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18:08:36

비렌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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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10대 국왕
비렌드라
वीरेन्द्र वीर विक्रम शाह | Birendra of Nepal
파일:비렌드라.jpg
<colbgcolor=#DC143C><colcolor=#fff,#fff> 본명 비렌드라 비르 비크람 샤허 데브
श्री ५ महाराजाधिराज वीरेन्द्र वीर विक्रम शाह देव
출생 1945년 12월 28일
네팔 왕국 카트만두
사망 2001년 6월 1일 (향년 55세)
네팔 왕국 카트만두
재위기간 제10대 국왕
1972년 1월 31일 ~ 2001년 6월 1일
대관식 1975년 2월 24일
존호 슈리 판치 마하라자디라즈 비렌드라 비르 비크람 샤허 데브
부모 아버지 마헨드라 국왕
어머니 인드라 락쉬미 왕비
종교 힌두교

1. 소개2. 생애
2.1. 어린 시절2.2. 재위기간
3. 최후
3.1. 사태의 원인3.2. 사후
4. 평가5. 가족 관계

[clearfix]

1. 소개

네팔의 10대 왕. 재위 말기에 네팔 왕실 학살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비운의 명군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일:비렌드라 어린시절.jpg
비렌드라는 1945년 12월 29일에 당시 왕세자였던 마헨드라(1920년 ~ 1972년, 재위 : 1955년 ~ 1972년) 국왕과 인드라 왕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동생 디렌드라를 낳느라 어머니 인드라를 잃었다. 그런데 그 동생 디렌드라는 커서 형과 같은 최후를 얻었다. 이후 영국으로 유학 생활을 하였고, 1964년 이튼 칼리지를 졸업했다. 이후 여러 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유능한 인물이었다.

2.2. 재위기간

파일:external/c1.staticflickr.com/6152697710_3853d604d0.jpg
좌측부터 (당시 기준 명칭으로) 디펜드라 왕세자, 비렌드라 국왕, 나라잔 왕자, 아이쉬와르야 왕비, 슈르티 공주

1972년 1월 31일 부왕인 마헨드라가 붕어하자 즉위하였다. 마헨드라는 절대왕정 독재를 통해 네팔의 근대화를 이룩하겠다는 생각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다당제를 금지했으며 국왕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방식으로 통치를 하다가 민주주의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거센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과격한 마오이스트들은 산간지역을 점거하고 무장투쟁을 벌이는 등 나라는 극도의 혼란가운데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렌드라는 즉위하자마자 교육 정책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국민들을 위해 이곳저곳을 시찰하면서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래서 네팔은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된 지금도 비렌드라 전 국왕에 대한 국민과 사학계의 평가가 아주 좋은 편이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혼란과 숙제를 어느 정도 잘 풀어내기도 했을 정도였고 국내 정치도 비렌드라 사후에 국왕이 되어 전제정을 펼치다 폐위당한 남동생 갸넨드라에 비해 나쁘지 않았다.

1979년 카트만두에서 거센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이듬해인 1980년 비렌드라는 네팔의 통치체제에 대해서 국민투표를 시행한다는 결단을 내린다. 마헨드라가 도입한 무정당 판차야트 제도를 유지할지, 아니면 다당제 민주주의를 도입할지의 여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한 것. 물론 이런 결단에는 비렌드라의 통치가 국민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판차야트 체제가 공인될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기에 내린 결단이었겠지만. 결국 근소한 차이로 기존의 판차야트 체제 유지로 결론이 났지만 비렌드라는 어느 정도 판차야트 제도를 개선해서 1981년 5년 임기의 판차야트 대표를 뽑는 총선을 1959년 이후 22년만에 시행했다. 이후 1986년에도 총선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6월 항쟁을 시작으로, 중국, 대만, 베트남, 필리핀 등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민주화 열풍에 이르자 이에 자극을 받은 네팔에서도 다시 대대적인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결국 1990년 비렌드라는 스스로 절대 왕정을 포기하고 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였다. 무정당 판차야트 체제를 포기하고 다당제 민주주의를 다시 도입했으며 1991년 합법화된 네팔 의회당과 네팔 공산당이 참여한 총선이 치러져 의회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국민들이 국왕을 열렬히 지지하였고, 대외 관계도 좋은 편이었다.[1] 이렇듯 그는 네팔 국민들의 좋은 왕으로 남아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3. 최후

2001년 6월 1일, 네팔 현지 시각 오후 9시경(한국 시간 6월 2일 새벽 12시 15분경), 비렌드라는 왕실에서 개최하는 연회장[2]에 참석하였다. 여기에는 아이쉬와르야 왕비, 슈르티 공주, 나라잔 왕자 등 왕실 고위 인사가 참석했고, 분위기는 평소처럼 화기애애했다. 디펜드라 왕세자 또한 이 연회에 참석했으나, 그냥 술만 마시고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이쉬와르야 왕비가 디펜드라한테 나가서 좀 쉬라고 타일렀고, 디펜드라는 그냥 조용히 나갔다. 그러나, 잠시 후 디펜드라는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하고 와서 문을 잠근 다음 총을 들고 천장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비렌드라 국왕을 총으로 쏘고, 그 다음 주변에 있던 왕족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당시 나라얀히티 왕궁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그 상태에서 디펜드라는 고모 3명(비렌드라의 전임 국왕 마헨드라의 딸들)을 총으로 쏘고, 여동생 슈르티 공주를 총으로 쏜 다음 숙부 디렌드라를 총으로 난사해 죽였다. 그 후 아이쉬와르야 왕비와 나라잔 왕자도 총으로 쏘아 죽였다.[3] 그리고 소리를 지른 후 그 자리에서 소총을 버리고 권총을 빼들어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을 기도했다. 이때 경호원들과 왕실 경비병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지만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비렌드라 국왕의 재위 29년. 이후 디펜드라는 혼수 상태에 빠지다가 3일 후인 2001년 6월 4일 사망했다. 끔찍한 사건은 비렌드라 국왕 일가와 디펜드라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3.1. 사태의 원인

원인은 다름아닌 디펜드라 왕세자가 데브야니 라나를 사랑했지만, 비렌드라 국왕은 데브야니 라나가 슈르티 공주의 남편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크게 반대했고[4], 아이쉬와르야 왕비는 디펜드라가 35세 이전에 결혼하면 왕(비렌드라)이 죽을 것이라는 점성가들의 예언을 굳게 믿고 있어서 반대했다. 무엇보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디펜드라는 마약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어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고 몰래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네팔 왕실에서는 이를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비렌드라는 경호원들을 연회장의 안이 아닌 밖에서 경호를 하게 하여 이것이 그의 큰 실수였다.[5]

3.2. 사후

비렌드라의 죽음은 네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와서 슬퍼했다. 그 결과, 마침 출장 중이던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 갸넨드라가 즉위하였으나, 갸넨드라는 형과 달리 전제군주제로 통치했기에 네팔 전체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즉위 7년만인 2008년, 국민 투표로 왕실이 폐지되면서 퇴위되었다. 한편 갸넨드라의 아들 파라스(1971년 ~) 왕자는 총격 사건에서 디펜드라를 설득하려 했고, 슈르티 공주가 낳은 두 아이를 현장에서 대피시켰다.

4. 평가

아이러니하게도 비렌드라는 네팔 샤 왕조의 개창자인 프리트비 나라얀 이후로 가장 유능한 왕이었다. 부친 마헨드라 국왕이 절대왕정 독재를 수립하고 불러일으킨 네팔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름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했으며 시대의 흐름을 읽고 절대왕정을 포기할 줄도 아는 왕이었다.

그러나 아들 디펜드라의 폭주로 비렌드라는 사망했고 결국 네팔 샤 왕조는 무너지고 말았다. 나름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있던 네팔 정국도 비렌드라 사후 동생 갸넨드라가 시대를 거스르는 절대왕정으로 회귀하면서 왕조가 폐지되는 사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네팔 최고의 명군이었지만 아들과 동생을 잘못 두었다. 군주제가 폐지된 현재에도 비렌드라에 대한 평은 매우 좋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에 대한 부정적 시선도 존재한다. 일설에는 그가 말기에 이르러 민간정부가 무능하고 왕실 내에서 자신의 권위가 위축되는 가운데 마오이스트 반군들이 크게 세를 떨치게 되자 이를 기회로 다당제를 정지하고 전제군주정으로 회귀하려 한 게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마오이스트 반군을 제압하면서 동시에 무능한 민간정부도 타도하고 비렌드라 자신이 직접 국가를 통치하려 했던 게 아니었냐는 것. 물론 비렌드라가 샤 왕조 내에서는 가장 민주주의에 우호적인 인물이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비렌드라 말고는 민주주의에 우호적인 왕실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6] 자칫 잘못하면 왕위를 찬탈당할수도 있어서 이런 생각을 품고 있지 않았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시선도 있다.

5. 가족 관계


본인 내외는 물론 자녀까지 다 죽고 외손녀 둘만 생존. 누나 둘과 남동생 하나도 죽었으며 왕위는 결국 화를 면한 다른 남동생인 갸넨드라에게 인계되었으나 이는 왕정의 폐지를 가져온다. 네팔의 복벽주의자들은 갸넨드라와 그의 아들인 파라스가 저지른 과오들이 굉장히 많음[10]에도 불구하고 네팔 샤 가문의 당주 계승법이 수정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갸넨드라의 복위를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1] 대한민국과도 인연을 맺었고, 한국 특사를 직접 맞이했는데, 그 특사로 파견된 인물이 하필이면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는 분이었던 것이다.[2] 네팔 국왕이 왕실에 대한 홍보와 가족 관계 개선을 위해 매달 1번 연회를 개최했다.[3] 이때 아이쉬와르야 왕비는 얼굴에 총을 맞아 죽어서 사후 얼굴이 심하게 손상되어 장례식 때 그녀의 시신에 도자기로 만든 데드 마스크를 씌우고 장례를 치러야 했다.[4] 라나 가문이 네팔 왕실을 바지사장으로 두고 100년 넘게 실권을 장악한 사건도 원인의 하나로 추정된다. 상세 내용은 라젠드라트리부반 항목 참조.[5] 원래 왕실의 연회는 경호원들이 연회장에서 항상 국왕의 곁에서 철통같은 경호를 한다. 하지만 비렌드라는 연회에 경호원들이 있는 것이 분위기를 망친다고 생각하여 싫어한 터라 연회장 안이 아닌 밖에서 경비를 서게 했는데 이게 큰 실수였다. 최소한 곁에 경호원들만 있었다면 왕태자의 총기난사가 제압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6] 어머니 인드라도 남편 마헨드라의 절대왕정 체제를 수호하기를 바랬고 부인은 물론 남동생까지도 왕권을 이양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7] 총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지만 간신히 목숨은 건졌다.[8]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현장에 없었다. 이후 제12대 국왕이 되나 폭정으로 왕이 된지 7년만에 퇴위한다.[9] 갸넨드라의 아내로 총격사건 당시 중상을 입고서 아들인 파라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게 되었다.[10] 특히 갸넨드라가 재위하던 2000년대 초중반 마오이스트 반군과 네팔 왕실 정부군이 내전을 치르면서 네팔 정부군에 의해 친지나 가족이 살해당하거나 마오이스트 반군의 부역자로 몰려 체포·고문당했던 농촌·산촌 지역의 주민들은 갸넨드라 전 국왕에 대해 이를 엄청 갈다 못해 원수 취급을 한다고 한다. 당연히 이들은 왕정 폐지 후 수립된 공화국 정부의 열렬한 지지세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