의 자리에 올라 여러가지 부침을 겪는 것 처럼 필립 역시 아내 뒤로 한 발 물러나야 하는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시간이 없었던 것. [153] 그런 와중에도 대중에게 대관식을 TV로 생중계 하거나 다큐멘터리로 왕실의 생활 모습을 공개하는 등 변하는 시대에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의혹 제기일 뿐이긴 하지만 해외 순방 중의 불륜인지 아닌지 의심되는 애매한 연출이나 장남 찰스에게 가혹할 정도로 매정하게 구는 모습 등이 묘사된다. 앞서 말한 막말 일화도 등장했다.[154][155]
초반 시즌 많은 갈등을 겪고 나서 부부 사이가 상대적으로 안정기로 들어선 3시즌 이후부터는아직 다소 철은 없지만여러모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7. 여담
- 영어 외에도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매우 능숙하게 구사했다. 오늘날에 그 위상이 많이 낮아지기는 했으나,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프랑스어는 유럽 상류층의 공용어이자 필수 교양이었다. 필립 공도 당연히 전형적인 상류층 교육을 받으며 프랑스어 능력을 쌓아왔다. 또한 필립 공은 어머니와 누나 쪽 친척들이 다 독일 왕공족들인데다, 어린 시절 독일의 슐레 슐로스 잘렘에서 수학하기도 하여 독일어 능력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다. 유창한 독일어 인터뷰 영상 프랑스어 실력 또한 독일어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 없는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다. #
- 그리스 왕국의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외모의 어디를 뜯어봐도 대부분의 그리스인에 해당되는 남유럽계가 아니라 평범한 서유럽계 외모다. 필리포스도 자신을 그리스인보다는 덴마크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56] 필리포스의 조부인 그리스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초대 왕 요르요스 1세[157]는 본래 부계를 독일계에 둔 덴마크 왕국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 빌헬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왕가 자체가 진짜 그리스인이 아니다. 거기다 어머니 앨리스도 독일계 가문 출신이라 부모 모두 혈통적으로 독일인이다. 이 때문에 남유럽계 그리스인과는 외모가 다른 금발/벽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158][159]
- 사촌누나 마리나 공주는[160] 엘리자베스 2세의 작은 아버지 조지 5세의 4남 켄트 공작 조지 왕자의 부인이다. 마리나 공주는 아름다운 외모로 켄트 공작가 사람들이 한 미모 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161] 다만 손윗동서인 엘리자베스 왕대비를 왕족이 아닌 귀족 출신이라고 무시해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 엘리자베스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 에드워드 7세[162]의 증손녀이고 필립은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공주[163]의 증손자로 둘 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자 모계[164] 기준으로는 8촌이다. 또 필립의 조부 요르요스 1세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이고 엘리자베스 2세의 증조모인 알렉산드라는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로 부계[165]로는 7촌 관계이다. 덧붙이자면 필립은 마찬가지로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인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와 소피아 왕비 부부와도 친척관계이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의 증손자로 필립과는 7촌이고[166], 소피아 왕비는 필립의 큰아버지인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의 손녀이므로 필립과는 오촌의 비교적 가까운 친척 관계이다. 루마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미하이 1세도 1921년생 동갑이지만 촌수로는 필립 공의 5촌 조카가 된다. 필립 공과 미하이 1세의 어머니인 엘레니 왕대비가 사촌이기 때문.[167]
- 누나들은 모두 독일 왕공족들과 결혼했다.
- 첫째 누나 마르가리타 공주 (1905 ~ 1981): 1931년 4월 20일 호엔로헤-랑엔부르크(Hohenlohe-Langenburg)[168] 후작(Fürst) 고트프리트와 결혼해 4남 1녀 출생. 맏손자[169]가 현재 가문의 당주 역할을 맡고 있다.
- 둘째 누나 테오도라 (1906 ~ 1969): 1931년 8월 17일 자신의 육촌이자[170] 바덴 변경백(Markgraf) 베르톨트[171]와 결혼, 2남 1녀 출생. 맏아들 막시밀리안 안드레아스(1933 ~ 2022)가 바덴 대공가를 이끌다가 2022년 말 사망했고, 그 아들 베른하르트(1970 ~ )가 당주가 되었다.
- 셋째 누나 체칠리아 (1911 ~ 1937): 1931년 2월 2일 헤센 대공국의 대공세자이자 오촌 숙부인 게오르크 도나투스[172]와 결혼했다. 1937년 10월 선친의 사망으로 대공위를 승계한 지 한 달여 뒤인 11월 16일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게오르크 도나투스, 체칠리아 부부와 두 아들[173]이 모두 사망하고 만다.
- 넷째 누나 소피아(1914 ~ 2001): 1930년 12월 15일 헤센카셀의 공자(Prinz)[174] 크리스토프[175]와 결혼했다. 언니들보다 앞서 남매들 중 제일 먼저 결혼했다. 2남 3녀를 낳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프트바페로 복무하던 크리스토프는 1943년 10월 이탈리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이후 1946년 4월 23일 하노버 왕조의 빌헬름[176]과 재혼했다. 빌헬름과의 사이에는 2남 1녀를 낳았다. 소피아는 자매 중에 영국 왕실과도 제일 사이가 가까워서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 1985년 전두환 前 대통령은 필립 공이 당시 국제승마협회 회장 자격으로 방한했을 때, 필립 공에게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여했다.[177] 이후 필립은 2004년 여왕의 초청으로 영국을 국빈 방문한 노무현 前 대통령 환영만찬이 열리자 훈장을 이브닝 드레스에 패용한 채 참석했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여왕 부처. 필립 가슴의 흰색 훈장이 청룡장이다. |
- 러시아 혁명 와중에 처형당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가 1991년 공식 발굴되었을 때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검사 샘플로 필립의 DNA가 제출되어 화제를 모았다. 필립의 외조모인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가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자매였기 때문에 모계 유전으로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의 특성상 알렉산드라 황후 본인 및 자녀인 올가, 타티아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알렉세이와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의 외손자인 필립의 미토콘드리아가 일치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 가운데서 미토콘드리아가 모계로 유전된 사람으로서 DNA 검사 당시 생존한 알렉산드라 황후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바로 필립이었다.[178][179]
-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이기도 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차남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장녀인 그리스의 왕후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의 친손자다. 현 영국 왕실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이기도 하다.
- 젊은 시절부터 운전하는 걸 상당히 좋아해서 90살이 넘은 나이까지 자신의 자가용인 랜드로버를 운전기사 없이 본인이 직접 운전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됐다. 하지만 2019년 랜드로버를 몰다가 교통사고를 냈는데 며칠도 안 되어 다시 운전대를 잡은 모습이 포착됐다. 심지어 안전벨트까지 매지 않은 상태였다 보니 비판 여론이 들끓자 거의 반강제적으로 운전면허증을 반납했다. 이때가 무려 97세로 상당한 고령이다. 이후 여생 동안은 운전을 하지 않았다.
- 스웨덴의 왕비인 루이즈 마운트배튼의 외조카이기도 하다. 루이즈 왕비가 조카며느리인 엘리자베스 2세에 대관식에 참석했는데 자신의 좌석에 "스웨덴 왕비"라고 적혀서 매우 쑥쓰러워 했다는 일화가 있다.
<rowcolor=#fff> 젊은 시절의 앨리스 | 노년의 앨리스 |
-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와 많이 닮았다. 젊었을 때 잘생겼다는 평가를 들었던 필립처럼 앨리스도 젊은 시절에 미인으로 유명했다.
- 영국의 정치인이자 다이어리스트인 헨리 '칩스' 새넌은 필립의 결혼 이전부터 필립이 영국의 국서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스에 잠깐 방문 중이던 필립을 만난 후 “ 여기 칵테일 파티에 그리스의 필리포스도 있었다. 그는 놀랄정도로 잘생겼는데, 필리포스가 우리 해군에서 복무하는 것은 영국의 국서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옐레나 왕자비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매력적이지만, 이 결혼은 반대다. 그들은 너무 근친이라고!“라고 일기를 적었다. 버킹엄 궁에 방문 했을 때도 같은 내용의 일기를 적었으며,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의 집에 방문한 새넌은 방문록에 필립의 이름이 자주 써진 것을 보고 "틀림없이 여기서 엘리자베스 공주와 만나는구나. 정말 공주가 필립과 결혼할 것 같아"[180]라고 적었다.
- 자신과 영국 왕실을 다루는 드라마《더 크라운》을 아내인 엘리자베스 2세와는 달리 즐겨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즌 초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다룬 편[181]을 보고서는 격노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법무팀을 동원해 고소미를 시전하려다 다른 왕족들의 설득으로 무위에 그쳤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필립 공을 연기한 맷 스미스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한 한 영화계 유명 인사에게 그가 필립 공과 나눈 다음의 대화 내용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필립 공 : 자네 요즘 무슨 일 하나? 혹시 그 크라운인가 뭔가 하는 거에 관여하고 있나?영화계 인사 : 아닙니다, 그쪽 일엔 관여하고 있지 않습니다.(시간이 흐른 뒤)영화계 인사 : 필립 전하, 헌데 궁금해서 말입니다. 더 크라운을 제작하고 있는 제 친구들이 있어서 그럽니다만, 혹시 그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필립 공 : (노려보면서) 말 같잖은 소리 좀 하지 말게나 (Don't Be Ridiculous).
한편 엘리자베스 2세도 시즌 초에 엄하게 그려진 남편 필립 공과 아들 찰스 3세 사이에서 빚어지는 불편한 관계와 갈등이 묘사되어 있는 부분들을 불편하게 여겼다고 제작진에게 지적한 적이 있다고 한다. - 넥타이를 선택하는 패션 센스가 독특한지 젊었을 때부터 가끔 괴악한 디자인의 넥타이를 매고 나오기도 했다.
- 바누아투의 탄나 섬에 살고있는 부족들이 필립 공을 신의 아들로 여기며 자신들과 같은 부족으로 여기고 있어 화제가 됐다. 부족의 전승에 의하면 오래전 산신의 아들이 강력한 힘을 가진 아내감을 찾기 위해 섬을 떠났는데, 이 산신의 아들이 바로 필립이며 백인들의 어리석음, 질투, 탐욕, 그리고 끊임없는 싸움으로 인해 섬에 돌아오지 못하고 숨졌다고 여기고 있다. 심지어 필립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집도 있다고. 이들은 2007년 필립을 만나 전통 술과 선물을 바치고 섬에 돌아올 것을 청하기도 했으며,[182] 필립 역시 탄나 섬 주민들에게 답례품과 함께 이런저런 지원을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학자들은 바누아투가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 시내 관공서에 걸린 필립의 초상화[183]에서 신앙이 비롯되었고 1974년 필립 공이 여왕과 함께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방문한 이후 이런 믿음이 더 강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 샤를 드골의 장남 필리프 드골과 동갑내기로 두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에 함께 참전한 전우이기도 하다.[184] 또한 필리프 드골의 장남도 필립 공의 장남 찰스 3세와 역시 동갑내기다.
- 1960년대에 직접 조종사로 북아프리카 투어를 간 적이 있는데, 이때 같이 비행기를 몰았던 부조종사가 피터 미들턴이었으며 이 부조종사의 손녀가 바로 훗날 손자 윌리엄의 아내가 되는 캐서린 미들턴이다.
- 필립의 사망 당시 BBC 라디오의 속보 전환을 활용한 리믹스와 패러디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정규 방송을 중단하지 않고 볼륨만 약간 줄인 후 단신으로 간단하게 내보낸 뒤 정규 방송을 재개하는 패러디인데 직접 들어보자.Buckingham Palace has announced the death of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Edinburgh.버킹엄 궁은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이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저렇게 방영되었다고 와전이 되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속보 전환 타이밍을 놓쳐 댄스곡 중간에 God Save the Queen이 어정쩡하게 방영되었을 뿐, 영상에 나온 위성 및 인터넷 전용 방송인 BBC Radio 1 Dance도 속보 전환을 했으며[185] 당시엔 음악, 스포츠 라디오 1, 2, 3, 5 채널 가릴것 없이 모두 뉴스 채널인 Radio 4를 몇 시간 동안이나 릴레이 송출했다. 즉 위 영상은 누군가가 조작한 가짜 영상인데 서거 소식 발표 직후 자연스럽게(?) 비트를 드롭하며 다시 댄스 음악으로 넘어가는 것이 웃겨서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받았고 이 때문에 상술했듯이 아직도 본 영상을 당시 실제 방송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후 2022년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자 또 Radio 1의 당시 발표 영상이라며 누군가 패러디 장난 영상을 올렸다.
필립 공이 사망한 후에 해당 부족은 매우 애통해하며, 마을 족장은 필립 공의 영혼은 살아있으며 영원히 자신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인터뷰했다.#
- 워낙 어두운 성장 배경과 아들 찰스 3세에게 워낙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한 모습이나 허구헌날 실언을 삼는 모습으로 유명했지만, 어린 시절에는 여느 남아들처럼 개구진 모습을 보였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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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리자베스 2세와의 혼인을 위해 영국으로 귀화하면서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튼을 쓰게 되었다.[2] 100세 생일을 2개월 1일 앞두고 사망했다.[3] MiD[4] Croix de Guerre[5] 크레타 섬 전투, 마타판 곶 해전,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드라군 작전, 롭슨 작전, 렌즈콩 작전, 오키나와 전투 등의 전투에 참전했다.[6] 말년인 2017년에 공개된 초상화로, 필립 공의 생전 마지막으로 공개된 초상화이다. 특이하게도 영국의 훈장이 아닌, 덴마크 코끼리 기사단 훈장의 대수를 둘렀는데 글뤽스부르크 왕조 출신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림 속에서 필립이 서있는 복도의 끝에는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와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가 태어난 방이 있으며, 오른쪽 벽에 부착된 영국 왕실 가족 초상화에는 어머니 앨리스 공녀의 어린시절 모습이 그려져 있다.[7] 조지 6세가 장인어른이기도 하지만 필립이 조지 6세의 6촌 동생이기도 하다. 조지 6세의 아버지 조지 5세와 필립 공의 아버지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가 외사촌 형제지간이다. 즉, 필립 공은 7촌 조카랑 결혼한 것이다.[8] 국서로서의 공식적인 업무는 2017년 8월 2일 부로 내려놓았다.[9] 남편의 문장과 합쳐지는 왕자비들의 문장과 달리, 필립 공의 문장은 아내의 문장과 합쳐지지 않았다. 좌측 하단의 흑백 문양이 외가 문장이며, 상단 문장은 친가와 그리스의 문장에서 따왔다. 우측 하단의 문장은 에든버러 시의 문장에서 따왔다.[10] 이 문장 이전에는 그리스 왕자로서의 문장에 영국 왕통에 가장 근접한 조상인 헤센 대공비 앨리스의 문장을 덧붙인 문장을 사용했다.[11]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Earl of Merioneth, Baron Greenwich, Royal Knight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Extra Knight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Grand Master and First and Principal Knight Grand Cross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Member of the Order of Merit, Companion of the Order of Australia, Additional Member of the Order of New Zealand, Extra Companion of the Queen's Service Order, Royal Chief of the Order of Logohu, Extraordinary Companion of the Order of Canada, Extraordinary Commander of the Order of Military Merit, Canadian Forces Decoration, Lord of Her Majesty's Most Honourable Privy Council, Privy Councillor of the Queen's Privy Council for Canada, Personal Aide-de-Camp to Her Majesty, Lord High Admiral of the United Kingdom[12] 엘리자베스 2세와의 결혼을 위해 이후 그리스 왕위 계승권과 왕족 신분을 포기했다.[13] 엘리자베스 2세와의 결혼을 위해 그리스 왕족 신분을 포기하면서 HRH 칭호를 잃었다가 다시 받게 되었다. 왕자비와 달리 공주의 부마들은 HRH 호칭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왕족 신분을 받지 못하므로 원칙대로라면 필립도 HRH 호칭을 사용할 수 없었으나 차기 여왕의 부군이 될 사람이었기에 전하 칭호를 수여한 것이다.[14] 하지만 영국식이나 독일식으로 Philip(필립)/Philipp(필리프)로 불렸다. 또한 전하/HRH(His Royal Highness) 경칭을 가진 고위 왕족이라서 성씨가 없었다.[15] 따라서 니콜라이 1세는 필리포스의 고조할아버지가 된다.[16] 아내 엘리자베스 2세도 빅토리아 여왕의 현손녀로 남편 필리포스와는 8촌 지간이다. 앨리스 공주의 친오빠 에드워드 7세가 엘리자베스 2세의 증조할아버지였기 때문.[17] 사실 엘리자베스 2세와는 외가 뿐 아니라 친가 쪽으로도 친척인데, 필리포스의 할아버지 요르요스 1세와 엘리자베스의 증조할머니 알렉산드라 왕비가 남매다. 때문에 필리포스와 엘리자베스 2세는 덴마크 및 그리스 왕실 기준으로도 7촌이고, 따지고 보면 장인어른인 조지 6세와도 같은 항렬인 6촌 지간이 된다.[18] 첫째 누나 마르가리타 공주와 나이 차이가 16살이 났다.[19] 편지의 본문은 "Philip could stand up alone now & sits with bare legs on the hard road & crawls on it without minding the stones. He is in fact as advanced & sturdy for his age as all the others were & has the same tow-coloured hair.."(이제 필립은 스스로 설 수 있고, 맨다리로 딱딱한 도로에 앉고 기어가. 다른 아이들(필립의 누나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래에 비해 튼튼하고, 옅은 금발이야.) 그리고 루이즈는 “아이는 하루종일 웃어. 난 이렇게 명랑한 아기는 본 적이 없어.(laughs all day long. I have never seen such a cheerful baby.)"[20] 장남 요르요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은 이유는 그가 독일 제국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반독 정서를 의식해서였다.[21] 재판을 받은 7명 중에 안드레아스 왕자만이 목숨을 건졌다.(1명은 종신형.) Trial of Six[22] 남자아이임에도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유는 당시의 배변 훈련 문화 때문이다. 옛날에는 바지는 입히고 벗기며 기저귀를 갈아주기에 번거로워서, 남자아이에게도 치마를 입혔다고 전해진다. 훗날 자신의 맏아들 찰스 3세에게도 이런 드레스를 입히고 안아주는 사진이 남아있다.[23] 고모할머니의 아들이자 외할머니의 사촌이자으로 이후 배우자의 할아버지다. 촌수로는 친가 기준 5촌.[24] 조지 5세는 러시아 혁명 당시 앨리스 왕자비의 셋째 이모이자 자신의 사촌들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니콜라이 2세 부부가 자녀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 의사를 타진한 것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가 러시아 황실 일가족들을 죽게 만든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25] 앨리스 왕자비의 시녀, 아이들의 가정교사, 유모 등[26] 노년의 소피아 공주는 이제까지 살면서 가본 최악의 장소라고 평했다.[27] 앨리스 왕자비는 멈추라고 했지만, 유모는 필리포스를 가만히 놔두자고 했다.[28]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으로, 성에서 짐작하듯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이다.[29] 에드위나 애슐리, 낸시 리즈(그리스의 아나스타시야 왕자비), 마리 보나파르트 등. 에드위나 애슐리는 필리포스의 외숙모로 루이 마운트배튼의 부인, 에드워드 7세의 재정관리인이었던 외할아버지 어니스트 카셀의 상속녀였다. 낸시 리즈는 필리포스의 숙모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크리스토프 왕자의 첫째 부인, 철강왕 윌리엄 리즈와의 2번째 결혼에서 큰 돈을 상속받았다. 마리 보나파르트는 필리포스의 백모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 몬테 카를로의 카지노를 설립한 외할아버지 프랑수아 블랑의 상속녀였다.[30] 맥자넷 전기, 앨리스 왕자비가 교장에게 전한 말. 원문: Instead of being constantly hushed up he should be working off his boundless energy by practicing games and learning Anglo-Saxon ideas of courage, fair play, and resistance. Philip should develop English characteristics, because his future will be in English speaking lands, perhaps American, and I want him to learn English well.[31] 뿐만 아니라 항상 방문자들을 위해 의자를 가져다주고, 여자들이 자신을 위해 음식을 가져다 주는 일이 없도록 직접 부엌에서 음식을 가져왔다고 한다.[32] 전하(HRH) 칭호를 쓰는 고위 왕족은 성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3] 당시 프랑스 주재 중화민국 대사였고, 나중에 주 영국, 주 미국 대사, 대총통 권한대행까지 지낸 구웨이쥔웰링턴 쿠(Wellington Koo, 顧維鈞)의 아들들이다. 이 둘은 학교에서 칭칭 차이나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34] 엘렌 코르데는 프랑스 태생의 여배우로 필립의 불륜 상대로 자주 지목된다. 엘레네 푸푸니스가 본명으로, 필리포스와 소꿉친구였다. 푸푸니스 가족은 꽤나 부유한 프랑스에 살던 그리스인 가족이었다. 필리포스의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와 엘레니의 엄마, 필리포스의 유모와 엘레니의 유모는 친구였다. 푸푸니스 가족은 베르크 해변가에 별장이 있었다. 필리포스네 가족이 해변가로 휴가를 나왔을 때 누나 케킬리아와 소피아와 필리포스는 엘레니, 엘레니의 남동생 라이니, 여동생 리아와 함께 놀았다고 한다. 엘렌 코르데는 60년 후에 이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어릴 때 필리포스를 매우 질투했어요. 내가 필리포스를 싫어한 만큼 필리포스는 나를 싫어한 것 같진 않지만, 내 감정은 주로 질투였습니다. 모두들, 특히 우리 엄마는, 필리포스가 잘생긴 아이라고 좋아했어요! (참고로 엘레네의 엄마의 회고록에 따르면 예전에 사람들은 자신보고 필립의 보호자인지 가정교사인지 계속 물어봤는데, 그 어느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아이처럼 필립을 사랑했다고 함.) 우리 아빠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새아빠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금발 벽안의, 이 독일인처럼 생긴 작은 아이가 우리집에 오고, 우리 엄마가 그 아이에게 너무나 많은 관심을 쏟을 때면 나는 매우매우 화났어요. 필리포스와 내 동생 라이니는 작당해 맨날 나를 괴롭혔어요.”라고 말했다. 이후 그들은 헤어졌지만 새아버지가 사망하고 가세가 기운 이후 필리포스가 15살 때 런던에서 다시 만났다고 한다. 필리포스는 헬렌이 첫번째로 결혼할 때 신랑 들러리가 되어주었고, 2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이들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헬렌의 아들 맥스에게 고든스턴 학교를 권유했으며, 헬렌의 필립이라는 손자도 고든스턴에 갔다. 그들은 친구였지만 불륜 상대로 지목된 이유는 첫 남편과 이혼하지 않고 별거 중에, 두 번째 남편이 될 애인과 아들 맥스를 낳았기 때문에 아이의 아버지를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근데 필립이 맥스의 대부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불륜 상대로 지목돼 버린 것.[35] 그가 느끼기로는 그저 평범한 가족의 삶과 다름이 없었으며,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적이 없다고 밝혔다.[36] 입고 있는 옷은 그리스 전통 옷인 에브존이다.[37] 조현병은 오늘날까지도 인식이 최악인 병이다.[38]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의 외가이기도 하다.[39] 이 시기보다는 이후이지만 볼프스가르텐 성에는 1946년부터 2005년까지의 방문 기록이 창문에 새겨져 있다. 창문에는 필리포스, 엘리자베스 2세, 찰스 3세, 앨리스 왕자비의 서명이 있다.[40] 외숙모였던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나데이아 마운트배튼의 조카다.[41] 바덴 대공국의 대공자인 당주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후원을 받아 쿠르트 한이 1920년 독일 남부 잘렘에 설립한 기숙학교이다. 필립은 둘째 누나 가족 소유의 학교이기 때문에 학비를 아끼려고 침 스쿨을 떠나 잘렘에 입학했다.[42] 쿠르트 한은 유대계 독일인이라 나치당에 반기를 들었다. 결국 나치가 집권하고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되자, 1933년에 투옥되었다가 영국으로 추방되었다.[43] 최상류층 답게 정기적으로 여러 거주지를 오가며 살았는데, 고든스턴은 아예 스코틀랜드에 위치해 있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유력 후보지였던 이튼 칼리지는 거주지 중 하나인 윈저 성에서도 보일 정도로 가까웠고, 이는 더 크라운에서 “저기 봐 찰스, 저 언덕만 넘어가면 학교야. 그러니깐 주말은 여기서 보낼 수 있어. 네 침대에서도 잘 수 있고.”라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사로 반영된다.[44] 이는 남동생들인 앤드루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도 마찬가지였다.[45] 이때 나이가 너무 어려서 동행하지 않아 살아남은 체칠리아의 막내딸 요한나는 숙부 루트비히에게 입양되었으나 2년 뒤 수막염으로 사망한다. 이후 루트비히 또한 자녀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헤센 대공가의 직계는 사실상 단절된다.[46] 선두에 서 있는 제복 군인들 중 3명은 필립의 매형들이다. 첫째 줄은 루트비히 폰 헤센 공자. 둘째 줄은 왼쪽부터 고트프리트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 크리스토프 폰 헤센 공자(SS 제복), 필립 폰 헤센 공자(SA 제복), 필립 공(에든버러 공작), 베르톨트 폰 바덴 공.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뒤에서 뾰족한 해군 모자를 쓰고 있으며,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의 대리인으로 참석했다. 이 장례식에는 헤르만 괴링이 직접 참석했다.[47] 조지 마운트배튼의 아들이었던 데이비드 마운트배튼이 밀포드 헤이븐 후작위를 물려받았으나, 필리포스보다 고작 2살 많았을 뿐더러 미성년자였기에 누군가의 후견인을 맡을 처지가 아니었다.[48] 이 때문에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이 IRA의 폭탄테러로 끔찍한 최후를 맞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49] 1995년 인터뷰에서 해군으로 입대하게 된 것이 루이 마운트배튼의 영향이라고 직접 밝혔다. 기자의 질문은 “전하의 할아버지들 모두 해군에 몸담으셨고, 아버지는 육군에 계셨었지만 전하는 원래 공군이 되고 싶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결국 해군을 선택하게 되었나요?”였는데, 대답은 “결국 외삼촌(마운트배튼 경)한테 설득당했으니까요.”였다.[50] 필립의 모국어인 그리스어는 너무 어린 시절에 그리스를 출국해 대화는 다소 서툰 편이었으나, 1992년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했다고 한다.[51] 현 국왕과 차기 여왕이 시찰을 나오는 만큼, 그만큼 격이 되는 생도가 의전을 맡아야 맞다. 마침 필립 또한 왕자 지위를 가진데다 빅토리아 여왕의 4대손이기도 하므로 격이 맞았다.[52] 당시 국왕 조지 6세는 딸만 둘이었고 나이도 40대 중반에 다다르며 아들을 볼 가능성이 거의 없어지자 장녀 엘리자베스가 차기 국왕으로 즉위할 것이 확정적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웨일스 여공 작위를 받지 못한 건 왕세자비를 의미하는 웨일스 공비와 어감이 같아 조지 6세가 반대했기 때문.[53]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필립과 공주들의 만남은 매우 성공적이었다."라고 일기에 적었으며, 훗날 필립이 첫아들인 찰스 3세를 얻자 크게 기뻐해 친할아버지 역할을 자처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도 왕따를 당하던 찰스 3세를 위해 과자 등을 한껏 싸들고 학교에 찾아가며 차 밖에서 찰스에게 바보라고 소리치는 급우를 노려본다.[54] 참고로 가문 영지인 하이클럭어 캐슬이 그 유명한 다운튼 애비의 촬영지이다.[55] 7대 카나본 백작 헨리 허버트는 여왕과 소위 찐친 관계였고, 196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여왕의 레이싱 매니저를 맡았다.[56] HMS 켄트의 중위는 일지에 ‘오늘은 비가 많이 왔다. 다행히 필리포스 왕자가 사관생도로 있는데, 코코아를 정말 잘 만든다…’라고 적었다.[57] 이 전투에서 잃은 군함 중 하나는 구축함 HMS 켈리로 필리포스의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이 함장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마운트배튼이 필리포스와 만나자 필리포스는 외삼촌이 기름을 뒤집어쓴 모습을 보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고 한다.[58] 다만 엘리자베스 2세 또한 당시에도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다.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필립에게 중학생 정도였던 엘리자베스는 취향 밖이었겠지만.[59] 켄트 공작 조지 왕자의 아내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왕자비가 필리포스의 친사촌(마리나의 아버지 니콜라오스 왕자가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친형)이었다.[60] 이것이 조지 왕자의 생전 마지막 결혼기념일이 되었다. 영국 공군에서 복무 중이던 그는 이듬해 여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다.[61] 전쟁 중 영국 왕실에서는 연말에 상류층 인사들을 초청해 크리스마스 자선 공연을 열어 전쟁자금을 모아 기부하는 행사를 가졌다. 왕실에서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가 참여했는데, 1941년에는 '신데렐라', 1943년에는 '알라딘', 1944년에는 'Old Mother Red Riding Boots'에 등장했다.[62] 막상 엘리자베스 2세는 중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수염을 기른 남자를 매우 싫어했다. 이 때문에 여왕 생전 왕실의 남자 구성원들은 반드시 면도를 해야만 했다.[63] 그런데 정작 왕실 직원들은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온 필리포스의 모습에만 익숙해서, 사진 속 수염을 기른 인물이 필리포스인지도 잘 몰랐다고.[64] 왕족치고는 풍파를 좀 겪어본 데다가 군대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탓이었다.[65] 부친 안드레아스 왕자는 모나코의 몬테 카를로에서 객사한지 오래였고, 모친 앨리스는 이전에 조현병으로 정신병원에서 3년간 지낸 데다 그리스로 돌아가 수녀처럼 지내며 봉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66] 베르톨트는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다.[67] 크리스토프는 괴링 밑에서 Forschungsamt(FA)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일했다. 후에는 SS 장교, FA수장을 맡으면서 루프트바페에서 복무하다가 1943년에 전사했다. 넷째 누나 소피아는 남편의 전사 이후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자이자 하노버 왕가의 차남 게오르크 빌헬름과 재혼한다.[68] 그냥 복무한 것도 아니고 공을 세워서 군 기관지에 이름이 언급된 것만 수차례가 넘는다.[69] Duchess of Kent to Louis Mountbatten 28 January 1945 "I think it is a very good idea & apart from it being a help in his naval career it might also be an asset for other 'matters'." Of course the less said about the question we have sometimes discussed the better - & as you say it must take its course.[70] 루이 마운트배튼은 조카가 영국의 후계자와 결혼한다는 생각에 매우 들떴다. 그는 야망이 컸고 가계도와 결혼 중매에 관심이 많았다. 1930년대에 친구 에드워드 8세를 위해 (15세부터 33세까지) 18명의 결혼 가능한 유럽의 공주들 목록을 만들었다고 한다.[71] 당시 남성 왕족이 얼마 없었던 그리스 왕가에서 필리포스는 의외로 계승서열 3위인 왕족이었다.[72] 마운트배튼은 외가인 바텐베르크 공가의 성을 영문식으로 읽은 것으로, 1차대전 중 반독 감정으로 개명한 것이다. 단,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는 그 훨씬 전에 결혼했기 때문에 한 번도 '마운트배튼'이었던 적이 없었다.[73] 필립의 계승권은 당시 그리스 왕가에서도 매우 높은 3위였다. 살리카법을 채택하고 있던(1952년 폐지) 그리스의 국왕은 필립의 사촌형인 요르요스 2세였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으며(1921년 결혼했지만 자녀 없이 1935년에 이혼했고, 필립의 영국 귀화 직후인 1947년 4월 1일 동맥경화로 급서), 요르요스의 동생이자 후임 국왕인 파블로스도 아들이 콘스탄티노스 2세뿐이었으며, 둘째 백부 요르요스 왕자는 80살을 바라보는 고령이었고, 그의 외아들 페트로스는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한데다 자녀 없이 사망, 셋째 백부 니콜라오스 왕자는 딸 셋만 두고 이미 사망, 이미 사망한 숙부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외아들 미하일이 있었지만 슬하에 딸만 둘을 두어서 여기도 단절됐다.[74] 여태껏 가족이나 친구들과 성공회 감사성찬례(예배)를 드렸으나, 군에 있을 때 세례는 그리스 정교회식으로 받았다고 한다.[75]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그 윈스턴 처칠이 "신랑 가족들이 왜 다 안 왔는지 알아? 전부 나치하고 결혼했거든. 골수 나치하고!"라고 두 사람의 결혼식을 못마땅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즌 2의 1화에서도 마거릿 공주가 언니 엘리자베스에게 "뭐? 그럼 형부의 나치 누나들이 계속 와서 괴롭혀?"라고 말한다. 2화에서 나온 필립의 단독 인터뷰 장면에서도 그가 독일에 있는 학교에 다닌 것에 대해 누나들이 거기에서 살았다고 대답하자, 여기자가 "나치 누나들이죠. 당신 누나 한 분과 결혼한 사람이 히틀러의 친구였어요."라고 말하여 필립의 성질을 긁어버린다. 그리고 필립의 학창 시절을 다룬 9화에서도 고고한 태도의 필립에게 불만을 가져 ’어디 몰락한 백작님이라도 되나?‘라고 이죽거린 학생이 ‘난 백작이 아니라 왕자야.‘ 라고 맞받아치자, 반격한답시고 가족들의 상황을 언급하며 "네 누나들은 다 나치잖아."라고 말한다.[76] 그럼에도 필립의 누이들은 가족의 나치 전력 등의 이유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들은 6년이 지나서야 올케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되었고, 후술하지만, 그 후손들은 사후 필립의 장례식에 참석했다.[77] 이후 이 결혼식에서 만난 미하이 1세와 결혼하게 된다.[78] 2022년 9월 8일 아내 엘리자베스 2세가 세상을 떠난 그 곳이다.[79] 필립 공이 애매한 신분으로 즉위식에 참여했다는 것이 복장에서 드러난다. 군주와 군주의 배우자는 도유 의식을 위해 장갑 등을 착용하지 않으며, 전통적으로 부부 모두 왕관을 착용한다.[80] 공작관(coronet)은 즉위식에선 썼으나 사진 촬영 때는 벗었다. 공작관이 충성맹세 때 사용되는 물품이기 때문에 여왕의 신하로서 부부 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81] 또한 필립 공은 왕비들과 달리, 제대로된 대관식 기념 초상화도 남아있지 않다. 이 역시 필립은 대관식의 주인공이 아닌, 여왕의 신하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82] 사실 조지 6세는 젊은 시절부터 잔병치레가 많아서 건강한 사람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안 그래도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편인데 전쟁으로 인해 과로와 스트레스, 거기에 줄담배까지 피워댔으니 건강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83] 필립은 해군을 떠나야 한다는 것에 상심했다고 한다. 총각 시절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자기 실력으로 중령까지 달았는데, 느닷없이 반강제로 군을 떠나야 하게 됐기 때문. 사실 해군을 떠나긴 했지만 제대한 것은 아니었으며 기존에 근무하던 호위함 함장을 그만두고 왕실 공무에 투입됐을 뿐이다. 필립은 아내가 즉위한 1952년까지 현역 신분을 유지했지만 1951년 호위함 함장을 그만둔 이후로 다시는 현역 해군 장교로서의 보직을 받지 못했다. 국서로서 감당해야 할 업무량은 여왕과 비슷했으며, 이듬해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필립은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왕족으로서 육해공군 원수직을 받았다.[84] 루이 마운트배튼은 자신이 쓰고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게만 유통된 책 <마운트배튼 계보>에서 마운트배튼 가문이 영국을 두 달 동안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그 두 달은 여왕이 결혼한 이름으로 통치한 1952년 2월 6일부터 4월 9일까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4월 9일에 윈스턴 처칠의 조언에 따라 여왕과 그녀의 아이들은 윈저의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고 설명한다.[85] 조지 5세의 개봉 칙허장에 따르면 전하 호칭은 군주의 자녀, 군주의 아들의 자녀, 웨일스 공의 적장손만 사용할 수 있다. 이 개봉 칙허장에 따르면 찰스 3세는 메리오너스 백작, 앤 공주는 레이디 마운트배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지 6세의 1948년 개봉 칙허장으로 필립과 엘리자베스의 아이들은 전하(H.R.H.)와 Prince/Princess의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전하 (The Royal Highness)'를 받은 왕족은 성이 없다. 성을 쓰는 The Royal Highness Prince는 필립 뿐이었다.[86] 영국 왕실의 공식 설명.#[87] 마운트배튼윈저 성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손녀 루이즈 앨리스 엘리자베스 메리이다. 아버지의 직위와 상관없이 왕의 부계 손녀이기 때문에 루이즈는 HRH 칭호와 Princess 호칭을 사용할 수 있으나, 에드워드 왕자 부부가 자식들이 평범한 삶을 살길 바랐기 때문에 HRH 경칭을 주지 않을 것 뿐이다. '전하 (The Royal Highness)'를 받은 왕족은 보통 성을 쓰지 않고, 써야 할 상황이면 영지 이름을 사용한다. ex) 찰스 에든버러, 윌리엄 웨일즈, 조지 케임브리지.[88] 04:12쯤에 필립 공이 여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89] 필립 공이 해외 순방으로 6개월 동안 여왕과 떨어져 지냈는데, 이때 이혼설이 언론을 통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버킹엄 궁 측에서 곧바로 부인했다. 또한 이는 버킹엄 궁이 사상 최초로 밝힌 왕족의 이혼설에 대한 입장이었다.[90] 엘리자베스는 결혼 이후 즉위하기 전까지 엘리자베스 마운트배튼이라는 이름을 쓴 적이 있다.[91] 그 외에 이 논쟁에서 후보로 거론된 작위로는 국서(Prince Consort), 영연방 공(Prince of the Commonwealth), 왕국 공(Prince of the Realm), 프린스 로열(Prince Royal)등이 있었다.[92] 1957년에 여왕이 작위를 내리기 이전에는 에든버러 공작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Edinburgh)라는 호칭이 전부였다. 이는 왕족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인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으로 책봉되어 있었던 자신의 장남보다 낮은 신분이었다.[93]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정부에서 보낸 서류를 상자에 넣은 다음 꺼내서 함께 들여다 보았는데, 엘리자베스 2세는 그 상자의 열쇠를 자기만 갖고 남편에게 주지 않았다.[94] 예를 들면 1956 멜버른 올림픽 개회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 호주 국왕을 대신하여 개회 선언을 했다. 한편 인도를 방문했을 때는 영국 식민지 시절 학살자 추모비에 딴지를 걸다가, 여왕이 나중에 인도를 방문할 때 극우파들의 야유와 비웃음을 실컷 당하는 데 기여했다.[95] 여왕의 막내 아들 레오폴드 왕자의 1남 1녀 중 장녀.[96] 상대 차량은 기아 카렌스였고, 탑승자 2명 모두 가벼운 부상으로 끝났다.[97] 마지막 공식 생일 사진이다.[98] 현직이 아닌 전체 군주로 한다면 최장수한 배우자는 필립의 장모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다. 무려 만 101세까지 살았다.[99] 사망 1달 전에 찍힌 사진이다.[100] 고령에도 비교적 정정했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수척해진 모습으로 등장했다. 또한 평소에는 퇴원 시 스스로 걸어나와 차를 탔지만 이때는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와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탑승했다.[101] BBC는 영국 왕실 일원의 추모 방송에 국제 방송인 BBC World News를 포함한 모든 정규 방송을 끊고 God Save the Queen을 송출한다. 1997년 다이애나 스펜서, 2002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사망 때도 방송했다. 영국 왕실기나 국기를 띄워주었던 지난 추모 방송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필립 공의 사진을 띄웠다. 이후 다음 해 엘리자베스 2세의 사망 때도 여왕의 사진을 띄웠다.[102] 만 100세를 단 2개월 앞두고 있었다. 그래도 굉장히 장수하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103] 1952년 ~ 2017년.[104] 원문 extraordinary public servant, 쉽게 번역하자면 만인의 비복[105] 필립 공의 사촌인 파블로스의 아들로 필립 공에게는 5촌 조카. 스페인 소피아 왕대비의 남동생이기도 하다.[106] 필립은 생전에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이 영면한 프로그모어에 묻히고 싶어했다고 한다.[107] 원래 2달 뒤인 100세 생일 때 영국에 방문하려고 했었다고.[108] 첫째 누나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르가리타 공주의 손자 필리프 추 호엔로에랑엔부르크와 둘째 누나 그리스와 덴마크의 테오도라 공주의 손자 베른하르트 폰 바덴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셋째 누나가 시집 간 헤센-다름슈타트 가문(현재 남계 단절) 및 넷째 누나의 첫 시댁인 헤센카셀 가문을 대표하여 헤센카셀의 당주 도나투스(필립 공의 넷째 누나 소피아의 첫 남편 크리스토프의 형 필리프의 손자)도 참석했다.[109] 외손녀 자라 틴달의 아들 루카스 틴달, 친손녀 유지니 공주의 아들 어거스트 브룩스뱅크, 친손자 해리 왕자의 딸 릴리벳. 여기에 친손녀 베아트리스 공주의 딸 시에나 마펠리 모치가 태어났다. 루카스와 어거스트의 미들네임에는 필립이 들어간다. 손녀들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110] 니콜라이 1세의 차남이다.[111]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이다.[112] 웨일스 공 윌리엄,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113] 피터 필립스, 자라 틴달[114] 요크의 베아트리스 공녀, 요크의 유지니 공녀[115]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윈저, 웨식스 백작 제임스 마운트배튼윈저[116] 그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도 농담을 좋아했다고 한다.[117] 일련의 영국 관련 발언 때문에 필립 공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개념없는 영감이라는 농담아닌 농담도 있다. 다만, 필립 공은 스스로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입맛이 엘리자베스 2세와는 너무나도 달랐어서 이런 말을 내뱉게 된 측면도 있다.[118] 필립 공의 할아버지인 요르요스 1세가 니콜라이 2세의 외삼촌이니 필립 공은 니콜라이 2세에게는 5촌 조카, 그 자녀들과는 6촌 사이가 된다. 또한 필립 공의 외할아버지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는 니콜라스 2세의 5촌 당숙으로 필립 공은 니콜라스 2세에게 7촌 조카이다. 그와 동시에 필립 공의 친할머니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이 니콜라이 2세의 5촌 당고모라서, 니콜라이 2세에게 7촌 조카이자 그 자녀들과는 8촌 관계로 겹겹이 친척 관계였다.[119] 물론 고향이라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듯이, 풍비박산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잊기 위해 평생 가기도 싫다는 사람도 있으며, 필립 공은 상대적으로 후자에 해당하는 당사자였다고 보면 된다.[120] 이 불황을 해결하겠다고 나서서 강력한 구조개혁을 밀어붙인 사람이 바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당시 마거릿 대처의 정책은 경기를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서민층과 노동자 계급에서는 많은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121] 솔로몬 제도는 현재도 인구가 74만 명으로 영국에 비해서 한참 적다. 현재 기준으로 인구 성장률이 5%라면 올해에 3만 7천명만 늘어도 달성되는 수준. 그러나 영국은 388만 명이 늘어야 달성된다.[122] 중국에 머무는 유학생들 중 에든버러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들에게 에든버러 대학교 총장인 필립 공은 그 학생들에게 매우 관심을 가졌다.[123] 이 발언은 인종차별이 맞지만 본인에게는 악의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가 영국에 거주하는 중국 유학생들에게 "이곳에 너무 오래 있다가는 당신들 눈도 크고 동그래진다"고 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124] 사적인 점심 모임에서 어떤 사람들이 인종차별적인 뉘앙스로 농담을 하자 필립이 그 사람들의 말을 저지했다는 등 필립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증명해주는 일화는 많다. 필립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1920년대 사람이다 보니 그 시대의 잘못된 편견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125] 의도적으로 주변을 지나가던 선박을 암초에 걸리게 한 다음 노략질을 해서 먹고사는 전형적인 약탈 경제였다.[126] 정확히는 음주단속 적발로 인한 무효처리.[127] 비슷하면서도 다른 맥락으로, 음주량이 높은 국가에서는 음주운전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널널한 편이다. 그중에서도 땅이 넓거나 개발도상국 같은 경우는 맥주 한두캔이나 칵테일 한잔 정도는 그렇게 문제삼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적발해도 몇가지 테스트 후 크게 문제 없어보이면 차를 한번 검사한 뒤에 구두경고 혹은 가벼운 과태료 정도로 끝난다. 물론 이것도 크게 문제가 없어보이거나 참작이 됐을 때 가능하지 만취한 상태거나 아예 사고를 내면 가차없이 처벌수위가 올라간다.[128] 레지날드 다이어. 인도 암리차르 학살의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129] 필립 공은 어린 시절 독일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어서 독일어에 매우 능통했다.[130] 한글로 표기하면 '구텐 탁, 헤어 라이히스칸츨러'[131] 히틀러의 대표적 직책 퓌러의 정식 명칭부터가 Führer und Reichskanzler(최고영도자 겸 제국 총리)이다.[132] 내각수상은 북한에서, 내각총리대신은 일본에서 쓰는 직책명이다. '제국총리'라는 표현이 히틀러의 존재로 민감해진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133] 6월 4일, 원문은 You may have noticed that the tabloids were quick to suggest that I had made another 'gaffe' 'insulted' some deaf children at Cardiff recently. Needless to say, the story is largely invention. It so happens that my mother was quite seriously deaf and I have been Patron of the Royal National Institute of Deaf for ages, so it's hardly likely that I would do any such thing. Quite apart form that, I have no recollection of meeting a group of deaf children at the event for the Prince's Trust in the grounds of Cardiff Castle. There were young people milling all over the place and there may well have been a group of deaf children amongst them. What I do remember is that the noise from various stages and bands was quite deafening and I may well have said at some point something to the effect that if anyone were to sit too close to the loud speakers they would certainly be in danger of going deaf.[134] Prince Phillip outburst: Sir Elton John reveals shock moment he was confronted by Duke[135] The day Prince Phillip savagely told off neighbour Elton John[136] <인디펜던트>는 시론으로 왕실 폐지를 주장하는 언론이다. 구독자들도 공화주의자가 많은 편.[137] 정확히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의상 킬트에 그려진, 타탄이라는 다른 여러 선이 교차되는 스타일의 무늬이다.[138] 칭제만 안했지 영국 왕실은 그 명성으로 따지자면 19세기 후반 독일 황실, 러시아 황실, 오스트리아 황실과 동급인 격이 높은 왕조였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대부분의 유럽 왕실들이 아예 퇴위하거나 권력을 잃고 몰락한데다 상술한 저 세 가문 역시 폐위되어 망명을 떠나거나 아예 왕가의 일원들이 학살당하는 가운데에서도 영국만이 유일하게 군주제를 유지했다. 두번의 세계 대전이라는 난리통 속에서도 영국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서 모두 승전국의 지위를 차지하며, 대영제국 시절보다 위상은 낮아졌을지언정 현존하는 왕실 중에서는 큰어른 위치로 군림하고 있다.[139] Princess란 작위 앞에 The가 붙는다는 건 왕자의 딸(왕의 친손녀/종친)이 아닌 왕의 적녀라는 뜻이다. 왕자의 딸도 Princess 작위와 HRH(전하) 칭호는 가지고 있으나, 앞에 The를 붙이지 않고 부친의 영지 이름을 따서 'Princess of~ (~의 공녀)'라는 작위로 불린다. 이는 왕세자(Prince of Wales)의 딸도 마찬가지다. 사실 Princess니 뜻만 놓고 번안하자면 왕녀나 공주라고 봐야 맞겠지만, 한국에선 왕의 딸과 왕자의 딸이라는 서열 구분을 하기 위해 공식적인 작위는 공녀라고 번안한다. 이는 대공의 딸도 같다.(ex.헤센의 알릭스 공녀)[140] 망명생활을 하던 어린시절은 어디까지나 왕족, 그것도 고위 왕족이라는 기준에서 가난하게 살았을 뿐이지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141] 이 학교는 필립의 모교인데, 매우 억압적인 교칙으로 유명한 학교다. 필립은 아들들을 모두 이곳에 보냈다.[142] 필립 공 자신도 혼인 초기에 몰락한 집안과 부모의 사정 등으로 멸시를 받았기에 사실상 고립무원의 처지였던 며느리에게 연민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을 것이다.[143] 현대의 일반인들 눈에는 둘을 따로 놓고 볼 수가 없지만 유럽 왕족 및 귀족들은 예로부터 정략결혼이 많아 배우자에게는 정치적인 의무를 다하고 연애는 내연녀와 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과거에는 그 부인에게 가짜 남편을 결혼시킨 뒤, 만약 왕이 자식을 낳을 경우 그 남편의 아들로 세례를 받게 하는 식으로. 로얄 미스트리스 부분에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그런 사고방식에 익숙한 필립 공도 찰스에게 가정에 대한 의무는 지키라고 꾸짖은 것.[144] 번역하면 '가장 소중한 아빠' 정도의 표현이다.[145] 다만 2002년 쯤에 다이애나의 심령 치료사라는 사람이 다이애나가 맞바람을 피운 이후로는 필립 공이 "찰스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런 행실이 용납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그녀를 비판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고 주장해 크게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필립 공은 자신이 그 해당 편지의 사본을 가지고 있는데, 심령치료사가 공개한 편지 양식과 서명이 모두 자신의 것과 다르다며 조작하지 말라고 반박했다. 또한 자신은 단 한 번도 며느리에게 나쁜 말을 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 부분은 넘어갈 수 있는게 의혹을 제기한 사람이 다이애나의 최측근이나 가족도 아니고 심령 치료사라는 이상한 직업을 가진 사람인데다 생전 다이애나와 인연도 없었다. 반면 필립은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시아버지이고 국서 신분이다. 신분적으로나, 가정 내의 위치에서나 필립의 말이 더 설득력 있다.[146] 이 때문인지 해리 왕자가 훗날 왕실이 인종차별적 태도를 보여 아내 메건을 압박했다고 폭로했을 때도 조부모인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는 그 범인이 아니라고 별도의 증언을 했다.[147] 생애 항목에서도 나왔지만 필립 역시 생후 1년 만에 고국인 그리스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나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아버지에게도 사실상 버림받은 데다 부모 대신 외삼촌과 외숙모들 손에서 자라면서 신분과는 별개로 빈말로도 가정사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본인도 고작 16살 때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누나, 매형, 조카들을 한꺼번에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손자들이 더욱 안타까웠을 듯 하다.[148] 결국 성공회 교회의 반대와 내각의 반대, 그리고 법률상의 문제로 결혼을 하지는 못했다.[149] 필립 공은 네 자녀 중 앤을 제외한 아들 모두를 자신의 영국 모교이기도 한 고든스타운 보딩 스쿨에 입학시켰다. 나치 정권으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해주었던 쿠르트 한이 영국으로 이주해 세운 학교.[150] 찰스는 고든스타운 스쿨의 엄한 학풍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두 아들은 이튼 스쿨을 보냈다.[151] 하다 못해 근대화가 느린 축이었던 조선에도 궁궐에 전화가 설치된 때가 1896년이다.[152] 당시 왕실 중신들은 왕실 행사를 그런 식으로 일일이 세상에 알리면 신비감이 떨어져 왕실 권위에 금이 간다는 주장을 했다. 윈스턴 처칠 총리도 엄숙해야 할 대관식이 극장 공연 같이 된다고 반대했다.[153] 즉위 시점 필립은 한창인 30세, 엘리자베스는 25세였다. 젊은 부부가 너무 큰 변화에 적응하고 갈등을 해결해 나가기에는 녹록치 않은 시기일 수 밖에 없다.[154] 당시엔 아직 공주였던 여왕이 공항에 도착하자 맞이하기 위해 나온 아프리카 부족장들의 복장이나 훈장 등을 가지고 조롱을 하고, 이에 엘리자베스 2세가 당황하며 제지하는 모습이 나오며, 시즌4에서는 가이아나 대통령이 선물로 준 항아리에 이상한 새와 구불구불한 선들이 그려져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155] 다만 여태 있던 의혹들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설정해 극이 진행되다 보니 필립 공 본인은 이 드라마를 정말 싫어했고, 다이애나 스펜서가 등장하기 전까진 여왕 본인은 물론 왕족들도 더 크라운을 즐겨보던 것과 달리 대놓고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생전 더 크라운의 제작자들을 고소하길 원했으며, 특히 누나 체칠리아의 죽음을 묘사한 것에 대해 분개했다고 한다.#[156] 그러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요르요스 1세의 자녀들 중에서 그리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강했다고 한다.[157]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요르요스 1세의 4남으로 그냥 왕자였다.[158] 그래서인지 자신과 아내 엘리자베스 2세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도 출입국심사를 담당하는 SS 장교가 어린 필리포스에게 정말 그리스인이 맞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가짜 그리스인[159] 한편 할머니 올가가 러시아 황족이라(니콜라이 1세의 손녀) 러시아 혈통도 약간이나마 섞여있다.[160] 요르요스 1세의 아들로 필립 공의 큰아버지인 니콜라오스 왕자의 딸.[161] 특히 켄트 공작과 마리나 공주의 장녀인 켄트의 알렉산드라 공녀가 어머니를 쏙 빼닮은 상당한 미녀였다. 더군다나 마리나의 두 아들들 역시 미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손주들도 하나같이 훈남 훈녀다.[162]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 조지 6세의 할아버지.[163] 필립의 어머니 앨리스의 외할머니.[164] 영국 왕실인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및 윈저 왕조.[165] 그리스 및 덴마크 왕실인 글뤽스부르크 왕조.[166] 바텐베르크 가문으로는 7촌,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는 8촌[167] 중세부터 근세의 유럽 왕가에서는 사촌간 혼인이 굉장히 흔했고 이후 4~5촌 정도의 가까운 친척간의 결혼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왕족은 가급적 왕족끼리만 결혼하는 오랜 전통상 20세기까지도 유럽 왕실에서 6~8촌간의 결혼은 종종 이루어졌다.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마운트배튼의 경우도 이런 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168] 슈탄데스헤어 가문.[169] Philipp Gottfried Alexander Prinz zu Hohenlohe-Langenburg (1970 ~ )[170] 테오도라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와 베르톨트의 어머니 마리 루이제가 사촌 지간이었다. 마리 루이제의 어머니 하노버의 왕세자비 티라가 안드레아스의 막내 고모.[171] 독일 제국의 마지막 재상이자 군주제 폐지 이후 바덴 대공가의 실질적인 초대 당주였던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아들. 바덴 대공가의 수장은 대공국 멸망 이후 바덴 변경백을 칭한다.[172] 헤센의 마지막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장남으로 체칠리아의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외사촌이다.[173] 실제는 임신하고 있던 태중의 아들까지 세 아들[174] 헤센 대공국(헤센-다름슈타트)과는 다른 헤센카셀 방백 가문이다. 물론 모계로는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지만 부계로 치면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를 지지했던 필리프 1세 이후 갈라진 먼 친척 뻘인데다가, 헤센 대공국의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이 단절되어 1968년 이후로는 헤센카셀 가문의 수장이 헤센 가문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175] 잠시 핀란드 왕국의 왕으로 추대된 적이 있던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카를과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의 5남이며, 마르가레테 공주가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니 소피아와 크리스토프는 빅토리아 여왕 기준으로 7촌이다. 크리스토프의 셋째형이자 프리드리히 카를의 뒤를 이어, 헤센카셀의 수장이 된 필리프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둘째 사위다.[176]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의 동생이자 그리스의 왕비 프레데리키의 오빠. 참고로 빌헬름의 어머니는 빌헬름 2세의 딸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이니 전 남편 크리스토프에게는 오촌 조카이다. 또한 소피아의 형부(상기한 언니 테오도라의 남편) 바덴 변경백 베르톨트의 외사촌이기도 하다.[177] 훈장 수여를 보도한 당시의 대한뉴스 제1562호 - 대통령 동정[178] 필립 공의 외외증조할머니 앨리스 공주의 남아있는 여계 후손들은 1녀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와 3녀 헤센의 이레네 공녀의 자녀들밖에 없었는데 이레네 공녀는 아들만 셋을 낳아 미토콘드리아 유전이 단절되었고, 빅토리아에겐 딸이 둘 있었으나 차녀 루이즈는 자녀 없이 사망하였다. 장녀 앨리스는 1남 4녀를 낳았는데 4명의 딸은 모두 사망한 상태여서 마지막 남은 아들 필립 공이 미토콘드리아를 대조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었다. 만약 필립 공마저 없었으면 필립 공의 조카이고 알렉산다르 1세의 차남 토미슬라브 왕자의 아내 마르가리타가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만약 더 윗대에서 갈라진 친척 중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공유하는 혈족을 찾아본다면 알렉산드라 황후의 이종사촌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와 알폰소 13세의 자식들, 또 다른 이종사촌인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의 외손자 미하이 1세 등을 추가로 찾을 수 있다. 범위를 더욱 넓혀보면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왕 콘스탄티노스 2세도 동일한 미토콘드리아 DNA를 공유하는 혈족이지만 이들은 미토콘드리아 DNA 계보로만 따지면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조모 빅토리아 여왕의 언니 라이닝겐의 페오도라의 후손들이라(물론 실제 촌수는 더 가깝다.) 아주 먼 친척이다.[179] 니콜라이 2세의 경우에는 DNA를 대조해 볼 만한 친척이 마땅찮아서 (영국에 거주 중인 친척이 있었으나 해당 인물이 본인 일가족의 망명을 돕지 않은 영국에 대한 악감정을 이유로 DNA 검사를 거부했다.) 사망한 다른 친척의 관을 열고 DNA를 채취해서 검사해야 했다. 사실 필립은 니콜라이 2세와도 부계 조상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이 경우 공통 조상이 16세기 인물인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프레데리크 1세이기 때문에(25촌 조카뻘, 다만 크리스티안 9세 기준으로는 5촌, 니콜라이 1세 기준으로는 7촌이다.), 불일치로 나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고 실제로 그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덴마크 왕실이 난처해질 것이기 때문에 신원 확인을 위해 두 사람의 Y염색체를 대조하기는 곤란했을 것이다.[180] 정말로 사촌 마리나의 집에서 엘리자베스와 필리포스는 만났다고 한다.[181] 시즌 2 에피소드 9로 본래 편명은 "Paterfamilias", 국내 방송시 편명은 "왕자의 아버지"[182] 필립은 "날씨가 따뜻해지면 생각해 보리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83]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뉴헤브리디스 제도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식민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관공서에는 프랑스 대통령의 초상화 역시 같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대통령은 임기직이라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 사진으로 바뀌었을 테지만 영국 여왕 부군은 이혼하거나 군주제가 철폐되지 않는 한 종신직이니 사진이 계속 걸려 있어서 필립 공을 섬기게 된 듯.[184] 필리프 드골은 친아빠인 샤를 드골과 함께 영국 런던에서 망명정부인 자유프랑스를 이끌고 있었다.[185] 다른 정규 중파 라디오 채널들인 Radio 1, 2, 3, 5는 제때에 속보 전환이 이루어졌다. BBC Radio 2 속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