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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제9대 국왕 마헨드라 महेन्द्र वीर विक्रम शाह | |
<colbgcolor=#DC143C><colcolor=#fff,#fff> 출생 | 1920년 6월 11일 |
네팔 왕국 카트만두 | |
사망 | 1972년 1월 31일 (향년 51세) |
네팔 왕국 바랏푸르 | |
재위기간 | 제9대 국왕 |
1955년 3월 13일 ~ 1972년 1월 31일 | |
대관식 | 1956년 5월 2일 |
칭호 | 마헨드라 비르 비크람 샤허 데브 |
부모 | 아버지 트리부반 국왕 어머니 칸티 락쉬미 왕비 |
배우자 | 인드라 락쉬미 왕비 |
종교 | 힌두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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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네팔의 제9대 국왕. 1955년 3월 14일부터 1972년 1월 31일까지 총 17년간 재위했다. 아르슬란 전기의 등장인물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니 유의하자.2. 통치
1955년 아버지 트리부반의 뒤를 이어 네팔의 국왕이 되었다. 20세기의 국왕이었지만 마헨드라는 서구식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고 오히려 전통적인 교육을 받은 관계로 현대적인 것보단 전통을 더 숭상하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국왕이었다.아버지 트리부반이 샤 왕조의 절대왕정 복고를 이뤄냈고 이후 민주주의를 도입하려 했지만 권위적 통치에 익숙해져 있던 네팔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진통과 혼란이 일어났고 마헨드라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으로 네팔에 현대적인 문물을 도입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어느 정도 현대적인 사상이나 문물에 익숙해진 성향의 국민들도 포섭해 나가려는 방편이었다. 어쨌든 그런 덕분에 네팔의 근대화가 진척되었다.
한편으로 마헨드라는 토지제도 개혁에도 박차를 가해 토지소유 상한제를 도입했으며 라나 가문이 도입해 네팔 사회에 혼란을 불러온 카스트 제도를 폐지하기도 했다.
그의 치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민주주의 제도 도입이었다. 아버지 트리부반이 진행하다 사망하여 이루지 못했던 의회 수립을 그의 치세에서 진행해 1959년 2월 18일 네팔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총선거를 통해 109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고 네팔 의회당(Nepali Congress party)이 74석으로 3분의 2 의석을 차지해여 최초의 의회가 개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헨드라의 통치 목표는 전통적인 자비로운 군주와 근대화의 주역이라는 상호 모순된 것이었다. 마헨드라는 이 상호모순된 목표 가운데 줄타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게 아이러니하게도 네팔 왕조의 몰락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어버린다. 그는 처음에는 정당활동을 보장하면서 나름 줄타기를 해보았지만 나중에 이르러선 민주주의보다는 강력한 절대왕권으로 네팔의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1960년 12월, 불과 최초의 의회가 개원한지 2년도 안되어 마헨드라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한 뒤 국왕의 직접통치로 전환해버렸다. 모든 정당활동은 금지되어 네팔 의회당과 네팔 공산당은 불법단체가 되어버렸고 의회는 무정당 판차야트라는 체제로 바뀌었는데 국왕이 수상과 내각을 임명하고 판차야트는 국왕이 주도하는 국가회의의 감독을 받게 되어 명목상의 기구로 전락했다. 또한 국왕의 통치에 대한 어떤 불평이나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선포해 사실상 언론과 출판,사상의 자유도 억압하는 독재의 길로 나아갔다.
그나마 판차야트가 구성된건 마헨드라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1년이었고, 판차야트의 구성도 거의 대한민국의 유신정우회와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의 국왕이 직접 임명하는 의원과 지방대표들, 그리고 대졸자들만이 투표하는 대표로 구성되는 거수기 의회에 불과했다.
마헨드라는 이런 조치로 네팔이 안정적인 국왕의 통치 가운데 근대화를 달성할 것이라 여겼지만, 오히려 네팔의 혼란만 가중되어 버렸다. 트리부반의 왕정복고를 도운 민주주의 세력들은 뒤통수를 맞은 셈이니 당연히 반발했고 다당제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와 파업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마헨드라는 혼란을 해결하지 못한 채 1972년 1월 31일 사망했고 그 과제들은 그의 아들 비렌드라가 떠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