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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톤 | 요르요스 1세 | 콘스탄티노스 1세 | 알렉산드로스 | |
글뤽스부르크 왕조 | ||||
콘스탄티노스 1세 | 요르요스 2세 | 파블로스 | 콘스탄티노스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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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5eaf><colcolor=#fff> | |||
출생 | 1845년 12월 24일 | ||
덴마크 코펜하겐 아말리엔보르 궁전 | |||
사망 | 1913년 3월 18일 (향년 67세) | ||
그리스 왕국 테살로니키 | |||
묘소 | 타토이 왕실 묘지 | ||
재위기간 | 그리스 국왕 | ||
1863년 3월 30일 ~ 1913년 3월 18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d5eaf><colcolor=#fff> 가문 | 글뤽스부르크 가문 | |
이름 | 덴마크어: 크리스티안 빌헬름 페르디난 드블크흐드 르흘란프 아돌프 게오르그 (Christian Vilhelm Ferdinand Dbrqhd Rhlanf Adolf Georg) | ||
그리스어: 흐리스티아노스 굴리엘모스 페르디난도스 드블르크하드 르흘란프스 아돌포스 요르요스 (Χριστιανός Γουλιέλμος Φερδινάνδος Αδόλφος Γεώργιος) | |||
아버지 | 크리스티안 9세 | ||
어머니 | 헤센카셀의 루이제 | ||
형제자매 | 프레데리크 8세, 알렉산드라, 다우마, 티라, 발데마르 | ||
배우자 |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1867년 결혼) | ||
자녀 | 콘스탄티노스 1세, 요르요스, 알렉산드라, 니콜라오스, 마리아, 올가, 안드레아스, 크리스토폴로스 | ||
종교 | 정교회 (그리스 교회) | }}}}}}}}} |
공식 어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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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왕국의 국왕.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으로, 전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시할아버지[1]이다.
필립 마운트배튼의 친할아버지이자 현 영국 왕인 찰스 3세의 친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국 왕실에 탈모 유전자가 내려오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2]
2. 생애
빌헬름이 본명인 요르요스 1세는 1845년에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덴마크 추정상속인 겸 덴마크 왕위후계자였기에, 비교적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년이 돼선 덴마크 해군에서 복무하다가, 1863년에 오톤을 폐위한 그리스 국회에 의해 17살에 그리스 왕국의 차기 국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했다. 그가 국왕으로 즉위한 지 약 8개월 뒤 아버지가 정식으로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먼저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이런 기묘한 구도는 형 프레데리크 8세와 조카 호콘 7세까지 이어졌다. 둘 다 차남으로 태어났고, 해군에서 복무한 것까지 같다.그 전 해에 오톤이 폐위되고 새로운 국왕을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열렸을 때,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인 에든버러 공작 앨프러드[3]가 95%로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4] 하지만 열강 출신 왕자가 다른 나라 왕위에 오르지 않기로 했던 까닭에 알프레드는 국왕 후보에서 배제되었고, 이후 그리스와 열강들이 서로 조율하여 빌헬름이 선택되었다. 영국은 당시 왕태자의 처남[5]이기도 한 요르요스의 즉위 선물로 당시 영국령이던 코르푸 섬을 포함한 이오니아 제도를 그리스에 양도해주었다. 처음에는 나이가 어려 숙부 율리우스 왕자나 빌헬름 스폰네크 백작의 조언을 받았지만,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이들을 덴마크로 돌려보냈다.
애초에 진짜 그리스인이 아니었던 데다 덴마크 왕실 자체도 그리스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에, 요르요스 본인으로선 죽을 맛이었다. 거기에 더해 모어인 덴마크어와 제2언어인 영어, 그리고 독일어나 프랑스어는 제법 유창하게 구상했으나, 재위 초반기엔 그리스어 자체를 구사 못 할 정도로 그리스와 인연이 없었다. 하지만 즉위 직후에 곧바로 그리스 교회로 개종하고 빠르게 그리스어를 익히기 시작했으며, 재위 초기에 덴마크 섭정관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이후 혼란스럽던 그리스 정국을 안정화하면서 본인의 입지를 안정화했다. 또한 고대 그리스와 동로마 제국 시절에 자부심과 향수를 간직하고 있던 그리스인의 요구에 부응하여 영토 확장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덕에 요르요스 1세의 재위 후반기에는 재위 초기보다 그리스의 영토가 2배 이상 넓어지는 등, 그리스 역사에 여러 업적을 남겼다.[6] 비록 재위 중반에 크레타섬을 탈환하려다가 실패하면서 한동안 권위가 실추되기도 했지만, 이후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와 힘을 합치면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거의 50년간 재위하면서 그리스 역대 국왕 중에 가장 오래 재위하였고, 아울러 1896 아테네 올림픽을 개회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7]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조카), 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2세,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 요르요스 1세 본인,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다. 앞줄은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영국 국왕 조지 5세(누나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의 아들),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친형).
그러나 1913년 즉위 50주년을 코앞에 두고 그리스가 새로 얻은 테살로니키를 방문했을 때 알렉산드로스 시나스(1870 ~ 1913)라는 이가 쏜 총에 맞아 시해당했다. 범인 시나스는 반왕당파 사회주의 조직원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체포 직후에 횡설수설하던 정황에 더해 알코올 중독자라는 의사의 진단을 봐선, 그냥 정신병자였다는 게 학계의 주론이다. 그래도 국왕 시해범을 그냥 풀어줄 순 없으니 경찰은 그를 체포했고, 고문을 하자 그는 경찰들을 비웃으며 5월 6일에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여러모로 씁쓸한 결말이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요르요스 1세 (George I of Greece) | <colbgcolor=#fff3e4,#331c00>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 <colbgcolor=#ffffe4,#323300> 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빌헬름 (Vilhelm, Duke of 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 |
홀슈타인-존더부르크-베크 공작 프리드리히 (Frederick, Duke of Holstein-Sonderburg-Beck) | |||
쉴리벤의 프리데리케 여백작 (Countess Friederike of Schlieben) | |||
헤센-카셀의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 |||
헤센-카셀의 카를 (Prince Charles of Hesse-Kassel) | |||
덴마크의 루이세 공주 (Princess Louise of Denmark)[8] | |||
헤센카셀의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 |||
헤센-카셀의 빌헬름 (Prince William of Hesse-Kassel) | |||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Prince Frederick of Hesse-Kassel)[9] | |||
나사우-우징엔의 카롤리네 (Princess Caroline of Nassau-Usingen) | |||
덴마크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Denmark) | |||
덴마크의 왕세자 프레데리크 (Frederick, Hereditary Prince of Denmark)[10]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조피 프리데리케 여공작 (Duchess Sophie Frederica of Mecklenburg-Schwerin) |
3.2. 자녀와 후손
요르요스 1세는 1867년에 러시아 제국 황족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11]과 결혼해 5남 3녀를 두었다. 크리스티안 9세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많은 아들을 낳았다.[12]요르요스 1세 이후의 그리스 왕손들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의 손자녀가 되므로, 자신들의 경칭으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아무개 왕자/공주”를 사용한다.[13]
아버지처럼 유럽의 이름있는 가문들과 혼맥을 맺었다. 특히 유럽의 몇 안되는 황제 가문이었던 독일 제국의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스 제국의 보나파르트 가문,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가문와 혼맥을 맺기도 했다.[14] 오스트리아의 황제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을 빼면 유럽의 모든 황제 가문과 혼맥을 맺은 셈.
다만 아들을 가장 많이 낳았고 친손자가 6명이지만 현재 2남(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이 귀천상혼 후 자녀 없이 사망), 3남(세 딸을 낳음), 5남(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두 딸을 낳음)의 가계가 단절되었고, 현재까지 가계가 이어지는건 장남 콘스탄티노스 1세와 4남 안드레아스밖에 없다. 장남 콘스탄티노스 1세의 아들중에서 장남과 차남이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현재 요르요스 1세의 자손은 그리스 국왕 파블로스와 영국의 국서 필립 마운트배튼의 자손으로만 이어지게 된다. 그래도 파블로스와 필립의 자손들이 아들부자여서 꽤 번성했다. 현손자인 파블로스 왕세자의 아들수는 특기할만한 부분. 물론 필립 마운트배튼은 영국으로 귀화를 한 뒤 결혼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옛 그리스 왕가의 남계 후손은 파블로스 국왕의 외아들 콘스탄티노스 2세의 아들, 손자들 뿐이다.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콘스탄티노스 1세 (Constantine I) | 1868년 8월 2일 | 1923년 1월 11일 |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 슬하 3남 3녀[15] |
2남 | 요르요스 왕자 (Prince George) | 1869년 6월 24일 | 1957년 11월 25일 | 마리 보나파르트 공녀[16] 슬하 1남 1녀 |
1녀 |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 (Grand Duchess Alexandra Georgievna of Russia) | 1870년 8월 30일 | 1891년 9월 24일 | 러시아의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17] 슬하 1남 1녀 |
3남 | 니콜라오스 왕자 (Prince Nicholas) | 1872년 1월 22일 | 1938년 2월 8일 | 러시아의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18] 슬하 3녀[19] |
2녀 | 러시아의 마리야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 (Grand Duchess Maria Georgievna of Russia) | 1876년 3월 3일 | 1940년 12월 14일 | 러시아의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20] 슬하 2녀 |
페리클레스 이오아니디스[21] | ||||
3녀 | 올가 공주 (Princess Olga) | 1880년 | 1880년 | |
4남 | 안드레아스 왕자 (Prince Andrew) | 1882년 2월 2일 | 1944년 12월 3일 |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슬하 1남 4녀[22] |
5남 | 크리스토폴로스 왕자 (Prince Christopher) | 1888년 8월 10일 | 1940년 1월 21일 | 낸시 스튜어트 워싱턴 리즈[23] |
오를레앙의 프랑수아즈 공녀[24] 슬하 1남[25] |
[1] 요르요스는 또 엘리자베스 2세의 친할아버지인 조지 5세의 외삼촌이기도 하다.[2] 사실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9세도 탈모였는데, 정작 현재 덴마크 왕실 및 옛 그리스 왕실은 탈모가 거의 안 보인다.(...)[3] 이후 1893년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된다.[4] 참고로 24만 1202표 가운데 공화국을 원한다는 표는 93표, 빌헬름 본인은 6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2표, 그리고 전 국왕인 오톤의 복위는 꼴랑 1표만을 기록했다.[5] 에드워드 7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는 빌헬름(요르요스 1세)의 바로 위 누나이다.[6] 즉위 당시 47,000㎢ → 1913년 108,610㎢.[7] 그의 친손자인 필립 마운트배튼은 60년 뒤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 국왕 엘리자베스 2세를 대리하여 개최 선언을 했다.[8] 프레데리크 5세와 영국의 루이자 공주의 3녀.[9] 조지 2세의 외손자(4녀 헤센카셀 방백비 메리의 아들)이다.[10] 프레데리크 5세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율리아네 마리의 아들.[11] 니콜라이 1세의 손녀(차남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장녀)이자 알렉산드르 2세의 조카이다.[12] 참고로 처가집으로 가면 처남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슬하 6남 3녀)에 이어서 2위다.[13] 막내아들 크리스토폴로스의 손녀들은 예외, 크리스토폴로스의 외아들인 미하일 왕자가 그리스인 평민과 결혼했을 때 덴마크 왕실에서 이를 승인해주지 않아 덴마크 공주 칭호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그리스 공주 칭호만을 사용한다.[14] 다만 프랑스 제국은 1870년에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보나파르트 왕조는 이름밖에 없는 가문이다. 물론 과거 황제 가문인만큼 격 자체는 매우 높았다.[15]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루마니아의 왕대비 엘레니, 파블로스 등[16]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남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17] 알렉산드르 2세의 6남이다.[18] 알렉산드르 2세의 손녀(3남 블라디미르 대공(1847~1909)의 막내이자 외동딸)이다.[19] 유고슬라비아의 파블레 왕자비 올가,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공주 등[20] 니콜라이 1세의 손자(4남 미하일의 3남)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함.[21] 1887~1965, 그리스 해군 장교[22]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비 마르가리타, 바덴 변경백비 테오도라, 헤센의 대공세자비 체칠리아,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비 소피아, 에든버러 공작 필립[23] 사별 / 1878~1923, 미국 출신 상속녀로 낸시에게는 크리스토폴로스 왕자와 한 결혼이 세 번째 혼인이었다. 1920년에 크리스토폴로스 왕자와 결혼할 때 그리스의 아나스타샤 공주 칭호를 받았으나 3년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24] 1902~1953,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방계인 오를레앙 가문 출신으로 루이필리프 1세의 고손녀이다. 크리스토폴로스의 작은어머니인 오를레앙의 공녀 마리(크리스티안 9세의 3남 발데마르의 부인)의 조카이고, 프랑수아즈의 여동생 안은 크리스토폴로스의 조카인 이리니 공주의 동서(이리니의 남편 아이모네의 형인 3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와 결혼)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폴로스 왕자와는 1929년에 결혼하였다.[25] 미하일 왕자(1939~2024). 옛 그리스 왕가에서 거의 유이하게(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로스) (민족적, 혈통적인) 그리스인과 결혼했다. 그리스 예술가인 마리나 카렐라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는데, 그 중 둘째 딸 올가는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조의 방계이자 자신의 친척인(요르요스 1세 기준으로 하면 7촌 조카, 오를레앙 가문의 기즈 공작 장 기준으로 하면 6촌 오빠이다)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아이모네와 결혼했다.