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7:38:49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colbgcolor=#FFDFDE><colcolor=#000000>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Prinzessin Alice von Battenberg
파일:AndrewofGreece.jpg
이름 영어 빅토리아 앨리스 엘리자베스 줄리아 마리
(Victoria Alice Elizabeth Julia Marie)
그리스어 빅토리아 알리키 엘리사벳 율리아 마리아
(Βικτωρία Αλίκη Ελισάβετ Ιουλία Μαρία)
출생 1885년 2월 25일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성
사망 1969년 12월 5일 (향년 84세)
잉글랜드 런던 버킹엄 궁전
배우자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1903년 결혼 / 1944년 사망)
자녀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체칠리아, 소피아, 필립
아버지 제1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 루이 마운트배튼
어머니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 마운트배튼
형제 루이즈, 조지, 루이
종교 루터교회그리스 정교회
서명 파일:PrincessAliceOfBattenbergSignature.svg.png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유년기3.2. 결혼3.3. 전쟁과 망명생활3.4. 정신병3.5. 제2차 세계 대전3.6. 말년과 사망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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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립 공의 어머니이자 영국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의 시어머니[1], 찰스 3세의 친할머니이다.

스웨덴루이즈 왕비의 언니이자, 루이 마운트배튼의 누나이기도 하며 동시에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다.[2]

2. 작위

  •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전하 Her Serene Highness Princess Alice of Battenberg (1885년 2월 25일 ~ 1903년 10월 6일)
  •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Andrew of Greece and Denmark (1903년 10월 6일 ~ 1969년 12월 5일)

3. 생애

3.1.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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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영국. 왼쪽부터 외외증조모[3] 빅토리아 여왕, 막내 이모할머니 영국의 베아트리스 공주, 어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의 장녀로 버크셔 윈저 성에서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어났다. 빅토리아 여왕은 앨리스가 태어난 후 다음 날 "새로 태어난 아기가 너무 예쁘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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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여동생 루이즈, 남동생 조지, 앨리스
친가는 독일 출신이지만 아버지 루트비히가 영국 해군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영국, 몰타에서 지내기도 했다.

선천적인 청각장애가 있었으나, 어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가 독순술을 가르쳐 겉으로 보기엔 일반인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구사했으며 결혼 후에는 그리스어까지 배웠다. 그리고 경증 장애라 성인이 된 후에도 큰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고. 실제로 앨리스와 교류한 사람들 중 사전 정보 없이 청각장애를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는 청각장애가 있는 딸을 많이 걱정했지만, 그때마다 빅토리아의 큰이모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앨리스는 대답이 느릴 뿐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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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의 메리조지 5세결혼식.
둘째 줄 가장 왼쪽의 여자아이가 앨리스이다
1893년 조지 5세테크의 메리의 결혼식에서 화동을 맡았다. 빅토리아 여왕이 증손녀를 직접 지목했고, 화동을 한 앨리스를 보고 여왕이 '아주 예뻤다'고 했다고 한다. 앨리스는 친가 바텐베르크 가문 쪽을 닮아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미모로 친척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남편조차 외모를 보고 골랐을 만큼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유명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얌전한 미소녀였던 앨리스를 "우리 예쁜 앨리스"라고 부르며 매우 아꼈다고 한다. 커서도 아름다운 외모로 친척들이 입 모아 칭찬했을 정도. 여동생 루이즈는 "우리 모두 언니가 통치 가문의 왕자비나 왕비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라고 회고한 바 있고, 실제로도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결혼했다. 게다가 이 말을 한 루이즈 역시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결혼해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다.

3.2.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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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와 안드레아스 왕자 1903년 결혼식 당시
앨리스는 1902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4]를 만나 1903년 10월 6일 다름슈타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1902년에 처음 만났다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진을 보면 1901년 앨리스가 러시아를 방문할 때 안드레아스 왕자를 포함한 그리스 왕족들과 함께 있던 사진이 존재한다.

앨리스는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고 안드레아스 왕자는 크리스티안 9세의 손자였기 때문에, 유럽의 수많은 왕족들이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안드레아스 왕자와 결혼한 이후에 앨리스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비로 불렸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케킬리아, 소피아, 필리포스를 포함한 1남 4녀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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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앨리스와 네 딸들
마르가리타, 소피아, 테오도라, 케킬리아

결혼 이후 안드레아스 왕자는 그리스에서 육군 생활을 계속했고, 앨리스는 자선사업에 참여하였다. 이모인 옐리자베타 대공비를 만나 대공비가 준비하던 자선사업을 돕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을 기점으로 그리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정치상황이 점점 악화되었고, 남편 안드레아스는 사임되었다.

3.3. 전쟁과 망명생활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안드레아스 왕자는 다시 육군에 복귀할 수 있었고, 앨리스는 야전병원을 운영했다. 당시 참전자들의 증언과 앨리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발칸 전쟁 동안 앨리스는 최전선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심각한 부상자들에 상태로 응급조치를 시행했으며, 이때의 충격적인 경험이 평생에 걸친 앨리스의 자선 활동과 타인에 대한 자비심, 종교적 헌신에 큰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시숙(남편의 형)인 콘스탄티노스 1세는 중립국으로 남길 원했지만 당시 그리스의 권력자인 베니젤로스는 연합국에 참전하길 바랐다. 왕당파와 베니젤로스파로 나뉘어 불안한 정세를 보이는 동안 앨리스의 가족은 궁전 지하 창고에 숨어 지내야 했다. 1917년 6월, 결국 콘스탄티노스 1세는 퇴위했고 그리스 왕실 가족은 모두 망명 생활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해군이었던 아버지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이후 루트비히는 조지 5세의 권유로 바텐베르크의 공자 작위를 포기하고, 바텐베르크의 영국식 명칭인 마운트배튼으로 성을 바꾼 뒤[5]밀퍼드 헤이븐 후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 이후 두 이모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황후옐리자베타 대공비볼셰비키에게 살해당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끝에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여, 외삼촌 에른스트 루트비히가 헤센 대공국의 대공 자리에서 물러났다.

1920년에 콘스탄티노스 1세가 복귀함에 따라 앨리스의 가족들도 잠시 그리스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터키 전쟁에 패하자 왕실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고, 혁명파들은 국왕에게 망명 생활을 요구했다. 정부는 전쟁의 책임을 물을 책임자를 찾고 있었고, 많은 군인들이 체포되었으며, 전쟁에 참여했던 안드레아스 왕자 역시 체포되었다.

재판 후에 안드레아스 왕자에게는 추방령이 내려졌고, 앨리스의 가족들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또 다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3.4. 정신병

앨리스는 동서인 마리 보나파르트[6]의 도움을 받아 파리 근교의 생클루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리스 난민들을 받는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힘든 망명 생활에 지쳤던 앨리스는 점점 신앙심이 깊어지다가 1928년 10월에는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하였으나, 얼마 후부터 자신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다거나 치유능력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1930년, 결국 조현병에 걸렸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강제로 가족들에게서 떨어져 스위스에 있는 요양원에 보내졌다. 앨리스의 어머니인 빅토리아의 편지와 일기, 가족들 및 당시의 앨리스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앨리스의 상태를 대략 알 수 있다. 앨리스의 종교적 계시들 중에는 종교적 엑스터시, 예수가 직접 사인한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어머니 빅토리아가 '앨리스를 요양원에 보내 심리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해당 시설의 담당의들이 치료를 위해 자문한 전문가들 중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있었으며, 프로이트는 '앨리스의 망상은 억압된 성욕에 의한 것이므로, 난소에 x-선을 방사하여 성욕을 차단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와 편견에서 비롯된 잔혹한 상황들은, 앨리스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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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마지막 가족사진. 왼쪽 2번째 금발의 남자아이가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다.

약 2년 간의 긴 요양 기간 동안 앨리스의 딸들은 모두 독일의 왕족들에게 시집갔고(1930-1931년), 남편과도 헤어져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들 필립영국에서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외삼촌 조지 마운트배튼과 루이 마운트배튼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요양과 치료 기간 동안 앨리스는 일관되게 "나는 미치지 않았다"고 항변했으며,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가 무산되자 앨리스는 큰 저항 없이 과정을 견뎌 2년 만에 치료를 마치고 "시설에서 나가도 된다"는 진단을 얻어 낸다. 이후 앨리스는 1936년까지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않고 유럽을 떠돌며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과 연락하지 않고 지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앨리스는 요양 기간 동안 자신을 버리고 신뢰하지 않은 가족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종교적 망상을 제외하고는 앨리스의 사고력에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앨리스는 가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민감하게 눈치채고 외로움을 느꼈다고.

앨리스의 딸들은 아이들의 사진을 보내기도 하며 어머니와의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그러던 1937년, 3녀 체칠리아의 가족 전원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앨리스는 딸들과 관계가 점차 회복되는 중이었고, 체칠리아가 아이를 낳을 때 찾아가겠다는 약속까지 한 상태였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6년 만에 가족들과 재회한 뒤 앨리스는 조현병이 상당히 호전되었고, 1938년에는 홀로 아테네에 돌아가 자선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회복했다. 셋째 딸 일가의 죽음을 겪은 앨리스는 매우 슬퍼했지만, 동시에 남은 가족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반대로 남편인 안드레아스는 가장 아끼던 딸의 죽음으로 가족과 연을 거의 끊고 살 정도로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살아남았던 체칠리아의 막내딸 요한나마저 병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앨리스는 당시에 외동아들 필립이 자신과 함께 아테네로 돌아가서, 그리스의 왕자 신분을 선택하기를 내심 바랐던 듯하다. 하지만 필립은 비록 어머니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영국에서 지낸 기간이 길었고, 조국으로 여긴 영국 해군에 복무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결국 영국에 남게 되었다.

3.5. 제2차 세계 대전

앨리스가 그리스로 돌아간 직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사위들은 독일의 옛 왕족/귀족으로 독일군에서 싸우고 있었고, 아들 필립영국 해군으로 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은 가족 간 싸움이기도 했다. 앨리스는 독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을 굉장히 싫어했기에, 독일 장교가 "필요한 것이 있소?"라고 묻자 "내 나라에서 썩 떠나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머물렀던 다른 그리스 왕족과는 달리, 앨리스는 동서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7]과 함께 그리스에서 지냈다.

앨리스는 굶주린 사람들을 도우며 스웨덴의 왕세자비였던 여동생 루이즈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스웨덴에서 의약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1943년 9월, 독일군은 아테네를 점령했다. 그리스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고[8], 남아있는 소수의 유대인들은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이 시기에 앨리스는 레이첼 코엔이라는 여자와 두 자녀들을 숨겨주었다. 레이첼 코엔의 남편이 예전에 요르요스 1세를 도운 적이 있었는데, 그 보답으로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물어보았던 일을 코엔의 아들이 기억한 것. 그래서 당시 그리스에 남아 있었던 왕족인 앨리스와 옐레나 여대공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독일군이 물러나기 전 1년 간 들킬 뻔한 상황이 몇 번 있었고, 한 번은 게슈타포가 '앨리스가 유대인들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하여 심문하기도 했다. 앨리스는 자신의 청각장애를 이용하여 게슈타포가 지쳐 심문을 포기할 때까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처럼 연기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당시 앨리스와 코언 가족의 일화는 앨리스 본인이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 알려지지 않다가, 코언 가족들 및 당시 주변인들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스에서 행한 선행들을 앨리스 본인은 대외적으로 함구했다. 대부분 일화는 도움을 받은 당사자들과 상황을 기억하는 목격자들, 그리고 앨리스가 가족들 및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알려졌다. 사후 앨리스에게 주어진 '열방의 의인' 수여식에 참석한 아들 필립 마운트배튼 공은 이에 대해 회고하며 "어머니는 성격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 이를 전혀 자랑스럽거나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44년 10월 독일군아테네 점령이 끝났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스 내전이 발발하면서 사회주의 군대(ELAS)와 주둔 영국군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내전을 겪는 동안 앨리스는 통행금지령을 어기고 경찰들, 아이들에게 배급물자를 나누어주었다. 아들인 필립과 어머니 빅토리아가 앨리스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물자들이 몇 달에 거쳐 도착하면, 그렇게 받은 식품들과 일용품들을 앨리스는 즉시 사람들에게 전부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유탄을 맞을 수 있는 거리에 나가 물자를 나누어 주는 것은 위험하다"며 걱정하자, 앨리스는 "나는 어차피 귀가 어두워 총 소리를 듣지 못한다.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던 중 앨리스는 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는데, 바로 남편 안드레아스 왕자의 사망 소식이었다. 두 사람은 1939년 이후로 한 번도 보지는 않았지만, 앨리스는 사망한 남편을 추모하였다.

3.6. 말년과 사망

파일:AlicedeBattenberg.jpg
노년의 앨리스
1947년 11월, 아들 필립 마운트배튼조지 6세의 장녀, 즉 영국의 왕위 계승자인 엘리자베스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 방문했다. 앨리스의 딸들은 모두 독일 왕족/귀족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전쟁 직후의 반독 감정으로 결혼식에 전원 참석할 수 없었다.

1949년 1월, 앨리스는 이모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가 그랬듯이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을 세웠다. 1950년과 1952년에 자금을 벌기 위해 미국에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자금 부족으로 수도원 건설은 실패로 돌아갔다.

1952년에는 며느리 엘리자베스 공주가 여왕이 되었고, 1953년 6월에 대관식에 수도복 차림으로 참석하였다. 대관식에는 앨리스의 딸들 내외도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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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앨리스. 손자 찰스 3세, 손녀 앤 공주와 함께. 찰스와 앤이 재종형제인 콘스탄티노스 2세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아테네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1967년, 그리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그리스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쇠약해진 앨리스는 아들 필립 마운트배튼과 며느리 엘리자베스 2세의 요청에 따라 영국 버킹엄 궁전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 해 12월, 그리스에서는 왕당파의 역쿠데타가 실패해 시조카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2세[9]와 그의 아내인 아나마리아 왕비, 그리고 조카며느리인 프레데리카 왕대비[10]는 망명길에 올랐다.

영국 버킹엄 궁전에서 지낸 마지막 2년 동안, 앨리스는 아들 외에도 몇몇 왕실 구성원, 특히 손녀 앤 공주와 가깝게 지냈으며 사망하기 직전까지 명료한 정신을 유지했다고 한다. 영국에서 지낸 지 2년 뒤인 1969년, 노쇠한 앨리스는 자던 중 숨을 거두었다.

유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며느리 엘리자베스 2세가 아들 필립 마운트배튼과 약혼할 때 물려주었던 몇몇 보석 외의 나머지 소지품은 전부 수도원을 위한 자금에 보태기 위해 팔거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기에, 사망 당시에는 앨리스의 소유로 남은 유품이 없었다.

장례식은 앨리스가 태어났던 윈저 성에서 거행되었고, 평생을 신앙에 기대어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던 그녀의 삶을 기리기 위해, 유해 또한 윈저 성에 묻혔다가 생전 유언에 따라 1988년 예루살렘 올리브 산에 있는 세인트 마리아 막달레나 수녀원[11]으로 이장되었다. 참고로 딸 소피아가 "어머니를 보러 가기 힘들 것"이라며 불평하자 앨리스는 "무슨 소리니. 그곳 버스 노선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데."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Princess Alice
of Battenberg)
<colbgcolor=#fff3e4,#331c00>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Prince Louis of Battenberg)
<colbgcolor=#ffffe4,#323300>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Prince Alexander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
(Countess Julia Hauke)
한스 모리츠 하우케 백작
(Count John Maurice Hauke)
소피 라퐁텐
(Sophie Lafontaine)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의 카를 공자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12]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앨버트 공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비 마르가리타
(Margarita, Princess of Hohenlohe-Langenburg)
1905년 4월 18일 1981년 4월 24일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작 고트프리트[13]
슬하 4남 1녀
2녀 바덴 변경백비 테오도라
(Theodora, Margravine of Baden)
1906년 5월 30일 1969년 10월 16일 바덴 변경백 베르톨트[14]
슬하 2남 1녀
3녀 헤센의 대공세자비 체칠리아
(Cecilie, Hereditary Grand Duchess of Hesse)
1911년 6월 22일 1937년 11월 16일 헤센의 대공세자 게오르크 도나투스[15]
슬하 3남 1녀
4녀 하노버의 게오르크 왕자비 소피아
(Sophie, Princess George of Hanover)
1914년 6월 26일 2001년 11월 24일 헤센카셀의 크리스토프 공자[16]
슬하 2남 3녀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17]
슬하 2남 1녀
1남 에든버러 공작 필립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1921년 6월 10일 2021년 4월 9일 엘리자베스 2세
슬하 3남 1녀[18]

5. 기타

  • 나치 독일 치하의 그리스에서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 가족을 적극적으로 돕고 숨겨준 것이 인정되어, 사후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 칭호[19](1993년, 야드 바솀 웹페이지)와 British Hero of the Holocaust(2010)상이 수여되었다.
  •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3 에피소드 4 "Bubbikins"가 앨리스의 일화들을 다루고 있다. 작중의 인터뷰는 앨리스에 대한 제작진의 헌사이자 순수한 창작으로, 앨리스 본인은 평생 자신의 일화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다.
  • 빅토리아 여왕조지 5세의 결혼식 때 화동 중 한 명으로 '앨리스'를 지목했을 때, 다들 그 사람이 여왕의 손녀인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이에 빅토리아 여왕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지목한 사람은 증손녀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라고 밝혔다.[20]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는 훗날 "바텐베르크의 앨리스는 예쁜 아이였지만, 당시에 상심이 컸다."며 화동이 아니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를 회고했다.

[1] 재당고모이기도 한데, 엘리자베스 2세의 증조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앨리스의 외할머니 앨리스 공주와 남매였기 때문이다.[2]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조지 6세 형제, 노르웨이 국왕 올라프 5세, 덴마크의 잉리드 왕비,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와 지빌라 왕자비 부부도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주들로, 앨리스와 육촌지간이다. 그리고 막내 이모 알렉산드라 황후의 자녀들인 올가, 타티아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 황태자사촌지간이다.[3] 어머니의 외할머니.[4] 알렉산드라 왕비의 남동생 요르요스 1세의 4남이다.[5] 이후 그리스 국적의 필립 공이 영국으로 귀화할 때 모계 성씨인 마운트배튼을 선택한다.[6] 요르요스 1세의 2남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남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7] 요르요스 1세의 3남 니콜라오스 왕자의 부인. 엘리자베스 2세의 작은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독일에 호의적이었으며, 당시 직접 확인된 사실이다.[8] 7만 5천 명 중 6만 명가량이 끌려갔다고 한다.[9] 큰시숙인 콘스탄티노스 1세의 막내아들 파블로스 1세의 외아들[10] 파블로스 1세의 부인이자 콘스탄티노스 2세의 어머니[11] 이모 옐리자베타 대공비가 묻혀있는 곳이다.[12]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13]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인 에든버러의 알렉산드라의 아들. 빅토리아 멜리타루마니아의 마리 왕비의 조카[14]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아들[15] 촌수로는 체칠리아와 5촌이다. 체칠리아의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의 외사촌이기 때문.[16]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카를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의 5남이다.[17]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의 차남으로 전 남편 크리스토프의 5촌 조카다.[18] 찰스 3세,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19] 위키에 문서가 있는 이 칭호를 받은 다른 유명인으로는 오스카 쉰들러스기하라 지우네가 있다.[20]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는 아버지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가 자신의 생후 만 1년이 지났을 무렵에 혈우병으로 일찍 사망했던 데다가 아버지 사후에, 어머니 헬레나(발데크피르몬트 가문 출신으로 네덜란드빌헬미나 여왕의 이모이기도 하다.)와 유복자로 태어난 동생 카를 에두아르트와 함께 멀리 살았기 때문에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자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바텐베르크의 앨리스는 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과 자주 만나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